만나

9/13-공사중인 구로역 환승통로

아빠와 함께 2025. 9. 13. 08:06

주님은 어느 쪽으로 갑니까? 주님은 아버지에 의해서 천국 가는 쪽으로 회수가 되죠. 그런데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어요? 우리가 하는 것은 내가 하는 것에 대한 결과물을 회수하려고 하죠. 방향이 어때요? 주님 가는 쪽과 내 쪽이 반대가 되니까 우리는 환장하는 거예요. ‘이건 아니지. 내가 이러려고 교회 다녔나? 이러려고 예수 믿었나?’ 뭐 반항을 해요.

그러나 주님께서 성령께서 강제로 환승통로를 이렇게 겪게 하면 ‘아, 천국은 이렇게 가는구나. 자기를 미워하면서 가는구나. 결국 내가 장애물이네. 내가 주님의 방해물이네.’ 비로소 알게 되는 거예요. 비로소. 이 통로가 뭐냐, 두 자로? ‘사랑’. 

 

사랑의 사태가 터지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다고 제가 아까 얘기했죠? 그거 말실수 아닙니다. 맞습니다. 사랑이 덮치면 어떻게 되는가? 이 형벌 속에 주님의 사랑이 들어오게 되면 그냥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모든 상황 따라서 사랑이 자체적으로 분해되어서 섞여서 들어와요.

섞여서 들어오게 되면 그 사랑은 탄탄한 내 사랑으로 인하여 핍박받는 모습으로 구박을 받겠죠. ‘하나님이 사랑이라고 해놓고 나한테 주는 건? 내 인생 이렇게 망하게 해놓고… 이것도 사랑이냐?’ 불평, 불만과 맞닥뜨리는 일이 벌어지는 거예요. 주님은 사랑을 주었지만 우리 쪽에서는 무섭고 놀라운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신명기 20장에 나오는 이스라엘과 이방나라의 전쟁이고 신약에서는 개인적인 의식과 무의식 속에서 이 전쟁이 지속되고 있는 겁니다. 지속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자기 사랑을 회수하고자 하는데 인간들은 자기 사랑에 탄탄히 무장되어서 ‘내 건데 나 이것마저 빼앗기면 나 정말 못 산다.’하고 발악을 하는 그 전쟁. 주님은 사랑으로 왔지만 우리는 사랑으로 이해 못하고 있는, 발악을 하는 모습. 신약에 와서 말씀이 주어질 때 이런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자기로부터 자기가 벗어날 수 있는 문은 인간에겐 없습니다. 평생 없습니다. 영원토록 없습니다. 자기 안에 갇혀 사는 것. 그래서 바깥의 상황을 보고 두렵고 떨고 무섭고 겁나고. 이게 일상생활이에요, 일상생활. 겁내고 두렵고 떨고 놀라고. 이게 신약에 오면, 불안하고. 불안한 거예요. 왜 불안한지도 몰라. 그냥 불안이 올라와요. 그리고 거기에 대한 대처는 전부다 누구 탓? 남 탓하고.

우리의 일상, 그 요소 빼놓고 다른 요소 있는가 한번 돌아보세요. 없지요? 내가 스스로 나한테 갇히는 식으로 평생을 살아가는 것,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뭐로 보느냐? 형벌입니다. 형벌. 하나님께서는 죄짓고 형벌주시는 것이 아니고, 형벌을 먼저 주시고 거기서 죄가 나오도록 조치합니다. 형벌부터 먼저 주시고.

두렵고 무섭고 떨며 놀라는 것부터 먼저 주시고 그리고 거기서 죄가 나오게 함으로써 인간이 본인도 모르는 죄가 이 인생 자체를 형벌로 간주함으로써 비로소 자기 죄를 아는 기쁨을 주셔요. 자기가 죄를 아는 기쁨. 인간은 의인은 없어요. 의인은 안 나와요. 의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어요.

 

사랑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주님 받았던 형벌에 동참케 하는 그것만이 사랑이에요. 왜? 환승통로는 우리가 시도하는 것과 반대방향이기 때문에. 우리가 기피하는 거거든요. 우리가 왜 그걸 기피하느냐 하면, 그 길 가게 되면 자칫하면 우리가 놀랄 수 있고 겁날 수 있고 두려워할 수 있고 떨 수 있거든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놀라고 겁나고 떠는 그 일에 우리를 참여시키면서, ‘너는 내 형제다.’하고 참여시키는 형제권한을 우리에게 주고 환승통로를 통해 우리가 가기 싫은 그길, 반대 길에 우리를 동승시켰어요. 합승시켰습니다. 합승시키면 우리에게 돌아올 이익이랄까, 우리는 어떤 자가 되느냐? 우리는 바로 사랑 안에 있죠.

‘사랑은, 나에게서 빠져나온 상태’입니다. 사랑은 나에게서 빠져나온 상태. 아까 제가 분명히 했습니다. 인간은 자기에게서 못 빠져나온다.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것처럼 못 빠져나와요.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돈 많은 ‘나’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나’ 뒤에 ‘돈 많다’가 들어붙어서 이게 떨어지지 않아요. 나는 돈 많음을 통해서 다시 나한테 회수하는 겁니다. 나는 나의 가치를 내 소유를 통해 다시 회수하기 때문에 회수하는 그 통로를 우리는 끊을 수가 없어요.

애 네 명 키웠다. 내가 고생해서 애 네 명 키웠다. 어떻게 엄마가 그걸 끊습니까? 지난 수요일에 제가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인간이 지킬 것이 있으면 악착같이 산다고요. 오기로라도 살리는 거예요, 지킬 가치가 있으면. 최종적으로 지킬 가치가 누굽니까? 나잖아요. 내가 여기 있는 한 나는 구원되기 전까지는 절대로 포기 못한다, 이게 인간의 오기란 말이죠.

그건 자기 사랑이죠. 그 사랑은, 나는 어떤 형벌도 받기 싫다는 거예요. ‘내가 왜 형벌 받아?’라고 했는데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나는 형벌 받아 마땅한 죄인이구나.’하는 것은 예수님과 동참하면서 비로소 발생되는 겁니다.

나한테 어떤 일도 놀라거나 두려워 할 일이 없는 이유가 내가 형벌 중에 있고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내가 죄인으로 형벌 받고 있는데 이것보다 더 깜짝 놀랄 일이 또 뭐가 남아있습니까? 사람이 놀라고 두렵고 겁난다는 말은 자기의 가능성이 내심 있었는데 그게 좌절되었기 때문에 거기서 절망감으로 두려워하고 떨잖아요. ‘그건 안 돼. 그건 안 돼. 나 그만 살래.’ 그럴 때 무섭고 두려워 떠는 거예요. 그것도 미리 상상하면서.

 

이거 하나면 우리 인생 고민은 다 끝납니다. . ‘쓰임을 받은 자’. 모든 고민은 끝났어요. 모든 근심, 걱정은 다 끝난 거예요. 쓰임을 받는다는 것은 써달라고 요청한 적 없는데 쓰임을 받는 거예요. 그 감각이에요.

‘써주세요’ 하지 않았는데, 평소에 나는 내 일상에, 내 일에 몰두했는데 그 자체가 주님께 쓰임 받는 현실의 한 조각이 되는 거예요. 보통 현실은 내가 측정해서 나한테 회수되도록 내가 가치 있고 내게 의미 있도록 내가 강제로 끌어 모으는 현실이 인간이 하는 건데, 주께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네가 어떤 현실을 살던 간에 주께서 그 현실 자체를 쓰셔버리는 거예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한다는 주님의 말씀의 성취성이 우리의 모든 일상 속에 현실성을 장악해버린다 이 말이죠. 쓰임을 받는 겁니다. 자, 쓰임을 받으면서 여기서 떨어져나가는 게 있어요. 뭐냐 하면, 나의 윤리와 나의 도덕성이 여기서 무용지물로 다 떨어져나가요.

윤리와 도덕이 떨어져나가면서 뭐도 떨어지느냐 하면 ‘나는 착한 일했으니까 복 받을 거야.’ 또는 ‘나쁜 짓했으니까 벌 받을 거야.’라는 이러한 악마가 일방적으로 심어준 그 마약에서 너끈하게 탈출이 가능합니다. 어떻게 쓰이든 그 가치와 의미는 주께서 결정할 문제지, 내 윤리도덕으로 내가 판단하고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순간 마귀는 손 놔버리죠. 손을 놔버리죠. 주께서 “내 사람 누가 건드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감사, 감사, 감사로 점철되어야 돼요. 고마움, 고마움, 고마움이 되어야 되는데 성질, 성질, 성질로 계속 가버리면 이건 쓰임 받는 게 아니고, 주님이 날 쓰도록 내가 나한테 반듯한 인간되라고 혼신의 노력을 다 하는 거예요. 이건 미친 거죠. 간절히 구했다가 귀신들린 거예요. 아니, 간절히 구했다가 귀신들린 사람이 한두 명입니까.

 

우리는 이 세상사는 것 자체가 주님 형벌의 환승통로, 주님께서 고생고생하며 통과했던 환승통로에 우리가 형제가 돼서 동행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형제가 돼서 동행하게 되면, 이 세상 누구도 형제를 사랑 안 해요. 자기사랑이 급선무지, 남까지 왜 챙깁니까? 사랑하지 않는 그 모든 수모를 성도도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이유 때문에 같이 수모를 당하는 겁니다. 말씀을 사랑한다는 이유 때문에 주님 사랑한다는 이유 때문에 세상에서는 어떤 환영을 받지 못하는 것을 환영해주세요. 그걸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걸 고마워해야 돼요

 

성령께서는 형제사랑의 상호작용은 어떤 경우라도 사람은 무능해서 못하고 유능한 주님만 형제사랑을 유지시켜준다. 그게 주의 말씀을 주의 말씀대로 말씀 자체가 이루시는 방식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현실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내가 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것을 구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어느 것 하나 이미 주의 사랑 아닌 것이 없음에 대해서 감사와 감사와 고마움과 고마움으로 이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