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애굽에 대한 저주(겔29;1-3)이근호140219

아빠와 함께 2014. 2. 20. 18:23

애굽에 대한 저주(에스겔 2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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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4-02-19 21:19 
애굽에 대한 저주

2014년 2월 19일                               본문 말씀: 에스겔 29:1-3


(29:1) 제십년 시월 십이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29:2) 인자야 너는 애굽 왕 바로와 온 애굽으로 낯을 향하고 쳐서 예언하라

(29:3) 너는 말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애굽 왕 바로야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자기의 강들 중에 누운 큰 악어라 스스로 이르기를 내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하는도다

지금 애굽은 바로왕이 통치하는 왕정 국가가 아닙니다. 대통령제를 채택하기에 이 성경에 나오는 그 애굽과 상관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 애굽의 바로왕에게 저주와 심판을 전달케 하십니다. 그러나 그 계시받아야 당사자는 지금 없습니다. 또한 현대 이집트는 아 싱황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계시는 사장될 계시에 해당될까요? 전달 받을 자가 이미 고인이 되었고 상황이 달라졌기에 오늘날 우리가 무시해도 되는 계시일까요?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쓰레기 취급하시듯이 내치시는 그 쓰레기 더미에서 진정 하나님의 구원 기준을 엿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취지에 입각해서 애굽 나라를 저주하시는 겁니까?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너는 자기의 강들 중에 누운 큰 악어라 스스로 이르기를 내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하는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바로왕은 평소에 나일강 유역을 자신의 거주지로 공고히 하겠다는 의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있어 ‘인간 고유의 거주지’라는 것이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마태복음 7:13-14에 보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은 오로지 두 가지 길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멸망의 길이요 다른 하나는 생명으로 통하는 길입니다. 보통 인간 세상에서의 길이란, 일단 자신의 본거지가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고 이웃과 내왕을 위하여 길을 터게 됩니다. 그러니까 길은 어디까지 거주지를 안전하고 오래 보존하기 위한 조치로 닦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세상을 그렇게 보시지 않습니다. 그 어느 누구에게도 영원한 거주지를 허락하신 적이 없습니다. 모두다 길 위를 매일 조금씩 걸어가는 존재로 다루십니다. 어디론가 떠나는 중이라는 말입니다. 계속 머무는 자는 없습니다. 또한 그런 자리나 공간도 없습니다.

얼마 전에 경주 양남면에 있는 코오롱 마우나 리조트에서 천장이 무너져 대학생 10명 가까이 죽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행사에 참석한 부산외국어 대학생 가운데 경주 양남면에 거주지를 갖고 있는 학생이 몇 명이 되었습니까?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은 사고가 나나 아니나나 상관없이 며칠 후면 각자 자신의 거주지로 떠날 것이고 다시 리조트는 사람이 거의 없는 곳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모임은 임시적인 모임입니다. 길을 내어주는 모임입니다. 길을 유발하는 모임입니다. 결국 거주지가 길에 편입될 뿐입니다. 거주지가 먼저 있고 그 다음의 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길 뿐 것이 이 세상의 사정입니다. 길이란 거주지와는 달리, 방향성을 품고 있습니다. ‘여기 있다’가 아니라 ‘어디로 가고 있다’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애굽 나라마저 방향성을 나타나는 길의 일부로 삼으시겠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17장에 나오는 변화산 일에서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의 하실 일을 말하고 있는 반면에서, 베드로는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초막 세 채를 지어드리겠습니다“는 식으로 발언합니다.

의식 자체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애굽의 바로왕과 조금도 다를 바 없습니다. 예수님 십자가 달릴 실 때에, 옆에 두 명의 강도가 달린 사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강도들의 믿음을 조사하려는 성급함을 드러내게 됩니다. 하지만 두 강도는 예수님을 통해서 결정난 두 갈래의 서로 다른 방향의 길을 나타냅니다.

한 사람은 낙원으로 통하는 길을 보여주는 강도요, 다른 강도는 멸망으로 통해서는 길을 보여주는 강도입니다. 살아온 직업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주지의 평수가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평생 품고 있는 그 어떤 것이라도 그가 가고 있는  그 ‘길’에 편입된 요소일 뿐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도시 국가 두로의 교만을 보았습니다. 교만한 것을 하나님이 싫어한다면 겸손하면 될게 아닌가 생각드시겠지만, ‘본인의 것’이 있는 한 겸손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반대로 ‘본인의 것’이 사라지면 겸손이니 교만이니 라는 그 판정 자체의 저촉을 받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불상사가 다 하나님의 일입니까 아니면 사람의 일입니까? 누가복음 13:4-5에 보면,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무너진 망대에 깔리지 않는 것으로서 자신이 저주받지 않을 정도의 선한 존재라는 인식을 갖게 마련입니다.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바로 그것이 저주받을 애굽의 바로왕의 의식입니다. 망대가 무너진 것이 하나님의 일인가 아니면 사람의 부실공사로 인한 사람의 불찰인가 하는 것은 외부인에게 물을 것이 아니라 깔려죽는 당사자에게 묻는 것에서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만약 막 깔리면서 하는 소리가 “진작 이렇게 저주받아야 될 자인데 이제사 종을 편히 쉬게 하시는군요. 그동안 세상을 은혜로 살아온 것이 너무나 과분한 처분이었습니다. 죽여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라고 한다면 그 사람에게 있어 망대 무너짐은 100% 하나님의 일입니다.

반면에서 “내일 결혼식을 앞에서 내가 죽으면 나의 약혼자가 얼마나 가슴 아프겠습니까? 그래도 저는 나의 죽음을 하나님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단지 인간들의 관리 소홀의 결과로 보겠습니다”고 나온다면 그 사람의 방향성은 지옥을 보여줍니다. 역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서 감사의 반응을 보이는 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늘 맡기며 사는 사람입니다.

이사야 36장에서, 앗수르 장수 산헤립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히스기야왕에서 자기 나름대의 역사 인식을 말해줍니다. 즉 자기 군대의 침공은, 유대나라가 믿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 뜻에 의한 것이니 항복하라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히스기야 왕은 말합니다. 단 한 마디로 대꾸치 말라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두 가지 속성, 곧 천국과 지옥을 보여주기 위해 우리 존재가 시설물이나 장치가 되기 위해 태어난 겁니다. 그래서 늘 맡기는 쪽으로 이끌리면 그 ‘맡기는 삶’이 곧 천국의 삶이 되니 그쪽이 바로 천국쪽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의 자리에 머무르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4-02-20 13:52 
79강-에스겔 29장 1-3(애굽에 대한 저주)140219-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29장 1절에서 3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95페이지입니다.



에스겔 29:1-3



“제 십년 시월 십이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너는 애굽 왕 바로와 온 애굽으로 낯을 향하고 쳐서 예언하라 너는 말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애굽 왕 바로야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자기의 강들 중에 누운 큰 악어라 스스로 이르기를 내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하는도다.”



바로왕과 관련된 이 애굽나라, 지금은 없습니다. 지금은 이집트라는 대통령제의 나라가 있지 바로라는 왕으로 되어 있는 애굽나라는 아니거든요. 그런데 성경 29장에 보니 애굽 왕 바로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향하여 계시를 하는데 하나님께서 누구를 향하여 계시를 할 때 이 계시 받는 자가 그 당시에 분명히 있었잖아요. 그런데 그 당시의 바로 왕이 지금은 없다는 말이지요. 없으면 계시전달자는 하나님인데 계시 받는 자가 이 역사상에서 없어졌기 때문에 그렇다면 이 에스겔 29장의 이 말씀도 사라져야 되는가?



그 당시 에스겔보고 누구에게 이야기하라고 할 때 그 누구라고, 애굽의 바로왕이라고 지정을 했는데 지정받은 바로 왕이 지금 없다 이 말이지요. 없으면 하나님께서 특정 인간에게 하는 이야기가 이미 그 대상이 없는데 구태여 그 말씀을 우리가 들을 이유가 없지 않는가, 라는 생각이 들 수가 있겠지요. 바로 왕을 보고 이야기했는데 지금 바로왕은 없으니까 그 말씀의 유효기간이 사라져버리고 해당되는 사람이 없으니 우리에게도 필요 없는 말씀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생각을 하게 될 거예요.



그런데 분명히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거든요. 그렇다면 애굽 왕 바로라고 해서 그 당시에 계시 받는 자가 분명히 있었다면 지금 에스겔 29장의 이 말씀은 누구보고 들으라고 하는 이야기냐, 하는 것을 먼저 생각을 해 봐야 됩니다. 옛날에는 애굽의 바로 왕이 있었는데 지금은 이 사람들이 없으니까 우리보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지 않는가, 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걸 생각해 봐야 돼요. 누구보고 이야기를 할 때 그 이야기를 받은 사람은 없어지더라도 이야기하신 분의 이야기는 여전히 계속해서 후대에 전달되는 겁니다. 비록 받는 사람이 없다고 할지라도.



그러면 그 내용은 어떤 내용이기에 계속해서 지금까지 전달되는가? 여기서 좀 복잡한 이야기지만 애굽 왕 바로에게 했던 이야기가 지금 우리 중 누구를 보고 하는 이야기냐 할 때 간단하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애굽 왕 바로는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천년만년 사는 것이 아니니 곧 없어집니다. 그러면 없어질 자에게 하나님께서 그 당시에 이야기를 한 거예요. 그리고 바로 왕처럼 동일하게 없어질 우리가 이 말씀을 받아야 되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깊이 있게 의미 있게 받아들여야 할 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없어질 때 그냥 없어지면 안된다는 거예요.



없어지더라도 그냥 무대에서 은퇴하면 안 되고 왜 없어지는지, 무엇 때문에 사라지는지, 거기에 필요한 이야기가 그대로 유지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없어져도 ‘아, 나는 이것 때문에 이 땅에서 없어집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져야 돼요. 거기에 대한 용어를 한 용어로 할 수 있습니다. 그 용어가 뭐냐, ‘길’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길이 되는 겁니다. 한 예를 들면 경주 양남면의 리조트 강당이 무너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지요? 저는 그 사건을 보면서 뭘 느꼈느냐 하면, 거기에 한 천명이 모였는데 그 가운데 경주 양남면에 거주지를 갖고 있는 학생은 몇 명이었겠습니까?



한 명도 없다는 말이지요. 한 명도 없는데 해발 400미터 넘는 그 산에 왜 올라갔지요? 고향도 아니고 거주지도 아닌데 왜 올라갔느냐는 말이지요. 올라간 이유는 뭐냐, 모였다가 흩어지기 위해서 잠시 모인 거지요. 그렇다면 이 세상이라는 것은 뭐만 있느냐 하면, 길만 있어요. 보통 우리의 의식은 길은 부차적인 겁니다. 길이 있고 그 다음에 집이 있는 것이 아니죠. 집이라는 것이 기본이죠. 이 집, 내 집에서 다른 집하고 연결할 때 길이라는 것이 뚫려있다는 이것이 우리가 평소 알고 있고 살아가는 상식입니다.



저는 그 상식을 거부합니다. 길을 말하기 위해서 임시 거처들이 있다고 감히 말하고 싶네요. 길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주님 보시기에 이 세상에는 길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멸망의 길이고 하나는 생명의 길입니다. 길 뿐이에요. 나는 여기 살고 있는데 내가 죽어서 천국 가는 길은 어디일까, 이렇게 보통 생각하죠. 하지만 내가 여기 살고 있는데, 라는 것은 내 쪽에서 봤을 때는 성립되는데 하나님 보시기에는 “야, 너 지금 네길은 멸망 길 위에서 사는 거야? 아니면 생명의 길 위에 사는 거야?”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는 거주지가 따로 있고 밖에 나오면 길이 따로 있는데 우리가 사는 거주지마저 하나님 보시는 길에다 포함을 시켜버리는 겁니다. 우리는 늘 떠나야 되는 사람입니다. 떠나고 있고 사라지고 있고 머무르지 못할 존재가 우리입니다. 우리가 이런 인식이 없이 자꾸 머무르고자 하기에 뭘 잊느냐 하면 주의 말씀을 잊어버려요. 멸망의 길, 생명의 길, 마태복음 7장에 나오지요? “이 세상엔 두 길밖에 없다.” 이 세상은 두 길밖에 없는 것이 아니라 전체가 두 길로 되어 있어요.



보통 우리 생각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왕래하기 위해서 길을 내는 거예요. 길을 조금 내는데 거기 만약 그 지역 시장이 바뀌어서 하는 말이 “발전하려면 길이 좁아서는 안 됩니다. 길을 더 넓혀야 됩니다.” 하고 더 넓힌다고요. 대구시 내당동의 밤 고개, 대구시에서 공사할 때 엄청나게 큰 공사였는데 대구시내 난리 났습니다. “사람도 별로 없는데 왜 그렇게 큰 길을 내는가?” 사람들이 그랬어요. “이 동네는 사람은 없고 길 밖에 없네.” 바로 그거에요. 이 세상은 길 밖에 없어요. 저는 방향성을 가지라, 그 말입니다.



도상(途上)의 존재라고 하는데, 길 위의 존재가 아니면 우리는 인생 방향성을 잊어버려요. 베드로가 했던 것처럼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겠습니다.” 그러나 엘리야와 모세는 길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여기가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지어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된 거예요. 성경해석의 인식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길밖에 없다는 거예요. 우리는 도상의 존재, 지금도 매일같이 거북이처럼 걷고 있는 거예요. 방향성을 갖고 있습니다. 하루 살면 그 방향으로, 또 하루 살면 그 방향으로, 어느 방향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계속 어떤 정해진 방향으로 가고 있는데 우리는 속도가 느리니까 ‘이것은 내 자리다.’하고 있는 거예요.



다시 이야기해 봅시다. 이번 사건을 통해서 제가 느낀 것이 있어요. 경주시 양남면의 부산외대 천명 학생들이 산 위에 모였어요. 그 중에서 경주시 양남면에 거주하는 학생들은 몇 명이나 되었겠느냐는 말이지요. 아마 거의 없고 다 외지사람들 일겁니다. 그러면 그 리조트가 무너지나 안 무너지나 며칠 지나면 그 자리는 천 명 학생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고 다 어디로 가버려요. 잠시 모인 그것, 부산 외대학생들 천명이 모인 그것, 그게 애굽입니다. 우리는 모였을 때 애굽이라 하지요?



바로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3절에서 “나는 이 강의 큰 악어다. 이 모든 강들은 내 것이다.”라고 했다는 말이지요. 애굽이라는 나라가 나일 강의 악어처럼 세월이 아무리 흘러가고 오래되어도 이 이집트는 이집트고 나는 바로 왕이고 이 나라는 영원할 것이다, 라고 하잖아요. 우리나라 애국가 가사에 나오잖아요.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대한 사람으로 이 땅을 길이 보전합시다.”라고 하잖아요. 애국가를 지은 이 장로님께서. 대한사람을 대한사람으로 길이 보전을 해야 된다는 거예요.



성경은 말합니다. 이 세상에는 사람을 보전할 자리가 없어요. 경주시 양남면하고 똑같아요. 무너지나 안 무너지나 며칠 지나면 학생들은 자기 집으로 다 가버렸어요. 거긴 잠시 모인 장소인데 거기는 길로 나가야 될 임시적인 길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10명은 결국 거기서 죽음의 길로 갔지만. 누가복음 13장 4절에 보면……, 제가 지금 말씀을 드리면 ‘아, 그 말씀’하고 기억이 날 겁니다.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 여기서 열여덟 사람을 학생으로 바꾸면 “망대가 무너져 치어죽은 열여덟 학생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지금 예수님은 방향성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살아 있으니까 아직 살아있고 무너졌을 그 당시에 안 죽었으니 나는 아마 하나님 보시기에 죄가 없다고 여길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망대 무너져서 열 여덟명 죽게 하는 것은 “방향성을 네가 지금 거주하는 곳에서 느끼면서 사느냐, 아니면 안 느끼고 사느냐?” 보라는 거예요. 네가 못 느끼면 망대 무너져서 치어죽은 그 사람들이나 너나 똑같다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말씀 하시고 나타나신 것은 바로 너희들에게 이 세상 자체가 안고 있는 안일함에 대해서 방향성을 주기 위한 겁니다.



이 세상은 길의 일부지 영원히 머물 거지지가 아니라는 거예요. 오늘 설교 다시 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애굽 왕 바로에게 계시를 줬어요. 우리는 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왕에게 계시를 줄 당시의 그 바로 왕이 지금은 없어요. 그 나라도 지금 없고 그런 식의 왕국도 지금은 없거든요. 없다면 그 말씀은 이미 죽어버린 사람에게 했기에 우리한테는 해당사항이 없다, 우리한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가 있어요. 주의 말씀은 바로 왕을 들춤으로 말미암아…… 이야기를 아주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이사 갈 때 쓰레기를 내놓잖아요. 집 수리할때도 쓰레기 내놓고 가져갈 사람은 가져가라고 하잖아요. 애굽은 쓰레기입니다. 쓰레기니까 그냥 버리라는데 저는 이렇게 합니다. 그 버려진 쓰레기를 다시 한 번 조사를 해 보자는 겁니다. 무엇 때문에 버려져야 했던가? 애굽나라가 통째로 저주를 받아요. 이게 일체 쓰레기라 쓸모없어서 저주받거든요. 그러면 우리가 마치 하나님입장이 되어서 ‘그래, 이 쓰레기 몰라도 돼.’라고 하지 말고 내가 버려질 쓰레기 일수가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갖다 버린, 저주받으라고 갖다 버린 그 쓰레기에 끼어들어서 조사를 해 봐야 돼요. 무슨 연유로, 무엇 때문에 하나님 여호와로부터 그렇게 저주를 받았는지, 쓰레기 취급을 받았는지. 만약에 쓰레기 헤집어서 쓰레기 속에서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똑같은 의식을 발견한다면 우리는 뭐로 밝혀지느냐 하면, 우리가 바로 버려진 쓰레기로 밝혀질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하나님께 버려진 쓰레기도 우리한테는 필요 없는 게 하나도 없어요. 그 계시가 다 필요한 계시가 된다는 그 말입니다. 성경해석에 있어서.



지금까지는 일단 쉬운 이야기만 했다고 자체적으로 평하겠습니다. 앞으로 골치 아픈 문제, 엄청나게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다. 애굽나라가 쓰레기라고 하는 것, 저주받아 마땅하다고 하는 것은 성경 이야기고 우리가 만약 예수님이라면 우리는 하나님 편에 같이 서서 “어이, 바로 왕! 쓰레기야.” 이렇게 지적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이 아니고 아담에 속한 인간이잖아요. 하나님께서 어떤 특정 나라를 쓰레기취급해서 “너는 저주받아. 꼴 보기 싫다. 너는 천국에 오지 마. 너의 가는 길은 멸망의 길이야. 네가 네 자리에 앉아서 ‘나일 강은 영원하다.’ 하는 식은 멸망의 길 위에 누운 것이다, 이 쓰레기야.”라고 우리도 같이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입장에 있느냐 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아닌 이상 우리가 그런 입장이 될 수가 없거든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쓰레기라고 할 때 자칫하면 이 이야기가 옛날 애굽보고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보고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치 나를 피해가는 것처럼 오인할 수 있는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이 문제가 얼마나 난해한 문제인가를 제가 먼저 질문을 던지고 그 다음에 성경을 통해서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질문 하나 던질 테니 여러분들도 평소에 그런 질문을 던져 보세요.



충북 진천중앙교회 성도들이 성지순례를 갔습니다. 거기서 테러를 당해서 세 명이 죽었거든요. 질문은 이겁니다. 그게 하나님 사건입니까, 사람의 사건입니까? 참 이 질문이 답변하기 굉장히 어려운 거예요. 진천중앙교회 성도들이 울고불고, 어떤 사람들은 “참 다행이다. 세 명 밖에 죽지 않고 나머지는 무사해서 다행이다.”하니까 댓글 다는 사람이 “천국 보낼 수 있었는데 살아왔으니 그렇게 이야기하면 안 되지.” 했거든요. 하나님이 일으킨 사건입니까, 사람이 일으킨 사건입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2천년기독교 역사에 그 많은 신학자와 목사들이 해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정답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왜 그런가 하면, 본인이 어디에 서 있어야 되느냐 하면, 본인이 쓰레기의 위치에 서 있으면 정답을 알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망대가 무너져서 18명이 죽으면 ‘휴, 나는 아직도 살아있기에 안심이다.’라는 자리에 있기에 전혀 해석이 안 됩니다. 차라리 해석 받고 나서 죽는 게 나아요. 그러니까 망대가 무너져서 18명이 죽는데 죽는 그 순간에 비로소 성경해석이 되는 겁니다. ‘아, 내가 죽어 마땅하구나. 주여, 참 잘하셨습니다. 그동안 살아온 것도 과분한 조치였습니다. 이제야 저를 죽이시는군요. 고맙습니다.’ 이렇게 무너지는 망대에 깔려서 죽으면 제대로 하나님 말씀이 해석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 해석, 정답을 알기 위해서 짧게 인터뷰를 해 봅시다. 지금 망대가 무너졌고 지금 한 사람이 깔리고 있는데 기분이 좋아서 깔립니다. “이제 주와 합류하는군요.” 하고 깔리고 있을 때에 MBC에서 초짜 기자가 와서 인터뷰를 합니다. “지금 깔리시는 기분이 어떻습니까?” “기분 좋습니다.” “그렇다면 이게 주의 일입니까, 사람의 일입니까?” 하고 인터뷰를 할 때 기쁘게 깔려죽는 그 사람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주님이 아니면 어떻게 내 죄를 알릴수가 있단 말입니까? 내가 어떻게 죄를 알 것이며 나를 포함해서 나와 똑같은 다른 인간들이 어떻게 내 죄를 알려주겠습니까? 지금 망대에 깔려 죽어가면서 비로소 ‘내가 그동안 살아온 것도 간당간당하게 살아왔고 진작 죽어야 하는데 이제야 죽이시는구나.’ 하고 기쁘게 마땅히 죽기를 바라는 마음을 허락하는 것은 주님밖에 없사오니 이번 망대 무너진 것은 백 프로 주께서 저를 사용해서 한 일입니다.”라고 할 거예요.



가족들이 울건 말건, 가족들이 보상금이나 합의금을 어떻게 받건 말건 지금 죽는 사람은 그런 거예요. 그런데 같이 죽는 사람 중에는 어떤 사람이 있느냐 하면, 본인이 며칠 있으면 결혼식을 하는데 망대 옆으로 우연히 지나가다가 깔려죽는 사람, 깔려죽으면서 자기의 아름다운 약혼녀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신이시여, 너무하십니다. 총각 떼고 가야 되는데 이렇게 죽는 것은 너무합니다.” 이런 식으로 죽어가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 때 MBC기자가 와서 인터뷰를 한다고 해 봅시다.



“이 망대가 무너진 것은 신의 뜻입니까, 인간의 뜻입니까?” “부실공사 때문입니다. 기둥이 없는 공법이 되어서 이 공법이 잘못되어 무너졌습니다.”라고 할 거란 말이지요. 지금 관점이 바뀌니까 쉽게 풀리지요? 이 동일한 사건에서 하나님께서 양발차기로 서로 다른 두 개의 길을 낸 거예요. 두 개의 사람을 낸 것이 아니고 두 개의 길을 낸 겁니다. 자, 이 이야기를 여러분이 기억하시고 십자가로 돌아가 봅시다. 십자가에 보면 예수님 가운데 있고 양쪽에 강도 두 사람이 있습니다.



강도 두 사람을 볼 때 우리는 이쪽 강도의 믿음이 어떻고 저쪽 강도의 믿음이 어떻다고 하지만 사실은 뭐냐 하면, 두 강도는 인간이 처해 있는 서로 반대방향으로 가는 길을 이야기해주고 있는 겁니다. 길. 강도가 착하냐, 안 착하냐를 묻는 것이 아니고, 개별자의 실력과 능력과 믿음을 보는 것이 아니고 강도는 하나의 지옥 가는 길과 천국 가는 길이 예수님에 의해서 결정됨을 보여주는 하나의 보조기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냥 장치에요, 그냥 쓰레기라고 볼 수 있어요.



아담이 부끄러워서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서 가렸다는 대목이 성경에 있지요? 우리 보기에는 아담이 죄를 지어서 부끄러워서 치마를 입었다, 이렇게 되지만 아담 쪽에서 봐서는 그렇고 주님 쪽에서는 뭐냐 하면, 죄가 무엇인지, 수치가 무엇인지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으로 하여금 수치를 보여주는 설비장치로서 인간을 만든 거예요. 인간이 옷을 입어야 되는 것은 죄가 무엇이며 죄인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옷을 입어야 되는 겁니다. 인간이 죄를 지어서 지옥 가서 고생한다, 자꾸 내 입장, 인간입장 생각하시면 성경해석 전혀 안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를 말하기 위해서,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는 의를 말하기 위해서, 달리 이야기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천국과 지옥을 설명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 지셨고 그걸 설명하기 위해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가야 될, 서로 반대방향으로 결정된 운명의 두 사나이, 두 강도를 배치한 겁니다.



첫 번째로 제가 이야기한 것은 이 땅에 우리 거주지가 없다는 거예요. 우리의 거주지가 없고 어느 길로 지금 가고 있는 거예요. 내가 어느 아파트에 살고 어느 빌라 몇 동에 사는 그것은 의미 없어요. 그냥 길이에요. 주소 잘 바뀌었어요. 팔공 91길, 팔공 길, 그냥 길이잖아요. 우리 집도 길에 지금 편입되어 있어요. 우리 집도 지금 길 위에 있다니까요? 강도가 한 평생 살아온 것이 주소지는 바뀌어도 그 인생자체가 길이에요. 한편 강도는 천국 가는 그 자체가 길이고 다른 한편은 지옥 가는 길이고. 예수님은 두 가지 길을 다 보여주시고.



아까 한 질문 다시 해 봅니다. 성지순례 갔다가 세 사람이 죽은 그 테러사건이 주의 일입니까, 아니면 사람의 일입니까, 라고 묻는 이유는 그 답변에 따라서 그 사람이 지금 지옥가고 있느냐, 천국가고 있느냐가 판정이 나버려요. 그렇다면 그 사람의 신앙상태, 그 사람이 가는 길이 어느 길인지 알려주기 위해서 주께서 일부러 그 사건을 일으킨 겁니다. 아주 답변이 단순명료하지요? 간단한 거예요. 충북에 있는 집 떠나서 그 먼 나라까지 가서 돌아가실 때 죽은 사람이나 그 가족이나 남아 있는 교인들이 그 사건을 바라볼 때 ‘나는 이렇게 바라본다.’는 그것이 본인은 지금 어느 길에 서 있어서 하루하루를 걷고 있느냐의 그 실체를 보여주는 하나의 계기가 되고 기회가 된다는 그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애굽나라는 쓰레기에요. 저주받아야 돼요. 우리하고 상관없다고 생각되지요? 아닙니다. 쓰레기를 헤집어 보자는 말입니다. 헤집어보니 하는 말이 “자기의 강들 중에 누운 큰 악어라.” 다시 말해서 나는 따로 거주지가 있다는 말입니다. 에스겔 28장 17절에 보면 “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라고 했잖아요. 두로라는 아주 잘 사는 도시국가보고 저주한 거예요. 교만하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교만하다는 이야기가 나오면 사람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교만한 것을 싫어하니까 우리가 겸손하면 되지.” 하거든요. 겸손도 교만이에요. 왜냐하면, 자기 본인 것이 있으면 아무리 겸손해도 겸손한 그것마저 본인의 겸손이기 때문에 그것도 교만 된다니까요.



반대로 본인 것이 없으면 이것은 겸손이나 교만할 거리도 없어요. 그 자체가 겸손입니다. 그러면 자기 것이 없으려면 남 다 주느냐? 남 줘도 자기 것이 있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그냥 걸으면 돼요. 그래서 제가 설교 처음에 길이라고 한 거예요, 길. 그냥 어느 한 방향으로 가면 돼요. 머무르지 아니하고. 사람이 머무르면 자꾸 계산해요. ‘지금 내 재산이 얼마고 수입이 얼마야?’ 계산을 할 때는 머무르기 때문에 계산하는 거예요. ‘이 아파트가 지금 몇 평이지?’ 어쩌고저쩌고.



어제 부산을 가는데 부산의 아이파크인가 8십 몇 층짜리 아파트가 바다를 향하여 있더라는 말이지요. 집 좋아 보여요. 그래서 그런 생각이 들어요. ‘주여, 머무르지 않을 테니까 살게 하옵소서.’ 그런데 따지고 보니 주께서는 네가 몇 평짜리에 머무르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지금 어느 쪽으로 가고 있느냐가 중요하거든요. 천국 간 강도가 몇 평짜리 아파트에 살았습니까? 그냥 강도는 강도질 하면서 가고 있었던 겁니다.



애굽은 자기 것이 있었어요. 애굽은 애굽이고 진짜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이니까 이스라엘을 생각해야 됩니다. 이스라엘은 언약백성들이었으니까. 애굽은 가진 것이 있었기에 망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어떻게 요구하는가? 이사야 36장 4절에 보면 앗수르의 산헤립이라는 군대장관이 와서 약을 올리는 대목이 나옵니다. “어이, 히스기야. 네가 우리한테 침략당하니까 애굽한테 도움을 청하는데 애굽 바로왕은 너한테 그냥 상한 갈대다. 의지해봐야 소용없다. 그리고 너희들이 여호와를 의지하는데 여호와도 마찬가지다. 내가 분명히 히스기야 너에게 이야기하는데 애굽도 너를 도와주지 못하고 여호와도 도와주지 못한다. 차라리 항복해라.” 하는 대목입니다.



여기에 대한 답변은 딱 하나였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말라.” 그러면 누구하고 이야기한단 말입니까? 히스기야는 지금 주님과 이야기해요. 주님과 이야기함으로써 히스기야는 주님을 경유하게 됩니다. 주님을 경유하게 되면 저쪽에 있는 앗수르의 침공이라는 사건, 테러사건, 리조트가 무너지는 사건, 망대가 무너지는 모든 사건은 누구 사건이냐 하면 주님이 사건이 되는 거예요. 주님의 사건이 되면서 히스기야는 본래의 자기역할, 다시 말해서 “내가 어디에 머뭅니까?”가 아니라 “내가 어느 쪽으로 가야 주님이 보이는 쪽입니까? 어느 쪽으로 가야 주님에게 한발자국 더 접근할 수 있는 쪽입니까?”를 기도의 응답으로 받게 돼요.



내가 어디에 살면 다시는 적들이 안 쳐들어옵니까, 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나는 내 자신을 버리고 주께 맡길 수가 있습니까,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런 사건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이것은 “히스기야, 네가 거기서 할 말은 없다.”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는 할 말이 많아요. 왜냐하면 내 것이 따로 있기에, 우리는 이 땅을 길로 보지 않고 내가 영원히 정주하고 거주해야 될 장으로 보기에 우리는 조금만 일이 벌어지면 그때부터는 말이 그렇게 많아요.



원망하고 새벽제단 쌓고 두드리고 통곡하고 “하필이면 저에게……” 이렇게 하고. 이 말은 뭐냐 하면, 아무리 우리가 믿음 좋으니 기도 좋으니 해도 그 본심은 “하나님, 당신이 책임지시오.”라는 것, “당신을 원망합니다.”라는 거예요. 그리되면 우리가 바로 악어입니다. 우리가 바로 애굽이고, 우리가 바로 앗수르고, 우리가 바로 방향성을 잃어버린, 필요하면 주님을 찾지만 필요 없으면 안 찾는, 나밖에 모르는, 내가 나의 거주지에 누워있는 한 마리의 악어처럼 살고 있다는 것을 에스겔 29장을 통해서 우리의 이야기라고 이야기해주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떠날 때 그냥 떠나면 안돼요. 그냥 떠나면 우리가 어느 쪽으로 갈지 모릅니다. 그런데 어느 쪽으로 가느냐, 주님께 맡기는 쪽으로 가게 됩니다. 왜, 천국은 맡기는 생활을 하기 때문에. 우리는 동으로 가봐야 거기에 지옥이 있고 서쪽으로 가봐야 거기 지옥이 있고 남쪽으로 가봐야 그렇고 북쪽으로 가도 지옥이 있습니다. 그런데 동쪽으로 가면서 맡기고 가게 되면 그것은 천국의 일이 됩니다. 동으로 가도 서로 가도 남으로 가도 천국에 가게 돼요. 그러나 그 맡기는 작업을 누가 하겠습니까? 내가 하겠습니까, 남이 하겠습니까? 주께서 일을 일으키지 아니하면 우리는 절대로 주께 맡길 의향이 전혀 없는 인간입니다. 태생이 그래요. 내가 가진 것만 좋아하지 주님 가진 것은 안 좋아하는 것이 우리의 태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건을 통해서, 돌발사건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우리가 맡겨야 된다는 것, 내가 하나의 길 위에 산다는 것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새롭게 느끼게 됩니다. 이번 소치동계올림픽을 통해서 따야 될 금메달을 못 따고 자빠지고 엎어지고 할 때 다시 한 번 우리가 이 세상에 마음 두고 있다는 것,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나라는 천국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세상 잘못 해석하고 있고 주님 잘못 이해했습니다. 다 우리의 죄 때문에 그런 줄 아오니 다시 한 번 말씀으로 지적해 주셔서 지금도 부단히 한 방향, 생명의 방향으로 가고 있고 가면서 주께 더욱 더 내일이 아니고 주의 일인 줄로 알고 맡기는 쪽으로 이끌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