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2장 40-41절에서 요나 이야기를 언급합니다.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 41절에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으며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요나 이야기에요. ‘심판 때’입니다. 그러니까 최종 심판이 진행된다는 것은 언약이 완전히 완료가 되었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마지막 심판이 감행된다, 이 말이에요. 그전까지는 모의고사고 이제 마지막 최후의 심판은 언약이 완성될 때 감행되는데 그러면 그 언약이 완성되었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바로 인자(人子), 예수님 자신이 모든 언약을, 스바 여왕도 그렇게 반했던 다윗 언약, 그 다윗 언약을 영원히 최종 상태로, 최종 경지로 올려버리는 거예요. 스바 여왕이 감격해서, 그 언약에 반해서, 십자가 다 이루심 앞에서 다시는 남한테 보여주기 위한 인생 같은 그러한 무거운 부채, 짐, 내가 원하는 인생 그 자체를 포기하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는 그러한 가벼움, 존재의 가벼움, 수고하고 무거운 짐에서의 가벼움, 이건 마지막 언약의 영광이 제대로 나타날 때 가능합니다. 그러면 인간의 지혜로 인간을 심판하는 게 아니고 인간을 능가하는, 인간을 초과하는 지혜가 모든 인간을 심판할 그때
“세상의 집권자들은 임의로 너희를 다스리고 너희를 권세로 부리는 것을 자기의 영광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야기한다.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한다.”
보이지 않는 세상의 주관, 임금이 있다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임금, 요한계시록에 보면 그게 짐승입니다. 그 짐승 배후에는 악마가 있고, 악마의 제안은 ‘이기는 자가 이기는 거고 지는 자가 지는 것’이라고 한 거예요.
그런데 마태복음 20장에서 주님이 이야기하는 것은 ‘지는 자가 이기는 자고, 이기는 자가 지는 자’가 되는 거예요.
스가랴 9장 9절에 보면,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이 말씀은 의도적으로 이미 이 세상은 악마가 왕으로 통치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스꽝스러운 돈키호테같이 왕은 왕인데 자진해서 초라하고 별 볼 일 없는 “뭐 왕이 저 정도밖에 안 돼?”하고 조롱받는 왕으로 오시는 그것이 하나님의 독생자 영광, 하나님의 영광인데 그 독생자와 결합이 되면서 지극히 초라하기 짝이 없는, 누구도 흠모하고 싶지 않은, 누구라도 외면하고 싶은, 그래서 하나님의 그 영광이 초라함 속에 함축되어 있어서 누구도 반기지 않는 그런 영광이 스바 여왕이 눈으로 봤던 솔로몬 영광보다 더 완성된 영광으로 오는 거예요. 참 어려운 이야기예요, 정말.
얼마 전에 예루살렘에서 초막절 행사했거든요. 초막절 행사할 때 감람산에서 예루살렘 시가지까지 1시간 10분 동안 내려오면서 “호산나~” 노래를 불러요. 정통 유대인들이 노래를 부르면서 마태복음의 이 대목을 그대로 연출합니다. ‘비록 나귀 새끼지만 그래도 우리가 믿고 있는 성경대로 진짜 되었으니까 혹시 알겠는가? Perhaps, 아마도 왕일 수도 있겠잖아?’라고 하는데 이러한 연출마저, 십자가 죽는 연출 앞에서는 모든 다른 인간들까지 다 날아가 버렸어요.
자, 여기서 마지막으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그렇다면 마지막 때에 언약이 완성되면 이방인이 찾아온다는 그러한 예언, 유대인들도 못 알아본 예수님을 이방인들이 알아봐서 찾아온다는 그 말입니까?” 아닙니다.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이끄시는 거예요.
그 대목이 요한복음 12장 20-23절에 나옵니다.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저희가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짜온대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지금 헬라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만나고자 오는 그러한 낌새를 가지고 예수님은 어떻게 그 현상을 해석하느냐 하면 “드디어 인자가 마지막 남아 있는 이 모든 언약까지 완성될 때가 비로소 되었다.” 그때를 맞춰 율법과 아무 상관 없는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오는 거예요. 이방인들이 언약의 완성에 기웃거리는 것은 그들의 어떤 행함이나 어떤 것도 없이 염치불구하고 언약의 완성을 공짜로 얻고자 오는 거예요. 왜 얻고자 오겠습니까? 자기가 천국 가는데, 영생 얻는데 아무것도 한 게 없거든요. 한 게 없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나님! 저에 대해서 포기했어요. 제 행함을 포기했어요. 제 잘남을 포기했습니다. 저는 더 이상 저한테 신경 쓰지 않겠습니다. 이제 저를 방치하겠습니다. 내 것을 해체하고 나를 나에게서 풀어주었습니다.’ 이제 네 마음대로 해라, 내가 나를 내 곁에서 풀어놔 버려요, 풀어놔 버린 겁니다.
유대인들은 모르는 걸 이방인이 알아채서가 아니라 ‘나를 만나러 오는데 유대인이 아니고 헬라인 이방 사람이 온다는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내가 십자가에서 마지막 최종적인 하늘의 영광이 될 그때에 맞춰서 이방인들이 찾아옴으로써 찾지 않은 자에게 내가 찾음이 되고, 그동안 나를 구하지 않은 자에게 답’이 되는, 그래서 그들이 묻고 예수님 자체가 모든 지혜의 답이 되는 거예요.
끝으로 솔로몬이 이야기했던 지혜의 본질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잠언서 8장 22절에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그리고 8장 1절에 보면, “지혜가 부르지 아니하느냐” 그 지혜가 뭐냐?
천지창조 할 때 원천이었고, 근본이었고 토대에요. 그러니까 솔로몬이 아는 지혜는 뭐냐? 인간이 몰랐던 자기의 토대와 지혜, 창조의 원천 되시는 하나님과, 예수님이죠, 그 하나님과 내가 도킹하는 것, 우주 정거장에서 이렇게 만나듯이 도킹해서 이제는 뿌리 없는 내가 아니고 뿌리를 가졌기 때문에 내가 일부러 나의 뿌리를 새롭게 만들어낼 필요가 없다는 데서 우리는 정녕 우리 자신의 정신적인 무게에서, 심리적인 압박감에서 우리가 해방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토대로 삼고 그리스도와 안에서 함께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솔로몬이 지혜를 이야기했고, 스바 여왕은 지혜를 찾아왔는데 도대체 그 지혜가 뭔지, 그 지혜가 우리를 만드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고 지금도 우리를 살려주시는, 그리고 나중에 같이 만나게 되는 예수님의 지혜인 것을 이제는 알고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앞에서 나를 포기하면서 맡길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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