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의 생산
2025년 2월 26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8:31-34
(8:31) 만일 어떤 사람이 그 이웃에게 범죄함으로 맹세시킴을 받고 저가 와서 이 전에 있는 주의 단 앞에서 맹세하거든
(8:32)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행하시되 주의 종들을 국문하사 악한 자의 죄를 정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돌리시고 의로운 자를 의롭다 하사 그 의로운 대로 갚으시옵소서
(8:33) 만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주께 범죄하여 적국 앞에 패하게 되므로 주께로 돌아와서 주의 이름을 인정하고 이 전에서 주께 빌며 간구하거든
(8:34)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시고 그 열조에게 주신 땅으로 돌아오게 하옵소서
최종 권위를 ‘성전에서의 기도’에 두자는 의식은 오늘날 현대인들이 보면 우스울 일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최종 판단은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옳고 그름의 최종 판단 뿐만 아니라 자신의 행위에 대한 결과까지 현대인들은 자신들이 책임질 각오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즉 그 어떤 결과가 나온다 할지라도 그 결과까지 흔쾌히 수용할 각오가 되어 있는 것이 현대인들의 자신감입니다. 왜냐하면 실제 현상까시 수용하는 자아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최후의 1인자로 숭상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에게 있어 잘못을 하든 잘 하든 그 어떤 경우도 본인이 알아서 해결할 마음 자세로 무장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철저하게 ‘개인을 숭상하는’ ‘개인주의 정신’입니다. 이들이 교회를 찾든 절을 찾든 아니면 평소에 급작스럽게 신을 찾는 것은 바로 ‘신전(神殿)에서의 기도’에 해당됩니다. 답답해서 신을 찾고 절대자를 찾는 경우가 있다할지라도 이는 자신의 ‘불안요소’를 반영하는 경우에 해당됩니다.
인간들이 할 수 있는 도리를 대해 보지만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을 때, 마지막으로 신의 능력에 아부하고 호소하고 애걸해 보는 겁니다. 이것이 ‘소원 비는 식’의 기도입니다. 반면에 ‘성전에서의 기도’는 이런 개인주의를 철폐합니다. 성전에 계시는 오직 하나님의 존재만이 인정합니다.
그 예가 오늘 본문 열왕기상 8:33-34에 나옵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죄를 지었으면 그 죄값으로 망하든지 아니면 심한 벌을 받든지 해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죄지었으면 성전에 와서 기도하라는 겁니다. 그 죄를 용서해서 이스라엘을 정상화시켜 주시겠다는 겁니다.
이것은 결코 ‘이스라엘 중심’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름대로 성전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게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이 개인을 지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성전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의 권위와 능력이 죄 사함으로 주어진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자들의 생산입니다.
죄를 사해주시는 능력과 권세는 ‘성전이 갖은 깨끗함’에 근원이 있습니다. 이 깨끗함을 지속시키고 유지하는 것은 성전 안에 매번 ‘깨끗한 제물의 죽음’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의 단’은 번제단을 말합니다. 번제단은 제물을 죽이는 장치입니다. 여기에서 죽은 제물은 연기+재를 남깁니다.
다 태워지는 겁니다. 그리고 나머지 제물을 성전 밖에 쓰레기 장에 버려집니다. 그 중간에 피는 하나님이 계시는 성소 안까지 운반됩니다. 이는 제물의 파괴에 분해를 의미합니다. 깨끗함을 색깔이 나타낸다면 ‘흰색’입니다. 성전에서 일어나는 죽음을 통해서 ‘흰색’을 품은 백성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이 바로 ‘성전의 있음에서 나온 생산물’입니다.
이것은 성전에서만 나오는 결과입니다. 이사야 1:18에 보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결과는 성전의 깨끗함에서 발휘는 권세와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결코 인간의 기도나 인간의 행함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반면에 신전에서의 기도는 기도하는 당사자의 노력의 결과를 얻고자 하는 ‘중간과정’임을 스스로 느끼면서 하는 행위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중간이나 결과 양쪽으로 다 관계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특정한 하나의 관계의 정확도를 최대한으로 높이는 경우 다른 관계의 정확도는 포기하게 된다는 것이 양자물리학에서 말하는 ‘불확정성원리’입니다.
인간은 중간 과정에 치중하므로서 결과는 미지의 것, 불확정한 것으로 남겨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 중간 과정의 주인공에 자신이 주입되므로서 악마의 사주를 자처하게 됩니다. 악마로부터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한 기도자세나 마음가짐에 대해서 조언을 쉴새없이 받게 됩니다.
반면에 성전에서의 기도는, ‘내가 누구이어야 하는지’는 재정립받게 됩니다. ‘주홍같은 죄가 이미 양털같이 희어졌음’이 된 결과로 성립된 자아임을 늘 확인받게 됩니다. 구약의 성전는 하나의 대상이 되지만 신약에 와서 성전은 이미 성도 자체가 성전 안에 놓여져 있습니다. 마치 기차 안에서 타고 기차와 함께 달리는 안목과 기파 밖에서 기차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입니다.
구약에 성전에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망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까지 성전의 활동은 멈추지 않고 이어져서 생산된 것은 ‘남은 자’의 등장입니다.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롬 9:27)
또한 로마서 11:5-6에 보면, “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왜 은혜일까요? 그것은 생산물이기 때문입니다. 이 생산물의 고백은 이러합니다.
“다른 분이 지금 나 대신이 이 자리에 살고 계시다”입니다. 이렇게 되려면 성도는 이미 죽어야 합니다. ‘이미 죽어서 하는 기도’가 바로 ‘예수 이름으로 하는 기도’입니다. 과연 어떻게 죽을까요? 히브리서 13:11-13에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 안에 있는 가짜 성전 말고 진짜 성전은 사건으로 발생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움직이는 성전’입니다. 따라서 이 성전을 통해서 흰색의 능력과 권세가 계속 발휘되는 겁니다. 이 성전 안에서 죽음의 능력으로 인하여 성도의 모든 개인적인 성향을 뚫고 예수님의 마음이 솟구쳐 올라오게 됩니다.
마치 잠수함이 물 위에 올라오면서 다른 인간들의 모든 행위와 성향이 다 사방으로 쓸려내려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예수님의 찬미가 가능한 성전의 생산물이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성전의 생산물로 늘 평안함이 나오게 하옵소서. 예수님이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9강-열왕기상 8장 31-34절(성전의 생산) 250226-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 열왕기상 8장 31-34절입니다.
열왕기상 8:31-34
“만일 어떤 사람이 그 이웃에게 범죄함으로 맹세시킴을 받고 저가 와서 이 전에 있는 주의 단 앞에서 맹세하거든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행하시되 주의 종들을 국문하사 악한 자의 죄를 정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돌리시고 의로운 자를 의롭다 하사 그 의로운대로 갚으시옵소서 만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주께 범죄하여 적국 앞에 패하게 되므로 주께로 돌아와서 주의 이름을 인정하고 이 전에서 주께 빌며 간구하거든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시고 그 열조에게 주신 땅으로 돌아오게 하옵소서.”
31-32절은 개인적인 기도의 경우고, 33-34절은 이스라엘 국가에 관한 기도와 그 기도의 결과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개인이, 어떤 사람이 나에게 범죄했다는 추측과 낌새, 느낌을 받아서 고발을 했어요. 고발당한 당사자가 ‘나는 이런 범죄를 행한 적이 없다.’고 나올 때 고발한 사람이 “너 정말 범죄한 적이 없어?” “없어!” “그러면 하나님의 제단 앞에 가자. 주의 단(31절)으로 가자.”라고 하는 거예요.
이것이 오늘날 현대인에게는 굉장히 이상한 이야기입니다. 내가 내 양심에 호소해서 하자가 없다면 누구한테 이야기 안 하면 그만이지요. 누가 나보고 죄지었다 하는데 ‘그건 네 맘대로 생각해. 너는 네 갈 길 가고 나는 내 갈 길 간다. 오늘부로 우리 찢어지자.’ 하면 끝나는 문제에요. “네가 나한테 나쁜 짓을 했잖아.” “그렇게 한 적이 없는데?” “누가 옳은지 주의 단으로 가볼까?”
왜 가봐야 하는데요? 왜 가야 하지요? 가서 뭘 얻겠다고? 고소한 사람은 “음, 아니네.” 하면 끝나는 문제이고 무고하게 고소당한 그 억울함은 누구에게 풀 것입니까? 오해를 했든지, 진짜 혐의가 있었든지 오늘날 현대사회에서는요, ‘너는 그렇게 생각해라.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하면 그만이다.’ 하는 겁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뭔가 누락 된 것이 있어요. 뭐가 빠졌느냐 하면 “하나님의 제단 앞에 가자.” 이것이 빠졌어요. ‘누가 옳은지 누가 그른지 우리 하나님 앞에 판단 받아보자.’ 요게 빠졌다고요. 내가 그렇다 하면 그런 것이지 누구한테 판정을 받습니까? 현대인들에게는 판정받을 이유가 없어요. 각자 자기 팔 흔들면 그만이고, 자기 인생 스스로 행복하면 그만이지 누구한테 인정받거나 판정받는다는 그 자체가 굉장히 기분나쁜 일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31절에 “이 전에 있는 주의 단 앞에서 맹세하거든”이라고 할 때 오늘날 현대인들은 누구한테 맹세 안 합니다. 왜냐하면 최종적인 판단자는 본인들이에요. 내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고, 내가 아니라면 아닌 거예요. ‘날 설득하려 하지 마. 내가 아니라면 아닌 거’예요. 그래서 현대인들은 대화가 안된다는 거예요.
대화가 안 될 수밖에 없지요. 각자 자기가 최종판단자인데 무슨 대화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본문 열왕기상 8장 31절에 “이 전에 있는 주의 단 앞에서 맹세”한다는 이것이 성립이 안 된다고요. 따라서 오늘 본문에 있는 대로 만약 주의 제단으로 간다면 그 가는 행위를 가지고 ‘기도’라고 하는 겁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말하는 기도하고는 좀 다르지요? 오늘날 교회에서 말하는 기도라는 것은 오늘 본문에서 성전 제단 앞에서 기도하는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신전에서 기도하는 거예요. 바알신전, 아세라신전. 신전에서의 기도와 성전에서의 기도가 달라요. 신전에서의 기도는 자신의 불안 요소를 메우기 위해서 하나님께 하소연하고 자기 한을, 억울함을 풀어달라 요청하는 이방 종교입니다.
그런데 성전에서의 기도는 뭐냐? ‘너도 최종판단자가 아니고 나도 최종판단자가 아니고, 이 현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성전에 계신 분에 의해서 판단되라고 발생 된 일이다.’ 그래서 “성전에 가자”는 그 말은 ‘너도 눈에 보이잖아. 그러니까 너는 아니야. 너를 고소한 나도 눈에 보이거든. 그래서 나도 엉터리거든. 너도 엉터리, 나도 엉터리라면 유일하게 살아계신 분은 성전에 계신 분이다. 그분 앞에 가자.’ 이것이 성전에서의 기도에요.
그러니까 성전에서의 기도의 의미는 뭐냐?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원해서 일어난 일은 아닙니다.’라고 인정하는 거예요. 알기 쉽게 말해서 성전에서의 기도는 뭐냐? 내가 누구 소속인가를 날마다 재확인하고 재정립하기 위한 기도가 성전에서의 기도에요.
‘주님, 저 주님의 종 맞지요? 저 주님께서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주님의 자녀 맞지요?’ 이걸 확인하러 가는 것이 성전에서의 기도에요. 그런데 신전에서의 기도는 뭐냐? ‘제가 이렇게 억울합니다. 제가 이렇게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제가 이것 때문에 속이 상합니다. 앞으로의 미래도 불확실하니 내 뜻대로 채워주소서.’ 이것은 바알과 아세라종교, 다시 말해서 여호와가 빠져 있는, 인간이 기대하는 우상신들에게 기도하는 신전에서의 기도입니다.
신전에서의 기도는 내가 바뀔 필요가 없어요. 왜? 기도 당사자가 나의 미흡한 것, 모자라는 것을 마저 채워달라고 기도하기에 ‘나의 부족한 것이 있고 그래서 이것이 나의 소원입니다. 신이라는 당신이 이걸 채워주면 그만이고 나 자체는 건드리지 마세요.’라는 이것이 신전에서의 기도 조건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건드리는 것은 싫어해요.
그런데 성전에서의 기도는 뭐냐? ‘내가 또 삐딱하게 나갔지요. 내가 또 주인인 양 행세했지요?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내 소원대로 되어야 한다고 말도 안 되게 우겼지요? 하나님께서 나를 다시 제자리로 데려가 주옵소서. 주님의 종으로서의 제자리를 찾게 하옵소서.’ 이거지요.
그래서 ‘잘못했다, 잘했다’가 판정이 안날때 주의 제단에서 기도를 하게 됩니다. 32절에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행하시되 주의 종들을 국문하사 악한 자의 죄를 정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돌리시고 의로운 자를 의롭다 하사 그 의로운대로 갚으시옵소서.”
‘죄를 지은 자에게는 벌을 내리시고 의로운 자에게는 의롭다’라고 하는 결과가 나온다는 거예요. 신기하지 않습니까? 현대인에게는 하나님이 없잖아요. 각자 자기 삶 살면 그만인데 신기하게도 나 말고, 너 말고, 인간 말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되면 ‘하나님께서 죄지은 자에게는 벌을 내리시고, 의로운 자에게는 의롭다고 인정하는 결과를 내놓는다.’는 거예요.
어디에서? 신전에서가 아니라 성전에서 기도하게 되면 그런 결과가 나온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 열왕기상 8장 31-32절이 상당히 어려워요. 왜 어려운가? 어떤 사람이 죄를 지었다는 혐의가 있어요. 그래서 다른 사람이 “여호와가 계신 성전으로 가자!”라고 해서 “네가 만약 죄를 지었다면 벌을 받을 것이고 죄가 없다면 너는 의롭게 될 것이니 성전으로 가자.”라고 할 때 그 죄를 지은 사람이 안 갑니다.
안 갈 수밖에 없지요. 죄가 없다고 되면 벌받을 일도 것이고, 만약에 진짜 죄를 지었기에 하나님의 벌을 받게 된다면 굳이 성전에 안가도 벌은 받을 것이니까 괜히 가서 공개적으로 우세 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안 가는 게 더 나은 거예요.
병이 들었다. “여보, 병원에 갑시다.” 안 갑니다. 왜? 병원에 가도 “이것은 못 고칠 병입니다.” 그런 소리 들으면 병원에 가나 마나지요. 병원에 가서 괜히 돈이나 버릴 바에야 굳이 병원에 가서 확인받을 이유가 없어요. 돈만 날리는 거지요.
그런데 부인이 이야기합니다. “보험 다 들어놨다.” “그러면 가볼까?” 결국 돈 문제지요. 자, 그래서 열왕기상 8장 31-32절이 어려운 이유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기도하라는 그 말은 네 소원 들어주는 그 기도를 하라는 말이 아니고, 이 이스라엘에 누가 살아계시고, 그 살아계신 분에게서 무엇이 계속 분출되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가운데서 이스라엘에서의 개인, 개체라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은 어디까지나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지 나 개인의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성전을 만들어놓고 거기서 수시로 기도하라고 한 거예요. 그 내용이 열왕기상 8장 33-34절에 나옵니다. 33절에 “만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주께 범죄하여 적국 앞에 패하게 되므로”라고 되어 있거든요.
이스라엘이 범죄 했잖아요. 범죄 했으면 성전에서 기도할 필요 없어요. 범죄 했으면 아까 말한 개인적인 경우처럼 벌을 받아야 해요. 이스라엘은 망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범죄 했거든 오라” 그 말이지요. 그런데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갈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범죄 했다면 범죄 했다는 그 이유로 인하여 “우리는 그냥 당할게요. 망하겠습니다.”
동거하던 남자를 버리고 권력자의 가문과 정략적으로 결혼하는 경우가 있겠지요. 그럴 때 그 여자가 “‘다른 여자 손 잡고 너 앞에 나타나서 날 차버린 걸 후회하게 만드는 복수’ 그 벌 내가 받을게요.” 이렇게 나온 거예요. <보물섬>이라는 드라마 대사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내 죄 아니까, 그 죄에 대해서 벌 각오하고 이런 결혼을 하니까 내 결혼에 대해서 당신은 알아서 해라.’ 그런 뜻이거든요. 그처럼 이스라엘이 범죄했잖아요. “우리 이스라엘이 범죄했으니 공정하고 정의로운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마시고 우리 이스라엘을 멸망시켜주옵소서.”라는 이 정도 오기가 있다 이 말이지요. 이스라엘도 같은 인간이니까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오기를 일체 인정하지 않아요. “어디서 이게 내 앞에서 오기를 부려? 빨리 와!” “오게 되면요?” “죄 용서해 주고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줄게.” 이런 이야기 한다고요. 그게 뭐라고요? 성전에서의 기도에요. 그러니 성전에서의 기도는 개인의 사정이나 이스라엘의 사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는 식으로 여태껏 너희를 인도해 왔다는 거예요.
잘 들으셔야 해요.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시니 우리가 죄지으면 용서해 준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이 용서해 주는 것이 아니에요. 사적으로, 개인적으로 하나님이 죄를 용서해주기 위함이 아니고 주님의 계획은 뭐냐? 일방적으로 용서를 강요해서 용서가 들어 있는 그 인간들을 ‘남은 자’ - 하나님의 용서로, 하나님의 은혜로 생겨나는 – 그 ‘남은 자’를 생산하겠다는 그 목적이 성전 안에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 용서받기 싫어도 여러분은 용서받아야 해요. 여러분, 천국 가기 싫지요. 가야 한다니까요! 이것이 여러분 소원입니까? 아니에요. 누구 소원인가? 성전을 만드신 하나님의 소원이 그래요.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아, 내가 죄를 지었는데 어떻게 하지? 그래, 교회 가서 십자가 앞에 용서를 구해야지.’ 이렇게 되어버리면 이것은요, 계속해서 자기자신의 욕망이 살아 있는 것이 돼요. 당연히 구원받지 못하지요. 천국에 못 가요.
천국은 내 뜻을 주님이 이뤄줘서 가는 것이 아니고, 천국은 일방적으로 주께서 천국 갈 백성을 모집하고 그 백성을 죄 용서된 백성 만드는 작업을 어디서 하느냐? 성전의 능력과 권세로 해요. 그래서 성전의 특징은 깨끗해요. 깨끗합니다. 성전이 깨끗하다는 말은 어떤 인간도 성전 앞에서 자기 잘났다, 할 수 있는 위인은 아무도 없다는 뜻이에요.
그 깨끗함을 색으로 표현하면 흰색입니다. 백설공주. 사람들이 백설공주를 왜 좋아하느냐? 깨끗해요. 흠도 티도 없이 깨끗해요. 오죽하면 눈같이 흰 공주(Snow White), 백설공주(白雪公主)겠어요? 주님께서 그 백설공주로 만들어주십니다. 하얗게 만들어줘요.
그러니까 그 깨끗함이 뭐가 되느냐? 그 깨끗함이 권력이고 권세고 힘입니다. 그 깨끗함이 어떤 사람에게 주어진다면 그 사람을 통해서, 그 사람의 움직임과 말을 통해서 여호와의 권세와 능력이 나와요. 왜? 깨끗하니까. 그러면 어떻게 깨끗한가?
이사야 1장 18절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찌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에 두 가지 안목이 성립할 수 있어요.
하나는 과정을 보는 안목, 또 하는 결과만 보는 안목이 있어요. 글을 배우는 아동들에게 선생님이 가르칩니다. “글씨는 알아보게 써야 한다.”라고 했어요. 글씨는 알아보도록 써야 한다. 이거 실패입니다.
하나님의 글씨는 아무도 못 알아봐요. 왜냐하면 인간은 중간 과정을 보고 결과는 못 보는 반면에 주의 모든 성경 말씀은 결과만 보게 하기 때문에 그래요.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된다.’ 다시 이사야를 보면 ‘너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고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된다.’고 했어요.
그런데 인간은 어딜 보느냐 하면 자기 죄가 주홍 같고 자기 죄가 진홍같이 붉다고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이 인간의 힘으로 구원받는데 실패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이건 중간 과정입니다. ‘너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그거 보지 말고 ‘눈과 같이 희어진다’는 그걸 보라는 거예요. 두 가지 다 보면 안 됩니까? 인간은 두 가지 다를 못 봐요. 인간은 과정만 볼 뿐이에요. 결과는 못 보는 거예요.
그래서 솔로몬 당시 성전에서 기도해도 이스라엘이 실패한 이유가, 그 성전이 있고 그 앞에서 기도하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글씨를 자기가 알아보도록 썼다고 생각하고 알아보는 것으로 생각해서 그대로 했어요. 그렇게 했는데 망했습니다.
왜? 인간이 바라보고 관찰하는 순간 그건 결과가 아니고 중간 과정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특정한 하나의 관계의 정확도를 최대한도로 높이는 경우 다른 관계의 정확도는 포기해야 한다.’ 이게 양자물리학의 불확정성 원리라는 거예요. 둘 다를 못 봐요.
여러분 골프에서 18홀, 그걸 코스라고 하죠. 골프 치는 사람은 두 개의 코스를 동시에 칠 수가 없어요. 자기가 뭘 왔다 갔다 해요? 그렇게는 못 합니다. 최종 결과를 받아들일 때는, 양털같이 희어졌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는, 만약에 ‘하나님의 은혜로 남은 자’를 받아들인다면 중간 과정은 잊으세요. 포기하세요.
그 중간 과정이 바로 우리들의 타고난 육신입니다. 육신은 항상 중간 과정 거기에 집착해서 철두철미한 과정을 밟아서 그 결과로 천국에 입성하려는 노림수를 갖고 있어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성전의 그 깨끗함은 그냥 깨끗함이 아니고 인간을 대신해서 희생 제물을 번제단에서 홀라당 다 태우게 되는 겁니다.
오늘 열왕기상 8장에 나오는 그 단이 무슨 단이냐? 번제단이에요. 주의 단이 번제단입니다. 번제단에 가게 되면 거기서 누가 죽어요. 죽음의 현장이에요. 번제단에서 제물이 죽게 되면 둘로 나뉘어져요. 연기와 그리고 재로. 재는 가루죠. 연기와 가루가 결과로 남으면서 중간에 있던 그 제물의 몸체는 모든 것이 파괴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어요. 신전에서 기도하다가 성전에서의 기도를 하려면 본인이 죽고 난 뒤에 하면 된다는 거예요, 본인이 죽고 난 뒤에. 왜? 성전에는 번제단이 있으니까요. 내가 죽고 난 뒤에 하는 기도가 신약 성경에 나옵니다.
내가 죽고 난 이후에 하는 기도가 바로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거예요. 참 쉽죠? 우리가 기도할 때 심지어 식사 기도할 때 ‘예수 이름’으로 기도한다, 뭐 이렇게 하는데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 내가 죽고 난 뒤에나 할 수 있는 기도, 다시 말해서 내가 파괴되고 난 뒤에 할 수 있는 기도라면 그러면 성전에서 생산하고자 하는 그 거룩은 뭐냐?
성전에서 나를 어떻게 만드느냐? 여기 지금 있는 내가, 내가 살고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살고 있다는 것으로 바뀌는 거예요. 성전에서의 기도는, 내가 여기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으로 바뀐다. 그걸 제가 아까 쉽게 “나는 여전히 주님의 종 맞습니다.” 자기가 주의 종인 것을 확인한다, 이 말이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성도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나는 이제 죽는 게 안 무섭다.’ 이게 성도가 아니에요. ‘다른 분이 지금 내 자리에서 살고 있다.’ 이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성도의 고백입니다. “너 죽고 사는 거 뭐 누가 물어봤냐?” 괜히 죽는 게 겁나 가지고 “나는 사자 굴에 들어갈 거야. 불 속에 들어갈 거야.” 누가 물어봤어? 코로나도 무서워하면서 그딴 소리나 하고.
그러니까 신약에 있어서는 어떤 맹세도 없거든요. 왜 맹세가 없느냐 하면 신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해도 인간을 안 받아요. 왜냐하면 맹세할 자격도 없고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죽었다는 게 분명하기 때문에 그래요.
구약의 성전은 글자 그대로 성전이 있고, “야, 같이 가자. 맹세하자. 하나님이 시킨 대로 결과를 고스란히 받도록 가자.”하고 끌고 가는 그 성전이 있고 인간이 성전을 바라보면서 그 안에 들어가는 관계가 구약이에요.
그런데 신약은 성전 안에 살고 있습니다. 아예 성도는 성전 바깥에 나온 적이 없어요. 그 안에서 깨끗함이 성도의 권세고 권력이 되는 거예요. 이 깨끗하다는 것을 요한계시록 7장 14절에서는 이렇게 말하과 있습니다.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그리고 13절에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어떤 신입이 들어오니까 “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이렇게 왔느냐?” 이렇게 하니까 “그건 주께서 아십니다.”라고 하니까 14절에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 성도가 지상에 있을 때 능력을 발휘하는데 그게 8장 3절에서 5절에 보면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단 위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
제단에서 올라가는 그 향, 연기는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받는다고 되어 있어요. 성도의 기도가 권세가 있고 능력이 있는 이유가 성도의 기도빨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성도는 죽었기 때문에 그래요. 성도 본인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도 있던 자리에 주님이 살아있기 때문에, 성도라는 껍데기를 통해 주님 자신이 일하기 때문에 성도의 기도는 권세와 능력이 있어요. 왜? 깨끗하니까, 깨끗하니까 더러운 것에 대해서는 모든 힘을 발휘하게 되어 있어요.
‘성전에 가면 이 사람이 잘 못했는지 아니면 잘못 없다고 그저 거짓말을 하는지를 어떻게 알까?’ 깨끗함이 주는 권세에요. 깨끗함앞에서는 모든 더러운 것이 더러운 것으로 다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현대인한테는 교회나 성전에 갈 필요가 없죠. 왜? 마지막 자기 의미의 가치 조정은 본인이 결정하기 때문에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구약의 성전에서 기도하는 그 구약 이스라엘 자체를 망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어떤 사람을 남기느냐? 끝까지 성전의 깨끗함과 거기서 나오는 권세를 인정하는 사람들을 남기는데 그 남기는 자를 ‘남은 자’라고 이야기합니다.
로마서 9장 27절에 보면,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찌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이스라엘이 망해 가면서도 그 안에서 성전의 깨끗함을 인정하는 사람들은 계속 생산되어서 유지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남은 자’는 어떻게 남게 되는가? 그 ‘남은 자’에 대해서 로마서 11장에 5절에 보면,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그다음 6절에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이스라엘은 망해도 성전은 살아있어서 거기서 권세가 나오는데 그 권세는 뭐냐? 그 권세는 깨끗해지는 인간들, 자기 백성을 계속 생산해 내는데 그건 본인의 행위로 된 것이 아니고 성전이 살아있는 데서 계속 하얀색, 백설공주의 능력이 계속 나오니까 이 ‘남은 자’는 자기 잘남을 이야기 하는 게 아니에요, 자기 의로움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깨끗하게 하셨다. 주님의 정결함이 정결하게 하셨다.” 이거만 계속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네가 뭐 잘났는데?” “잘난 게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했다니까?” “미쳤구나. 결국 네가 미쳤구나.”하고 비웃죠. 여기 비웃는다는 이 점은 오늘날 성도가 현실 속에서 살면서 상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신전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심리적 불안 때문에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공포와 불안에 잠겨있어요. 뭐라도 안 하면 못 견딜 것 같아, 그 마음이 터질 것 같아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원하는 것은 이거예요. “터질 것 같으냐?” “예.” “터져 버려라.” 이게 하나님이 원하는 거거든요. 인간은 육신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마땅히 터져야 해요. 파괴되어야 합니다. 왜? 죽어 있는 자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불안 요소를 가지고 어떻게든 뭘 해보겠다고 하면 여기서 온 동네 악마가 다 비웃습니다. “기도하는 자세 꼬라지 봐라. 꿇어앉아서 기도해야지. 그리고 아침 다 먹고 기도하면 돼? 이런 기도 내용은 적어도 일주일 금식해야지. 일주일 안 되거든 30일 하든지, 30일 해도 안 되면 39일은 해. 40일은 주님 몫으로 남겨두고. 경건하게 39일을 해야 해.”
뭐 금식은 해도 물은 먹고, 간식도 먹고, 얼굴빛은 좋아야 하니 세 끼는 중간중간에 채우고, 뭐 어린 식으로요. 어쨌든 간에 간절히 기도하면 악마가 옆에 붙어서 계속 비웃습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은 비웃음 속에서 기도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돼요.
그런데 성전에서 기도하는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성전에서 기도하는 사람은, 우선 악마가 슬슬 비웃기 시작하죠? 시편 2편 3절에 보면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성도는 성전에서 기도할 때 중간 과정을 몰라요.
‘내가 여기서 기도한다. 기도한다. 기도한다. 내가 지금 꿇어앉아서 기도한다. 2시간째 기도한다.’ 이게 기도 내용입니까? 지금 생중계하는 거지 그게 기도 내용입니까? 자기가 기도하는 자기한테 집중하는 거지, 그게 기도에요?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마귀가 와서 기도하는 나 자신에 대해서 제대로 기도하라고 지시 내리고, 명령하고, 훈계하고, 조언하고 이렇게 하는 것은 악마의 비웃음이에요.
그런데 성전에서 기도하는 성도는 결과를 가지고 기도하는 거예요. 벌써 좀 지났다고 다 잊어버렸죠? 성전에서의 기도는 뭐냐? ‘이미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결과는 양털같이 희어진다’는 그것, 이러한 존재를 생산하는 것이 성전에서의 기도거든요.
시편 2편 3절에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마귀가 와서 기름 부은 자와 성도 사이를 끊고자 할 때 4절에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라고 되어 있어요. 성전에서의 기도의 특징은, 지금 주님께서 자체적으로 노력하는 모든 인간의 노력을 비웃는다는 그 사실을 느끼는 것을 성전에서 기도할 때 응답으로 받게 되는 겁니다. ‘아, 주님께서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을 비웃는구나.’
여러분,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게 무슨 뜻인지 잘 모르시겠죠? 열왕기하 5장 17-18절, 이게 나아만 장군 이야기인데 제가 그냥 쭉 한번 읽어 볼게요. 읽어 보면 무슨 뜻인지 여러분 아십니다. “나아만이 가로되 그러면 청컨대 노새 두 바리에 실을 흙을 당신의 종에게 주소서 이제부터는 종이 번제든지 다른 제든지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 오직 한가지 일이 있사오니 여호와께서 당신의 종을 사유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곧 내 주인께서 림몬의 당에 들어가 거기서 숭배하며 내 손을 의지하시매 내가 림몬의 당에서 몸을 굽히오니 내가 림몬의 당에서 몸을 굽힐 때에 여호와께서 이 일에 대하여 당신의 종을 사유하시기를 원하나이다.”
나아만 장군의 하나의 장관이잖아요. 자기 주인이 있단 말이죠. 자가 위에 왕이 있잖아요, 아람 왕입니다. 그 아람 왕이 자기 손을 의지해서 림몬이라는 우상 신전에서 예배할 때 자기가 안 갈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 림몬 신당에서 림몬 신을 외치면서 기도할 때 ‘내가 림몬 신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께 기도하는 것으로 이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는 내용이에요.
그럴 때 엘리사가 하나님께 받은 응답은 이렇습니다. 19절 “엘리사가 가로되 너는 평안히 가라.” 너는 평안히 가라. 결과입니다. ‘어느 절에 가든지, 알라신을 믿든지 뭘 믿든지 나는 모르겠고 너는 결과만 챙기고 편안히 살아라.’ 이 말이에요. 이게 성전의 효과에요. 이게 성전의 효과입니다.
‘내가 지금 꿇어앉았는지 두 손을 모았는지, 깍지를 끼고 하느냐, 지금 40일째 금식하느냐, 아침에 금식을 했는지 안 했는지 모르겠어, 혹시 간식 먹지는 않았나?’ 이런 거, 중간 과정에 개입되어 있는 나 자신의 행동을 주시하면서 이것을 통해 내가 응답받을지 안 받을지를 내가 결정하는 이런 것은 다 신전에서 하는 기도에요.
이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남은 자’가 아닙니다. 자기가 자기를 생산하려고 하는 그것은 오만이고 그걸 보고 누가 비웃겠습니까? 동네 귀신 다 달라붙어서 비웃고 있습니다. 하하하…, 웃고 난리고 뭐 조언하고 “기도 그렇게 하면 안 돼. 자세 똑바로 해야지.” 이런 식으로 참견 막 들어오고 이래요.
기차 밖에서 기차를 보는 것과 기차 안에서 기차를 느끼는 건 다릅니다. 신약의 성도는 성전 안에서 날마다 자기가 죽고 주님이 내 안에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거예요. 그것이 신약 히브리서 13장에 나옵니다. 이 말씀 하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마친다고 해놓고 또 몇 분 갈지 모르겠습니다.
히브리서 13장 10-15절까지 좀 길죠. 제가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그 위에 있는 제물은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이 이 제단에서 먹을 권이 없나니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10-11절)
제가 아까 이야기 했죠. 죽음이 뭐냐? 연기와 재 두 개로 구분되죠. 제사장이 제단에서 먹을 권이 없다, 속죄 제물은 먹을 권한이 없다는 거죠. 그냥 피만 흘릴 뿐이죠. 그 피는 제사장이 가져가고 나머지 피 빼고 육체는 쓰레기장에 가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도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 말고, 구약 때 가짜 성전 말고 주님 자체가 움직이는 성전이 되어서 예루살렘 성전과 구분되게 진짜 마지막 성전은 나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 바깥으로 빠져나와서 죽는 십자가가 그게 바로 번제단이고 모든 성전의 완성이에요.
인간들이 살고 있는 성문 바깥으로 나와서 고난을 받으셨잖아요. 13절에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그러니까 주님께서 내 내장을, 내장이고 육체고 다 홀라당 갖고 튀었단 말이죠. 어디로? 쓰레기장으로. 주님이 죽는 그 자리, 그 자리에서 만나자는 그 말입니다.
성전 자체가 꼭 잠수함 같아요. 물 밑에 있는 물체가 잠수함이잖아요. 물 밑의 물체가 삭~ 하고 올라오게 되면 그동안 물 위에 있던 물들이 사방으로 쓸려 나가고 그 물체만 우뚝 솟아오르죠. 그리스도의 성도한테는요, 날마다 그 마음에 잠수함 같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삭~ 올라오면 ‘그동안 내가 아침에 뭘 먹었고, 오늘은 딸기를 먹었고, 아침에 기도하고, 성경 몇 장 읽고, 내가 전도를 몇 명 하고, 그동안 어떻게 설교했고…’ 이런 게 전 부 다 쓸려내려 가는 거예요.
그딴 게 천국에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지금 중요한 것은 내가 여기 있지 않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있다는 게 중요하죠. 그래서 신약의 성도는 성도 자체가 성전이에요. 주님과 함께 있는 성전이에요. 삭~ 솟구쳐 올라오니까요. 14-15절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성도는 우리 안에서 주홍같이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했던 그 결과로 발생된, 그래서 그 결과가 하얗잖아요. 그 결과를 알고, 그렇게 되면 이미 성도는 죽은 자예요. 깨끗하게 되었다는 자체가, 백설공주 되었다는 그 자체가 이미 죽은 자예요.
나는 죽고 죽은 자로 뭘 보느냐? 이 땅에 육신을 가지고 그동안 내가 죄라고 한 그것도 내가 몰랐던 죄고, 이미 죽고 난 후에 다시 보니 죄 아닌 게 하나도 없는, 다 벌건 죄뿐이었다는 사실, 그걸 알고 그 간격에서 찬미의 제사를 드리는 겁니다.
“주여! 우리의 능력이 아니고, 우리의 재주도 아니고, 주께서 깨끗한 자기 백성을 스스로 생산하는 주님의 일이었습니다.”라는 것, “오직 주님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것을 찬미의 제사로 주님을 증거하는 것, 이게 오늘날 성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기도가 이미 죽은 자로서 우리 속에 주님이 내뱉는 기도가 되게 하옵소서. 중간 과정을 모두 죄로 알게 해주시고 결과는 하나님의 의가 됨을, 그 놀라운 일이 주님이 하신 십자가의 공로뿐인 것을, ‘남은 자’ 입장에서 찬미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