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궁전
2025년 2월 5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7:1
(7:1) 솔로몬이 자기의 궁을 십삼 년 동안 건축하여 그 전부를 준공하니라
솔로몬이 궁을 짓는 것은 솔로몬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 다윗의 유지의 일부 작업입니다. 아버지 다윗의 유지는 ‘하나님의 집’을 짓는 겁니다. 솔로몬은 이 성전을 먼저 짓고 그 다음에 왕의 궁을 13년 동안 지었습니다. 성전과는 딴 건물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따지고 보면 성전의 부속건물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솔로몬은 매사가 철저하게 아버지 다윗에 종속적입니다. 이는 곧 ‘다윗에게 내린 하나님의 약속’에 종속적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솔로몬은 다윗의 하나님으로부터 보호도 받고 지배를 받기를 원했습니다. 이 원칙은 잠언 25:2의 말씀의 구현입니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
즉 솔로몬이 앉아 있는 자는 일반적인 ‘왕의 자리’가 아니라 ‘다윗의 언약’의 자리입니다. 따라서 ‘다윗의 언약’에서 이탈되면 성전은 사라지고 궁도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솔로몬의 왕궁의 자리보다 성전의 존재가 우선입니다. 그것은 솔로몬이 ‘다윗 언약’ 곧 성전의 보호와 지배를 받는 것처럼 백성들도 자기처럼 자신의 보호와 지배를 받기를 원합니다.
사실 백성들은 자기네들은 집에 살지만 왕은 대단히 화려하고 아름다운 왕궁에 살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그 대단한 왕에서부터 보호와 지배를 받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이렇게 표현해도 됩니다. ‘인간의 신체는 건축을 통해서 자신의 뜻이 확장되기를 원한다’ 인간 신체의 포부는 눈에 보이는 건축 행위로 가시화되기를 원합니다.
왕은 백성들에게 있어 자신의 안녕과 안정을 보장책이기를 기대합니다. 곧 백성들은 자신의 권리를 양도하고 그 양보받은 왕이 하나님으로부터 대단한 복을 누린다면 이 복은 곧 백성들의 번영으로 이어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비록 백성들 개개인의 집이 솔로몬이 왕궁처럼 화려하지 않더라도 백성들은 솔로몬 같은 영광에 대해서 기꺼이 인정할 마음이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들의 본성은 안정적이고 대단한 건축물을 통해서 자신의 양심을 드러냈다면 하나님께서는 건축물을 통해서 자신을 뜻을 드러내시는 데 그것이 바로 성전과 왕의 궁궐입니다. ‘화려한 궁궐’의 영광이 천국에 해당된다면 상시적으로 무서운 불이 피워있는 성전은 지옥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윗 언약에 있어 지옥같은 성전이 없는 한, 천국같은 화려한 집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약속한 ‘다윗의 자손’입니다. 하지만 일반인들은 자신의 선조가 다윗 혈통이라면 출생 자체로서 마땅히 자동적으로 ‘다윗의 자손’이라고 여길 겁니다. 하지만 이것은 옳지 않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와 규례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면 왕궁만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성전도 무너집니다. 성전 안에서 상시 피어오르는 그 저주의 불이 왕궁 및 이스라엘 전체를 불사르게 될 것입니다. 성전의 가치가 유지되는 조건 하에 이스라엘은 ‘다윗의 자손’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 ‘다윗의 언약’에 자신의 전부를 바쳐야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특혜를 받은 겁니다. 그것은 바로 ‘신체의 최종성’입니다. 인간 신체의 최종성이 두 건축물을 통해서 표현되었다면 이런 사실을 오직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해당되는 일입니다.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민족에게 있어 인간 신체의 최종성은 그저 죽음입니다.
즉 인간들이 평소에 살아가는 것은 그저 ‘죽음의 표현’이라고 보면 됩니다. 집→무덤→스올(음부:죽은 자의 집합소)→지옥이 됩니다. 요한복음 11:1에 보면,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즉 이 세상 누구나 자기 동내에서, 고향에서 평범하게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11:17에 보면,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평범하게 사는 모든 자들이 평생을 해온 일이 자기 무덤을 건축하는 겁니다. 즉 이 세상은 오로지 죽음들을 표출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죽은 지 나흘이나 되는 나사로 가정’에 주님이 찾아오시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여기서 ‘믿느냐’는 것은 ‘더는 너의 목숨을 네가 갖지 말라’는 뜻입니다. 죽어가는 내가 나를 믿어서는 아니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지옥같은 성전이 직접 움직일 때만 죽을 목숨이 영생을 얻는다는 겁니다. 역대상 21:1-2에 보면, 다윗은 사단의 시험을 받아 이스라엘의 인구를 계수합니다.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다윗이 요압과 백성의 두목에게 이르되 너희는 가서 브엘세바에서부터 단까지 이스라엘을 계수하고 돌아와서 내게 고하여 그 수효를 알게 하라”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무려 7만 명을 죽였습니다. “이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온역을 내리시매 이스라엘 백성의 죽은 자가 칠만이었더라”(대상 21:14) 그 다음의 하나님의 공격은 예루살렘입니다. 여기에 놀란 다윗은 예루살렘에다 제단을 쌓게 됩니다. “다윗이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려 여호와께 아뢰었더니 여호와께서 하늘에서부터 번제단 위에 불을 내려 응답하시고 사자를 명하시매 저가 칼을 집에 꽂았더라”(대상 21:26-
27)
이 제단에 ‘천사’도 있었고 ‘불’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성전을 기반으로 천국같은 세계를 펼쳐지게 됩니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신체적 야심을 버리지 못하고 천국을 고대합니다. 이것을 저지하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성전으로서 움직여서 찾아오십니다. 즉 ‘죽음을 네가 처리하려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마치 핀이 뽑힌 수류탄을 계속 평생 쥐고 있는 것처럼 어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찾아오십니다. “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요 14:1-2)
최종 하나님의 집이 바로 ‘성전+다윗의 자손으로서의 궁’입니다. “왕이 나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우리가 너를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에서 지남이라 처녀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니라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아 1:4-5)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 것도 아닌 죄인의 목숨을 찾으려 오신 분에게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6강-열왕기상 7장 1절(최종 궁전) 250205-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 열왕기상 7장 1절입니다.
열왕기상 7:1
“솔로몬이 자기의 궁을 십삼년 동안 건축하여 그 전부를 준공하니라.”
성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이 자기 궁전을 새로 지었는데, 이 궁이 성전의 부속 건물이라고 보시면 돼요. 성전은 제사장이 가는 곳이고, 그 성전과 백성들 사이 중간에 있는 장소에 솔로몬의 궁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모리아 산이 있는데 그 위쪽에는 성전이 있고 그 아래쪽에 한 500m쯤 내려오게 되면 다윗의 거주지, 나중에 솔로몬의 성전이 있던 그 장소가 됩니다. 좀 더 내려오면 실로암 연못이 나오고요. 예루살렘에 가본 사람들은 봤겠지요, 성전 있는 곳과 다윗이 살던 곳이 좀 떨어져 있어요. 거기에 솔로몬 궁을 13년 동안 짓게 되었습니다.
성전 짓는 게 왜 그렇게 오래 걸리는가? 그것은 아버지 다윗이 성전 짓는 자재는 다 준비 했지만 궁을 지을 때는 새로 시작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준비하는 기간까지 합해서 13년 걸렸습니다. 이 성전은 단 한 채지만 궁은 총 네 채로 되어 있어요. 제일 먼저 지은 것이 벽이 없는 집을 지었습니다.
■45개의 회랑으로 되어 있는, 벽이 없어요, 기둥으로, 주랑으로 되어 있는 집을 지었습니다. 2절에 보면 “저가 레바논 나무로 궁을 지었으니”라고 해서 이 궁은 솔로몬이 사는 곳은 아닙니다. 역대하에 9장 16절에 보면 레바논 나무로 만든 그 궁은 무기 같은 것 또는 궁에 필요한 여러 가지 창고 역할을 위하여 만들어졌습니다. “또 쳐서 늘인 금으로 작은 방패 삼백을 만들었으니 매 방패에 든 금이 삼백 세겔이라 왕이 이것들을 레바논나무 궁에 두었더라.”
그런데 그런 무기가 들어있다, 여러 가지 방패도 거기 담겨있다고 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성전은 폐쇄적인데 궁은 개방적이라는 것, 벽이 없으니까 개방적입니다. 또 하나 개방적인 것이 있는데 뭘 만들었느냐? 재판하는 자리를 만들어요. 재판정을 만들어요. 그게 7절에 나옵니다. “또 심판하기 위하여 보좌의 낭실 곧 재판하는 낭실을 짓고”
첫 번째는 방패 같은 것이 있는 무기고, 벽으로 되어 있지 않고 개방형으로 되어 있고, ■두 번째는 바로 재판정, 역시 백성과 왕이 만나는 그곳을 짓습니다. 그게 두 번째고, ■세 번째는 8절에 솔로몬 자기의 거처, 침실이라든지 하는 자기 거처를 짓고 ■네 번째가 뭐냐? 솔로몬이 결혼을 했잖아요? 장가든 바로의 딸, 애굽의 공주를 부인으로 맞이했으니까 안채, 내실을 또 만들었어요. 그렇게 총 네 채를 합해서 궁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솔로몬이 존재하는 이유가, 자기가 궁궐에 들어가 살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성전에 하나님이 계시니까 그 성전의 부속 건물로서 궁을 지은 겁니다. 인간들이 성전의 보호 아래, 또는 성전의 지배 아래서, 하나님의 지배 아래서 사는 대상이 바로 눈에 보이는 나라 이스라엘인데 그 이스라엘 나라를 둘로 나눈 겁니다. 왕이 있는 거처와 일반 평민들이 사는 거처를 따로 구분하는 겁니다.
그렇게 구분하는 이유는, 솔로몬이 단독으로 하나님의 보호와 하나님의 지배를 같이 받아요. 그 보호와 지배를 받는 그 관계성과 동일하게 일반 백성들이 솔로몬의 보호와 지배를 받는 그것이 똑같은 관계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성전, 궁, 백성(평민)들의 집단 지역, 이렇게 구분됩니다. 그리고 성전과 궁은 한 울타리에, 한 성벽 안에 같이 합채되어 있습니다.
잠언서 25장 2절에 보면 방금 제가 설명한 것을 이렇게 간단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 하나님은 숨어버림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이고, 그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 왕의 일인 동시에 바로 하나님의 일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일과 백성들에게 나타낼 왕의 일을 한 공간에서 같이 결합을 시키겠다, 그것이 하나님이 다윗에게, 솔로몬의 아버지에게 준 약속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것, 그리고 어떤 뜻을 갖고 있다는 것을 다윗 자손을 통해서 나타내겠다, 이걸 다윗의 언약, 다윗의 약속이라 하죠. 다윗의 자손을 통해 하나님께서 집을 만들겠다고 했잖아요. 하나님의 뜻은 성전과 궁을 합쳐야 표현된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왕?)의 궁은 그야말로 화려하게 백향목으로 지었어요, 오늘 본문에 보면. 이건 이 세상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보면 되겠죠. 그러면 천국이죠, 천국. 그러면 성전은 뭐냐? 성전은 저주의 불이 항시적으로 타오르는데요, 심판의 불이 타오르죠. 그러니까 이건 지옥입니다. 원래 인간들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 천국, 지상의 이곳은 지옥, 이러한 위치를 예루살렘 내부에서는 그걸 뒤바꿔 버리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만든 지옥을 통해서만 비로소 너희들이 천국을 맛볼 수 있다.’ 그런 뜻입니다. ‘지옥을 벗어나면 천국이 있다.’가 아니라 먼저 지옥이 있고, 그 지옥을 받아들인 사람에 한해서 하나님의 영광, 천국의 아름다운 세계, 솔로몬의 궁처럼 백향목으로 지어진 그 아름다운 주님의 영광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는 거죠.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성전과 궁의 위치 두 개를 같이 조합하고 결합했느냐?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잖아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은 장차 예수님이 말씀이 육신으로 온다는 거예요. 육신이라는 것은 신체성입니다. 말씀이 신체를 가지고, 하나님이 신체를 가지고 오시는 거예요. ‘말씀’이란 요한복음 1장에 보면 하나님 자신을 두고 말씀이라 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1절)
하나님이 신체를 가지고 자기를 드러내는 그 미래에, 솔로몬 입장에서 미래죠, 그 미래에 마지막 때 일을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 뭘 이용해 표현하느냐? 인간의 신체는 항상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식으로 확장시켜 나간다는 인간의 그 본성을 근거로 해서 하는 겁니다. 자기의 신체성을 드러내는 것, 인간이 신체를 통해서 갖고 있던 모든 뜻과 포부 같은 게 있죠?
그걸 인간들은 어떻게 나타내느냐? 눈에 보이는 건축을 통해서 그걸 드러내요. 뭘 만들고 건축하면서. 그게 다니엘 2장에 보면 느부갓네살이 갖고 있던 모든 꿈과 이상이 신상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자신의 속에 들어있는 뜻이 바깥으로, 건축물 모습으로, 신상이라는 건축물 모습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창세기 11장의 바벨탑도 마찬가지예요. 바벨탑도 인간의 뜻을 모아모아 놨는데 덜렁 나타나는 것은 뭐냐? “탑을 쌓자.” 왜? “우리가 만든 건축물 안에 하나님도 포섭을 하고 그래서 노아 홍수 같은 흩어짐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면하자.” 이래서 그들은 바벨탑을 쌓은 겁니다.
어쨌든 간에 인간이 자기 자신 속에 숨어있는 뜻을 건축물을 통해서,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건축을 통해 드러냈다면 하나님께선 인간들의 그 방식을 그대로 사용을 하십니다. ‘너희들만 자기 속뜻을 건축물로 드러내? 나도 내 뜻을 건축물로 드러낼 거야.’ 그 두 가지 건축이 하나는 성전이고 하나는 궁이었습니다.
이 성전과 궁이 그렇게 건축물로 드러나게 된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인간 다윗에게 자기 약속을 전달하면서 약속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건축물을 사용해서 그렇습니다. 다윗이 먼저 하나님을 위해서 내 속뜻, 다시 말해서 어떤 성전이라는 건축물을 통해서 “하나님을 모셔드리겠습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이렇게 된 거예요.
하나님께서 “나를 위한 건축물 그런 건 필요 없고 내가 친히 너희를 건축할게.” 그렇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친히 다윗에게 하나님의 뜻을 담아서 건축하겠다는 것이 뭐냐 하면, 다윗의 자손, 다윗의 가문이었습니다. 여기서 어려운 것이 뭐냐? 하나님이 약속한 것은 다윗의 가문이에요. 가문은 신체와 신체가 만나서 자식을 낳는 게 가문이잖아요.
하나님이 친히 다윗의 가문을 만들겠다는 것은, “우리가 본래 아브라함 자손이고, 다윗의 자손이 평범한 여인을 만나서 애를 낳고 가정을 꾸몄으니까 우리는 신체적으로 다윗의 가문, 유다 가문에 속한 것이 맞다.”라는 그 주장을 배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배제하기 위해서였어요.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의 신체는 아까 제가 이야기했듯이, 보호 받기를 원해요. “나를 보호해 준다면 왕이시여, 내 위에 군림해도 저는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나를 보호한다면 내 위에서 권력을 가지고 군림해도 흔쾌히 저는 수용하겠습니다.” 그게 계엄이고 그게 대통령 바꿔라, 그런 이야기죠.
그렇게 나보다 더 위대한 왕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 움직이는 왕이 나를 보호한다면 우리에게 남는 게 뭐냐? 내 신체의 최종성은 왕으로부터 보호받는 것 자체가 왕 배후에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보호받을 수 있다는 그러한 아이디어가 발생되는 겁니다.
그러면 남는 것은 뭐냐? 우리 집안 잘 되는 거죠. 내 신체가 눈에 보이는 왕으로부터 보호받고, 왕 배후에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보호받으면 우리의 가문, 우리의 집안은 잘될 것이다, 이거? 다윗의 자손 아닙니다. 다윗의 자손 아니에요. 인간들은, 왕이 사는 궁궐이 얼마나 화려하냐에 대해 일체 말을 안 해요. 왜냐? 왕은 자기의 대표물이기 때문에, 자기 신체의 대표적 신체기 때문에요.
솔로몬이 궁궐 지어서 산다. 그러면 백성들이 “너만 인간이고 우리는 인간이 아니냐?” 이렇게 나오지를 않아요. 왜? 모든 권리를 왕에게 양도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도리어 왕이 잘먹고 잘살면 비록 우리 가정이 어렵더라도 행복해요. 우리가 사는 곳은 집이고 임금이 사는 곳은 궁입니다. 내 집이 나의 최종성이 되기 싫은 거예요, 최종성.
내가 모든 걸 양도한 왕의 궁이 화려하고, 아름답고, 천국 같다면 그걸로 족합니다. 인간의 건축성이, 인간 자기가 품고 있는 이 포부가, 나를 대신한 분이 화려한 궁에, 집에 산다면 곧 내가 그 집에 사는 안도감과 평정심을 얻을 수 있는 거예요.
그걸 달리 말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최종성이라는 것…. 우리는 임금 하나 잘 만나서 잘 먹고 잘산다, 솔로몬 시대에 이구동성으로 솔로몬에 대해서 대단하게 여깁니다. ‘왕 하나 잘 만나서 우리는 하늘의 복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다윗의 자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하는 것은 뭐냐? “너의 모든 것을 솔로몬에게 일임하라.”가 아니라, 잘 들으셔야 돼요, “솔로몬 시대에 사는 인간들아. 너의 모든 것을 솔로몬에게 일임하라.” 그게 아니고 ‘다윗의 자손에게 일임하라’는 거예요.
사람들은 ‘솔로몬이 다윗의 자손이니까 솔로몬에게 인계하나 다윗의 자손에게 인계하나 같은 것이 아니냐?’라고 생각하는데 같은 것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솔로몬이 그 왕궁에 살지만 솔로몬이 무너지면 왕궁도 무너지고, 성전도 무너지고,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다 같이 무너져요. 무너지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의 계명과 율례와 법도를 지키지 않으면 다윗 자손, 자격에서 박탈당합니다, 박탈당해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성전 안에는 항시적으로 불이 피워져 있어요. 저주의 불입니다. 흠 없는 제물을 태워 죽이는, 제단에서 피우는 그 불이에요. 그러나 궁에는 불이 없어요. 나중에 솔로몬 궁에 불이 났을 때는 어떤 경우냐? 하나님의 그 자비와 용서는 하나님의 약속이 유지될 때 계속 지켜지는데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백성들이 그걸 거부할 때 성전도 불타 버리고 왕궁도 불타 버립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우리는 아브라함 자손이야. 유다 백성이야. 그러니까 당연히 우리는 다윗의 가문이 맞아.’라는 것은 통하지 않습니다. 통하지 않아요.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지금까지 한 것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인간 신체의 최종성을 미리 맛보여 주는 특혜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었습니다.
인간이 계속해서 자기 신체를 가지고 ‘나의 마지막은 어떨까? 나의 최종 모습은 어떻게 될까? 나의 끝장은 어디까지 나갈 수 있을까?’ 그것을 사람들은 궁금해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을 통해서 “옛다! 천국이 너의 것이야, 너의 최종성이야.”라고 허락할 때 백성들은 얼마나 기분이 좋았겠습니까? ‘이야! 이 세상에 솔로몬만 한 왕이 없었다. 하나님이 친히 세우신 왕이니까 우리의 최종성, 우리의 마지막 모습이 저 왕의 영광, 저 왕의 궁궐의 영광이 곧 우리들 전부의 영광이야.’ 얼마나 만족했겠습니까.
그러한 만족, 개인적인 신체의 연장과 연결의 최종성이 천국에 이른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나 그들이 기대했던 영광이 하루아침에 날아가는 것은……, 그 왕궁에 있는 자리, 다윗의 자손들이 대대로 왕이 되거든요. 그 왕과 그리고 성전에서 요구하는 하나님의 그 뜻과 매치가 되지 않을 때 틀어질 때 성전도 불타고 왕궁도 불타 버립니다.
잠언서 25장 2절 다시 읽어보면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뜻이 그대로 왕에게 제대로 인수인계 되어서 그때그때 지시에 따라야 합니다. 그게 율례와 법도거든요. 그게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약속대로 다윗의 자손만 살리지 그 외에는 다윗의 자손으로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그런 조건하에 왕궁과 성전을 만든 거예요. 먼저 인간 신체의 최종성, 우리들은 육신이 있잖아요, 육신의 최종성에 대해서 특혜를 줘서 성전과 왕궁이라는 두 개의 건물의 조합과 결합으로 하나님의 뜻을 표현해 줬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야 할 것은 뭐냐?
그것은, 자신의 목숨을 자기가 갖고 있으면 안 되죠. 누구한테 넘겨줘야 하죠. 이게 특혜에요. 이게 이스라엘의 특혜에요. 다른 이방 민족에게는 넘겨줄 게 없어요. 신을 자기 맘대로 골라 먹는 재미가 있잖아요. 신을 자기 맘대로 골라 먹는 것한테는 역시 자기 신체가 잘 되어서 잘 먹고 잘사는 것 그게 신체의 최종성이죠.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는 미리 최종성, 끝을, 특혜로서 미리 보여줬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의 목숨을 자기가 쥐고 있으면 안 되고 넘겨줘야 돼요. 누구한테? 다윗의 자손, 다윗의 언약, 약속에다가 넘겨줘야죠. 다윗에게 준 그 약속에게 넘겨줘야죠.
이게 성경, 특히 열왕기상의 성전과 관련해서 그리고 왕궁과 관련해서 오늘날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건 그겁니다. “아직도 네 목숨을 네가 갖고 다니느냐? 여러분 수류탄을, 고리를 뽑았는데 언제까지 갖고 다닐 거예요? 미국 이민 간다고 안 터집니까? 캐나다 이민 간다고 안 터져요? 우리의 목숨은 “어머나!” 하고 빨리 누구한테 넘겨줘야 돼요? 주님한테 빨리 넘겨주라는 거예요. 왜? 주님이 최종성이니까요.
최종성이라는 말은 뭐냐? 지옥 같은 성전과 천국 같은 왕궁이 나중에 최종 하나가 돼요. 말씀이 육신이 되면 이게 하나가 된다고요. 예수님의 신체성의 최종성은 말씀의 세계, ‘다 이루었다.’ 말씀이 완성된 세계가 바로 성전과 왕궁의 결합체입니다. 최종 결합체에요.
예수님께서 복음을 이야기하고 사도가 복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네 목숨을 네가 들고 다니지 말라는 거예요. “왜 자꾸 너를 믿어? 너 목숨 있지? 빨리 넘겨. 터지기 전에.” 주님한테 넘기라, 이 말이죠. 그런데 사람들이 주님한테 안 넘겨요. 왜? 주님 몰골을 보니까 꼭 지옥 같으니까. 만약에 우리가 주님같이 되면 ‘아, 안 돼. 그건 끔찍한 현실이야. 싫어. 나 주님한테 안 넘길 거야.’
갖고 있어도 터지는데요? 주님께 넘기는 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주 하나님을, 주 예수님을 내가 믿습니다.’라는 뜻이에요.’ 이게 내가 나를 믿다가 이제는 ‘내가 믿는 이 목숨을 주님한테 인계해 드리겠습니다. 난 이제 나 안 믿습니다. 그동안 나 믿는다고 되게 부담 됐는데 더는 내 목숨을 내가 가지고 다니지 않겠습니다.’ 후딱 그냥 주님한테 넘기는 거예요.
왕한테는 궁이 있잖아요. 인간에게는 집이 있습니다, 평민들에게 백성들에겐. 인간에게 집이 있는데 그 집이 나를 보호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보호는요, 자연에서의 보호는 집이 되는데 위에서 억누르고 있는 그러한 권력으로부터는 집이 보호가 안 돼요. 만약에 왕의 병사들이 와서 “야, 여기 도로 낼 거라서 그 집 뜯을 거야.” 40년 정든 고향이고 뭐 부모님의 터전이고…, “치워라.” 고속도로 그냥 뚫어버립니다. 더 센 집에서 사는 존재가 나약한 하나의 평민이 사는 집을 그냥 뜯어버려요.
어제 제가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백년 전에 일본 사람들이 살던 흑백 사진을 봤어요. 백 년 전 일본의 흑백 사진을 보니까 인간들은 각시대마다 죽어가는 모습을 보여줘요. 일본 그 옛날 복장 있잖아요, 막 밭일하고 돌아온 일가족 사진 찰칵! 이런 거. 옛날에 잘 못 살 때 어린 소녀들의 기생 복장의 사진, 외국 선교사들이나 외국 사람들이 찍은 사진들이에요. 그 한 컷 한 컷이 뭐냐 하면 그냥 죽음을 품고 살아가는 모습이에요, 죽음을 품고 사는 모습.
그게 백년 전이라고 했는데 지금의 우리가 다른 사람의 스냅사진을 찍을 때 그 모습도 뭐냐? 죽어가는 모습이에요. 죽음을 표현하는 모습이에요. 죽어가면서도 자기 목숨을 던질 데가 없어요. 넘겨줄 데가 없어요. 왜? 최종성이 아니니까. 넘겨줬다가 부도나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주님의 성전, 그 주님의 성전을 모든 인류의 최종성으로 보고 그 성전을 미리 앞당겨서 이스라엘에게 특혜로 주면서 “이 성전에 네 목숨을 던져라.” 그러면 백성들이 “누구처럼요?” “솔로몬처럼. 솔로몬 봐, 성전 옆에서 살잖아. 성전의 부속 건물이잖아.”
성전은 밀폐되어 있지만 궁은 개방되어 있어서 언제든지 재판하고 싶은 사람은 그 앞에 재판정에 나설 수가 있어요. 궁은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의 중간, 성전은 벽으로 되어 있으니까, 밀폐, 폐쇄되어 있으니까, 그거에 비해서 왕이 사는 궁전은 어떤 유도리가 있는 거예요. 여지가 있어요. 백성들을 만날 수 있는 여지가 되어 있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 개인적인 집은 뭐가 되느냐? 무덤이 돼요. 결국 갖고 있을 수가 없으니까. 구약에서는 집은 무덤이 된다, 인간은 자기 무덤을 평생토록 건축했다는 거예요. 인간은 평생토록 자기 무덤을 건축한 거예요. “아파트, 아파트!” 그게 뭐냐? 자기 무덤이에요. 그다음에 무덤이 구약에서는 스올, 음부가 돼요, 죽은 사람 집합소.
음부가 신약에 오면 지옥이 돼요. 갇혔다는 거예요. “처음부터 너희는 천국과 상관없이 지옥에 갇혀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요한복음 11장에 적절한 예가 나오는데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1절에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백년 전 일본의 촌에 살던 그들이 그때의 옷차림 가지고 사는 것처럼 요한복음 11장 1절에 베다니에 나사로, 마리아, 마르다가 그렇게 남매간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11장 17절에 보면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그들이 베나디에 산 건 맞는데 그 나사로가 마르다 오빠 나사로가 죽어서 어디 갔느냐? 무덤에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이 자기 집에 산다는 것은, 자기 동네에 산다는 것은 곧 자기 무덤을 그동안 건축해 왔다는 거예요, 평생동안.
그다음에 여러분 아시다시피 요한복음 11장에서 주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 11:25-26)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아직도 안 죽고 있는 마르다 보고 이야기했거든요.
이게 뭐냐? Toss! “넘겨라.”에요, 넘겨라. 축구공도 제대로 못 차면서 옆에 손흥민이 있는데 자기가 왜 드리블을 하고 난리입니까, 손흥민이 있는데. 손흥민이라고 혹시 알아요? 빨리 공을 그 손흥민한테 넘겨야 하지 않습니까? 자기가 몰고 가면 자살골이죠. 70m 드리블해서 자살골. 어떤 사람은 100살까지 드리블하는 사람 있어요. “빨리 넘겨, 빨리 넘겨. 혼자서 뭘 해보겠다고 하지 말고. 지금 수류탄 그걸 왜 쥐고 있어, 빨리 넘기라니까, 넘겨라!”
우리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에요. 왜? 우리는 최종성을 몰라요. 백년 전 일본 사람 그 모습처럼 그냥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죽는 모습, 죽음을 표현하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살다가 어디 가겠지.’ 최종성을 몰라요, 최종성! 마지막을 몰라요. 그런데 주님은 성전 있고, 왕 있고, 다시 말해서 천국 있고 지옥 있고, 예루살렘이라는 한 장소에서 최종성을 다 표현한 겁니다.
역대상 21장에 보면 이런 내용 나와요. 다윗이 사탄의 미혹을 받아서 인구 조사를 하는데 단, 제일 꼭대기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인구 조사했다가 그때 7만 명 죽었어요,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신의주에서 제주도까지 7만 명 죽었거든요. 그다음에 하나님의 천사가 어디를 공격하느냐?
이제 남아있는 게 서울이에요, 예루살렘. 7만 명 죽이고 그다음에 다 죽이는 목표가 예루살렘이에요. 다윗이 놀라서 예루살렘 여부스 땅에다 뭘 했느냐? 제단을 세웠습니다. 제단을 세웠는데 역대상 21장 14절에 보면 7만 명 죽고요, 그다음 26절에 보면 “다윗이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려 여호와께 아뢰었더니 여호와께서 하늘에서부터 번제단 위에 불을 내려 응답하시고 사자를 명하시매 저가 칼을 집에 꽂았더라.”라고 되어 있죠.
하나님이 사탄에 속한 이 세상을 다 죽이라고 하는데 그것을 미리 알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다윗을 통한 특혜를 베푸는 거예요. 최종성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이 최종적으로 무슨 뜻인지를 특별히 다윗에게 특혜로 알려줘서 다윗이 후다닥 예루살렘에 제단을 세웠더니만 그 제단에 뭐가 왔느냐? 불이 내려왔죠? 그다음에 사자가, 하나님의 천사가 내려왔잖아요. 그 불과 사자가 다 있는 곳이 어딥니까? 바로 성전이잖아요, 솔로몬 성전.
제단에 불 있죠? 언약궤 있는 데에 천사 있죠? 이게 최종성 아니고 뭡니까? 하나님께 있는 그 최종성의 그 가치와 의미가 존속하면 백성들은 뭐냐? 솔로몬이 영광스럽게 살아가는 그 왕궁의 천국이 백성들의 몫이 되는 거예요. 주님이 나사로에게 “나는 부활이고 생명이다.”라는 말은, 바로 나사로가 죽어서 무덤에 들어간지 나흘이 되었던 그때 하신 말씀이에요.
“그때는 나사로에게나 그런 말씀 했잖아요.” 하는데 그러지 말고 요한복음 11장에 나사로에게 한 말을 하나님이 특혜를 베풀어서 지금 여기 앉아있는 저와 여러분에게 마지막 최종성의 모습을 이야기 해주는 거예요. 그게 요한‘복음!’이잖아요, 요한‘복음!’
이왕에 요한‘복음’이 나왔으니까 요한‘복음’에 대해서 한 구절 더 찾아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절이요. 이 땅에서 최종성을 아는 사람은 없어요. 그냥 백년 전 일본 사람처럼 밭 일하다가, 밥먹고 살다가 나중에 늙으면 죽고 끝나는 거예요. 자기 신체의 최종성이 어떻게 쓰이는가를 몰라요.
그런데 요한복음 14장 1절에 보면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라고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욥을 시험할 때 욥의 신체와 욥의 마음을 강제로 분리시키는 시험을 한 거예요. 욥의 자기 신체는 자기가 지금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요. 완전히 뭉개졌어요. 말기 암보다 더한 거예요.
그런데 욥의 마음은 쌩쌩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육체와 마음을 확 떼 가지고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신체가 죽더라도 근심하지 말라, 걱정하지 말라, 또 나를 믿어라.’ 나를 믿으라는 것은 나한테 네 마음을 “엄마야!”하고 그냥 인수인계해 버려라, 그러면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이 집이 다윗의 자손들만 갈 수 있는 집이에요, 다윗 자손들만 갈 수 있는 집. 육신이 있다고 다윗 자손들이 아니거든요. 그러면 육신이 있는데 육신만 있어서 다윗 자손이 안 된다면 육신 가지고 다윗 자손으로 어떻게 들어갈 수가 있느냐?
누가복음 19장 5절에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성전과 왕궁이 하나로 결합되는데 지금 솔로몬이 궁을 잘 지었으니까 사람들이 어디에서 멈추느냐 하면요, 성전보다 솔로몬 궁의 화려함에 거기 반했고, 거기에 자기 마음도 느긋하게 거기서 멈추는 거예요.
솔로몬의 자기 궁은 성전의 부속 건물이에요. 자기가 궁에서 “하나님 고맙습니다. 잘 먹고 잘살게요.” 이게 아니라 항상 어디의 보호를 받고 어디에 지배를 받느냐 하면 성전에서 벌어지는 일의 보호를 받고 지배를 받아야 돼요. 백성들이 ‘솔로몬이 잘 먹고 잘산다.’ 여기에서 스톱, 하면 안 된다고요. 성전까지 나아가야 돼요.
그런데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솔로몬의 궁, 거기에 멈추고 성전에 대해서는 생각을 못 해요. 그래서 주님께서 먼저 성전이, 궁 안에 있는 자기 백성을 찾아와서 골라서 잡아가는 방식으로 구원을 해내는 겁니다. 그런데 그 성전에 아버지께 저주받은 몰골로 온 예수님을 가롯 유다가 안 믿었거든요. 열두 제자 다 안 믿고, 백성들도 안 믿었어요.
왜? 초라해도 너무 초라했기 때문에, 너무 초라한 모습이에요. 베드로가 걱정 안 할 수가 없었어요. ‘우리가 헛다리 짚었나? 이게 뭐야? 내 인생 조졌다. 이거 끝난 거 아니야?’ 그런데 주님께서는 최종성을, “걱정하지 마라. 두려워하지 말라. 염려하지 마라. 날 믿어라.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가신 곳, 그곳이 바로 성전과 궁, 다 같이 영원히 결합이 완전하게 되어 있는 아버지의 집인 겁니다.
이것을 솔로몬이 몰랐겠습니까? 나중에 알았어요. 나중에 알아서 솔로몬이 지은 책이 있습니다. 그게 아가입니다. 아가 1장 4절에 보면 “왕이 나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우리가 너를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에서 지남이라.” 포도주보다 더 달콤하다, 이 말이죠.
“처녀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니라.” ‘처녀들아, 내가 왕궁에 같이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 너희들이 나를 칭찬해 달라, 나를 부러워해 달라.’ 그런 뜻이죠. 5절에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찌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내가 솔로몬 왕을 모신다.
그러니까 다윗 언약의 완성은 사랑이고, 일방적으로 왕이 거무튀튀한 여인 하나를 지독하게 스토킹하듯이 따라다니면서 “너는 내 여자야. 너는 내 여자야.” 집요하게 따라다니며 기어이 자기 침실로, 자기 궁으로 잡아당기는 것, 이게 바로 사랑인 거예요.
그런 노래가 있어요. “보고 싶다. 예쁜 그대 돌아오라, 나의 궁전으로.” 카더가든이 불렀던 <명동 콜링>이라는 노래에요. 자기 여자는 그동안 뭐 하고 있었는가? “바람 불면 어디론가 떠나가는 나의 조각배야.” 너는 바람 불면 자꾸 어디로 가는지 조각배처럼, 바람 후, 불면 돌아다니는 거예요. 일본 갔다가 캐나다 갔다가 바람 불면 가는 거예요. “이제 돌아와. 궁으로 돌아와, 궁으로!” “보고 싶다. 예쁜 그대 돌아오라, 나의 궁전으로.” 그 궁에, 내 집에는 거할 곳이 많다는 이게 최종성입니다. 이게 최종성이에요.
다른 노래도 비슷한 가사가 있죠. “사랑은 아름다운 꿈결처럼 고운 그대 손을 잡고 밤하늘을 날아서 궁전으로 갈 수도 있어.” 이문세의 <깊은 밤을 날아서>라는 곡의 가사에요. “어쩌면 우리의 만남은 어린아이의 노래 같아. 슬픈 동화 속에 밀려오는 구름 타고 날으는 요정처럼.”
마지막은 뭐냐? 건축이죠. 사람이 만든 건축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든 건축, 하나님의 집.
끝으로 시편 84편 읽고 마치겠습니다. 시편 84편에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여러분의 수류탄, 터지기 전에 후딱 주님한테 인수인계, 넘기세요. 그게 바로 나를 믿지 않고 이제 나 믿는 부담에서 벗어나는 나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눈에 보이는 부귀영화 거기에 매료되어서 나도 장차 저렇게 되면 얼마나 좋겠는가, 부자 되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십자가를 잊어버렸습니다. 지옥을 잊어버렸습니다. 마땅히 지옥 갈 자라는 것을 생각 못 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는 그 순서를 지킬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