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

주께서 호명하고 택하신 그 위력

아빠와 함께 2025. 9. 10. 12:11

악인을 다루는 방법은 무입니다, 무. 악인을 동정하고 감정적으로 다루면 안 돼요. 악인도 나중에 양심이 있어서 ‘봐주세요’ 이러거든요. 악을 이기는 것은 무정한 마음씨, 기계. 천사의 마음, 천사는 감정이 없어요. 그냥 기계에요. 천사가 막 눈물 흘리고 이럽니까? 악을 이기는 것은 무에요, 무. 악을 이기게 되는 이유가, 선과 악이 붙어있는 이유가 선이나 악이나 전부 다 감정이란 점에서 이게 똑같은 거예요.

감정은 주님만 감정 있으면 되지 우리가 감정 있을 필요가 없어요. 예수님의 감정만 있으면 돼요.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에겐 성령이 옴으로서 예수님의 감정을 우리에게 집어넣습니다. 그때부터 예수님이 좋아하는 것 같이 좋아하고, 예수님이 싫어하는 것 같이 싫어하는 것이지 기존에 있는 나 위주의 감정은 아무 소용없는 거예요.

뭐가 필요하겠어요? 나 자체를 말씀으로 구원하려면 나를 어떻게 해야 돼요? 없애버려야 되지요. 광야로 가는 길로 가서 나를 없애버려야 되죠. 내가 왕년에 이렇다 저렇다 하는 건 없어져야 돼요. 그래야 잃었다가 다시 얻는 그 과정이 있어야 됩니다. 거기에 적합한 노래가 있어요. 가사 들으면 어떤 노래인지 알거에요. 가사만 읽어볼게요.

그 얼마나 오랜 시간을
짙은 어둠에서 서성거렸나
내 마음을 닫아 둔 채로
헤매이다 흘러간 시간
잊고 싶던 모든 일들은
때론 잊은 듯이 생각됐지만
고개 저어도 떠오르는 건
나를 보던 젖은 그 얼굴(그 여자가 떠나면서 눈물 흘렸던 모양이죠)
아무런 말없이 떠나버려도
때로는 모진 말로
멍들이며 울려도
내 깊은 방황을
변함없이 따뜻한
눈으로 지켜보던 너
너에게로 또다시
돌아오기까지가(그다음에 뭡니까?)
왜 이리 힘들었을까

주님한테 오기가 왜 그렇게 힘들었느냐 이 말이죠. 그러니까 주님을 시시하게 봤다가 짙은 어둠 속에 서성거리고 있었던, 찬송가도 이런 찬송가가…. ‘너에게로 또다시 돌아오기까지가 왜 이리 힘들었을까’ 여기서 제발 좀 노래 부르지 말라고 당부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제 나는 알았어
내가 죽는 날까지
널 떠날 수 없다는 걸

변진섭의 노래, <너에게로 또다시> 이게 뭐냐 하면 떠나고 난 뒤에 비로소 뭘 아는 거예요? 떠나고 난 뒤에 비로소 떠날 수 없음을 아는 거죠. 근데 내가 주님을 떠났다는 사실을 주님을 안 떠났을 때 비로소 알아요. 재밌죠. 이게 주님의 시공간에선 그래요. 주님의 시공간은 이미 완료된 상태에서 우리의 과거를 다시 한 번 끄집어내어 재해석하는 겁니다.

기존의 우리 시간은 어릴 때부터 나 위주의 시간이었어요. 내가 좋은 부모 만났으면 어떻게 되는가? 저 인간만 안 만났어도 내 인생은 이렇겐 안 되었다. 물어둬, 할 수도 없고. 이렇게 하는데 따지고 보니까 그것이 누구 시공간 안에서 이뤄진 거예요? 말씀의 능력 시공간 안에서 하나의 절차로서 한 거예요.

스스로 제가 어둠에 있다고 했지만 어둠이 빛으로 변한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가운데서 내가 진정 나보다 더 소중한 분을 놓쳐버렸다는 거예요. 나를 있게 한 분을 나한테 없게 만든 과거의 모습을 자기가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하는 겁니다. 내가 여기 있는 게 내가 있는 게 아니거든요. 나는 없어요.

그러나 그분이 있으면 나도 덩달아 같이 있게 하는 그 상황을 주님의 시공간이었습니다. 그 시공간을 성령 받고 난 뒤에 그때 시공간을 다시 한 번 입장에서 볼 때에 내가 어둠 속에 있었다. 그 어둠 속의 시간이 어떤 시간이냐?

그 얼마나 오랜 시간을
짙은 어둠에서 서성거렸나
내 마음을 닫아 둔 채로
헤매이다 흘러간 시간

이런 노래거든요. 역시 숙제 나가거든요, 이 노래. 들어보시는 숙제.

이 뒷부분을 다시 해봅시다. 선과 악 자체가 붙어있는 이유는, 우리가 범죄하고 난 뒤에 마귀한테 속하고 난 뒤에서 선과 악이 떨어질 수 있다는 의식을 갖고 있었어요. 그래서 악을 멀리하면 나는 자동적으로 무슨 사람 된다? 선한 사람 되지요. 이게 잘못이에요. 이게 우리가 마귀를 못 벗어나는 이유입니다. 선악 자체를 떼어낼 수 없어요.

선악 자체를 무로 하기 위해서는 바로 레위기의 제사법이 동원되는 거예요. 율법이 동원되는 거예요. 너 대신 죽어야 떠난다는 거예요. 인간이 너는 죽어야 돼. 안 죽고는 너는 선악 자체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는 거예요.

그럼 죽이는 방법은 뭐냐? 공식을 하나 쓸 테니까요. 죽음+죽음+죽음+…=폭발, 폭발하는 거죠. 이 죽음은 뭐냐 하면 이걸 뭐로 바꾸느냐? 주님께선 이걸 사람으로 바꿉니다. 사람 만나고, 사람 만나고, 사람 만나고…. 이 사람은 산 사람 아니거든요. 주님 입장에선. 왜 우리는 사람 없이는 못 살아요? 혼자서는 외롭고 만나면 괴롭고. 만나면 좋은 친구 아니에요. 그건 엠비씨고.

괴로워서 혼자 있으면 외롭고 다시 사람 만나면 또 괴롭고. 인간 자체가 자기 혼자 시공간을 생각했는데 그 시공간 속에서 계속해서 확장을 해보면 나도 인간 같지 않지만 너도 인간 같지 않다는 것을 이걸 만나서 확인시키는 거예요. 계속 우리는 말씀이 어떻고, 교회가 어떻고, 신앙이고 주님이 어떻고 해도 계속 우리가 할 일은 뭐냐? 사람 만나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일이 아무것도 없어요.

자식한테 전화하고, 친구한테 전화하고, 예배시간에도 휴대폰으로 문자하고, 문자 보내고. 설교하고 있는데 틱톡, 답장한다고…. 그럼 목사는 그 답장한다고 방금 문맥 놓쳤잖아요. 그러면 그다음 기다렸다가 답장 끝났잖아, 그 문맥을 다시 해야 돼요. 왜? 놓쳤으니까. 서비스.

왜 사람을 만나느냐 하면 사람을 만나야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해줄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이거 참 모순이죠. 내가 혼자 있을 때 죽음을 느끼거든요. 다 마찬가지에요. 혼자 있을 땐 살 이유가 없어요. 혼자 있는데 왜 삽니까? 심심해서 못 살지요. 그런데 내가 혼자 있을 때 죽음을 느끼는 것처럼 상대방도 똑같아요.

그러면 죽음과 죽음이 만나면 죽음이어야 되는데 산수가 이상하게 만났다 하면 카페에서 벌써 세 시간 지났어요. 카페 주인은 눈치 주고. 커피 한 잔 시키고 세 시간 동안 있으니. 내가 사는 기분을 느껴요. 이상하게 시체를 만났는데 산 기분? 이게 무슨 조화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람을 만나야 내가 산 느낌을 주는 이유가 이 시공간이 동일한 시공간이라 그래요. 나의 시공간 따로 있지만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 똑같은 사고방식이 유통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걸 언어라 하지요.

근데 혼자 있으니까 죽을 맛이거든요. 죽을 맛이니까 언어, 말을 누구한테 이야기하지요. 할 때 이게 같이 뭐가 나오느냐? 정신병이 섞여 나온다는. 그래 내 이야기 좀 들어보라니까. 전쟁이 따로 없어요. 서로 자기 이야기 들으라고 전쟁하는 중이에요. 카페 앉아서. 남편 저녁 할 때까지 몇 시간 남잖아요. 빨리 자기 이야기 다 쏟아내야 돼요. 안 그러면 정신병 걸릴 것 같아. 자기 하는 이야기.

왜 아내 이야기하는데 남편이 옆에 있고 싶지 않은 이유가 뭔지 알아요? 이미 아는 이야기를 또 하기 때문에 지겨워. 자기는 새로운 친구 만나 이야기하는데 남편은 다 아는 이야기에요. 기승전결을 다 알고 있으니까 새롭질 않아. 그러면 슬슬 남편은 친구 만나러 갈게. 다른 친구 또 만나요.

세상 자체가 악하고 음란하다는 말은 그냥 죽음의 세계라 할 수 있는데 주께서 악하고 음란한 이유가 뭐냐 하면 죽는 이유가 날마다 생산되는 현장이기 때문에. 내가 하는 일이 나를 죽게 하는 일이에요. 언어를 하든지 모든 것이. 그래서 주님께서 하시는 모든 말씀은 뭐냐? 제자들로 하여금 입을 다물게 해요.

그 입을 다물게 하는 대목이 요한복음 21장입니다. 주께서 말하지요. 베드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입을 다무는 방법이 말의 주인공이 내 입에서 나오지 말고 주님한테 넘겨주는 방식이에요. ‘주께서 아십니다.’ 이 순간이 뭐냐? 생명을 만나는 순간이에요. 주께서 “네가 요새 사는 게 힘들지?” 하면 “주께서 조성한 시공간이잖아요.” 이렇게 넘어가는 거예요.

이게 사도 바울의 편지에 보면, 내게 준 모든 환경은 주께서 말씀 전하라고 준 적합한 환경이다.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누구한테? 호명한 자에게. 주께서 선택해서 호명한 자에게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호명이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게 하신 그들을 영화롭게 하는 그 시공간에 내가 말려들었습니다. 이제 내 입에서 나오는 것은 주의 소식, 주의 하신 일만 내가 내놓겠습니다. 그게 바로 사도 바울의 편지가 되는 거죠.

‘폭발’이라 했는데 설명해야 되겠지요. 빠뜨리면 안 되겠지요. 폭발이 자연폭발이에요. 불로 태워지는 것, 폭발. 기존에 인간이 아는 자연세계를 불로써 태우는 이유는, 태울만한 이유들이 꽉 차있다고 느껴질 시점에 태워버려요. 이것은 아브라함과 약속할 때 아브라함의 후손이 바로 약속의 땅에 가지 않고 사 대, 사백 년을 대기했다가 애굽에서 탈출해서 약속의 땅에 가잖아요.

그 대기하는 목적이 이유가 뭡니까? 뭐 때문에 대기합니까? 그 약속의 땅에 악이 관영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까지 성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요. 처벌할 때 이스라엘이 심판 대행자, 실무자가 되어 심판할 때 심판할만한 죄가 그만큼 숙성해야 돼요. 꽉 차야 돼요. 꽉 차서 해야 이스라엘의 정당성이 보장되니까 이스라엘과 함께 한 하나님이 보장되니까 기다려야 되는 거예요.

지금 이 자연세계, 온난화, 해와 구름, 별 지금 대기상태입니다. 내가 죽음+죽음, 공연히 쓴 게 아니에요. 이게 요한계시록 8장 13절인지 누가 찾아보세요. “내가 또 보고 들으니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 소리로 이르되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로다” 아멘.

여러분, 철새 본 적 있지요. 철새도래지 자리에서 떠나서 그 철새가 어디론가 가지요. 우리는 여기서 살고 있는데 빌라나 아파트에 살고 있는데 철새는 내가 살던 집에서 떠나버리죠. 독수리가 떠나면서 뭐라 하느냐? 화, 화, 화. 죽음, 죽음, 죽음. 저주, 저주, 저주가 있을지어다. 그 이야기를 떠나는 존재를 통해서 알려준다는 겁니다. ‘시체, 시체, 시체가 있을 것이다.’ 이것과 똑같은 것이죠.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미 하나님 보시기에는 죽음의 세계입니다. 어제 낮 설교에 했지요. 아담 안에 있으면 생명이고, 아담 밖에 나가면 무조건 저주지요. 왜냐하면 생명나무가 없기 때문에. 그런데 그 생명이 하나님께서 특수한 나라를 만들었어요. 이스라엘을 만들고 거기다가 언약을 집어넣었어요.

언약을 받은 당사자가 다윗이었어요. 다윗은 비로소 언약 받고 난 뒤에, 그리고 자기가 왕 자리에서 쫓겨나서 광야로 가면서 그동안 미처 몰랐던 새로운 계시를 부여받은 게 뭐냐 하면 악인들은 이 땅과 더불어서 멸망한다. 여기 오늘 본문 마지막에 이런 대목 나옵니다. 9절에,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저희는” 어느 곳에 들어갑니까? “땅 깊은 곳에”

땅 깊은 곳에 들어가는 건 여러분 잘 아는 민수기 16장에 보면 나오지요. 땅이 갈라지요. 땅이 갈라지는 곳에 뭐냐? 살 가치가 없는 것들, 폐기된 것, 시효가 끝난 것, 주께서 다룰 수 있는 대상자로서 마감이 된 자는 쓰레기장에 다 치워졌습니다. 그게 지옥이죠. 지옥의 특징은 뭐냐? 주께서 영광을 위해서 더 이상 쓸 가치가 없는 것들의 집합소. 주님이 쓰시기에 주님을 증거하는데 쓸모짝 없다고 이미 규정이 된 것들의 폐기장소, 폐차장 그게 지옥입니다.

그래야 그 지옥이 있어야 주님의 공로에 합세한 하나님께서 따로 은혜를 주신 복된 자의 세계가 따로 있음을 드러내는 거예요. 그래서 천국과 지옥은 균형 맞추기에요. 천국이 있는 이유는 지옥이 있기 때문에, 지옥이 있는 이유는 천국이 있기 때문에 필히 지옥이 있는 겁니다. 이런 안목을 가지고 죽음, 죽음들을 만나서 세 시간 동안 수다 떠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늘 누구를 만나고 또 만날 수밖에 없는 악하고 음란한 환경을 허락하신 것을 이제는 감사하게 하옵소서. 내가 누군지를 주께서 호명하고 택하신 그 위력이 어떤 현장에서도 우리에게 주신 신분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귀한 자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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