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궤의 영광
2025년 2월 12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8:1-3
(8:1) 이에 솔로몬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윗 성 곧 시온에서 메어 올리고자 하여 이스라엘 장로와 모든 지파의 두목 곧 이스라엘 자손의 족장들을 예루살렘 자기에게로 소집하니
(8:2)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다 에다님월 곧 칠월 절기에 솔로몬 왕에게 모이고
(8:3) 이스라엘 장로들이 다 이르매 제사장들이 궤를 메니라
언약궤를 성전 안으로 안치하는 날 성전 깊숙한 곳에는 구름으로 가득했습니다. 거기에는 천사들이 인간들의 출입을 막는 무대가 펼쳐져 있습니다. 천사의 긴 날개가 인간들이 언약궤가 있는 곳으로 오는 것을 완벽 차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광경은 이방나라 한테는 있을 수 없는 참 특수한 경우입니다.
어떻게 평범한 땅 위에서 인간이 머물 수 있는 곳과 인간이 머물 수 없는 곳이 서로 마주보면서 양분될 수 있단 말입니까? 이것은 두 이질적인 시공간이 서로 맞닿은 겁니다. 인간들에게 익숙하고 줄곧 지내온 시간과 공간은 언약궤가 있는 저곳에는 전혀 먹히지 않습니다. 그곳에는 인간은 무조건 죽습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 3:24) 생명나무쪽으로 가는 길을 차단하는 임무를 가진 그룹이라는 천사가 지금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과 족장과 제사장과 솔로몬 앞에서 제 기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마주보고 있으면서도 못들어온다는 겁니다. “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하매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왕상 8:10-11) 원래 언약궤는 이 세상에 없던 물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19장에서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온지 3개월 만에 시내산에 당도하여 산 위에서 일어나는 무서운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제삼일 아침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모세가 하나님을 맞으려고 백성을 거느리고 진에서 나오매 그들이 산 기슭에 섰더니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점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출 19:16-18)
산 위에서 나팔소리가 들린다는 말은 하나님과 더불어 다른 존재가 같이 있다는 말입니다. 창세기 3:24에서 생명나무 가는 길을 지켜야 될 천사가 시내산까지 내려와서는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을 맞이하게 된 겁니다. 모세는 호출을 받고 그 화산 속으로 올라갑니다. 거기서 모세는 ‘불 가운데서 나온 율법’을 받게 됩니다.
이 율법 내용의 정중앙을 자리잡은 것이 바로 ‘언약궤’입니다. 그룹이라는 천사가 바로 이 언약궤를 사수합니다. 마치 생명나무를 지키듯이 말입니다. 모든 말씀이 이 언약궤로부터 나옵니다. 그리고 언약궤로 회수됩니다. 회수될 때 그냥 회수되는 것이 아니라 저주받을 죄를 수집해서 회수합니다.
그리고 그 죄를 심판하는 것은 천사 담당합니다. 냉혹한 킬러처럼 사정없이 심판하고 저주합니다. 이것이 심판하는 불의 위력입니다. 심판하는 기능의 시공간이 인간 나라에 등장했다는 것 보다 더 큰 위기는 없습니다. 기존의 시공간에 사는 인간으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사정을 이이야기하고 잘 봐주십사 협의할 수 있는 권한은 없습니다.
그냥 율법이 요구하는 대로 일방적으로 당해야 마땅합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신약에서 예수님이 말씀해주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요 3:3-7)
즉 인간은 그냥 ‘육’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천국은 못 들어간다는 겁니다. 니고데모가 ‘다시 태어남’을 시도하겠다지만 백날 다시 태어나봤자 육에서 나오는 방식의 범주 밖으로 나올 수 없는 ‘육에서 육’으로 태어남에 불과합니다. 인간들은 기존의 시공간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솔로몬 뿐아니라 그 누구라도 언약궤에서 피어나는 그 영광을 산 채로 맞이할 수 없습니다.
인간 세계는 하나님이 계시는 곳으로 막혀 있습니다. 창세기 28:12-13에서 야곱은 꿈을 꾸고, 그 꿈 속에서 하늘로부터 사다리가 나려오지만 그 사다리는 어디까지는 인간이 활용하라는 용도가 아니라 천사들의 용도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준 율법에 준해서 천사는 지속적으로 인간 세계에서 저주와 심판의 폭격을 감행합니다. 이것이 그들 천사가 해야할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 언약궤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들은 평소에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까요? 누가복음 12:19-20에 보면,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들은 대자연의 천체를 지붕으로 삼아 평안하고 안정적인 삶을 누립니다. 하지만 천사에 의해서 이 단단한 자연 질서도 다 뜯겨나갑니다.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마 24:29-30)
오늘 본문에 나오는 언약궤 안치는 7월 절기에 해당됩니다.(대하 6:8) 7월 10일은 불에서 나온 하나님 말씀에 의하면 대속죄일입니다. 이 날은 이스라엘의 일년이라는 시간이 하나님 시간에 의해서 단 하루가 됩니다. 그동안 그들의 지은 모든 죄가 이 단 하루에 다 모이게 됩니다. 인간에게 있는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 의식이 하나님 앞에서 단 하루가 됩니다.
그 하루에는 인간이 지은 모든 죄가 언약궤 앞에 다 모아지게 됩니다. 율법은 마치 두레박같이 세상에서 죄를 건져 올립니다. 그렇게 건져 올린 죄는 언약궤에 모아집니다. 언약궤는 아무 것도 없이 오직 인간의 죄가 모아집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하나님 됨을 비우고 그 빈 자리에 죄있는 인간의 육신으로 채우는 것을 미리 보여주는 겁니다.(빌 2:8)
대속죄일날 이스라엘 대제사장은 백성들을 대표해서 유일하게 그날만은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데 그 대제사장이 들고가는 것은 자신의 피가 아니라 지정한 ‘희생의 피’를 들고 가서 죄만 가능한 언약궤 상자 위에서 부어버립니다. 하나님의 저주와 피와 만남에서 ‘하나님의 죽음의 효과’가 발휘됩니다.
사무엘상 1장에서 한나는 경건한 사람이지만 아이를 갖지 못합니다. 이게 공백, 곧 빈 자리입니다. 죄는 저주를 만난 비게되고 그 빈 자리에 예수님의 공로가 들어가서 십자가로 채워진 영적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게 되는 겁니다.(요 5:24)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뭘해도 육이라서 죄만 나온다는 사실이 언약 작용으로 볼 때 마땅함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7강-열왕기상 8장 1-3절(언약궤의 영광) 250212-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 열왕기상 8장 1-3절입니다.
열왕기상 8:1-3
“이에 솔로몬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윗성 곧 시온에서 메어 올리고자 하여 이스라엘 장로와 모든 지파의 두목 곧 이스라엘 자손의 족장들을 예루살렘 자기에게로 소집하니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다 에다님월 곧 칠월 절기에 솔로몬왕에게 모이고 이스라엘 장로들이 다 이르매 제사장들이 궤를 메니라.”
길어서 다 읽지는 않았습니다만 10-11절에 보면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하매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라고 되어 있어요. 성전을 짓고 난 뒤에 봉헌식을 하는데 그 구역이 둘로 나뉘어 있어요.
나뉘어 있다는 것이 6-8절에 나옵니다.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그 처소로 메어 들였으니 곧 내전 지성소 그룹들의 날개 아래라 그룹들이 궤 처소 위에서 날개를 펴서 궤와 그 채를 덮었는데 채가 긴고로 채 끝이 내전 앞 성소에서 보이나 밖에서는 보이지 아니하며.”
이것은 뭐냐? 본부석이 있는데 인간들은 관람석에 있지요. 관람석에 있는 관중들이 본부석이 있는 무대 위로 난입하지 못하도록 천사가 날개를 쫙 펴서 여기는 특별구역입니다. 인간들이 들어오면 안 되는 장소를 특별히 구획해서 천사들을 동원해서 지키고 있어요. 하나님이 임재하는 곳은 천사들에 의해서 인간들에게는 가로막혀 있어요.
가수들이 공연할 때 관중들이 흥분해서 무대에 막 뛰어들기도 하잖아요. 그것을 철저하게 차단하는 겁니다. 천사가 있는 그 지성소 앞까지는 인간들의 자리에요. 거기에는 구름이 없습니다. 그런데 제사장이 섬기는 본무대, 언약궤 옆에 있는 천사들이 보디가드처럼 날개를 쫙 펴서 작은 틈도 주지 않고 어떤 경우에도 인간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합니다. 천사들의 날개 길이가 무대를 꽉 채운 그 길이와 동일한 치수로 되어 있어요.
그렇게 못 들어오게 했고 거기에는 구름이 가득했다 그 말이지요. 인간이 딛고 있는 땅인데 인간이 그 땅에 못 간다? 이것은 무슨 뜻이냐? 언약궤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기존에 인간들이 살고 있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언약궤가 내려앉아 있는 그 시간과 공간이 서로 이질적이라는 거예요.
이질적이라는 그 말은 아주 어렵게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두 지평이, 두 이질적 지평이 만난다. 지평이 만난다는 말이 어려운 말인데요. 땅에서 해변 쪽으로 가는 땅의 지평, 그리고 바다 쪽에서 땅으로 가는 그 지평이 서로 해안가를 형성하잖아요. 그처럼 하나님의 시공간에서 출발했던 하나님의 세계의 그 끝자락이 놀랍게도 이스라엘에 당도했다는 거예요.
이스라엘에 당도했는데 조건은 뭐냐? 천사들을 대동했습니다. 천사들을 대동하고서 이스라엘에 당도했어요. 당도하니까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이 경험하지 못한, 하나님이 함께 있을 때나 생겨나는 현상인 구름,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구름이 이스라엘의 접근을 금지한 거예요.
저도 어릴 때 경험한 것이 있어요. 동네에 소독차가 지나가는데 소독약을 구름처럼 피워내거든요. 애들은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그 구름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해요. 그래서 우리는 구름 속으로 들어갔지요. 소독약만 실컷 마셨어요.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는 소독약만 실컷 마셨는데 거기는 짙은 구름 속이니까 앞이 잘 안 보였는데 그러한 낯선 경험이 아이들에게는 아주 신났었습니다.
구청 소독차는 도망치지요. 도망쳐버리면 소독차가 내뿜은 구름도 어느새 걷히고 소독약을 실컷 마신 애들만 남아 있지요. 낯선 세계가 구름으로 나타났고 우리는 그 구름 속에 들어가고 싶은 호기심을 갖고 있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이게 소독약이 아니에요. 이게 소독약이 아니라서 천사를 대동하고 오면 그 속에는 감히 들어갈 수가 없지요.
이것은 우리 보기에는 ‘참 신기하다.’ 이렇게 되지만 그 시대에 이것을 경험하는 이스라엘 당사자들에게는 인간 최대의 위기가 되는 겁니다. 인간의 위기는 자기 몸이 아픈 것이 위기가 아니고 죽을병이 위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접경선, 하나님의 지평선이 자기 세계까지 밀려온 것을 느낄 때 인간에게는 전면적 위기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이 구름과 영광은 출애굽기의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경험한 적이 있어요. 출애굽기 19장 16절부터 보면 시내산 밑에 모세가 백성들과 함께 모여 있습니다. 그 때 18절에 “시내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연기 있고 불이 있다는 말이지요. 백프로 화산이지요. “그 연기가 옹기점 연기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화산이 맞잖아요.
그런데 그 화산에서 어떤 존재인가는 살아 있다는 징후가 등장했어요. 왜냐하면 나팔소리가 나는 거예요. 무슨 밴드가 화산에 올라가서 트럼펫을 불겠습니까? 이스라엘은 그것을 체험한 거예요. 분명히 화산인데 거기서 나팔 소리가 왜 나느냐 그 말입니다. 나팔을 부는 그 당사자가 누구냐는 그 말입니다. 19-20절에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 여호와께서 시내산 곧 그 산꼭대기에 강림하시고 그리로 모세를 부르시니 모세가 올라 가매.”
모세가 화산으로 올라가니까 사람들은 다 겁이 났지요. ‘모세 저분 끝났다.’ 저기가 어딘데 화산 속으로 기어 올라가느냐는 말이지요. 자, 나팔을 누가 부느냐는 겁니다. 나팔을 부는 당사자가 있었으니 나팔 소리가 들렸을 테니까요. 그런데 열왕기상 오늘 본문에 나팔을 분 그 집단이 있었는데, 여기서 말하는 그룹은 천사를 그룹이라고 하고요, 그룹(cherubim, 천사)이 모인 그룹(집단)이 또 따로 있어요. 그들이 나팔을 부는 거예요.
천사들이 나팔을 부는데 그 나팔이 바로 심판과 저주를 알려주는 나팔입니다. 하나님이 천사를 대동하면서 하나님께서 뭘 함께 동반했는가? 하나님과 인간의 경계선이 시내산까지 와서 그냥 시내산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시내산에서 머물렀던 그 경계선이 이제는 이스라엘이 있는 시내산 밑으로 들어옵니다.
밑으로 들어온 그것을 가지고 언약, 모세언약, 율법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경계선이 있는데 그 경계선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창세기 3장 24절에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여기 보면 그룹, 천사들이 두루 도는 화염검, 불 칼을 가지고 휙휙 도는 거예요. 출애굽 해서 3개월 만에 시내산에 당도해서(출 19:1)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강림하신 것을 온 이스라엘이 목격했고, 그 시내산에 모세가 올라갔습니다. 아까 이야기한 대로 사람들은 ‘모세 저 인간 이제 죽었다.’ 했는데 죽는 게 아니고 뭘 인수 받기 위해서 올라간 겁니다.
율법을 인수 받기 위해서 간 거예요. 화산에서 나오는 돌판, 화산이 빚어낸 돌판, 불이 빚어낸 돌판이기 때문에 모든 율법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심판의 불이 받치고 있어요. 신명기의 말씀처럼(신 33:2) 그 불에서 율법이 나오는데 그 율법의 중앙, 핵심 부분이 오늘 우리가 생각해야 할 언약궤입니다.
언약궤는 뭐냐? 언약궤는 모든 하나님의 저주가 나오는 진앙지입니다. 지진이 일어날 때 그 지진이 시작되는 첫 자리가 있잖아요. 그 진앙지.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이 쏟아져 나오는 출구같은 것, 그게 언약궤입니다. 그래서 언약궤는 하나님이 임재했다는 뜻인데 언약궤, 언약이 있는 상자 거기에 하나님이 임재한다는 거예요.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에 대하여 무한한 저주와 심판을 계속 쏟아내는 출구 역할이 언약궤입니다. 그렇게 저주하고 심판하려면 무슨 근거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 근거를 제시하고 그 근거에 따라서 심판 기능을 하는 자들이 창세기 28장 12-13절에 보면 야곱에게 나타나요.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야곱이 브엘세바를 떠나서 하란으로 가는 도중에 어떤 한 곳에서 자고 있는데 돌베개 하고 자고 있었어요. 그곳이 벧엘입니다. 제가 가 봤습니다. 야곱이 베고 잤다는 돌 베개도 해놓고 그랬어요. 야곱이 꿈에 사닥다리를 봤는데 그 사닥다리는 인간이 올라갔다 내려가는 용도가 아니에요. 그 사닥다리는 누구의 용도인가 하면 천사들만 오르락내리락해요.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뭘 하느냐? 장차 모세를 통해서 주어질 율법이 어떤 역할을 하느냐인데 그 율법이 이스라엘에, 그리고 인간세계에 들어옴으로써 이를테면 우물의 물 길어 올리는 식의 역할이지요. 도르레가 달린 물긷는 두레박이 있잖아요. 물속에 두레박을 집어넣었다가 다시 끌어올리잖아요.
율법이 내려오게 되면 인간에게서 죄를 건져서 하나님께로 올라가요. 오르락내리락하니까 그렇게 올라가면 거기 대기하던 심판하는 천사가 그 죄를 지은 인간에 대해서 저주로 폭격하는 그 역할을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찾아왔다, 천사를 대동해서 왔다? 한마디로 해서 인간세상 죽이겠다는 거지요! 그냥 파괴하겠다는 겁니다.
그 파괴하는 진앙지가 어디냐? 그곳이 언약궤예요. 여러분, 화산이나 지진이 일어날 때 그 진앙지가 있잖아요. 강도가 3.2 이 정도면 꿈적도 안 하지만 9.8, 이러면 온 세상이 다 끝나는 거지요. 강도가 3~4도 오를 때 그 세기가 천배가 차이 난다니까 천배의 천배면 이것은 끝나는 거지요.
인간세계에 언약궤가 왔다? 인간은 피할 곳이 없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것은 전면적인 위기입니다. 피할 곳이 없어요. 뭐 다 부수겠다는데요. 그렇게 해서 천사가 온 지구를 싸돌아다니면서, 부지런해요, 설쳐가면서 말씀에 입각해서 계속 심판하고 저주하며 폭격해 버립니다.
일단 맛보기로 천사들이 애굽에 나타난 거예요. 일단은 맛보기로 애굽의 장자는 다 죽였어요. 그러니까 차자, 형님 있으면 둘째 아들은 괜찮아요. 형님이 대신 죽으셔야 합니다. 그런데 형님 있고 누나 있다, 누나는 필요 없어요. 아들이 죽어주셔야 합니다. 군에 갔다 온 사람도 소용없어요. 그냥 죽어버려요.
대를 이을 자손을 죽인다는 말은 ‘너희는 다 죽었다.’ 이 말입니다. 죽음이 마땅하다, 하나님 앞에서. 두루 도는 화염검 앞에서 살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무시무시한 이 말을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하고 대화하면서 아주 간편하게, 쉽게 압축해서 이렇게 말씀했어요. 요한복음 3장 3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다시 말해서 “인간은 하나님 나라 못 간다.” 그러면 니고데모가 “왜요? 왜 못 가는데요? 우리가 하나님을 섬겨도 못갑니까?” “섬겨도 안 돼” “그러면 우리는 왜 못 가는데요?” “우리가 말씀 지키면 되잖아요.” “말씀 지켜도 안 돼.” “왜 우리는 안 됩니까?” 할 때 주께서 그 내막, 진실을 이야기합니다.
그 이유가 뭐냐? “사람은 육으로 났기 때문에 못 간다. 육으로 난 것은 영이 될 수 없다.” 그 말씀이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요 3:6). 끝! 게임 끝났지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에요. 영은 아니니까. 다시 태어난다고 하니까 “그러면 엄마 뱃속에서 다시 태어납니까?”(요 1:4). 엄마 뱃속에서 다시 골백번을 태어나도 육에서 난 것은 여전히 육이지요.
엄마 뱃속은 이제 소용이 없다니까요. 엄마 뱃속을 대신하는 다른 것이 있어야 하는데 다른 것을 동원해 봐야 맨 육인데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에요. 안되는 거예요. 하늘나라 못 가는 겁니다. 교회가 이것 전해야지요, 뭘 전합니까?
“교회 오셨습니까? 잘 오셨습니다. 이제 당신이 몰랐던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하늘나라 못갑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이거지요. 교회가 뭐 전하느냐? 못 간다는 거예요. 왜? 인간은 육이기 때문에 못 가는 거예요. 그러면 육에서 다시 태어나면 되지 않겠느냐?
육에서 생각하는 ‘다시 태어남’은 이게 출처가 육에서 나왔기 때문에 육에서 다시 태어나겠다는 그 인식 자체가 그게 육이에요. 육에서 다시 태어나겠다는 그 각오와 열심도 그게 육이에요. 천국에 못 갑니다. 언약궤가 존재하는 이유는 구름 때문에, 오늘 본문의 구름 때문이에요. 못 들어가요.
솔로몬왕이 있고 대단한 제사장들이 다 있는 데 있으니 뭐합니까? 그 구름 속으로 아예 못 들어가는데요. 모기약 뿌려놓은 겁니까? 거기에 쑥 들어가게? 들어갈 수가 없어요, 구름 속으로. 왜? 시공간이 다르기 때문에요. 언약궤가 준비된 시공간 하고 인간이 육으로 살면서 경험했던 시공간하고 저주라는 것으로 그 판이, 지평이라는 말을 쓸 수밖에 없는데요, 그 경계면이 그렇게 되어 있어요.
저쪽은 심판으로 왔고, 이쪽은 심판 대상이고요. 그것이 실제로 그렇다는 사실은 다른 민족은 알 수 없고 오직 이스라엘 민족만은 언약궤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경험하게 되었던 겁니다. 다른 민족은 그 당시에 농사나 짓고 있었지 그런 것을 압니까? 언약궤가 뭔지,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다가 거기서 율법을 들고나왔는지 그런 것은 다른 민족에게는 있을 수도 없죠.
다른 민족들은 어떻게 사는 가가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나옵니다. 19절-20절에서. 언약궤가 들어옴으로써 전 세계 모든 것에 위기가 왔는데 그러면 다른 민족이나 다른 인간들은 어떻게 사느냐? 누가복음 12장 19절 20절에서 ‘인간들은 이렇게 삽니다.’를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예를 들어 이야기했어요.
어떤 사람이 농사가 잘되었어요. 잘 되니까 미래를 생각해서 창고를 크게 짓고서 하는 말이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자기가 자기보고 이야기해요. 자기 이름이 영혼인가?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이겁니다. 인간들은 이거뿐이에요.
그런데 누가복음 12장 20절을 제가 말씀드리기 전에 뭐부터 봐야 하느냐 하면 마태복음 24장 29-30절을 봐야 해요. 그걸 먼저 제가 읽어드리면 “그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제가 총신 신대원 3학년 때 거기가 사당동이에요. 그 당시 서울의 사당동에 못 사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재개발 지역이 있었단 말이죠. 이 본문 할 때마다 그때 본 게 있어서 제가 뭘 상상하게 되느냐? 어떤 사람이 재개발 지역에 사는데 아직도 이사 못 가고 자기 집에 누워 있어요.
자기 방에 누워 있으면 천장도 보이고, 벽에는 그동안 수십 년 살면서 애들 키울 때 기린 그림 붙여놓고 애들 키 잰 흔적도 있고, 이런저런 낙서한 것들까지 다 있을 것 아닙니까? 여느 때처럼, 보통의 일상 때처럼 그렇게 있는데 갑자기 개발 업체의 포크레인이 들이닥쳐서 벽을 뜯어가고 지붕도 뜯어낸다면 추억들이 다 날아가면서 훤하게 뭐가 보이겠습니까?
별들이 보이고요, 오늘이 정월 보름인데, 보름달도 훤하게 보이겠죠. 나를 지켜주던 이 벽, 벽이 갑자기 날아가죠.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인간세계를 지켜주던 것은 대자연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천사가 개발 업체가 돼 가지고 그 대자연인 해와 달과 별을 다 뜯어간다니까요. 다 뜯어가요. 심판, 저주는 뭐 ‘개인적으로 아프다.’가 아닙니다. 영원할 것 같은 해와 달과 별의 질서, 이걸 다 뜯어가요.
요한계시록 6장을 봐도 같은 이야기입니다. 6장 12-13절에 “해가 총담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 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그때 사람들은 혼비백산해서 자기 살길을 찾아다니죠. 어떤 곳이요?
자기 지평, 자기 땅이라는, 육지라는 자기 지평, 자기 시공간 속에서 자기 몸 피하려고 했는데 15-17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이렇게 된 거예요.
하나님의 일은 어떻다? 화끈하다. 아예 화끈해요. 뭐 어디 이민 가도 소용없어요. 해와 달 별 자체를 뜯어낸다니까요? 그래서 다시 한번 누가복음 12장 19절에 보면 “내 영혼아, 걱정하지 마라.” 편히 쉬고 있는데 20절에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이게 하나님의 스케줄입니다. 여러분, 학교의 급식스케줄은 누가 짜죠? 1번, 학생들이 짠다. 2번, 영양사가 짠다. 몇 번입니까? 영양사가 짜서 조리사가 조리하면 끝나는 거예요. “그냥 주는 대로 먹어.” “왜 탕수육이 또 나왔습니까?” 자꾸 이렇게 하지 말고 그냥 식단대로, 식당 스케줄대로 가는 겁니다. 우리 인간은 지금 그런 입장이에요.
천사가 율법을 대동해서 율법이 주어지고, 천사가 율법대로 죄를 건져내고, 그 죄를 담아서 언약궤에, 언약궤가 진앙지니까, 언약궤에 오게 되면 언약궤에서 뭐가 쏟아진다? 하나님의 준비된 저주와 심판이, 불심판이 쏟아지고요. 하나님의 스케줄이 그대로 지금 차질 없이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뭐, ‘종교 생활을 어떻게 합니까, 기도는 하루에 몇 번 합니까, 헌금은 몇 퍼센트를 해야 하고, 경건의 생활 어떻게 합니까?’ 지금 경건의 생활이고 뭐고 벽지가 날아가고 지붕이 뜯기는데요? 오늘 밤에 네 영혼 데려간다는데! “종교 생활을 어떻게 합니까?” 하는 경우는 어떤 경우냐 하면 아직 율법이 자기 죄를 안 건져냈을 때 하는 이야기에요.
율법이 오게 되면 어떤 인간도 그 앞에 의롭다 할 인간은 아무도 없어요. ‘율법에 대해서 잘못해도 우리가 반성하면 되지 않느냐?’ 이건 반성하라는 말이 아니고 심판받아라, 이 말이에요. “언약궤 안녕하십니까? 저는 아무개인데요, 주님 만나러 왔습니다. 제가 사실은 애 키우다 보니까 죄를 좀 지었고 했는데 어떻게 좀 봐 주기 있기, 없기? 있기, 없기?”
지금 그런 이야기 하려고 하니까 옆에 건장한 천사가 “저리 물러가세요! 여기 그렇게 함부로 오는 데 아닙니다.” 천사가 날개를 펴서 “구름 맛을 좀 한번 봐? 불맛을 한번 봐? 여기 올라오는 거 아닙니다. 저리 나가세요.” “개인적 사정이…” 개인적 사정이고 뭐고 좀 저리 나가라니까! 심판의 대상이라니까요.
지금 우리나라 헌법재판소에서 뭘 의논하느냐 하면 ‘윤석열 대통령 계엄이 유효냐, 무효냐?’ 내란이 성립되는지 그거 논의하고 있잖아요? 내가 답답한 것은 그런 것 좀 논의하지 말고 논의할 수 있는 의제를 내가 그 사람들에게 던져주고 싶어요. 요한복음 5장 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이 말이 진실로 그러하냐, 이런 것 좀 논의하면 안 돼요? 사무실에서 회의할 때 “오늘도 파이팅!” 이런 것 좀 하지 말고 “사망인데 어떻게 생명으로 옮겨 갑니까? 이게 진짜로 그렇게 됩니까?” 이런 거 논의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윤석열 그런 사람들 신경 쓰지 말고 제일 중요한 문제가 뭐냐?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이미 사망이라는 거예요, 이미. 이미 사망이라니까. 주님께서는 이미 사망을 보편화시켜 놓았어요. 인간세계에 생명은 없어요. 저주밖에 없어요. 왜? 언약궤에서 저주가 계속 나오니까요, 심판이 나오니까요. “내 사정 알아주세요.” 그런 거 필요 없어요.
저주받는 이유는 육이기 때문에 저주받아요, 육이기 때문에. 육은 하늘나라 못 갑니다. 갈 수가 없어요. “영이 되면 되잖아.”라고 하는데 육인데 무슨 재주로 영이 됩니까? 말 같은 소리를 해야죠. 이미 육이 됐는데 육에서 나오는 모든 의도와 생각과 “믿습니다.” 하는 것도 육인데 어떻게 그게 영이 됩니까? 안 되죠.
제가 십수 년 전에 봤던 <매트릭스>라는 영화가 있는데 세 번째 영화에 보게 되면 기계 나라가 인간 나라를 마지막으로 섬멸하려고 합니다. 인간 나라의 아지트가 있어요. 두꺼운 콘크리트 아지트가 있어요. 그 아지트 이름이 시온성이에요. 꼭 성경 이야기 같아요. 그 시온성에 기계가 구멍을 뚫어요. 인간세계 외부에서 기계가 구멍을 뚫어요.
인간은 그 외계의 기계가 자기를 섬멸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구멍 뚫는 그쪽에 온 역량을 다해 총을 쏘는 데 결국 실패합니다. 그때 트리니티(trinity), 트리니티는 우리말로 하면 삼위일체, 삼위일체 아들이 이것도 기계 인간이에요, 그 기계 인간이 희생함으로써 우리 인간이 다시 희망을 이어간다, 그 영화가 매트릭스에요.
얼마나 공포스럽다고요. 인간들이 숨어 있는 마지막 아지트인데 기계들이 거기에 구멍을 뚫으면서 인간에게 들이닥칠 때 그게 만약에 천사라고 해보세요. 인간세계는 끝났습니다. 재개발 정도가 아니고 완전히 다 끝났어요. 희망 없습니다. 언약궤가 왔다는 게 위기에요. 언약궤가 시내산에서 나와서 인간세계, 이스라엘 속에 안치됐다는 것 자체가 위기에요.
천사는 인간을 심판하려고 하고, 율법대로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율법대로 사는 사람 없다면 인간은 이제 끝장나는데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왜 안 죽었지? 언약궤가 있는 이스라엘은 천사들이 왜 살려주지?’라는 생각이 들 거예요.
맞아요. 하나님이 왔다는 것은 인간은 이제 다 죽었다는 건데, 다 죽어야 하는데 솔로몬은 왜 살아있고, 이스라엘 그 당시 사람들은 왜 살아있느냐, 그 말이죠. 그게 신기하지 않습니까? 그들이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이게 신기한 게 아니고, 하나님을 마주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숨을 쉰다는 것을 굉장히 이상한 일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로 볼 줄 아는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왜 살아있느냐? 언약궤에서 율법이 나왔기 때문에 인간들 죄를 수집해요. 인간 죄를 수집합니다. 수집하게 되면 인간은 율법을 따라서 언약궤 속으로 죄인이 되어서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요. 죄 자체가 되어서 빨려 들어간다고요.
그런데 오늘 본문 열왕기상 8장에서 성전 봉헌식을 하는 날짜가 8장 2절에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다 에다님월 곧 칠월 절기에”라고 되어 있어요. 이 7월 절기가 7월 며칠인지는 여기에는 안 나왔지만 역대하 6장 8절에 보면 7월 8일로 되어 있어요. 7월 8일부터 15일의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그 안에 대 속죄일이 들어있어요.
대 속죄일은 유일하게 이스라엘의 대표자가 하나님을 만나는 날이에요. 인간의 시간은 현재, 과거, 미래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대속죄일만큼은 하나님의 시간이 작동하고 작용해서 인간이 1년 동안의 모든 시간을 단 한 순간으로 집약시켜요. 그 집약시키는 조건이 뭐냐? 1년 동안 너희들이 죄지은 것을 오늘 하루에 다 지은 것이라고 집약하는 그날이 7월 10일 대 속죄일이에요.
제사장은 하나님이 집약해 준 7월 10일 단 하루…, 다른 날은 안 돼요. 7월 8일, 안 돼요. 7월 9일도 안 됩니다. 7월 10일 그 단 하루에 하나님이 지정한 그 피, 소 피나 염소의 피, 그 피를 들고 지성소에 들어가는 데 거기에 아무도 따라오면 안 돼요. “아무도 따라오지 마.” 모세가 시내산 올라갈 때와 똑같아요.
그래서 제사장 홀로 들어가는데 방울을 달고 들어가요. 바깥에 방울 소리 들리면 살아있는 거고 아무 소리 없으면 벌써 죽은 거예요. 그러니 여러분들 생각해 보세요. 이스라엘이 얼마나 신기한지 성소 이쪽에는 인간이 살 수 있는 장소고, 저쪽에는 들어갔다 하면 죽는 장소, 삶과 죽음의 장소가 양쪽 다 구비되어 있는 그 공간이 언약궤의 왕림으로 성립이 되는 거예요.
이것은 인간의 시공간과 하나님의 시공간이 겹쳐져 있는 것을 하나님 쪽에서 허락했다, 이 말이죠. 신기하지 않습니까? 오늘 신기하다는 말을 한두 번 하는 게 아닌데요. 이게 왜 신기 하냐면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누가복음 19장에 ‘내 영혼아, 오늘 돈 많이 벌었다. 오늘 한 건수 했다.’
지금 이게 인간이 사는 세계관이거든요. 이게 시공간이에요. ‘또 내일이 있거든? 내일 또 더 잘 살기 위해 내가 창고를 짓거든?’ 인간 스케줄이잖아요. 이게 인간들이 보통 사는 거예요. 그런데 그 인간 스케줄을 하나님의 스케줄에 맞춰서 단 하루, 인간의 모든 날은 단 하루에 속하고, 인간들이 평생 뭘 하는 것도 다 그 하루에 속하면 그 하루는 어떤 하루인가?
인간이 평생 죄지었다는 거예요. 인간은 평생 율법에 의해서 죄지은 거 외에는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 잠을 자도 죄지은 거고, 예배 참석해도 죄짓는 거고, 설교해도 죄짓는 거고, 죄지은 것밖에 없어요.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해서 천국 간다? 못 가요. 왜? 육이니까요. 있을 수 없어요.
그래서 대제사장이 뭘 들고 가느냐 하면 피를 들고 갑니다. 옆에 보디가드, 천사가 있죠. “잠깐 스톱!” 충성, 경례하면서 검문하는 그 헌병, “그 피가 네 피야, 무슨 피야?” “예,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하나님의 희생의 피입니다.” “보자, 흠 있는지 한번 보자.” “흠 없습니다.” “가만있어. 내가 조사할 거니까.”
율법대로 흠 있는지 조사해서 흠 없는 피는 통과! 대제사장을 통해서 그 하루에만 만나는 거예요. 거기에 언약궤가 있는데 언약궤는 뭐로 구성되어 있느냐? 언약궤는 안이 비어 있는데 그 안에 뭐가 있느냐? 인간이 죄지은 것만 소복이 담겨있는 상자가 언약궤에요, 인간이 죄지은 것.
인간이 원망했다는 흔적의 만나, 그리고 고라자손이 모세에게 대들었을 때 싹이 핀 아론의 지팡이, 그리고 모세가 없는 사이에 우상 숭배했던 흔적인 돌판, 돌판이 깨졌다는 그 취지가 담긴 돌판, 그게 다예요. 언약궤는 인간의 죄만 들어있는 거예요, 죄만.
“그 피 누구 피라고 했어?” “예, 제 피 아닙니다.” “그러면 누구 피야?” “하나님이 지정한 희생 제물의 피입니다.” 그 죄만 들어있는 언약궤 뚜껑에다가 “그 피를 여기 부어라.” 물론 천사가 시키지는 않죠. 율법에 자세하게 다 되어 있기 때문에. 천사가 시킨다고 생각합시다. “너희 인간들이 평생 모아 놓은 죄 있지? 이 죄 위에 피를 뿌려. 피를 뿌리면 이 피가 모든 죄를 다 덮을 거야.” 그게 바로 “정죄함이 없나니! 사함을 받을 거야.”
그런데 그 피는 사람의 피가 아니에요. 사람의 피가 아니면 누구 피냐? 빌립보서 2장에 나옵니다. 빌립보서 2장 6-8절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주님께서, 자기를 비워, 하나님을 비운 거예요. 비운 자리에 인간의 모습을 거기에 집어넣고 죽기까지 복종했다는 거예요. 그러면 왜 아무것도 없는 언약궤에서 저주와 심판이 쏟아지는가? 그것은 하나님 죽으심의 효과에요. 하나님 자기 죽으심의 효과가 심판으로 나온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 언약궤 안에서 자기가 공백, 빈자리가 되어야 해요. 이 빈자리를 잘 말해주는 게 사무엘상의 한나입니다. 한나라는 여자는 하나님을 잘 섬겼는데 잉태치를 못해요. 아기를 못 낳아요. 그러니까 그 가운데가 비어 있어요.
인간은 죄를 가지고 옵니다. 인간은 죄를 가지고 율법에 의해서 빨려 들어가서 언약궤에까지 인도함을 받아야 하죠. 물론 대제사장이 대표해서 가는 거지만 거기에 함께 들어 있다고 보고요,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궤에 가는데 그 빈 상자인 언약궤에 뭐가 수집된다? 우리의 죄만 소복이 담겨있죠. 거기에 다 죄를 게워 내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그 죄를 게워 내면서 그 현장에서 천사한테 심판받을 대상이 되죠. 사망이죠, 사망. 죽은 자가 되죠. 죽은 자가 되는데 그 저주와 예수님의 피가 같이 합체가 돼요. 덮여요. 덮이면 이제는 죄와 피가 합쳐져서 발생되는 것이 뭐냐? 예수님의 죽으심의 효과거든요.
예수님의 죽으심의 효과가 뭐냐? 너는 이미 죽었고, 너를 죽인 예수님의 피가 그 죽은 현장에 남아 있다면, 그 피에서 영적 인간이 탄생하는데 그 영적 인간으로 말미암아 육에서 영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피가 있다는 것 때문에! “나 성령 받았다.” 이런다고 영적 인간이 아니에요. 예수님의 피에요. 성령이 그걸 말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피가 있는 거예요. 왜?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요.
그게 언제라고요? 7월 10일 날, 7월인데 무슨 날? 대속죄일. 누가 정했습니까? 사람들이 의논해서 정했습니까? 시내산에서 나왔던 율법에서 나온,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정한 날, 너희들이 평생 지은 죄를 용서하겠다는 그날이 대속죄일, 그날에 지금 솔로몬은 봉헌식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 봉헌식 현장에 하나님이 구름 가운데 나타났다, 천사가 거기서 활동하고 있다? 이건 무엇을 뜻합니까? 말씀은 실제 상황이라는 거예요. 믿든지 안 믿든지 네 마음대로 하세요. 그러나 안 믿는다고 해서 실제가 실제 아닌 게 아닙니다. 우리는 믿지 말고 실제 속에 포함된 존재인 것을 우리가 알면 되는 거예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한나처럼 우리는 우리 안에 아무것도 없기를 원합니다. 죄지은 것밖에 없지만 그 죄가 주님 십자가의 힘에 끌려와서 십자가까지 도달하니 비로소 주님의 피를 만나고, 예수님의 그 피로 말미암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그러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주심에 대해서 주님, 영원히 주께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