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250515a룻기2장20절(율법의 지배)-이 근호 목사
오늘은 룻기. <룻기와 한국교회> 성경 룻기 한번 봅시다. 1장 1절에,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라고 되어 있지요. 여기 짧은 문장이지만 많은 내용이 여기에 들어가 있습니다. 실려져 있습니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다음에 그 땅에 흉년이 들었다. 이리되어있지요. 사사들이 있다. 왕이 없던 때. 왕이 없던 때라는 말은 인간이 요구하는 그 왕이 없던 때. 인간이 요구하는 그때. 왕이라 하는 것은 인간의 의욕을 반영해 주는 거예요. 인간의 욕구를 반영해 주는 거예요.
지도자를 세웁시다. 모임 보통 동창회든지 모임이 있으면 제일 먼저 하는 게 뭐예요? 임원진 뽑읍시다. 하잖아요. 그처럼 인간들이 뭔가 왕이 없다는 말은 그들이 집념을 이렇게 한곳에 모을 수 있는 그들을 대표할 만한 인물이 없었다. 없어서 사사 시대에는 자기 소견대로 했다. 자기 소견대로 했으니까 이게 자기가 있다면 저 사람도 자기가 자기지요. 이 사이에 뭐가 일어나겠습니까? 걷잡을 수 없는 반발과 충돌. 그냥 충돌이에요. 그냥 충돌 또는 다툼. 충돌과 다툼을 일어나는데 그 이유는 나의 이익과 저 사람의 이익 사이에 상충 된다. 또는 같은 게 없다. 서로 이질적이다. 그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살고 있으면서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느냐 하면, ‘내가 노력한 대로 살면 되잖아.’ 사람들 전부 다 이렇게 생각을 해요. ‘내가 노력한 대로 살면 되지 뭐 남들 신경 쓸 거 없이 나나 잘 살면 되잖아.’ 그런데 그 뒤에 뭐가 있었습니까? 흉년이 있지요. 흉년. 내가 노력한 대로 살고 싶은데, 흉년이 들게 되면 내 노력한 것이 다 날아갑니다. 내 노력한 것이. 내 노력한 것을 다 뺏어가는 그 삶의 환경 속에 인간은 놓여 있다. 그렇게 보시면 돼요. 우리가 사는데.
내가 노력한 대로 내 뜻대로 다 된다면 그거는 완전한 절대적 삶의 환경이지요. 절대적 삶의 환경. 인간들이 생각하는 뭐든지 내 뜻대로. 둘째 주, 셋째 주, 내 원대로 다 된다. 절대적 조건이지요. 그런데 흉년이 들었다 이 말이지요. 그럼 흉년이 들게 되면 뭐냐 하면 내가 노력한 대로 살지 못하는 거예요. 내가 노력한 대로.
사사 시대에는 개인주의입니다. 왕이 없으니까 의논할 상대도 없고요. 나는 내하고 의논하는 거예요. 사사시대에. 오늘날 젊은 사람들이 자기가 고개 숙일 절대자가 없다 했잖아요. 결혼식도 주례가 없고 누가 감히 나를 가르쳐. 그냥 나 결혼합니다. 하고 발표하는 그런 행사를 치를 뿐이지. “아무 나도 나를 가르칠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는 다 알 것 다 압니다.” 이런 식이에요. 자기 소견 그걸 뭐라 하면 자기 소견대로. 자기 의견대로 살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 이제 흉년이 들어 버린 거예요. 흉년이 드니까 뭐를 생각해야 되느냐 하면, 처음부터 어렵게 나오는데 할 수 없어요.
이 땅이 어떤 흉년 땅이 보통 다른데 흉년 들면 이해되겠는데, 이 땅이 어떤 땅이냐 하면 젖과 꿀이 흐름을 보장해 주는 땅이거든요. 젖과 꿀이 흐른다는 것을 보장해 줬어요. 하나님께서 조건이 있어요. 율법대로 살면 말씀대로 살면 젖과 꿀이 흐른다. 그런데 여기 흉년이 들었다는 말은 그들이 보이지 않는 왕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이탈했다. 이탈했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탈했으면 그건 뭐가 없느냐 하면 인간에게 있어서는 그 왕이 없는 거예요. 갑자기 여기 왕이 두 종류가 돼 있죠. 첫째는 뭐냐 인간이 요구하는 왕. 이 왕도 사사 시대에는 없었고 그다음에 하나님이 요구하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백성이 없다가 되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백성이 없다. 백성이 요구하는 왕도 없고, 하나님이 요구하는 백성도 없는 거예요. 그 충돌의 현상이 뭘로 나타났습니까? 흉년으로 나타난 거예요. 흉년.
“하나님이 없다고? 왕이 없다고? 왕이 내가 있잖아. 여호와 있잖아.” 하나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나오시는 거예요. “봐라, 내가 왕이라서 너희에게 흉년을 줬잖아. 이래도 정신 못 차리지. 그지?” 이리되는 거예요.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 소견대로 살기 때문에, “아, 흉년이야? 어, 흉년이구나!” 끝났어요. 이 땅이 특수한 땅인데, 하나님이 아닌 자기 소견대로 살아가는 사람한테는 이 땅이 특수한 땅이 아니에요. 이 견해를 무슨 견해라 하느냐 하면, 좀 어렵더라도 참아내셔야 돼요. 이 견해를 가지고 뭐냐, 지역적 관점. 좀 더 어려운 표현을 하게 되면 지엽적 관점. 지역적 관점, 지엽적 관점. 자기의 소견이라는 말을 이렇게 바꿀 수가 있어요.
내 소원대로 한다는 말은 지엽적인 거. 자기 생각밖에 없는 거. 자기 곧 둘레 자기 근처 그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그것만. 그게 지역적이고 같은 말은 지엽적이다. 지엽적으로 보니까 여기 나라는 것과 너의 뭐가 다르겠어요? 관점이 다르지요. 왜냐하면 나는 순수하게 객관적으로 본다, 세상에 이런 말은 없어요. 자기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고 세상을 구성하지 않습니다. 내게 현실이라 하는 것은 내게 이익을 얼마나 줄 거냐의 선입감에 입각해서 현실에 일어나는 것을 조립하는 겁니다. 조립하는 거예요.
그 아주 강원도 깊은 골짜기 사시는 홀로 사시는 할머니에게 만약에 어떤 방송국에서 인터뷰할 때, “할머니, 이번에 트럼프의 관세 20% 때렸는데 그게 어떻게 생각합니까?” 하면 그 할머니는 뭐라고 합니까? “나는 모르겠고 트럼프가 누군지도 모르겠고 관세라는 말 자체가 무슨 뜻인지 모르겠고 보다시피 나는 감자 농사해서 장에다가 팝니다.” 이러는 거예요.
“내가 아는 것은 감자 씨해서 농사지어서 장날에 감자 팔고 사고 그 돈으로 나는 내 생활비합니다. 이게 내가 아는 전부입니다.” 하지요. 그러면 그 방송 기자가 “할머니, 앞으로 제값 못 받을 걸요.” 이래 이야기하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감자를 제값 못 받는다는 말은 관세가 오게 되면 미국과 협상할 때에 미국 감자를 수입해야 되는 조건 붙어 버리면 할머니가 아무것도 모르고 장날에 갔는데 자기는 분명히 5천원 받아야 될 건데 저쪽에 3천짜리가 나왔더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도 어쩔 수 없이 5,000원 못 받고 3,000원 깎잖아요. 깎는다, 말이지요. 이게 트럼프의 효과입니다. 하면 그 할머니한테 이야기하면 그 할머니는 뭘 몰라요? 자기의 지엽적인 관점과 범 세계적인 관점 사이에 논리의 징검다리가 다 빠진 거예요. 논리의 징검다리가. 그 지역적 관점 그 지엽적 관점의 특징은 이런 공식이 되는 거예요.
“나는 한다. 결과를 낸다. 나는 일한다.” 또는 나는 뭐 행동한다. 결과를 낸다. 딱 요거밖에 모르는 거죠. 내가 감자했다. 한근에 5,000원 받는다. 딱 이것만 아는 거예요. 기억하는 것은 내가 감사 농사 애썼다는 것과 그리고 장날에서 5,000원 현찰 쥐었다. 딱 이것만 아는 겁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몰라요. 이게 지역적이고 지엽적인 거예요.
언제 말입니까? 왕이 없기 때문에. 누가 전체를 이야기해 준 사람이 없잖아요. 전체를. “너는 너의 지역은 너의 공간은 너를 네가 네 지엽적 관점을 용인하지 않는, 허용하지 않는 공간에 네가 들어와 있다. 하나님의 이름의 이 계시는 약속의 땅에 와 있다.” 라는 이런 사실을 제사장들이나 이야기했을 게 아닙니까. 안 들어요. 안 듣습니다. “이왕 뭐 땅에 들어왔는데, 그냥 땅에서 내 노력한 대로 결과 얻으면 되지.” 그런 주장이 맞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러면 내가 흉년을 왜 내리지? 흉년을 왜 내려?” “아, 그건 고려 못 했는데요.” 흉년은 안 와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흉년이 없어야 된다고? 무슨 권리로? 이게 누구 땅인데 네가 함부로 흉년이 있니? 없니? 하느냐.” “없어야 된다. 하여튼 풍년만 있어야 된다.” “그거 네가 주장할 수 있는 공간에 네가 있다고 생각하냐?” 이렇게 나오면 어떻게 답변할 거예요. 답변 안 하지요. 그럼 답변하면 어떻게 할 거냐, 흉년이라 그러면 지역적 관점, 지엽적 관점에 의해서 그러면 흉년 없는 곳이 어디지? 가자. 보따리 싸라. 어디로 갑니까? 옆의 나라 모압으로 가요.
예루살렘에서 한 100km 떨어지는 곳에 직선거리 모압으로 갑니다. 그런데 모압 가면서 거기에 2절, 그 2절 그 사람의 이름은 뭐라 했습니까? 엘리멜렉. 코미디 같아요. 엘리멜렉의 뜻은 나의 하나님은 왕이십니다. 왕이 없어요. 왕이 없는데, 전통적으로 여호와는 왕이다, 라는 그런 인식으로 이름을 그렇게 지었습니다. 아버지가 지었겠지요. 하지만, 그 엘리멜렉이라는 것이 이 성경에 나와 있는 이상은 엘리멜렉은 하나님은 나의 왕이라는 것은 전혀 하나님의 왕을 인정하지 않는 하나님의 왕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를 어떻게 인간들이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왕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어떻게 작동 작용하는지를 룻기가 보여주는 겁니다.
“이게 왕이야. 이게 하나님 왕의 방식이야.” 그걸 나타내는 거예요. 지역적, 지엽적 관점을 이게 엘리멜렉 가정을 가졌을 때에 이걸 남의 이야기로 보면 안 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그대로 지역적, 지엽적 관계 돼요. 뭐냐 하면 이거예요. 어떻게 하면 살지? 어떻게 하면 내가 살지? 라는 말이 있잖아요. 어떻게 하면 내가 살지. 여기서 왕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자기 소견이에요.
그러니 이 사사기 사사 시대 그것도 룻. 이게 오늘날 얼마나 현대적입니까? 이 현대적 인간들이 아무리 자아를 알려고 그렇게 노력하고 발버둥치고 애를 써도 성경은 익히 다 이미 우리에게 인간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십니다. 인간은 뭐냐, 이름 그대로 엘리멜렉 이름 그대로 왕과 그 백성 사이에 관계에서 이탈하면 인간 아니고, 그 안에 들어올 때만 인간이다. 룻기에서 제대로 이야기해 주고 있지요.
그러면 하나님이 왕 되심을 어떻게 연결되느냐, 인간 대 인간 자기 소견이니까 사사기 전체가 인간 대 인간의 충돌이잖아요. 요 맞은편 상대역에 누가 들어가느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인간들이 무시하는 하나님의 왕 되심이 앞에 나서서 인간들과 이스라엘과 충돌을 일으킵니다. 엘리멜렉, 하나님은 나의 왕이시라는 그 가정과 진짜로 왕이신 하나님과 충돌을 일으킨 겁니다. 복 받은 거예요. 그게 복 받은 겁니다.
이름뿐인 아무것도 아닌 무의미한 이름이 내용을 획득하게 된 거예요. 그 실제를 본질을 획득하게 된 거예요. “아, 이름뿐이 아니구나! 우리가 알아서 지었는데 그게 아니구나! 실제로 여호와는 나의 왕 맞구나!”라는 것을 알게 하시는 그 하나님의 활동이 바로 룻 이야기입니다.
자, 그렇다면 그 이야기의 끝부분에 끝에 하나님의 왕 되심은 어떻게 나타났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왕 되심을 제대로 보여 준 인물 다윗이 출생한다는 이야기로 룻은 닫힙니다. 마감됩니다. 룻기는 마감돼요.
그리고 사사기에서 그다음에 사무엘 상으로 역사는 가잖아요. 역사는 가는데, 그 휴계소처럼 하늘나라 휴게소. 이 아랫 동네에서는 역사는 빈틈없이 꽉 이어지고, 이어지고 이어지듯이 끊어짐 없이 이어 시간은 흐르듯이 흘러가고 있어요. 흘러가고 있는데, 여기에 이쪽에 빈 공간에 룻이 들어옵니다. 빈 공간에.
룻이 들어와서 여기서 룻은 장차 룻이 그 다윗의 증조 할머니니까 누가 등장하느냐, 다윗 왕이 예언되지요. 다윗 왕이 출신이 예언되어 있지요. 다윗 왕이 하나님이 왕이라 하는 것은 다윗은 뭐냐, 다윗은 언약 관계에 있다. 언약 관계. 무슨 언약? 다윗 언약. 다윗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의 왕 되심은 안 죽었다. 안 죽은 정도가 아니고 구현된다. 역사 속에 구현될 것이다.
이 다윗이 구현되고 이 사사부터 사무엘상으로 가면서 여기서 먼저 하면 하나님의 언약이 된 왕이 아니고 언약 인간들이 요구해서 언약이 없는 인간들이 요청하는 언약이 없는 백성들이 원하는 대선 김문수 여기서 김문수부터 먼저하게 저쪽에는 이재명부터 먼저 해야 돼요. 요령을 부려야 돼요. 그다음에 이재명. 이건 뭡니까? 언약으로 나온 거예요?
나는 언약이다. 이리 나옵니까? 언약 이야기 입에서 안 나오지요. 나올 수가 없지요. 왜냐하면 언약은 확정적이니까요. 투표가 필요 없어요. 언약은 어떻게 하느냐하면 선택되는 것이지, 투표하는 게 아닙니다. 이 백성들 투표권 다 없애 버려요. 찢어버려요.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선출하는 것이지 백성들이 자기의 의견을 규합하고 이게 아닙니다. 그건 이방 나라에서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윗 왕은 특징은 뭐냐 하면 역사 위에 룻이 붕 떴잖아요. 그럼 역사적으로선 이거는 뭐냐하면 없는 공간이지요. 없는 공간. 여기 밑에는 누가 있느냐 하면 엘리멜렉 가정. 엘리멜렉의 가정은 어떻게 생각한다 했습니까? 지역적이고 지엽적이다. 지엽적. 코앞에 눈앞에 눈에 보이는 내 가정, 내 자식, 내 가정 이게 전부예요.
거기 함축된 뜻을 뭐라 했습니까? 어떻게 살지? ‘아, 흉년은 왜 있나 모르겠고, 흉년이 일어났다. 그러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흉년이 누가 일으키는가, 그거 아니고 나는 이 흉년 가운데서 내가 살 길은 어디지?’ 요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그것만 생각하는 겁니다. 자기의 소견대로 생각하는 거예요. 뭐 주님이 누구고, 뭐 그건 모르겠고, 그냥 시집만 가면 돼요. 나, 시집간다. 그걸로 끝나면 된다. 지엽적이지요.
엘리멜렉이 있어서 지역적인, 지엽적인 공간이 지엽적이라, 공간이 지엽적 그 근처에서 룻은 없는 공간입니다. 없어요. 없는 공간인데, 여기에 덮치는 거예요. 없는 공간에 또 구체적으로 하면 이 땅은 율법에 없다고 여기는 민족. 무슨 민족이냐 하면, 모압 민족이에요. 모압 민족. 룻은 모압민족의 여인이지요.
모압 민족은 신이 뭐냐, 여호와가 아니에요. 그모스라는 신입니다. 우상 섬기다가 여호와 섬길 때 필수적으로 룻에게 일어나는 일이 일어나야 됩니다. 그게 뭐냐하면 자기 죽음이에요. 자기 죽음. ‘어떻게 살까’가 아니라 ‘나는 어디에 죽을까’를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그게 룻기 1장에 나옵니다. 1장에 17절 누가 한번 읽어 보세요.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됐습니다. 거기까지. 딴 거 볼 것도 없어요.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 나도 거기 죽어 장사 될 것이라. 끝난 거죠. 끝난 겁니다.
룻이 보기에 자기 약속의 땅을 율법에 의해서 약속의 땅에 살아야 되는데, 흉년 든다고 자기 약속의 땅을 아주 우습게 여기고, 모압 나라에 그모스 이방나라의 우상을 섬기는 그 나라에 이사를 왔다는 말은, 이민을 왔다는 말은, 하나님이고 뭐고 우상이고 뭐고, 난 모르겠고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떻게 밥 먹고 사느냐가 중요한 거예요. 그게 자기 소견이에요. 타고난 거예요. 이게 지엽적이에요. 좁게 보는 거예요.
남들은 좁게 본다고 하지만, 이건 인간에게 자기에게 전부에요.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학문을 많이 하고 박사학위를 몇 개 해도 그것을 이렇게 깔대기로 모아 보면 어디로 모입니까? 내가 박사학위가 다섯 개인데 그래서 지금 월급은 얼마지? 요걸로 모이는 거예요. 두루두루 학문을 섭리해도 중요한 것은 뭐냐, “내가 어떻게 살지?” 이거예요.
이게 룻이 여기에 들어갔다는 말은 그 당시 그리고 이스라엘 전체가 젖과 꿀이 흘러도 모자를 약속의 땅에 젖과 꿀이 흐르는 이유는 거기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주는 거예요.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기 때문에 넉넉해야 될 이 땅이 흉년이 되어서 쪼달린다는 말은 지금 너희들 상태 그 상태로서는 내 백성 아니다. 내 백성은 젖과 꿀이 흘러야 돼! 흉년이 들었다는 말은 내가 왕으로서 너희들이 내 백성 값을 못한다는 것을 알려 주는 그런 징후 같은 겁니다. 징후 같은 거죠. 관심사가 엉뚱한데 가 있다. 관심사가.
룻은 어떻게 알았느냐 하면, 여호와를 믿는 우리 시집이 쫄딱 망하는 거예요. 전부 다. 망한 이유를 룻이 나름대로 평가해 보니까 뭐냐 하면 그들이 율법을 위반한 거예요. 우리 시집이. 우리 시집이 율법을 위반한 거예요. 율법을 위반했는데 하나님께서 여호와 하나님이 죽은 신이 아니고 말뿐인 신이 아니라 정말 살아 있어 우리 남자라는 남자는 다 죽였잖아요. 아버지 죽고 자기 남편 죽고 그 집안의 아들 둘 다 죽였잖아요.
그렇다면 이거는 죽은 것이 아니고, 죽였다가 돼 버리지요. 하나님이 죽이신 거예요. “네가 살라고 지엽적으로 살라고 그게 사는 목적이야? 그러면 니가 살면 율법이 죽는데. 나는 너한테 그런 양보 못하겠다. 율법을 살리는 한이 있더라도 너를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율법은 살리겠다.” 라는 식으로 룻은 이걸 이 사태를 그렇게 이해한 거예요. 놀랍지요. 이방인이. 자기가 믿던 그모스 신하고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거예요.
그모스 신은 이방 신은 섬기다가 안 섬길 수도 있고, 안 섬기다가 섬길 수도 있고, 교회에 다니다가 안 나올 수도 있고, 안 나왔다가 심심하면 나올 수도 있고. 중요한 것은 그 하나님이 누구냐가 중요하지 않고, 내가 얼마나 편하게 사느냐 그게 중요하다. 이게 그 우상이다. 살아 있지 않아요. 신은 인간이 만드는 거니까요. 신을 만드는 이유가 내가 신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신을 만들어요.
내가 굶어 죽을 판에 여호와가 무슨 소용 있느냐 해서 모압 땅을 넘어온 겁니다. “여호와 없어도 상관없어. 내가 우선 살아야지” 이게 바로 엘리멜렉의 가정이었어요. 이방 나라 와서 작살났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그 엘리멜렉이 그렇게 죽었으면 ‘아이고, 뭐 사람의 팔자가 죽을 때가 되어서 죽었겠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이 나오미가, ‘여기서 멈춰야 돼. 막 나가면 안 돼. 스피드 내면 안 돼.’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그런데 그게 절망이에요.
왜냐하면 올 때 뭘 했느냐 하면, 땅을 팔고 왔어요. 그걸 영끌이라 하거든요. 거기다가 대출까지 받았어요. 몰빵한 거죠. 자기 목숨을 담보로 내기한 겁니다. 자기 인생을 상대로 내기 한 겁니다. 그런 이야기하니까 갑자기 생각난 사람들이 여러 명 돼요. 생각한 사람이. 자기 인생을 도박처럼 생각해가지고 해놓고 거기다가 복음 믿는 것도 교회 다니고 예수 믿는 것도 내 것을 몰빵한 내 것을 지키기 위해서 내 하나님께 마치 모든 것을 몰빵한 것처럼 행세하는 사람들 여러분 가운데는 없어요?
자기 것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 저 복음에 몰빵했습니다.” 하나님 어디 바보입니까. 그 우상 숭배를 하나님께서 어디 그냥 넘어가지 않지요. 넘어가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면 하나님께서는 이거예요. 룻을 통해서. 너는 너에게 내기 할 가치가 없다는 겁니다. 너 아무것도 아니야. 너.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닌데. 뭐. 긴 줄 알고 대단한 존재인 줄 알고. 우리 가정은 이래야 되고 우리 아들은 이래야 되고, 우리 딸은 이래야 되고, 그렇게 해서 그렇게 구성해서 요만한 가정을 꾸민다. 내세울 만한 우리 가정 이렇게 행복하다. 그게 지엽적이고 지역적이잖아요. 그게 자기 소견 아닙니까.
시집을 가든 장가를 가든 주께서 알아서 하시겠지 뭐. 다들 그런 마음이잖아요. 지금 마음이 그런 마음이잖아요. 내가 또 강요한 거 같다. 왜? 나는 아무것도 아니니까요. 아무것도 아닌 것에 하나님의 왕 되심에서 계속해서 일거리 또는 하나님의 왕 되심을 나를 통해서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그 현장을 보여주는 거예요. 물론 우리는 육신이 육체로 있기 때문에 사는 게 우선이고 가정이 혈통이 우선이에요. 따라서 우리는 세상적인 것을 자랑질 하고 싶어 환장합니다. 그런데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룻기의 말씀을 통해서 너 어느 쪽이냐고 묻는 거예요. 너 어느 쪽이냐.
신명기 27장 11절에 보면 율법에 이런 게 있어요. 네게 맡겨 준 기업을 옮기지 마라. 네 땅 아니다. 이 땅이 내가 있는 땅이 내 땅이 아니면 내가 팔 수도 팔면 안 돼요. 그 땅에서 주어지는 양식으로 감사해야 됩니다. 그걸 팔린 땅을 대신 되갚아서 사 준 분이 있어요. 그게 바로 후견인입니다. 룻기에 중간부터 등장하는 후견인이 등장해요. 이름이 누구냐 하면 보아스예요. 우리 보씨 집안에 그렇게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보아스.
보아스가 그 땅을 사줘요. 후견인이 해야 될 일이 있는데, 네 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 땅 사주기. 레25장 23절에서 25절, 두 번째, 빚 대신 청산하기. 은행 대출받은 거 청산. 레25장 47절에서 49절, 세 번째, 이 집안에 아들이 없어 대를 못 이은다. 아들이 없으면 상속, 하나님이 주신 상속이 아들이 없으면 이게 안 돼요. 계속 상속받을 수 없거든요. 여자는 시집가면 그 시집의 사람 되기 때문에 없어요. 그래서 아들 낳아주기. 후견인 지금 바빠요. 할 일이 많아요. 빚 갚아 줘야 되지 대출 갚아줘야 되지요. 팔린 땅 다시 되찾아주지요.
그 다음에 뭐냐 하면, 자식 없는 자에게 결혼해 가지고 자식까지 낳아줘요. 신명기 25장 5절에서 10절, 아들 낳아주기. 네 번째, 후견인이 대상이 된 자기 친족, 자기 친족의 억울함에 대해서 끝까지 대신 복수해 주기. 누가 내 사람 건드려! 복수해 주기. 요게 뭐냐 신약에 보면 이게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구름 타고 공중에서 오십니다. 왜? 복수하기 위해서. “내 피 믿는 사람 누가 건드렸어? 다 나와! 내 가 완전히 작살내고 지옥 보낼 거야.” 그런 겁니다.
그러니까 십자가가 우리의 죄의 삯을 갚아줬잖아요. 탕감해 줬잖아요. 십자가가. 십자가로 머무는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 딱 아구가 맞춰야 돼요. 복수해 주기.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공중에 구름 타고 오셔서 복수해 주는 것까지 딱 세트가 딱 맞아 떨어져야 돼요. 이제 재림 믿습니까.
실제가 믿는 자만이 재림을 믿을 수 있어요. 일련의 조치이니까. 중지되지 않는, 멈추지 않는, 그냥 쭉 가는 거예요. 그냥 쭉. 코스가 그냥 쭉 가는 거예요. 십자가 피를 믿고 탕감받을 때 그 사람은 이제 주의사람 됐어요. 주님이 후견인으로 된 사람 됐다, 이 말이에요.
본인은 뭐 아무것도 모르죠. 뭐. 돈도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주님이 우리가 죽을 때까지 다 이 땅에서 머물게 해주는 것도 후견인입니다. 후견인. 주님께서는 빚을 갚아주기 위해서. 후견인은 빚 갚기 위해서 친척 빚 갚기 위해서 자기 돈을 내잖아요.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자기 생명을 내놓은 거예요. 그게 어디까지 이어집니까. 재림까지 효과를 주는 거예요. 재림까지.
그러니까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는 이렇게 소매를 걷는다, 보면 돼요. “어디 한 번 해 보자 이 말이지. 알았어. 알았어. 해 보자.” 이제 재림을 기다릴 사람이 누군지를 아시겠지요. 재림을 기다린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나는 내가 알아서 내 것 챙길 게 아무것도 없다는 상황만이 주님이 후견자로 보이는 거예요.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하지 뭐. 공부도 많이 했겠다. 뭐. 열심히 내 행한 대로 하면 결과 생기면 되지.’ 이런 사람한테는 후견자가 그다지 와닿지 않아요.
지금까지 내가 이렇게 잘살았고 아 잘 키워서 시집까지 보낸 게 전부 누구 탓인데. 다 이거 엄마 탓. 내 탓. 내 공로인데 무슨 후견인이 필요해요. 없지요. 그래서 이 후견인을 제대로 알면요, 우리가 주님 앞에 유구무언,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할 말이. 도대체 내가 그동안 뭐 했냐? 뭘 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성경 말씀이 이 내용이에요. 성경 말씀. “네가 뭐 알아?” “뭐 뜬금없이 뭘 알아, 하십니까? 내가 뭘 모른다는 말입니까?” “거봐. 모르잖아.” 주님과 대화가 안 돼요.
“니 뭐 알아?” ‘가만히 있어 봐. 이 질문은 뭐가 있다. 이때 질문을 잘해야 돼.’ “예, 모릅니다.” “뭘 모르는데?” “모르겠습니다.” “거봐, 모르잖아.” 이렇게 답변하고 저렇게 답변해도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거는 마찬가지에요. 복음 알아도 아무것도 아니고 복음 몰라도 아무것도 아니고. 그저 후견자가 그냥 혼자서 활동하는 세계 속에 우리가 놓여 있는 거예요.
그게 바로 골로새서 1장 16절입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세계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은 누굴 위해서? 우리 주님을 위해서. 우리 주님께서 주님을 위해서 주님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만들어졌다. 사도 바울이 이 후견인을 이걸 알았잖아요.
이걸 아니까 사도 바울은 모든 면의 자유고 겁나는 게 없어요. “어? 사도 바울은 율법대로 사네.” “율법 있는 자를 위해서 내가 율법대로 산다. 좀 어때서?” “어? 사도 바울은 율법 없이 사네” “율법 없는 자를 구원하기 위해서 율법 없이 산다. 왜? 내 마음대로다. 이건 주님 주신 자유 마음대로다.” 율법을 지켜야 돼. 안 지켜야 돼. 그거는 그 지시는 윗분 후견자가 지시한 대로 그냥 움직이면 되는 거예요. 내걸 따로 챙길 수는 없어요.
왕이 존재하지 않는 왕, 다윗 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울이 존재하는 거예요. 다윗은 왕 될 상황도 없고, 왕 근처도 안 갔어요. 다윗 왕은 없어요. 다윗은 있는데, 다윗 왕은 없어요. 다윗에게 왕 기름 부음이 있다는 것은 기름 부음이 있어 줘야 기름 부음이 그 왕이 되는 거예요. 없는 왕을 만든 게 다윗 왕입니다. 그런데 그 정신은 룻에게서 계속 숨어 있는 다른 특수한 공간에서 주어진 내용이에요.
사울은 토대가 있어요. “왕을 주옵소서. 우리에게 왕이 필요합니다.” 사무엘상 8장에 사울왕 됐잖아요. 우리가 이렇게 사사 시대에 왕이 없어 소견대로 하니까 이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서 우리가 대표자가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라고 해서 나타난 지도자가 누구냐, 사울이죠. 그 사울 품 안에는 가짜 이스라엘이 소복이 다 들어있어요. 마치 구더기가 들어 있는 것처럼 소복이 다 들어 있어요.
그 사무엘상 28장 잠시 한번 보겠습니다. 28절, 그 앤돌의 신접한 여인이 죽은 사무엘을 불러냈어요. 자, 불러냈다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불러낸 사무엘이 다시 사울왕과 마주했습니다. 이 의미는 평소에 사무엘이 죽기 전에 사울 왕과 마주해서 한 이야기가 있었거든요. 이야기가. 그게 사무엘상 15장인가 뭐 나와요. 그러면 그 살아 있는 사무엘과 살아 있는 사울 왕 때 했던 그 대화 내용과 이미 죽어버린 사무엘과 그리고 살아 있는 사울 사이에 중간에 그 여자 무당이 끼어들었지만, 그 사이에 대화 내용이 같을까요? 다를까요?
28장 18절에 보면, “네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고 그의 진노를 아말렉에게 쏟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오늘날 이 일을 네게 행하셨고” 그러니까 똑같아요. 이스라엘이 본인이 스스로 가짜인 걸 모르거든요. 그러니까 아말렉을 일부러 보내가지고 아말렉과 그 이스라엘을 사울이 왕으로 있는 이스라엘과 맞닥뜨리게 한 겁니다. 이게 아말렉의 역할입니다.
그 아말렉을 볼 때, 사울왕이 왜 가짜냐 하면 하나님이 아말렉을 보는 그 진노의 관점을 과연 사울이 갖고 있느냐, 아니면 사울왕이 자기 지역적이고 지엽적인 자기 이익을 챙기는 관점에서 아말렉을 다루고 있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서 그 아말렉이 쳐들어왔고 예상대로 사울 왕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왕으로 보지 않고 자기 소유의 백성 자기가 이스라엘 왕으로 여겼던 겁니다. 그것이 죽고 난 뒤에도 한결같이 똑같은 발언이 사무엘에게 나왔다는 이 말은, “죽고 난 뒤에 어떻게 됩니까?” 라는 것을 굳이 죽어서까지 찾을 필요 없고, 살아서 있을 때 입에서 뭐가 나오느냐, 로 알 수 있다, 이 말이에요. 입에서.
그걸 오늘날 실현하면 이렇습니다. “저 아저씨! 십자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예수님 십자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하나님 앞에서 내 모습이 저렇게 저주받는 모습입니다.” 이렇게 술술 나오면 얼마나 좀 좋아. “아버지! 십자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나는 지옥 가야 마땅해.” 이리 이야기가 나오면 얼마나 좋아. “어머니는 십자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나는 너한테 효도 받을 필요도 없고, 나는 길바닥에 내놔도 상관없을 정도로 난 아무것도 아니야.” 이런 말이 술술 나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 말 안 나와요. 우리가 4대신앙가지고. 그리 나오지요.
그게 뭐냐 하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은 도저히 그런 고백이 안 나오는 거예요. “지금은 내가 니가 보기에 복음도 안 믿고 좀 농띵이로 보이지. 내 죽어서는 주님한테 잘 할 거야.” 이러고 있다고요. “어머님! 그 죽은 예수님이 지금 이 딸자식으로 지금 엄마 앞에 지금 나타나 있어요. 엄마는 내가 보기에 지금 딸로 보이십니까?” 요거는 이제 이거 스릴 영화. 귀신. 딸로 보이십니까?
살아 있을 때 주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면 죽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은 처벌이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마지막 때에 누구든지 심판대 그리스도 심판대에 있다. 그리스도 심판대에. 여러분들의 사명과 할 일이 그만큼 막중합니다. 우리가 뭐 하라는 말이 아니고 누가 시켜요? 후견자가 든든한 후견자가 있기에 우리는 주저 없이 할 수 있는 거예요.
요한계시록 12장 11절에 보면 있지요. 그 성도가 어떤 사람을 성도냐 하면 그리스도 어린 양의 보혈의 피로 말미암아 죽기까지 복종했던 죽기까지 복종했다. 이미 살았기 때문에 내가 살아 있으면서 살아 있는 생명을 얻었기에 내가 살아 있을 때 주의 소식이나 내가 죽고 난 뒤에 주의 소식이나 동일하다는 것이 내가 살아 있을 때 이미 획득을 했기에 들었기 때문에 더 이상 나한테 죽는다, 산다, 가 별 의미가 없어요.
연탄가스에 막혀 죽느냐, 차에 받쳐 죽느냐, 그 별로 의미 없어요. 군대 가서 죽느냐 죽는 거 별 의미가 없어요. 주일 낮에 그런 소리 했잖아요. 물에 빠져 죽으나 불에 타 죽으나 늙어 죽으나 자연사하거나 죽기는 마찬가지에요. 인간은 죽기 위해서 태어납니다. 이걸 룻이 아는 거예요. 룻이 그걸 알아요. 율법을 통해서.
어떻게 아느냐, 율법은 살아 있다. 살아 있는 율법이 우리 시가집 남자를 죽였다는 말은 죽여서라도 율법만 살아 있겠다 하는 것이 바로 살아 있는 주님의 뜻입니다. 그 뜻에 기꺼이 내 목숨을 그 속에다가 드리겠습니다. 죽음속에 들어가서, 죽음속으로 들어가서 시가집 죽음 속에서 생명을 거기서 발견하는 거예요.
그 생명이 어떤 모습입니까? 후견자 모습이지요. 후견자가 룻기는 누구? 보아스. 다윗 때는 누구? 다윗왕. 예수님 때는?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후견자가 되는 겁니다. 후견자가 받았다는 증거는 뭐냐 증거는 이거예요. 내 이름으로 사는 것 아니고 무슨 이름으로? 주님의 이름으로 사는 것. 이게 후견자 만났다는 뜻입니다.
후견자는 어려울 때 도와준다가 아니라, 어려울 때 도와준다. 인간은요, 어렵다 하는 게 없어요. 뭐 개코나 있어야 어렵지. 뭐 있지도 않은 존재가 없는 존재가 뭘 어려워요. 주께서 나 말고 주님이 살아 있다는 걸 드러내는 여러 가지 상황과 정황은 주님이 만들어내는 거예요. 후견자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후견자를 받게 된 우리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작업 이것이 지금 주께서 하시는 일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을 그렇게 하는 거예요.
여기서 나오미도 대단한 믿음이지요. 1장 20절에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다시 말해서 나오미는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나를 괴롭게 했다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다른 말로 하면 율법이 율법을 위반한 나를 괴롭게함으로써 율법은 나는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사람이다. 이런 뜻입니다.
지역적이고 자기만 챙기고 자기 소견대로 이게 아닙니다. 완전히 돌아오면서 율법의 중요성을 알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왕이 없는 시대에 드디어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왕이 율법 없는 여인을 통해서 진짜 이스라엘이 멈추지 않고 칙칙폭폭 지금 폭주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10분 쉽시다.
■안양20250515b룻기2장20절(율법의 지배)-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자, 이제 나오미 가정이 고향에 왔습니다. 왔는데, 이미 나오미는 늙었어요. 늙었다는 말은 노동력이 없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어떻게 살 거에 대해서는 자기가 전혀 기억하지 못합니다. 특히 여자 같은 경우에는 자식이 있든지 아들이 있든지 남편이 있든지 그래야 든든해서 농토를 갈아야 되거든요. 노동력으로 살아야 되는데, 그 나오미의 아들들, 말론 또 하나는 기룐이죠. 말론. 기룐. 말론이라는 뜻은 뭐냐, 보잘 것 없다. 기룐이란 뜻은 소멸한다.
그러니까 하나의 아버지는 자기 남편 이름은 뭐라고 했습니까? 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다. 근데 하나님은 왕이신데 낳은 자식은 뭐가 돼요? 보잘 것 없다, 소멸한다. 왕이 지상에 나타나는 하나의 절차, 결과적 절차가 이런 식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그 낙담할 수밖에 없지요. 낙담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 보잘 것 없고 소멸할 수밖에 없는 험하게 사라지는 거기에 이 말은 율법 세계에서 하나님이 율법을 줄 때 인간을 이런 식으로 마지막 이런 모습으로 끝나도록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이 준비한 것은 뭐냐 하면 율법 외의 한 의. 율법 외에 한 의는 누구냐 하면 바로 예수님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룻이 다윗을 낳았지요. 다윗은 누굴 낳았습니까? 다윗의 후손 누구예요? 예수님이지요. 그러면 룻은 누굴 낳은 거예요? 예수님을 낳았지요. 그게 마태복음 1장에 나온 족보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그 족보다. 거기에 그 족보에 누가 끼어들어요? 룻에게서, 다말에게서, 우리야의 아내에게서가 끼어듭니다. 보잘 것 없고 아무것도 아닌데, 거기에만 유일하게 예수님이 거기에 자리 잡고 계시는 겁니다.
그러면 이거는 그러면 내가 살기 위해서 예수를 믿기 위해서 이제 보잘 것 없이 되어야 되느냐, 그 말이 아니고 그거는 완전히 반대로 생각한 거예요. 내가 없어도 괜찮은, 보잘 것 없어도 괜찮고, 소멸해도 괜찮은 나를 대체하는 나가 예수님에게 준비되어 있습니다. 나를 대체한 나. 기존에 나는 대체가, 인간은 자기가 기억을 하고 손대지 말라. 나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간섭하지 마라. 하거든요. 그게 바로 율법에 저촉 받는 거예요. 율법에 저촉.
백날 그렇게 몸부림치고 저항해도 결국 보잘것없이 망해요. 그런데 율법 외에 한 의는 이미 태어날 때부터 의로운 분의 자손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그 율법 외에 한 그 의로 태어난 그 하나님의 백성은 어떤 경우라도 흠이 없고 완벽하고 의로워요. 거룩하고.
성경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이게 너무나 엄청난 비약적인 말처럼 들려져가지고 사람들이 이 말을 감당을 안 하려고 해요. 내가 요렇게 해서 예수 믿고 요렇게 해서 구원받고 이건 하려고 했지 바로 내가 요렇게 요렇게 요렇게 상관없이 그냥 너는 따로이 하나님 율법외의 한 의로 이미 장만되어 있고, 마련돼 있고, 이미 출생돼 있다는 이 사실을 사람들은 못 믿습니다. 믿을 수 있는 사람 없지요. 믿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성경은 율법 속에는 율법 바깥에 일어나는 생산물을 위해서 율법 내에 법칙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 법칙이 뭐냐면 바로 시형제 결혼법. 신명기 25장 6절에서 9절, 아까 그 후견인 할 때, 제일 마지막에 나왔던 네 번째 기능이 이 시형제 결혼법이잖아요. 아예 자식까지 낳아 줘버려요. 자기 자식 아닌데. 안 돼요. 하나님 자식 낳는데 보아스가 참여했다. 이렇게 되지요.
보아스의 자식이 안 돼요 누구 자식이냐, 엘리멜렉의 자식이에요. 엘리멜렉 이름 뭡니까? 하나님은 나의 왕이시다. 하나님의 아들이 룻을 통해서 이 땅에 출연합니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예요. 왜 출연하느냐 기존에 인간 말고 아담 후손 말고 혈통 말고 하나님이 따로 생각해 놓은 인간. 천국 백성. 그는 친히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서 그걸 생산하고 만들어내는 거예요.
율법외의 한 의를 요한복음에서는 뭐라고 하냐면 이것을 가지고 사랑이라고 해요. 사랑. 율법 외의 사랑. 율법 안에는 사랑이 없고, 율법 외에 사랑이 있어요. 사랑이라 하는 것은 율법을 다 온전하게 다 될 때 그 덩어리가 사랑이에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고, 그 사랑 말입니다. 그 율법을 다 지킬 때에요. 어떤 일점일획도 다 지킬 때나 사랑이 나와요. 그래서 사랑은 인간은 사랑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사랑은 율법을 다 지키고 난분이 자기가 확장. 자신의 몸의 확장, 자기의 영향력의 확장에 의해서 사랑의 자식이 태어나는 거죠. 사랑의 자식이에요. 두 사람이 사랑할 때 인간 세계에서는 왜 사랑이 안 되느냐 하면, 인간은 사랑 값으로 요구하기 때문에 그래요. 혼수 뭐 이런 거. 내가 당신을 사랑한 어떤 아기가 태어난다면, 내가 당신을 사랑한 결과가 요 아기다, 이렇게 하고, 이쪽에서는 아니야 내가 당신을 사랑한 결과가 이 아기야.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 인간 세계에서는.
그런데 율법에서의 시형제 결혼법에서 이거 아기는 빈 공간입니다. 어느 것도 내 것이라 할 수 없는 빈 공간에 사랑이 나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 결과도 아니고 네가 나를 사랑한 결과도 아니고 빈 공간에서 나오는 거예요. 요것이 바로 뭐냐 하면 성도의 교제예요. 성도의 교제. 성도의 교재에 대해서 내가 부산 강의에서 한 적 있어요. 서로 헌담하고 싸우고 하는 그 거. 아주 아름다운 교제예요.
왜냐하면 되어진 결과에 대해서 아예 내 거라고 할 생각을 애초부터 철회할 수 있습니다. 철회. “네가 천국 가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이거. 얼마나 귀한 사랑입니까. 그럼 저쪽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그럼 니 신앙이 내 신앙보다 낫다는 뜻인가.” 이리 나오거든요. “니, 복음은 어느 정도 아는데?” “니 십자가복음 몇 년 들었어? 어디 고참 보고.” 갑자기 고참이 등장하네. 그러니까 그 모습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쪽에도 속하지 않지요. 왜?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이 복음을 자기 소유화시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오직 주님의 소유며 그 복음의 소유에서 주님의 능력에 의해서 여기 사랑이 등장합니다. 십자가 사랑이지요. 십자가 앞에서 반복되는 십자가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한 방식을 하나님께서는 사용하시는 겁니다.
어쨌든 간에 지금 나오미 가정은 큰일 났어요. 땅 없지, 노동력 없지, 일할 만한 아들 다 죽었지. 그렇게 나오미 가정에서 놔야 할 것은 종범이도 없고, 선영이도 없고, 뭐 쓸만한 차 없고, 포 없고, 뭐 차 떼고, 포 떼고, 뭐 없어요. 없고, 없고, 없고, 없고예요. 이 없는 자에게 율법이 준비된 게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초과의 원리. 초과의 원리 또는 여분의 원리. 출애굽기 22장 21절에서 24절, 레위기19장 9절 말씀, 신명기 24장 19절 말씀, 짜투리는 줍지마라. 땅 주인이 농사짓는 것은 자기가 농사해서 거두는 거예요. 농사해서 거두었으니까 그 밭에서 이삭 나는 것은 전부 다 자기 소유잖아요. 그 하나라도 어떻게 됩니까. “다 내 거, 내 거, 내 거, 내 거야.” 내 것이 되지요.
그 내 거라고 여기고 가는 것에 대해서 “그 떨어진 거 놔두시지. 그 떨어진 거 너 거 아니야.” 내 거라고 여기는 예외 요소를 자기 것 안에다가 하나님께서는 집어넣어 버려요. 너는 온전히 내 것이라는 곳에, 니 것이 아닌 게 거기에 포함돼 있다는 거예요. 그래야 그 이삭과 그 모든 그 곡물에 대해서 내 노력했다는 소리를 일체 못 하게 만들어요.
그러니깐 보아스가 일꾼들에게 보리 베는 일꾼들에게 부탁하기를, “얘들아, 이삭은 남겨두어라.” 이 말은 너희들 지금 율법을 수행하는 중이라는 뜻이에요. 율법을 수행하는 중이다. 그냥 노동이 아니고 율법을 수행하는 중이에요.
보아스 입장에서도 그게 마음이 편하고 이제 자신만만한 게 뭐냐 하면 이삭을 줍지 않고 했을 경우에는 자기가 그냥 “하나님, 저 율법대로 레위기 19장 9절대로, 신명기 14장 19절대로 내가 지금 율법 다 지킵니다.” 이렇게 자기 의가 될 수가 있잖아요.
그런데 이삭 줍는 그 주인공이 예외 존재가 나의 모든 나됨을 오히려 그걸 다스릴 만한 초월적인 여분의 존재가 보아서 입장에서 이미 나타났다는 것이 반가운 소식이지요.
쉽게 말해서 보아스가 율법에 갇히지 않고 율법 외에 완성, 완성 범위로 벗어날 수 있게 자기를 인도하는 인물이 등장한 것에 대해서 보아스는 굉장히 기쁘고 감사한 거예요. 그 사람이 누구냐 룻입니다. 아무 노동도 없어요. 그냥 뭐냐 줍는 거예요. 짜투리를 줍는 거예요. 만나처럼. 하나님이 거져주신 것을 거져 줍는 역할을 하는 존재. 그 존재는 인간의 노동으로 버티는 인간 세계에 속하지 않은 다른 인간성 인간형입니다. 다른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룻의 입장에서 자기의 목숨은 어디에 달렸습니까? 자기 목숨은 하나님께 달린 거죠. 하나님께서 거저 줄 때까지만 살고 안 주면 안 살면 되니까 똥배짱도 이런 똥배짱이 없어요. 진짜 그때 깨춤 춰야됩니다. 팔짝 팔짝 뛰어야 돼요. 어떻게 율법을 버린 이 세상에서 아직도 율법대로 이삭을 줍지 말라고 명령하는 자가 있느냐.
이삭은 룻 것도 아니고 이삭은 보아스 것도 아니니까. 보아스와 룻 사이는 어떤 관계? 연인 관계, 사랑의 관계. 어떤 것도 내 것이 아니니까. 보아스는 내 것도 아니고 룻은 보아스 것도 아니고 누구 것입니까? 율법의 것.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완성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유. 소유된 백성이 되는 거예요. 백성은 그렇게 만드는 겁니다.
룻은 자기 남편은 죽었어요. 룻은 그것을 율법에 의해서 죽었다고 보는 거예요. 아까 그 후견인 중에서 아까 네 번째가 뭐라고 했습니까? 끝까지 복수해 주는 거라 했지요. 끝까지 복수하는 거.
부산 강의에서요. 이사야 63장 1절에 그 메시아가 어디서 온다 했습니까? 에돔에서 온다. 에돔에서. 에돔에서 메시아가 온다 했어요. 상당히 구원은 유대에서 난다는 것은 요한복음 4장에서 분명히 언급했는데 왜 갑자기 유대 나라가 아니고 그 에돔에서 구원자가 오느냐. 이게 굉장히 흥미롭습니다.
왜냐하면 이거는 어떻게 해석되느냐 하면 에돔이란 뜻이 있어요. 뜻 자체에. 에돔 뜻이 뭐냐 하면 붉다. 벌겋다 이 말이에요. 벌건데, 이게 술 잡숴서 벌건 게 아니에요. 방금 한 건수 해서 벌건 거예요. 피가 튀어서 벌건 거예요. 도축장에 일한 사람들은 소 한 마리 잡았어. 방금. 피가 그 하얀 가운에 막 튀었어. 위생복이 온 피가 벌게요. 그 도축장 직원이 힘들어가지고 칼 쥐고 난도질하고 나올 때 바깥에 사람이 뭐라고 이야기하는 식입니까? “와~~ 메시아다!” 이리 되는 거죠. 왜? 방금 심판했기 때문에.
그러니 후견자가 있다는 말은 하나님을 후견자 하지 않는 자에게는 어떤 대상자가 되느냐 하면, 후견자에 의해서 처절하게 안 갚음을 받을 수밖에 없는 보복의 대상으로서 그들은 메시아의 진노하심과 분노하심을 그대로 반영해 줄 그러한 대상에 처지에 입장에 놓인 자에요.
제가 왜 이 말을 하느냐 하면, ‘저들은 율법대로 안 살아도 그냥 살고, 나라도 율법대로 복음대로 살아야지’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복음대로 안 사는 게 지금 여유를 누릴 입장이 못 돼요. 왜? 보복당하니까. 주님한테 보복당한다고요.
‘아이고, 뭐 예수 믿는 것은 나중에 내가 할 일 없을 때 늙어서 그때 예수 믿지.’ 지금 이런 사람한테 은근히 그러한 태도를 갖고 있는 사람한테 은근히 부러워하지 마세요. 나도 그럴까? 그리할까? 지금 빡시게 할 게 뭐가 있노. 천천히 대충 복음에 다리는 한 짝 걸치다가 갑자기 어려움이 있다, 사업이 안 된다 할 때 그때는 “아이고, 우짜노? 그 때 빡시게 복음 연구하면 되잖아” 이런 요령을 부리면 안 돼요.
왜냐하면 복음 앞에 모이고 복음이 이렇게 같이 생각한다는 것이 특혜 받은 거기 때문에 그래요. 하고 싶다고 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여건이 이렇게 오늘 올 수 있는 여건이에요. 지금이라도 아들이 군에 갔다가 휴가 나와 보세요. 못 옵니다. 맛있는 거 해준다고. 어떤 거 하나 주님한테는 필이 필연이 되겠지요.
이제 이야기 계속해 봅시다. 어쨌든 간에 현재 나오미 가정은 쫄딱 망했다. 뭐 이리 보시면 정확합니다. 쫄딱 망한 거예요. 그리고 그 젊은 그 여인이 미망인이 과부지요. 남편 죽은 과부가 그것도 외지 사람이 그 필리핀이라든지 저 필리핀 베트남 여인이 남편 없이 외지에서 할 때 그 일꾼들 우악스럽고 억세스러운 그 일꾼들이 그 아무도 보호받지 못한 여인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놀리고 강압적으로 또는 폭력적으로 위협을 가할 가능성이 많겠지요.
여기서 우리는 이걸 한번 생각해 봐야 돼요. 주일날 설교했는데 여자란 없는 존재. 이거는 부산강의에서 언급을 했는데, 여자는 이게 없음이에요. 없음. 없음. 그러면 없음을 없으니까 이게 없음을 없음으로 하려면 여기에 없음을 없음으로 들어낼 수 있는 있음이 있어야 되겠지요. 이게 무슨 세계냐 하면 남성의 세계에요. 남성의 세계.
여자는 약하지요. 그런데 여자가 약한데 약하고 없음인데 여자가 있음으로 나오고 강한 방법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그건 뭐냐하면 자식. 그것도 아들이죠. 자식을 가질 때예요. 자식을 가질 때 그것도 강한 자식. 그러니까 룻기의 중간 부분에서 어떻게 되느냐 하면 불쌍하다 쫄딱 망했다. 이건 대책 없는 가정이 되었다. 이렇게 될 때 중간 부분은 뭐냐 하면 이 여인이 어떻게 자식을 갖게 될 것인가, 그 이야기가 2장부터 해서 4장까지 계속 이어집니다.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족보가 어떻게 살게 되느냐, 그 이야기가 4장까지 계속 이제 이어져 나갑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아까 그 후견인 세 번째 시형제 결혼법이 됐잖아요. 시형제 결혼법. 시형제 결혼법이 있어야 뭐 합니까. 자기 좋아하는 남자가 있어야죠. 법은 있어도 강제 결혼할 수 없는 거 아닙니까. 어떻게 뭐 솔로로 나갈까요. 솔로 나가 봤자, 나는 선택하지 않겠습니다. 끝나는 거예요.
그러면 나오미와 며느리 룻이 자식을 낳는 방법은 뭐냐, 뭐 괜찮은 재벌 남자 만나느냐 아니에요. 뭐냐 하면 율법과 더불어 사는 남자를 만나는 거예요. 율법과 더불어 산다는 남자는 남자가 율법을 지킨다는 말이 아니고 율법이 그 남자를 주도하는 남자. 율법이 주도하는 남자를 만나는 거예요. 그러면 그 남자는 여자를 사랑하기 전에 먼저 뭐부터 사랑해야 돼요. 율법부터 사랑해야죠. 하나님의 계명부터 사랑할 수 있는 남자. 그런 남자가 돼야 되죠.
그런 남자니까 자기 일하는 일꾼 억센 남자 일할 때, 그게 언제 오느냐 하면 이게 겨울에 와요. 초실절에 와요. 초실절. 초실절이라 하는 것은 유월절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초실절은 유월절 중에 하나에 포함돼요. 무교절 중에 하나 포함되어 있어요. 초실절. 딱 하는데 그 근처 그 보리의 이삭을 베어서 그걸 하나님께 드리는 절기가 초실절 또는 유월절이라고 하는 거예요.
맥추절은 밀 생산하는 겁니다. 처음에는 보리부터 먼저 하지요. 보리부터. 맥해서 보리지만 사실은 밀이에요. 그때 와가지고 땅도 없지. 뭐 먹을 것도 없지. 그 나오미가 그 며느리를 이렇게 그 현장에다가 이삭 줍는 현장에다가 보냅니다. 보낼 때 그게 아마 친척 밭인 거 같아요. 친척 밭에 이렇게 보냈다. 보냈을 때에 여기 룻기에 나온 것처럼 그 8절에 보아스가 2장 4절 거기에 2장 4절 단어 하나 나오지요. 마침.
타이밍 맞게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라고 일하는 자들에게 뭘 선포합니까? 율법을 선포해 버리지요. 그다음에 모압 소녀 미망인 줄 몰라요. 그냥 소녀인 줄 알아요. 8절에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에 가지 말고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와 소년들과 함께 있으라.”
자, 이러한 일련의 보아스의 행동은 보아스는 자기 밭에 그냥 추수해서 내 것 따낸다 내 것 건진다가 아니라 전체가 뭘 봅니까?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현장으로 보는 거예요. 일하신 현장에 누가 나타났습니까. 모압 소녀가 이삭을 줍고 있더라 말이지요. 그러면 이것은 이방인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누구의 뜻이다? 여호와 율법을 주신 여호와의 뜻이다, 라는 것을 보아스가 이미 마음속에 갖고 있었어요.
갖고 있고, 그 모압 소녀가 왔는 것을 가지고 율법이 율법들을 시행하는 하나의 실습의 장으로 그렇게 해석을 한 겁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보아스가 스스로 자기한테 정신 차려! 정신 차려! 이때 잘해야 돼. 이런 이야기입니다. 잘해야 돼. 9절에 보면 보아스 말고 다른 일꾼들은 뭡니까. 항시 건드릴 대상자가 되지요. 그래서 보아스는 그걸 알고 소년들에게 건드리지 말라. 그리고 보아스는 이미 나오미의 가정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2장 그 뒤에 쭉 나옵니다.
여기서 이제 흔히 그 룻 설교할 때 보통 교회에서 설교할 때, 보아스가 왜 룻에게 잘해 줬는가, 룻이 시어머니한테 효도해서 그렇다. 이게 주로 이게 어디에 설교하느냐 하면 5월 8일이 끼어 있는 그 주간에 어버이주간에 룻이 효도한 그 이야기 나옵니다.
그럼 오늘 스승의 날인데 오늘 스승의 날이 본문 뭡니까? 오늘 본문 간단하죠. 내가 죽으니 너도 따라 죽어라. 이게 스승의 날이에요. 내가 죽으니 너도 덩달아 줄줄이 따라 죽어라. 왜 스승의 날에 그런 이야기는 안 하는지 몰라요. 따라 죽으라는 이야기는 왜 안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저 지엽적인 거, 교인들을 지엽적인 거, 지 챙기는 거, 하나님에 지 득 보는 설교. 그런 것만 하지요. 걱정하지 마세요. 주께서 복수하십니다. 가만두지 않아요.
2장 15절에 보면 “룻이 이삭을 주우러 일어날 때에 보아스가 자기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그에게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하고 책망하지 말며 또 그를 위하여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에게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 하니라” 그래서 룻이 짜투리를 얻었지요. 아~~ 이 짜투리에 족하고 만족해서 더 는 소원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 아~~ 이런 사람이 있을까.
여로보암을 아히아 선지자 만났잖아요. 아히아 선지자가 새 옷을 입고 갔어요. 새옷을 입었는데 새옷을 입고 간 이유가 나중에 결국 새옷이 찢어진다는 말이에요. 새옷이 찢어져서 한 10분의 구가 날아가고 두조각만 남았다면, 묻습니다. 이 두 조각이 새옷에 해당됩니까? 헌옷에 해당됩니까? 중요한 질문이에요.
이게 새 옷에서 나온 쪼가리예요? 헌 옷에서 나온 쪼가리입니까? 새 옷이죠. 그러면 새로운 이스라엘은 유다 지파를 통해서 계승된다는 뜻입니다. 찢어지지 아니하면 새것이 안 나온다는 거예요.
새로운 하나님의 다윗의 등불은 늘 그때그때마다 제거하고 제거하고 짜투리 남기고 짜투리 남기고 짜투리 남기는 식으로 마지막에 예수 그리스도에 도달 되게 하시는 거예요.
그 짜투리를 보고 이렇게 나오미도 만족하고 그리고 그 룻이 만족한다는 것은 그 당시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뭡니까? 그 뭐 동양해서 얻은 거 그게 뭐 그렇게 좋으냐, “얻어 먹으니 그리 좋냐?” 이런 식으로 할 거예요. 그러나 룻은 이게 하나님의 율법이 살아있는 증거물을 이만큼 모아온 거예요.
나는 양식 먹어서 사는 게 아니고, 율법이 아직도 남편 죽고 시아버지 죽일 때도 하나님이 살아 계시지만, 그 아들 죽였던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양식까지 제공하는 하나님으로 계시기 때문에 율법은 살아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약간 유명한 노래 가사를 이렇게 했습니다. 노래 가사. 부산 강의에서는 시간이 없어서 못했는데. 요거는 우리 마저 해봅시다.
The Brothers Four
I may not have mansion I havn't any land
난 집도 한 줌의 땅도 없어요.
No even a paper dollars to crinkle in my hands
주머니에 바스락거리는 지폐 한 장 없지만
But I can show you morning on a thousand hills
하지만 수많은 언덕의 아침을 당신께 보여주고
And kiss you and give you seven daffodils
당신께 키스하며 일곱 송이 수선화를 줄 순 있어요.
I do not have a fortune to buy you pretty things
난 예쁜 것들을 살 수 있는 재산은 없지만
But I can weave you moonbeams for necklaces and rings
하지만 달빛으로 목걸이와 반지를 당신께 엮어 줄 순 있어요.
And I can show you mornig on a thousand hills
그리고 수많은 언덕의 아침을 당신께 보여주면서
And kiss you and give you seven daffodils
당신께 키스하며 일곱 송이 수선화를 줄 순 있어요.
Oh, seven golden daffodils all shining in the sun
아, 태양 아래서 빛나는 황금빛 수선화 일곱 송이,
To light our way to evening when our day is done
우리의 하루가 끝날 무렵, 저녁으로 가는 길을 밝혀주죠.
And I will give you music and a crust of bread
나는 당신에게 음악과 빵 한 조각을 드릴 수 있어요.
And a pillow of piney boughs to rest your head
그리고 솔가지로 만든 베개를 드려 머리를 뉘게 할 수 있어요.
우리나라에 트윈폴리오가 노래 불러서 좀 유명했는데 그게 외국 노래였어요. 일곱 수선화. 이거 노래 틀어도 되는데 또 이게 저작극 또 올라가서 그냥 할게요. 이건 내가 노래 부르는 것은 저작권과는 관계없습니다.
난 저택을 가질 수도 없고 땅도 없어요. 내 손에 부스럭대는 지폐 한 장도 없어요. 하지만 당신께 보여 줄 거예요. 수많은 언덕의 아침을. 키스와 함께 일곱 송이의 수선화를 드릴게요. 당신께 좋은 걸 사 줄 형편이 못돼요. 아예 노골적이죠. 그러나 달빛으로 먹거리와 반지를 짜 줄게요. 아~ 일단 낭만적인 것은 좋다만은 실속이 하나도 없어요. 당신 시집오면서 나한테 뭐 해줄 건데? 달빛으로 반지를 짜 줄게요. 이런 거. 목걸이 짜 줄게요. 상견례에서 싸움 나지요.
하지만 당신께 보여 줄게요. 수많은 언덕의 아침을. 키스와 함께 일곱 송이 수선화 드릴게요. 일곱 송이 수선화, 큰 빛 수선화, 태양 아래 빛나고 하루가 끝나면 그 빛으로 밤을 밝히리라. 당신께 음악과 빵 한 조각드리고 그대로 당신으로 하여금 편하게 자도록 소나무 베개도 드릴게요. 혹시 이 사람이 다단계 아닌가 몰라. 그대로 편하게 자도록 소나무 베기를 드릴게요.
자, 문제 나갑니다. 이 사람이 준다는 사람이 자기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게 질문입니다. 객관식. 자기 거 줍니까? 하나님 거 줍니까? 하나님 거 주지요. 하나님 거. 지가 뭐 햇빛을 만듭니까. 다 있는 거잖아요. 있는 것을 시답지 않게 여기고 너무나 자기 돈벌이에 빠지다 보니까 놓쳐 버린 감사의 고마움. 감사하고 고마움. 이걸 되새겨 줘서 이걸 혼수감으로 내놓는 거예요.
우리는 내 것만 내 노력한 것만 귀하다 여기는데 정말 귀하고 귀한 것은 거져받는 것 그것이 더 귀하다는 거예요. <일곱 송이 수선화> 이 노래는 저작권 관련돼 있어서 끝나고 난 뒤 여러분들이 찾아서 들어보세요. 들어보면 아 이 노래하고 아실 거예요. 일곱 송이 금빛 수선화. 금색으로 있는 수선화. 수선화도 자연에 있는 것이고, 금빛 햇빛도 자연에 있는 것이고, 거져주시는 자연의 혜택. 그 가운데서 이렇게 이 노래가 있어요.
이 노래를 제가 이렇게 채택한 이유는 아무것도 없음에 없음이 주는 그 속에서 있음에서 얻는 그 고마움과 감사보다 더 큰 게 있다는 거예요. 그 이삭, 남이 줍지도 않는 그 이삭. 그 이삭을 보면서 말씀이 율법이 살아 있다는 것을 두 나오미와 며느리가 그렇게 기뻐하는 거예요. 그 일을 누가 한다? 후견자가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걸 보고 이제 이쪽에서 나오미가 또 속도를 내내. 나오미가. 잡아라. 물 들 때 노저어서 잡아야 돼. 여기서 주춤하면 안돼. 망설이면 안돼. 그냥 가야돼. 그래서 3장 3절에서 “그런즉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 마당에 내려가서 그 사람이 먹고 마시기를 다 하기까지는 그에게 보이지 말고 그가 누울 때에 너는 그가 눕는 곳을 알았다가 들어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 그가 네 할 일을 네게 알게 하리라” 이리 되어있어요.
나오미 시어머니가 시키는 것은 상당히 도발적이에요. 그냥 묻지도 말고 임신이나 시켜라. 그러면 그다음부터 사랑의 전쟁이 알아서 다 해줄테니까. 하여튼
임신만 시켜! 빼도 박도 못하게 꽉 물어. 이런 식으로 상당히 도발적으로 보이는데 중요한 것은 그 이야기 아니고, “들어가라” 그 후견인이 될지 안 될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그 보아스가 형성된 그 사람의 공간에 네가 거기에 들어가라.
들어가라. 다시 말해서 너는 너의 공간을 포기하고 들어갈 때에 경상도말로 “처분대로 하이소” 다이소 아닙니다. 처분대로 하이소. 다이소는 천원 받잖아요. 하이소는 천원도 안 받아요. 그 처분대로 하시옵소서. 이게 바로 성령 안, 십자가 안, 예수 안에 들어갈 때에 저분이 나의 내가 나를 믿는 것 이상으로 나의 후견인 것을 믿을 믿는 자일 때는 자진에서 들어가는 거예요.
“차라리 개라도 좋으니까 들어가겠습니다.” “들어가라.” 밀어붙이지요. 이게 이제 룻은 시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들어갑니다. 그럼 이 들어간다는 말은 여기서 뭐냐하면 일생일단의 위기 순간이 옵니다. 옛날에 옛날 이야기데 이휘재라는 개그맨이 MBC 방송할 때 이런 방송에 프로그램이 있어요. 선택지. 두 가지 선택을 다 해보는 거예요. 두 가지 선택. 그래서 나는 결심했어! 하는 유명한 말이 있어요. 나는 결심했어! 이쪽도 해보고 저쪽도 다 해 보는 거예요. 다 해보고 좋은 쪽을 선택하잖아요.
그런데 이거는 뭡니까? 이게 왜 위기냐? 선택할 권한마저 후견자 율법 앞에서는 선택하는 고난마저 우리한테는 없다는 것을 룻은 그걸 알아요. 왜? 저는 이미 모압에서 올 때부터 모든 것이 없기 때문에. 어떤 보호받는 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그 율법 아니면 없어요. 그냥 죽으려고 온 거예요. 율법이 죽으라면 죽겠나이다. 왜? 나는 이미 죽었으니까. 죽은 자에게 선택권이라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냥 내가 이 보아스가 나에게 어떻게 처분하냐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율법의 처분으로 나는 받아들이겠습니다.” 이게 믿음이지요.
그 믿음의 특징은 자기 부인이 전제가 되어야 돼요. 제대로 진짜 말로만 난 없다 부정한다, 가 아니라 제대로 없는 거예요. 진짜 없는 거예요. 왜? 주어진 것은 전부 다 후견자 되신 주님이 주신 거니까. 아무것도 없지요. 이게 어느 시대입니까? 사사 시대. 사사 어떤 시대? 자기의 복이 소원대로 자기만 챙기기 위해서 하는 그 시대에 진정한 엘리멜렉 하나님은 나의 왕이시라는 그 이미 사라진 이미 파괴된 가정인데, 그 파괴된 가정에 왕이시라는 이름을 진 실체는 룻의 가정을 이름은 파괴됐지만, 실제적으로는 그 가정을 하나님은 왕이시다가 어떤 식으로 그 백성으로 만든 하나님의 진짜 백성을 만드는 걸 보여 주는 것을 보여 주는 거죠.
자, 이럴 때 누가 놀랬는가, 보아스가 놀랬죠. 쓱 들어오니까. 예상 밖으로 쓱 들어오니까. 그때 이제 룻은 나오미가 시키는대로 했어요. 당신은 우리의 후견자십니다. 당신의 처분에 맡기겠습니다. 딱 그리 이야기하니까 보아스가 “내 그럴 줄 알았지. 잘 걸렸다.” 이게 아니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율법대로 하자.” 율법대로 하면 내가 순번이 두 번째 순번이다. 니보다 더 가까운 친척이 있는데 그 친척이 아까 네 가지 했지요. 네 가지. 네가지 다 해줄지 안해줄지를 내가 그 사람에게 일단 물어보겠다.
그런데 아무리 율법을 잘 지킨다해도 가난한 친절을 위해서 네 가지를 시행하는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 것이 될 수 없는데 그 다 퍼주고 퍼주고 또 퍼주고 나중에 저 사람 대신 복수해 주고 이거는 너무 너무 과하지요. 뭐 동정하고 뭐 나중에 뭐 어떤 누구 아프면 부조나 해줄 수 있지만, 전적으로 전적으로 네 인생 내가 책임질게. 그런 후견자는 그런 일가친척은 거의 없습니다.
물론 아주 어릴 때는 불쌍해서 이모가 조카 너를 키워줄게. 이런 건 되는데. 이건 다 컸는데 뭐예요? 그거 안 되잖아요. 그것도 하나도 아니고 둘이에요. 시어머니하고 며느리. 뭐 가능성 없어요. 시어머니는 지금 어디 충전 공장에서 일할 겁니까 뭐 할 거예요? 지금 어~~ 허리야, 이러고 있는데. 무슨 공장에서 받아 줘요. 안 돼요. 안 되지요. 그 며느리도 마찬가지에요. 뭐 며느리가 언제 뭐 시어머니 존경한다, 평생 모신다 하다가 공장다니면서 어떤 남자 만나 해버리면 이쪽 새로운 신랑의 시어머니 있는데, 옛날 구닥다리 시어머니 챙길 필요 없잖아요. 관계가 복잡해요.
그런데 율법이 하나님 말씀이 보아스는 말씀으로 해 가지고 나도 내 마음대로 안 되고 우리 시킨 말씀 시킨 대로 해야 되거든. 내가 그 일순위한테 내가 이야기해 볼게요. 그래서 이제 일순위하고 이야기를 했어요. 그리고 “네가 온 걸 쉿! 아무도 모르게 하자. 아직까지 율법의 결정이 안 났다. 괜히 안 좋은 소문 나면 니 난처하잖아.” 하고 그다음 또 어땠냐면 또 가면서 빈손으로 안가고 듬뿍 보리 여섯 말을 또 담아가지고 너 시머니하고 잘 해라. 하고 이렇게 했다 말이에요. 그러니까 지금 관계 한 적도 없고, 그냥 이걸 보류된 거죠.
했을 때, 며느리 입장에서 시어머니 입장에서 굉장히 섭섭해하는데 이미 이만큼 양식을 이미 얻어 왔으니까, 아~ 이게 완전히 종결 난 상태가 아니고 이게 유예됐구나! 대법원 갔다가 다시 파괴돼 가지고 고등에 왔지요. 이 고등 판결문 남아 있으니까 대통령 되든 안 되든 이거 자칫하면 대통령 발언 같아서..., 취소 될 수도 있는 문제라는 말이에요. 유예됐으니까. 그런데 한국의 법은 율법이 아닙니다. 자꾸 꿈꾸지 마세요. 내가 내보고 하는 이야기에요.
그 이야기는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물어서 그 첫 번째 친척이 “미쳤나? 내가 내 생돈 다 들어가는데. 나 안 한다. 안 한다.” 그러니까 하는 말이 그걸 그냥 말로 안 한다 해가 딴소리하지 말고 신발 벗어라. 신발을 벗어서 이제 증거를 삼았지요. 장로들 앞에서 하고 정식으로 보아스가 보는 앞에서 그 백성들
앞에서 그 룻과 혼인했습니다.
그래서 13절에 이에 보아스가 룻과 취하여 아내를 삼고 동참하였더니, 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 여기 이제 마지막 관문이에요. 룻의 남편은 보아스지요. 보아스의 아내는? 없지요. 보아스의 아내는 없어요. 왜냐하면 없는 자식에서는 없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거꾸로 발생하기 때문에 그래요. 태어날 수 없는 자식.
예를 들면 이거에요. 마리아에게서 누가 태어났습니까? 예수님이 태어났지요. 그러면 마리아, 요셉, 없는 아빠, 엄마가 돼요. 물론 마리아는 있어요. 요셉도 있어요. 그러나 땅에서는 육신을 마리아 육신을 했으니까 마리아 어머니 맞아요. 그런데 하늘나라에서는 모조리 마리아든 요셉이든 없는 이 지상에 없는 존재인데 예수님 때문에 자식 없는 자식으로 말미암아 새로 발생된 아빠 엄마 역할이라고 보는 겁니다.
하늘나라의 아빠 엄마가 아니라, 지상에서 아빠 엄마 역할한 그것이 소급해서 하늘나라서 다시 되돌려서 보게 되면 지상에 없는 역할을 그들이 부여받은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여서 일시적인 아빠 엄마 역할을 하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지금 이 세상에는 없는 존재예요. 왜? 돌아가시니까 없고. 지금 일 안 하니까 없는 존재로 여기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 일한다, 이리 되면 우리는 뭡니까? 이 세상에 어떤 존재가 돼요? 없는 존재가 되는 거예요. 없는 존재. 그러니까 성도에게서 나오는 모든 말은 이 세상의 인간들 머릿속에 지혜 속에는 나올 수 없는 이야기가 성도를 통해서 나오는 겁니다. 그 행위나 태도, 마음가짐, 의식, 다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나는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 산다는 이거는 얼토당토한 말도 안되는 누가 들어서 그걸 누가 믿어요? 말이 안 되지요. “방금 니 입으로 이야기했잖아.” “내가 한 것이 아니고 주의 말씀이 한다.” “자꾸 복음 핑계 되지 마! 방금 니가 이야기했잖아.” 그러니까 이 땅에 성도가 당하는 핍박과 모독과 고난의 대표적인 것이 뭐냐 하면 맨날 복음 핑계된다. 복음 핑계 된다. “복음 핑계 아니고 진짜인데.” “에이, 또 핑계된다.” 맨날 복음 핑계 된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러분 복음을 핑계 대는 게 아니고, 복음이 아니면 그런 이야기가 안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당신도 핑계 대고 이야기해 보지. 못해요. “나도 복음 핑계대고 이야기해 볼까” 이게 안 돼요. 할 수가 없어요. 네가 일하는 것이 네가 말하는 것이 아니고 네 속에 성령이 말한다. 마태복음 10장 20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바로 이 말씀을 제자들이 믿었을게요? 안 믿었을게요? 그 당시에 안 믿었지요.
성령 오고 난 뒤에 이거는 믿는 문제가 아니라 그 제자들이 늘상 체험하고 있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나는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가 빈말이 아닌 거예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일을 벌리시고 살아계셔서 활동하는데 때로는 우리가 내가 했다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 육신이 이해될 때가 참으로 자주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의 뜻이 우리의 생각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좌절되게 해주시고 좌절된 이후에 나타난 진짜 주의 뜻으로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