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강의

언약의 소재

아빠와 함께 2025. 3. 22. 09:58

안양20250313a사사기2장23절(언약의 소재)-이 근호 목사

안양 강의는 한 회씩 할 때마다 성경책 하나씩 넘어갑니다. 지난번에는 여호수아하고, 오늘은 사사기고요, 그래서 66권 성경 전체를 다 대충 핵심과 그 중요한 것은 파악할 수 있는 그러한 모임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사사기인데, 그 사사기의 특징, 핵심, 이런 것은 이제 사사기 성경에도 똑같은 그 주제가 테마가 유지가 되고 이걸 일관성 있게 하나님께서 이걸 끌고 가십니다. 이 사사기를 끌고 가시는 그 힘은 어떤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이루어지는가, 사사기 2장 22절에서 23절에 말씀이 핵심이 돼 있습니다.

사사기 2장 22절에서 23절 거기 보면 “이는 이스라엘이 그 열조에 지킨 것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로 시험하게 함이라 하시니”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 열국을 머물러두사 속히 쫓아내지 아니하시며 여호수아의 손에 붙이지 아니하셨음이 이를 인함이었더라.” 이것이 사사기 2장 22절 23절 요 뜻은 이스라엘을 긍정적으로 보시겠다는 겁니까? 부정적으로 보시겠다는 겁니까? 이스라엘을 좋게 봅니까? 안 좋게 보시는 겁니까?

시험을 한다는 것은 안 좋게 본다는 뜻이지요. 못 믿겠다는 거예요. 이스라엘 자체를 믿지를 못하겠다는 겁니다. 부정적인 안목을 갖고 있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러면 사사기에서 긍정적인 것은 뭐냐, 자기 백성도 부정적으로 본다면 사사기에서 하나님께서 긍정적으로 이루고자 하시는 그 취지는 무엇인가.

그거는 사사기에서 이스라엘을 부정적으로 보셨잖아요. 그런데 그 23절에 보면 그 열국을 머물러두사 속히 쫓아내지 아니하시며 여호수아의 손에 붙이지 아니하셨다 해서 그 약속의 땅에서 그 열국들, 이방민족을 쫓아내고 안 쫓아내고가 여호수아 선에서 모든 게 완결되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쫓아내지 않은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약속의 땅에서 두 부정적인 대우를 받아야 될 두 주체가 같이 한 장소에 있는 겁니다. 한쪽은 이스라엘 역시 부정적, 그리고 이방민족 역시 부정적. 부정적과 부정적인 것을 만나면서 나올 수 있는 긍정은 뭐냐 전쟁이지요.

악인데, 절대적 악이에요. 절대적 악은 역할이 누구냐 하면, 이거는 이방 민족이 하는 거예요. 이방 민족이 절대적 악을 역할을 하고, 이스라엘은 악인데 이스라엘은 ‘언약을 드러내기 위한 보조로서의 악’ 또는 보조로서 악을 적당한 표현을 한다면 언약의 소재, 언약의 소재지요.

글 쓰는 소설가가 소설을 쓸 때, 소설을 쓰고 또 돌아서서 소설을 못 써요. 뭘 모아야 되냐 하면 소재를 수집해야 됩니다. 소재 수집하는데 돈 많이 들어요. 그 소설가들이 시간도 많이 걸리고 몇 년씩 걸려요. 그리고 자기 소설 내용이 이게 실제적으로 맞는지 안 맞는지 검토하기 위해서 전문가들에게 조언과 자문을 얻어야 되고 거기에 대한 비용도 들고.
어떤 소설가는 해외여행들을 다니면서 그냥 상상해서 독일이 어떠니 프랑스가 어떠니 실제로 그 현장에 안 가보면 표현 묘사될 수 없는 묘사를 하기 위해서 그 여행을 많이 다녀요. 그런 비용이 상당히 많이 듭니다. 이 소재를 발굴한다. 소재를 개발하는 용도지요. 그 용도로 이스라엘이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절대적인 악, 그 다음에 언약을 드러내기 위해서 소재로서의 이스라엘. 이스라엘을 사용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사용한다면 이러한 전쟁을 통해서 긍정적인 것은 뭐냐, 긍정적인 것은, “하나님 자신이 남긴 언약의 실제성” 이게 긍정적인 거죠. 긍정적인 거. 그러면 이스라엘을 믿지 않는 이 부정적 이스라엘에서 긍정적 이스라엘로 나오려면 이스라엘이 어떤 태도를 가져야 되는가, 절대적 악과의 전쟁을 통해서 “나는 이겼다. 역시 하나님 우리 편이야.” 그래 가지고는 안 되겠지요. 어디까지나 보조니까. 보조가 주인 행세하면 돼요? 안 돼요? 안 되잖아요.

하나님께서 전쟁을 의도적으로 일으켜서 어디서부터 벗어나냐 하면 내가 마치 나의 주인인양 여기는 데서 벗어나서 나는 누구의 보조며, 그리고 나의 모든 활동과 생활은 하나님이 자기의 긍정적인 자기 일을 위해서 소재거리로 내가 참여된 것을 영광으로 여겨야 되지요. 영광으로.

이것을 저는 이렇게 표현해 보겠습니다.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느냐 하면은 “살아야 될 사명” 이 사명이 빠져버리면 사는 것이 뭐로 전락 하느냐 하면, 허무, 허탈로 전락해요. 이 사명감이 살아야 될 이유가 없으니까. 그냥 12명의 아이가 그냥 질주해요. 질주하는 이유도 몰라요. 아무 이유가 없어요. 13번째 아이가 나는 달려가지 않을래. 하고 멈춰 버리죠. 그게 그 이상이 그 시대상에서 자기 나름대로의 작가로서 그 시대에 해답이라고 내세운 게 그게 뭡니까. 나는 남은 이유 없이 질주하는 거 나는 안 달려갈래. 그냥 천천히 살래. 그렇게 되는 겁니다. 어떻게 뭐 상당히 지혜로운 거예요? 어떻게 되는 거예요? 뭐가 빠졌어요? 이게 사명이 빠진 거예요.

사명감은 내가 나의 의미가 나로 종결되지 않는다는 거. 나 말고 다른 나는 누구의 소재거리에 해당된다는 거예요. 그리고 나를 소재로 삼으신 작가 뭐 작가 뭐 김영아 작가가 유명하니까. 김영아 작가든 누구든 뭐 작가. 그분이 자기 긍정을 위해서 소재로 삼았기 때문에 사명감이라는 것은 그분이 제공된 거잖아요. 사명이 주어짐으로서 내가 주인공이 되면서부터 오는 허무와 허탈은 이것이 이게 날아가죠. 날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이 살아야될 사명감은 그러면 어떻게 생깁니까? 오늘날 우리에도 해당되는데. 그걸 물으신다면 이겁니다. ‘만나야될 사명’이 내가 ‘살아야될 사명’과 이유를 제공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기 자신 사명감이 없이 자기 자신에 매몰돼 버리면 그다음부터는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느냐 하면, 그건 누구하고도 안 만나요. 만나질 않습니다.

자폐 증세를 보이기 시작해요. 자폐 증세를. 대표적인 것이 치매 환자지요. 치매 환자입니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치매 안 걸려도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치매성 바이러스를 갖고 있어요. 잠복성. 잠복적인 잠재적인 치매 환자들이에요. 그게 이제 세월이 지나서 거기 티가 나 버린 거죠. 드디어 감출래야 감출 길이 없으니까. 내 구조가 내가 고장이 났으니까. 이제 본색이 들어나는 겁니다.

그 결국은 뭐냐 하면 사명이 없고 사명이 없다고 견제할 수 있는데 만약에 사명이 있다면 나를 위해서 내가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누구로부터 연락이 오고, 누구로부터 전달이 오고, 누구로부터 만남이 이루어져야 되겠지요. 그러면 이 만남은 어떤 만남이냐 하면 우연적 만남이에요. 우연적 만남.

우연적 만남은 이거는 우리에게 뭘 주느냐 하면, 신기함을 제공하고, 여기서 새로움을 새로움이 일어납니다. 새로움이 일어납니다. 제가 여러분들이 이렇게 많이 올 줄도 모르고 <사사들의 목록> 아홉장 밖에 없는데 같이 한번 봅시다.


<사사들의 목록표>는 첨부파일에 있습니다.

여기에 등장인물이 몇 명이에요? 12명이지요. 사사가 12명 돼 있지요. 12명이 되어있는데, 하여튼 다채로워요.

심지어 여기에 여자도 있고, 다채로운데, 이걸 보면서 사람들은 뭘 생각하느냐 하면, 이렇게 불쑥불쑥 자꾸 우연적으로 등장하지 말고 차라리 왕 하나를 딱 박아가지고 그 왕 밑에서 그 왕과 왕은 세속제니까 그 왕과 그 왕의 가문 세습적으로 주어지는 그 후손들이 창창하게 이스라엘을 이렇게 굳건하게 하나님 나라로 만들면 더 낫지 않느냐, 이걸 사자성어로 중구난방이라 하거든요.

중구난방이라고 등장해서 나라 꼴이 이게 뭐가 되느냐, 이게 나라꼴이. 연도수도 나와 있지요. 40년 80년 뭐 10년 40년 40년 23년 22년 6년 8년 이리 죽 삼손은 20년 그렇게 되어있는데. 그럼 이들이 통치하는 이 통치. 우후죽순처럼 이렇게 일정하지 않아요. 일정하지 않으니까 이거는 필연에 속합니까, 우연에 속합니까? 우연에 속하지요.

이 우연에 속한 12명 등장이 무슨 뜻입니까? 어느 누구도 대장질 하면 안 된다. 어느 누구도 누구의 소재 이어야 하지, 등장인물이 소설가 되면 안 되잖아요. 등장인물이. 인간은 자기가 잠에 잘 때 꿈은 자기가 주인공이고, 등장인물이고, 그리고 뭐 다 되지요. 꿈 자체가. 꿈을 누가 꾸게 했는가, 그건 내가 꾸었다고 간주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꿈에다가 의미를 줘요. 멀리 타지에 있는 아들에게 전화해서 “야야 내가 오늘 어젯밤에 꿈자리가 사나운데 니 차 조심하래이.” 이런 거. 본인들이 본인들의 주인공이에요 그 본인들이 주인공이 되는 것은 뭡니까. 어디에 빠진다 했어요? 허무와 허탈에 빠지지요. 요 주특기가 뭐냐면 절대적 악이라 하는 바로 이방민족에게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이방 민족은 꼭 난폭 운전 술 먹고 난폭 운전하는 거 같아요. 차 안에서 지가 대장이니까. 지는 술김에 차 바깥에 누가 있는지는 모르겠고, 나 달리고 싶어 달린다. 그냥 밟는다. 스피드를 확 온몸으로 느낄 거야. 이방 민족들이 다 그래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누구를 닮느냐 하면, 이방 민족들의 이 스피드 광. 광적 이러한 거. 자기가 자기의 최고가 되고, 주인이 되는 거, 이걸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닮아가는 겁니다. 자 여기서 문제 하나 냅니다. 그들이 닮아갔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닮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유도했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닮도록 유도한 거예요. 그게 바로 사사기의 핵심입니다.

사사기 2장 22절 23절, 지금 세 번째 읽는데 다시 한번 읽어 보면, “이는 이스라엘이 그 열조 지킨 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로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 그 열국을 머물러두사 속히 쫓아내지 아니하시며 여호수아의 손에 넘겨주지 아니하셨더라.”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너희들이 하나의 국가로서 하나의 왕으로서 하나 여호와 하나님께 섬길 마음 자세는 이게 숙성되어야 되고 무르익어야 돼요.

그 무르익는 과정에서 재료로 투입되는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이방 민족입니다. 이방민족이 어떻게 살아가는가, 그들을 바로 곁에 두게 하셔가지고 그게 얼마나 이방 민족의 그 이방 민족의 삶과 거기에 합세해서 그걸 본받을 수밖에 없는 내부 속성을 하나님께서는 들추어 내어주시는 거예요. 그걸 뭐라 하면 이방민족과 일체감. 일체감. 일체감의 근원은 ‘나는 절대적 존재다.’ 나는 절대적 존재감, 일체감.

그 사실을 이스라엘이 이미 거기에 잠복 되어있어요. 그게 다 포함되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을 싫어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이 누구를 밀어내고 저쪽을 가까이해요. 누구를 밀어내는가, 여호와 쪽에 오는 것을 밀어내요. 다시 말해서 내가 누구를 만나고 누구를 안 만나고는 누가 결정하는가, 내가 결정하는 거예요. 내가.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신을 믿는 거 누가 결정한다? 내가 결정하겠다. 왜? 나는 절대적 존재이기 때문에 나는 내 곁에서, 내 안에서, 뭐를 의도적으로 빼겠다는? 사명을. 누구의 지시를 따라야된다는 이 사명성을 사명감을 나는 그것을 강력하게 반대하면서 그것을 내 안에서 빼겠다는 거예요. 뺄 것도 없어요. 하나님을 밀어내면 자연적으로 사명감도 같이 옅어지고 사라지기 때문에 간단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본심은 누구로부터 지시받는 게 아니고 스스로 절대자가 되는 그 본심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이렇게 배치해 놓은 이방 민족을 향하여 그들에게 흡수 통합됩니다. 통합되는 뜻은 아까 이야기했지만, “하나님 싫어! 하나님 싫어! 나는 사람이 좋아.” 물론 내가 원하는 사람이지요. “나는 하나님이 싫어! 나는 사람이 좋아” 요 부정적 요거 하나 끄집어내면 하나님은 성공입니다. 하나님의 성공.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일의 성공이에요. 끄집어낸다는 표현을 했는데 하나님 싫어 나는 사람이 좋아, 이걸 이거는 남이 모른다고 생각하고 본인만 알고 있었어요. 본인만. 본인은 알고 있는데 이게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여호수아가 죽고 난 뒤에 이게 노골화 되지요. 노골적이 돼요. 여호수아 죽고 난 뒤에.

여호수아는 뭐냐 하면 잔소리꾼이에요. 누구로부터 파견된 잔소리꾼이냐 하면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사명을 받아서 잔소리하는 사명을 받은 거예요. 여호수아를 통해서 하나님의 계명과 율례를 지켜라, 라고 계속 잔소리를 해대니까 여호수아가 살아 있을 때는 그걸 노골적으로 거부 못하다가 죽고 난 뒤에는 ‘이제는 아~ 나도 숨 좀 쉬자. 그 잔소리에서 숨 좀 쉬자.’ 그렇게 해서 해방감에 만끽하는 거죠. 해방감에. 이러한 본색을 들추어내는데 하나님께서 그동안 노력해 왔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습니다.” 라고 우리가 하게 되면 하나님은 이렇게 대꾸하십니다. “네가 나를 아느냐? 그리고 너는 너 자신을 아느냐?” “하나님도 잘 모르겠고 나는 나 자신을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 내가 누구 보내 줄게. 사명을 가진 사람을 보내 줄게. 네가 선택하지 않는 사람을 내가 만나게 해줄게. 그 사람 편에 무엇이 연락이 오고 무엇이 어떤 내용이 실려서 오는지를 한번 봐라.”

그게 뭐냐 하면, 그 본인도 사명감인줄 모르지만, 둘이 똑같은 인간을 만나지요. 언약(복음)을 모르는 자의 만남, 두 번째는 언약(복음)을 안다고 우기는 사람과의 만남. 언약은 복음이지요. 복음. 인간은 요 두 종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두 종류밖에 없어요. 그런데 이 두 종류 사람과 나와 만났을 때 제일 중요한 것은 내가 미지다. 내가 나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 미지다. 만나게 되면 여기서 뭐가 생기는가, 짜짜잔짜~ 짠~~ 팝콘이 확 튀면서 어떤 결론이 내리지요. 일체감. 동질감에 젖게 됩니다. 동질감에 일체감에.

예를 들면 시골에 있는 시골에서 농사짓는 동서와 서울에 사는 동서가 시골쥐, 서울쥐지요. 이렇게 연락도 없고 전화도 없고 이렇게 잘 안 만나고 하게 되면 잘 모르고 있다가 서울에 있는 쥐 동서가 남편이 사고쳐가지고 부도 나가지고 피신할 때가 없어가지고 촌에 왔다고 칩시다. 촌에 있는 동서가 형님이고, 서울에 있는 사람이 동서라면 전에는 “형님은 뭐 어 어머니 모신다고 그렇게 유세 떨고 응 어머니 모시는 건지, 어머니 기대 사는지 분간도 안 되면서 어 나 큰 동서 값한다.” 그렇게 큰 소리치면서 그동안 다른 동서 만나가지고 많이 비난했었는데 막상 자기가 사업 망해 가지고 시골에서 그 연로하신 그 어머니와 같이 살면서 부도가 너무 나가지고 한 5년가까이 있었다고 칩시다. 5년에서 바깥으로 못 나왔다고 칩시다. 5년 같이 고추 농사 “네가 그냥 먹으면 안되지. 농사 니가 밥값해야지.” 해가지고 그 깨끗한 손으로 그것도 곱디고운 손으로 고추 심고 농사하고 태비 소키우고 더럽게 했을 때에, 둘 사이에 뭐가 생기겠습니까? 일체감, 동일시 되지요.

다른 또 손 아래 또 그 서울쥐 말고 두 번째 서울쥐가 “동서 둘이 뭐 어머니 모신다고 한 거 다 그 땅에 촌에 땅노리고 하는 짓 아닙니까?” 이렇게 할 때, 그 세 번째 동서도 부도났어. 그래 가지고 같이 한번 살아보면 어떻게 돼요? 동질감, 일체감 느끼지요. 인간은 어디까지나 인간 편이다. 인간하고 굳이 싸울 필요 없다. 인간하고 싸울 필요 없어요. 사사기는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인간에게 끌리지 절대로 하나님께 끌리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절대 악을 사모한다. 나는 용기가 없어서 하나님을 노골적으로 안 버리는데 이거 슬슬 버려도 되네. 슬슬 용기가 나가지고 나 복음 없으면 죽는 줄 알았는데, 이제 복음 없어도 잘만 살더라. 뭐 성경은 뭐 옛적에 성경은 뭐 다 덮어버렸지요. 왜? 이게 잔소리 책이니까. 굳이 잔소리를 들으려고 학을 쓸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세상이 좋고 사람이 좋은데 좋은 거 있는데 억지로 싫어하는 거 볼 이유 없지 않습니까. 좋은 게 있는데. 나는 그렇게 예수 안 믿고 교회 안 다니는 것이 그다지 인간이 아닌 줄 알았는데, 촌에 와서 같이 고추 심고 하고 보니까 이제는 하나님이 누구신가 보다도 이번에 농협에서 하는 대출 이자가 얼마나 낮은가, 둘 다 거기서 똑같은 생각을 갖고있는 거예요. 둘 다.

그 동서간에 이야기를 끌어가보면 동서간에 만약 큰 동서가 큰 병이 들어서 어머니 못 모신다고 하면, “동서, 마지막인데 마지막이니까 내가 간절히 부탁하는데 예수님 십자가 복음 받아들이세요.” 이런 소리 안 하지요. “그저 우리 형님은 그동안 어머님을 지극정성 섬겼기 때문에 아마 죽은 데 가면 하늘나라에 좋은데 가고 거기서 먼저 가신 어머님 만나 하늘나라에서 만날 겁니다.” 아무 근거도 없는. 인간 대 인간의 정 나눔에서만 나올 수밖에 없는 너무나 극히 상식적인 이야기로 있으니 그러면 그동안 뭡니까? 하나님 자리에 누가 있었어요? 정들었던 인간이 그 하나님 자리에 버텨서 버티면서 힘들고 고생스러운 인생살이에 나의 반려자 또는 동행자, 위로자로서 사람을 선택한 거예요.

그럴 때 우리는 사사기 2장 23절 하나님께서 그 옆에 그런 동서를 붙여준 이유는 절에 지극한 보살을 둔 이유는 결국 복음이고 하나님이고 간에 인간은 인간을 좋아하게 마련인 이 근원적인 속성이 우리 속 우리 힘으로는 이걸 뺄 재간이 없다는 거예요. 뺄 재간이 없어요. 결국은 사사기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이유는 추락입니다. 이스라엘의 추락.

이스라엘이 뭐를 착각했느냐 하면, 만나는 분이 여호수아잖아요. 여호수아. 여호수아 이전에는 뭐였습니까? 모세. 신명기는 여호수아고, 여호수아는 여호수아고, 사사기는 여호수아가 죽고 난 뒤에 사사기에요. 모세, 여호수아 만나는 분이지요. 그 다음에 모세 여호수아 배후에는 누가 있습니까? 누가 모세, 여호수아한테 사명을 줬습니까? 하나님이지요. 하나님을 하나님이라 하고, 지상에 관여하는, 관계하는 그런 하나님, 지상과 인간을 연결하는 이스라엘을 연결하는 하나님을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이름에 의해서 만나는 분이 여호수아, 모세였다, 이 말이지요. 뒤에는 하나님의 이름이지요. 이렇게 만날 때는 이들이 뭘 했느냐 하면 착각을 한 거예요. 착각을. 아무도 주변에 만난 사람 없기 때문에 그들은 땅 차지에 몰두해 있어요. 우리가 광야에서 힘들게 살았기 때문에 우리 소유에 부동산이 필요한 거예요. 우리 소유의 부동산. 이젠 전세 그만 살고 월세 전세 그만 지긋 지긋하다. 내 소유에 등기돼 있는 내 이름으로 등기돼 있는 두 번 다시 이사 가지 않는 영원한 이 안식처만 있으면 우리는 좋겠다. 그런 꿈 그런 희망으로 그들은 여호수아 모세의 지도를 따랐어요.

따라서 그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운인지 우연인지 모르겠습니다만 하여튼 차지했어요. 그러면 차지했으면 온전히 이게 모세 여호수아 전했던 율법과 계명과 더불어서 늘 하나님 만나는 즐거움이 있어야 될 텐데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안 믿는 이웃 사람들을 근처에다가 이웃 사람들을 두면서 사람이라는 걸 굳이 하나님의 말씀만 듣고 사는 이것만이 사람 사는 재미가 아니고, 다른 재미가 있다는 거 다른 행복이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이제 눈이 뜨여져서 눈이 확 뜨여져서 깨닫게 된 거죠. 할렐루야! 뭐 이런 거. 이상한 할렐루야. 확 눈을 뜨게 된 거죠.

여기서 이스라엘을 표현한 것은 뭐냐 요령이라는 거. 모든 것은 요령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같이 있어서 그들의 종교가 신기하고 새롭다. 왜? 새로운 만남이니까. 새롭다고 느꼈는데, 그들은 하나님이 추가적으로 주신 하나님의 작업에 대해서 그들은 몰랐던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과 하나님 믿어왔으니까 전통적인 패턴이니까 삶의 패턴이니까 못 버리잖아요. 하나님과 바알 섬기는 우상. 우상 섬기는 데서 양다리 걸치는 요령이 통할 줄 알았는데, 이방나라에 바알적인 삶의 태도가 이 요령을 완전히 뭐로? 폭력으로 압제하도록 하나님께서 배후에서 조치를 취했던 겁니다. 조치를 취했던 거예요.

그 압제 폭력 이거 압제 폭력이니까 우리말로 글자 하나 단어로 끄집어내면 이게 뭐냐, 힘이에요. 무슨 말이냐 하면 이방 민족들이 “야 이스라엘아! 너희는 하나님, 하나님 말씀으로 산다며?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며? 우리는 힘! 모아진 힘으로 산다. 어때? 우리처럼 힘 모으는 재미로 솔솔하지 않아? 너도 우리 따라 힘 한 번 모아볼래?”“우리도 당신처럼 힘셌으면 좋겠어요.” “그래? 그러면 나한테 복종해. 나한테 조공 받치고 그러면 내 보호를 받게 되는 혜택을 줄게.” 이 관계.

그러니까 인간대 인간의 관계가 어떤 관계냐 하면, 여기 사사기에 제일 마지막에 이런 말이 나오거든요. 사사기 제일 마지막에. 그때에 이스라엘의 그다음에 뭡니까?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제 속에는 옳은대로 행했지요. 왕이 있으면 왕국이 돼요. 왕국은 뭐냐 이방 나라의 특징이 제도가 왕국 제도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왕이 없었기 때문에 힘을 집결할 수 있는 구심체가 없어요. 구심체가 없으니까 이거는 뭐 어떻게 되는가, 전부다 낱알 같이 각자 각자 소소한 각자의 힘으로 우왕 좌왕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사사기 끝나고 난 뒤에 사무엘상 8장에 들어가면 그 이스라엘 장로들이 그 사무엘 선지자에게 요청한 게 제일 다급하게 요청한 게 뭐냐 하면 소소한 개인적인 힘, 이게 우리로 하여금 안정적인 국가 운영의 보탬이 안 되더라, 이 말이지요. 이 힘을 그 소소한 힘을 하나로 집결하는 강력한 힘의 소용돌이 구심점이 있어야 되겠다. 우파지요. 강력한 힘에 의해서 휘어잡을 왕을 주신다면 우리는 아낌없이 우리들의 힘을 왕에게 잘 쓰라고 양도할 용의가 되어 있습니다, 라고 장로들이 이야기한 겁니다. 장로들이.

장로라는 것은 무슨 전통을 갖고 있어요? 바로 여호수아의 전통, 하나님의 잔소리 계명, 율례의 전통을 갖고 있지요. 갖고 있으면서 그들은 말씀을 좋아했다? 좋아하지 않았다? 말씀을 좋아한 게 아니고 이 계명을 뭐로 전환시키느냐 하면 다른 나라에 못지 않는 힘의 뭉치로 전환시키고자 하는 아이디어를 그 당시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이스라엘 장로들이 그렇다는 말은 다 백성들도 동의하고 있다는 거예요. 동의한 거예요.

힘이 센 왕이 우리나라가 되면 우리가 그다음에 그다음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용기가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우리에게 왕을 허락해 주옵소서.” 사무엘은 거기에 동의했습니까? 동의 안 했죠. 사무엘이 전한 바에 의하면, “너희들이 왕을 구해? 왕을 구한다고? 그러면 그건 인간의 나라지.” 하나님을 이제는 영원히 빼자 하는 그러한 주장인데 이구동성으로 그렇게 뺐어요. 빼버렸다 말이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무엘상에 들어와서 포기했으니까? 포기하지 않았어요. 사사기부터 내려오는 주님의 일관성이 있습니다. 그건 뭐냐 하면 사사입니다. 사사가 몇 명이냐, 12명. 특징이 뭐냐, 하나님의 신. 하나님의 신이, 하나님의 영이 임했다. 영이.

자, 그러니까 하나님이 영이 임했으니까 하나님의 영은 특징은 임금되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임금 되는 것을 이방나라처럼 임금 이방나라처럼 되는 것을 뭐가 반대해요? 하나님의 신이 반대하겠지요. 그러면 사사기에서 전쟁이 일어날 때 이스라엘과 이방 전쟁이 일어날 때, 이 전쟁이 결국은 눈에 보이기는 이방 나라와의 전쟁인데, 결국은 이게 사사기가 무르익어 가면서 점점 심도가 더 심도 있게 이야기하면, 이스라엘이 누구를 상대로 싸움하느냐 하면, 하나님을 상대로 싸우는 그러한 대상이 된 거예요.

하나님이 키웠고 하나님이 만들었고 하나님이 제작한 나라 하나님의 나라가 도리어 하나님의 자신을 치는 나라로 전환되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자체적인 하나님의 계획안에 포함되어있는 프로그램이에요. 포함되어있는. 특히 여기 나오는 지금 방금 제가 지금까지 이야기하는 것을 요약하게 되면, 인간들이 원하는 것은 힘이죠. 힘. 힘 안에서의 안정적인 삶, 여유, 요걸 합쳐서 뭐가 되느냐, 행복. 인간은 자기가 둘러싼 힘 안에서의 안정적인 여유와 행복을 추구하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나오게 된 것은 “나는 절대자다.” 나는 절대자다.

그런데 사사기를 통해서 뭘 보여주냐 하면 힘이 이걸 선호하거든요. 그런데 힘의 힘으로 된 이 세계에, 뭐가 있느냐 하면 서열이 생겨요. 서열이 높낮이가 생긴다고요. 힘 작은 것과 힘 많은 것과의 높낮이. 그러면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의 왕국이 된다는 말은 이방 나라 밑에서 이방 나라의 힘에 눌린 작은 왕국이 되는 것밖에 안 돼요. 이방나라의 왕과 이방나라 신이 있으니까 이방나라의 신 바알이 절대적인 실질적으로 살아 있는 하나님 맞다를 그걸 증명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은 그 밑에 똘마니로서 시키는 대로 조공을 받쳐야 될 그러한 힘의 세력에 참여된 바가 되어버려요. 그것도 하나님께서 의도했던 전략이었습니다. 전략입니다.

그래서 이제 오늘 강의 제일 중요한 부분에 들어왔는데요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은 뭐냐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런 구조로 몰아가는 취지는 뭐냐 이겁니다. 이거 꼭 기억하셔야 돼요. 빨간 걸로 쓸게요. 낭비. 소모용 낭비 또는 소모. 주님께서는 우리인생을 아무 뜻도 없고 아무 의미도 없이 소모 합치면 이게 뭐냐, 허비. 허비하는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이게 진짜 여기서 사자성어 나와야 돼요. 할렐루야! 할렐루야!

인간의 모든 걱정과 근심은 어디서 나오는가, 내가 소모용이라는 것을 잊어서 그래요.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소모용을 잊어서 그래요. 이 소모용이 바로 여호수아 7장에서 이미 실시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제비뽑기. 아간의 제비뽑기. 제비뽑기를 하면서 네가 인생을 네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선택한다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하나님의 소재로서 채택된 자 있고 곧 나머지는 뭐냐 소모용이고 낭비고 허비용이에요. 그러면 12사사는 뭐냐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분류 작업을 하고, 이 시간도 멈추지 않고 분류 작업을 하고 있는 거예요.

어제 수요일 같으면 치밀한 분류 작업. 아주 세세한 분류 작업. 세세한 분류 작업을 하면서 로마서1장 24절 언급했어요. 내어버려 둘 자와 내어버려 두지 않겠다는 자와의 철저한 분류 작업이에요. 그 분류 작업을 누가 하느냐 우리 본인이 아니에요. 주님께서 친히 하셔요. 너는 내 분류 작업에 끼어들지 말라, 해서 그냥 복음을 모르고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는 사람들은 그 복음을 안 받으려고 예수를 안 믿는 사람 그 나름대로의 하나님이 아주 바쁜 일과를 보여주는 거예요. 바쁘게 보여줍니다. “저리가! 저리 가! 니 복음에 오지 마!” 계속 밀어내고 하나님께서 제비뽑기를 분주하게 매일같이 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하나의 그 자투리 같은 현상. 하나의 증거물들이지요.

여러분들이 철 깎는 선반 깎는 작은 철공소에 가게 되면 옆에 바닥에 뭐 떨어졌습니까? 철에서 떨어져 나오는 철조각 있지요. 그 철 조각들 그 쓰레기들 그게 뭡니까? 주님 보시기 이게 낭비되고 소모되어야 될 자들이에요. 그러면 뽑힌 사람 뭐가 있다? 주께서 사명이라는 것을 심어 주면서 주님과의 다이렉트 직접적인 만남을 하게 되는 거예요. 이 만남의 대표적인 사례가 12사사에요.

12사사의 공통점은 뭐냐, “나 안 할 랍니다. 나, 일 못합니다.” 다시 말해서 12사사들은 고백합니다. 이 일을 기획하고 시작하고 그리고 나의 성신 하나님의 신의 만남은 내가 원해서 내 쪽에서 기대해서 한 게 아닙니다. 기대한 게 아닙니다. 아까 낭비라는 걸 잊지 말라 했지요. 낭비, 우리 인생은 낭비니까. 또 하나 더 한다면 낭비1, 2. 예상하지 마세요. 뭐든지 예상하지 마세요. 예상하면 내가 절대자가 돼요. 그러면 인생이 내가 힘을 추구하게 되어있습니다. 힘 추구하게 되면, 힘 추구하면 벌써 여기에 어깨에 오십견 와요. 힘 추구하면. 힘 추구하는 이유가 예상하기 때문이에요. 예상하기 때문에.

우리 애가 요번에 1등 해야 되는데. 졸업식 할 때 졸업장 읽는 거를 우리 애가 대신 대표로 해야되는데. 갑자기 어깨가 뻐근해요. 우리 애가 천재가 돼야되는데. 예상하면 힘 들어가고 그 힘은 나를 뭉게는 힘이죠. 나를 파괴 시키는 힘이에요. 어차피 우리는 마태복음 20장에 의하면 놀고 서 있는 사람 낭비지요. 노는 자에요. 할 짓 없는 노는 자인데, 일부러 낭비를 훅 뿌려놓고 주님의 분류 작업은 주님 혼자 바빠요.

“너! 너! 너! 천국 와” 뽑아내는 거예요. 그 옆에 있는 사람은 뭣도 모르고 “나도 갈래.” “니는 부르지도 않았는데 니가 왜 와.” 부르지도 마! 그런 노래. 옛날에 그런 노래 있어요. “니는 부르지도 않았는데 왜 와. 니는 저리 가! 니 할 일이나 해. 니 힘 좋아하잖아. 힘. 니가 스스로 절대자잖아. 잘 먹고 잘하세요.” 밀어내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간택, 뽑아내는 작업이에요. 뽑아내는 작업. 주께서는 여기 쉴 틈이 없습니다. 지금도 오늘도 굉장히 바빠요. 굉장히 바빠요. 밀어낼 건 밀어내고 뽑힐 것은 기어이 뽑아내는 작업.

그러면 뽑아낼 때 뭐를 뽑아내는가, 힘. 힘을 힘의 반대를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신이지요. 하나님의 신은 하나님의 잔소리가 가득 들어 있지요. 하나님의 원래 언약이 들어 있지요. 하나님의 언약이 힘을 이걸 공허한 것으로 이방인적인 거, 하나님의 대적으로 밀어냅니다.

결국 전쟁은 뭐냐, 우리는 매일같이 나를 데려가려는 하나님과 나는 세상과 더 친해 보려는 나와의 전쟁. 이 전쟁을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걸 연회를 파티를 하듯이 이 세상에다 그걸 만들어 놓고 나는 나의 힘은 세상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나를 더 센 힘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뽑아낼 때, 그때 우리의 고백은 이겁니다. “하나님은 나의 왕이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나의 왕이십니다.” 10분 쉽시다.

 

 

 

안양20250313b사사기2장23절(언약의 소재)-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작하겠습니다. 인간은 소모품이니까 인간 자체로서는 인간을 보존할 가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겁니다. 오늘 빨래를 한다면 아침에 운동할 때 땀 안 적게 하려고 애쓸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어차피 오늘 운동하고 벗어놓으면 오늘 빨래할 거니까. 그게 하나님 보시기에는 우리가 보존할 가치가 없어요. 보존할 가치 없는 것에 보존이 되려면 거기에 주의 이름에 의해서 쓰여져야 돼요. 이게 사명인데. 주의 이름으로 쓰여지는 거. 주의 이름의 요소가 거기에 들어올 때 비로소 이거는 기존에 있던 보존할 가치가 없는 내가 주님의 들어옴으로써 주님 입장에서 보존할 가치가 새롭게 발생이 된 거예요. 주님의 입장에서. 기드온은 그냥 농사꾼이에요. 그냥 방앗간 주인이에요. 아무 가치 없어요.

그런데 천사가 와서 기드온에게 하나님이 너를 간택했다고 소식이 올 때에 기드온은 “나 안 합니다. 믿음도 없는데 나는 이거 못 받아들입니다.” 그렇게 거부하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신이 그 기드온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이 거부한다는 것은 인간 안에서는 힘이 내가 거부할 힘이 있다고 여기는 세계에서는 내가 거부하고 안 하고는 내 결정에 달렸지만, 인간 바깥에 오는 세계에 대해서는 우리가 거부할 수가 없어요.

따라서 기드온이 하나님의 지시의 사명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기드온은 그때부터 인간의 힘으로부터의 결별이 되는 거예요. 이게 자유입니다. 더 센 외부의 힘이 나를 장악했을 때 기존에 묶여 있던 엮여 있던 이 힘은 자동적으로 그 족쇄가 풀리게 되는 겁니다. 그들의 눈치를 볼 하등의 이유가 없게 됩니다.

그 중간에 그 중간 경계선에 사사들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사사들의 일어난 일은 인간이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잖아요. 그 뭉쳐진 그 힘을 뭉쳐지도록 유도해 놓고 그것과 별개로 그 뭉쳐진 힘의 소속이 되지 않는 새로운 집단을 선택해요. 그게 바로 무슨 정신이냐 하면, 바로 출애굽의 재판입니다. 다시 출애굽의 재현. 출애굽, 끄집어내는 있는 데서 없다고 여기는 것을 없다고 여기는 것을 있음으로 구체화시키는 그 작용을 출애굽 사건에 준해서, 다른 사건이 아니고, 출애굽 사건에 근거해서 이것을 끄집어내 버립니다. 출애굽 사건. 그럼 출애굽 사건에서 잘 알다시피 그들이 그냥 나올 수 있는 게 아니지요. 뭐를 바치고 나왔잖아요. 어린양 바치고 나왔지요.

희생. 희생물의 부각. 희생물이 드러나는 겁니다. 희생물이 하나님 쪽에서 요구했던 그 희생물이 드러나죠. 그 희생물을 누가 해야 되는가, 사사가 이 희생물의 사명을 떠안게 돼요. 그런데 이 희생하게 한다는 것은 그만큼 뭐가 강했다는 거예요? 인간과 인간의 힘의 결속이 굉장히 힘이 셌다. 너무 너무 세가지고 거기서 개인이 자기 마음대로 인간과 인간의 힘의 그 구조에서 발을 못 빼게 돼 있는 구조 인간 세계가. 발을 뺄 수가 없습니다.

예를 한 번 들어볼게요. 기드온 일인데, 새벽에 솜이 하나 있고, 이쪽은 솜이 없지요. 새벽에 그 이슬이 내리는데 다 이슬이 땅도 촉촉 솜도 촉촉 이래 돼야 되는데, 솜만 촉촉하고 땅에는 안 촉촉해요. 그런 일이 인간들이 힘의 세계에서 성사 될 수 있습니까? 안 됩니까? 안 되지요. 성사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기드온은 어떤 의미에서 희생이냐 하면, 힘의 세계에서는 납득이 안 되고, 하나님 세계에 속했기 때문에 힘의 세계에서 용납하지 못한 그러한 일을 해야 될 사람으로서 사사는 기드온은 희생되는 겁니다.

남들이 “희생이냐?” 라고 하는 이해도 안 되는 일을 해야 돼요. 희생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과 기드온과의 사이의 관계지 다른 사람은 그게 희생인 줄을 몰라요. 다른 사람은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면, “네가 왕 되려고 이번 전쟁 벌렸지?” 이런 오해를 받게 되지요. “네가 힘을 추구해 가지고 이번 전쟁을 계기로 네가 왕으로 한번 해보라고 뭐 꺼떡거렸지” 이런 식으로 오해를 해 주는데, “오케이! 우리 당신 성과 인정할게. 우리가 당신을 왕으로 삼으면 되겠어? 그럼 만족 하겠어?” 이래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기드온이 뭐라 합니까?

나는 죽어도 당신들의 뭐가 안 된다? 왕이 안 된다. 왕이 안 된다 하니까 왕이 되기를 왕을 요청했는데도 왕이 안 된다는 자체도 뭐냐하면 그들의 이해 못한 행동을 인하여 또 그것 자체도 그들에게 희생물이 가련한 희생물이 될 수밖에 없어요. 아주 가련한.

자, 두 번째 시간에 제가 거론하고 싶은 것은 사사기 9장이야기입니다. 아비멜렉. 아비멜렉이 누구냐, 그 왕 되기 싫다는 그 기드온의 아들이에요. 아비멜렉을 통해서 기드온이 일구어냈던 그 미디안 군사에 대한 승리가 그 승리 안에 어떤 희생이 담겨 있는가를 이제 아들을 통해서 아비멜렉을 통해서 이제 보여주는 거예요. 아비멜렉은 9장 2절에 누가 한번 읽어 보세요. 9장2절, “청하노니 너희는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라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이 다 너희를 다스림과 한 사람이 너희를 다스림이 어느 것이 너희에게 나으냐” 왕은 하나이어야 능률이 있죠. 효과가 있다는 거예요. 70명이 왕 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하면 여룹바벨은 기드온을 말합니다. 우리에게 엄청난 놀러운 성과를 제공해서 미디안으로부터 벗어나게 된 큰 공적인 것이 있기에 이거는 우리가 기대했던 영웅이다. 영웅이 왕이 돼야지 누가 왕이 되겠어. 근데 왕이 된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그 사람이 그 당사자가 죽어도 왕가문이 되는 거예요. 왕 가문이. 그 밑에 있는 자식이 아버지를 왕으로 모셨던 것과 동일한 모심의 그 힘들을 다 수용해서 그 힘 위에 자기가 군림할 자격이 있다는 거예요. 그걸 권위라고 해요. 권위.

우리는 당신들에게 나에게 복종하라고 요구할 권위가 우리는 왕가기 때문에 있습니다. 그게 바로 세상이 추구하는 왕국이에요. 요즘으로서는 왕국이라 할 수 없고 부족국가라 할 수 있는데 그냥 왕이니까 왕국이라 하지요. 그런데 아들이 몇 명이에요? 70명이에요. 70명이니까 이건 힘을 한 곳에 못 모은다 말이죠.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5절에 “오브라에 있는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가서 여룹바알의 아들 곧 자기 형제 칠십 명을 한 바위 위에서 죽였으되 다만 여룹바알(기드온)의 막내 아들 요담은 스스로 숨었으므로 남으니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사사기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의해서 건짐을 받았다. 뭐 이런 이야기로 꽉 차있어야 될 사사기가 그게 사사기 내용이 아니고 분명히 승리했다는 이 기쁨의 도치 되어야 될 사시기에서 그 승리는 인간의 사악함 속에서 누군가 하나님의 사명으로 희생되었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승리한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 승리로 인하여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노출시키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사악함입니다. 요거에요. 이 사악한 이스라엘아! 이리되는 거지요.

그다음부터는 이제 그 9장 이야기가 상당히 길지요. 상당히 깁니다. 상당히 긴데, 그 9장 7절에, 요담이 그리심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같은 왕자지요. 같은 왕자가 돼 가지고 도망친 왕자지요. 형제의 난에 의해서. 그래가지고 세겜 사람들아 들어라. 하루는 나무 뒤에 나가서 기름을 부어 왕을 삼으라 할 때 이래 되는 거예요. 왕을 삼으라 할 때, 감람나무한테 하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기름 받쳐야 돼서 안 된다고 하고, 또 무화과나무한테 하니까 우리가 아름다운 실과를 내가 어떻게 버리겠는가, 나는 내 할 일에 충실하겠다. 12절에 포도나무에게 왕이 되라 하니까 나는 사람과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게 목표지, 내가 왕되는 건 아니다. 그런데 아무 남한테 가시만 주고 아무 쓰잘데기없는 가시나무가 되어 가지고 우리의 왕이 되라 함에, 가시나무가 왕이 된다고 설쳐됐는데 그게 누구다? 그게 바로 아비멜렉이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 이게 뭡니까? 아버지의 승리로 인하여 나라가 내란이 일어난 거예요. 내란이. 아버지가 승리해서 백성들이 우리도 이렇게 절대적인 하나님의 신의 충만한 기드온 같은 왕이 꼭 필요합니다, 에 백성들이 더 깊숙히 관여했다는 것은 그만큼 백성들이 왕 없어서 환장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뭐 특출한 위인이 없어서 지금 왕 재목감이 없어서 하지, 언제든지 왕 재목감이 있다면 기꺼이 우리는 왕을 만들고 우리는 거기에 복종할 그 힘에게 복종할 용의가 되어 있습니다,라는 그 자신들의 인간들의 본마음을 이 사사기를 통해서 다 들추어 나는 거예요.

어떻습니까? 이 나라가 이스라엘이 우리가 생각했던 그 이스라엘이 아니지요. 완전히 이방나라와 똑같지요. 그게 똑같아요. 차이 나지 않아요. 똑같아요. 사사기의 마지막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사기의 마지막은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이 12지파가 되어야 될 이스라엘이 지파가 열한 지파가 돼요. 이가 12개 있어 야 보기 좋은데, 하나 빠지면 하나 임플란트해서 집어넣으면 되잖아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렇게 하나 집어넣는 게 아니고 나머지 열한 전체가 다 하나님의 복의 대상이 안 돼 버려요. 12가 숫자가 채워지지 아니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대상이 자체가 성립이 안됩니다.

그 이유가 있어요. 왜냐하면 레위인들이 그 12지파가 각자 땅이 있어가지고 각장 농사 있잖아요. 그러나 그 일종의 국회 의원 또는 의회 대표자들은 각 지방에 있는 레위인들이 따로 새로운 계층을 해서 그 레위인들 안에서 제사장이 나오고 그 제사장이 직접 하나님과 언약으로 연결이 되어있고 연락책이 되는 구조예요. 이게 율법에 관한 이스라엘이에요.

그런데 여러분 아시다시피 사사기 끝에 가게 되면 전쟁을 일으키는 원인자가 누굽니까? 레위인이에요. 떠돌아다니는 레위인으로 인하여 전쟁이 내전 일어났고 그 내전에 의해서 베냐민 지파가 자체가 없어져 버렸어요. 자기가 자기 칼로 자기의 눈알을 찌른 것과 똑같은 결과를 낳게 된 겁니다. 그 원인에 대해서 왕을 구하겠다. 왕을 구하겠다는 것은 이스라엘은 우리에게 현재 왕이 없다. 왕이 없다고 여겨요. 이게 어디서 나온 거예요? 다른 민족은 다 왕이 있어서 힘이 구심점을 갖췄는데, 이건 중구난방 엉망이 된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왕이 없다는 거예요. 왕이 없다는 것은 다른 왕국과 대비해서 생긴 거거든요.

그런데 여호와는 없어 보이는 식으로 왕으로 일하십니다. 인간들이 원하는 왕은 아니지만, 인간들이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왕이 통치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하나님의 신이 임한 겁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한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일하는데 그 하나님이 안 보이는 것은 인정한다 치고, 하나님이 어떻게 일을 하느냐, 아까도 이야기했습니다. 어떻게 일하느냐, 출애굽 방식의 적용입니다. 출애굽 방식의 적용. 분류 작업을 하는 거예요. 내 사람과 내 사람 아닌
사람, 내 사람과 내 사람 아닌가, 계속 쪼개고 또 쪼개고 또 쪼개고 또 쪼개지요. 아까 여호수아 7장에 보면, 마지막에 아간 하나 뽑기 위해서 유다 지파 전체를 다 동원시키잖아요.

이스라엘 전체 중에서 유다지파, 여러분이 보게 되면 7장에 14절에 아침에 너희는 지파대로 가까이 오라 해서 뽑아보니까 유다지파 뽑혔지요. 유다지파 뽑히고 난 뒤에 세라 족속 뽑혔고 그다음에 삽디 가족 뽑혔고 그다음에 마지막에 누가 뽑힙니까? 아간 뽑히는 거예요. 이 작업을 누가 한다? 왕이 보이지 않는 분이지만 왕이 바로 이 뽑는 작업을 하는 거예요. 계속 뽑는 작업을 하는 거예요. 이 뽑는 작업을 하는데 이스라엘 가운데 제대로 된 왕 다음 하나님이 뽑으시는 그 왕의 마음과 취지를 제대로 반영하는 인간이 이스라엘 중에 있었다? 없었다? 사사기에서는? 없었다. 없으니까 어디서 수입하는가, 룻기에서 수입해요. 룻기.

바로 모압여인 룻의 아들로서 룻에 낳은 자식이 영원한 다윗 시대 영원한 하나님의 언약을 체결할 왕의 위치에 나타난 임무를 조상을 모압 여인 외계 이방여인 모압으로부터 주어지게 되어있어요. 그 룻기가 무슨 시대냐? 사사시대에요. 룻기 1장 누가 한번 읽어 보세요.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스톱! 됐습니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하나님은 안 죽었다. 하나님의 활동은 멈춘 게 아니에요. 인간이 무슨 짓도 하나님의 활동은 멈춘 적이 없습니다. 인간의 그 아주 개판 같은 것도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거예요. 유도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쉽게 말해서 이 말은 뭐냐, 이스라엘 중에 인간 같은 인간은 없다. 이 말이거든요. 그 방식이 출애굽 방식이거든요. 인간의 목숨을 원한 게 아니라 어린양의 피를 원해요. 인간의 피를 원한 게 아니고 인간 속에는 받을 만한 피가 없다는 것이에요. 마찬가지로 오늘날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일 할 때도 계속해서 아침 눈뜰 때부터 밤에 잘 때까지 해질 때까지 계속 이야기하는 것은 “너는 인간도 아니야.” 우리는 사람 축에도 안 들어갑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낫씽(nothing). 아무것도 아니야. 너는.

계속 이 작업을 아주 부지런하게 하셔요. 부지런하게 하신다고요. 진짜 아무것도 아닌 게 누구냐 하면 바로 모압 여인이에요. 모압 여인. 룻이에요. 그건 본인이 너무 잘 알고 있어요. “아이고, 내 팔자야” 이런 거 없어요. “내 청춘을 돌려다오.” 이런 거 없어요. “이 젊은 나이에 아~~ 내가, 지금 한참 이쁠 때, 늙은 시어머니나 모시고...,” 남편은 이미 죽었잖아요. 시집 쪽에서 시어머니도 양심이 있어요. “네가 니 남편하고 살려고 왔지 나하고 살려고 온 건 아니잖아. 솔직하게 딱하니 말해서 네가 창창한 네 미래를 즐길 자격이 있어. 죽은 남편의 과거에 매몰되지 말고 인생 살아.” 그 이야기를 듣고 다른 동서는 “안녕히 계세요.” 하고 갔잖아요. “너도 가지” 안 갑니다.

“제가 발견한게 있습니다.” 그거는 뭐냐, “우리 시가집을 아무것도 아니게 만드는 그 작업 자체가 여호와에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내가 시집와 소속된 이 시집이 개코도 아무것도 아닌 집안이고 정말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아닌 걸 아무것도 아니게 하시는 유일한 활동은 여호와 하나님의 활동뿐입니다. 그 활동은 뭐냐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서 주께서는 착오 없이 양보 없이 율법을 율법대로 실현시키는 것을 제가 느껴서 봤습니다.” 우리 집안에서 봤으니까. “따라서 저는 시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고, 시어머니가 죽는 그 자리에 저도 죽고 싶습니다.

그 정도로 자기가 살아왔던 모압 여인으로 살아왔던 자기의 과거는 다 날아갔어요. 나는 율법과 결혼했다는 말과 똑같은 거예요. 나는 우리나라 마르둑 신. 모압신 말고. 나는 여호와 하나님과 하나님 집에 시집왔다. 그 이야기입니다. 언약과 율법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준비된 왕이에요. 그 준비된 왕의 계통은 사사기가 하나님의 신이 임했지요. 하나님의 신이 임하지 그 신이 임한 그 일관성 신이 임해야 된다는 일관성을 계속 유지하면서 다윗까지 옵니다. 그 중간에 하나님이 신 임한 자가 있었어요. 그게 누구냐하면 사무엘이고, 사무엘에 의해서 신을 받은 자가 누구냐 사울 왕이에요.

그런데 사울이 다윗을 만나고 난 뒤에 졸지에 사울은 성신이 임했던 그때가 없어지고 뭘로 임했어요? 악신이 임했잖아요. 그게 왜 그러냐하면 사울의 왕이된 그 배후에는 이스라엘 장로들이 우리에게 왕이 있어야 되겠다는 그 소리를 했거든요. 그 소리를 주께서는 놓치지 않고 그걸 간직해서 그걸 그대로 후세에 그다음의 시기의 역사 안에다가 그걸 집어넣어요. 집어넣는다고요.

여기서 한번 일단 정리해 나갑시다. 전쟁이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전쟁이란, 기억과 기억의 싸움입니다. 기억과 자신의 과거와 나의 과거의 싸움. 하나님이 일했던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남겼던 그 과거와 인간의 존재 개체가 꾸준하게 그동안 유지에 찾고 있는 그 과거와의 투쟁에서 이것이 깨어지게 만듭니다. 이걸 깨어지는 방법은 여기 뭐가 끼어드느냐 하면, 하나님의 신이 임하지요. 인간의 과거의 사물인 걸 아시지요. 내가 이렇게 해서 이만큼이라도 버티고 살아왔다는 그 과거의 모든 패턴과 정보와 상식 이것이 하나님의 신이 임하면 이게 무용지물이 되면서, ‘아~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거를 품고 있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구나!’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사실을 하나님의 신이 임할 때, 깨닫는 겁니다.

자, 아비멜렉 이야기 계속하겠습니다. 아비멜렉이 여러분들이 아비멜렉을 생각하고 아비멜렉은 어떤 과거가 있었어요. 뭐냐 우리 아버지는 뭐다? 존경받는 왕이다. 영웅이다. 이게 아비멜렉의 기억이에요. 이 기억을 아비멜렉은 뭐로 구체화 시키느냐, 힘에 힘으로 구체화 시켜요. 너희들 가운데서 우리 아버지만큼 너희에게 큰 혜택을 준 적이 있느냐? 자, 미디안이 몇 년 동안 통치 받았어요?

여기에 <사사들의 목록>이 있습니다.

<사사들의 목록표> 는 첨부파일에 있습니다.

여기에 미디안이 7년간 통치했지요. 7년간 지배를 받았습니다. 압제를 받았어요.그런데 그 7년을 훨씬 능가하는 40년 동안 평화가 찾아왔지요. 이게 뭐냐 기드온의 통치시대일 때는 영향력이 그만큼 센 거예요. 여호와에 센 거예요. 미디안의 영향력이 세다 이 말이지요. 암몬 같은 거 입다 같은 경우에 암몬의 통치가 18년 통치당했잖아요. 그 뒤에 입다는 6년만 이스라엘을 건졌습니다. 삼손은 블레셋에 몇 년 통치당했어요? 40년간 통치를 당했습니다. 지금의 가드. 하마스가 있는 가드. 그런데 삼손은 20년 동안 통치를 했습니다. 통치를 하고 장렬하게 희생이 되었지요. 사사라 하는 것은 일시적이고 한시적인 거예요. 뭐가? 하나님의 신이 임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한시적이고 일시적이라. 왜냐 하면 하나님께서 지상에 다른 나라 왕이 있는 것처럼 인간의 왕을 주겠다는 약속은 다윗언약에서 비로소 주어지는 거예요. 다윗 언약에서.

그런데 조건이 뭐냐 하면, 왕은 왕인데, 어떤 조건이 있느냐 하면 그 왕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조건하에 다윗의 후손을 통해서 태어나게 되어있어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조건하에. 그러면 왕의 아버지는 누구죠? 왕의 아버지는 누가 돼야 돼요? 하나님 돼야 되겠지요. 그러면 사람이 왕이 되는 이 왕의 제도는 영원히 지상에서 이거는 낭비되는 겁니다. 이거는 소재가 다 끝났어요. 이제는 그런 인간 없습니다. 아버지가 하나님의 아버지 되고 그 아들이 왕이 되는 그 시대가 올 때까지 하나님의 언약은 줄기차게 질주했습니다. 달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중에 한 토막인 사사기를 보고 있습니다.

그에 비해서 사사기 9장에는 아비멜렉은 굉장히 폭력적이지요. 굉장히 폭력적인데, 결국 그 마지막에 어떠냐 그 죽을 때 이게 지금 아비멜렉은 힘으로 그냥 밀어붙이는 거예요. 그러면 힘 가진 자가 주로 이 세상에 힘 가진 자가 누굽니까?
남자입니까? 여자입니까? 남자 쪽이지요. 그래서 힘 가진 남자한테 받쳐 죽는 거 그거는 남자로서의 그거는 권위가 아주 위대하지요. 그런데 힘이 없는 여자한테 죽었다? 이거는 남성으로서의 아주 수치스러운 거예요. 힘으로 그동안 밀어붙였던 힘만 내세웠던 인간으로서는 굉장히 수치스럽지요.

사사기 9장 53절, “한 여인이 맷돌 위짝을 아비멜렉 머리 위에 내려 던져 그의 두개골을 깨뜨리니” 보셨지요. 그러면 그 사사기4장21절, “그가 곤비하여 깊이 잠든지라(시스라입니다.적이 시스라입니다.) 헤벨의 아내 야엘이 장막 말뚝을 취하고 손에 방망이를 들고 그에게로 가만히 가서 말뚝을 그 살쩍에 박으매 말뚝이 꿰뚫고 땅에 박히니 시스라가 기절하여 죽으니라” 옛날에는요, 최고 장수가 죽을 때 전쟁은 끝나요. 마지막 그 최고의 마지막 적군의 장수를 죽인 자가 이쪽에 공로자가 돼요. 그 공로자가 누굽니까? 아벨의 아내 야엘입니다. 야엘. 남자 사람 바락이 아니에요.

한 군데 더 찾아보겠습니다. 사사기 11장 38절, 39절 “이르되 가라하고 두달 위한하고 보내니 그가 그 동무들과 함께 가서 산 위에서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고 두달만에 그 아비에게로 돌아온지라 아비가 그 서원한대로 딸에게 행하니 딸이 남자를 알지 못하고 죽으니라.” 희생되었지요. 희생된 겁니다. 힘을 앞장세우는 자들에게 힘없는 여인이 죽은 거예요. 그런데 그 결과가 뭡니까? 그 결과가 바로 6년 동안 이스라엘이 암몬의 통치에서 벗어나서 해방된 거예요. 어떻게 희생의 정도가 더 노골적이지요. 점점 더 노골적이에요.

그 다음에 삼손 13장 여러분이 다 아는 이야기니까. 삼손은 그 힘으로 밀어붙인 사람이잖아요. 삼손하면 딱 마동석이에요. 마동석. 그냥 앞에서 주먹 휘드르지요. 그 주먹이 누구한테 패배 당합니까? 드릴라한테 패배 당하지요. 패배 당하면서 블레셋을 승리한 것 같지만 패배 당함으로써 머리카락이 잘려지고 힘이 없어져요. 체포가 되지요. 바로 패배당한 삼손이 드디어 승리를 하게 됩니다. 자기 몸 하나 희생함으로써 승리하게 됩니다.

사사기 제일 마지막에 내전 일어나가지고 베냐민지파가 몰살 당합니다. 그 남자는 거의 다 죽었다고 보면 돼요. 싸그리. 정의의 이름으로 다 싸그리 하거든요.그럴 때 그 비어 있는 베냐민 지파를 살리는 것은 사사기 21장 20, 21절 “베냐민 자손에게 명하여 가로되 가서 포도원에 숨어 보다가 실로의 여자들이 무도하러 나오거든 너희는 포도원에서 나와서 실로의 딸 중에서 각각 그 아내로 붙들어 가지고 베냐민 땅으로 돌아가라” 그 실로의 딸 중에서 보쌈해 가지고 강제로 납치해서 베냐민 땅으로 가가지고 거기서 전수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일을 하시는데 심장하고 뭐 그럴싸해보이는 이방 민족이 자체가 그렇지만, 힘을 가진 자를 우대하고 그것을 영웅시하고 왕으로 삼는 그 분위기속에서 하는 상대적으로 힘이 없는 여인을 통해서 그 룻 같은 경우에 룻을 통해서 꾸준히 하나님께서는 반대 취지로 이스라엘에게 일관되게 일을 하십니다. 그것이 무슨 정신이라 했습니까? 출애굽 정신이지요. 출애굽정신입니다. 출애굽은 자체가 전쟁이에요. 자체가 전쟁입니다. 누구와의 전쟁? 힘 있는 애굽나라와의 전쟁. 애굽나라는 힘으로 히브리인들을 압제했잖아요. 그런데 히브리인들은 대응할 힘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유월절 사건을 하나도 모른다치고. 유월절 사건이 났을 때 잠시 기절해 가지고 한 몇 개월 동안 기절했다 치고 그 전에는 히브리인들이 노예 생활한다 그건 아는데 중간에 기억이 끊어졌어요. 기억이 끊어져 가지고 나중에 한 몇 개월 뒤에 깨어나 보니까 “아직 그 히브리인들이 그 애굽나라에서 고생 되게 하지? 그지?” 하니까, “그들 나갔는데.” 그 소리 들으면 뭐라고 하겠어요? 그 논리 구조가 확 빠지지요. “그 말도 없는 소리. 거기 그들은 노예였어. 무슨 수로 나가? 뭐 반란? 힘 전쟁?” “아니.” 그들은 그 힘도 없고 군대도 없고 못 빠져나오고 계속 노예 생활을 하는데 어떻게 빠져나와. 불가능이죠. 이게 구원입니다.

구원은 힘을 가진 자한테 설득이 안 돼요. 힘을 앞장세운 자 한테는 구원이 설명이 안 돼요. 설명할 길이 없어요. 그래서 성경은 구원이라 하는 것은 이렇게 해서 구원되었다가 아니라, 구원되고 난 뒤에 이거는 제가 한 일이 아닙니다. 고백하는 방식이죠. 내가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했더니만 구원되었습니다. 예수 믿고 뭐 십자가 피 믿고 그렇게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나와보니까 주께서 주의 요소를 저한테 심어 주셨습니다. 그것도 성령으로. 성신으로 저한테 심은 게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찾으시는 것은 네가 한 것 말고, 심어진 것이 있느냐를 찾는 거예요. 심어진 것이 있느냐.

그러면 사사기를 통해서 이 사사들에게 심어진 건 뭡니까? 우리가 아까 이야기한 단어로 하면 불가능성이지요. 그리고 그걸 구체적으로 불가능성이 어디서 나왔다? 언약에서 나왔지요. 그 언약의 원칙은 일관된 출애굽의 방식을 언약 안에서 계속 작동시킨다. 하나님의 법칙이. 사사기를 통해서 나타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사사기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법칙이 그 이스라엘로 하여금 남들이 다 왕이 있는데 이스라엘은 왕이 없어요. 왕이 없어요. 왕이 없는 그 이스라엘을 왕이 있는 그 민족에게 서로 만나도록 했지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만나게 해서 그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쪽 힘이 너무 그쪽 힘에 매료되도록 조치를 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아비멜렉 같은 경우처럼 온 백성이 전부 다 우리에게 왕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하는 것은 그들은 당연한 것처럼 여기고 그 기드온 같은 그런 사람이 왕 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니까 아비멜렉이 “그렇지요. 그렇지요. 그 다음에 내가 왕이 되겠습니다.” 하고 자진해서 나선 거예요. 김대중 대통령 아들 국회의원 됐잖아요. 김영삼 대통령 아들 뭐 됐습니까? 직업이? 뭐 옛날 이야기해서 몰라요? 국회의원 됐잖아요. 박정희 아들은 국회의원 못 됐어요. 마약을 해가지고. 큰 교회 목사 됐다. 아들 뭐해야 돼요? 후임 목사 되어야 되지요. 왜? 교회는 힘이니까요. 힘이 있어야 교회 되니까요. 진리가 아니에요. 힘이에요.

전개해 봅시다. 힘이라는 것은 가치있다는 큰소리, 내게 힘이 있다는 것은. 나, 가치 없는 게 아니고 나, 가치 있어. 가치 있는 거야. 누가복음 12장에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농부가 농사할 때, 그의 농사가 너무 잘됐어요. 그러니까 갑자기 농사 생산물을 저장하기 위해서 창고를 크게 짓고 하는 말이 본인이 본인 보고 칭찬을 합니다. “내 영혼아! 걱정하지마라.” 내가 나보고 이야기하는데, “걱정하지 마라. 평생 먹을 거 있다.” 할 때, 하나님 하시는 말씀이 “이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 데려가면 저것이 누구 것이 되겠느냐?” 그러니까 그
부자는 뭐냐 하면 낭비의 원칙을 몰랐던 거예요. 부자도 낭비스럽고 소품이고, 가난해도 소품이고, 그다음에 찾아내서 뽑아내는 것은 하나님의 출애굽 정신 일관된 출애굽 원칙만 우리 안에 꽂혀야 돼요. 선택해서 뽑아내는 작업을 하는 거예요. 뽑아내는 작업을.

사사기를 여러분들이 보면서 답답한게 한두 가지가 아니겠습니까마는, 제일 답답한 게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통해서 그렇게 놀란 기적으로 나를 구해 줬잖아요. 그런데 그게 오래 못 간다는 사실이에요. 오래 안 가요. 사사 12명 보세요. 얼마나 다채롭습니까. 그 이유가 뭐냐 사사 본인도 오래 못가요. 사사 본인도. 반짝하다가 그다음부터는 별 성과를 못내요.

꼭 대기업 직원 같아. 사업이 잘 풀려서 할 때는 반짝 직원을 뽑다가 이제 쓸데 다 쓰다 보면 조기 퇴직! 40대 조기 퇴직 나갈 사람 나가세요. 명예 퇴직 시켜 드리겠습니다. 쓸데없는 것 다 내보내지요. 왜? 노동 시장이라는 것이 그만큼 변화가 무쌍하기 때문에 그래요. 전에 써먹었던 노동기술이 신상에 더 이상 쓸데없을 때는 어떻게 됩니까? 내 보내야지요. 쓸데없이 돈이 나올 데 없는데 돈을 왜 줘요. 바보 아니에요? 주인이 바보 아니잖아요. 주인보고 야박하다 하면 안 돼요. 원래 주인의 직원은 그렇게 소모품으로 쓰다가 이제 더 나올 거 없으면 내보내는 겁니다.

하나님도 그 방법 사용하시고요. 여기에 이거 한번 봅시다. 사사 목록표 봅시다.

<사사들의 목록표> : 첨부파일

옷니엘, 첫 번째 사사고요, 그 다음에 에훗, 그 이야기가 나오는데 3장에 왼손잡이 사람인 사사인데 왼손잡이라서 보통 권총을 오른쪽으로 쏜다고 생각하는데 왼쪽으로 권총이 있다는 것은 생각도 못 했죠. 그 당시에는 권총이 아니겠지요. 요새는 권총이지요. 에글론은 암살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신이 임한다면 뭘 잃느냐 하면, 그 적이 갖고 있는 모든 정보에 들어 있지 않은 방식을 사사에다가 하나님의 신으로 사용해 주는 거예요. 전혀 상상도 못한 거예요.

제가 아까 첫 번째 뭐라고 했습니까? 첫 번째 낭비하는 인생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두 번째는 예상하지 말라는 거예요. 우리 인생을 예상하지 마세요. 예상 안 해도 모든 것은 하나님의 원칙대로 우리를 사용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냥 새로움만 만끽하면 되지, 예상해 버리면 전혀 새로움이 없어요.

삼갈 봅시다.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600명을 처단했다. 소 모는 막대기로. 왜 700은 아닐까요? 왜 500은 아닐까요? 그걸 물으면 답이 그 600명까지만 죽여도 그 당시에 블레셋은 겁나서, “야 이스라엘 사람을 함부로 하면 안 되겠다. 놔주자.” 이렇게 조정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 보시기에. 삼손은 600명보다 더 죽였어요. 600명 시대는 지나간 거예요. 이미 그때는 지금 뽑을 때 써먹을 대로 다 써먹은 거예요. 다음 직원 또 뽑는 거예요.

그다음에 드보라. 여자 사사 드보라. 드보라는 이런 전쟁을 받은 계시를 받은
적이 없습니다. 전쟁 계시 누구한테 했느냐, 그때 총 쏘는 바락 장군이 받았지요. 그런데 그 쫄장부가 그 선지자 드보라에게 “당신이 좀 이렇게 좀 내 대신 전쟁에 나가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래 한 거예요. 그러니까 드보라가 하는 말이 “당신의 임무를 받기는 받는데 당신에게 주어질 모든 명예는 이제 끝났습니다.” 그리고 전쟁을 드보라가 한 게 아니에요. 전쟁은 하나님이 하신 거죠.

드보라도 쓸데없고 아무 가치 없는 여자예요. 가치 없는 여자기 때문에 전쟁을 하면서 오는 것이 우연과 우연으로 연속으로 전쟁 이기게 되어있어요. 그 전쟁은 아까 하나님의 전쟁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의 전쟁 또는 여호와의 전쟁이라 하는 여호와의 전쟁. 여호와 하나님 이름의 전쟁이 되는 겁니다.

시편 20편 6절과 7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의 오른손의 구원하는 힘으로 그의 거룩한 하늘에서 그에게 응답하시리로다.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이리 되어있어요. 그러니 이건 여호와의 이름은 무엇과 대비가 돼요? 무엇이 필요 없다는 뜻이에요? 병거와 말, 다시 말해서 힘. 인간의 입장에서 힘을 힘의 무기가 된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비켜가면서 하나님은 전쟁을 하신다는 겁니다. 젖먹이 입으로 승리케 하시는 거예요. 젖먹이 입으로. 예수님이 아무 맥 없이 돌아가신 약해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그 피로 말미암아 악마의 모든 힘으로부터 빠져나갈 수가 있어요. 피가 권능이에요. 찬송가 그런 찬송가 여럿 돼요. 주의 피가 권능이에요. 피가 권능이니까 이 말은 뭡니까? 중요한 것은 내 존재가 중요하지 않고 이 존재의 쓸모없는 존재를 철저하게 쓸모없게 만드는 주님의 피의 능력이 우리 속에서 발휘되는 것이 바로 주의 일입니다.

주님의 희생의 그 의미가 발휘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가 예상 못하는 사건과 자주 매일같이 마주할 수밖에 없어요. 왜? 우리는 모든 일을 예상하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방해물이 된다는 거예요. 우리가 주의 일의 방해자가 우리 자신이라는 거예요. 우리를 이렇게 우리의 예상에 빚나가고 빼내는 방식으로 주께서 일하게 하신 식으로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소재로 사용하시는 겁니다. 우리 일상을.

그다음에 봅시다. 입다 이야기는 했고요. 이게 돌라, 야일 이 사람은 간단하게 지나가요. 입다 이야기했고, 그다음에 입산, 엘론 이 사람들은 그냥 통치하는데 평화로웠다. 얼마나 평화로운지 애들 많이 낳았어요. 애 많이 낳은 거 그거 기록돼 있어요. 그다음에 이제 마지막에 삼손 있습니다. 삼손 사사 나오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사사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나라가 완전히 하나님이 원하는 나라가 안 됐으니까. 다른 엉뚱한 나라가 되었으니까. 이스라엘이 아닌 12 지파가 아닌 11 지파가 된 나라. 11 지파는 이스라엘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 삼손에 와서 이런 일이 이제 벌어지죠. 삼손에서 건지고 난 뒤에 이십년을 통치하고 난 뒤에 그다음부터는 사사가 없습니다.

사사가 없다는 말은 완전히 이스라엘이 이방나라화 되어버렸다는 겁니다. 이방나라 되어서 거기서 뭐 하나님의 뜻을 전해야 될 레위인들이 먹을 게 없어가지고 기웃거리면서 동냥하듯이 돌아다니는 그 세계. 언약궤는 있지만, 하나님도 이스라엘이 요구하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시대. 이게 사사의 마지막 시대지요. 아까 사사시대에 누가 있다, 했습니까? 룻이 있지요. 이스라엘 내부에는 누가 있겠어요? 한나라는 여인이 있었어요. 사사시대입니다. 한나라는 여인이 자기를 위해서 아들 달라고 아들이 있어야 힘이 있으니까 힘 달라고 아들 달라고 하다가, 내가 아들 달라고 하는 이 자체가 바로 그 당시 이스라엘의 죄와 한 통속인 것을 발견하고 엘가나의 아들을 하나님께로 바치게 됩니다.

한나의 일생이고 사무엘의 희생이지요. 그때 제사장 엘리가 있지만 완전히 엘리 가문 자체가 개판이지요. 뭐. 아들. 그 엘리제사장 가문이 휙 쥐어가지고 제사 내가 먼저 맛있는 거 먹고싶다, 해가지고 완전히 뭡니까? 그 제사 자체도 힘의 서열로 움직이는 여호와의 제사도 힘에 의해서 완전히 변질 돼 버린 그런 세계. 힘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는 세계에 사무엘은 새로운 이스라엘 다윗에게 기름 부을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힘의 세계에서 구성되어야, 죄밖에 없는 세계가 구성되어야, 십자가의 희생의 의미가 돋보인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해 주시고 우리를 그 십자가에 드러내는 소재로 삼아 주신 것을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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