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강의

큰 단위

아빠와 함께 2024. 12. 22. 19:32

안양20241212a여호수아7장26절(큰 단위)-이 근호 목사

오늘은 <여호수아와 한국교회>하겠습니다. 86페이지에 “정복과 심판은 한 사건이다.” 심판 없이 정복이 이루지지 않으니까 한 사건이지요. 정복은 심판이며, 심판은 죄악된 하나님에 대한 보복이다.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호수아를 앞장세워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대해서 고발하려고 하시는 의도가 있습니다. 그냥 인간끼리 평화롭게 사는 것은 인간들 생각이고,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인간들끼리 평화롭게 사는 것을 그걸 진정한 평화라고 간주하지 않습니다. 살 자격도 없으면서 자기들끼리 산다는 것에 대해서 나는 방치하지 않겠다. 공격하겠다. 이렇게 하시는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인간과 인간끼리의 삶은, 인간과 인간끼리의 모임에서는 뭐가 나오느냐 하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비언약’이 나온다. 비언약. 언약이 아닌 것이 나오기 때문에 언약적 하나님께서는 이걸 방치하지 않고 고발하시는 거예요. 인간과 인간의 만남에서 언약이 안 나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요.

그래서 여호수아의 전체 내용은 비언약을 고발하고 심판하면서 그 심판하는 그것이 비언약에 대한 언약적 정복, 이렇게 표현해도 돼요. 비언약이 나온다. 따라서 비언약은 그냥 방치하지 않고 비언약에 대한 언약적 정복이다. 비언약적 정복이니까 그러니까 당하는 비언약 입장에서는 상당히 생뚱맞는 공격을 받고 있는 거예요.

인간과 인간끼리의 다툼이나 전쟁이라 하는 것은 언약을 배제하고 비언약과 비언약 사이의 다툼과 영토분쟁이다, 말이지요. 그리고 이것은 뭐냐 하면 무기와 권력과 숫자에 싸움. 그걸로 승자와 패자가 나뉘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언약이 쓱 개입돼 버리면 숫자나 사람의 권세, 무기력 이런 거와 상관없이 언약 있느냐, 없느냐로 승패가 결정 나버립니다.

이일을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앞장세워서 이걸 시범조로 가나안 땅에만 요러한 하나님의 본래의 자기의 추진하려는 본 마음을 드러냈어요. 가나안 땅에서만. 그래서 가나안 땅에서 이루어지는 여호와 전쟁은 이게 하나님의 계시에 속합니다.

계시에 속하는데, 그 전쟁에 참여하거나 바라보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시라 해서 위에서 신비롭게 오는 게 아니고, 실제로 피튀기는 전쟁광경이지요. 전쟁인데 그 전쟁 하나 하나가 하나님의 자신의 뜻을 이 지상에 비언약적 지상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계시로서 벌어지는 현상들이다. 이렇게 보면 됩니다.

그래서 이 여호수아라는 이 하나님의 계시의 실제의 현상을 우리가 외면하면 안되겠지요. 하나님의 계시를 알아야 되는데.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되는데. 그 뜻은 전쟁이라는 형태로서 이미 여호수아에게, 우리에게 나왔잖아요.

전쟁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전쟁은 아무도 좋아하지 않아요. 귀찮고, 힘들고, 목숨 잃을 수 있고, 평생 일구어낸 거 다 한꺼번에 다 날아갈 수 있고, 승리하면 승리한 대로 또 패자한테 미안스럽고. 만약에 군대에 참전해서 전쟁에 나섰다. 그래서 우리 편이 이겼다. 마냥 신나지는 않아요. 내 손에 죽었던 베트콩이 몇 명이냐, 베트콩의 불우한 가족들은 얼마나 가슴 아프겠는가, 지나 나나 똑같이 한 가장이고 식솔이 많은데 내 총에 맞아죽음으로서 그 집안이 아주 파탄 났다. 그런 것을 생각해보면 비록 전쟁하는 것은 나는 나쁜 짓은 아니지만, ‘아~ 이 모든 죄가 전쟁 자체에 죄가 있구나!’ 그런 식으로 은근슬쩍 자기변명은 하지만 마음은 이렇게 편치 못하지요. 온전한 평화가 될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이 전쟁에 대해서 여호수아에 대해서 두 가지 견해가 있을 수가 있지요. 하나는 뭐냐 하면 언약적으로 보는 견해가 있고, 하나는 언약적으로 보지 않고 이스라엘 민족이 자기 터잡고 자기 땅이 없는 이스라엘 민족이 악착스럽게 하나님이 앞장세워서 정복에 나서가지고 여호수아가 정복에 나서서 자기 부동산 하나 확보하려고 대대로 물려줄 터전 마련하려고 그토록 싸웠던 여호수아가 이렇게 설명하면 이건 안되지요. 안 됩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그 모든 인간이 언약, 비언약 관계없이 모든 인간이 해오고 있는 일이잖아요. 그게 무슨 하나님의 뜻입니까. 인간의 뜻이지요. 그래서 이 여호수아는 인간의 뜻을 하나님이 어떤 식으로 하나님의 뜻으로 이게 바뀔 수 있도록 어떤 조치를 하셨는가, 그게 여호수아의 핵심에 다가서는 방식입니다.

내가 사는 것이 나의 뜻인데, 여호수아 계시를 거치면서 내가 사는 것이 나의 뜻이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럼 고발당해요. 그럼 뭐냐, 나의 사는 것이 나쁘냐, 내가 살고자 살면 나쁜데 이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산다면 이건 하나님의 일이 되지요.

사람들의 약점은 여러 가지 있겠습니다만, 우리가 그점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적어볼게요. “왜 자꾸 하나님의 일을 생각한다 하면서도 어느 새 그게 나의 일로 돌아오느냐” 자꾸. 이게 한 두 번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관심사는 어느새 그게 나의 일로 되어버려요. 나의 일. 하나님의 일이 나의 일로 되어버리지요.

그 원인은 어제 수요설교에서 한 것처럼 이게 어디에 있느냐, 육신에 있어요. 육신에. 그래서 주님께서는 언약을 어디에 관여하겠습니까? 원인이 우리 육신에 있기 때문에 언약을 어디에 관여하겠어요? 우리 육신에 관여해서 우리의 일을 하나님의 계시로 언약적 일로 하나님이 벌리시는 일로, 전환하겠지요.

그럼 방금 제가 육신이라는 말을 했는데, 오늘의 용어는 같은 육신이지만 뜻을 바꾸겠습니다. 바꾸는데 뭘 바꾸느냐 하면 비언약세계니까, 정복당한 세계가 비언약세계니까, 우리는 자꾸 여호수아편에 서려고 하지 말고 정복당하는 억울하게 정복당하는 그것도 대대로 우리 땅이라 여겼던 그 땅을 난데없이 광야 애굽에서 나왔던 땅없는 민족에게 모조리 다 빼앗기는 그 안타까운 사연을 접한 그 당시의 이방민족의 심정으로 돌아가보자, 이 말입니다. 심정으로. 그들이 할 말이 많잖아요.

왜 성경은 도둑들의 편에 서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느냐, 이럴 수도 있잖아요. 그냥 니는 니대로 애굽에서 그냥 종노릇하던지 그냥 살아. 거기서 기어나오지 말고. 여기는 대대로 우리 땅이다. 와서 5년, 10년 기거한 게 아니에요. 대대로 그거는 열 족, 이방민족의 열족 땅이에요. 부동산 등기 떼어봐요. 누구 땅인지. 그들 땅이에요.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들 땅이에요. 자기 땅에 주인이 없는 게 아니라 주인이 있다 이 말이에요. 있는데, 밖에서 온 돌이 박힌 돌을 빼버리고 내 땅이다. 일방적으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다. 이리 밀고 나오니까, 니만 신 있나, 우리는 신 없나, 우리는 뭐 신을 동원할 빌미는 없는 줄 아느냐, 이리 나온다면 어떻습니까.

인간은 각자 자기 이야기할 말이 다 각자 지니고 살지요. 여덟살 때 일인데, 비가 주룩주룩 오더라. 비가 오는데 비 안맞기 위해서 어떤 빌딩 밑에 들어갔는데 길 건너에 저쪽에도 빌딩 밑에 비를 피해서 있더라 말이죠. 그걸 보고 모든 인간은 1인칭 다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거예요. 누가? 한강이. 한강 작가가. 노벨상 시상식에서 한. 4분짜리 연설에서. 인사말에서 그런 이야기했어요. 1인칭들의 다수의 1인칭. 그걸 단위적이라 해요. 의미는 하나가 고집하면 이건 국가적 폭력이 되니까.

민주주의는 뭐라고요? 민주주의는 1인칭 다수들의 의견을 다 옹호하고 그것을 될 수 있는대로 반영해서 누구도 누구의 주인이 될 수 없고 각자 스스로 주인이었던 자를 주인으로 대우하는 그러한 체제. 그게 민주주의 아닙니까. 그게 민주주의에요. 계엄은 왜 해가지고 하느냐, 우리는 민주주의 국가다. 헌법에 나온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공화국이다. 누구 하나 통치하는데 매여 사는 그러한 전제주의독점국가 아니다. 그렇게 이야기하거든요. 이것을 한마디로 세자로 하면 뭐라고요? 비. 언. 약. 이게 비언약.

그 비언약을 하나님이 그냥 방치한다고요? 아니지요. 고발하고 심판한다. 이게 하나님의 뜻이에요. “인간아! 니 본색 다 드러내. 내 하나님이 내 본색 드러내서 내가 쳐줄거야.” 이게 충돌이지요. 이게 전쟁입니다. 그 전쟁이 여호수아 전쟁이에요.

그러면 여호수아 전쟁, 하나님의 계시를 알기 위해서는 개개인의 가치와 의미를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고 어떤 수고를 하고 있는가를 모르면 안되겠지요. 그걸 파헤쳐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언약은 비언약을 노출시키면서 일한다는 그런 공식이 성립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 토착민들, 비언약사람들이 “나는 나대로 그냥 살테니까 당신이 하나님을 믿던, 여호와를 믿던, 나는 모르겠고 나는 나대로 살테니까 당신도 여호와 믿고 당신대로 그냥 조용하니 살아. 부탁한다. 정말. 우리 공격하지 말고” 라고 나왔을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뭐라고 대꾸해야 돼요. 뭐라고 답변해야 돼요? 그 비언약 사람들이 토착민들이 그런 이야기할 때 그게 얼마나 설득력있는 이야기입니까. 수많은 1인칭들이 있으니까. 니는 니 1인칭해. 나는 내 1인칭할테니까. 이게 얼마나 반박 여지가 없는 굉장히 합리적인 사고방식이에요.

여기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여호수아하고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뭐라고 반박하겠습니까? “니 눈에 이게 우리가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알아? 이게 바로 하나님의 일이다. 뭐 난들 어떻겠어? 난들 하고 싶어 하는 게 아니야.” 하나님의 일이 이거다. 이 말이에요. 하나님의 일이.

따라서 너희들이 그냥 조용하게 살아. 니는 니대로 살아. 이건 우리가 하나님을 대할 때 우리도 같은 마음이라. ‘하나님이여, 건드리지 말고 가만놔두세요. 그냥. 하나님 잘 섬길테니까 내가 노력하고 애쓴만큼 그냥 소박하게 평화롭게 살도록 그만 가만 좀 놔둬요.’ 이게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호와께 하고 싶은 이야기에요.

모세와 아론이 애굽에 찾아왔을 때, 그 모세와 아론에 대한 존재에 대해서 누가 반대의사를 드러냈습니까? 애굽사람들이에요? 아니지요. 그 히브리인들이 모세와 아론을 반대했어요. 좀 건드리지 말라고. 살던대로 살게 그냥 내버려두라고. 우리가 잘 사는데 여기에 갑자기 노선을 돌변하는 우리가 감당하기 곤란한 어떤 프로젝트를 제시하면 우리보고 뭐 어떡하라는 말이지요? 미리 대비한 것도, 예비한 것도 아니고. 준비한 것도 아니고. 이걸 가지고 하나님의 계엄령이라 해요.

아무 대책도 없는데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선언해가지고 “나가자.” 실패하면? 다 죽는다. 아니 실패해서 죽을 확률이 높은 그것을 내가 그걸 따를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성경에 보면서 여호수아라는 하나님의 계시. 다른 성경도 마찬가지지만. 우리가 성경을 얼마나 안일하게 보고 있는가, 왜 안일하게 볼 수밖에 없는가.

우리는 이미 비언약에 익숙해졌고, 그 비언약은 뭐냐 하면 이 단어로 대변하겠습니다. ‘개인적 감정.’ 수요일에는 육신이라고 했지만, 오늘은 달리 표현하겠습니다. 같은 뜻인데 달리 표현하겠습니다. ‘인간은 자기 감정에 울고 자기 감정에 웃고’ 그게 전부에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자기 감정에 대한 예민함.’ 자기 감정에 대한 예민함.

십자가 복음 듣고 십자가 앞에 내가 죄인맞습니다. 눈물 찔찔 흘리면서 맞습니다. 천하의 죄인은 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동서가 왔다. 동서가 “형님! 요번 김장 맛 없더라. 무슨 젓갈을 그리 많이 넣고, 고춧가루도 없이 허여이 이게 뭐야?” 훅 치고 들어왔을 때 조금 전까지 십자가 앞에 죄인 어디가 버리고. “내가 고춧가루 쳐라 했어? 안했어?” 갑자기 개인 대 개인의 투쟁. 비언약 대 비언약의 투쟁으로 졸지에 하나님의 일은 언젠가 어느 새 날아가 버리고 자기 감정에 충실하지요. 비언약에 충실하지요.

도대체 인간으로서는 자기 감정, 자기 예민함을 스스로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감정, 온난화 환경이 CO2가 빠지는 거예요. 그렇지 않아도 인간들은 감정적인 존재에 푹 젖어있거든요. 이걸 뭐냐 하면 이걸 저는 유니트 Unit, 단위. 어떤 단위? 소 단위. 인간은 어린애도 어른들이 보기에 마찬가지잖아요. 어린애가 고민하고 걱정하고 거기서 개인적인 감정을 터트리고 발산하고 스스로 참는 그 단위를 보세요. 그 유니트가 굉장히 좁아요. 굉장히 좁다고요. 아무것도 아닌 국제평화와 전혀 관계도 없는 것. 구슬따기 한 개 잃었다고 그것 때문에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지요. 운다는 것은 감정에 휩싸였다는 거예요. 그 감정의 눈물 나게 한 그 원인을 조사해 보면, 국제관계 우크라이나 전쟁하고 관계없어요. 시리아 함락하고 전혀 관계없습니다. 그 단위가 어떤 단위에요? 굉장히 좁혀진 단위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그들은 애굽에서 살았어요. 완전히 애굽사람이에요. 모든 감정적인 것이. 노예가 힘들지만 뭐 팔자인데 어쩔 수 없이 이 정도에요. 그냥. 힘든 외부환경에 대해서 내부적 감정으로 달래는데 발달된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출애굽 당시 전에 히브리인들이에요. 그 히브리인들을 주님께서는 유니트(Unit)가 작지 말고, 유니트가 큰 어느 정도로 커야 되느냐 하면 눈에 보이는 세상보다 더 크게 능가하는 초가하는 유니트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유월절 사건으로 나서기 시작하는 겁니다. 유월절 사건으로.

그 유월절 사건하면서 유월절 어린양의 취지를 계속 동행시킨다는 이야기는 지난번에 신명기와 한국교회 할 때 제가 했습니다. 어디가도 유월절의 취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신명기에서 신명기 요단강 모세가 안들어가면서 “너는 앞으로 가라. 나는 위로 갈게.” 이중성에요. 이중성. 수평적인 것과 수직성. 수직으로 가는 길과 수평으로 가는 길. 모세는 수직으로 바로 갔지요.

왜냐하면 시내산에서 받을 때 합류될 수 없는 천사의 나라에 감히 인간이라는 존재가 거기에 합류했다는 것은 모세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모세를 거룩한 나라에서 가도 모세가 죽지않고 보존할 수 있는 다른 조건이 모세와 더불어 동행했고 덧입혀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모세가 아니고, 모세언약입니다. 모세언약.

수직적으로 형성되어있는 하늘나라의 그 모든 질서가 언약이라는 이름으로 미리 단 한 명. 모세에게 그렇게 덧입힌 겁니다. 그래서 모세는 회막에서 단독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고 모세가 성신으로서 예언을 할 수 있었던 거예요. 그럴 때 다른 사람은 모세의 뜻에 의해서 그 족장들이 예언할 때, 사람들이 “아이, 족장들도 뭐 예언을 한다.” 하니까 모세가 하는 말이 “앞으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와같이 수직적으로 하나님의 성신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말할 수 있는 그 때가 되기를 하나님께서는 이미 계획잡고 있다.” 고 이야기해요. 우리 입에서 이중성이 나오는 거예요. 이중성.

수평적인 것은 단위가 개인에서 가정으로, 가정에서 사회로, 사회에서 국가로. 기껏 수평적이니까, 개인에서 가정으로, 가정에서 그 다음에 사회로 보다 넓은 사회로, 넓은 사회가 이렇게 추상화되면 국가라는 겁니다. 국가는 추상화 된 거예요. 추상화. 하나의 종교같은 거예요. 종교 같은 거. 국가는 눈에 안 보여요. 많은 사람들이 보이지 국가는 안 보여요. 촛불 들고 있는 사람들은 보이지 국가는 안 보인다고요. 민주주의 국가는 없어요. 그냥 사람들이 어떤 보이지 않는 이념을 외치는 거지, 그걸 이데오로기, 이념이라 하는데, 이념을 외치는 무리, 집단이 있을 뿐이지 민주주의라는 것은 없어요.

촛불을 백날 켜놔도 맞바람 휙 불면 다 꺼지지요. 그런데 개인에서 가정, 가정에서 사회, 넓은 사회 직장일수도 있고 넓은 사회 국가 이렇게 될 때 여기에 따라서 인간의 자기적인 개인 감정도 같이 여기에 덧붙여서 단위별로 감정을 건드릴 수 있는 영향이 보다 많이 받는 쪽으로 이게 진행되고 있어요.

어릴 때 구슬치기 때문에 감정 상했다면 가정에서 어려움이 있으면 그 때 자기 감정 추스림이 따로 정립이 되고, 나중에 학교, 직장 생활에서 또 감정 상하는 일이 있으면 감정 상해서 사표내고 때려치울까 아~ 사표낸다. 사직서. 일신상의 이유로 내려고 하는데 사장이 뭐 갖고 왔어? 나 줄거 있어? 네, 있습니다. 하고 내려고 하는데 이쪽 휴대폰이 울리면서 “여보, 나 임신했다!” 그 소리 듣고 다시 집어넣어요. 임신했다는 소리에 사직서 쏙 들어가고요, 사실은 기쁜소식 전하려고 사장님 찾아왔습니다. 이런 딴 소리를..., 그러니까 개인적 감정은 본인이 결정하는 게 아니고 피동적으로 주위환경에 따라서 살기 위해서 살아남아야 된다는 욕구 때문에 그 때마다 감정 조절해서 형성되는 거예요. 감정 조절로.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개인에서 가정으로 이걸 그림을 한번
보겠습니다. 자기만의 아주 자기만의 사소한 감정, 감정이 하나의 가정사 있을 때에 가정사 가정의 일 올 때에 예를 들어서 어린애는 아버지가 사업을 하던 부도가 나던 그건 관심이 없어요. 지 친구한테 가서 지 자랑거리 있으면 되는 것이지, 아버지가 사업이 뭔고 부도가 뭔지 그 개념조차도 파악 못하는데, 좀 커서 아버지가 사업이 어렵다. 부도 난다. 이렇게 하게 되면 그러면 이 집 이사 가야돼. 이 집 이사가면 지하방에 들어가야 돼. 이리 된다면. 여기에 있는 개인의 감정은 이 개인 감정, 단위1은 이 단위2에 의해서 핍박을 받게 됩니다. 감정을 억눌러야 돼요.

이게 어릴 때, 마음껏 이층집에서 놀았던 넓은 뜰에서 살았던 사업 번창해가지고 주위에 나가면 부자집 도련님이라는 소리를 듣던 그 감정은 내 심층에 아래쪽으로 이렇게 강제로 묻히게 돼요. 이게 없어지지 않아요. 없어지지 않고 위에 새로운 감정이 어려운 가정 환경에서 나는 공부를 계속 하냐 마냐 그럴수록 나는 공부를 잘해서 부모를 기쁘게 해주어야지하는 새로운 적응에 대한 감정이 이게 위에 겹쳐지는 거예요. 겹쳐지지요.

여기 개인적인 감정에서 언어 사용을 하잖아요. 가정에 풍지박산 났을 때 여기 필요한 내가 뭔가 기여를 해야 되고 보탬이 되어야 되려면 돈 벌 수 없지만 공부라도 열심히 해서 장학금을 타야겠다는 새로운 그 언어 사용이 나오겠지요. 언어 사용. 이 밑에 있는 언어사용을 1이라 하고 위에 언어사용을 2라 하면, 항상 2가 1을 압박하고 있는 입장에 있어요.

압박하고 있는 입장에서 이게 뭐로 나오냐 하면, 꿈으로 나와요. 꿈에서 뒤집어서 나와요. 꿈에서. 실컷 뭔가 엄마하고 이렇게 형하고 같이 풍족하게 살았던 그 때 그걸 보면서 막 웃었는데 깨보니 꿈이라. 현실은 햇빛이 안들어와요. 방역차가 위에서 막 놀아. 방역차가. 어떤 아저씨가 막 오줌 누고 그래요. 기생충에 보면.

그러나 꿈속 세계에서는 뭐냐, 내가 체험한 거예요. 그 때. 그러니까 이것을 경상도에서는 이런 억압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시견났다. 표준말로는 식견. 철이 났다. 까불지 않고 진중하니 어떤 어려움도 헤칠수 있는 자질이 향상되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힘든 것을 겪고 나니까. 하지만, 문제는 언약적으로 볼 때에, 이 문제는 이게 수직적입니까? 수평적입니까? 수평적. 비언약의 범위를 넓혀간다는 것뿐이에요. 나를 변화시키지는 않아요. 나를 변화시킨 것이 아니고 내가 세상 체험을 넓히면 넓힐수록 내가 도저히 양보하지 못할 그것은 계속 어느 누구한테도 들키지 않고 계속 지하 내 마음에 지하 깊은 곳에 내가 강제로 눌러야 돼요. 그냥 눌러야 된다고요. 참하라 언제는 우리 집안 필때면 옛날처럼 잘 엄마 아빠 모시고 잘 살 때 있을 것이다 계속 억누를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나중에 자기가 좀 살기 나아져서 좋은 집 사 가지고 가봤자 그때 엄마 아빠는 내 어릴 때 알든 나로 하여금 기쁘게 해준 엄마 아빠가 아니에요. 왜? 연세가 들었으니까 골골하니까. 약값이 계속 들어가니까. 요양병원에 내가 내 생활을 중단하고 찾아봐야 되니까. 귀찮아 죽겠어. 귀찮은 대상. 뭐 남은 유산에 있으면 좀 이렇게 보람 있는데 그것도 없고 돈 어디에 꼬라박았는지 다 꼬라박고 이제는 성공한 나한테 기대 산다. 짐이 되는 부모. 그럼 어떻게 됩니까. 영원한 나의 꿈은 계속해서 이게 현실화 되지 못하고 내가 그래서 억눌러서 현실에 대해서 나의 허탈감과
상실감만 제공될 뿐이에요. 상실감. 그래서 그 상실감, 허탈감, 이걸 그냥 빈자리로 놔두면 힘들지요. 어떻게 되는가, 메꾸어야 되지 않습니까.

메꾸는게 뭐냐 인간들의 사적인 분노가 감정이니까 기쁠 때를 생각하면 옛날 기쁘지 못한 데는 그 간격 틈을 분노로 퍼트린 거예요. 그 분노가 뭐냐 촛불집회에요. 정치. 뭐 정치에 대해서 뭐 말하고 이거 속에 내가 원하는 내가 지금 안돼서 내가 지금 화딱지 난다는 다른 표현이에요. 내 인생에 만족 못하는 다른 성질내고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의 언어는 항상 내 깊숙히 있는 내 상처를 트라우마를 안들키도록 계속 덮고 덮고 덮는 감추는 기능을 현재 요령껏 새로운 언어체계를 가지고 추가시키고 있으니까. 그러면 결국 수평적인 해결이 난다? 해결이 안 난다? 해결이 안나요. 그리고 계속해서 남에 대한 원망은 끊어지지 않아요. 남에게 원망한다는 것은 이상하게 내가 불안하다는 거예요. 해답이 없는 존재의 특징은 불안한 거예요. 정답이 없으니까. 그 정답을 미흡한 그것이 나를 해꼬지하지 않는가, 그래서 사람들이 수평적 자기 감정을 계속 유지하면서 성경 공부도 나온다고요.

왜 나오지요? 자기의 결핍을 혹시 메꿀 수 있을까 나오는데 복음은 어떻게 합니까? 복음은 수적이잖아요. 이중성. 수직적이고 언약을 이야기한다고요. 언약을 이야기하니까 내가 꼬기 꼬기 감추었던 “나는 내가 만든다.” 별표로 체크. 나는 내가 알아서 내가 만든다는 이 하나님 없이 내가 만든다는 본색이 복음이 들어오면 어떻게 됩니까? 이게 들키지요. 들키면 예씨~ 하고 안 나오지요. 안 나오는 거예요.

나는 행복하기를 원하는데 내 꿈이 채워지기를 원하는데 그 꿈을 채우기를 원하는 그것이 바로 지옥의 본성인 것을 복음은 다 죽이고 그냥 고발해 버립니다. 말씀으로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그게 됩니까. 그게 말이 안되지요. 그러면 여러분들 제가 이렇게 하면 그러면 이 유니트 단위를 아예 세상을 한꺼번에 막 다 탈피한 사람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이래 항의조로 할 거예요. 그럼 저는 “있습니다.” 라고 이야기하죠. “누굽니까?” 기생 라합이지요. 여호수아에 기생라합 나오잖아요.

기생라합이 이방여인이면서도 직업도 별로 좋지 않으면서도 그 사람의 세상 보는 유니트가 단위가 이 수평적 모든 세상 단위를 초월해 버렸어요. 다시 말해서 마지막에 개인, 가정. 사회, 더 넓은 사회, 국가, 다른 말로 하면 그 당시는 민족이지요. 민족. 이 전체를 뛰어넘는 시선으로 여호수아에게 이스라엘에게 일어난 상황을 보고 있었던 겁니다. 이것을 가지고 야고보서2장에서 이걸가지고 믿음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믿음.

자, 그러면 여기서 문제 하나 나갑니다. “기생 라합과 아브라함의 공통점은?” 이 문제는 아무도 못 맞힐 거 같아. 수능에 나와서 아무도 못 맞힐 거 같아. 킬라 문항이라. 기생 라합과 아브라함의 공통점은, 같은 점은 무감정적이라는 사실. 무감정적. 사실을 사실만 보고 끝. 그동안 내 내부나 외부 그동안 내 인생의 깊숙히 자리잡은 이 모든 것을 일거에 주님의 사건에 의해서 그 앞에 자진해서 미리 항복을 선행해 버린 거예요. 항복을.

나는 독자 이삭을 사랑한다 그런데 일거에 하나님은 그 사적인 감정, 가정 유니트 단위를 뛰어넘는 지시를 해버려요. 네 이삭을 잡아라. 잡아 죽여라. 제가 왜 갑자기 난데없이 기생 라합과 아브라함을 이렇게 그렇게 반칙처럼 뜬금없이 연결시킵니까? 이리 하신다면 그건 제가 연결한 게 아니고 야고보서 2장이 그걸 언급을 해요. 행함 없는 믿음은 거짓 믿음이다, 하면서 여기 예를 두 사람 들잖아요.

행함 없는 믿음은 그런 것은 귀신들도 믿는 믿음이라 해요. 행함 없는 믿음은 귀신들도 믿음이다. 그 행함 없는 믿음은 그 자체로 죽은 것이라 야고보서 2장 1절 나오면서 그 예가 두 사람 예가 나오지요. 하나는 23절 아브라함 나오고 또 하나는 기생라합 나옵니다. 그러면 여기서 기생 라합과 아브라함의 공통점을 찾는 것은 마땅히 우리가 알아봐야 될 숙제지요. 마땅히. 시대를 초월해서. 전혀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하나는 이방 사람이고 하나는 하나님의 약속에 택한 민족인데 어떻게 그 택한 민족과 이방여인이 서로 공통점을 가질 수 있느냐, 여기 설명을 더 하면 이렇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받쳤는데, 그것이 아브라함 언약이라 했지요. 아까 잊어버렸습니까. 모세가 일개 죄인 주제에 감히 천사가 나팔 불고 있는 그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이 계시는 시내산 꼭대기에 올라가면서도 이게 생존해 있다는 것은 여기는 모세 곁에 뭐가 있기 때문에 모세를 뭘로 보호하기 때문에? 모세언약이 보호하는 거예요. 지금 새 언약이 여러분을 보호해 주는 겁니다.

무슨 복을 더 원하십니까. 보호해 줄 거 다 보호해 줬는데. 무슨 정권 바뀌기를 원하고 뭐 그런 걸 쓰잘데기 없는 그런데 왜 신경을 쓰십니까. 보호도 안 되는 걸. 그게 모세 언약이거든요. 그러면 아브라함 언약 이삭 바친다는 그것이 그게 모리아 산에서 그렇게 했다, 이 말이지요.

자, 그렇다면 이 아브라함 언약이 계속해서 수직적인 요소가 수평 인간 역사 역사는 수평에 계속 진척해요. 진척하면서 아브라함 언약이 이삭 언약, 이삭 언약이 야곱 언약, 야곱 언약으로 계속 밀어붙입니다. 야곱언약이 뭐 열두아들 나오고, 아들 가운데 레위지파에 모세 있으니까. 계속 나오는데 그 나오면서 그 출애굽기 3장 16절에서 그 모세가 하나님 떨기나무에서 대화하면서 모세가 물었죠.

“하나님 이름이 뭐라고 이야기해야 됩니까?” 그건 제가 주일 오후 설교 때 했어요. 지상에 내려온 존재는 반드시 이름을 지녀야 된다는 것. “그러면 지상에 오신 하나님은 어떤 이름으로 이게 불리어져야 그 본질과 일치됩니까?” 이런 뜻이에요. 그때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으로 왔다.

야곱의 언약으로 왔다는 것은 아까 제가 모세 이야기한 것처럼 죄인이 감히 천국에 천국들어가는 것은 이거는 안 돼요. 생명 나무에서 추방됐기 때문에 불가능한데 그 불가능한 것을 이루기 위해서 보호막이 필요한데. 그 보호막으로 오셨다는 겁니다. 그 보호막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보호막이 함축된 것이 뭐냐 바로 유월절 어린 양이지요. 유월절 어린양.

그러면 기생 라합은 뭐를 생각하겠습니까? 지금 여고성 우리 민족, 우리 성을 공격하는 저들은 도체 뭘 믿고 이렇게 이곳까지 와서 내가 사는 이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려고 하느냐, 기생라합이 수집한 정보에 의하면 그들은 애굽에서 나올 때 유월절 어린 양으로 해서 나왔다는 그러한 전설 같은 그런 이야기가 들려오는데 이게 단순히 전설이 아니고 실제로 그동안 광야 지나오면서 일어났던 무수한 전쟁을 통해서 이게 전설이 아니라 실제로 사건화 돼 있다는 거. 사건화 되어버렸다는 겁니다.

그냥 높다란 파도가 이렇게 밀려오는 거죠. 기생라합은 인간의 역사를 초월한 그 높은 파도에 자진해서 자기 몸을 맡기면서 그 언약 안에 자기가 쓱 들어오는 겁니다. 그 보호막 안에. “저도 보호해 주세요.” 저도 보호해 주세요.

이게 그렇게 되게 되면 여리고성에 대한 하나님의 이스라엘의 침략 행위는 어떻게 돼요? 정의가 돼요. 정당한 것이 되고, 의로운 것이 되고, 동시에 그 이스라엘을 반기지 않는 모든 것은 비언약이 되면서 불의가 되고, 죄악이 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너희들은 왜 기생라합처럼 되지 않느냐” 이것을 야고보서 2장에서 묻는 겁니다.

단위를 생각하는 감정 단위를 세상을 뛰어넘는 단위로, 단위에서 자신의 감정이 새롭게 정립돼야 되고 언어가 정립되어야 돼요. 세상을 뛰어넘는 시선에서 이 눈에 보이는 이 단위 눈에 보이는 세계 단위를 뛰어넘는 그 소식을 듣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내가 나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기생라합이 알고 있던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친히 새로운 나를 언약 안에서 만드신다.” 이리 되지요.

그러면 그런 차원에서 기생라합과 정반대되는 사람이 여호수아에 또 등장합니다. 들어는 봤나요? 이름이 아간. 아간이 생각하는 유니트. 감정의 유니트는 어떤 단위입니까? 여리고성 동일한 사건이 여리고성 정복 사건 동일한 여리고성 사건에서 기생라합은 이방인이지만 구원을 받았잖아요. 붉은 줄로. 그런데 그 여리고성 때문에 저주받은 자가 있지요. 돌무더기가 된 거예요. 그냥 광야에 흔한 돌. 그 속에 너는 돌멩이보다 더 못해. 그냥 묻히게 만든 사건. 아간. 아간은 뭐를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까? 그 여리고성에서 전리품 중에서 자기가 괜찮아 보이는 것을 몇가지 중요한 물건을 뚱 쳤지요. 훔쳤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아간의 입장을 생각해 봅시다. 이게 훔친 겁니까? 자기 노동의 대가를 얻은 겁니까? 뭐 아간이 자기가 모든 물건을 다 갖겠다고 욕심낸 거예요? 아니죠. 자기가 수고한만큼 어느 정도 챙겨도 나는 괜찮다, 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간의 문제점은 그 생각하는 유니트가 단위가 좁지요. 뭐냐 개인이 개인적인 거예요. 개인적. 개인적인 것 단위에서 본인이 벗어나지를 못해요. 그러니까 아무리 하나님의 언약이 하나님이 함께 있어도 그 개인이 살아 있는 한 그것은 바깥 단위를 그 개인은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아간이 잘못됐으면 아간의 한 개인이 잘못됐으면
그냥 아간의 나중에 “너 훔쳤지? 처벌한다.” 이리 될 문제를 하나님께서는 그다음에 그 정복할 아이성을 계속 정복해가니까 고발이니까. 아이성에 대해서 이스라엘이 패배하게 만들었던 거예요. 그 잘못한 사람은 쫒겨내고 좀 뽑아내고 나머지 사람은 그냥 정복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왜 그 진격을 멈추느냐, 10분 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안양20241212b여호수아7장26절(큰 단위)-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첫 번째 끝나면서 제가 말씀을 던진 것은 아간 하나 잘못했으면 그거는 나중에 뭐 하든지 체포하든지 놔두고 지금 아이성은 그냥 진격하면 되는데, 하나님께서 아이성의 진격을 보류시켰어요. 진격을 하는데 진격을 못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내부에 비언약이 들어 있음을 알려줌으로써 이방 나라와 비언약 세계에서의 이방 나라와 이방나라 앞의 전쟁 방식을 절대로 그런 식으로 전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겁니다.

모든 인간이 완전하라는 말이 아니고, 완전해야 승리한다는 말이 아니고, 모든 인간이 하나의 언약 안에서 언약 안에만 쳐다봐야 되는데, 왜냐면 우리 모두가 다 부족하기 때문에 그래요. 어떤 인간도 전쟁에 하나님의 일을 할 만한 그런 입장들이 아니에요. 그러한 입장들이 아니에요. 인간들은. 그렇기 때문에 네가 잘났다 내가 잘났다 할 수도 없는 형편인 것을 주님께서는 분명히 해주시면서 하나만 생각해요. 한 분만 생각해요. 하나님의 언약만 생각할 수 있도록 앞으로 진격하는 것을 일차 밀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하나님의 언약을 여리고성 이겼다고 해서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여리고성을 이겼다, 이렇게 돼버리면 안 돼요. 그러면 이스라엘이 자동적으로 정당하고 대단한 민족인 것처럼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여리고성의 정복은 이스라엘의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이에요. 그러면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면 “그 다음에는 어떤 성을 칠 것인데요?”라고 할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앞장서서 이끄시는 대로 갈 마음 자세가 돼 있어야 돼요. 여리고성 하고 난 뒤에 스톱하면 스톱하는 거예요.

그런데 아이성 칠 때 사람들은 성급했어요. “여리고성 쳤으니까 그다음에 아이성은 뭐 자동적으로 이미 예상한 거잖아. 치자!” 하고 이렇게 나선 겁니다. “너희들끼리 잘해 봐. 되는지 안 되는지.” 안 됐거든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나님이 앞장서서 하나님과의 전쟁이라는 사실을 잃어버린 그들에게 하나님의 전쟁을 다시 거기 되돌릴 수 있는 하나님의 방식은 뭐냐, 이스라엘 내부에 있는 비언약에 대해서 그냥 놔두고 자기들끼리 가자! 이러면 안 돼요. 왜냐하면 그러면 그 아간보다 본인들이 잘난 존재가 돼 버려요.

하나님뿐이어야 되는데, 하나님을 빙자해서 자기도 잘난 존재가 돼버리면 이것은 하나님 전쟁이 아니고 자기 명예와 체면을 위한 전쟁으로 변질돼 버립니다. 그것은 이방나라의 비언약이 비언약적 세계에서 인간과 인간의 충돌하는 그 원리 원칙과 동일한 거죠. 아까 강의 다시 한다면 인간은 많은 1인칭 있다, 했지요.

많은 1인칭. 각자 각자다. 이 말입니다. 각자 각자. 각자 각자니까 어떤 경우라도 나의 잘남을 내가 포기를 안 하려고 애를 써요. 내 안에. 내 안에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감정이 들어 있기때문에. 어릴 때 있는 감정, 작은 단위, 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생각했던 그 작은 감정이 자기 내부에 깊숙한 곳에 들키지 않고 숨어 있다, 이 말이지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도와주게 되면 이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뭐로 바뀌어요? 내 자체를 긍정하는 거예요. 하나님 덕분에 내가 이렇게 또 잘 살게 되었습니다. 이거 뭐 하나님을 높이는 거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엿먹이는 거예요. 지금 이게 무슨 소리 하고 있느냐, 마태복음 20장에 포도원비유 나오잖아요. 천국은 이와 같으니 아침에 노는 사람들 아침에 10시, 12시, 3시, 오후5시 주님께서는 오후 5시의 고백을 듣고 싶은 거예요. “내가 하루 종일 놀고 있는 아무 쓸모짝도 없는 자에게 어떻게 하루 품삯을 다 주십니까” “이게 네 품삯이냐, 내가 거져 주는 것이지.” 이게 천국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시키는 대로 전쟁에서 이겼다고 해서 갑자기 자기 잘난 사람 돼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너희 중에 수사해 가지고 범인 찾아내라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찾아내요. 유다 지파 끄집어내게 해가지고 12 지파 유다지파 끄집어내고 분류, 분류, 분류, 분류해서 마지막에 남는 자 아간을 남았잖아요. 그럴 때 아간을 죽일 때 어떻게 죽이는가 여호수아7장에 돌로 다 쳤지요. 돌로, 아간을 돌로 쳤다는 말은 이거는 요한복음 8장에 간음한 자에게 돌 던지는 심정이랑 똑같은 거예요. 아간을 돌로 쳤다면 이제는 그 다음 돌 맞을 자는 누구다? 자기 자신이죠. 자기 자신.

누구든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뜻에 반발한다면 돌에 맞아 죽어도 싸다하는 그 공통적 의식을 다 갖는 그러한 계기가 돼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찾아냈다는 말은 아간을 쳐다보는 것처럼 다 너희들도 cctv 다 깔고 너희들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보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나머지 사람들은 자기 잘남을 주장하겠습니까. 아니면 주님만 바라보겠어요? 주님만 바라볼 때 그거는 하나의 신약으로 말하면 그리스도의 하나의 한 몸이 되는 거 하나의 공동 언약체가 되는 겁니다.

왜? 잘나서 그래서요? 아니요. 어느 잘난 자가 없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예수님 빼놓고 잘난 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에 하나가 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 내부에 다 죄인이라면 내 안에 옛날 캐캐묵은 어떤 감정들이 있다면 그 자체가 항시 돌을 맞을 수밖에 없는 죄에 해당 됨을 늘 인식하면서 그 죄마저 사해주신 십자가의 새언약 앞에서 성도는 모두가 하나가 되는 거죠.

그래서 인간과 성도의 차이점은 그겁니다 인간은 자기가 지킬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것은 인간이고, 성도는 나는 내가 지킬 가치가 전혀 없다는 것이 성도에요. 그게 성도입니다. 그렇게 되면 성도는 뭐냐 아브라함과 기생라합과 성도는 모두 다 하나의 공통점을 갖고 있어요.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런 내가 아무것도 아니고, 나는 죄인이라는 그런 공통적인 행위를 내놓을 때 그게 바로 행위 있는 믿음이 되는 거예요.

새 언약의 부합되는 행위 있는 믿음은 그겁니다. 어제 수요일 이야기했던 것처럼 하나님 번제를 원했다면 번제를 드렸을 것이다. 그러나 번제를 드려 버리면 나는 번제 드리는 잘난 자가 돼 버려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번제를 드려라 해놓고는 하나님께서 진짜 요구하는 것은 번제 드리는 나가 아니라 번제 드려라는 명령을 받은 나 자체가 제대로 된 번제를 드릴 수 없는 상한 심령이라는 거, 곰팡이 핀 못 먹는 썪은 음식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깨끗한 걸 받는 게 아니고 그것보다 더러운 것을 받으시는하나님으로 다윗이 바뀌게 되죠. 다윗이 왜 그렇습니까. 다윗 옆에는 뭐가 있기 때문에? 다윗의 보호막이 뭡니까? 다윗언약이 찾아왔기 때문에. 그 언약이 찾아오면서 언약이 찾아오는 언약의 두께 안에 희생물이 들어 있는데, 그 두 사람 그 세 사람의 희생물이 들어 있어요. 하나는 우리야 장군 또 하나는 우리아의 부인 또 하나는 다윗과 우리아 사이에 나오는 아기. 이것이 이게 포개져서 다윗 언약을 형성합니다. 언약을 형성해요.

어제 수요일도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솔로몬이 하나님의 기도해서 응답받을 때 천하 너보다 더 지혜롭고 똑똑하고 이렇게 잘난 왕은 없을 것이다, 라는응답을 받았을 때 그는 감히 자기가 얼마 후에 헛되고 헛되고헛되고 헛되다는 말을 할 자라는 것을 감히 생각 못했어요. 최고라는 생각을 했겠지만, 이것조차도 응답받는 이것조차도 다 헛되고 헛되다는 생각을 솔로몬이 해보지를 못했을 거예요. 솔로몬은 응답을 소지할 게 아니고, 응답 따라 그 노선 하나 안에 들어가서 자기가 죄인으로 변해야 될 사람이었던 겁니다. 그게 응답이었던 겁니다. 십자가의 응답입니다.

십자가의 주님 기도의 응답이에요. 솔로몬의 기도가 응답받는 건 아니에요. 그래서 이제 여호수아 7장 뒤에 이제 8장 아이성 정복하고, 아이성. 그 아이성을 정복해 가지고 무더기를 만들고 이렇게 잠복 작전을 해서 잠복 작전하는 쉽게 해서 상대방을 교만케하고 나를 패배자로 만드는 작전이에요.

나를 숨긴다는 것은 이 전쟁에서 내가 없다고 치고 전쟁하는 게 잠복전쟁이에요. 잠복 작전 뒤에 여러 군데 나옵니다. 압살롬도 그렇고 베냐민 지파와 사사기 마지막도 잠복 작전 나오고, 최고의 잠복 작전은 주님입니다. 십자가입니다. 이 잠복 작전의 취지를 그 아간은 몰랐습니다. 그래서 이 아간의 사건. 이 말은 바로 비 언약을 내포하지 않는 한 언약은 앞으로 진척되지 않는다. 진척되지 않는다, 이리 보시면 돼요.

제가 어젯밤에 꿈을 꿨는데 꿈에 뭐 의미를 주는 건 아닌데 그 꿈이 오늘 강의와 관련돼서 말씀드리는데, 큰 육계장 같아요. 큰 육개장을 뜨다가 국자를 그 통안에 빠트렸어요. 빠트려 버렸어요. 뜨거워서 국자를 이제 손이 데기 때문에 국자를 못 떠내요. 그러면 그 국을 버려야 됩니까? 아니지요. 비 언약이 들어 있을 때만 언약이 돼요. 좀 억지다 마는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국을 뜨려는 내 탐욕이 포함될 때, 비로소 맛있는 육개장 국통이 되듯이, 내 죄가 들어 있어야 주께서 그 언약을 예수님 아버지가 그 언약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십자가 앞에서 자기 잘못이 이미 포함이 됐는데 십자가에서 지잘났다가 어떻게 나올 수가 있습니까. 안 되지요.


그러니 이러한 게 언약이거든요. 그러면 비언적 앞으로 여호수아 그 남은 이야기는 이런 언약적 의식을 이스라엘 내부에서 새롭게 재정립하고언약을 새롭게 제 조직하는 거예요. 제 조직하면서 그 이스라엘은 뭐가 되느냐 하면 이게 군인이 돼요. 군사, 군인들. 군사들이 돼요. 군사들.

군사들의 특징에 대해서는 디모데 후서 2장 4절에 나옵니다. 디모데후서 2장 4절 누가 한번 읽어볼까요. “군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 있는 자가 하나도 없고”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지 않는다.” 왜 자기 생활에 얽매이면서 군사하면 되잖아요. 왜 자기생활을 빼야 비로소 군사가 되는 이유가 뭡니까? 자기 생활에 얽매이면 쳐다보는 걸 자기가 쳐다봐요. 이번 전쟁하고 전리품은 나에게로, 이런 거요. 월남전가서 카메라는 우리 집에. 뭐 이런 거. 그런데 그거는 하나님의 군사에 적절치 않다는 거예요.

자기생활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말은 그 뒤에 나와요. “얽매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아~~, 나의 전쟁이 아니다. 말이지요. 김의 전쟁이 아니에요. 권의 전쟁이 아니고, 박의 전쟁이 아니고, 윤의 전쟁이 아닙니다. 이거는. 아니고, 모집한 분이 따로 있어요. 모집한 분의 전쟁의 그 연속으로 그분이 하신 전쟁의 연속으로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성도의 전쟁은 비언약과의 전쟁. 이걸 에베소서 6장 12절이가 거기서는 뭐냐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니요 공중권세 잡은 자와의 싸움이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전쟁하는 방식은 뭐냐, 간단하지요. 내 국자 그게 십자가 안에 들어있어요. 내 국자. 모든 죄 십자가 안에 들어있어요. 따로 내가 연마한 칼, 내가 훈련한 군사력, 이딴 거 아무 소용없어요. 천하 쓸모없는 것이 납니다. 할 때만 입에서 복음이 나의 잘남에 가리워지지 않고 나오는 겁니다. 이게 군사에요. 군사. “군사해라. 군사 열심히 해라.” 가 아니라 군사 되게 하시는 거예요.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또다시 십자가에 복종하고 십자가에 복종할 때마다 우리는 군사가 되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군사라고 할 수 없고 자기 생활에 거기에 몰입할 겁니다. 그게 전부라고 여길 거예요. 디모데후서2장5절 하나 더 보면,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않으면 면류관을 얻지 못한다.” 이 면류관은 결국 예수님이 예수님께로 돌아갈 면류관입니다.

우리에게 돌아갈 면류관이 아니고 줘놓고 다시 모아야 될 그분 예수님 앞에서 다시 무더기처럼 모아야 될 그 면류관을 그 면류관을 통해서 네가 나의 군사였음을. 그러면 면류관 반납할 거 같으면 주지를 말던지 해야 되는데, 그게 아니고 면류관을 받으면서 그 경로가 너는 너의 일을 한 게 아니고 이 예수님의 나의 일에 참여했으니 너는 천국의 백성이다. 천국의 군사였다는 것으로 정립이 됩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런 점을 우리가 안다 할지라도 실제 생활에서 우리 실제 생활에서 우리 생활에 또 우리한테 얽매이는 사례 또는 경우를 우리가 혹독하게 우리가 거기에 체험하고 있으면서도 그게 정립이 되어 있어야 돼요. 복음을 위해서 주의 일을 위해서 얼마나 우리는 내 생활 내 이익과 내 생존에 절실하게 그게 묶여 있다는 것을 더 철저하게 그걸 느껴야 돼요. 그걸 느끼기 위해서 제가 이야기 하나 동화이야기 하나 해드리겠습니다.

동화 제목은 <잭과 콩나무> 옛날 옛날 아주 오랜 옛날에 서양 옛날이야기입니다. 아버지 일찍 돌아가시고 어떤 엄마는 어린 잭과 함께 힘들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데, 그 여자 한 몸으로 그 남편 남긴 농토를 농사지으면서 하기가 너무 벅차서 어느날 엄마마저 병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 그 살던 마을에 흉년이 들었어요. 엄마는 조용히 잭을 불러놓고 잭한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지금은 우리가 이게 마지막 빵이다. 그걸 보니까 그 열왕기상 17장에 사렙다과부 이야기를 이 동화가 각색한 게 아닌가, 베낀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흉년이 들었잖아요. 열왕기상에 이 마지막 빵을 먹으면서 물론 잭과 콩나무는 좀 달라요. 잭아! 이제 너도 컸으니까 엄마 말 좀 들어라. 엄마는 몸이 아프고 이게 마지막 빵이다. 따라서 집에 있는 젖소 한 마리인데 저거 네가 시장에 가서 팔아서 이것저것 먹을 것을 사오너라. 젖소가 있어야 우유가 나와서 그것을 팔 건데 그것마저 얼마나 가난했으면 마저 처분을 하려하는 거예요. 철없는 잭은 그것도 모르고 “예”라고 한 거예요.

그 잭이 젖소를 끌고 가는데 어떤 이상하게 생긴 노인이 와가지고 “야, 니가 너의 아버지 아들 잭이구나!” “그런데요?” “잭아! 너 어디 가는데?” “젖소 팔러 갑니다.” “그래?” “여기에 마법의 콩이 있는데 콩하고 젖소하고 안 바꿀래? 바꾸자.” 이러는 거예요. 그럴 때 잭이 젖소하고 콩 하나하고 바꿔요. 왜 바꾸느냐 하면, 그 잭이 돌아가신 아버지가 돌아가기 전에 이야기들은 게 있어요. 마법의 콩에 있는데 그게 콩나무가 크면 그게 나중에 황금알을 낳는 그 닭만 있으면 매일 황금이 알이 아니고 황금덩어리가 나오기 때문에 그걸 팔아서 잘 살수 있다, 라는 전설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그와 관련돼 있나 싶어서 팔고, 콩 하나하고 젖소하고 팔고 왔어요.

그 이야기해서 제가 생각한 것은 바로 하춘화가 불렀던 <잘했군, 잘했어>가 생각났어요. 잘했군 잘했어, 잘했군 잘했어, 영감! 왜 불러. 하는 노래 있잖아요. 소 팔러 갔다가 썩은 사과랑 바꿔놓고 잘했군, 잘했어. 하는 노래. 그래 집에 와가지고 “야 소 팔어 왔나” 하니까 “소 팔아서 이거 갖고 왔어”보니 콩 인기라. 엄마가 화를 내면서 “이런 콩 하나로 바꾸는 이 바보가. 아이고~ 이제는 죽었다. 큰일 났다.” 하고 콩을 성질나서 바깥에 던져버렸어요.

아침에 일어나니까 콩이 커 가지고 콩나무가 돼 가지고 하늘로 올라가는 거예요. 잭이..., 시간이 없어서 빨리 합니다. 잭이 나무를 타고 올라가니까 거기에 뭔가 뭐 집이 궁정같은 집이 나오는데 그 집에 그 집이 있고 그 집에 아무도 없고 그 안에 무슨 닭이 한 마리 있어요. 닭이 닭장에 갇혀있는 거예요.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이래가지고 있는데 그 뭐 사정 들어보니 나도 잡혀왔는데, 빨리 저 나무 밑으로 땅으로 가야 돼요. 하고 있는데, 쿵!쿵!쿵! 하면서 어떤 뭐 어떤 괴물같이 생겼는데 거인이 찾아오는 거예요. 그래서 급해요. 빨리 가요. 그래서 잭이 후딱 해가지고 내려가는데 그 때, 거인이 “어디 내 닭을 가져가느냐” 그 땐 뭐가 또 생각나느냐, 그 땐 전설의 고향 <내 다리 내놔라!>

콩나무 타고 막 내려오는데 거의 다 따라왔어요. 다 따라왔는데 내려오고 하니까 그거 막 계속 따라오는 거예요. 잭이 이제 나무를 벱니다. 나무를 베니까 그것도 놀라가지고 괴물이 위로 올라가거든요. 결국은 이제 그걸 나무를 베고 괴물은 떨어졌고, 그 닭이 무슨 닭이냐, 엄마는 또 불평이지만, 아침에 보니까 황금 알을 낳아 가지고 황금 알을 이렇게 팔아 가지고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이야기거든요.

여기서 등장하는 모든 마법이야기, 신기한 이야기, 꿈 이야기, 가난한 이야기, 흉년 이야기, 하늘로 올라가는 수직적인 이야기, 이 땅 말고 그 아빠가 이야기하는 그 황금 그리고 위에 있는 콩나무 이야기, 모든 이야기의 의미가 결국 어디로 쏠리고 있습니까. 자기의 생존에 쏠리고 있지요. 밥 먹고 사는 거와 관련되어 있지요.

모든 동화가 이게 지독하게 우리 인간 속에 어린 마음속에 깊숙히 잠복되어 있어요. 그래서 아무리 성경 듣고 복음 들어도 이 밑에 있는 것은 이걸 어떻게 처리가 안 돼요. 어제 수요일도 이야기했지만 모든 신앙적인 시도가 다 실패로 끝나버려요.

애굽에서 어린양 피 바르고 와서 신나게 찬송 불렀던 그들이 광야에 오면서 어떻게 되겠어요? 결국 실패했잖아요. 40만 다 죽였잖아요. 그러면
또 물어봅니다. 여호수아 앞장 세워서 가나안 땅 정복하면 그러면 성공하겠습니까? 실패하겠지요.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뭐냐, 군대로 만들어요. 군대의 특징은 뭐라 했습니까? 디모데후서 2장 4절에 군대의 특징은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이거 뭐냐 하면, 자기 계획이 없다. 자기 계획이 없다. 그런데 인간은 눈만 뜨면 자기계획 세웁니다. 눈만 뜨면. 부산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성도의 기도는 뭐냐, 계획이 없다가 아니에요. 내 계획을 무산시켜달라. 내 계획을. 나는 계획을 계속 만들테니까 주님께서는 만들어진 계획을 몽땅 무산시켜 달라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게 해 달라, 이게 바로 이중성입니다.

수평 속에 살면서 내 속에 있는 잭과 콩나무 같은 그러한 환상 신화가 이미 내 속에 본질로 굳건하게 심어져 있거든요. 심지로. 이거는 내 손으로 이거 뽑아낼 수가 없어요. 그런데 이걸 뽑아내서 구원받는게 아니고 여기 이중성 있지요. 내가 이것을 발현하게 되면 주님은 그걸 또 잘라내고 또 다음날 되면 또 계획 세우면 또 잘라내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군대는 뭐냐 하나님의 군대는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언약적 관계로 맺어지는 겁니다. 나는 비언약적 속에 속한 사람으로 나서면 언약의 완성자 되시는 주님께서 그것을 받아들여서 우리 안에서 비언약이 비언약을 제거함으로써 거기에 대한 부산물로 나온 게 우리는 하나님의 군인이 되는 겁니다.

군대. 예상 못할 전쟁 속에서 계속 우리자신이 우리가 원래 싸워야 될 대상이 그때 그때 내 생각과 계획이 짤 때마다 우리의 싸움은 마귀와의 전쟁이지 우리는 혈과 육의 인간 눈에 보이는 세상과의 전쟁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 알게 되겠지요.

여호수아 5장 4절과 6절 한번 보겠습니다. 오늘 여호수아하면서 오늘 여호수아 처음 봅니다. 5장 4절 “여호수아가 할례를 시행한 까닭은 이것이니 애굽에서 나온 모든 백성 중 남자 곧 모든 군사는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노중에서 죽었는데” 라고 되어있지요. 여기는 남자를 뭐로 봅니까? 군사로 보지요. 6절,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치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맹세하사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여 우리에게 주마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그들로 보지 못하게 하리라 하시매 애굽에서 나온 족속 곧 군사들이 다 멸절하기까지 사십년 동안을 광야에 행하였더니” 이리 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뭘 해주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오히려 하나님의 전쟁에 참여해야 될 사람으로 모집됐다. 이렇게 되지요.

그러면 모집한 분의 뭐가 있겠습니까? 계획이 있겠지요. 그 계획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이 여호수아와 그 백성들은 걸려든 거예요. 말려든 겁니다. 오늘날 이 말씀은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거예요? 오늘날 우리에게. 성도는 곧 뭐다? 군사가 된다. 자기에게 얽매이지 않는다, 가 되는 거예요. 잘 들으셔야 돼요. 우리가 우리 자에게 얽매이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눈만 뜨면 우리 자신뿐이에요. 그런데 그거는 군사가 아니거든요. 군사라고 호명해 놓고 군사 되게 하는 모든 그러한 능력은 우리에게 나오는 것이 아니고, 새 언약 되신 주님이 우리의 계획을 무산시키므로서 우리는 졸지에 하나님의 군사가 되는 겁니다.

제가 아까 에베소서 6장12절에서 우리의 전쟁은 마귀와의 전쟁이라는데 그걸 다른 귀절를 통해서 우리 한 번 보겠습니다. 디모데전서 5장 15절
자, 참 이런 말씀은 참 어려워요. 14절부터 보겠습니다. 11절부터 14절 까지 먼저 읽어보겠습니다. “젊은 과부는 거절하라 이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가고자 함이니” 참 말씀 어렵지요. 시집가는 것이 무슨 행위다? 그리스도 배반행위가 된다. 12절,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심판을 받느니라” 시집가는 거 하고 천국가는 거 하고 맞바꾸었다. 이것들아! 이리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럼 시집 안 가면 천국가는 겁니까. 시집 안 가도 지옥가요.

13절, “또 저희가 게으름을 익혀 집집에 돌아 다니고 게으를뿐 아니라 망령된 폄론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 이 말씀은 또 뭐냐 하면, 그리스도를 배반했다는 그 현상, 어떤 경우를 두고 그리스도를 배반했다고 하는가, 그건 복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이 비언약적인, 수평적인, 세상의 여러 가지 잡스런 이야기, 연예계 이야기, 정치 이야기, 윤석열 이야기 이런 이야기, 그런 이야기 가지고 다른 사람과 대화를 시도하는 것을 그리스도를 배반한 걸로 규정을 짓는 겁니다. 입에서 왜 언약이 안 나오느냐 이 말이지요.

언약이 안 나오는 것은 니가 지금 안 잘려서 그렇다는 거예요. 아침마다 주님한테 성령으로서 니 계획이 무산되지 않기 때문에 니 지금 계속해서 시답지않는 이 수평적인 세상에서 비언약적 세상이 큰 대수냐, 큰 일이 된 양 떠벌이고 다닌다 이 말이지요. 하여튼 사도바울의 발언은 너무 냉정해요. 사람들로 숨도 못 쉬게 만들어요. 어떤 연예인 이혼했드라, 그런 이야기할 수도 있는 이야기지. 그걸 가지고 그리스도의 배반과 관련시키면 그럼 뭐 무슨 이야기할까요?

14절에 “그러므로 젊은이는 시집가서 아이를 낳고” 야, 이 대목. 누가 시집을 가기 싫어서 안 갑니까. 애 있는 여자를 아 젊은 자는 애 없을 수도 있겠다. 이 중고품을 누가 가져 갑니까. 중고품을 중고 시장에 가면 가격이 뚝 떨어지는데. 몇만 km 탔는데 2만km타면 벤츠라도 반값이에요. 반값. 아 시집가기 싫어서 안 갑니까. 뭐 솔로로 뛰고, 솔로도 비율이 세요. 마지막 사랑도 뛰고, 하여튼 뭐 200만원씩 주고 정보회사에 해도 뭐 나중에 200만원 주고 선 좀 한 몇 군데 보다 그것도 다 소용 없고, 내가 마음에 들면 지가 마음에 안들고, 지가 마음에 들면 내가 마음에 안 들고, 안 돼. 시집을 안 가는 게 아니고 지금 가고 싶어도 안 돼. 아니 추석 때마다 설 때 마다 30넘은 딸 보고 시집가라 하는데 그 소리 듣는 딸도 참 기가 찬 거예요. 누구 가기 싫대. 없는데. 뭐가? 남자가. 어떤 남자가? 마음에 드는 남자가.

시집가서 아이를 낳고 아이를 낳라하면 또 여자 들을라. 여자 할 일이 애 낳는 기계냐, 뭐 또 이리 나오고. 애를 낳고 집을 다스리고 대적에게 훼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로 원하는데, 그러면 시집 안 가고 애 없으면 이건 뭐냐, 마귀에 밥이다. 이런 뜻이거든요. 정말 얼마나 사도 바울이 견해가 편협한 의식인지 세대차 훅 나지요. 세대 차가 훅 나는게 아니고, 단위 차가 훅 나는 거예요.

자, 그렇게 해놓고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15절에 나옵니다. “이미 사단에게 돌아간 자도 있다” 야~~ 이게 악마가 또 튀어나오네. 악마가. 지금 군사 이야기를 했어요. 군사라 하는 것은 적이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적이 있다는 거죠. 군사는 우리는 원하지 않아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내 계획을 무산시키므로서 강제 징집 시켜 가지고 군인으로 만들어 놓은 거예요.

군인으로 했으면 이제는 주님의 눈동자 가지고 주님이 싸우고자 하는 적이 이제 보여야 되거든요. 그게 뭐냐 사도 바울은 사탄이라고 하는 겁니다. 악마.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 이게 디모데전서 2장에 4절 5절 이야기를 하는 이 말은 지금 여호수아의 그 세계가 지금도 계속 유지되고 있다는 뜻이에요.

여호수아 전쟁할 때 우리는 거기는 사탄이란 말이 안 나와요. 안 나오고
뭐가 나오냐 하면 언약이 없는 민족이라는 말이 나와요. 언약이 없는 민족. 여호수아11장 20절 누가 한 번 크게 한번 읽어보세요. 11장 20절,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로 저주 받은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진멸하려 하심이었더라”

여기서 저주받는 자 되게 한다. 저주받는 자 되게 한다. 그 토착민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얼마나 평화롭고 가족끼리 화목하고 애키우고, 가축키우고 엄마, 아빠 하면서 하하 웃고, 지나가던 어떤 나그네가 봐도 너무나도 행복하고 행복하고 행복한 가정. 그런데 갑자기 번개 얻어맞듯이 갑자기 이스라엘이 쳐들어와가지고 침략자가 와가지고 그 다복하고 행복한 그 가축들과 그 가족들을 다 몰살 했다. 그 이스라엘의 잔혹성이 신문에 날 일이지요. 하마스 집단 박살나고, 이제 헤즈볼라 박살나고, 이제 시리아 박살나고, 그냥 그저 한강 작가의 말대로 많은 1인칭만 있는 세계인데 왜 네 1인칭이 유별나야 되는가,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뭐라고 거기에 대꾸할 수 있습니까?

그들 1인칭 마귀하고 싸웁니까? 마귀하고 싸워요? 그들은 자신의 생존과 싸우고 있잖아요. 그러면 자기의 생존과 싸우면 그게 생명입니까?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죠. 그럼 인간은 뭐냐, 죽기 위해서 열심히 사는 것밖에 안 되잖아요. 미래도 모르고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모르고 모르고 그냥 모르는 가운데서 순간 순간 어릴 때 있는 감정, 나도 시집가서 행복한 가정되면 좋겠다. 어릴 때 감정 그 감정에 그 감정이 만들어내는 그 환상에 놀아나는 거, 그게 바로 비언약세계의 실제고 현실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지금 여호수아의 이 계시가 일반 사람들 모든 인간 아담의 후손 자손들에게 이걸 전하면 그들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해요. 보기는 봐도 알지 못합니다. 대체 무슨 소리 하는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저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면 믿지 말래도 믿을게. 우리를 사랑하면. 그런데 지금 당신 이야기는 지금 우리를 사랑한다는 말이 아니잖아. 우리를 부수겠다는 말이잖아. 그런데 어떻게 그런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느냐” 그러면 복음 전하는 사람은 뭐라고 해야 됩니까?

“믿지 마!” “믿지 마!” 지금 믿으라고 전하는 게 아니에요. 저래도 못알아 듣는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온 거예요. 사도바울도 그렇고. 여호수아도 그렇고. 그게 한마디로 말해서 여호수아11장20절, 저주받는 자 되게 하는 거예요. 저주받는 자 되게. 왜? 유니트가, 단위가, 생각하는 단위가, 세상을 초월한 단위이기 때문에. 그걸 믿음이라 하는 거예요. 그걸 믿음이라 합니다.

이제 우리가 살펴볼 것은 이처럼 여호수아 시대에는 그 약속의 땅이라는 구역, 그 가나안 땅이라는 구역 있잖아요. 가나안 족속이 사는 그 구역 완전히 초토화 만들어 버려요. 물론 초토화에 실패합니다. 이스라엘 믿음이 없어가지고 갑자기 배부르고 잘 사니까 놔둬버려! 놔둬버려! 그냥 놔둬 버려! 적당히 우리가 내 속을 아니까 쉽게 쳐들어 오지는 않겠지. 이러면 안 쳐들어오면 우리는 편하면 된다. 그걸로 족하다. 그리 된 거예요.

쳐들어와서 문제가 아니고, 사사기에 보면. 쳐들어와서 문제가 아니고 이스라엘이 그들을 지금 부러워하고 있어요. 그들 종교를. 여호와 종교는 뭐 여호와 종교는 이거는 난해함을 뛰어 넘습니다. 왜냐하면 유니트 단위 자체가 인간으로서 출생할 때는 그 단위로서는 해명이 아닌 규모에요. 인간이 아는 범위 바깥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그 범위 안에 인간들은 하나님의 도움은 받고 있으면서도 그 하나님을 이해하거나 그걸 마음을 알 수 있는 능력은 한계가 있어요.

“고맙습니다마는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리 되는 거예요. “도와주는 것은 고맙습니다만 왜 감사해야 될 이유를 모르겠다.” 는 거예요. 왜 감사해야 될지. 하루 하루 여러분들이 사는 것도 감사하세요. 감사하세요. 하면 억지로 감사하는데, “왜? 감사해야 됩니까?” “당신의 매일 스케줄을 박살내니까.” 그러니 그게 무슨 말이냐는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이냐. 알아듣게 좀 해라. 너무 어렵다니까. 알아듣게 좀 이야기하자 그게 무슨 말이냐, 말이죠. 스케줄을 박살낸다니? 뭐든지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응답받는다며? 근데 왜 그걸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느냐, 말이에요. “성경대로 합시다. 성경대로 해보니까 또 그 이야기 아니네.” 주의 뜻대로 하면 응답받는다 하니까, 또 골치 아파. 아~ 나, 짜증 나, 나 기도 안할래. 짜증나니까 나 살만큼 욕심 없이 살래. 이리 버티는 거예요.

그러니까 저주받는 자가 저주 받으면서 저주받는 자의 모습이 소위 복 받는 우리하고 어찌 그리 동일한지요. 도대체 하나님께 저주받는 자의 모습이 저주받을 이유를 찾아야 되는데 찾을 수가 없어. 똑같아. 복 받겠다고 우기는 인간들과 다를 바가 없어요. 왜? 인간은 존재하기 위해서 존재하면 그렇게 돼요. 싸우는 기능을 위해서 보게 되면 달리 보이는데, “싸우기 싫습니다. 그냥 주께서 적당히 복 주시면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러고 내가 나중에 천국 가서 봅시다.” 이런 식으로 나가는 거예요.
중간에 군사로 바뀌어지지 않는 거예요. 군사로.

그래서 하나님께서 준비한 책이 있죠. 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 자 요한계시록 12장보겠습니다. 결국 이거 여호수아의 그 해답은 여호수아 자체 내에서는 이게 해결이 안 돼요. 왜냐하면 여호수아가 은퇴를 해요. 보통 사람들은 여호수아가 죽으면 죽는다 하잖아요. 여호수아는 처음부터 군대 장관을 5장에서 군대 장관을 만났기 때문에 여호수아는 알아요. 이게 시킨 대로 한 거예요. 어떤 의미에서 여호수아 혼자 군인인 거예요. 천사의 계획에 의해서 모집 당한 징집원으로서의 여호수아에요. 그래서 여호수아는 이중적이에요.

수평에서 죽으면, 수직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이건 은퇴하는 거고, 제대한 겁니다. 군인을 제대를 한 거예요. “너희들 나 간다! 너희들 고생 많이 해라. 나 먼저 제대해서 미안해.” 해서 죽는 거예요. 그냥. “제대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남겨준 그 언약 있지. 저주받는 자를 더욱더 저주받게 하고 복 받는 자는 더욱더 복 받게 해라. 이것은 주님의 확정된 계획이다. 나간다.” 하고 가버려요. “그러면 여호수아님! 지도자님! 그 복 받는 것을 이야기해 줘야지요.” “돌판에다가 새겨났다. 율법. 율법대로 살면 복 받는다. 이제 더 이상 할 말 없지. 나 간다.” 가버렸어요.

사사기에 보면 여호수아 떠나고 난 뒤에 율법 줘도 못 지켜요. 왜? 아직 쫓아내지 않는 이방 민족의 종교가 일단은 무거운 숙제 없는 종교거든요. 내 편할 때 그냥 편할 때 약간의 바치고 응답 받으면 되니까. 율법이라는 무거운 짐 없지요. 제가 어제 그 수요일날 그 육신의 이야기하면서 그런 이야기했어요. 로마서 8장 7절,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더 뒤에 나온 더 놀라운 말씀은 이것을 지키고자 해도 이게 지킬 수가 없다. 지킬 수가 없어요. 왜? 원인은 이 육신한테 있으니까. 율법 지켜서 복 받고 천국 간다. 이 육신이 없기 때문에 그게 안 된다는 거예요.

아까 그 엘리야 사렙다과부 마지막 빵을 먹을 때도 마찬가지예요. 빵을 먹었잖아요. 빵을 먹을 때 그 참기름 빵 밀가루 줬지요. 그거 차원이 무슨 차원이냐, 유니트가 초월 차원이 아니고, 생존 차원이었습니다. 생존 차원인데, 그 아들이 갑자기 죽어 버리죠. 그때 그 여인이 그 엘리야 보고 뭐라고 닦달냅니까. 맥살지고 흔들고 쳐서 달려들잖아요. 당신이 안 찾아왔으면 내 아들 안 죽었다는 거예요. 어떻게 유니트 단위가 좁지요. 엘리야의 단위가 아니잖아요.

그래서 엘리야가 어떻게 했습니까. 그 아들 자기가 엎어져가지고 살려내지요. 살려냄으로서 비로소 내 아들이 내 아들조차도 나로 하여금 세상 보는 유니트들을 이 눈에 보이는 수평적에서 수직적으로 옮겨가기 위해서 가뭄도 주어졌고, 빵도 마지막 빵을 먹었고, 참기름도 끝이고, 아들마저 죽었다가 살아나는 그러한 사건들이 일어난 거예요. 사건들이. 그게 바로 엘리야의 심정을 이해하는 거예요. 엘리야가 하나님의 군대잖아요. 그건 누가 이야기합니까? 그건 엘리사가 이야기했어요. 하나님의 군대여! 자기 스승보고 하나님의 군대여! 엘리사 하나님의 군대인 엘리사의 그 군인의 입장을 과부가 이제는 이해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여기 요한계시록 12장에 보겠습니다. 12장 11절에 사탄이 나오거든요. 용이 나온다고요. 쭉 용 이야기가 많이 나오죠. 아마 제일 이게 많이 나올 걸죠. 요한 계시록에서. 할 때 사탄으로 전쟁할 때 전쟁을 어떻게 승리로 이끄는가가 12장 11절에 나옵니다.

또 여러 형제가 어린양의 피와 자기를 증거하는 말로 인하여 저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했다. 내 목숨이 무기가 아니죠. 어린양의 목숨이 내 목숨을 제끼고 내 목숨에서 나오는 모든 나의 계획을 무산시키고, 내 목숨에서 나오는 모든 취지를 어린양의 취지로 다 바꿔놓을 때 그게 바로 하나님의 군인입니다.

나를 살기 위해서 이 땅에 일어난 일이 아니고, 우리 입에서 복음에 나오기 위해서 이러한 삶의 환경을 여태까지 끌고 오는 거, 이게 여호수아의 현장이고 놀라운 주님이 함께 하신 기적의 현장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를 위해 살지 않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해봤자 결국 소용없이 또 나를 위해서 사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럴 때마다 잃어버렸던 십자가에 대한 고마움과 감사, 죄사함, 큰 단위로 생각하는 인식을 다시 회복시켜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일을 할 수 있는 저희를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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