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말씀이 운동력이 있다면, 그럼 말씀이 영으로 오셔서 나를 깨운다면 그 순간 주도권은 말씀에 있습니까, 나한테 있습니까? 말씀에 가 있죠. 그럼 세상에 대해서 보다 세상을 말씀대로 잘 알아서 내가 이왕 세상사는 거 제대로 실패 없이 보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야겠다는 이런 생각을 한다면 이 주도권은 하나님한테 있는 거예요, 자기한테 있는 거예요? 결국 자기한테 있는 거죠.
그러니까 주도권이 성령에 있어서, 그러니까 성령은 바람같이 불잖아요, 바람이 주도권을 갖고 있어서 나를 깨울 때 결과적으로 요한일서 4장이 새롭게 해석되어야 되는 거예요. 이 해석을 내가 해서 바르게 살겠다는 그러한 의도는 포기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포기해주시기를 바라요.
‘영을 받은 사람의 특징은 어떤 책임도 자기에게 짐 지우지 않는다.’ 어떤 책임도. 정말 무책임한 사람이에요, 정말 무책임한 사람.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예수님’과 ‘성령’의 ‘관계’에 ‘끼어든’ 사람입니다.
예수님, 주도권자. 이걸 두 자로 줄이면 ‘주여’ 또는 ‘주님’ 되죠. 성령님도 주도권자에요. 성령님도 ‘주 성령께서’ 이렇게 하죠. 성령님도 주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주님이죠. 그러니까 주도권을 갖고 있는 분들 속에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여기 끼어들게 되면 끼어드는 순간 자기 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자기에게 주도권이 없는데 자기 일이 없죠.
그러면 예수님과 성령 관계 속에 끼어들었다는 이것을 아주 어려운 말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매개 입자’라고 합니다. 매개 입자. 보통 과학에서 많이 하는 이야기인데, 매개 입자. 매개한다. 그냥 연락책. 주님은 우리를 통해서 성령, 성령은 우리를 통해서 주님. 주도권은 예수님과 성령이 갖고 있는데 여기에 매개 입자로 그냥 심부름꾼으로 끼어드는 거예요. ‘내 인생은…’이란 것은 여기선 용납이 안 되죠. 우리가 주님한테 끼어들면 되잖아요, 이렇게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성령님은 예수님의 영으로서 늘 연락하고 있는 입장이기 때문에 끼어든 자리가 ‘예수님께 끼어든다’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좀 더 정확하게 말해서 예수님이 성령님께 지시를 내린 그 활동 속에 우리는 여기서 끼어드는 거예요.
끼어들 때 우리가 주인공이 아니니까, 연락하니까 ‘매개’. 그리고 우리는 하나의 개체니까 ‘입자’. 합해서 하나의 ‘매개 입자’라 하는 거예요. 시켜만 주이소, 이런 거죠. ‘시켜만 주이소.’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질 게 없기 때문에.
‘매개 입자’라는 말을 굳이 제가 쓰는 이유가 힉스 입자라는 게 있어요. 힉스 입자(Higgs particle, Higgs boson: 입자물리학의 표준 모형에 따르면 우주를 구성하는 가장 근본적인 입자의 하나로 스핀이 0). 물리학에서 질량을 처음으로 만들어내는 입자가 힉스 입자에요. 걸쭉한 젤리 같은 그러한 에너지의 공간에서 어떤 저항을 느끼는데 그 저항이 질량이라는 그런 이론입니다.
질량이라 하는 것은 에너지의 저항을 수치로 나타내는 것이다, 시공간 내에서. 그렇다면 힉스 특징이 뭐냐? 남을 질량 있게 하기 위해서 본인은 매개 입자기 때문에 질량이 없어요. 매개 입자가 질량이 없어요.
“네 정신 무게, 마음 무게가 얼만지 저울에 달아보자.” 해서 달아보니까, 0. “내려가, 내려가. 그럼 너는 활동이 뭐냐?” “주님의 일하고 성령의 일을 합니다.” 이거죠. 내가 주님이 아니고 내가 성령은 아니에요. 그러나 예수님을 드러내고 성령을 드러내는 매개 입자로서의 부름을 받는 겁니다.
그러면 이 매개 입자가 질량이 없으니까 성도를 매개 입자로 쓰기 위해 성령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우리 성도의 마음의 질량을 박탈해야 되겠죠. 박탈해야 돼요. 박탈하는 방법이 예수님께서 요단강 세례 받을 때 그때 하늘에서 누가 내려오셨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오셨죠. 성령께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예수님 고유 질량이 박탈되게 했어요. 박탈하고 아버지와 예수님의 말씀의 관계만 남도록 성령께서 그렇게 인도했습니다.
박탈하는 마지막 박탈 장면이 바로 겟세마네 기도였습니다. 그 기도내용은 잔을 잔 되게, 쓴잔이 쓴잔 되게 되기 위해서 그 쓴잔에 대해 예수님 자신이 어떠한 저항을 갖지 않도록 성령께서 힘을 주신 거예요. 저주의 잔을 마셔야 된다는 그러한 아들의 역할에 대해서 아들 본인의 저항이 거기에 방해 놓지 않도록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하신 겁니다.
그 저항력이 얼마나 센지 예수님의 땀이 핏방울처럼 땅에 떨어진다 했어요(눅 22:44). 죄 있는 육신이 갖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발심은 그만큼 지독한 거예요.
박탈한다는 말을 제가 잠시 바꾸겠습니다. 박탈한다는 말을 박피로 바꾸겠어요, 박피. 박피라 하는 것은 피부 확 밀어버리는 것.
하여튼 박피를 해야 의미가 없어져요. 내 의미가 없어진다고요. 그럼 박피를 어떻게 하느냐? 그게 궁금하잖아요. 박피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죄 있는 육신에 법(의식)이 들어있어요. 법. 선악체계인 법이 들어있어요. 이게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거예요, 법이.
갈라디아서 2장 한번 봅시다. 2장 18-19절,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왜 내가 주님이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는 겁니까? 그것은 단독적으로 내가 의로운 존재인 것을 확인하고 싶을 때 법이 없으면 ‘법 지켰다’가 안 되니까 내가 의로울 방법이 없잖아요. 그래서 의롭게 되기 위해서 법을 세우는데, 여기 18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이 율법을 헐어버렸다 이 말이죠. 주님은 율법을 헐어버렸고 인간은 율법을 세우고, 지 잘난 체하려고. 이게 어떻게 성도가 될 수 있느냐 이 말이죠.
예수님이 율법을 헐어버린 방법이 뭐냐 하면 그 율법에 의해서 본인이 돌아가셨던 거예요. 그 방법이에요. 율법 필요없다,가 아니라 율법에 대해서 이미 죽은 자로 규정되는 것으로 더 이상 율법이 주님한테 또는 성도한테 뭐라 할 수 없는 다른 영역, 차단된 또 다른 세계로의 이동을 의미하는 겁니다. 율법이 작동하는 세계 말고 법이 작동하는 세계 말고, 율법에서 벗어난 자들끼리 따로 모이는 세계가 예수님과 더불어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냥 우리를 도끼로 이마 까라는 식으로 율법이 우리를 죽여버려서 이제는 더 이상 내가 회개해서 옛날처럼 다시 깨끗한 사람으로 돌아갈 수 있는 어떤 방안이 율법 법 안에서는 그게 성립 안 되는 거예요. 성립될 수가 없어요. ‘율법 지켜서 율법에서 벗어난다’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 갈라디아서 사도 바울의 복음이에요.
19절에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끝났죠. 나는 뭐했다? 죽었다. 누가? 율법이 나를 죽였다. 그러면 율법으로 나를 죽게 하신 그분이 나를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을 향하여 살게 만들었다. 그럼 율법에 대해서도 하나님에 대해서도 주도권은 누가 갖고 있습니까? 주님, 하나님께 주도권이 있고 나한테는 주도권이 없죠. 주도권이 없는 거예요.
율법에 대해서 죽지도 않으면서 성경을 이용해서 자기 방식으로 자기가 책임지고 살려는 이것들을 요한일서 4장에서 뭐라고 합니까? 그걸 ‘적그리스도’라 해요. 그게 바로 거짓 선지자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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