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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레갑 족속

아빠와 함께 2025. 4. 12. 15:36

-레갑 족속과 오늘날의 성도들과의 차이점은 과연 왜? 

 

123강-렘35장1-2(레갑 족속)110810-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35장 1절에서 2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08페이지입니다.

 

예레미야 35:1-2

 

“유다왕 요시아의 아들 여호야김 때에 여호와께로서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너는 레갑 족속에게 가서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을 여호와의 집 한 방으로 데려다가 포도주를 마시우라.”

 

여기에 레갑 족속이 나옵니다. 신기한 것은 하나님께서 레갑 족속을 안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우리 존재를 모르고 있는 것처럼 평소에 그렇게 생각이 들 수가 있는데요, 하나님께서는 레갑 족속도 알고 누가 하나님을 사랑하는지도 주께서는 아십니다. 성경에서 구체적으로 레갑 족속, 레갑에 속한 족속이라고 구체적으로 거론하시면서 그들에게 선지자를 보내서 어떤 일을 지시하게 되는 겁니다.

 

레갑 족속들이 누구며 하나님의 지시로 그들이 하는 일이 그 당시 유다나라에게 이야기해야될 그 하나님의 말씀과 무슨 연관이 있느냐를 알아야 되겠지요. 하나님께서 유다나라에게 죽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선지자에게 ‘레갑 족속에게 가거라.’ 했는데 엉뚱하게 왜 레갑 족속에게 가야 할까요?

 

그것이 35장 17절, 18절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 모든 거민에게 나의 그들에게 선포한 모든 재앙이 내리리니”라고 하는데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이는 내가 그들에게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며 불러도 대답지 아니하함이라 하셨다 하라 예레미야가 레갑 족속에게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너희 선조 요나답의 명령을 준종하여 그 모든 훈계를 지키며 그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행하였도다.”



‘레갑 족속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지만 유대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에 재앙을 내린다.’고 하시는 거예요. 그렇다면 레갑 족속이 여기에 등장해야 될 이유가 약간의 윤곽이 드러나게 되지요. 하나님께서 유다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면서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는 이유를 말하기를 신앙적 모델을 하나 세워서 ‘이 사람들처럼 하지 않았기에 재앙을 내린다.’고 하는데 그 제시된 모델이 레갑 족속입니다.

 

하나님께서 레갑 족속에게 다가오는 것은 사실은 레갑 족속을 구원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현재 유다백성이 왜 멸망당해야 되는지에 대한 이유를 자기백성에게 설명하기 위해서 일을 지시하는 거예요. 그러면 레갑 족속이 유다나라하고 뚝 떨어져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유다 족속 안에 레갑 족속이 있어요.

 

이들이 미디안 사람, 혹은 겐 족속이라고도 하는데 이 사람들이 뭐하는 사람들이냐 하면 유목민들입니다. 흩어져 사는 사람들이지요. 요새로 하면 루마니아나 폴란드의 집시, 집시같은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어떤 생활을 했는지가 35장 6절과 7절에 나옵니다. “그들이 가로되 우리는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겠노라…….”



첫 번째로 그들은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했다는 것, 그 다음에 “……레갑의 아들 우리 선조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와 너희 자손은 영영히 포도주를 마시지 말며 집도 짓지 말며 파종도 하지 말며 포도원도 재배치 말며 두지도 말고 너희 평생에 장막에 거처하라.” 이동하면서 천막 짓고 살라는 말이지요.



몇 가지가 되지요. 포도주를 마시지 말고, 집을 짓지 말며(고정적인 터전을 잡지 말라는 말이지요. 항상 이동할 준비를 하면서 살아라.), 그 다음에 파종을 하지 말며(씨 뿌려서 경작을 하지 말며) 포도원도 재배하지 말고. 이것 빼고 저것 빼고 다 빼면 할 것이 뭐가 있느냐하면, 가축 키우는 것 외에는 할 것이 없어요. 가축을 키우면서 평생을 유다 땅에서 살아왔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유다나라 안에서 유목생활을 했기 때문에 바벨론 제국이 쳐들어왔을 때 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느냐 하는 문제지요. 유다나라에 속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던 그들이지만 만약 베벨론 제국이 쳐들어오는데 그 적군이 유다에서 레갑 족속을 따로 분리해서 볼 이유는 없을 것이 아닙니까? 다 같은 유다족속이니 다 같이 망하라고 나오겠지요.



그럴 때 그들이 하나님께 순종했는데 만약 그들마저 망한다면 하나님이 하는 일에 일관성이 없다 그 말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 안한다고 재앙을 내려놓았는데 그 가운데서 순종하는 레갑 족속마저 큰 제국에 멸망당한다면 순종하라고 한 하나님의 말씀에 권위도 서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자체가 실효성 없는 말씀이 되겠지요.



레갑 족속은 11절에 보면 “그러나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이 땅에 올라왔을 때에 우리가 말하기를 갈대아 인의 군대와 수리아 인의 군대가 두려운 즉 예루살렘으로 가자 하고 우리가 예루살렘에 거하였노라.”라고 해서 그들이 예루살렘에 피신합니다. 그리고 13절에는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너는 가서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가 내 말을 들으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겠느냐.”



그러니까 예루살렘이 그들에게는 멸망이 아니고 오히려 피난처가 된 셈이지요. 그들의 자손을 더욱더 증식시키는 안식처를 바벨론제국을 통해서 성사시키는 거예요. 바벨론 제국이 쳐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레갑 족속들은 예루살렘에 거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는데 이 바벨론제국이 쳐들어오는 바람에 그들은 이 예루살렘을 차지했고 그들의 자손은 거기에서 번식하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거했던 본래 유다민족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족속들은 바벨론 나라로 포로 잡혀 가지요. 자리 교체하는 현상이 일어나는 거지요. 하나님께서 이 레갑 족속에 지시한 것이 뭐냐 하는 겁니다. 이 레갑 족속이 어떤 족속이냐가 되게 궁금해지는 거지요. 레갑족속중에 유명한 사람이 있는데 십보라의 아버지, 십보라는 모세의 부인인데 그 십보라의 아버지가 있습니다.



모세의 장인인데 그도 미디안족속이고 그 후손이 레갑 족속입니다. 이 레갑 족속이 철저하게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계명에 대해서 순종을 한 거예요. 그래서 말씀에 순종했다는 모델을 찾으려면 유다백성에게서 찾지 말고 그들 가운데 목축을 하면서 흩어져 살았던 레갑 족속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지켜야 지키는 것이다.’라는 모델케이스로서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남겨준 거예요.



한국교회 형편, 또 십자가마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서 제가 느끼는 것이 있었어요. 제가 수백 번을 이야기했습니다. 한국교회가 망하는 것은 교회가 있다는 그 자체 때문에 그들이 망해버렸다, 그 말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교회가 있으니까 그것을 교회인줄 알고 있는 거예요. 기존의 교회가 주님 말씀의 모델이 아닌데 어느 교회는 어떻고, 어느 교회는 어떻고, 이렇게 어느 교회가 등장한다는 자체가 아직도 한국교회가 이단이라는 것을 벗어나지 못한 증거라는 말이지요.



하나님의 뜻은 교회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주의 말씀 듣고 순종하는 것이 주의 뜻이거든요. 얼마나 간단한 이야기에요.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그 결과물이 교회라는 겁니다. 이번 수련회 첫째 시간에 했어요.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교회지 교회되기 위해서 교회를 만든다는 것은 주의 뜻이 아닙니다. 주의 뜻도 아닌 것에 대해서 왜 그리 관심이 많고 신경을 쓰느냐는 말이지요.



그렇게 되면 주의 말씀을 포기했다는 그런 느낌으로 저는 받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말씀을 전하면 ‘목사님, 다른 교회는 어떻게 전합니까?’ 이렇게 다른 교회 이야기가 왜 튀어나오느냐는 말이지요. 교회 자체가 주의 뜻이 아니에요. 강도가 교회 다녀서 구원받았습니까? 세리와 창기가 교회 다녀서, 헌금해서 구원 받았습니까?



사람들이 교회 관심 있다는 말은 속이 텅텅 비어있다는 뜻이에요. 내가 교회 등록한 것 외에는 하나님에 대해서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목사님, 내가 어느 교회 등록했습니다.’ 절에 등록했는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동화사 등록한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동화사에서 못나오겠습니다.’ 동화사에서 못 벗어나면 그냥 있으면 돼요.



그것하고 구원하고 관계없습니다. ‘동화사갈래, 파계사 갈래?’ 그게 구원하고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지금 한국교회가 교회 다녀야 구원된다는 사고방식을, 그 성경에도 없는 이야기를 다 퍼뜨려 놓으니까 자꾸 교회에 신경을 쓰는 거예요. 레갑 족속이 그것을 극복한 신앙의 모델이 되는 겁니다. 레갑 족속은 기존의 유다족속과의 차이가 뭐냐, 살려고 하는 그것이 우선이 아니었고 그들은 ‘우리가 주의 말씀 때문에 차후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레갑 족속의 선조 중에 레갑의 아들 요나답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8절에 “우리가 레갑의 아들 우리 선조 요나답에게 명한”이라고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요나답에게 어떤 명령을 줬어요. 여기서 약간 복잡하지만 요나답이 어떤 사람인지를 먼저 알아야 되겠지요. 열왕기하 10장에는 ‘여호나답’이라고 나오는데 맨 같은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그 당시 예후라는 사람과 손잡은 사람입니다. 예후라는 사람은 북쪽 나라 아합 왕의 군대장관중 한 사람이었어요. 그 당시 선지자가 엘리사인데 엘리사가 자기 종보고 ‘나라꼴이 하나님보시기에 맘에 들지 않는다.’고 했지요. 아합 왕은 특심으로 바알을 숭배했고 바알의 전당을 세운 왕입니다. 예배당, 교회당, 무슨 전당, 이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교회당 지붕 날라 가고 벽체 날라 가면 그 안에 열 명이 혹은 열 세 명이 있었다는 그들이 그 안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를 보라는 말이지요. 그것이 십자가 복음이냐, 주의 뜻이냐가 중요하지 큰 예배당 안에 파이프오르간 설치하고 합창단 만들고, 그것은 그냥 놀이터인데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하면 참 가슴이 아파요.



어느 교회든 가서 보고 복음이 있으면 다니고 복음이 없다면 그 교회에 왜 있느냐는 말이지요. 교회라는 것은 하나의 부동산인데, 그냥 땅, 단지 필지로 되어 있는 그 땅이 천당은 아니잖아요. 그냥 땅 아닙니까? 그냥 땅에 콘크리트 세운 것이고 강대상 뜯어보면 판자때기나 나오고 아무 의미도 없는 거예요.



사람들이요? 사람들은 다 자기집구석밖에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아파트 구멍 속으로 다 들어가면 자기 가정밖에 모르는 사람들이에요. 거기에는 교회라는 것 자체가 없다니까요. 교회는 자기 사는 것이 우선이 아니고 주의 말씀이 우선, 주의 말씀 때문에 내가 차후로 존재하며 만들어졌다는 것을 인식하는 사람들이에요.



말씀에 관심도 없는데 그것을 교회라, 구원을 받는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우리교회 계시다가 다른 데 가시는 분이 말씀에 관심이 있으면 저는 안타까워죽지요. 그런데 말씀자체에 관심이 없다니까요. 그들은 교회에 관심이 있어요, 교회에! 그러면 그분들이 처음에 우리교회 여기에 왔을 때도 관심이 교회에 있었던 거예요.



교회에 관심이 있는 그들의 소원을 제가 들어줄 수가 없는 거예요. 복음을 전할 수밖에 없지요. 나가든 들어오든 복음을 전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왜, 그게 교회이기 때문에. 예후라는 사람이 아합 왕과 그 밑에 있는 바알선지자들을 싹쓸이해서 죽였어요. 그 당시 바알선지자를 어떻게 보면 되느냐, 어릴 때부터 기독교나라에서 세례 받은 목사 장로의 숫자가 전부 바알을 믿는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쉽습니다.



나라자체가 바알나라니까. 어릴 때부터 국가에서 월급주고 바알의 전당, 바알예배당, 바알교회, 전부 바알 목사들만 양성했던 나라에요. 하나님의 자기 나라를 바알나라로 만들었는데 하나님께서 예후를 보내서 일을 처리하십니다. 어떻게 처리하느냐, 꾀를 냈어요. ‘이제 새롭게 등장하는 왕께서는 바알에 대해서 특심하니 바알을 믿는 목사, 장로, 교인들은 다 바알전당으로 모여라. 단 그냥 올 것이 아니고 바알예식의 복장을 다 하고 오너라.’ 했어요.



여기서 또 한마디 해야 되겠어요. 예수 믿는데 특별한 복장을 해야 한다는 이 자체, 이 발상이 대체 정신머리가요, 성경에 그런 것이 어디 있습니까? 목사 복장을 한다니, 그것이! 나는 중을 만나면 꼭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 불교, 도를 닦는 것은 좋은데 그 머리는 왜 깎습니까? 그것이 돈이 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일반인들처럼 머리 기른 중한테는 사람들이 돈을 안내요. 거기에 시주를 안 하지요.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어야 사람들이 돈을 내는 거예요. 목사가 가운을 걸쳐야 그것이 돈이 되는 모양입니다, 권력이 되고. 이러한 아이디어는 바알종교도 마찬가지고 여호와종교도 마찬가지도 전부 다 마찬가지에요.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은 다 기어 나와요.



뭔가 성스러워 보이고 뭔가 구별되어 보이고 뭔가 높은 자리에서 카리스마가 있어 보이잖아요. 그런 짓을 한다는 그것이 이미 하나님의 뜻에 관심이 없다는 거예요. 어쨌든 옷 다 입고 오라고 해놓고는 밖에 군사 80명 배치해놓았는데 그 아이디어는 이 예후와 함께 손잡은 요나답이 아이디어를 끄집어 낸 겁니다. 그래서 다 죽였습니다. 아합의 왕자도 다 죽였어요.



이러한 요나답의 행동은 마치 뭐와 같으냐, 주의 말씀은……, 잘 들어보세요, 주의 말씀은 우리가 실천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한 과격한 행동은 우리에게 뭘 이야기해주느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자기백성에게 맡기는 겁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성도에게 맡기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할 수 없는 일, 다만 믿음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일만 맡기는 거예요.



그 믿음으로 했다는 말은 ‘나는 내 힘으로는 해내지를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는 일입니다. 본문으로 돌아와서 35장 17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 모든 거민에게 나의 그들에게 대하여 선포한 모든 재앙을 내리리니 이는 내가 그들에게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며 불러도 대답지 아니함이니라 하셨다 하라.”



이것이 인간이 실천할 수 있는 일이냐는 말이지요. 재앙을 내린다 할 때, 이 말은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 무섭다, 또는 무서운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하나님 인식론의 제일 첫 번째가 뭐냐, 무섭다는 거예요. 어느 정도로, 상상이 안갈 정도로 무섭다는 거예요. 제가 옛날에 어느 목사님 이야기를 했지요. ‘무섭다.’고 했다고. 그 말이 맞아요.



정말 너무 무서워요. 너무 무서운데 어느 정도로 무서우냐하면, 자기인생, 자기일이 걱정이 안 될 정도로 무서워요. 자기 일이 사소한 일로 간주될 정도로 무서워요. 나에게 어떤 일이 있더라도, 설사 망하는 일이 있더라도 그 일이 무서운 것이 아니고 주님이 더 무서워요. 말이 참 어렵지요? 내가 만약에 말기 암이다. 이때 말기 암 걸린 내가 무서운 것이 아니고 주님이 더 무섭다니까요.



사람이 주님을 안 믿게 되면 누가 무서우냐, 내가 무서워요. 말기 암에 걸릴까봐서. 시집간 딸이 이혼할까봐서, 사업 벌린 아들의 사업이 부도날까봐서, 전부 다 내가 무서워요. 세상 사람의 특징이 뭐냐, 자기가 무서워요. 왜, 하나님이 없으니까, 하나님이 없으니까 자기가 무서운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자기생각이 안들어갈 정도입니다.



왜, 하나님이 너무너무 무서우니까. 그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너무 무서우니까 자기 일에는 웃음이 나고 하회탈처럼 기쁨이 생기는 겁니다. 너무 무서우니까 자기일은 없고 전부 무서운 하나님께 다 일임해야 될 일밖에 없는 거예요. 내가 내 일을 무서워한다는 자체가 이것은 무서운 하나님께 꾸중들을 일밖에 안돼요.



뭘 해도 죄예요. 그 말은 뭐냐 하면, 맡기는데서 오는 감사와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누가 무서우냐, 내가 무서운 거예요. 혹시 내가 내일 하다가 내가 내일을 망칠까봐서. 그래서 인간은 날마다 자기를 취조합니다. ‘너 오늘 어떻게 행동했어? 이래서 네 계획대로 되겠어, 안되겠어!’ 자기가 자기를 나무라고 호통치고 겁주고 아주 난리법석이에요.



인간은 자기가 자기 앞에서 간이 오그라듭니다. 소심해지고 대범하지가 못해요. 무서운 하나님 앞에서는 사람이 대범할 수밖에 없어요. 왜, 무서운 하나님 앞에서는 뭘 해도 그것은 엉터리라는 것을 뻔히 다 알기 때문에 그래요. 성경에서 제가 나름대로 제일 좋아하는 구절이 요한복음 3장 36절입니다. 여러 번 했지만 보면 볼수록 감동이 돼요.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여기서 감사한 것은 하나님의 진노에요. 왜 하나님의 진노가 감사하냐면, 네 힘으로 안 되고 어떤 인간의 힘으로도 이것을 저지하거나 취소할 수 없기에 그것이 기쁘다 그 말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그것에 대해서는 이미 하나님이 ‘손 놔, 손 놔! 네가 뭐라고 해도 나는 진노를 내릴 거야. 이것은 누가 뭐라 해도 주님의 일이야.’ 라고 일방적으로 선언하는 그 주님의 선언이 너무너무 기쁘고 행복하다 그 말입니다. 너무 즐겁다 그 말이에요. 그런 간증이! ‘네가 아무리 친하고 사랑하고 좋아한다 할지라도 아들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영생이 없고 거기에 진노가 머문다, 는 그것에 대해서 너는 손때라.’ 그 말입니다.



‘네가 아무리 그 사람을 좋아하고 아무리 네가 그 사람에게서 어떤 도움을 받았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예수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는 것은 도저히 취소할 수 없는 명확한 현실’이 되는 거예요. 그 점이 편하고 행복하고 마음이 가벼워지는 겁니다.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우리의 모든 수고와 짐이 다 없어져요. 어느새 무거운 짐이 다 없어졌어요.



하나님의 진노를 안 믿으니까, 그것을 우리가 생각을 못하니까 ‘하나님, 내 돈 떼어먹은 놈 벌 받게 하옵소서.’ 맨 날 벌벌벌 떠는데 자기가 자기에게 벌벌 떠는 거예요. ‘하나님, 그 놈의 증권회사 과장 말 듣고 이번에 주식투자 했는데 5억 날렸습니다. 그놈이 길 가다가 객사하게 하여주옵소서.’ 이것은 그 사람이 객사할 문제가 아니고 내 돈에 대해서 평소에 본인이 얼마나 벌벌 떨면서 살아왔느냐를 보여주는 거예요. 5억에 벌벌 떨었다 그 말이지요.



물론 저한테 5억 주면 벌벌 떨 수도 있습니다만, 하나님 말씀에 판사고 검사고 지금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사람 만날 때 ‘와, 잘생겼다.’ 잘생겼네, 못 생겼네, 가 아니라 ‘실례지만 아들을 사랑하십니까?’ 아들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요, 영생이 없고 영생이 없으면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따 놓은 당상입니다. 그 인생을 무서운 하나님이 아주 무섭게 처절하게 저주해 버립니다.



그래서 사람이 자기 운명을 아는 순간부터 비로소 자기주체는 무거워진다는 말이 있어요. ‘내 운명은 어떻게 될까?’ 그것을 알아서 뭐할 건데?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데,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한 그 코스가 다르잖아요. 내 코스는 취직해서 아파트사고 출세하고 성공하는 이 코스라면 주의 코스는 이미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는 이 코스가 달라요.



코스가 다른데 네가 너한테 겁을 집어먹느냐는 말이지요. 주께 다 맡기면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광스럽게 하시는데. 목사들이 얼마나 교인들에게 사기를 치고 있는가를 알겠지요. 한국교회 전체가, ‘여러분, 그렇게 하면 벌 받습니다. 목사한테 대들면 십년 안에 집안이 거덜 납니다.’ 그런 식으로 사기를 치는 이유가 그만큼 인간들 본인이 말씀에 관심이 없고 자기 사는 데만 관심이 있다 이 말이지요.



그것은 신앙의 모델이 아닙니다. 이 시대의 신앙의 모델은 레갑 같은 족속이에요.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셨다.’ 하는 그 말씀을 증거 하라고 주께서는 몇 년 몇 월 몇 시에, 아주 사주 좋은 날에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사주 본다는 것, 손금 본다는 것, 이사 가는 날짜를 본다는 것, 굿하는 것, 마귀가 싱긋이 웃고 있습니다.



‘백날 까불어 봐라. 너는 너한테 겁을 내고 있어. 너는 네 운명에 대해서 겁을 내고 있다고.’ 그게 뭐냐, 인간은 자기주체에 겁을 내고 있는 겁니다. 한국교회가 ‘저 교회처럼 되고 싶어, 이 교회처럼 되고 싶어.’ 하는 그 자체가 마귀의 역사입니다. 특히 목사들. 주일 오전에도 그 말씀 드렸습니다만 주의 말씀을 아는 당나귀가 버티고 있는데 목사들은 ‘주여, 왜 내 교회 부흥 안 시켜주느냐.’고 몽둥이 들고 당나귀를 치는데 그 당나귀를 치는 그것이 예수님을 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왜 내 교회를 부흥시켜 주지 않느냐.’ 그 말입니다. ‘왜 내가 목사 값을 못하게 하느냐.’고 패는 거예요. 이것은 장로도 마찬가지고 집사도 마찬가지에요. ‘우리교회 십년을 다녔는데도 어떻게 이 모양 이 꼴입니까?’ 그게 레갑 족속입니까? 레갑 족속의 특징이 뭐냐 하면, 세상에 마음 두지 않으면 유혹받을 일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포도원도 없어, 자기 집도 없어, 포도주도 안 마셔, 경작도 안 해, 세상에 남겨둔 것이 아무것도 없는 나그네 같은 인생을 살고 있어요. 그런 인간들이 장차 오실 예수님의 증인의 모습으로 그 당시 멸망하는 유다나라의 최후까지 비교하면서 남겨준 남은 자에요. 예레미야 35장 2절에 나오는데 그들을 예레미야로 하여금 성전의 한 방에 가게 합니다.



성전에는 방이 총 90개가 있는데 어느 방에 가서 슬쩍 시험을 해 봅니다. ‘어이, 포도주 마셔라.’ 하니까 레갑 족속이 ‘안마십니다.’ ‘마시라니까!’ ‘안마십니다. 주의 뜻이라도 안마십니다.’ 하나님이 테스트 했습니다. 지금도 주께서는 욥을 시험하듯이 이런 식으로 이 돈밖에 모르는, 힘과 돈과 권력과 큰 것, 많은 것, 이런 것이 자랑거리가 된 이 세상에서 주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내가 그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반드시 그 말씀대로 하도록 나를 사용한다는 것을 믿는 레갑 같은 족속.



이 레갑 족속이 받은 것이 언약이거든요, 지금도 언약에 의해서 만들어진 언약사람들이, 십자가의 새 언약 사람들이 지금도 이 시대에 군데군데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예수님이 재림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까지 그런 백성들이 있어요. 바로 그런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항상 그런 사람들이 시험을 받았을 때 이 레갑 족속처럼 ‘주께서 아신다.’ 하는 거예요. 남들이 안 알아줘요. 남들이 안 알아주지요. 교회 교인 서너 명 되는데 그걸 누가 알아줍니까? 안 알아주지만 주께서는 레갑 족속을 알아주신다는 거예요. 알아주시기 때문에 그들은 지금도 성령에 의해서 말씀 사랑하면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세상 사람들의 말에 그만 속아 넘어가기를 원합니다. 교회 다니면 구원되는 줄 알고 큰 교회 다니면 그것이 복된 줄 알고 축복인줄 아는 저희들, 이제는 말씀을 돌아와서 주께서 알아주는 그런 사람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