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의 탕감
2025년 3월 5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8:41-43
(8:41) 또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 속하지 아니한 자 곧 주의 이름을 위하여 먼 지방에서 온 이방인이라도
(8:42) 저희가 주의 광대한 이름과 주의 능한 손과 주의 펴신 팔의 소문을 듣고 와서 이 전을 향하여 기도하거든
(8:43)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무릇 이방인이 주께 부르짖는 대로 이루사 땅의 만민으로 주의 이름을 알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 처럼 경외하게 하옵시며 또 내가 건축한 이 전을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줄을 알게 하옵소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통해서입니다. 그 이름 안에 그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 결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흔한 일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나름대로 신을 찾고들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부르는 이름은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신이라는 것을 전제로 해서 부르게 되는 신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직접 다윗에게 찾아오게 되면 다윗은 독특한 고백을 하게 됩니다. 일반인이라면 도저히 고백할 수 없는 하나님을 표현합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시 8:4-5)
즉 다윗 안에 장차 오실 메시야가 들어 있었던 겁니다. 그 이름은 ‘인자(人子)’입니다. 이 메시야성으로 인해 다윗은 다음과 같은 수난을 당하게 됩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걸 하나이다”(시 22:6-8)
다윗은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지어드리겠다고 먼저 제안한 사람이고 친히 성전건축물의 모든 재료를 장만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이방인들, 즉 여호와를 모르는 자들도 들어와서 기도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방인들은 여호와가 아닌 다른 신을 섬기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방인들도 성전에서 기도드릴 수 있다’고 합니다. 그 말은 기존에 자신이 믿던 신을 엉터리라는 점을 인정하는 조건하에 드릴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 말고 다른 신의 특징은 강력한 인간들의 혈육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해주는 신입니다. 즉 신의 능력보다 인간 대 인간의 결속의 힘이 더 세다고 인정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버리되 결코 혈육관계를 포기할 수 없는 마음가짐을 믿는 신입니다. 그런데 기생 라합의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자기 사회 공동체를 뭉개고 파멸시키려 온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참된 하나님으로 영접한 자입니다. 자기 인생에 위기와 위험이 온다 할지라도 그것보다 여호와 하나님의 관계가 더 우선적임을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이것은 참된 ‘하나님의 이름’이 지닌 그 기능은 자신이 가진 기본적인 힘과 관계를 모두 버린다 할지라도 상관없이 드러내는 하나님임을 드러내신다는 것입니다. 성전이라는 고정된 건물에서 하나님을 만나고자 했던 이스라엘은 결국 이스라엘도 망하고 성전도 몽땅 불에 타서 사라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을 이방신을 믿는 자들의 손으로 더럽혀지는 방식으로 망하게 하십니다. “대적이 손을 펴서 보물을 빼앗았나이다 주께서 이미 이방인을 금하여 주의 공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사오나 저희가 성소에 들어간 것을 예루살렘이 보았나이다”(애 1:10)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스스로 더럽혀지는 방식으로 자기 파멸을 초래하십니다.
즉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기 이름을 지상에서 없애버리신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자도 없고 부를 수 있는 자도 없습니다. 누구나 성전이란 건물구조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2:20-22에 보면,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누가 감히 성전을 건물이 아니라 물컹한 육체라고 이해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의 이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 굳이 이 땅에 오신 겁니까? 그것은 마태복음 10:6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어 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을 거론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이란 실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활동을 해주셔서 비로소 발생되는 겁니다. 예수님 스스로 ‘잃어버린 분’이 되십니다. ‘잃어버렸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 아버지의 안목에서만 그러하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천국에 들어갈 만한 ‘잃어버린 자’는 어떤 자일까요?
마태복음 18:23-34에 보면, ‘일만 달란트와 100데나리온’의 비교가 나옵니다. 일만달란트는 조금 시세로 1조원이라면 100데나리온은 천만원 정도가 됩니다. 1데나리온은 성인 남자의 하루 품삯이기 때문입니다. 1달란트는 십만 데나리온입니다. 임금님에게 1조원 빚은 진 자에게 임금이 호통을 치면서 “너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라도 갚아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임금님은 말합니다. 모든 것을 다 바쳐도 못 갚은 그 신하를 불쌍히 여겨서 일시로 그 1조원을 다 탕감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탕감받은 신하는 천국의 백성이 된 겁니까? 아닙니다. 그 종은 탕감받고 난 뒤에 자기 집안의 종이 천 만원 빚이 있으니까 기어이 그 종에게 다 갚아라고 닦달합니다.
즉 그 종은 자신 마음 속에 자신을 불쌍히 여긴 그 임금님이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임금님은 빚을 탕감해 준 그것을 취소하고 긍휼이 남아 있지 않는 그 신하를 옥에 집어넣었습니다. 지옥행이지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면서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남쪽 유대지역에 가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어둠’이 있다는 갈릴리 지방에 나서십니다.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 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마 4:12-16)
이 세상 중에서 예수님을 부르는 그 이름을 부를 자는 아무도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통해서 탕감받은 자, 곧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은 자만이 제대로 ‘하나님의 이름’이 뭘하셨는가를 아는 ‘잃어버린 자’이며 이들이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현 우리 마음 안에 뭐가 가득차 있는지 늘 돌아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0강-열왕기상 8장 41-43절(성전의 탕감) 250305-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 열왕기상 8장 41-43절입니다.
열왕기상 8:41-43
“또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 속하지 아니한 자 곧 주의 이름을 위하여 먼 지방에서 온 이방인이라도 저희가 주의 광대한 이름과 주의 능한 손과 주의 펴신 팔의 소문을 듣고 와서 이 전을 향하여 기도하거든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무릇 이방인이 주께 부르짖는대로 이루사 땅의 만민으로 주의 이름을 알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처럼 경외하게 하옵시며 또 내가 건축한 이 전을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줄을 알게 하옵소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이 땅에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왕이 만든 성전은 눈에 보이는 겁니다. 그런데 그 눈에 보이는 성전은 어떤 요소가 있느냐? 주의 이름이 계시는 곳이라고 되어 있어요. 사람마다 이름이 있지요. 사람마다 이름이 있고요, 사람이기에 이름이 있는데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기에 이름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이름들만 있는 이 세상에 끼어들기 위해서 스스로 이름을 가지시고 이 땅에 합류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름이 있는 인간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 이름이 없는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들어주신다는 그 장치가 성전이라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 성전을 누가 만드는가? 성전은 다윗이 기획했고 기획한 그대로 건축한 자는 오늘 말씀대로 솔로몬왕입니다.
이 말은 ‘주의 성전 건축에 있어서 이방인들은 여기에 끼어들지 아니했다.’ 그렇게 돼요. 이방인들은 끼어들지 않았다, 이방인들은 성전 만들지 않았다. 성전을 만들게 된 것은 이스라엘의 왕인 다윗에 의해서 주도된 것입니다. 그런데 성전 건축에 참여하지 않은 이방인도 성전에서 기도하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들어주시는 그 이유가 뭐냐?
이방인인 너희들은 빠져야 하는데 왜 여기에 끼어드는가? 그것은 그들이 성전을 만드는 주체는 아니었지만 오늘 본문 열왕기상 8장 41절에 “주의 이름을 위하여 먼 지방에서 온 이방인이라도”라고 되어 있어요. 주의 이름은 성전을 만든 이스라엘이 독점할 수 없다는 거예요. 성전을 만든 것은 이스라엘이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독점 대상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독점 대상은 아니지만 이스라엘의 성전이 있는 곳까지 와서 이방인들이 기도 하게 되면 하나님은 들어주신다는 겁니다. 이 내용을 간편하게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용해서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주의 이름을 부르면 응답하겠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이방인들은 무엇을 알아야 하느냐? 이스라엘 민족의 가치를 인정해 줘야 해요. 이스라엘의 가치를 인정한다는 것은 이런 겁니다. 이방 민족인 우리로서는 각자의 신이 있지만 그 신에게 빌어도 소용없음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름을 통해서 수긍해야 하고 인정하는 자가 주의 이름을 인정하는 자에요.
그래서 주의 이름은 결국 무엇을 결정하느냐? 이스라엘과 이방인은 완전하게 차이가 난다는 그 점을 인정하는 이방인들은 주의 이름을 부를 자격이 된다는 겁니다. ‘이방인과 그리고 이스라엘은 애당초 뿌리부터 다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시고 찾아오셨지만 이방인에게는 그것이 없었다.’라는 거예요. 진짜 하나님이 찾아온 적이 없다는 겁니다.
진짜 하나님이 찾아온 적도 없는 우리가 이 지상에 살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방법은 내가 섬기는, 내가 원하는 신을 단호하게 기꺼이 거절하고, 그걸 포기하고 이스라엘을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는 거예요. 대표적인 사람이 기생라합이지요.
여러분이 기생라합을 두고 뭘 생각해야 하느냐? 기생라합이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숨겨줬다. 굉장히 간단한 상황 같으나 정탐꾼을 숨겨줬다는 것은요, 일본이 조선을 삼킬 때 자기가 조선인이면서 조선인임을 기꺼이 포기하고 일본 천황 섬기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너, 배, 배, 배신자야!” 하는 소리를 기꺼이 받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방신의 특징이 어떤가 하면, 인간의 권력을 신보다 더 우선시하는 것이 이방신입니다. 인간의 권력, 혈육의 권력, 육신의 힘, 인간과 인간이 결집해서 만든 이 사회공동체, 인간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사회라는 이 결사체의 단단한 힘의 관계를 신보다 더 우선시 하면서 살아온 자들이 이방인들입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은 ‘내 육신과 내가 속해 있는 가족과 그 범위가 확대된 그 사회라는 것, 그 사회에 잘해주는 신 같으면 내가 뭐라도, 뭐라도 섬기겠습니다. 천주교가 되든 불교가 되든 내 가족, 내 직장, 내가 속한 집단과 사회를 지켜준다면 나는 어떤 신이든 섬길 용의가 되어 있습니다.’ 이게 바로 이방신이에요. 아주 철두철미합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이 하나님이라고 하기 전에, 먼저 그들과 그들이 섬기는 이방신 사이에 얼마나 강력한 힘으로 결집 되어 있는가를 철저하게 느껴야 해요. 여러분이 그것을 느끼는 방법은 하나님께서 계속 그걸 느끼게 하는 겁니다.
만약에 여호와 하나님과 여러분이 언약관계로 연결되어 있다면 소위 내 가족, 내 직장, 내 육신의 병 같은 것들로 인하여 깜짝깜짝 놀라고 걱정하거나 염려하는 현상은 발생되지 않아야 하지요. 어떤 문제나 사태가 벌어졌는데 내가 속해 있는 내 것 때문에 불안해한다든지 걱정하고 염려하고 분노한다면 이것은 바로 이방신을 믿는 이방민족들의 우선적인 태도에 해당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기생라합에게 애가 있는데 그 애가 아프다. 그런데 여리고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라합 아주머니! 빨리 우리 쪽으로 오세요.” 하는데 기생라합이 “내가 이스라엘로 탈출하려고 맘은 먹었는데 우리 애가 열이 좀 있네요.” 한다든지 “아버님이 어제부로 돌아가서 장례 치르고 가겠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기생 라합에게서 나올 수가 있습니까? 없지요.
그 여호와 하나님의 결속력은 나 위주로 있는 하나님(이방신)의 결속력을 뛰어넘기에, 초과하기에 그런 겁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성전에서 기도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제공하는 것이 뭐냐? 열왕기상 8장 43절에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무릇 이방인이 주께 부르짖는대로 이루사 땅의 만민으로 주의 이름을 알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처럼 경외하게 하옵시며”
경외하게 한다는 거예요. 이방인이라도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것은 다른 민족에게는 찾아간 적이 없고 특이하게 이스라엘 에게만 찾아온 그 하나님이 진짜 지금도 엄연히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점을 알고 그 하나님에게만 경외하는 그 모습을 이방인이지만 보인다는 거예요.
이것은 결국 뭐냐 하면, 위치가 가나안 땅이 아니고 가나안 땅 바깥에서 왔다 뿐이지 그 속 마음은 이스라엘과 조금도 차별 나지 않는 그런 이방인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자,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어요. 이게 구약이거든요. 구약 때는 주의 이름을 기념하는 성전이 어떤 장소로 지정되어 있어요. 시온산, 예루살렘, 모리아 산이라는 그 장소로 고정되어 있습니다.
고정된 하나님의 이름의 그 처소가 구약 때까지만 허락되고 이스라엘 나라가 망하고 난 뒤에는 성전도 완전히 불에 타 없어집니다. 불에 타 없어진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더 이상 주의 이름을 부를 장소가 이 세상에서 깔끔하게 다 없어졌다는 뜻이에요. 성전이 죽은 거예요. 성전이 파괴된 겁니다.
그런데 성전이 파괴될 때 그냥 파괴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도로 이렇게 파괴됩니다. 예레미야 애가 1장 10절입니다. “대적이 손을 펴서 보물을 빼앗았나이다 주께서 이미 이방인을 금하여 주의 공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사오나 저희가 성소에 들어간 것을 예루살렘이 보았나이다.”
성전에는 주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는 자기 신을 포기한 자만 성전에 들어올 수가 있는데 성전이 망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자기 신을 포기하는 게 아니고 도리어 자기 신의 이름으로 여호와의 이름이 계시는 성전을 파괴하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거예요.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믿는 이방인들에 의해서 성전이 완전히 유린 되고 파괴되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거예요.
허락하신 이유가 있어요. 성전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야 할 이스라엘 본 자손이 그 모든 마음을 이방 신들에게 다 빼앗기고 여호와는 버렸습니다. 이스라엘 성전과 거기 계시는 하나님의 이름은 졸지에 머쓱하게 되어 버렸지요. 하나님의 이름과 성전은 머쓱하게 되었다고요.
성전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선지자나 알고 성전의 가치는 이스라엘에서 완전히 죽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이방인의 신이 인간 육신의 욕구와 욕망을 다이렉트로 직접 충족시켜 주기에 그런 거예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이방신은 나 잘되기 위해서 믿는 신이 이방신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을 위해서 자기를 포기하기를 요구하는 하나님이 여호와 하나님이에요. 성전이라는 것이 이론상 유일하게 진짜 하나님과 만나는 장소인데 그 성전에 들어오는 마음가짐이 ‘하나님을 위하여’ ‘자기를 위하여’를 포기한 자만 제대로 주의 이름을 부르도록 용납하는 장소가 성전이었다는 말이지요. 심지어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그런데 솔로몬왕 이후에, 심지어 솔로몬 당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점차 배가 부르고 좀 산다 싶었더니만 ‘여호와는 안녕히 계세요.’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신을 수입하고 선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과 인간의 유일한 만남의 장소인 성전이라는 건물 자체가 불타 없어졌습니다.
그냥 불탄 것이 아니고 이방인들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고, 이방신들의 유린 대상이 되는 성전, 하나님의 이름이 욕을 얻어먹는 성전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은 영원히 끝장났느냐, 하는 그 문제가 중요하게 등장하겠지요. ‘그러면 인간은 하나님과 만날수 없는 겁니까?’ 하는 그 문제지요.
시편 8편에 다윗의 시가 나와요. 다윗이 자기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인자’라고 이야기합니다. 4절에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라고 했어요. 다윗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약속이 주어지면서 다윗은 분명히 사람이지만 다윗이라는 인간의 존재가, 그 이름이 살짝 다른 이름으로 바뀌어요.
무엇으로 바뀌느냐 하면 ‘인자’로 바뀌어 버립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만나는 장소가 성전이라 했지요. 그런데 다윗부터는 하나님은 사람하고는 안 만나요. ‘인자’하고 만납니다. ‘인자’라는 이름의 사람하고만 하나님은 만나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다윗이 성전은 왜 지었는가?
성전은 불타버리기 위하여 지어진 거예요. 성전이 불에 타지 않도록 조치하면 되는데 왜 의도적으로 불에 타게 되어 있는가? 시편 22편 6절에 보게 되면 다윗 속에 계시는 분, 다윗은 사람이고 다윗 속에 ‘인자’ 되시는 예수님이 계시거든요.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이러한 모독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장로들에게 받은 모욕이에요. 저희끼리 수군거리는 거예요. “야, 야, 저거 봐. 저 예수라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서 하나님이 자기 아버지래. 아버지 아들의 자격으로 이 땅에 왔대. 웃기지? 그러면 아버지가 뭐 아들을 죽도로 놔두겠어? 아버지가 저 아들을 어떻게 하겠어. 우리가 아무리 죽이고자 해도 아마 죽기 전에 하나님께서 구원할 거야. 살릴 거야. 자기가 큰소리를 쳤으니까 한 번 볼까? 우리는 죽이는 역할, 저 인간 하나님은 살리는 역할, 한 번 볼까?” 이러고 놀리고 있는 거예요.
자기 손으로 죽이기 전에 하나님께서 저 메시아를 하늘로 올려보낼 거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게 바로 다윗이라는 사람 속에 있는 ‘인자’가 당한 고난인데 그 다윗 속에 다윗 언약이라는 언약이 ‘인자’의 모습으로 들어왔어요. 그 ‘인자’의 모습이 신약에 와서 구현되고 구약에서는 성전이라는 그런 건축물로 다윗은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을 생각했던 겁니다.
다윗의 생각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의 장소였던 그 성전 건물은 구약이 끝나면서 불타버리고 그게 불에 탐으로서 본격적으로 조롱받고 모독받는 성전의 모습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 신약 성경에 출현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인자’라는 성전,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곳,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그 장소가 하나님의 이름 그 자체로서 이 땅에 오신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은 움직이는 성전이 되는 겁니다.
요한복음 2장 끝에 보면 46년 동안 성전 지었거든요(20절). “저게 성전이냐? 내가 성전이다. 46년 지었어? 난 사흘 만에 지을게.” 그렇게 할 때 제자들도 무슨 말인지를 몰라요. 성전이라는 것은 딱딱한 돌로 짓는 것이지 인체로 되어 있는 게 무슨 성전이냐는 거예요. 인체가 성전입니까? 딱딱한 돌이 성전의 재료입니까, 아니면 물컹한 인간의 육신이 성전의 재료입니까? 이건 인간이 인간보고 물을 질문에 해당이 안 되죠. 안 됩니다, 이건!
인간의 육체도 성전이 아니고 돌도 성전이 아니에요. 반드시 거기에는 뭐가 있어야 하느냐? 죽어도 죽지 않는 육체가 성전입니다. 죽여도 죽지 않는, 그 죽음으로 만든 것이 바로 영원한 성전입니다. 죽이고 죽였는데 안 죽어요. 참, 어떻게 그런 성전 한 번 들어가 보실래요?
죽여도 안 죽는 성전 한 번 되어 보실래요? 그 성전을 믿은 사람? 열두 제자도 이해 못 했죠. 예수님을 조롱했던 유대인, 그리고 이방인은 말할 것도 없고요, 이 세상에 아무도 성전을 이해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믿는 사람 아무도 없었어요.
자, 그렇다면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과 똑같은 말이에요.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예수님 외에는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여호와, 여호와, 부르면서 여호와를 죽였잖아요. 얼마나 코미디에요? 여호와 부르면서 여호와 이름으로 여호와를 죽여 버렸어요. 여호와가 주의 이름이니까, 주의 이름으로 주의 이름을 죽여 버려요.
그러면 주의 이름을 부르는 하나님의 백성은 이 땅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없습니다. 성전이 있어서 그걸 대단한 자랑거리로, 자부심으로 여겼던 유대인 그 이스라엘 사람들이 성전의 가치를 모독해서 성전이 불타버렸거든요? 북쪽 이스라엘도 성전을 모독했고 남쪽의 남아있는 유다 백성도 성전을 모독하고 우상을 가지고 성전까지 참여시켜서 결국 성전은 ‘그렇게 성전이 싫으면 자진해서 폭파될게.’ 하고 자진해서 폭파되었잖아요. 없어졌어요.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의 장소가 없다는 말이에요.
없는데 그럼 “없다!” 하고 그냥 도로 가시면 될 텐데 없다고 하시면서 왜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서 활동은 하시느냔 말이죠. 마태복음 10장 6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10장 5절부터 보면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어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라고 했어요.
이 말씀이 굉장히 어렵기 때문에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이방인이 사는 동네, 이방인의 길이죠. 사마리아인이 사는 그들의 동네도 있지요. 그들의 지역이 따로 분명히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은요, 그런 지역이 없어요. 사람이 사는 데는 유대인이나 이스라엘이나 또는 이방인, 이렇게 구분되어 있지만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가시는데 잃어버린 양이 사는 동네는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어요. 잃어버린 양은 주민 등록이 된 적이 없어요.
이래서는 무슨 뜻인지를 모르겠죠? 잃어버린 양을 찾는 방법이 마태복음 4장 12절에서 16절에 나옵니다. 12절에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요한은 요단강과 광야에서 활동했어요. 남쪽 유다 지역입니다. 요한이 예루살렘에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물러 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지금 마태복음 4장 13절부터 16절까지 읽고 있습니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이사야에 의하면 이곳은 어둠의 땅이에요. 어두움의 땅, 어두움의 땅은 저주받은 땅이고 버림받은 땅입니다. 저주받고 버림받는 땅에 왜 주님께서 가십니까? 마태복음 2장에 헤롯왕이 베들레헴의 애들을 다 죽이니까 주님께서 피신해서 애굽으로 갔거든요.
애굽으로 가면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와야 맞는데 예수님 가족이 어디로 가느냐 하면 나사렛 동네에 가서 나사렛 사람이 돼요. 그 나사렛 동네는 하나님의 약속이 없는 곳이에요. 이방인의 땅이에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방인의 땅에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땅에도 가지 말고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잃어버린 양이 사는 그런 동네가 없다니까요? 그런 동네가 없어요. 없는 동네를 주께서 새로 만드시는 겁니다. 왜 어둠의 땅,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땅에서 잃어버린 양을 찾느냐? 그것은 그 누구도, 어디에도 하나님의 백성이 없기 때문에 그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거예요. 그 어디에도 하나님의 백성은, 정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 어디에도 없는데 없는 데서 주께서 잃어버린 양을 새롭게 만들어요. 뭘 앞장세워서? 새로운 이스라엘 곧 열두 제자를 앞장세워서 이방인 가운데에서도 자기 백성을 건져서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이라고 명칭을 붙이고, 하나님의 성전에서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새로운 백성으로 창조하는 일을 주께서 하십니다.
자, 여기서 우리가 궁금한 것은 ‘그러면 어떻게 창조하는가?’ 어떻게 창조하느냐 하는 것은 마태복음 18장을 통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18장 23절부터 천국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 대”(마 18:23-25).
“갚아라!” 갚으라고 했거든요. 26절에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종이 엎드려서 “갚겠습니다.” 하고 그냥 자빠진 거예요. 그런데 27절에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다는 겁니다. ‘탕감’, 받을 권리가 있는데 불쌍히 봐서 안 받겠다는 거예요. 이게 뭐라고요? 천국이라는 겁니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탕감을 받아야 하는데 누구한테 탕감받는가? 주의 이름에 의해서 탕감받는 자만이 제대로 의미가 꽉 찬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유일한 대상자가 된다, 이 말이죠.
여호와, 여호와, 부른다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게 아니에요. 여호와가 어떤 분인데요? 뭐 설명을 할 수 있어야 해요. “여호와가 어떤 분인데? 예수님이 어떤 분인데?” “몰라.” 이러면 안 되죠.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제 죄를 탕감해 줬어요.” “왜 탕감하는데?” “불쌍히 여겨서요.”
그러면 천국 백성 맞습니까? 조금만 기다리세요. 그 뒤에 28절에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종이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니까 불쌍히 여겨주지 않고 갚으라고 강요한 거예요. 그래서 탕감해 준 임금이 화가 났고 “도로 집어넣어.”(34절) 도로 옥에 집어넣으라고 했던 거예요.
그러면 이 절차와 그 과정을 다 한번 같이 넣어봅시다. 1만 달란트가 얼마냐 하면 요새 돈으로 6조 원이에요. 1달란트는 6, 000데나리온이거든요. 1데나리온은 성인 남자의 일당이에요. 요새 성인 일당을 대충 십만 원이라고 잡읍시다. 일만 달란트니까 계산하면 6조 원입니다.
탕감받은 1만 달란트는 6조 원, 그런데 탕감받고 돌아가던 그 사람이 멱살 쥐고 갚으라고 한 빚은 100데나리온이니까 천만 원입니다. 6조 원대 천만 원이에요. 요새 뭐 1조 원이 돈입니까??? 천만 원과 6조 원의 비교에요.
사람들은 어디까지 가느냐 하면 여기에서 멈춰요. “제가 임금님께 6조 원의 빚을 졌습니다.” “다 갚아!” “다 갚겠습니다. 제가 모든 걸 팔아서 갚겠습니다. 그런데 현재 갖고 있는 것을 다 팔아서도 6조 원을 갚을 길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6조 원을 갚으라고 했을 때는 ‘그냥 주님께서 나 자체를 아예 소유해 버리소서.’ 예를 들어 “우크라이나 전쟁한다고 빌려 갔던 3,000억 달러 갚아.” “없습니다.” “그러면 희토류 내놓던지.”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양복 입고 가서 이렇게 하면 얼마나 좋았어요?
주께서 네 처지를 보고 널 불쌍히 여겨서 “그러면 6조 원 안 갚아도 돼.” 여기서 멈추는 게 아니에요. 그 탕감 받는 마음속에 나는 탕감 받았다는 자기 의미가 있으면 지옥 가요. 잃어버린 양은 주님이 탕감했던 마음이 그대로 그 사람 안에 꽉 차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게 천국 백성이에요. 이걸 아주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고 할 때는 “그 잃어버림이 접니다.”라고 그걸 계속 자기가 유지가 되어야 해요. 지속돼야 해요. 그게 천국 백성이에요. 그 천국 백성만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바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이 땅에서 완전하게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어요.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음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육신이 연약해서 죽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께 버림받아서 죽는다는 사실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거예요.
더 쉽게 말해서 인간은 버림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을 예수님을 통해서 분명하게 보여줬습니다. 버림받아 마땅함이 계속 그 사람의 마음속에 유지될 때 버림받아 마땅함과 하나님이 주시는 긍휼하심이 계속 결속되면서 잃어버린 양, 천국 백성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겠어요? 여기에 트럼프가 앉아 있고 젤렌스키 앉아 있고 또 여기 부통령 앉아 있으면, 부통령이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대통령한테 이야기했잖아요. “왜 감사함이 없습니까, 감사함이!” 왜 고마움이 없어요? 자꾸 해주면 권리처럼 여기고요.
고마움이 법을 이깁니다! 고마움만이 끝을 넘어설 수 있어요. 이 세상의 종말을 넘어서는 것은 고마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은 고마움이기 때문이에요. “그동안 미국이 이렇게 우리나라를 도와줘서 고맙습니다. 뭐 희토류든 뭐가 되든 다 가져가도 괜찮습니다. 압수해도 괜찮아요. 우크라이나는 내 것이 아니고 미국 겁니다.” 이렇게 했으면 좀 좋았어요? 양복도 안 입고 와서는.
왜 예수님께서 유대인에게는 살해당하고, 이방인은 찾아가서 이방인들을 그렇게 일방적으로 사해주는 겁니까? 마태복음 8장에서 천국을 이야기하면서 이방인을 거론해요. 이방인 백부장을 이야기하면서 10-12절에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즉 “왜 고마운 줄 몰라? 왜 감사가 없어? 불쌍히 여김이 왜 없어?고맙단 이야기를 왜 못해?” 마태복음 18장에서요, 베드로가 이렇게 이야기해요. “내가 몇 번 용서해 주면 됩니까? 일곱 번 용서하면 됩니까?”(21절) 주님께서 베드로 보고 “너는 왜 고마움이 없어? 네 존재 자체에 대한 고마움이 왜 없어? 왜 자꾸 너의 의만 생각하는 거야? 너의 의미만 생각하는 거야? 왜 감사함이 없어? 저 봐. 이방인 봐. 그냥 고맙잖아. 이방인들은 그냥 고마워하잖아.”
이 잘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 전통과 역사가 찬란하다,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다, 주님께선 ‘본 자손들은 쫓겨나고 이방인들, 이들이 천국을 차지할 것’이라고 했어요. 하나님이 뭘 기뻐하는지를 봐야 해요.
‘우리가 천국 가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 아닙니다! 그건 요령 부리는 거고요. 천국을 가든 지옥을 가든 주께 감사하세요. 고마워하세요. 내 것이 더 이상 내 것으로 남아있는 게 아무것도 없이 몽땅 주님한테 압수당하세요. 몽땅 다 압수당하세요.
사도 바울이 로마로 갔죠. 이번 겨울 수련회 다니엘서 보면 로마는 네 번째 짐승입니다. 마지막 짐승이에요. 그 마지막 짐승에게로, 사도 바울이 지중해의 폭풍을 뚫고 기어이 로마의 가이사 앞에 서야 한다고 가는 겁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네 번째 마지막 짐승인 로마의 가이사 앞에 서야 한다는 말은, 사도 바울의 복음 안에 끝을 터치했다는 내용이 들어있는 거예요. 사도 바울은 끝을 이미 알았어요. 사도 바울이 끝을 알면서 외친 것이 뭐냐? “나는 괴인 중에 괴수고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고마움이에요. 고마움이 끝을 넘어서는 거예요.
사도행전 19장 15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마귀가 알고 있어요. 사도 바울이 예수님과 같은 나라에 속했다는 것은 다른 인간은 모르는데 마귀는 알고 있어요. 왜? 마귀는 주님이 주신 그 복음의 고마움이 가득 담겨 있기 때문에 그래요.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고전 16:22). 이걸 벌벌 떨면서 이야기하지 마시고 이제는 고마움과 감사로 마음껏 이 저주를 외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구원받을 수 없고 주의 이름을 부를 수도 없는 저희들 가운데, 주께서 복음 주셔서 복음 안에 주께서 탕감해 주는 기쁜 소식을 담아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는 우리 안에 나의 존재 가치나 의미를 챙기려고 하지 말고 주님이 주신 죄의 용서함에 대한 고마움과 감사로 풍성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