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241114a신31장26절(율법의 경로)-이 근호 목사
오늘은 <신명기와 한국교회>. 신명기에서는 첫 번째 나오는 제일 첫 문장에 “신명기는 받은 율법을 재천명함으로서 율법을 그동안 받은 것을 재천명한다.” 이거하고, 다시 외치는 그 지점이 요단강을 바라보면서 외쳤거든요. 요단강을 바라보면서 모세가. 여기서 구분을 해보겠습니다.
모세가 율법을 다시 외쳤습니까? 아니면 과거의 역사를 이야기했습니까? 그렇게 두 개의 문항을 만들 수가 있어요. 얼른 보면 같아 보이지요. 첫 번째는 뭐냐, 1번, 율법을 다시 전했는가, 아니면 2번, 지나온 역사를 되돌아보는가, 이 두 개가 같아 보이지요. 두 개가 같아 보일 겁니다.
요단강 앞에서 외쳤던 것이 율법을 전했다고 해서 신명기인데, 지나온 역사를 되돌아보는 것 하고 두 개가 같아 보이지만 달라요. 왜냐하면 되돌아온 역사를 되돌아보게 되면 우리가 과거에 이러한 잘못한 것도 있고, 이러한 실수도 많으니까 앞으로 다시는 그러지 말자. 하는 것은 2번. 역사에 대한 회개지요.
그런데 율법을 다시 전한다는 말은 그 과거에 했던 그 오류가 미래에 대해서 그 오류보다 더 센 오류로 이렇게 미끄러져 갈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율법을 다시 전한다는 말은 예언이 담겨있다. 과거 역사를 돌아봐서 그걸 거울삼아 우리는 정신 차리자. 그 이야기가 아니에요.
니가 한 그 과거의 오류는 너의 속에 이미 암세포처럼 박혀 있어가지고 그게 세월이 가면 갈수록 이젠 전신에 다 이스라엘 전체에 퍼질 것이다. 따라서 너는 오류 덩어리가 될 것이다. 너가 오류 덩어리가 될 때 그 너에 대한 너에게 일어나는 모든 고통스러운 파멸이 일어나거든 이것은 인간은 달라져도 말씀은 달라지지 않는 사례인 줄 알아라. 이 말입니다.
“교회 다녀서 정신 차려서 바르게 살면 내 미래는 펼 것이다. 그리고 죽어서는 천국 갈 것이다.” 라는 이 사고방식은 애초에 성경 속에 없는 겁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내가 말했지. 너희들 흙이라고. 내가 처음부터 말했잖아. 너희들 가운데 구원될 사람 아무도 없다고. 다 망한다고. 너희들 안 믿지? 하지만 내가 너희들 믿게 해줄게. 네가 아무리 말씀대로 살아봐야 점점 더 니가 원치 않는 좋은 것이 아니고 망하는 쪽으로 갈 것이다.” 하는 거예요.
사람은 어떤 행동을 할 때, 나쁜 결과를 원해서 행동하는 법은 없어요. 다 좋은 결과를 상상하고 기대하기 마련이잖아요. 그걸 종교와 결합할 때 사람들은 그걸 뭐라고 보느냐, 이렇게 표현해요. “영적인 것을 아시면 당신은 행복해질 것입니다.” 영적인 세계를 아시면 당신은 행복해질 것입니다. 그럼 영적인 세계는 무슨 용도에요? 내 행복하기 위한 필요한 지식의 확보란 말이지요.
이미 영적인 세계를 관심을 가질 때, 그냥 빈 마음으로 가지는 게 아니고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영적 세계의 문을 두드리게 되지요. 그러면 문을 두드리면 누가 열어줍니까? 예수님이 열어줍니까? 마귀가 열어줍니까? 마귀가 열어주지요. “잘 걸렸다. 인간아! 니 행복을 원하지? 내가 행복 줄게. 그 대신 니는 지옥이야.” 그리되는 겁니다.
말씀은 스스로 말씀이 어떤 식으로 완료되고 완성되고 어떤 경로를 통해서 말씀이 인간으로부터 얼마나 수모당하면서 핍박을 받으면서도 굳굳하게 말씀은 자체 완성이 되었다. 그걸 드러내기 위해서 말씀을 준 거예요.
그 말씀을 율법을 따라서 요단강 앞에서 신명기에 전합니다. 그 전하는 내용안에 뭐가 포함되는가 하면, “나는 너희들 때문에 나도 약속의 땅 구경도 못했다.” 이게 내용이 포함되는 거예요. 모세가 멀쭉이 서가지고 못 들어가지요. 여기서 이제는 모세는 이스라엘과 함께 작별의 순간이 옵니다. 그 작별의 순간에 앞두고 모세의 예언 속에는 요단강 건너가서 벌어질 상황을 요단강 건너갈 때는 이러한 입국 절차를 밟아야 된다. 그것까지 알려줘요.
요단강 건너가기 전에는 광야고, 광야에서 하나님이 준비한 약속의 땅에 갈때에 약속의 땅 입국 절차를 밟는데 그 밟는 절차가 뭐냐, 여호수아의 앞부분에 나와요. 돌에다가 말씀을 새기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은 뭐냐, 지금부터는 이 새겨진 말씀 외에 새기는 것도 외치는 것도 다 포함이 됩니다. 에발산, 그리심산 외치는 것도. 이것부터는 말씀에 위반되는 것은 다 죽는다. 다 죽는다. 그리되는 겁니다. 무시무시한 곳에 들어온 거예요. 무시 무시한 곳에.
미국에서 만든 스릴영화, 괴기영화에 보면 이런 영화들이있잖아요. 절대로 소리내면 외계인들이 덮친다. 외계인을 만나더라도 사이언스, 침묵을 하게 되면 산다. 여러 가지 컨셉들이 있어요. 외계인 만났을 때의 컨셉들. 마찬가지로 그게 뭐냐 하면, 외계세계가 UFO가 침략했을 때는 그 지역은 내가 살던 고향이 아니에요. 더 이상. 이미 외계인에 의해서 접수된 땅이거든요. 주님은 그걸 가지고 약속의 땅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 땅은 너희가 살기 위한 용도의 땅이 아니고 내가 접수했다.
따라서 접수할 때는 이 땅에 사는 조건도 어느 쪽에서 제시하겠어요? 접수한 그 분 쪽에서 약속의 땅 조건을 제시하겠지요. 그런데 모세는 그 정도에서 머무는 게 아니에요. 그 약속의 땅에서 살게 되었을 때 모세는 비록 그들과 합류하지 못하고 경계선에서 바라보면서 120살 때 죽는데. 그 죽으면서 그 땅의 원칙이 이 땅에 차지한 이스라엘 전체를 녹여버린 거예요.
녹여버리면 녹여버린 원리원칙만 그 땅에 고스란히 남겠지요. 약속의 땅에 산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다. 다 죽었다. 그게 이스라엘이 점차 역사를 다하면서 스스로 자체적으로, 강한 햇빛에 눈 녹듯이 녹아가면서 말씀의 실체는 비례해서 이게 공개되는 겁니다. 사적으로 얼마나 말씀을 지켰다. 그런 건 사적인 것은 안 통하고요, 환경적으로 이미 말씀으로 결정난 환경이 약속의 땅입니다.
살 수 없는 땅. 어느 인간도 살 수 없는 땅. 그런데 우리가 살 수 없는 땅인데 왜 살 수 없다는 이야기를 미리 우리한테 이야기하지요? 우리가 알아도 살 수 없는 걸 뻔히 알면서도 왜 살 수 없는 땅이라는 사실을 왜 미리 알려주는 겁니까? 이게 신비로운 거예요. 이 점을 신명기에 먼저 알고 들어가야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어떤 타인이라는 것을 바로 말씀을 전달받는 그들에 의해서 그들이 못 들어가고 그들이 망하면서 증언하기 위해서입니다.
약속의 땅에 아예 안 들어간 게 아니고 들어갔는데 못살겠더라, 라는 말을 통해서 주님이 어떤 분인가를 그들을 통해서 드러내는 용도로 이스라엘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오늘 신명기를 대하기 전에 서론적으로 이야기하는데. 대할 때에 우리는 어떠한 마음가짐이어야합니까? 이렇게 마음가지면 됩니다. ‘저는 안 들어가도 좋으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기만 하면 저는 족해요.’ 그런 마음가짐으로 신명기를 대해야 돼요.
왜그러느냐 하면, 우리의 조상 아담이 범죄하고 난 뒤에 수요 말씀대로 변질되고 난 뒤에는 하나님 자체에 관심이 없어졌어요. 하나님 자체가. 왜냐하면 하나님 관심보다 우선되는 관심사가 등장했기 때문에. 그게 누굽니까? 본인이. 본인이 하나님으로부터 갈 수 있는 거죠. 그래서 내 존재가 항상 하나님의 존재를 가리는 식으로 인간은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신명기 말씀을 접하면서 이제는 반대가 되어서 내 존재를 녹여버림으로서 그 배후에서 지금껏 내 존재를 꾸역 꾸역 계속 하루 하루 살게해주신 그 분의 주체성이 드러난다면 우리는 그것으로 잃어버린 하나님의 관계와 회복된 것으로 간주하고 우리는 기뻐하고 감사해야 되지요.
하나님 만나고 다시 자기 이익 얻겠다고 “그럼 언제적 구원하실 건데요?” 이런 식으로 따지지 마시고요. 구원받겠다는 나를 이제는 주께서 놓아주셔서 고맙습니다. 구원받겠다는 욕망과 욕심. 내 손에서 떠나지 않던 이 탐욕을 구원에 의한 탐욕을 이제는 종을 편안히 놓아주시는군요.
시장 갈 때 그 어린 아들 손잡고 가게 되면 어린 아들들이 얼마나 까불락 까불락 합니까? 엄마는 단단히 한다고 손잡다가 엄마도 “요새 고등어 얼마하나요?” 하다 보면 그 때 어떻게 돼요? 엄마 손에서 아들 손이 어떻게 빠지지요? 슬그머니 빠져버리지요. 슬그머니 빠져버립니다. 실컷 계산하고 보니까 애가 없어요. 교회 가서 구원받겠다고 말씀을 보고 야무지게 필기하고 그랬는데 그만 김장한다고 그러다보니까 슬그머니 주님의 관심사에서 슬그머니 빠져나왔어요. 빠져나가요.
오늘날 우리가 흔히 보여주는 이러한 일상의 모습을 우리의 선배 되는 이스라엘이 다 보여줬고 심지어 예수님 앞에서도 유대인들이 어떻게 그들이 예수님을 믿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그들이 예수님을 귀찮게 생각했는가, 그 귀찮게 한 이유가 뭐냐, 자기의 집착되어있는 자기 구원의 방식으로 인하여 본인이 본인을 안 놔준 거예요. 놓지를 못한 거예요. 끈질기게. 끊질긴 자기에 대한 사랑. 집착이지요. 자기 연민.
이것이 모든 인간들이 다 그랬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첫 번째 율법 줄 때 그들은 그걸 몰랐어요. ‘야, 율법 줬으니까 이제 이거 지키면 하나님 만난다!’ 이러고 있었다 말이지요. 첫 번째 율법 줄 때 이미 그들은 실패를 했어요. 신명기1장3절에 보면, 제 사십년 십일월에 이렇게 되어있지요. 무슨 광야에서 40년을 돌아다닙니까. 아하, 참, 40년. 십일월 그 달 초일일에. 41년째 다 돼가요. 그럼 광야에 놀이동산 있어요? 뭘 본다고. 뭘 볼 게 있다고 40년을 돌아다녔습니까? 그 긴긴세월 소비된 이유가 인간의 존재한다는 그 자체가 이미 하나님이 버릴 수 밖에 없는 대상이라는 사실을 그 다음이 중요해요. 유일한 타자. 유일한 남. 남으로 찾아온 주님의 결정이었습니다.
유일한 타자, 유일한 남이라는 표현을 제가 쓴 이유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은 누구 중심이냐 하면, 인간은 나 중심이잖아요. 인간. 육신이 있으면 육신은 원래 하나님이 준 거고, 여기서 삐져낸 것은 인간의 범죄함으로 만들어진 것이 ‘자아’ 또는 다른 말로 하면 ‘나’가 생긴 거예요. 이 ‘나’가 생기면 어떤 기능이 있느냐 하면, ‘나’는 타인을 의식하고 후딱 자기 방어체제에 돌입해요. 인간은. 인간의 모든 행동과 말은 전부 다 뭐가 들어있느냐 하면 나를 지키기 위한 본성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나를 지키기.
카페에 앉아서 커피 마시면서 상대방과 눈 마주하면서 이야기하는 가운데 가끔, 가끔 정도가 아니고 아주 자주 ‘나 지금 잘 있지. 지금 선방하고 있는 거지. 지금. 그다지 지금 내가 상대로 인하여 지금 내 마음에 흉터 나지 않았지? 그지.’ 늘 점검하면서 상대와의 대화에 조절하게 되어있어요. 행동도 마찬가지고. 몇 살 때부터? 한 살 반부터 시작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신명기 어떤 대목을 보면, 어린아이들은 살려주는 대목이 나와요. 어린아이들은. 아직 자아가 미성숙할 때는 주께서는 노골적인 공격으로 안 하거든요. 왜냐하면 타인에 대해서 방어체제를 갖춘다는 말은 인간의 궁극적인 사는 목적이 자기 존재 사수에 있음을 우리 주님은 아시지요. 그래서 인간이 생각하는 타인은 나 지키기 위한 용도로 이해되는 타인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타인으로부터 몽땅 한 무리가 집단적으로 분리되어서 탈출이 된 사건이 바로 애굽에서의 출애굽 사건이에요. 민족 단위로 하나의 대규모 자아체라면 민족단위로 하나의 덩어리. 한 사람처럼 덩어리라면 히브리 민족 외에 다른 민족은 애굽은 뭐가 되겠어요? 타인이 되는 거예요. 타인.
그리고 출애굽 당시에 그 타인으로부터 히브리민족이라는 그 이름 때문에 노예생활 고생 많이하니까 그들끼리는 어떻게 됩니까. 점점 더 저 쪽 애굽 사람과는 다른 종족이라는 의식이 고취되겠지요. 하나로 뭉쳐지겠지요. 개인적으로 티격태격하든 말든 중요한 것은 저쪽 타인이 권력 쥔 타인이 우리들을 뭐라고 생각하느냐, 이 생각하는 그 인식을 우리가 조금씩 조금씩 할당받고 있는 거예요. 조금씩. 뭉쳐보면 애굽사람에 비해서는 우리는 뭐냐, 노예가 되어야 마땅한 하나의 큰 덩치에 불과한 겁니다. 그러니 애굽이 뭐가 돼요? 타인이 되는 거죠. 그 타인으로 경유해서 나는 애굽사람과는 다른 종족이라는 자의식이 집단적으로 공통적으로 갖추게 되는 거예요.
그 예가 바로 남자들이 어디에 갑니까. 나이 스무살 되면 어디 가지요? 군에 가지요. 군에가면 전문용어로 군바리라고 합니다. 군바리 맞은 편에 타자가 뭐냐, 사회인이에요. 왜냐 군에서 계속 강요하는 것은 “이게 어디서 사회에서 하던 행세를 해? 우리는 군인이야.” 무슨 뜻입니까? 개인을 말하는 게 아니고 집단 대 집단으로 분류시켜서 저 쪽이 우리를 바라보는 타인이고, 우리도 저쪽의 타인으로 보는 거예요.
그리하여 제대했습니다. 제대하게 되면 집에서 다시 옛날에 했던 사회로 돌아와야 되는데, “어머님,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뒷말 올림)?” 또 뒤에 붙는 전문용어 있잖아요. 뒤에 또 붙는 거 있잖아요. 그런데 말입니다, 이런 거. 제가 안 했습니다. 말입니다. 이런 거. “야, 야, 제대했어. 말 고쳐.” “하루 아침에 안 고쳐집니다. 말입니다.” 이런 거. 그러다가 제대하고 난 뒤에 한 몇 년 지나면 없어지겠지요. 그런데 없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예비군 훈련 가보세요. 지나가는 아가씨 휙~~ 불고. 그 때는 모자를 삐딱하니 써줘야 돼요. 지가 뭐 초월자 좀 되는 줄 알고. 자크도 안 올리고 있다 말이죠.
그게 뭐냐 하면 인간에게는 타인이 없으면 내가 없는 거예요. 왜? 타인이 만들어준 나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강제로 애굽전체를 통째로 날려보냈어요. 그리고 그 애굽 자리에 누가 오느냐, 하나님 본인이 오십니다. 하나님 본인이 와요. 본인이 딱 오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소위 히브리인 속에 이스라엘 속에 뭐가 남아있는가, 애굽을 타인으로 여겼던 자의식이 남아있었던 거예요. 그거 없애는데 40년 걸렸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하나님과 대화가 통하고 말이 통하고 생각이 통하는 하나님에 의해서 제작된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그러한 백성이 되어야 될 텐데 이 인간들이 애굽에서 나왔는데 애굽인들이 만들어낸 그 자아성을 그대로 갖고 있는 거예요.
오늘날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나 새사람 됐다고 우기지만,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교회 바깥에서 세상 사람을 자꾸 만나요. 만나게 되면 이미 그 전에 교회 나올 때부터 굳어져 있는 남들로부터 인정받으려 하는 것. 남들로부터 사랑받고 존경받으려고 하는 의식. 남이 싫어하는 일 내가 안해야지. 하는 타인을 의식하는 그 자아상. 그 자아상으로서 나는 이만하면 됐다는 것을 하나님이 그 타인 자리에 개입해서 우리하는 그 자아상을 깨부수는 일들이 일어나요.
그런 일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목사님, 교회 나왔는데 하는 일이 되는 게 하나도 없네요.”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예수믿고 복음 알고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 그 말이에요. 아직도 자기가 자기를 판정내리는 겁니다. 타인이 내려준 기준에 준해서.
그런데 그 성도에게 준 타인이 아까 신명기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라 했지요. 그럼 오늘날 성도에게 준 타인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지요. 예수님의 몰골이 어때요? 상상한 대로 대단합니까. 아니면 연약하고 약하고 아무것도 아닌 별볼일 없는 흠모할 것도 없는 어떤 모습이에요? 어느 쪽이에요? 흠모할 것이 없지요. 누가 무시해도 무시할 만한 핏기 없고 초췌한 그 분이 타인이고, 타인이 주님 자신이 이런 모습으로도 이게 진짜 하나님 모습이고 메시아라는 것을 자기 백성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성도가 그 전에 세상으로 살았던 방식은 전부 다 좌절시키는 식으로 천사를 보내가지고 환경조정에 나섭니다. 다 바꿔놔요.
그러면 우리 성도는 어떻게 돼요? 힘들고 괴롭다고 난리도 아니지요. 난리도 아니에요. 맨날 하는 소리가 “어쩌란 말입니까? 이것마저 날린다면 그럼 저는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맨날 이런 식이에요.
애굽으로부터 뭐가 생긴다 했습니까? 애굽으로부터 흉터 아픔이 있잖아요. 오늘날 주님으로부터의 아픔과 흉터가 발생되겠지요. 이런 식으로는 살 수가 없습니다. 하고 반항들을 하는 겁니다. 그 반항들을 주님께서는 자기 몸으로 다 끌어당겨요. 다닙니다. 해놓고 자기 아픔을 도로 성도에게 내뱉지요.
자, 이건 불신자도 해당되지만, 성도에게서 고민을 추정해서 말씀드리면, 성도, 사람, 인간, 불신자 어떻게 사는가, 중요한 거 나올 때는 좀 적으세요. “내 앞길 막는 자는 다 죽여버린다.” 내 앞길 막는 자는 다 죽여버린다. 이 마음을 누가 유도하는가, 주님이 유도해 버려요. “그래, 죽여라. 내가 이 일을 내가 유도했어. 나를 죽여. 그런데 니한테 묻겠다. 니가 나를 죽이고 니한테 얻는 이익은 뭐냐? 니가 나를 없애고” “나, 이제 예수하고 안 놀아.” “그래, 좋아 놀지 마! 그렇게 했을 때 그 결과가 니가 만족스럽냐” 묻습니다.
내 앞길 막는 자는 다 죽여버린다, 이것은 아담에게 심어준 악마의 마음이지요. 문제는 이 악마의 마음에서 어느 인간도 벗어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방식은 성도로 하여금 악마 품에서 죽게 만들어요. 그냥 죽게 만들어요. 그냥.
그래서 제일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녹는다고 했지요. 우리 자신이 녹아져야 이 모든 일을 꾸민 분은 주님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거예요. 나한테 가리워졌던 주님의 화면이 내 화면이 사라지면서 배후에 드러나는 겁니다. 그거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몇 년 걸렸다고요? 40년 걸렸습니다.
보람찬 하루, 나올 때는 신났어요. 찬양 부르고. 하나님이 함께 하면 우리 약속의 땅까지 했으니까. 우리 가자. 약속의 땅. 했지요. 모세도 못 들어가는 땅이에요. 어딜 저들이 넘봐요. 약속의 땅에 들어간다는 그들의 타자 누굽니까?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을 줌으로서 그들이 비로소 애굽에서 알던 나가 아니라 약속의 땅에도 못 들어가는 나라고 새롭게 자기 자신의 본질을 밝혀주는데 40년 걸렸습니다.
신약에 와서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는데 예수님이 광야에서 금식한 기간이 몇 일? 40일 걸렸어요. 40일 걸리고 인간은 왜 악마로부터 못 빠져나오는가를 악마와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모든 게 밝혀졌어요.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게 아니고, 말씀으로 산다. 그러니까 떡으로 산다는 생각은 바로 신명기8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광야에서 모세에게 달려들었는데 그게 떡달라고 달려든 거예요. 떡. 물달라고 기본 생존은 보장되어야 되지 않겠느냐, 그게 달라고 한다는 말은 이런 말이에요. 약간 어렵게 이야기해서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 속에 이런 고백입니다. “내 안에 애굽있다.” “내 안에 애굽 살아있다.” 이겁니다. 눈에 보이는 애굽은 떠나왔지만, 그 애굽의 요소는 그들의 몸에 실려서 광야에 들어온 거예요.
광야는 결국 걸러내는 겁니다. 애굽에 있다는 사실을. 내 속에 애굽이 가득차 있다는 사실을. 애굽의 요소는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애굽의 요소는 뭐냐, 타인에 의해서 타인의 인정 받기를 위해서 자아가 재구성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조건. 이런 관계망 속에서 인간은 자아가 형성된다는 거예요.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요. 어릴 땐 누가 이야기했어요? 아버지, 엄마가, 우리 형이, 누나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들이 지보다 먼저 태어났으니까. 먼저 태어난 자의 눈치를 보면서 자아가 형성되는 겁니다.
그래서 일찍이 엄마, 아빠가 죽게 되면 인간은 허하지요. 그만큼 통곡을 하지요. 통곡을 왜 하느냐, 아직도 내가 내 스스로 신이 되기 전에 당신들이 왜 죽습니까. 내가 나를 신으로 만들어놓고 죽어야지 신이 되기 전에 왜 죽습니까.
고아원 보모들 교사하고 부모하고 차이점이 확연하게 나요. 그 사람은 돌봐주는 사람이지요. 돌봐주는 사람이고 부모는 뭐냐, 나의 자궁이에요. 나의 원천이라고요. 이미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환경이고 그들은 태어나고 난 뒤에 밥 먹어라, 공부 시켜주고, 고아원 나오면 약간의 돈 주면서 생활터전, 또는 임시거처비 주지만 나의 나 됨은 그들이 아니고 부모에요. 부모 안에서 내가 태어났잖아요. 부모를 전제로 해서 부모 닮기, 아버지처럼 되기, 엄마처럼 되기가 바로 나라는 말이지요. 이걸 가지고 거울 관계라 해요. 거울 관계.
데이트폭력이 왜 일어납니까. 데이트폭력의 헤어진다고 죽이는 이유가 상대에게 너무 반했기 때문에 그래요. 그대가 이야기하는 것이 내 자아에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들어왔던 거예요. 그대 있음에 내가 존재하는 겁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 좋은 남자 생겼어. 우리 헤어져. 커플 반지 가져 가! 얼마 안돼. 가져 가!” 했을 때, 니가 없으면 내가 누군지를 모르겠는 거예요. 거기에 나오는 구구한 노래 가사가 존재의 이유입니다. 존재의 이유.
아, 남자들 듣고 울지요. 조금만 기다려줘. 달려갈테니. 내가 있는 존재 이유는 너가 있기 때문이야. 그게 가사에 나오거든요. 너가 있기 때문이야 친구집 중국집 배달하면서 썼던 가사거든요. 조금만 기다려줘. 달려갈테니. 잠잘 때도 그냥 안 자요. 그녀의 사진 쥐고 잤어요. 만약에 김종환 부인이 “우리 헤어져.” 그러면 아마 기절할 거예요. “내가 죽여버릴 거야.” “니 죽고 내 죽자. 사는 의미도 없어.” 이럴 거예요. 내 앞길 막는 자는 다 죽여버린다. 이 말은 평생 갑니다. 평생 가요.
그래서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뭐냐 하면 교체입니다. 교체. 옛사람과 주님의 약속에 의해서 미리 준비된 마련된 내가 예상 못한 내가 미처 모르는 나와 교체 작업에 주님이 개입하고 있어요. 우리는 뭐 현재 내가 알고 있는 나 죽는다고 난리도 아니에요. 지금. “비트코인 값 내려가면 나 죽을 거야. 나는 더 이상 못 삽니다. 죽을 거야. 정말. 주식값 내려가면 나 더 이상 안 살 거야.” 그럼 주님이 뭐라고 합니까? “먹는 거 입는 거로 족한 줄을 알아라.” 요새는 한국에는 거지도 먹는 거 입는 거 보장됩니다. 최저 생계비 주니까. 나는 나답게 살아야지. 그건 다람쥐 모이주는 것도 아니고 그게 사는 거냐, 이 말이지요.
그래서 인간들이 기도하는 거 보면, “하나님이여, 내가 그 정도밖에 안 됩니까?” “니는 그 정도도 안돼” 광야에 집어넣어서 죽어봐야 속이 시원하지. 항상 인간은 자기 편이고, 항상 주님은 말씀 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을 경유해서 어떤 식으로 말씀이 자체적인 완성을 구성하고 꾸리는가, 교체지요. 자, 이 교체를 신명기에서 소개하는 것은 이겁니다. “너의 스토리를 나의 이야기로 바꿔라.” 그러면 아, 이제는 내 일기 안 쓰고 주님 하신 거 써야지. 아니 쓸 필요 없어요. 왜? 나의 이야기가 성경이기 때문에.
아까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율법은 과거 이야기만 하는 게 아니고 미래까지 한다, 하지요. 이 성경 이야기는 모든 인간이 똑같다는 거예요. 아담의 자손이라서 똑같은 거예요. 아담의 자손의 마지막 아담 우리 주님이 어떻게 미리 개입하셔서 그들의 이야기를 하나님의 이야기로 바꿔지게 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신명기입니다. 신명기.
인간은 못 바꾸지요. 왜? 마귀가 쥐고 있으니까. 내 앞길 막으면 다 죽여버린다. 그러면 죽음을 당할 뻔 한 사람이 누굽니까? 모세와 아론이었어요. 광야에서. 민수기에 나오지요. 모세와 아론. 신명기는 이제 그 세월이 다 지나고 40년 지나고 요단강 바라보면서 했기 때문에.
민수기에 보면 모세를 죽이려고 했어요. 그리고 모세한테 반란을 일으켰잖아요. “니만 대장질 하나, 우리도 대장질 좀 하자.” 심지어 모세의 누나 미리암까지 모세에 대해서 그 가치를 몰랐습니다. 그 때 그 때마다 누가 개입합니까. 하나님이 개입하지요. 그 대목을 보면서 우리가 늘 생각해야 될 것은 왜 미리 개입을 안 하느냐는 겁니다. 미리. 미리 개입을 해버리면 내 식대로 내 교체에 나서기 때문에 주께서는 그런 식으로는 구원될 자가 한 명도 없는 거예요.
예수님의 복음에 대해서 예수님의 진리에 대해서 니가 미리 알면 아는 진리를 내가 꼭 붙잡고 내가 구원받겠다. 이게 마귀 생각이에요. 진리는 우리한테 붙잡히지도 않고요, 우리가 다룰 대상도 아니에요. 진리를 다루는 것은 주님에 의해서 다루어지는 겁니다. “내가 주님을 믿겠습니다.” “믿지 마!” “믿음을 니가 뭔 줄 알아? 믿음도 모르면서 뭘 믿어? 그냥 있어. 내가 믿음 줄게.” 주님이 믿음을 줘요. 우리는 내 믿음과 주님 믿음 사이에 거리가 있고, 이게 다르다는 것을 중첩된 인식 속에서 그걸 느껴지는 거예요.
나의 관심사는 따로 있는데, 주님의 관심사가 따로 있다는 것을 양쪽 관심사를 한꺼번에 안다는 것은 이미 성령 받았기 때문에 구원받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에요. 비록 두 눈이 너무 거리가 멀어서 사시가 된다 할찌라도 그 때는 안과에 교정 받으면 될 거예요. 물론 성령이 교정 받을 때 좀 심하게 아주 난폭하게 다루실 겁니다.
그래서 ‘나의 스토리 바꾸기’ 이게 신명기의 내용입니다. 요걸 달리 이야기하겠습니다. 다른 이야기는 빨간 거로 이야기하겠습니다. ‘내가 아닌 다른 나를 만나는 과정’ 이게 신명기 이야기죠. 그런데 여기 나라고 했잖아요. 요거 나는 집단 속의 나에요. 한쪽의 광야에서는 홍해 건너왔던 사람들 집단적으로 다 내보냈어요. 다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린 애와 아까 했던 것처럼 두 사람이 남았어요. 갈렙과 여호수아.
새로운 우리가 만들어지기 위해서 기존의 우리는 다 작살났습니다. 40년 동안. 그들이 어디를 가느냐, 약속의 땅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약속의 땅에 들어간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닌데, 저는 이렇게 표현하겠어요. 약속의 땅과 만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광야에서 죽었던 사람과 더 유리한 조건이에요? 불리한 조건이에요? 더 불리한 조건이에요. 못 들어가고 죽는 거나, 들어가서 망해서 쫓겨나는 거나 기분 업됐다 마는 그 기분 속에서 자기의 내부에 있는 악마성의 실체는 더 깊이 폭로당하지요.
그래서 성도가 되어서 오래 살 생각은 하지 마세요. 일찍 죽을 생각은 너무 과한 욕심이고요. 과한 욕심이에요. 어떤 분들은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 있어요. “목사님, 꽉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누구 마음대로. 어디서 호강을 누릴 생각을 하고 있네. 무슨 자격으로 호강을 당겨서 누리려 합니까. 그만 복음 알고 그냥 눈 감은 김에 꽉 죽고 싶습니다. 뭘 잘한 게 있다고 그런 호강을. 일찍 죽는 호강을 누립니까. 뭐했다고.”
가만두어라. 가라지는 일단 뽑고 가자. 우리는 주께서 다루는 용도로 사용하는 것이지 그게 하나의 주님의 레시피가 따로 있고, 우리는 레시피를 위한 시장에서 막 함부로 사온 식재료들이에요. 식재료. 양배추, 고추, 무사리는 거, 무 사리다가 예배도 못 보고 하잖아요. 주님이 우리를 다루는 식재료입니다. 니 속에 말씀이 제대로 들어있는지 박혀있는지 자기 집어넣은 부속품 확인하는 과정이에요. 그거로 하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구원에 주체로 서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체가 아니에요.
자, 그러면 이스라엘은 너무 안됐잖아. 너무 슬프잖아. 뭐 이런 생각도 하게 되겠지요. 모세야 이미 구원받았으니까 좋겠다 마는. 다른 백성들. 그럼 약속의 땅에도 못가고 40년 동안 광야에서 죽은 사람은 아쉽잖아. 이리 되는데. 노을은 어두움만 남기고 사라져요. 반짝하지요. 우리 인생은 노을과 같습니다. 우리가 살다 간 자리에는 어두움은 짙어요. 우리의 모든 기억의 끝은 죽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 인간을 사용해서 인간과 말씀을 개입시켜서 이스라엘 백성을 다루는 것은 모든 인류가 인간이 이런 운명에 처지에 놓여 있다는 거예요. 어느 누구도 그 죽음의 힘에 벗어날 자가 없어요. 인간을 탁 깨면 그 안에 죽음이 들어있지요. 탁 깨면. 캡슐에 든 약 있지요. 딱 깨물면 안에 죽음이 나오듯이.
하나님 쪽에서 그 이스라엘을 볼 때, 항상 성경에 불쌍히 여겼다. 하나님쪽에서 불쌍히 여겼다는 겁니다. 하나님 쪽에서 볼 때. 그런데 그 불쌍히 여김을 누가 찼습니까? 우리 내부에 있는 마귀에 편승해서 우리가 불쌍히 여김을 차버린 거예요.
우리는 불쌍히 여김을 받는 것 보다도 나의 존재를 충분히 인정해 주길 원합니다. 왜? 우리는 내 자아는 타인으로부터 그런 식으로 훈련받았기 때문에. 살아왔기 때문에. “아이구, 대단해요!” 이런 소리를 듣고 싶지. “아이고~~ 불쌍해라.” 이건 진짜 내 앞길을 막는 죽이고 싶지요.
여러분, 이거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추운 날에 어떤 할머니가 골목길 모퉁이에서 밤늦도록 국화빵 굽는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참 불쌍하다 생각 들지요. 그런데 국화빵 한 번 사보세요. 그 불쌍한 생각 싹 가십니다. 원가 계산 다 해도 절대로 그 조그마한 것 300원이상 못 받는데 천원을 받을 때 “에이, 이 도둑아 잘먹고 잘 살아라.” 갑자기 조금 전까지는 뿌연 외등 밑에서 손님도 없는데 이렇게 하는 거 보면 세상에 소설을 막 쓰고 싶지요. 자식한테 버림받고 남편하고 이혼하고, 이러고 있는데 나중에 조금 있으면 대충 국화빵 굽고 난 뒤에 자가용 몰고 집에 가요. 우리의 환상이 다 깨지지요. 저렇게 폭리해서 잘먹고 잘사는구나! 동정을 밑천으로 돈벌이했구나! 그게 어떻게 그 할머니만 국한되는 일일까요?
시장 다 그렇습니다. 모두 다. 장사하는 사람이 다 그런 거 아닙니다만. 말 실수할 뻔 했다. 난방 판다고 다 그런 건 아닌데. 모든 인간은 바로 자기 위주입니다. 10분 쉽시다.
■안양20241114b신31장26절(율법의 경로)-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두 번째 시간은 50분동안 신명기 전체 다 봅니다. 50분 동안. 신명기만 딱 펴시면 됩니다. 1장12절, “그런즉 나 홀로 어찌 능히 너희의 괴로운 것과 너희의 무거운 짐과 너희의 다툼을 담당할 수 있으랴” 여기에 다툼이라는 말이 나와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 자체가 다툼의 여지를 한껏 품고 지금 모세와 연결돼 있어요. 모세는 하나님과 다툴 일 없지요. 이미 40일 동안 광야 시내산 갔다 왔기 때문에. 하나님과 다툼이 되지 않는 사람이 다툼에로 가득 여지가 많은 이스라엘 속에 들어가 있으니 모세가 얼마나 심하게 그들에게 당하겠는가.
1장28절요, “우리가 어디로 갈꼬” 우리가 어디로 갈꼬, 야~~, 참, 근원적인 문제. 우리가 어디로 갈꼬. 그러면 여러분들이 모세라 생각하고 백성들에게 이런 질문 들을 때에, ‘아, 약속의 땅 어디로 갈지 어떻게 소개해야 돼냐’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하면 안 돼요. “그거 알아서 뭐하는데?” “나, 어디로 갈까요?” “니 아직 살기를 원하느냐? 니 이미 죽었잖아. 유월절에 너희들은 이미 죽었어.” 그러니까 그들은 “어디로 갈꼬” 정답은 “죽음 속으로” 가는 거죠.
애굽사람들이 경험하지 않는 죽음 속의 터널로 들어온 거예요. 왜? 죽음속을 경유하지 않으면 약속의 땅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이미 홍해 건너 들어올 때부터 이미 죽음 속이었어요. 그들은 아직도 사태 파악을 못 하고 있습니다. 33절에서 모세의 답변은 이렇습니다.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이게 무슨 뜻이에요? 낮에 구름, 밤에 불 없으면 그 자체가 캄캄한 세상, 그 자체가 갇혀있는 세상인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지요. 그러니 너희들 보기에 갇힌 세상에서 너희들 인도하는 것은 너희들이 어디로 갈꼬, 라는 게 아니라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친히 인도하실 것이다. 이 말이지요.
그러니 갈 길이 어디입니까? 물을 생각 하지 말고, 하나님과 어떻게 같이 살 수 있습니까. 그 생각을 물으라는 말이죠.
39절, “또 너희가 사로잡히리라 하던 너희의 아이들과 당일에 선악을 분변치 못하던 너희 자녀들 그들은 그리로 들어갈 것이라” 그 나머지는 들어간다? 못 들어간다? 못 들어가지요. 갈렙과 여호수아 빼놓고는.
백성들은 지금 모세만 쳐다보고 있어요. 그런데 모세는 하나님과 백성 양쪽에서 치이고 있습니다. 양쪽에 다 관여하고 있어요. 1장32절에 “이 일에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 이 일에 너희가 너희 하나님을 그 다음에 뭡니까? 믿지 아니한다. 애초부터 믿음 없는 채로 들어왔다. 믿음 없는 채로 들어왔으니까 믿음 없다는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백성들은 모세보고 계속 달려들고 있습니다.
그 믿음 없는 상황이 믿음 없다가 아니라, 나 어떻게 하면 살아요? 어떻게 하면 더 살 수 있습니까? 어떻게 빠져나와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살 수 있습니까? 이 모든 의식이 믿음 없다는 티를 내고 있는 거예요. 37절에 아까 했지만 너희의 연고로 내게도 진노하사 가라사대 너도 그리로 들어가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모세 너도 못 들어간다는 거예요.
그러니 모세가 모세 구원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모세를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가게 함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에 그 현 상태를 표현하는데 모세의 들어가지 못함을 유용하게 사용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로마서9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내가 하나님께 저주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 그냥 어떻게 내가 구원받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쓰여지느냐가 구원이다.
2장5절에서 6절, 그들과 다투지 말라 그들의 땅은 한 발자국도 너희에게 주지 아니한다. 이게 통과하기 때문에. 약속의 땅이 아니다. 이 말이에요. 광야에서 약속의 땅이 아니니까 다투지 말라. 이건 오늘날 우리에게 불신자하고 다투지 말라와 같은 거예요. 특히 3장3절에 봅시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바산 왕 옥과 그 모든 백성을 우리 손에 붙이시매 우리가 그들을 쳐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였느니라” 되어있지요. 아니하였다. 관거완료로 이미 끝났다는 겁니다. 끝났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그 안에 뭐가 들어있느냐, 끝났다가 포함돼 있어요. 끝났다. 재림이 남아있잖아요. 하지만, 재림이 남아있다는 사실은 끝났다. 완료됐다. 우리가 안 믿는다고 안 오고 그런 게 아니고 끝났다.
본격적으로 4장에 들어가면, 법도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이야기를 해요. 하나님께서 이제 본심을 풀어내는 거예요. 너희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너희를 재료로 해서 만들어낸 하나님의 말씀이 율법이 너희 죄인과 악마와 같이 사는 인간의 죄가 만나서 어떻게 자체적으로 말씀이 완성되는가, 하나님의 주관심사가 법에 있다는 거, 율법에 있다는 거, 언약에 있다는 걸 알려줍니다.
4장24절, 그런데 그 법은 어디서 나오는가, 4장부터 5장까지 불이야기가 계속 나와요. 그런데 여기 4장24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는 뭡니까? 소멸하는 불이다. 그리고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다. 그만큼 정성이 많이 들어갔다는 거예요. 그만큼 모든 관심을 거기 다 쏟았기 때문에 나 떠나면 나는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는 뜻이에요. 그렇다면 이렇게 정성이 이만큼 들어갈 정도로 질투가 뭐냐 하면 사랑에 다른 표현이에요. 나 너 질투할 거야. 나 너 사랑할 거야. 같은 말이에요. 그만큼 질투하는 대상이 너희라는 겁니다.
그러면 다른 민족은 질투의 대상입니까? 아닙니까? 아니지요. 4장26절에 보면,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 증거를 삼노니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는 땅에서 속히 망할 것이라, 어떤 경우에 그렇습니까? 그 땅에서 하나님의 관심도 없는 다른 민족을 섬기는 하나님을 하나님이라 여긴다면 그 땅에 가서 너희가 속히 망할 것이고, 거기서 너희 날도 길지 못하고 그 다음에 뭡니까? 그 다음에 나온 말, 전멸된다는 거예요. 전멸.
그러니까 하나님의 관심사가 말씀에 있지 이스라엘 그들의 팔자에 운명에 관심 없지요. 운명에 관심이 있으면 전멸시킬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전멸시켜서라도 주께서는 지키고 싶은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준 언약을 그런 식으로 지키는 겁니다.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특별히 이스라엘을 끄집어냈는데 어디서 끄집어냈는가, 4장33절,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었느냐, 이게 뭐냐 하면, 너희들이 지금 나하고 말하고 대화하는 게 불 속에서 대화한다는 거예요. 불 속에서. 이건 다른 민족에게서는 있을 수 없는 혜택이라는 겁니다. 창세기3장2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생명나무를 보호하기 위해서 인간을 추방하고 그 가운데 인간과 생명 사이에 두루도는 화염검을 천사들로 에덴동산 가는 길을 차단했지요. 끊아 놨다 이 말이에요. 이걸 불로서 끊어놨지요.
그 불의 상황 속을 그걸 그대로 가져와서 말씀과 더불어서 이스라엘에게 찾아오신 겁니다. 불이야기가 계속됩니다. 5장22절에서 26절까지.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을 산 위 불 가운데, 구름 가운데, 흑암 가운데서 큰 음성으로 너희 총회에 이르신 후에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그것을 두 돌판에 써서 내게 주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모든 말씀을 산위의 불 가운데서 구름 가운데서 말씀하셨다. 그런데 그 불 가운데 말씀하시면서 불 속에서 나오는 어떤 물체가 있어요. 그 물체를 두 돌판위에. 이 두 돌판이 있으면 그 돌판을 나중에 보관을 하는데 어디에 보관을 하느냐, 하나님의 상자에다가 보관을 합니다. 그게 언약궤지요.
신명기 끝에 보면 이 언약궤에다가 율법을 나란히 옆에 두라. 언약궤 옆에다가. 이 언약궤는 왜 둬야 되느냐,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최종 목표가 언약궤가 하나님의 나타나심의 유일한 토대가 되기 위해서 언약궤를 이렇게 마련했다는 겁니다.
여러분, 제사를 어디 앞에서 합니까? 제사를 할 때 어디를 중심으로 해요? 언약궤 앞에서. 신명기12장에 보면 내가 택한 지점이 있는데 그 택한 지점과 언약궤가 딱 만나게 될 때 거기서 하나님의 성전이 세워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제도 이야기했지만, 하나님은 굉장히 실용적이에요. 인간이 뭘 상상하든 그런 건 관계없고, 주님은 꾸준하게 이 현실 자체를 자신의 말씀이 말씀대로 되어지는 증거로서 매일같이 활용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도 거기에 포함된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신명기5장23~26절, “산이 불에 타며 캄캄한 가운데서 나오는 그 소리를 너희가 듣고 너희 지파의 두령과 장로들이 내게 나아와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영광과 위엄을 우리에게 보이시매 불 가운데서 나오는 음성을 우리가 들었고 하나님이 사람과 말씀하시되 그 사람이 생존하는 것을 오늘날 우리가 보았나이다 이제 우리가 죽을 까닭이 무엇이니이까 이 큰 불이 우리를 삼킬 것이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다시 들으면 죽을 것이라 무릇 육신을 가진 자가 우리처럼 사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불 가운데서 발함을 듣고 생존한 자가 누구니이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뭐를 정리했어요? 아, 우리는 이미 죽음 속에 들어와 있구나! 그 말씀이 잔소리 정도가 아니고 불을 동반하는 말씀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참, 이스라엘 백성들이 끔찍한 상황이에요. 오죽했으면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 거기는 불은 없잖아요.
그 다음에 7장7절봅시다. 계속해서 법도 이야기하면서 7장에 넘어왔습니다. 7장7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숫자가 많은 쪽이 이깁니까? 숫자가 적은 쪽이 이깁니까? 숫자가 많은 쪽이 이기지요. 그런데 숫자가 가장 적은 이스라엘을 가지고 숫자가 많은 민족을 의도적으로 드리대면서 부딪힌다는 말은 쪽수 싸움이 아니고 거룩의 싸움이에요. 언약의 싸움이에요. 어느 쪽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거룩하냐, 더러우냐,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7장8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사랑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있고, 그 사랑이 들어있는 언약을 내가 너희를 통해서 실행에 옮기고 있다. 이 말입니다.
그 다음에 8장 봅시다. 8장 3절에,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의 말씀으로 산다. 이 말씀을 예수님이 광야에 시험받을 때 하셨다 했지요. 그런데 이 말씀에 대해서 마귀가 알고 있어요? 안 알고 있어요? 마귀가 알고 있지요. 바리새인들이 다 알고 있으니까 마귀가 알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마귀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머나, 겁나라.” 아니요, 겁내지 않아요. 인간세계에서는 마귀는 어떤 것도 겁내지 않아요. 마귀는 주님만 겁내지 전혀 겁내지 않습니다. 그 드라마 <지옥에서 온 판사>보세요. 그 악마가 된 판사가 겁먹던가요. 드라마 안봤지요. 그 악마가 보면서 나는 자유를 느꼈다니까요. 인간세계에서는 주눅들만한 일도 그 악마는 씨익 웃고 있어요. 뭐? 그게 뭔데? 내가 못할 게 뭐가 있는데?
악마가 말씀을 알고 있다는 말은 악마는 뭐도 알아요? 이 말씀을 지킬 위인은 내 품안에 인간치고는 아무도 없다. 라는 것도 자신만만해하기 때문에 악마는 웃고 있습니다. 악마는 웃고 있지요. 삐에로만 웃는 게 아니에요.
8장 16절,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말씀을 주신 이유가 마음을 낮추고 교만하지 말라고 주제파악하라고 주신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앞으로 어디로 갈까요? 어떻게 살까요?” 그런 것 조차도 교만이다. 그건 니 할 일 아니고 내 할 일이지 니가 왜 신경쓰고 니가 걱정하고 있느냐, 말이지요.
그 다음에 9장5절,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너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도 아니고 마음의 정직함의 인함도 아니다. 이러한 서술이 많이 나와요. 뭐도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가 많이 나와요. 그 말은 뭡니까. 우리가 그런 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다.를 말씀이 삭제해버리는 겁니다.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우리를 마지막 궁지로 몰아가요. 이것도 빼고, 저것도 빼고, 이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고, 그럼 나는 왜 존재합니까. 그것은 언약을 너를 통해서 언약을 완성시키기 위함이라. 니는 시장에서 파는 식재료에 지나지 않는다. 레시피는 예수님과 주님과 하나님이 알고 있지요.
9장11절에, “사십 주야가 지난 후에 여호와께서 내게 돌판 곧 언약의 두 돌판을 주시고” 사십 주야가 지난 후에 여호와께서 두 돌판을 주었다. 이 돌판을 주었다는 말은 이 돌판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섞이게 되어있고 섞이게 되면 돌판 나름대로의 경로가 생기지요. 그 경로가 약속의 땅으로 이끌거예요. 경로가. 요단강을 건너서 갈 겁니다. 광야에서 시내산에서 만들어낸 그 언약궤가 요단강을 언약궤가 앞장서서 돌파하게 돼요. 그러면 약속의 땅은 이스라엘 땅이 아니고 언약궤의 땅이 되는 겁니다.
9장17절, “내가 그 두 돌판을 내 두 손에서 들어 던져 너희의 목전에서 깨뜨렸었노라” 자, 언약궤 경로 가운데 언약궤가 부서지는 일이 일어났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그 언약궤 경로를 따라서 너희들이 구원된다면 너희도 와장창 돌판 깨지듯이 깨어져야 된다. 너 자신 때문에 너 자신이 깨어져야 된다. 돌판이 이스라엘 때문에 깨어진 것처럼 너로 인하여 너 자신이 깨어지는 것으로 언약궤 경로에 동행하게 된다. 동반하게 된다.
10장2절~5절에 보면, 역시 언약궤 이야기입니다. 돌판이야기입니다. “네가 깨뜨린 처음 판에 쓴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너는 그것을 그 궤에 넣으라 하시기로 내가 싯딤나무로 궤를 만들고 처음 것과 같은 돌판 둘을 다듬어 손에 들고 산에 오르매 여호와께서 그 총회날에 산 위 불 가운데서 너희에게 이르신 십계명을 처음과 같이 그 판에 쓰시고 그것을 내게 주시기로 내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와서 여호와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 그 판을 내가 만든 궤에 넣었더니 지금까지 있느니라” 네가 깨뜨린 처음 판에 다시 썼다. 깨어진 판에 다시 썼다. 깨어졌다는 그러한 전제하에 말씀을 다시 썼다면 그 말씀은 자기가 깨어졌음을 인지하지 않은 사람은 말씀의 내용도 모르고 지키지도 못하고, 그 본질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안 깨어지려고 자꾸 말씀을 지키려고 하니까요. “하나님, 기도할까요? 하나님, 헌금할까요?” 이게 무슨 수작입니까? 나, 이래서 안 깨어질래. 그건 전혀 말씀과 상관없는 이야기입니다.
신명기10장18절에서 19절,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음이니라” 법도 내용이 죽 나오는 거예요.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음이니라. 이리 되어있지요. 이게 뭐냐 하면, 너희 신체를 잊지 말라. 너희 신체는 너희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임을 잊지 말라. 하나님이 친히 키운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친히 키운다 하니까 내 원대로 키운다는 뜻은 아니고 하나님의 뜻대로 키우기 때문에 우리는 때로는 거지, 때로는 병듬, 입원, 수술6번 하지요. 왜? 주님거니까.
신명기12장18절과20절을 보면, “오직 너희의 한 지파 중에 여호와의 택하실 그곳에서 너는 번제를 드리고 또 내가 네게 명하는 모든 것을 거기서 행할찌니라” 오직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뭐하느냐, 택하신 곳에서 그냥 앉아있느냐, 아니지요. 레위인과 함께 거기서 뭐하냐, 제사드려라. 그러니까 하나님의 언약궤 있다는 것 때문에 레위인들이 언약궤 옆에 포진을 해야 돼요. 안 그러면 죽으니까요. 언약궤와 레위인 사이에 그 작업으로 인하여 주변에 있는 나머지 모든 지파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거예요. 약속의 땅에서. 약속의 땅은 엔진이에요. 성전 언약궤 제사가 엔진처럼 그게 가동이 되어야 언약의 땅에서 생명이 부여받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만약에 그 하는 일을 레위인이 없어진다면 나라 망하는 거죠. 나라 끝나는 거죠.
12장27절, “네가 번제를 드릴 때에는 그 고기와 피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단에 드릴 것이요 다른 제 희생을 드릴 때에는 그 피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단 위에 붓고 그 고기는 먹을찌니라” 네가 번제를 드릴 때에는 그 고기와 피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단에 드린다. 이 말은 뭐냐 하면, 거기에 제단이 있고, 거기에 피내고 제사장 있고, 고 일이 약속의 땅을 약속의 땅답게 유지시키는 유일한 방식이다, 이 말입니다.
12장32절, 이러한 특이성에 대해서 너희에게 명하노니 이 모든 말을 너희가 지켜 행하고 가감하지 말라. 했는데, 이게 뭐냐 하면 그들이 가감을 나중에 합니까? 안 합니까? 하게 되지요. 그걸 염두에 두고 하는 겁니다.
13장,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제사 중심으로 갈 때, 여기에 필히 약속의 땅에서 누가 오느냐, 누가 등장하는가, 거짓 선지자들이 등장하는 거예요. 거짓선지자는 애굽요소입니다. 애굽요소들이 등장하는 거예요. 거짓선지자의 특징은 뭐냐,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위주에요. 사람위주. “하나님이 도와주실 거야. 영적으로 깨달으면 구원받을 거야.” 이런 거. 굉장히 영적으로 보이지만 결국 목적이 뭡니까? 나 행복할 거야, 나 잘될 거야. 그냥 100% 마귀가 보낸 거짓선지자들입니다.
그러면 거짓 선지자를 알아보는 진짜 성도라면, 진짜 백성이라면, 그들에게 어떤 조치를 취한다. 1번, 돌려보낸다. 2번, 달려서 우리편 만든다. 3번, 함께 두손 묶어 기도한다. 4번, 죽인다. 몇 번입니까? 신명기13장5절 누가 한 번 읽어 보세요. “그 선지자나 꿈 꾸는 자는 죽이라” 그냥 죽여라. 언약이 없는 것들은 그냥 죽여라. 질문 나갑니다. 죽였을까요? 안 죽였을까요? 안 죽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를 알겠지요. 쓸데없는 동정심이 만발해가지고.
13장15절 봅시다. 역시 언약이 없는 사람들. “너는 마땅히 그 성읍 거민을 칼날로 죽이고 그 성읍과 그 중에 거하는 모든 것과 그 생축을 칼날로 진멸하고”이리 되어있지요. 돌무더기 되게 만들어라.
14장에 보면, 식생활지침이 들어갑니다. 지침이 들어가는데 조건이 있어요. 레위인을 염두에 두고 식생활지침에 들어가는 거예요. 뭐냐 하면, 여기에 뭐는 먹고, 뭐는 먹지말라, 가 나오지요. 이게 뭐냐, 레위인은 제사드리지만, 레위인이 아닌 너희들은 식생활로 제사드리는 취지를 하루 세끼, 하루 두끼를 먹으면서 그 취지를 담아버려라 이 말이지요.
레위인들이 하는 것은 거룩하지 않은 것을 거룩하게 만드는 작업을 하잖아요. 그러면 일반인들은 뭘 알아야 돼요? 무엇이 거룩한지, 아닌지 그런 율법이 주어지지 않으면 인간은 몰라요. 왜? 거룩은 인간의 눈으로 파악되는 게 아니고 주님이 일방적으로 정해놓은 거기 때문에. 정해 놓은 것이 이리 나온다 말입니다.
왜 이걸 먹지 말라 합니까? 오징어는 못 먹어요. 맛있는 오징어 구워 먹으면 얼마나 맛있게요. 연탄불에 비틀어가면서 얼마나 맛있습니까. 우리 입맛에 맛는 식생활이 애굽적이라면 그 애굽과는 차이가 나야 돼요. 왜? 우리는 따로 빠져나온 분리된 거룩이기 때문에 그래서 여기 먹지 말라 하는 것은 사실은 분리에 취지를 둡니다. 새김질하는 이야기나오지요. 6절에. 무릇 짐승 중에 굽이 갈라져 쪽발도 되고 새김질도 하는 것은 너희가 먹을 것이니라. 죽 나와요. 그 다음부터 신명기의 모든 말씀은 애굽인들이, 애굽인들 하는 것은 보통 인간들이 마음먹으면 할 수 있는 모든 일과 차이를 둬라, 이 말입니다.
15장1절에서 3절에 보면, 여기 매 칠년 끝에 빚진 것을 빚을 받지 말라. 그들이 풍부해서 빚낸 건 아니니까. 니보다 못사니까 빚을 냈다 이 말이에요. 단 차이점이 뭐냐, 3절에 보면 “이방인에게는 네가 독촉하려니와 네 형제에게 꾸인 것은 네 손에서 면제하라” 이방인과 백성과 구별하라. 이방인에게는 니가 독촉하려니와 그 다음에 니 형제에게는 면제시켜라. 자, 그럼 묻습니다. 교인은 이방인입니까? 백성입니까? 일단 이방인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돈 빌려준 것은 이자까지 다 받으세요. 성도라 하는 것은 성령이 임하고 복음을 알게 된 자가 성도지, 교회 다닌다고 성도 아닙니다.
16장은 아까 이야기한 제사중심이에요. 거기에 법들이 나온 거예요. 17장. 소송하는 것. 재판에 관한 문제. 그 다음에 그 사람을 죽일 때는 두세사람의 증거가 있어야 된다는 그런 판결, 소송에 관한 문제에요. 17장 끝에 보면, 왕은 율법을 두고 형제보다 교만하지 말라. 형제 위에 나서서 교만하지 말라. 18장에 보면, 미신에 관한 거예요. 18장10절에, “그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 이 말은 왜 합니까? 약속이라는 땅이라는 그 동네에 온통 그런 사람들이 계속 생겨난다는 거예요.
왜 생겨날까요? 소비가 있는 곳에 공급이 되잖아요. 내 앞길이 어떻게 되는가, 궁금한 겁니다. 내 앞길. 갑자기 관심사가 자기한테 관심이 있으면 뭐 재미있네. 하면서 보지요. “재미있는데. 뭐~ 그건 뭐 믿는 건 아니고.” 세상에 안 믿고 행동하는 법은 없어요. 18장 끝에 보면, 선지자가 아무 증거 없을 때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거예요. 왜? 가짜니까.
그 다음에 19장에 도피성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서 일으킨 전쟁이나 일상생활 가운데서 어떤 이유가 없는데 살인사건이 벌어졌을 때 살인사건은 죽음에 관한 일이기 때문에 이건 대제사장이 관리해야 된다. 그 대제사장은 어디에 사는가, 도피성에 살아요. 고의가 아닌 자가 살인하게 될 때는 대제사장이 죽기전까지는 거기서 못 빠져나온다는 말이에요.
20장에 전쟁방식. 전쟁에 참여한 방식에 그 전쟁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에요. 전쟁할 때, 약혼한 사람은 전쟁에 병사와 내보내지 말라. 그리고 평화롭게 할 때는 문열어줄 때는 평화롭게 하라. 하지만 만일 싸우려하거든 아이들 다 죽여버려라. 그런 이야기.
21장 보겠습니다.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 혼인과 가정에 유사한 문제. 여기에는 소송 문제있고요. 그리고 22장에서는 약한 여성들 보호하는 거예요. 23장에 역시 이자문제인데, 이자도 타국인과 형제를 구분해서 타국인한테 꼬박 꼬박 챙기되, 형제한테는 이자를 받지 말라. 왜 형제는 이자를 받지 말라하느냐 하면, 형제는 소속이 내게 아니고 하나님 소속이기 때문에 그들의 재산도 하나님이 주신 거기 때문에 내게 아니에요. 내 소유로 가져올 수 없어요.
23장20절에 보면, 형제들에게 이자를 안 받는 소극적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보호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23장25절에 포도원에 가던지 아니면 곡식밭에 갈 때에 야무지게 야박하게 다 따지 말고 대충 남겨둬서 가난한 자가 주워먹도록 해라. 이 율법의 혜택을 입은 여자가 있지요. 바로 다윗의 증조 할머니 룻이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24장까지 계속됩니다.
25장에는 죄인을 보호하는 억울한 사람이 있게 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매를 40대까지 이상은 때리지 말라. 그리고 대를 이을 때 룻기에 나오지요. 대를 이를 때 친척집이 그 사람을 해야된다. 싸울 때 너무 과격하게 싸우지 마라. 그런 이야기.
26장 드디어 십일조 나옵니다. 십일조는 원래 누구의 몫입니까. 레위인 몫이고, 레위인의 특징은 딴 기업이 없어요. 기업이 없는 사람이 레위인 뿐만이 아니지요. 고아와 과부. 그래서 십일조도 삼년마다 십일조는 고아와 나그네와 과부에게 주어라. 그게 26장의 일이고. 26장12절에 보면, “제 삼년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다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서 네 성문 안에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 말은 왜 이렇게 했느냐 하면, 너희들이 애굽에 있을 때 그 때 하나님의 언약 앞에서의 하나님의 시선 앞에서 지금도 너희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다. 내 것 좀 있다고 부자 됐다고 잘난 체 하지 마라. 한꺼번에 얼마든지 고아와 과부 만들어 내버린다.
27장에 보면, 요단강 건너갈 때에 의식. 약속의 땅 지낼 의식을 보여줍니다. 율법을 기록하고 큰 돌에다가 율법을 기록하고, 에발산, 그림신산 세워서 하는 그 이야기. 아까 말씀드렸습니다.
28장, 신방갈 때, 신방 가서 많이 들었지요.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와도 복을 받는 거. 이건 저절로 외워지지요.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와도 복을 받는다. 그 말은 복을 받을 짓을 해야 복을 받는다는 거예요. 그 말은 저주가 기본이고, 복은 의외성입니다. 항상 우리는 말씀을 지키면 저주로 되돌아 오는 그러한 일상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복과 저주 두 개의 결과를 줌으로서 거기에서 몸부림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자신을 강력하게 당기는 것은 복쪽이 아니고 자기 안의 괴물 마귀로 인하여 저주로 다시 돌아온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 이야기가 계속 나와요. 28장 계속 나오고, 29장 마찬가지로 저주 이야기가 아주 덤배기로 했습니다.
그 다음에 30장까지 계속 이야기하고 있어요. 말씀 안 지키면 저주 받는다고. 말씀 안 지키면 저주 받는다는 말이 그 만큼 말씀 지킬 리가 없다는 뜻이지요.
그 다음에 31장9,10절, “모세가 이 율법을 써서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는 레위 자손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모든 장로에게 주고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매 칠년 끝 해 곧 정기 면제년의 초막절에” 초막절은 절기 가운데 마지막 절기가 초막절입니다. 수장절이라고 하고 있어요. 수장절, 모든 곡식을 다 모아놓은 것. 그리고 7년 텀으로 하나님께서 살게 해주실 때 이게 너희가 살았다, 하는 이것은 기적이지요. 왜? 말씀에 의하면, “저주받아야 마땅한데 저주를 받아야 마땅한 너희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아직도 너희가 여기서 약속의 땅에서 목숨 붙이고 살지?” 물으면 뭐라고 답변해야 돼요? “제사가 있잖아요. 제사.” 레위인이 드린 제사가 있잖아요.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이 나중에 약속의 땅에 가가지고 제사가 만약에 희미해진다든지 레위인들을 우습게 보면 어떻게 됩니까? 그들은 고스란히 저주를 받지요. 7년째 초막절에 이 율법을 반복해서 전체 가장들, 남자들 다 모여요. 여자들은 집에 있고. 남자들만 모여서 제사장으로부터 율법을 다시 한 번 재교육 받습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모습이에요. 마지막 모습이 결국은 율법만 남았네. 요거. “율법만 남았네.” 율법은 손을 털고 “내가 뭐라고 했어? 저주 온다고 했어? 안 했어?” 하고 율법은 자기 성과의 기적으로 봅니다. 아, 겁나지요.
도대체 이스라엘 백성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율법만 남고 그들은 멸망했는가, 그게 31장, 32장에 나옵니다. 아주 길어요. 31장26절을 보면 이렇습니다.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는 레위 사람에게 명하여 가로되 이 율법책을 가져다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곁에 두어 너희에게 그 다음에 뭡니까? 너희에게 증거가 되게 하리라. 그래서 이 언약궤를 뭐라고 하느냐, 증거궤라고 하는 겁니다. 증거궤.
어떤 식으로 증거한다 말이냐, 뭐가 증거궤 적인 기능을 발휘한다는 말인가, 그냥 상자인데. 그 상자가 나중에 불타버려요. 누가 불을 지르느냐, 하나님이 질러버려요. 바벨론을 통해서. 언약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무서우니까 근처에도 오면 죽는다고 그렇게 무섭게 엄포를 놨던 언약궤를 이방민족은 가볍게 불태워버려요. 가볍게 들어와서 가볍게 불태워버립니다.
왜 이방민족은 언약궤 건드려도 안 죽는 이유가 뭡니까. 언약궤의 효용이 끝났기 때문에 그래요. 건전지 약발 다 됐잖아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멸망받을 이방인과 다를바 없다는 그걸 들추어내는데 증거의 기능이 완료가 된 겁니다. 이제는 언약궤가 불태워져도 괜찮아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어도 괜찮아요. 왜? 충분하게 어떤 인간도 나를 알아본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그 증거 역할을 주님이 언약궤로서 다 보여줬습니다.
율법책과 언약궤를 나란히 함으로서 율법은 살아났지만, 언약궤는 불태워 없어집니다. 없어짐이 증거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서 없어짐이 바로 증거가 되는 거죠. 없는데 그게 증거가 돼요. 없음으로 증거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이교회 저교회 부흥회 오셨더라. 이러면 증거가 안돼요. 없어야 돼요. 아무리 찾아도 없어야 돼요. 우리 가정에는 주님이 계십니다. 사진 하나에 눈밭에 사진 찍어놓고 아침마다 볼록 올라오는 밥차리고 해봐도 주님은 없는 분이에요. 없는 분이 우리로 하여금 구원의 일을 만들어내십니다. 그것도 모르고 인간들은 자기가 하는 일이 자기에게 결과를 낳는다고 생각하지요. 열심히 기도하면 응답받는다. 그런 태도지요.
31장29절에 보면, “내가 알거니와 내가 죽은 후에 너희가 스스로 부패하여 내가 너희에게 명한 길을 떠나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너희의 손으로 하는 일로 그를 격노케 하므로 너희가 말세에 재앙을 당하리라 하니라” 아시네. 이미 다 알고 하시는 이야기에요. 뭐 지켜면 복 받고 안 지키면 저주 받는다. 할 때는 아직도 우리의 실력을 모르는 줄 알지만, 실력을 알고 있어요. 만들어 놓고 언약궤 없어질 거야. 그 때 니 주제파악을 하라는 말이지요.
32장8절에 이 일이 과연 이스라엘에게만 해당될까요? 32장8절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자가 열국의 기업을 주실 때, 인종을 분정하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민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 이게 뭐냐 하면 모든 민족들 속에 이스라엘이 언약과 관련된 이스라엘이 모든 민족속에 흩어진다는 뜻이지요. 흩어짐과 동시에 이스라엘에게 있었던 그 사태가 나머지 모든 이방민족에게 동일하게 이루어져서 그들도 이스라엘 멸망한 것처럼 그들도 멸망하는 겁니다.
32장15절에서 17절까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어떤 식으로 배신하는가 나옵니다. “그러한데 여수룬이 살찌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부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 제가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가볍게 여기고자 했던 그 의도, 무슨 의도를 가지고 무엇을 얻고자 그렇게 합니까?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신을 내가 알아서 고르겠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신보다 내가 우선되니까. 나는 내 잘되기 위해서 살아왔기 때문에 내가 신을 선택하는 것도 나한테 유리한 신을 내가 선택할 권리가 있다. 나는 나의 자유를 그 어떤 누구로부터 구애받지 않는 자유를 나는 발휘하겠다. 이게 바로 숨겨진 마귀의 본성입니다.
그래가지고 뭐냐 하면 17절에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하지 아니하고 마귀에게 하였으니 곧 그들의 알지 못하던 신, 근래에 일어난 새 신, 너희 열조의 두려워하지 않던 것들이로다” 하나님께 제사하지 않고 마귀에게 했다. 마귀지요. 18절에, “너를 낳은 반석은 네가 상관치 아니하고 너를 내신 하나님은 네가 잊었도다” 너를 낳지 않은 반석, 너희들은 추구하게 되고, 20절에 그들은 심히 패역한 족속이고 무신한 자녀다. 신이 없는 자녀다. 그래서 22절에, 내 분노가 불이 일어나서 모든 음부와 땅을 사른다. 이제 여러분들이 인류의 마지막 재앙이 물이 아니고 불로 떨어지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하나님의 말씀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전체 다 퍼졌기 때문에. 모든 말씀이 저주의 말씀이 가있기 때문에 그들은 언제 불심판 받아도 그들은 할 말이 없습니다.
32장39절,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줄 알라 나와 함께 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자 없도다” 이리 되어있지요. 이 말은 나 외에 다른 신은 없다. 이런 뜻이거든요. 이것은 결국 뭡니까. 십계명에 나오지요. 나외에 다른 신은 없다. 다른 신은 없는데 왜 자꾸 인간들은 여호와 말고 다른 신을 섬기니까 인간 내부에서 뭐가 나와요? 상상하는 하나님이 자꾸 나오는 거예요. 그래놓고 내가 믿으니까 이건 참된 신이라고 자꾸 억지를 부리는 겁니다.
그 다음에 33장 봅시다. 열 두지파에게 하나님이 복을 내리십니다. 아, 참, 이게 32장과는 좀 안 어울리지요. 실컷 욕해놓고 이제는 복을 내린다니 이건 복이 무슨 효과가 있겠어요. 저주받기로 확정되어있는데. 그것은 바로 ‘경로’입니다. 경로. 경로를 아는 것이 복이에요. 망할 때 망하더라도 망하는 경로가 주께서 이런 경로를 주셨다 한다면 비록 이 세상에서 망해도 구원받습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40년동안 사람들이 많이 죽었잖아요. 다 지옥간 게 아니에요. 지옥 간 게 아니고 이것이 하나님이 하나님다운 방식이고 이런 점에서 다른 신하고 차이 납니다. 자기 백성을 망하게 함으로서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뚜렷하게 드러내는 방식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 주의 백성입니다.
34장에 들어가면, 드디어 모세가 죽습니다. 33장에서 축복을 해주는데 축복은 모든 것이 다 마무리되고 주님에 의해서 새로운 이스라엘이 만들어질 때 그들의 경로, 그들이 죄지은 경로가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복으로 바뀌는 주님의 자신의 경로가 돼요. 니는 죄지었지만 나는 그게 복이라고 이해해야 된다. 그렇게 알려주는 거예요. 나중에 예수님이 오셔서 그걸 말씀해 주시지요.
34장에 모세가 죽습니다. 그런데 그 모세가 죽으면서 묘지가 없지요. 10절에,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모세의 가치가 바로 천상이라는 거예요. 지상적으로 가치를 논할 대상이 아니고 천상적이라는 겁니다. 그런 뜻에서 모세의 시체를 니가 찾아서 ‘내가 모세의 시체 앞을 영원토록 섬기리라.’ 그러한 쓰잘데기 없는 짓은 하지 마라. 모세는 이미 천상의 존재니라. 마치 예수님과 같지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신명기를 보았습니다. 주께서 말씀이 말씀되기 위해서 철저하게 자기 백성을 사용하셨던 것처럼 오늘날 저희들도 철저하게 사용하셔서 어느 것 하나 놓치지 말고 사용하셔서 십자가의 다 이루심만 드러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