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250417a삼상2장27절(약속의 전개)-이 근호 목사
102페이지 아홉 번째 <사무엘상과 한국교회> 사무엘상 16장 14절에 보면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지라. 사울에게 성신이 임했는데 사울이 성신이 임한 게 아니고 이제 악신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악신을 주실 것 같으면 애초부터 성신을 줘서 사울이 왕이 될 필요가 없어야 되는데 왜 왕이 되게 하시느냐, 이 사무엘상에서 이 점이 파악이 돼야 돼요.
처음부터 다윗에게 바로 성신 주셔 가지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면 되지 않습니까. 근데 왜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고, 사울을 왕으로 세워놓고 잘리게 만들고 그리고 그 사울로 하여금 그 다윗에 대해서 어떤 관계를 유지하느냐 하면은 핍박하게 만들어요. 악신 들린 자가 아무나 핍박하는 게 아닙니다.
핍박 없을 때 좀 주의해야 돼요. 악신 들린 자가 핍박하는 것은 성신 받은 자를 핍박해요. 이게 뭐 아무나 지나는 사람보고 악신 들린 자가 핍박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창세기 3장 15절,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뱀의 후손, 뱀의 후손과 그다음에 여자의 후손 둘 사이의 싸움을 통해서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약속이 현실화돼요. 현실이 된다. 현실은 없습니다. 현실은 없어요. 인간은 인간이 생각하는 현실은 망상이기 때문에 없고 현실은 만들어 가는 거예요.
현실은 없고, 현실은 만들어진다. 만들어지는데 그 만들어지는 중간에 뭐가 들어가느냐 하면 약속이 들어가요. 여기 약속이 들어간다 말이죠. 그러면 현실은 없는데 망상인데 그걸 현실을 붙잡고 사는 자들, 붙잡고 사는 자들이 누구에 속하느냐 하면, 바로 뱀의 후손에 속하는 겁니다. 현실주의자라고 하지요. 현실을 붙잡고 이거 없으면 난 죽어, 죽어 죽는다고. 그러니 현실을 붙잡고 사는 사람에게는 무엇이 필요지 않고 무엇이 거추장스러워요?
약속이라는 것이 없이 눈에 보이는 현실만 충실하면 된다고 생각하겠죠. 눈에 보이는 현실만. 그럼 인간은 어디에 속합니까? 인간은 현실에 속하지요. “인간은 어디에 속하는가?” 라는 이 질문을 좀 이렇게 친절하게 질문하면 “인간은 자연에 속합니까? 안 속합니까?” 같은 질문이에요. 인간은 대자연의 일부지요.
그러니까 인간이 되었다고 해서 대자연은 보고 빠이빠이 할 수는 없다, 이 말이지요. 대자연에서 인간이 나왔기 때문에 인간은 산다는 것은 대자연과 더불어서 살아가는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근데 대자연이라는 것이 인간 눈에 뜨이지요. 관찰의 대상이고 그리고 대자연에 있는 질서에 맞춰서 농사짓고 고기 잡고 하잖아요. 사냥하고 수렵 채집, 들에서 뭐 땅콩이라든지 뭐 콩이라든지 뭐 잎사귀 같은 거 해 가지고 먹잖아요.
자연의 품 안에서 태어나서 자연이 제공하는 것 가지고 그걸 양식으로 삼아 거기서 자연 속에서 살다가 자연의 품속으로 흙이 되어서 돌아간다. 자 방금 이야기한 이 루틴. 이 과정 속에 프로세스 과정 속에서 약속은 어디 있습니까? 있어요? 없어요? 약속은 없지요.
약속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라, 할 때, “뭐 돌아가지 뭐. 결국은 죽어서 흙으로 돌아 갈 거 같으면 흙으로 돌아가지 뭐. 좀 고생 좀 하지만.” 그렇게 돼 버리면 뭐가 빠져요? 약속이 빠지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담에게는 흙으로 돌아가라고 했어요. 아담에게는. 아담에게는 방금 이 자연과 더불어 사는 거. 현실을 이 자연 세계라는 현실을 붙들고 사는 거. 이게 어디에 속한다 했습니까? 뱀의 후손이죠.
그런데 하와 이름 자체가 뭐냐 하면, 하와. “니 이름이 뭐니?” “하와” 생명. 생명이라는 것은 어디서 나왔냐 하면, 여자의 후손에서 있어요. 여자 이름이 생명이에요. 그래서 성도는 숨겨진 자기 본명을 찾아가는 여정을 거친다. 본명. 예명 말고 진짜 이름. 진짜 이름은 여자의 후손이 제공 가실 거예요. 진짜 이름은. 왜냐하면 여자의 후손은 이름이 생명이기 때문에. 여자도 죽으면 흙이 되잖아요.
그런데 그 여자의 후손에서 난 여자는 그냥 사용할 뿐이고, 여자의 후손에서 나온 정확히 아들이지요. 남자 없이 뱀의 후손 없이 그냥 약속 그걸 약속에서 나왔다. 뱀의 후손 관계없이 약속에서 나왔다. 그러면 이 현실에 있는 그 권세 권력에서 약속은 별개죠. 약속은 별개에서 온 거예요. 약속은.
약속이 뭘 끄집어내느냐 현실을 이 현실을 제거하고 새로운 현실을 약속 중심으로 현실을 만들어냅니다. 새로운 약속 중심으로. 이걸 누가 아느냐? 이걸 뱀이 알고 있어요. 배암이 왔어요. 이 뱀이 알고 있어요. 뱀의 후손이 알고 있다고요. 알고 이 현실 세계에 난입한 자기 허락도 없이 뛰어드는 이 약속에 대해서 뱀은 가만 있지 않고 뭘 하겠습니까? 핍박을 하는 거예요. 핍박을. 핍박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핍박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약속 중심의 새로운 현실이 현재 구성되고 있다는 낌새를 나타내고 있는 거예요. 구성되고 있는 낌새를. 우리가 인간이 생각하는 이 눈에 보이는 자연 세계 현실 그리고 현실에서 나오는 모든 언어들 사상, 개념 언어 이 모든 것은 자연을 관찰해서 나온 것들이에요. 자연을 관찰해서 그 질서에 대해서 서로가 소통하기 위해서 언어를 언어와 기호 숫자를 만들었고, 그 숫자와 기호로서 구성되고 있는 게 그게 뭐냐면 바로 사회라는 겁니다.
사회는 서로서로 인간과 모함에서 법이 형성되어 있지요. 인간관계에 법이 주어 있습니다. 선 넘지 마라. 지킬 건 지켜라. 이게 법이잖아요. 근데 법이 주어지게 되면 법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법이 있다는 것 자체가 내가 상대방 보고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찬스가 왔다고 이리 보면 돼요. 법이 주어졌으면. 법을 지킨 나와 법을 못 지키는 너와의 차등이 확 올라오면서 법의 권력 이름으로 나를 지배할 수 있는 새로운 권력 서열에 나는 가담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겁니다. 가담될 수 있는 게.
“법 못 지키는 것들! 나한테 무릎 꿇어!” 이리 되는 거예요. 법 못 지키는 것들! 아내가 남편 잔소리 하게 되면, “이게 어디 기 타고 있어? 남편이 하늘이야! 우리 너희 시아버지 시어머니한테 한번 물어볼까? 우리 시집에 한번 물어볼까? 남편은 하늘이야! 하늘로 받들어야 돼! 이렇게 나온다고요.
그러면 그 남편 하늘이라는 그 신분 보장은 그건 누가 보장해 준 거예요? 대대로 내려오는 법이지요. 그걸 관행 관습 전통 또는 풍습이라고 이야기해요. 거기에 대해서 토 달거나 이유 달수가 없어요. 아내는 무조건 남편 말을 순종해야 가정이 평화가 온다. 샬롬! 가정이 평화가 온다. 그럼 제가 묻고 싶죠. “가정 평화 와서 뭐할 건데?” 그러면 남편이 하지요. “내가 편하잖아.” “그럼 너 혼자 편안한가. 너 혼자 편하려고 가정이 있구나! 아, 그런거구나!” “내가 편해야 식구들도 편하다.” 그런 논리도 어디서 구성하는가, 법이다. 이게 전부 다가 법이다가 돼요.
그래서 법이라는 게 참 편리하지요. 그 법을 엎어 버리기 위해서 기 싸움에서 우위를 정하면 비록 여자라 할지라도 기가 세면 그게 가장이 될 수가 있습니다. 기 센 걸 어떻게 티내는가, 약간의 폭력이니까 가미가 되지요. 남편은 겁이 나 가지고 이렇게 막 휴지통 싫다는 말이야. 휴지통 던져요. 안 깨지거든요. 얼마 안 되고. 그런데 기 센 아내는 TV 저거 60인치 저걸 엎어버려요. 제발 잘못 했다. 그러니까 이거는 아내의 권력도 아니고, 남편의 나약함이 아니라 돈의 권력이었던 거예요. 돈. 세상은 가정이고 어떤 가정이고 모든 경계선을 헐어 버리면 남는 것은 돈의 권력입니다.
돈이 있어야 현실 세계에서 여유롭게 풍요하게 살고 그걸 복이라고 합니다. 복이라고 앞에 글자 붙으면 그걸 뭐라고 하느냐 그걸 행복이라고 하죠. 행복. 대만족. 사람들은 이것이 정상이잖아요. 이걸 정상인데 약속은 이걸 뭐라고 합니까? 그걸 뭐라고 해요? 악신 들렸다, 하는 거예요. 악신 들렸다.
하나님이 사울을 왕으로 삼으신 것은 사울의 왕 자리가 없기 전부터 인간이 이스라엘의 각 구성원들의 마음을 수집한 거예요. 뽑아낸 거예요. 뽑아내서 하나의 구심점을 만들어 버린 겁니다. 너희들 그렇게 뭐 원하고 원하고 있는 그 원하는 거 내가 알아 맞춰 봐? 내가 너 원하는 거 내 가시화 실제로 그걸 현실화시켜 봐! 너그 왕 원하지? 그렇지? 그럼 왕을 세우는 것을 왕을 달라 해서 세우는 것을 허락했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제는 이스라엘을 하나의 대표자를 상대로 하나님이 직접 사울왕을 상대함으로써 이스라엘 전체의 운명을 사울 왕의 운명과 결부시키겠다는 것이에요. 복잡하게 뭐 개인하고 개인 너는 잘했고 못했고 필요 없어요. 그 잘하고 못하고 뽑아내 버리면 뽑아내 버리면 그건 왕이라는 이미지 안에 집결돼 있으니까 편리하죠. 왕.
그래서 그 사무엘상 8장에 보면 그들이 왕을 달라했다. 이 말이지요. 왕을 달라할 때 하나님이 그냥 왕을 주옵소서라고 했을 때 거기서 하나님께서 그들이 말하지도 않는 그들의 속마음을 거기다가 덧붙여서 왕을 세워 줍니다. 너희들이 왕을 구하는 것은 이제는 내가 왕됨을 싫다는 마음에 솔직함으로 나는 그렇게 이해하겠다. 받아들이겠다. 그렇다면 너희에게 왕을 세워주마. 그러면 그 왕이 얼마나 나 하나님을 싫어하는지를 너희들이 세운 사울 왕을 통해서 내가 증명해 줄게. 그래서 사울 왕이 있는 거예요. 그에게 악신 걸
렸다 말이지요.
그런데 그 사울 왕에게 백성들이 사울 왕에게 순종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모든 그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순종할 마음이 전혀 없다는 뜻이에요.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물론 우리가 지금 사무엘상하고 있잖아요. 그 전에 사사기 룻기도 있지만, 사사시대에 일어난 일이에요. 사사 시대 연장으로서.
그런데 여러분들이 이제 강의 시작하면서 꼭 알아야 될 거 있어요. 그건 뭐냐 출애굽 사건입니다. 출애굽이 뭐냐 사람들이 물으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학대받던 자기 백성 언약의 백성을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애굽의 나라에서 건져 줬습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지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아쉽습니다. 거기에 중요한 게 빠졌어요. 그게 뭐냐면 최고 사건은 애굽을 심판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애굽을 심판하는 사건이었어요.
그리고 애굽이 자랑하는 것 권력, 군사력을 의도적으로 유인해서 결국은 홍해 바다에다가 다 몰살시키는 사건이 출애굽 사건이고, 그들이 족보 자랑하고 자기의 역사와 전통과 풍습을 자랑할 때 그 족보에 아주 대를 끊어 놓는 사건이 유월절 사건이에요. 이거는 무슨 뜻하느냐 하면 하나님한테 개기면 너그 죽는다. 그걸 보여주는 사건이에요. 하나님께 대들면 너희는 죽는다. 내가 용서치 아니하리라. 성경대로 하면 찢어 버리리라. 이런 이야기지요.
그런데 출애굽 사건이 그리해서 그들이 이스라엘 됐잖아요. 그런데 사울 왕을 선택해 놓고 하나님께서 가만히 있을 일 없지요. 무엇을 되풀이 하느냐 하면 출애굽 사건을 계속 사무엘상을 통해서 언급해 줍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눈 운동을 해야 될 시간이 왔습니다. 사무엘상 2장 27절 읽기는 제가 읽겠습니다.
왜냐하면 듣는 사람들이 배나 위대하기 때문에. 감히 어른보고 읽으라고 못하겠어요. 수요 설교를 해 놓고.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에게 와서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 조상집이 애굽에서 바로에게 속하였을 때 내가 그들에게 나타나지 아니하였느냐” 참 우리 주님께서 뒤끝 있지요. 그 출애굽 사건과 결부되어서 모든 것이 결부되어서 이스라엘을 다루십니다.
그 말은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약속이라는 것을 애굽이라는 권력 법의 세계 안에 현실 안에 약속을 집어넣어서 이스라엘 중심의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 가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일관된 프로젝트 계획입니다. 그러면 출애굽의 그 사건의 의미가 빠져야 되겠어요? 안 빠져야 되겠어요? 안 빠진다. 그걸 계속 집어넣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다음에 사무엘상 4장 8절 “우리에게 화로다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리요.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 가지 재앙으로 애굽인을 친 신들이니라” 블레셋 사람이 벌써 그때 출애굽 사건을 이미 소문 듣고 다 알고 있는 거예요. 다 알고 있는 거예요. 그때 애굽에도 신이 많았지만, 애굽에 신이 열 가지 있었잖아요. 그게 열 재앙 아닙니까. 그런데 한 분의 신 여호와가 모조리 그 신들의 위력을 위세를 다 꺾어 나왔다는 거예요. 이것도 신이라고? 이런 식으로. 신과 신의 대결에서 그들은 샙대빵 된 거예요. 완전 KO패된 거예요. KO패. 그런데 그 신이 현재 이스라엘과 함께 있으면서 그 신이 어떻게 이스라엘과 함께 있는가, 언약궤와 더불어 함께 있다고 하는 거예요. 언약궤. 5절에 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에 들어올 때 온 이스라엘 큰소리 외치며 땅이 울린지라 블레셋 사람이 그 소리를 듣고 블레셋 사람이 바로 출애굽 사건 애굽이 재앙 받던 사건을 기억하고 있어요.
그다음에 6장 6절, “애굽인과 바로가 그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 것 같이 어찌하여 너희가 너희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겠느냐 그가 그들 중에서 재앙을 내린 후에 그들이 백성을 가게 하므로 백성이 떠나지 아니하였느냐”라고. 누가? 역시 또 블레셋 사람들이 걱정이 늘 늘어진 거예요. 그러니까 요새 말로 하면 그 애굽 나올 때에 하나님께서 히브리인에게 원자 폭탄을 안기게 해 가지고 원자 폭탄 투화해서 애굽 나라에서 빠져나왔다, 이 말이지요. 근데 그 원자폭탄을 제공한 그 하나님이 지금 우리 블레셋을 아주 작살을 냈다. 그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블레셋 사람이 이렇게 언약궤를 다시 도로 토해 놓는 것은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한테 이겼는데 이스라엘 하나님한테는 졌어요.
그게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왜 중요하냐 하면은 분명히 이방 사람들은 이스라엘 하나님한테 졌거든요. 그런데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하나님을 앞장세우지 않고 세상나라와 똑같이 자기들의 정치력을 믿기 시작했어요. 그러면 누가 하나님의 적이 되는 거예요. 이방 민족과 이스라엘 민족이 이스라엘 하나님만 적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하나님이 적이 되는 꼴이 된 겁니다. 그게 사무엘상을 이해하는데 이게 꼭 필수적인 인식이에요.
이스라엘은 적이었다. 여호수아의 하나님의 적이었다. 그 하나님과 친숙한 적 이스라엘 사이에 어떠한 괴리 간격이 벌어져 있는가, 그걸 주목해야 돼요. 왜냐하면 그 틈 간격에서 다윗이 나오기 때문이에요. 다윗이. 다윗이 나중에 다윗 왕이 되잖아요. 다윗이 왕이 된다고요. 그 말은 하나님에 대해서 원수가 되고 그 싸움을 최측근이 되면서 싸움을 벌리면서 거기서 하나님의 왕되심이 다윗이라는 인물로 통해서 하나님은 왕은 이렇게 다스리고 이렇게 자기 백성을 모으고 지배하고 관리하고 통치한다를 다윗을 대리해서 보여 주는 겁니다.
그러면 사울에 속한 이스라엘은 따로 다윗에 속한 이스라엘은 새롭게 구성되기 시작하는 겁니다. 새 내각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기 시작합니다. 새로운 정부가. 친여호와 쪽과 저쪽은 반 여호와 쪽이에요. 현이스라엘은 사울은 하나님을 반대하는 쪽,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을 인정하는 쪽이지요. 이런 것을 봐 가지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은 반드시 뱀의 후손의 노선이 꼭 필수적이었다는 사실이에요.
여러분들이 신앙생활 할 때 어떻게 하느냐, 핍박을 해 준 자들이 꼭 필수적으로 있어요. 핍박을 해 주는 자들. 그런데 왜 여러분 핍박을 안 받느냐 너무 잘해 줬거든요. 세상의 규칙과 세상의 질서에 너무 호응을 잘해 줘 가지고, ‘뭐 내 편하면 최고지’ 자기 안일한 최우선 과제로 생각하기 때문에. 혹시나 그럴 경우는 없지만 그럴 수도 있다. 그럴 때는 조용하게 평온한 삶이 보장이 될 수가 있어요.
사도행전에 보면 그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렇게 요란스러운데 그 사도행전에 보면 그야말로 난리도 아니에요. 예수님이 죽은 자가 부활했다는 그것 때문에 기존에 현실 세계 들고 일어나 가지고 예수 믿는 사람들 많이 죽이고 옥에 가두고 난리도 아니었잖아요. 지금 21세기 그 21세기 2020년도 한국은 그런 면에서 너무 조용해요. 그저 교회 난리라 하는 것은 그냥 전광훈 목사 그거 난리치지 다른 난리는 뭐 복음 위한 난리는 전혀 없는 상태입니다.
자, 그다음에 또 한번 봅시다. 8장 8절,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다시 말해서 지금 사무엘이 하나님의 마음을 대신해서 백성들에게 왕 달라는 백성들에게 지금 꾸중하고 있는 거예요. 꾸중하면서 그 본 내용은 뭡니까. 출애굽이에요. 애굽에서 나왔어요.
그런데 애굽에서 나온 게 그들이 뭐 의견모아서 나온 것이 아니고 기존의 이 현실 자체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이라는 차원에서 데리고 나온 거예요. 자연 속에서 일부가 되어 있는 나, 자연. 자연과 더불어 살기를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걸 폐지하는 거예요. 그렇게 살려면 내 백성 아니다. 그럼 뭐가 내 백성인데? 출애굽 했을 때 그 정신 출애굽의 그 요소, 그 요소로부터 새로운 바탕과 토대를 이루어서 거기서부터 능력이 나와서 구성되는 새로운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원하는 이스라엘이다, 말이지요.
그럼 그 작업을 어떻게 하느냐, 그 작업은 놀랍게도 기존에 뱀의 후손, 악신 들린 자가 그런 상황을 부정적이나마 그런 상황을 만들어 줘요. 만들어내면 그 안에서 어떤 모습? 핍박받는 모습으로 새로운 이스라엘이 만들어지는데 핍박받는다는 말은 저쪽에서 이제 나를 때리는 거고, 내 쪽에서 보게 되면 저쪽에 악신 들린 자의 사상이 하나님 여호와의 출애굽의 여호와의 사상과 어떻게 돼요? 안 맞다 틀려먹었다는 것을 발견하는 기회가 돼요.
‘아, 그래서 사상이 그래서 이게 하나님께서 화낼 만하구나!’ 라는 사상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는 겁니다. 바로 그 이야기가 바로 사무엘상 1장에 한나지요. 브닌나가 뭐냐 하면, 첩이지요. 이거는 악의 침입이에요. 악의 침입.
악이 한나 가정에 침입해서 한나가 아기 없음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근데 한나가 아기가 없다는 말은 이건 어느 노선이냐 하면 아브라함의 언약 노선이에요. 사라는 아기 낳았습니까? 리브가는 애기 낳았습니까? 라헬과 그 언니는 아기 놓았습니까? 못 낳았어요. 전부 다 불임여성이에요. 전부 다 특징이 아기를 못 가져요. 왜? 애기라 하는 것은 어디 세계 통합니까? 이 현실 세계 통하잖아요. 약속의 애기를 가져 줘야 되는데. 현실 세계에서는 그 뱀의 후손과 관리되어 있고 흙으로 돌아갈 인간을 100명 애기 낳아도 뭐 흙으로 돌아갈 거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나를 낳더라도 여자의 후손의 노선의 자식이 태어나야 되잖아요. 그거는 약속에서 새롭게 나와야 돼요.
한나가 그렇게 기도하게 된 것은 첩이 되는 브닌나의 효과입니다. “애를 못 낳는 주제에 뭐 안주인이라고 으시대느냐, 하나님이 아기 못 낳는 것은 저주 받는다고 우리 다 율법을 알고 있잖아. 대가 끊어진다고. 나 봐! 나 여자 들어와서 대가 이어지잖아. 그러니까 내가 약속의 사람이라고.” 하면서 브닌나가 이렇게 한나를 그렇게 굉장히 핍박을 많이 하지요. 성질난 한나가 하나님께 그 성전에 가가지고 아주 대들지요. “나도 애 주세요. 나도 애 줘 가지고 나도 큰 소리 치게 해주세요.” 막 이런 식으로 하지요.
그다음에 10장 18절, 사무엘이 백성들을 미스바에 불렀습니다. 그 당시 미스바가 수도였습니다. 사무엘 당시에. 미스바에 불러가지고 미스바라 하는 것은 북이스라엘 남유다 그 중간쯤 되는 거예요. 베냐민 지파에 속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고 너희를 애굽인의 손과 너희를 압제하는 모든 나라의 손에서 건져내었느니라 하셨거늘” 애굽에서 인도해 내고, 뭐 이제 지겹지도 않은가 몰라, 계속해서 언급하는 게 뭐냐하면 애굽에서 내게 인도하여 내고 왜 이걸 자꾸 식상되는 대로 반복하느냐 하면 주도권 싸움이에요. 주도권. 주도권은 네 이스라엘의 주도권은 어디까지나 애굽에서 너를 건져낸 이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의 주도권이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제 슬슬 군기가 풀려 가지고 이 이스라엘의 주도권이 뭡니까.
우리도 다른 나라처럼 우리 인민에게 있게 우리 백성에게 있게 주도권을 쥐고 우리가 투표해 가지고 왕 뽑자 하는 주도권을 하나님 쪽에서 이거 강제로 뺏어 가지고 자기 쪽으로 이렇게 자기 쪽으로 가져오려고 하는 거예요. 이게 악신 들린 거예요. 주도권을 내가 쥐려고 하는 거예요. 내가. 상당히 현대적 개인주의하고 똑같잖아요. 현대인들의 사고방식이 뭡니까? 키워만 주신다면 주도권은 제가 쥐겠습니다. 이거다 말이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주도권을 빼앗겨 버리면 그건 하나님이 왕이 안 되잖아요. 왕은 반드시 백성이 있어 줘야 왕이 되니까. 백성은 왕을 쳐다보고 살아가는 게 백성이에요. 백성이 자기 쳐다보라는 것은 왕의 존재를 거부하는 일종에 내란 또는 내란의 우두머리 내란의 수괴 그렇게 되지요. 그러니 민주주의 자체가 악신이 들린 거예요. 주도권을 전부다 본인이 쥐고 있으니까 누가 권력을 잡느냐에 따라서 내 말 들어라 이렇게 되잖아요. 이 정신을 계속해서 지금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다음에 12장 6절에서 8절,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모세와 아론을 세우시며 너희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는 여호와이시니 그런즉 가만히 섰으라 여호와께서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행하신 모든 공의로운 일에 대하여 내가 여호와 앞에서 너희와 담론하리라 야곱이 애굽에 들어간 후 너희 조상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을 보내사 그 두 사람으로 너희 조상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곳에 살게 하셨으나” 이렇게 이제 출애굽 이야기를 한 거예요.
사무엘이 이제 마지막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은퇴를. 사울에게 인수인계를 하면서. 나는 이제 네가 원하는 왕에게 권력을 인계할 테니까 나한테 찾아오지 마라. 나는 조용하니 은퇴할란다. 은퇴하고 다만 마지막으로 한 것은 출애굽에 그 정신을 잊지 말라. 이게 이제 마지막 말이에요.
이 말하고 이제 떠났습니다. 떠나고 가끔 찾아오기는 하지만. 가끔 찾아와요. 국정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미 이 말했다는 말은 그건 뭐예요? 이제는 이 이스라엘과 사무엘 노선하고는 관계없는 나라가 되었어요. 그때부터 이제 13장, 14장 계속 보면 이제 블레셋이라는 이방 나라를 하나님께서 이제 슬슬 자극시켜서 이스라엘도 아닌 이스라엘을 압박하고 공격하게 되는 겁니다.
왜 그러느냐하면 그렇게 하나님께서 이방 나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공격하게 해야 그 안에 그 안에서 이스라엘을 허물어 뜨릴 만한 더 힘센 블레셋이 공격케함으로써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가 결코 사울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드러낼 수 있어요. 그런데 그 안에 하나님이 찜해 놓은 어떤 소년이 있어요. 소년 다윗이 블레셋에서 이스라엘을 건져냅니다.
건져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또 오해를 하고 있는 거예요. 무슨 오해냐 하면 사울을 찾을 때 그들은 자기가 유리하도록 왕을 달라했잖아요. 그런데 이제 사울이 블레셋을 못 이기고 소년 다윗이 이기니까 그때부터 백성들이 어디다가 붙느냐 하면 이제는 다윗을 왕으로 삼고자 사울은 천천이고 다윗은 만만이라고 이야기해 버려요.
그러니까 백성들이 지금 무슨 정신이 없는 거예요. 출애굽 정신이 없는 거예요. 사무엘은 출애굽 정신을 강조했는데, 백성들은 자꾸 영웅을 이용하려고 한다, 이 말이죠. 출애굽 정신이 뭐냐? 이 시점에서 분명히 이야기해요. 출애굽 정신은 뭐냐, 이미 우리는 죽었다는 거예요.
이 현실에서 구성되는 나는 현실과 더불어 살겠다는 이 안일함이 다 죽이는 출애굽의 그 사건에 입각해서 우리는 이미 유월절 날 일단은 죽은 목숨이었다. 죽은 목숨인데, 피 발라서 우리는 애굽에서부터 애굽과 전혀 다른 색깔의 나라를 구성하기 위해서 나왔고, 죽음의 바다 홍해바다 건너왔고, 요단강 건너왔고, 이거는 죽어 있는 우리가 힘을 모아서 된 게 아니고, 우리를 죽어 있음을 확실하게 하면서 정작 살아 있는 것은 여기 나오지요. ‘성도는 숨겨진 자기 본명을 찾아가는 여정을 거친다.’ 이 본명이 하나님의 이름이잖아요.
하나님의 이름을 찾아가도록 하는 하나님의 조치였던 겁니다. 그 그게 출애굽 정신을 가지고 계속해서 이어 나오고 있는 거예요. 출애굽 정신으로서. 본명이 누구십니까? “본명이 누구십니까” 라는 말은 뭐냐 하면 “소속이 어느 소속입니까? 천국 소속이에요? 아니면 지옥 소속입니까?” 소속이 어디입니까? 그걸 묻는 거와 같은 말이에요. 본명이 뭡니까, 우리는 모르죠. 모르는데, 주님께서 그 본명을 사건을 통해서 현재 내가 갖고 있는 이름은 이미 옛적에 죽은 이름인 것을 우리는 아직도 명찰을 달고 다니는 거예요. 우리의 주민등록은 하늘에 있는데, 우리는 아직도 우리의 옛날 이름은 주민 센터에 호적에 있어요.
그러니 성경 자체가 얼마나 우리 예상 밖에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를. 우리가 은근히 기대하는 그런 이야기는 성경에 없습니다. 왜 우리가 기대해서는 안 되는가, 우리는 기대해 보면 자꾸 죽었다는 의식보다 더 살아야 되겠다는 의식이 강렬하기 때문에 성경을 좀 이용할 생각으로 성경을 이렇게 잘못된 해석을 하게 되는 겁니다.
자, 사무엘상 15장 2절과 6절, 사울이 아말렉을 칩니다. 역시 또 핀트가 어긋나요. 하여튼 뭐 사무엘이 없으니까 지가 왕질 하겠다고 나름 애를 쓰는데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을 추억하노니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라. 이렇게 사무엘이 가끔은 등장해서 선지자니까 하나님의 주어진 말씀을 전합니다.
전하는데 어떻게 했는가, 진멸했습니까? 진멸 안 했어요. 그거는 그 사울 왕이나 백성들이 한통속이었습니다. 왕이 잘못되면 백성들이 왕에게 뭐 지적을 하겠는데 왕이 하는 일이 우째 우리 마음을 잘 알아서 우리 마음을 대리해서 똑같이 하는 거예요. “왕이요! 좋은 건 남기고 나쁜 것만 칩시다.” 하는 그 마음을 대변해 가지고 사울이 그대로 실시한 거예요. 아마 그 당시 이제 국민 여론조사하면 거의 90% 나올 거예요. 사울에게.
그런데 사무엘은 딴소리합니다. 22절,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고 되어 있어요.
이게 굉장히 어려운 말이에요. 왜냐하면 이게 쉬운 말로 쉽게 하면 이래요. 쉬운 말로 여러분 이해하시면 이리돼요. 제사할래? 내 말에 순종할래? 이러면 눈치 딱 봐가지고 제사보다 순종이 낫지요. 순종할 건데. 순종해야 될 게 없애 버렸어요. 쉽게 말해서 너는 뭘 해도 순종 안 함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일을 그렇게 조치하시는 거예요. 미운놈 떡 하나 더 준다고. 미운놈 뭘 해도 결국은 뒤늦게 와서 또 순종 안 했구먼. 이렇게 되는 거예요. 순종 안했구먼. 하는 쪽쪽 순종이 안 되는 것이라고 뒤에 선지자가 와서 뒤에 계속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 말은 결국 이게 뭔 뜻이냐 하면, “사울아 네가 존재하는 것 자체가 네가 존재한다는 자체가 가짜 이스라엘 백성들이 네 안에 담겨 있다는 조치고, 이미 왕을 구할 때 이미 너희들 너희 집단은 끝났어. 내가 그걸 확인 차원에서 계속 일거리를 내가 만들 거야.”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뭘 해도 악신 들린 거 순종 아닌 게 돼 버려요.
15장 26절에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이렇게 하거든요. “니는 벌써 취소야. 왕 취소야.” 그러면 왜 사울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느냐 이게 왜 버렸느냐 하면, 여호와의 말씀은 새삼스러울 게 없어요. 출애굽 있잖아요. 그 출애굽 정신을 분명히 그걸 드러내고 발언하게 되면 그게 순종이에요.
왜냐하면 출애굽할 때 이스라엘 백성이 한 게 뭐가 있습니까? 없지요. 그냥 가만히 있었잖아요. 홍해바다 건널 때 가만히 있었지요. 누가 다 했습니까? 하나님이 다 하신 거예요. 그런데 순종을 안 했다는 말은 하나님의 하는 것이 못 믿어 와서 백성들이 자꾸 제사 드립시다, 하니까 제사 드린 거예요.
백성들이 이번 전쟁이 승리 전리품 중에서 괜찮은 건 남기고 안 좋은 것만 버립시다. 고물만 버립시다. 백성들이 원하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중간에 왕 입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될 왕이 누구 말 듣고 있어요? 백성들의 말을 듣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사무엘이 말씀을 버렸으므로 당신은 이스라엘 왕이 더 쉽게 말해서 끼리끼리 너희끼리 잘해 보세요. 잘 먹고 잘 사세요. 나는 니하고 안 놀아 하고 가버렸다 이 말이지요.
사무엘상에서 나중에 그 엔돌에 그 무당 나오죠. 여자 무당할 때 그 사무엘이 지적한 게 귀신 유령이 된 사무엘이 지적한 게 그거예요. 왜 그때 아각의 목을 자르지 않았습니까? 출애굽 정신이 뭐냐, 아말렉 그 출애굽해서 아말렉에서 그때 광야에서 전쟁했잖아요.
그때 아말렉을 진멸했다, 이 말이에요. 그 진멸할 때처럼 또 아말렉을 또 하나의 테스트 용도로 또 동원시킨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의 면면을 보여 주려면 하나님께서 붙여 준 아말렉 왕 아각을 아주 모가지를 쳐버려야 돼요. 그래서 그것을 여기 사무엘상 16장에서 사무엘이 시범을 보여 줍니다.
33절, “사무엘이 가로되 네 칼이 여인들로 무자케 한것 같이 여인 중 네 어미가 무자하리라 하고 그가 길갈에서 여호와 앞에서 아각을 찍어 쪼개니라” 이게 출애굽 정신이라는 거예요. 그 출애굽 정신이라는 것은 인간이 내가 열심히 해서 뭐 업적을 남겼다 하는 그것을 하나님 보시기에 찍어 쪼개는 대상으로 간주하는 정신이 출애굽 정신이에요. 내가 행해서 이런 괜찮은 걸 남겼습니다. 이래 와! 모가지 내놓으세요. 그냥 죽여 버리는 겁니다. 이게 십자가 정신이지요. 출애굽 정신이에요.
15장 27절, 사무엘이 가려고 돌이킬 때에 사울이 그의 옷자락을 붙잡음에 옷을 붙잡을 때 그다음에 뭐가 됐어요? 찢어지지요. 참, 사무엘도 참 사무엘 옷 입을 때 좀 청바지 입고 가지. 그 뭐 손만 대면 쫙 찢어지는 연한 거 입어가지고 이런 사단 나잖아요.
그런데 이게 의도적이라니까요. 하나님 의도적이지요. 붙들고 뛰는 걸 사무엘이 어떻게 알겠어요. 사무엘도 몰라요. 그러나 하나님은 알고 있어요. 찢어지니까 “그거 봐! 니 내면에 갖고 있던 정신이 옷 찢어지는 이렇게 가시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이런 결과를 낳는다. 딱! 딱 니 마음으로 인하여 하나님 내 마음이 옷 찢어지는 그 마음이야!” 라고 이야기해 주시는 겁니다. 이 정도 되면 하나님 정말 무시무시한 분이에요.
자,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내가 문제 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만약 사울 왕 같으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이 정도 되면. 1번 사울처럼 삐져 가지고 남은 백성과 더불어서 새로운 정권을 도모한다. 사무엘이 가든 말든 남은 백성들이 안위를 생각해서 왕으로서 역할을 다한다. 2번 사표 낸다. 몇 번입니까? 사표 내야 되잖아요.
악신은요, 인간의 욕망을 부여하면 그 부여된 욕망은 인간 악마에 부여된 욕망은 인간이 포기할 수가 없어요. 인간은. 인간은 포기할 수 없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신혼 때 그 남편하고 같이 힘들게 살았고 단칸방에서 살면서도 아무 집에 가구도 없고 비키니 옷장만 달랑 있고, 그것도 밥상도 사실 밥상도 이게 다리 해가지고 플라스틱 아니지 스탠이 아니고 알미늄 같은 거로. 해놓고 여기다 또 장비 같은 것 또 왜 그리 놨는지 몰라. 그때 할 때 얼마나 그때가 행복했습니까? 그때가 얼마나 행복했어요. 단칸방에.
왜? 아직 욕망이 유입이 안 됐어. 여기가 좋사오니 할 정도로 그렇게 살았는데 한번 그다음부터 욕망이 차고 들어오면 이미 들어온 욕망은 인간 속으로 취소가 되지 않습니다. 기어이 사울은 악신으로 망할 수 있는 코스를 갈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렇게 가야 이제 다윗의 준비된 다윗이 등장합니다.
그건 다음 시간에. 10분 뒤에.
■안양20250417b삼상2장27절(약속의 전개)-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에 한 것을 한마디로 말해서 이게 뭐냐 하면, 약속의 전개지요.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은 약속밖에 몰라요. 약속의 전개. 약속의 전개와 대비되는 것이 뭐냐 하면 인간 질서의 공허함, 허술함, 허약함, 이것과 대비시키는 겁니다. 인간질서의 공허함, 요거는 사울왕 체제지요. 사울왕 체제. 하나님의 약속의 전개는 이거는 다윗왕 체제입니다.
비교를 해야 약속이 나오기 때문에. 그럼 어떤 사람은 “나, 다윗왕 편이야.” “아니요” 다윗왕 편이야 하는 것은 다윗왕을 이용하겠다 하는 아까 제가 말씀드린 그것밖에 안 되니까 그것도 이스라엘이 아니에요. 요 틈바구니 사이에서 나오는 약속, 그 약속을 위하여 다윗과 사울 그 두 왕을 동시대에 같이 병행하고 출연시켰습니다.
그러면 오늘날은 어떤가, 오늘날도 마찬가지지요. 보이지 않는 왕. 왕을 주님 주라고 해요. 메시아라고 해요. 메시아. 기름 부은 자 메시아 왕이에요. 왕. 보이지 않지만 활동하시는 예수님이 왕으로 계시는 이 세상에, 인간의 트럼프 대통령부터 해서 한국에 있는 그 질서에서 이런 인간질서 체제를 같이 우리 성도는 이 두 세계 사이에 다 경험하게 하도록 그렇게 하게 합니다.
인간질서는 어디서 출발하느냐 하면 육신의 탄생부터 시작하겠지요. 육신의 탄생. 육신의 탄생에서 여기서 단체 결성에 대한 열의, 개인적인 육신이 보호받지 못하니까 서로의 힘을 서로 상호협동해서 뭉쳐야 되겠지요. 이게 김진홍 목사의 무슨 정신이냐 두레마을 아닙니까. 두레마을. 서로 합치는 거예요. 서로 협동하는 정신. 이게 공동체지요. 단체 결성에 대한 열의가 되게 되면 이 결성 단체가 결성의 힘을 더 빡빡하게 단단히 하기 위해서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이념이 발생해요. 이념이 발생.
이념이라는 것은 총화된 사상의 총화. 집결된 사상에 하나로 모아지는 사상을 이념이라 합니다. 이데오르기라 해요. 이는 이데오르기 있지요. 그러면 여기서 인간 세계는 이렇게 내 중심에서 어떤 이념화된 단체가 있다면 다른 육신 중심에 또 단체가 또 있겠지요. 또 이념이 있겠지요. 요 이념과 이념에 끊임없이 전쟁이 일어나요. 이쪽을 만약에 이스라엘이라 하면 이쪽은 뭐냐 블레셋이라 할 수 있어요.
좌파와 우파, 이념과 이념을 달리하면 뜻을 달리하는 두 파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서 전쟁이 일어나게 되면 뭐가 되느냐 전쟁은 뭐와 뭐를 결정하느냐 하면 승자와 패자를 결정해 버립니다. 그것도 일시적이에요. 그러면 이 패자가 잠복되어 있다가 다시 힘을 결성하면 뭐가 됩니까. 또 전쟁을 통해서 승자의 자리에 앉겠지요. 이게 계속 뒤집어지는 그 사슬이 인간 역사에 흘러가는 모양새에요. 인간 역사.
그 출발이 뭡니까? 나라는 육신의 탄생부터 하는 거예요. 육신의 탄생. 육신의 탄생을 하게 되면 특히 아들 같은 게 나타나게 되면 집안 부모가 뭐라 하느냐 하면, “이게 나중에 이거 인물 보니까 큰 놈 되겠다.” 이 큰 놈이 되는 게 뭡니까?
이념 전쟁에 나와서 승자 쪽에 선다 이 말입니다. 지도자 쯤 된다 이 말이에요. 또는 딸이 태어나면 “야~~ 인상 보니 나중에 왕비 되겠다.” 왕비가 뭡니까? 승자 옆에 딱 붙어 있는 그런 여성이지요. 붙어 있는 여성의 조건은 뭐냐하면 이뻐야 됩니다. 에스더. 에스더는 뭘 이깁니까? 권력을 이기지요. 나의 반이라도 너한테 주겠다. 너의 아름다움에 내가 너무 반해서. 나의 반을 줄 거 같으면 전부 다 준 거나 마찬가지에요. 내 모든 걸 몽땅 가져가도 너만 있으면 난 괜찮아. 이게 바로 에스더가 아하수에로왕을 유혹할 수밖에 없는 아름다운 그의 미모입니다. 아름다움이에요.
그런데 그 아름다움은 바로 하나님의 언약의 연속성 출애굽 정신의 연속성에서 나왔습니다. 모든 권력은 뭐라 해요? 모든 질서에 뭐함? 공허함, 허술함, 허약함, 이런 겁니다. 그래서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싸우는 것은 어디 속합니까? 그냥 이념 대 이념의 싸움이에요. 진리와 진리가 아니고 그 안에 누가 포함되어 있어요. 내가 포함되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사울은 사표를 안 내고 어떤 정신이냐 하면, 내가 이스라엘의 왕이다. 이 정신을 정신으로 계속 밀어붙이고 있는 겁니다. 이 정신으로.
자, 그러면 아까 우리가 첫째 시간에 했던 걸 다시 한 번 중요한 걸 다시 한 번 해 봅시다. 출애굽에 있어서의 주도자가 누구냐 하면 바로 우리들의 본명 이름이에요. 무슨 이름? 여호와의 이름이지요. 여호와의 이름을 하나님께서는 모세 율법에 의해서 여호와 이름을 한 곳에 딱 담아 놓았어요. 어디냐, 언약궤 있지요. 언약궤.
그래서 이 사무엘상을 하면서 출애굽 이야기를 하면서 그 출애굽의 사건 보이지 않는 사건은 원래 안 보이는 거예요. 보이지 않은 사건에 남긴 결실물로 계속해서 이게 중심 그 사무엘상 이야기에 중심 부위를 차지하는 것은 뭐냐 하면 언약궤입니다. 언약궤. 그 언약궤를 지키는 자가 기름 부은 자예요. 메시아 또는 제사장, 선지자, 왕, 전부 다 기름 부은 자거든요.
그러면 사울 왕이 해야 될 게 1번, 백성을 지킨다. 2번, 언약궤를 지킨다. 몇 번입니까? 백성을 지키지 말고 언약궤를 지켜야 돼요. 엘리 제사장이 그걸 못 한 거예요. 그래서 그 사무엘상 4장에서 그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전쟁을 하게 되는데 그 전쟁하게 된 것도 하나님께서 엘리 제사장 가문을 제거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블레셋 군대로 하여금 사악이 충천하게 만들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이스라엘은 언약궤만 있으면 아까 본 것처럼 언약궤만 있으면 우리가 승리는 따낸 걸로 그렇게 생각을 했었어요. 사무엘상4장에서.
자, 사무엘상 6장을 19절, 누가 한번 읽어 봐 주시기 바랍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고로 그들을 치사 십인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륙하셨으므로 백성이 애곡하였더라”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이걸 보면서 아 그거 뭐 상자 하나 봤다고 그 사람을 죽이느냐 하는데 지금 그거는 아까 첫째 시간을 상기해 보세요.
출애굽 사건에서 이미 그들은 죽은 자예요. 살아 있는 것은 여호와 이름만 살아 있다, 이 말이지요. 그런 특수한 관계가 유지되지 아니하면 세상 인간들의 질서 속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어요. 인간들의 이념의 힘의 결성체에서 승리할 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언약궤 의미가 뭐냐 하면 언약궤에다가 이스라엘을 잡아놓고 못으로 박아버린 거예요. 못으로. 내 이름에서 튀어나오기만 해 봐라. 못으로 박는 그러한 조치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십자가를 믿는다는 말은 십자가를 이렇게 바라보고 “아, 주님 너무 안 됐다. 고통스럽다. 나도 주님처럼 이렇게 생활해야지...” 이게 아니고 “이리 와, 이리 와” 십자가 뚜껑 열고 거기다가 집어넣고 십자가로 못 박아 버린 거예요. 주님의 못자국이 우리의 못자국으로 같이 연동되게 만들어 버렸어요. 네가 어딜 가도 십자가 바깥으로 못 나가는 사람이 될 때, 그게 바로 언약궤 정신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언약궤를 이용하면 승리를 일으킨다. 이거는 주도권을 누구한테 가져와요? 자기들이 인간 이스라엘이 쥐려고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거예요. 사무엘상의 핵심은 주도권은 여호와 이름에 있고, 그 있다는 증거가 언약궤에 있는 거예요. 언약궤. 나중에 사무엘하에 들어가게 되면 다윗이 제일 먼저 해야 될 일이 뭐냐 하면 바로 언약궤를 하나님이 전쟁을 마감했던 그 헤브론 나중에 이스라엘까지 예루살렘까지 언약궤를 모셔 오는 겁니다.
이 나라의 주도권은 인간의 왕이 아닙니다. 나도 아닙니다. 보이지 않지만 계시는 우리 하나님이 왕이 되시고 우리는 철저한 하나님의 충실한 백성일 뿐입니다. 이게 보이지 않는 왕국이지요. 보이지 않다 뿐이지 우리의 소속은 천국에 속합니다.
주일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천국 가려면 사람이 깊어져야 되는 게 아니고 달라져야 된다는 거예요. 달라져야 된다. 왜냐하면 천국은 주님의 조치에서 들어오게 되고 내가 예상한 조치는 문이 열리지를 않아요. 주님의 조치에서 한번 들어가 버리면 나가고 싶어도 지옥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어요. 들어오면 못 나오고 들어가려 하면 안 넣어주고 이게 천국이에요.
그러한 하나님의 취지를 늘 납득을 해야 되고 수고를 해야 되고 찬양을 해 줘야 돼요. 잘하셨습니다. 일방적으로 그 천국에 일방적으로 넣어 주신 것에 대해서 늘 고맙게 생각하고 감사합니다. 그리고 한번 들어가면 못 나오는 데서 더욱더 감사합니다. 그것이 유지돼야 되지요.
그 유지되는 방법은 뭐냐, 바로 악신 들린 자. 이 뱀의 질서 체제, 이 세상 속에다가 우리를 집어넣음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천국의 백성 됨의 가치를 빛나게 만들어요. 인간의 행함으로 힘을 모으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그것과 너무나 차이 나는 모습으로 오히려 내가 뭘 해도 나는 죄뿐인 것을 그것도 아주 즐겁게 고맙게 여기면서 살아가는 그 모습 따져 보면 마음을 이렇게 비워 버리면 그렇게 어렵지 않아요.
뭘 해도 죄가 되는 그만큼 홀가분한 게 없습니다. 그것부터 홀가분한 게 없어요. 그럼 목사님 뭘 해야 되고 뭘 안 해야 됩니까? 법이 들어가면 그것은 바로 내가 잠자는 나의 악마성 나의 자기의 의가 돋보이는 계기가 돼요. 내가 스스로 승자가 되려는 것은 주도권이 주님한테 있는 게 아니고 어느새 그거는 내란의 수괴가 되어 있습니다. 그건 안 돼요. 그건 내란죄에 해당되는 겁니다. 그러한 반항심을 사무엘상을 통해서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우리의 육신에 갖고 있는 면면을 그대로 지금 미리 앞당겨 다 보여 주고 있는 겁니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어려운 대목에 이제 접어들었어요. 뭐가 어려우냐 하면 그 사울에서 다윗으로 바뀌는 그 과정이 어렵고, 거기 그 과정 속에서 사무엘 선지자 역할이 참으로 초라하고 굉장히 소극적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냥 소극적이에요. 예를 들어서 사무엘상 16장에 보면 그 네가 기름을 뿌리를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로 보내리니 그가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내가 예상했다. 뽑았다. 채택했다 할 때 2절을 한번 보세요. 사무엘이 가로되 내가 어찌 갈 수 있습니까? 사울이 들으면 나를 죽이리다. 역시 왕 값과 선지자 값이 다르잖아요. 제목이 달라요. 제목감이 아닌 거예요. 사무엘은.
이게 왜 그러느냐면 사무엘이 못났다가 아니라 그 시대가 어느새 왕 시대로 접어들었기 때문에 사무엘한테는 그는 왕의 권위 같은 것이 아직까지는 충족되지 않은 채워지지 않은 상태예요. 훈계는 하고 잘못은 하되 왕감은 아니다 말이지요. 왕쨉은 아니다 말이지요. 질서에 대해서, 권력에 대해서 그렇게 무서워하는 거예요. 그러면 왕 제목은 누구한테 넘어가는가, 이게 바로 성경에서 신나는 거예요. 어디로 넘어가는가, ‘다윗에게 넘어간다.’ 이렇게 생각하겠지요. 아닙니다.
이새에게 넘어가요. 이새. 자, 이사야 한번 봅시다. 이사야 11장1절, “사무엘의 한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이렇게 되어 있습니까?” 아니지요.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라고 되어있어요. 이새. 여기 사무엘상 16장에서 이새가 아버지가 한 게 아무것도 없어요. 따라서 이새라는 존재는 어떤 존재냐, 있어도 없는 거와 마찬가지 존재. 그래서 다윗의 뿌리가 이새가 적당한 거예요. 왜? 별 볼 일 없으니까. 별 볼 일 없으니까 하나님 왕 값에 딱 적합한 거예요. 대단한 가문이 아니었다.
마치 없는 것 같은 가문을 도입해서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리는 바로 아브라함의 언약 정신을 계속 약속의 전개를 그런 식으로 사무엘상에도 그 요소가 이어져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만약에 주님이 여러분 멱살을 붙들고 와서 “너 아버지 뭐 하시노?” 하면 뭐로 해야 돼요? “우리 아버지 아무것도 아닌데요.” “OK.” “뭐 우리 집안은 사대째 목사 집안이고...” 이리 나오면 땡! 탈락이에요. 뭐 그 때문에 탈락되는 건 아니겠지만. “너 아버지 뭐 하시노?” “우리 아버지 그냥 죄인인데요.” “그럼 너는 뭔데?” “죄인의 아들이지요. 뭐.”
그냥 이새는 죄인이에요. 대단한 직분 같은 것도 없습니다. 그냥 목축하는 사람이에요. 그냥 목축하는 사람. 기드온은 뭐 했던 사람입니까? 기드온은 그냥 농사짓고 작은 방앗간 하나 있는 거예요. 그뿐이에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바로 이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우리 인간들 보기에 인간의 이념제의 이념들의 질서의 전쟁터에서 예수라는 존재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아무 별 볼 일 없는 존재예요.
인간과 인간의 존재에서 예수님이 끼어들 인간들이 필요할 이유가 없어요. 인간 대 인간의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주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싸웠지만, 예수님 죽이는 데서는 한 마음을 냈어요. 한목소리를 냈다구요. 공동에 적이 생기니까 그들은 갑자기 원수 된 걸 잠시 휴전하고 다 끝나고 난 뒤 다시 싸우고 그랬어요.
그만큼 인간은 주도권이 나한테 있는 것을 절대로 빼앗기지 않겠다는 거예요. 그 정신이 사울 왕이 끝까지 엔돌의 그 신접한 여인한테 갈 때까지 그 이후로도 계속 돼요. 나는 누가 뭐라도 사무엘이 뭐라고 해도, 하나님이 뭐라고 해도 나는 한번 잡은 권력을 나는 놓을 마음이 없다. 이미 권력의 맛을 본 겁니다. 뭐 다들 대통령 안 해봤기 때문에 실감이 안 나겠지만, 권력이라는 것은 그것처럼 자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지를 않아요.
내가 내 권력을 소유한 이것으로 인하여 그 뜻도 내가 새로 정립됩니다. 그래서 한번 부자가 돼 놓으면 그다음부터는 씀씀이가 달라요. 여러분 그저 국민학교 때 동창생 가운데서 씀씀이 좀 되고 도시락에 소세지 반찬 올라온 거 있지요. 그 애들 나중에 시집가도 돈 쓰는 게 폼이 달라요. 옛날 과수원집 딸이라든지 방앗간집, 술도가집 딸은 돈 쓰는 게 달랐어요. 그들은 그 지방 유지가 그런 거 하거든요. 좀생이 아니에요. 막 써요. 막 써. 굶어 죽어도 막 써요. 통이 크다. 한번 권력은 맛을 들여보면 그 맛이 스며들었어요. 완전히.
이걸 푹 고왔다. 이걸 권력이 푹 고와가지고 어디를 씹어도 그 권력의 맛이 씹히는 거예요. 그 맛이. 돈 막 쓰던 폼이 나와요. 폼이. 집안 내력이에요. 이새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닌 자를 바로 왕의 태어나는 하나의 고향으로 만드는 거예요. 하나의 토대로 만드는 거예요. 육신의 토대로. 아무것도 아닌 자.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이 땅에 올 때는 어디서 온다? 아무것도 아닌 자에요. 베들레헴이 뭐? 거기 뭔데? 고향이 베들레헴. 적어도 예루살렘에서 태어나야지. 베들레헴이 거기 뭐야? 이런 식이에요. 촌사람이 무슨 왕이 되겠어? 이게 그 당시 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얕잡아봤던 이유입니다.
성장 과정도 갈릴리고. “말씀이 없는 어둠의 자식들이 뭐 자식에서 그 배워봐야 뭘 얼마나 배웠겠어?” 이래 나오는 거예요. 의도적이었어요. 소위 배웠다, 안다, 하나님에 가까이 접근했다는 것들이 어디 있느냐 전부 다 예루살렘 수도에 서울에 다 있는 거예요. 그래야 투쟁 가운데서 힘이 양성화되니까. 힘이 자극을 받아서 점점 더 저력이 생기니까. 애 공부시키려면 강남에 보내야 되지. 학원도 거기에 안 많습니까.
자, 16장에 발발 떨면서 몰래 기름을 주고 지는 후딱 빠지려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목감이 아니지요. 사무엘은 큰 손을 치는 거 같은데 이상하게 아직도 어디에? 자기 목숨에 연연하고 있다는 것이 있지요. 왜 사무엘이 그렇게 약한 모습을 보입니까? 하나님께서 사무엘이 왕이 아니기 때문에 그랬어요. 그런데 그 당시에 이스라엘 장로들은 사무엘을 차기의 왕으로 삼으면 어떻겠는가 했어요. 엘리 다음에. 그 엘리 아들들이 아버지의 명예를 먹칠을 하고 있드라 말이지요. 그러니까 아이고 왕이라 하는 것은 세습제기 때문에 아버지는 진짜인데 자식 보니까 희망 없다. 안 되겠다. 이리 된 겁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로 하여금 다윗에게 하는데 다윗 역시 아무것도 없는 데서 왕이 되었어요. 아버지 이새가 아들 일곱 명 할 때 그때 다윗은 막내아들 다윗은 부르지 않고 그 현장이 없었어요. 막내는 저 양이나 키우라고 보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기름 주려 하는데 하나님과 사무엘의 관계에서 하나님께서 저항하시는 거예요. “걔 아니다.” “아이고 큰아들 인물 좋은데...” “나는 인물과 신장보고 하지는 않는다.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7절,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이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로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본다.” 이렇게 돼 있지요.
자,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뭐 선 볼 때나 또는 교회 목회자 볼 때나 또 후계자 뽑을 때 여러분 뭘 보고 합니까? 보통 교회에서 뭐라 해요? “여러분, 우리가 후임자 이제 선임자 나이 많아서 은퇴하고 후임자 뽑는데 여러분 이럴수록 우리 교회의 장래를 위해서 열심히 기도해서 하나님의 응답받는 목회자가 강단에 서도록 다 같이 열심히 기도합시다.” 그러면서 꼭 하는 소리가 하나님은 마음을 보는 게 아니고, 외모를 보는 게 아니고 중심을 봅니다.
자, 하나님께서 중심을 본다는 말은 이런 뜻이에요. 그 사람의 미래는 선택하신 하나님의 본마음이 담길 자예요. 하나님의 선택하신 본마음이 담기는 자. 그러니 이거는 뭡니까? 예수님의 고난의 길을 가야 될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뽑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이 인간의 사람을 뽑을 때는 뭡니까? 없는 나의 세력권의 안정과 확장에 보탬이 되는 인물 이런 사람을 뽑지요. 사람을 뽑을 때. “네 남자 친구 한번 데려와 봐라.” “네 여자 친구 한번 데려와 봐라.” 그 자녀한테 그렇게 이야기할 때 엄마한테 한번 소개해 봐라. “너 누구하고 사귀는지?” 이렇게 할 때. 뭐라 합니까?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는 사람을 뽑습니까? 이 집안 말아먹을 인간인지, 이 집안을 크게 부흥시킬, 크게 키울 인물인지, 그거 보고 뽑잖아요.
그러니까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인간의 한번 들어온 욕망은 절대로 쇠하여지는 법이 없고 티를 내게 돼 있어요. 내가 말한 게 아니고 내 안에 욕망이 말을 하지요. 그래서 다윗이 가는 곳마다 어디에 가더라도 늘 죽음이 따라다녔어요. 그래서 그게 새로운 건데, 하나님의 택한 왕 기름 부은 자 다윗의 존재와 그의 활동을 인하여 새삼스럽게 이스라엘 전체가 이미 죽어 저주받은 상황인 것을 새로운 소년 다윗을 통해서 까발리는 기능을 하나님께서는 차기 왕으로 사용하시는 겁니다. 오늘날 성도를 그렇게 사용해요.
16장 16절에 “원하건대 우리 주께서는 당신 앞에서 모시는 신하들에게 명령하여 수금을 잘 타는 사람을 구하게 하소서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왕에게 이를 때에 그가 손으로 타면 왕이 나으시리이다 하는지라” 드디어 여기서 다윗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분위기를 뭐로 만드느냐 하면 자연 세계에서 영적 세계로 전환 시킵니다.
악신, 성신, 이건 뭡니까? 이거는 자연 세계에 관한 문제가 아니지요. 자연 세계에서 인간이 익히 아는 질서가 아니고, 자연 세계에 가려워진 그 배후에 있는 영적 질서에 관한 이야기를 다윗을 등장시켜서 이것이 이 안에 자연 세계 안에 영적 세계가 스며들도록, 파급되도록 그렇게 조치를 한 겁니다.
18절에 “소년 중 한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을 본즉 수금을 탈 줄 알고 용기와 무용과 구변이 있는 준수한 자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더이다 하더라” 라고 해서 뒤에 보면 23절, “하나님의 부르신 악신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취하여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신은 그에게서 떠나더라” 라고 되어있어요. 그렇면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사울은 악신에게 소속되어 있고 성신은 다윗은 성신에게 소속이 돼 있지요. 그렇게 악신이 사울에게 다윗에 물러가게 되면 사울의 입장은 위치는 이미 다윗의 아래에 있어요. 이미 전임자가 되어버린 거예요.
전임자인데, 왕 본인 아직 사표 내지 않았어요. 사표 내지 않았어요. 그게 뭐냐하면 이스라엘이 통째로 다른 새로운 이스라엘로 바꾸어지는 계기가 되는 겁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할 때 부활은 뭐냐, 부활은 무엇이 부활이냐,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이 부활이다. 이렇게 돼 버리면 죽었다가 살아나게 되면요 방향이 죽었다가 살아났으니까 다시 살아 있는 인간이 죽었는데 그 죽었다가 살아났다 그럼 살아난 것은 다시 어디로 환원되는 겁니까? 살아 있을 때 돌아가기 때문에 이거는 부활이 아니에요.
이건 부활이 아니고 소생하는 거죠. 인간은 소생이고 부활이고 내게 유리하면 그만하지 그 차이가 뭐가 중요한 일이냐? 이리 나와요. 그럼 부활은 뭐냐 부활은 죽었다가 살아난 게 아니고 새로움이에요. ‘새로움’ 무엇과? 전에 내가 죽기 전에 나와 전혀 다른 나가 되어 버린 겁니다. 이름이 바뀌었으니까.
내가 자연 세계 육신에 살다가 이제는 성신, 성령, 성령의 새 사람 된 거죠. 내가 새사람 됐다는 말은 내게 능력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그 부활의 질서 속에 일부다. 부활의 질서 세계 속에 일부다. 이것을 주일 낮 설교에 제가 이렇게 표현했지요. 예수님의 촉수다. 예수님의 촉수. 문어 여러분 문어 잡솨봤습니까. 촉수 있지요. 몸통 따로 해서 몸통에서 나온 발판 같은 그런 거. 분명히 우리가 움직이지만 사실은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움직이도록 조치한 그러한 주님의 지체. 또는 기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말하는 몸의 한 일부 부분이었다.
이게 바로 성도를 표현할 때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누구다, 가 아니라 우리 몸통 되시는 주님은 이런 분이다, 를 드러내는 그 같이 한 통 몸에 붙어 있는 빨판 정도. 그 정도만 해도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그렇다면 다윗 속에 누가 있느냐를 물을 때, 질문에 다윗 속에 누가 있는가? 그것은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가면서 그 사울의 세계하고 다윗의 세계가 질서가 서로 다른 질서 속에서 틈새 사이에서 뭐가 나오겠어요? 하나님의 언약이 나오지요.
그 쏟아진 언약이 된 책이 뭐냐 시편입니다. 시편. 그러니까 시편에 보면 여러분 잘 아는 시편이 뭐냐 하면 여호와 시편 23편이지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 이미 주도권이 누구한테 가 있어요? 목자한테 완전히 주도권이 가 있고 양은 너무나 피동적이고 수동적이에요. 목자의 계획에 계획을 드러내기 위해서 양이 쪼로록 쪼로록 어딜 가도 따라갈 수밖에 없어요.
양은 갈 길을 압니까? 모릅니까? 모르지요. 그래서 성도는 계획을 세우면 안 된다니까요. 계획을 세우면 그 계획이 자기를 망쳐요. 막 머리 감싸고 막 그 저 머리 아플 때 뭡니까? 코로나 때 많이 먹는 타이레놀. 머리 아픈데 먹는 아스피린 계통 있잖아요. 그거 먹고 이렇게 골치 아퍼 고민이다. 절망이야. 하잖아요. 우리는 절망할 쨉이 못 됩니다. 우리가 절망해요? 주님은 예수님은 아버지 만나서 복종함으로 일이 끝났는데. 저 저 대리점에서 왜 절망합니까?
본점에서 일이 끝났는데. 대리점에서 단독 계획을 지가 왜 세워요? 지 맘대로 왜 계획을 세웁니까? 이제부터 난방 팔아야지. 난방 파는 계획하고 뭐 주의 영광하고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그냥 막 난방 팔게 하셨다. 이렇게 건너가야지요.
아까 했지만,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사이에 그 핍박을 통해서 뭐가 나온다? 약속이 나오면 그 약속을 우리가 믿으라, 가 아니라 이미 그 질서의 일부로서 우리가 포함돼 있는 그런 여유로움. 그 여유로움 어디서 나오는가, 주도권이 나한테 있지 않다는 거예요. 사나 죽으나 누구 것이에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지요. 주의 것이다.
이걸 이제 지식으로 알게 되면 주께서 실제로 이제 악신을 보내가지고 악신 걸린 자를 보내가지고 이게 지식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시편에서 하나님이 어찌 나를 버리시나이니까. 그 시편 22편에 나오는 이야기들이 실제로 우리의 삶을 미리 앞서 보여 준 거예요.
자, 이거 한번 봅시다. 복사한 거예요. <다윗의 피난처> 제가 한번 쭉 읽어 보겠습니다. 다윗의 피난처 사울 왕은 다윗을 추격하고 그 덕에 다윗은 이스라엘 땅을 17군데 옮겨 다닌 다윗은 기브아의 사울에게서 도망쳤다. 사무엘상 19장 11절 12절. 첫 번째 라마 나욧에 있는 사무엘을 찾아갔고 다윗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은 다 찾아요.
그다음에 사울은 라마 나욧에 있는 다윗을 쫓아갔으며, 쫓겨가니까 자기가 의지하는 사무엘보다 누가 더 셉니까? 사울이 더 세잖아요. 아예 죽겠다 싶어서 기브아에 있는 요나단에 가요. 왜? 요나단에 왜 찾아갑니까? 둘이 죽고 못 살거든요. 친구 아이가 이래 된 거예요. 요나단이 일종에 아버지를 배신한 거죠. 아무리 봐도 다윗을 붙드는 게 저한테는 낫다 싶어서. 요나단에 갔는데 요나단은 무슨 힘이 있습니까? 사울에게 힘이 있지요. 요나단이 다윗에게 그를 죽이려는 사울의 결심을 알려주자 다윗은 놋땅에 있는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피신을 해요.
자, 보세요. 다윗이 도망가면서 사무엘에게 갔다가 실패했지요. 친구한테 갔는데 실패했지요. 아히멜렉 제사장에게 갔을 때, 음식을 먹고, 골리앗을 칼을 얻고 다윗은 블레셋 성읍인 가드에 피난처를 구했다. 그 때문에 누가 죽습니까? 아히멜렉이 죽어요. 하여튼 다윗 도와주면 다 죽인다. 이리 했거든요. 그러니까 아까 말씀대로 다윗이 가는 곳마다 죽음의 깊이가 점점 더 강렬하게 소용돌이 치고 있는 겁니다. 잠자는 잔잔한 죽음의 새 힘이 다윗을 감아 이게 활활 아주 미친 듯이 죽음의 세계가 악신의 세계가 활개를 치는 겁니다. 꼭 예수님 같아요.
다섯 번째 가드 현재 가자 지역으로 피난처 구했고, 그 뒤에 압둘람 동굴에 본거지를 마련했고, 그 다윗의 형제와 그 아버지의 온 집과 환난당한 자 빚진 자 마음을 원하는 자 다윗에 모여 드는데 그때 400명이었습니다. 다윗이 자기 부모가 해를 입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해서 모압으로 땅에 가서 부모의 신변을 부탁했습니다. 같이 들어가면 자기만 다치면 되지 부모까지 죽는 걸 겁내서 모압한테 부탁하고 자기는 요새를 만들어 숨었습니다.
얼마 뒤에 다윗은 헤렛 수풀(삼상22:5)로 갔다가 여덟 번째, 그일라 지경을 블레셋의 공격에서 구출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우고(삼상23:1~12) 숨어 있으면서도 지 할 일을 또 왕으로서 백성들 구한다고요.
그 후에 다윗은 사울 왕이 그일라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600명으로 늘어난 자기 군대와 함께 십 광야로 이동한다.(삼상23:14~15) 십 사람들이 다윗을 사울의 손에 넘기자, 이 사람들이 배신한 거예요. 다윗과 그 부하들은 열 번째 마온 광야에 거주했고(삼상23:25) 거기서 사울에게 붙잡힐 뻔했다가 가까스로 위기를 면한다.
열한 번째, 엔게디의 요새(삼상23:29~24:22)로, 지금은 성지순례하면 반드시 가야될 곳이지요. 피신한 다윗은 열 두 번째, 바란 광야로 갔다(삼상25:1)가 그 후에 열 세 번째, 갈멜로 갔고(삼상25:2), 그 다음에 열 네 번째, 십 광야로(삼상27:2~3), 거기서 열 다섯 번째, 가드 왕 아기스에게 망명하지요. 미친척하면서. “나, 맛 갔어요.” 위장해서 그와 동거하고(삼상27:2~3) 열 여섯 번째, 시글락(삼상27:6) 블레셋 땅에 가서 있다가 마침내 이스라엘 땅 열 일곱 번째, 헤브론(삼하2:1~4)에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면서, 어느 동네를 돌아다녔는가, 블레셋 동네를 다 돌아다녔어요.
그러니까 다윗에게 적이 하나님의 원수가 이스라엘이 원수가 된 겁니다. 그리고 협조는 누구한테 협조를 얻었어요? 블레셋이 숨겨준 협조를 얻게 되었어요. 이것은 언약궤가 이스라엘을 떠나서 그 블레셋에 언약궤가 있으면서 도로 블레셋이 언약궤를 토해냈지요.
아까 보셨잖아요. 토해 낼 때, 하나님의 출애굽 정신은 항상 기존의 세상 정치성에서부터 벗어나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드는데 반드시 기존의 세상 정치가 꼭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왜냐하면 백성들 출신 자체가 세상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세상에서 태어났잖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태어난 인간이 지가 알아서 하나님 나라에 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그 한계를 사울 왕이 보여줍니다.
사울 왕은 스스로의 자기의 주도권을 포기할 생각이 없습니다. 계속 왕이고 싶어 하고 이미 자기 소유가 이스라엘이 자기 소유니까 죽을 때까지 이스라엘을 자기가 지켜줘야 될 책임이 있다고 여기고, 엔돌의 신접한 여인한테 가서 이 나라, 사무엘이 없는 이 나라를 내가 어떻게 지혜롭게 하게 되면 다시 이 나라를 블레셋으로부터 구할 수 있느냐를 물어요.
자, 사울에게 적은 뭡니까? 블레셋이지요. 다윗에게 적은 블레셋을 적으로 삼는 이스라엘이 다윗의 적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날 성도는 누가 적이 되는 겁니까? 성도의 적은, 응용문제 치고 어렵지요. 객관식 못해요. 주관식해야 돼요.
성도의 적은 이 세상에서 천국을 또는 천국 같은 나라 천국 같은 교회를 하겠다는 그들이 바로 성도의 적입니다. 지 몸 하나 자기가 근사하게 멋있게 포장할 수 있는 그런 것을 찾는 자가, 찾는 자로부터 성도는 핍박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개뿔도 아무것도 없어도 자기 신분에 변화가 없기 때문에. 이게 성령의 기름 부음이에요. 성령의 기름 부음이 아까 봤지요. <다윗의 피난처> 돌아다니면서 뭐가 터져 나왔지요? 시편이 나오지요. 시편.
그러니까 성경 공부한다는 것이 자신의 죄를 아는 기회로 삼으면 괜찮아요. 그런데 내가 편안한 신앙생활 하겠다고 한다면 그 자체가 하나님의 적이 되는 거예요. 성경을 모를 때보다 복을 더 받고, 성경을 모를 때보다 내가 하는 일이 내 계획이 잘 풀리기를 원해서 성경공부를 한다면 이것이 바로 성도의 적의 한계성을 그대로 답습하게 되는 겁니다.
성경 공부라 하는 것은 주께서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께서 허락하신 거예요. 어떻게? 모든 고민과 걱정.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감사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그토록 죄인인가, 이걸 몰라서 그래요. 내가 죄인인가. 자기가 괜찮은 존재라는 인식을 늘 우리가 이미 갖고 있는 욕망으로 인하여 이걸 지울 길이 없어요. 나 잘났어. 나 잘났어. 나, 이런 어려운 일은 나한테 생기면 안 돼. 왜? 나는 잘 났기 때문에. 이게 자기 의거든요. 자기 의. 이 자기 의에 가득 찬 인간이 거기다가 기도하고 구제하고 성경 공부한다고 이걸 포기할 것 같아요? 포기 안 합니다.
그러니까 사울이 등장한 이유는 사울이 그렇게 다윗을 미워하고 그렇게 해도 결국은 사울은 자기로부터 벗어나지를 못했던 거예요. 악신이 꽉 쥐고 있으니까. 뭐 전도한다고 될 문제도 아니고. 결국은 사무엘상에서 놀라운 점은 사울 = 신접한 여인, 다시 말해서 신접한 여인에 굴복당한 사울의 마음 정신 상태. 노골화 된 악신으로부터 굴복당한 사울. 악신에게 노골화된 사울 안에 뭐가 있다? 이스라엘 전체. 이스라엘의 운명은 사울과 더불어 망한다. 망해버렸다. 이 말이지요.
사울은 무당을 찾지 말라는 신명기 말씀을 다 알고 있어요. 다 알고 있으면 뭐합니까? 중요한 것은 말씀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답답하다는 게 중요한 거예요. 1순위가 내 답답한 거고 내 고통과 고민이 답답한 거예요.
그 원인은 한 가지에요. 내 속에 너무도 많아, 내 속에 욕망. 내 속에 욕심, 탐심이 너무도 많아. 마치 가시나무새 같아. 이 세상 살아가는 것이 가시나무 숲속을 살아가는 것 같아요. 요것 챙겨야 되고, 저 것 챙겨야 되고, 이거 신경 쓰고, 저거 신경 쓰고, 경기 나요. 심장 내려앉아요. 깜짝 깜짝 놀라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요. 전화 오면 “무슨 일이 있어요?” 불안증세. 극심한 불안증세. 불안정성.
이거 다 뭡니까? 내가 욕망을 못 다스리고 욕망이 나를 다스리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에요. 그러면 해결점은 뭐냐, 욕망과 더불어 차라리 매일 죄인으로서 죽자. 왜? 아브라함 언약이 죽으면 뭡니까? 죽은데서 살아나는, 부활은 뭐라고 했습니까? 새로움이거든요. 내가 이토록 죄인인가를 새롭게 아는 복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남한테 안 끌리려고 남한테 멋있게 보이려고 완벽하게 법적으로 남한테 유리한 고지를 서려고 내가 뭐가 잘못됐느냐는 말을 습관적으로 내뱉는 저희들 이제는 반대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이렇게 기르시고 천국으로 데려가 주시는 이걸 생각할 때 모든 일에 감사, 감사만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