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어두움
2025년 2월 19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8:12-13
(8:12) 그때에 솔로몬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캄캄한데 계시겠다 말씀하셨사오나
(8:13) 내가 참으로 주를 위하여 계실 전을 건축하였사오니 주께서 영원히 거하실 처소로소이다 하고
‘여호와께서 깜깜한데 계신다’는 것은 레위기 16:2에 나오는 상황을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형 아론에게 이르라 성소의 장안 법궤 위 속죄소 앞에 무시로 들어오지 말아서 사망을 면하라 내가 구름 가운데서 속죄소 위에 나타남이니라” 따라서 솔로몬은 이 ‘깜깜함’을 지워버릴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의식은 사무엘하 7:2에 나오는 다윗의 의식과 같습니다. “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 있도다” 여기서 다윗은 백향목에 있는 다윗과 휘장에 계신 하나님을 비교합니다. 그만큼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 다윗 자신에 비해서 초라하다 는 겁니다.
다윗이나 솔로몬이 하나님을 자기 곁에 나란히 하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상대적으로 빈약한 공간에 자리잡은 하나님 위상이 하나님의 가치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는 겁니다. 하지만 다윗과 솔로몬이 모르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언약의 진위입니다.
백향목이나 솔로몬의 화려한 성전은 모든 자재가 자연에서 얻어진 겁니다. 이는 인간 자체가 자연 안에 살아가는 방식에 둘러싸여 사는 것이 외연의 한계인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삶의 공간 경계 밖에 뭐가 있는지를 모릅니다. 인간 삶의 공간 밖에 계신 분이 인간들이 삶에 나란히 현존이 가능하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러나 엘리사에게 있어 하나님은 삶의 공간 밖에 계시는 분입니다.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그 겉옷을 가지고 물을 치며 가로되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 하고 저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엘리사가 건너니라”(왕하 2:14) 엘리야 선지자는 불수레 타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따라서 엘리사의 삶의 외연은 자연세계 안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이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합류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어두움에 둘러싸여’ 오시는 겁니다. 그 이유는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알려집니다. “이 밤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심을 인하여 여호와 앞에 지킬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밤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대대로 지킬 것이니라”(출 12:42)
하나님께서 애굽나라 전체를 ‘어두움’으로 표현하십니다. 이는 곧 낮과 밤이라는 자연세계의 한계를 넘어서는 겁니다. 이 ■‘보편적 어두움’을 봅아내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둘러싸면서 이동시킵니다. 그것이 바로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보호하는 이유입니다.
이 ‘이동하는 어두움’이 약속의 땅에 도달하면서 ‘정착하는 어두움’이 됩니다. 그런데 다윗과 솔로몬에 와서 이 ‘어두움 속의 언약궤’를 양성화시키겠다는 겁니다. 인간들이 눈으로 볼 수 있는 자연적 자재로 지은 집 안에 둘려고 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다윗이나 솔로몬이나 모두 하나님을 바로 곁에 두는 바가 된다고 여깁니다.
하늘의 복이 내려오는 하나님과 같은 공간에 나란히 한다는 것은 곧 자신도 하나님의 혜택을 입는 존재로 자부할 수 있다고 여긴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런 자연세계의 외연으로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언약을 인간 존재와 병행해서 같이 적용할 수 있는 식으로 해석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무엘하 7:14에 보면, “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영원히 계시는 집은 ‘하나님의 아들’의 발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 안에서만 계시려는 겁니다. 이것은 자연에서 나오는 건축 자재로 세운 건물이 아닙니다.
이렇게 되면, 기존의 자연세계에서 밝다/어두움의 인식 자체가 수정되어야 합니다. 곧 다윗언약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져야 합니다. 외연을 자연세계를 초과해서 넓혀져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어둡다’는 것은 어떤 건물 안에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세계 전체로 확대되도록 보편화되어야 합니다.
신약 성경에 들어오게 되면 다윗언약은 그 완성의 절정을 맞이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1:5에 보면,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3:19-21에서는,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자연 세계 안에 낮/밤으로 빛/어두움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직접 빛이 되시어 오시므로서 이 세상은 전체 어두움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빛되신 예수님을 못 알아보니까요. 못 알아보는 이유는 이사야 45:15는 나옵니다.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우리 주님을 어떻게 사람이 알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어두움의 극한에 이르게 합니다. 그러면 자기 백성은 주님은 빛과 어두움의 창조주로 알아보게 됩니다. 사도행전 9:3에서는 사울이라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행 9:3)
이로 인해 사울은 장님이 됩니다. 즉 인간 육신에 달고 있는 눈은 자연세계를 초월하는 빛을 수용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20:28에서는 도마라는 제자는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게 됩니다.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그때까지 도마 및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주님, 하나님으로 여기지 않고 자신들과 나란히 현존이 가능한 위대한 진리를 가르치는 스승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의 불신앙이 주님에 의해서 지적받고 난 뒤에 비로소 자신들의 그동안 모든 행적과 불신앙마저 ‘어두움’이 되며, 이 ‘어두움’은 다윗언약의 완성으로서 빛 그 자체로 나타나기 위해 연류된 현상으로 알게 됩니다. 즉 자연에 빛과 어두움을 만드신 분이 이제는 자연을 초월한 ‘빛 자체’가 되신 분이었던 겁니다.
따라서 어두움은 이 빛과 함께 할 수 없기에 보편적으로 어두움이 되는 겁니다. 그 빛 자체가 인간의 육신의 방해를 뚫고 마음 속까지 오게 되면 성도는 비로소 자신의 어두움의 모든 행위마저 빛이 빛되기 위해 끌려들어간 대상자임을 알게 됩니다. 이미 빛 안에 있고 그리고 모든 것이 빛만 드러나는 세계 안에 놓여 있게 된 겁니다.
지옥이란 예수님이 없는 곳입니다. 천국이란 인간의 만족하고 행복한 곳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계신 곳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어떻게 되든 예수님만 계신다는 그것만으로 충분한 자가 천국백성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어두움을 통해서 주님이 주님답게 드러나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8강-열왕기상 8장 12-14절(빛과 어두움) 250219-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 열왕기상 8장 12-14절입니다.
열왕기상 8:12-14
“그 때에 솔로몬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캄캄한데 계시겠다 말씀하셨사오나 내가 참으로 주를 위하여 계실 전을 건축하였사오니 주께서 영원히 거하실 처소로소이다 하고 얼굴을 돌이켜 이스라엘의 온 회중을 위하여 축복하니 때에 이스라엘의 온 회중이 섰더라.”
솔로몬이 하나님의 전에 언약궤를 안치하고 난 뒤에 그러한 일을 하는 그 취지에 대해서 어떤 비교를 통해서 이야기하느냐? “이제는 하나님께서 캄캄한데 계시지 않게 되었으니 내 할 일을 했다.”라는 식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캄캄한데 계시면 안 된다.’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이것은 아버지 다윗이 성전을 지을 때 성전을 굳이 짓겠다고 나선 그 이유가 사무엘 7장 2절에 나옵니다. “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 있도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나는 좋은 곳에 있는데, 남들 보기에 대단히 화려하고 영광스러운 장소에 거하는데 하나님의 궤가 있는 곳, 하나님의 이름이 계시는 곳은 초라하다.’ 그 말이지요.
그래서 초라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다윗은 화려하고 영광스러운 건물을 짓겠다고 나선 거예요. 다윗의 이러한 제안을 하나님께서 거절했어요.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궤가 캄캄한데 계시는 그 이유를 다윗도 몰랐고 지금 솔로몬도 모르고 있습니다. 신약시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아직 구약적 사고방식에 머물러 있으니까 그런 겁니다.
‘인간들은 굉장히 화려하게 사는데 주님은 굉장히 초라하게 계신다. 미안하다.’ 그런 거지요. 그런데 솔로몬도 그렇고 다윗도 그렇게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것이 있어요. 하나님을 자기 곁에 둘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자신의 현존, 다윗이나 솔로몬이나 자신의 현존과 하나님의 현존이 나란히 있을 수 있는 분으로 이해한 거예요. 거리감 제로지요. 거리감 없이.
남들 보기에는 그만큼 끔찍하게 하나님 섬기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궤가 어두운 곳에 굳이 계셔야 할 이유를 완전히 빠트린 것이 돼요. 하나님께서 어두운데 계시겠다는 말은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의 그 계시는 현존의 바깥 범위, 외연이라고 해요, 공간이지요, 하나님이 현존하는 그 공간의 크기에 대해서 인간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어요.
솔로몬이나 다윗이나 자기가 사는 삶의 공간, 그 공간안에 하나님을 모실 수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을 모시기 위해서 정성을 다하고 괜찮은 자리를 마련했으니 여기 와서 계시면 참 좋겠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되면 나 여기 있고 하나님도 여기 있으니 나란히 함께 붙어 있어서 한집안 식구처럼 되면 늘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 우리 가까이에 계시니 우리는 그 자체로 복된 공간에 속한 것이 아닌가?’
다윗이나 솔로몬이나 둘 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솔로몬이나 다윗이나 하나님이 어두운데 계셔야 할 이유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어요. 캄캄한데 계신다는 것을 전혀 모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삶의 공간, 어려운 말로 외연(外延)…, 그 범주를 넓히는 거예요, 경계선을 넓힌다는 뜻입니다.
그 경계선을 넓힌다는 뜻이 무슨 뜻인지 열왕기하에 나오는 엘리사의 행동을 보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엘리사가 엘리야와 같이 있다가 엘리사만 놔두고 엘리야가 불수레 타고 떠나버려요. 떠나갈 때 열왕기하 2장 14절에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그 겉옷을 가지고 물을 치며 가로되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 하고 저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엘리사가 건너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대목에서 “여호와는 어디 계시나이까”라는 그 마음의 소원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왜 찾습니까? 이것부터 한번 생각해 봐야 해요. 인간은 대자연 속에 살고 있습니다. 공기를 마시고, 땅에서 나는 식물을 먹으면서 70, 80, 90까지 건강하게 잘 살다가 그냥 생을 마감합니다. 도중에 애도 키우면서 가정생활도 하고요. 직장생활도 합니다.
그렇게 살면 되잖아요. 우리가 교회 나오는데 한번 생각해 봅시다. 내가 평소에 직장생활하고 돈 좀 벌어서 애들과 같이 생활하고, 그러면 되잖아요. 가끔 건강 생각해서 오메가3도 챙겨 드시고, 아침에 나가서 운동도 하고요. 다들 그렇게들 사니까 그렇게 살면 되는데 엘리사는 왜 이래요? “엘리야의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하나님을 왜 찾아요? 그냥 너대로 살아. 그런 분 찾지 말고. 엘리사는 지금 하나님이 없어서 답답해요. 지금 엘리사가 밥을 못 먹고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아주 부농 출신이에요. 열두 겨리 소(왕상 19:19)라고 나오니까 소도 많고 큰 밭도 있었어요. 그러나 그것이 엘리사의 삶의 목적이 아닙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는지 그게 관심사고, 엘리야의 하나님이 없이는 자기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에요.
이것을 가지고 외연을 넓힌다고 해요, 외연을 넓힌다. ‘같은 인간들 사는 것처럼 고만고만하게 살다가 죽을 때 되면 죽겠지.’ 하는 이것은 외연을 넓히는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대자연 속에 갇혀 있는 꼴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엘리야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는가고 찾고 있어요. 왜냐하면 엘리야의 하나님은 불수레 보내서 엘리야를 하늘로 올려보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우리의 삶의 바깥 경계, 외연은 이 정도 되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맨날 탄핵이 어떻게 되니, 우크라이나 전쟁이 어떠니, 물가가 높으니, 수출이 되니 안 되니, 취직이 어려우니 어쩌니 장가가기 힘들고 시집가기 힘들다, 우리 애가 벌써 서른다섯인데 시집을 안 가고 있다, 그래서 교회 가서 “우리 딸 시집 좀 가게 해주세요.” 이런 것.
그게 엘리야의 하나님을 찾는 심정입니까? 그것은 외연이 자기에게 갇혀 있는 꼴이잖아요. 지금 솔로몬이 아버지 다윗 언약에 의해서 하나님의 성전을 지으라고 했으니까 자기는 성전을 지었다는 말이지요. 성전을 지었는데 그 성전은, 자기 있는 삶의 공간에 하나님을 모셔서 같이 살겠다는 거예요.
같이 살겠다는 이것은 솔로몬 자신의 외연을 넓히는 것이 아니에요. ‘복 주는 하나님이 옆에 있으니까 나는 신난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지금까지 생각한 것은 솔로몬과 다윗의 입장이에요. 복 주는 하나님이 바로 옆에 계시면 어려울 때마다 기도하고 얼마나 좋으냐. 다시 말해서 솔로몬이 ‘하나님이여, 하나님의 소원대로 성전 지어 드려서 내 옆에 계시니 나 잘했지요?’ 이런 뜻이에요.
‘우리는 밝은데 살았는데 하나님은 어두운데 계시니 그동안 답답했지요? 이제는 훤~하고 밝은데 계시도록, 어두운데 계시지 않도록 제가 알아서 모시겠습니다.’ 이런 겁니다. 그게 하나님의 세계로 외연을 넓히는 겁니까, 아니면 자기 외연에 하나님을 가두어 두는 겁니까? 이것은 가두어두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알아봐야 할 것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이름이 계시는 언약궤는 왜 밝은 곳에 계시지 않고 어두운데 계시는 겁니까? 그 이유를 알아야 해요. 출애굽기 12장 41-42절에 “사백삼십 년이 마치는 그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이 밤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심을 인하여 여호와 앞에 지킬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밤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대대로 지킬 것이니라” 여호와의 밤이라.
무슨 뜻이냐 하면, 애굽 전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밤이다 그 말입니다. 캄캄하다는 거예요. 그들은 태양신을 섬기고 항상 밝은 대낮에 활동하기를 원하고 있지요. 보통 인간들이 다 그러하니까요. 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애굽 자체가 어두움이에요. 애굽의 본질, 애굽의 본 성격은 여호와의 밤에 다 드러납니다.
“너희는 다 죽었어. 각 가정의 맏이를 내가 죽일 거야. 애굽에 있는 모든 가정이 족보는 내가 다 자를 거야. 족보를 더 이상 이어가 봐야 희망 없어. 왜? 내가 절단냈으니까.” 그게 맏아들, 장자를 죽이는 거거든요. 죽이는 데 낮에 죽이는 게 아니에요. 밤에 죽입니다. 그게 여호와의 밤이에요.
여호와의 밤, 곧 애굽전체를 어두움으로 간주했어요. 이게 보편적 어두움인데 보편적 어두움이라는 것은 인간의 개성이나 색깔 이런 것은 그 어두움 앞에서 안 통합니다. 아무 소용이 없어요. 밤 되면 모든 소가 검다는 말이 있어요. 낮에야 색깔이 있겠지만 밤이 오면 다 어두워요.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낮에는 나 고유의 색을 지킬 것이다. 아닙니다. 내 색깔을 가지고 태양 가까이, 촛불 말고, 전구 말고 태양 가까이 가보세요. 그 눈부신 광채 앞에서 나의 빛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돼요. 그러니까 하나님께 빛을 만들고 어두움을 만드실 때 빛이든 어둠이든 그것은 전부 다 보편적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빛이나 어두움 안에서 인간의 개성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개인 사정은 고려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전체를 봐요. 빛이냐 어두움이냐 그 전체를 봅니다. 애굽은 어두움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사람이 얼마나 선하냐, 착하냐, 성품이 온화하냐와 상관없이 모든 맏아들은 다 죽였어요. 왜? 아무리 착해도 어두움에 속하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전체가 어둡다는 것을 밝혀내기 위해서 그 어두움을 뽑아내요. 이 세상은 보편적으로 말할 것도 없이 전부 다가 어둡다는 그 요소를 뽑아내는데 그 뽑아내는 것이 뭐냐?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입니다.
언약궤가 어두운 데 있다고 솔로몬이 이야기를 했는데요, 이 어둡다는 말이 레위기 16장 2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형 아론에게 이르라 성소의 장안 법궤 위 속죄소 앞에 무시로 들어오지 말아서 사망을 면하라 내가 구름 가운데서 속죄소 위에 나타남이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언약궤가 있는 곳에는 구름이 가득해서 어둡다는 거예요.
구름 자체로 어두움을 묘사하고 있어요. 장정만 60만(출 12:37-38)이니까 어림잡아 족히 2백만에서 3백만 잡고요, 하여튼 엄청나게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빠져나올 때 하나님이 찾아오심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나타나는 현상,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세계는 다 어두움에 갇혀 있다는 이 현상을 나타내게 되는데, 이스라엘이 이동할 때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같이 이동하게 함으로써 이동하는 어두움이 되는 겁니다.
이동하는 어두움이 언약궤가 약속의 땅에 옴으로써, 다윗에게 옴으로써, 시온산에 안착함으로써 안착한 어두움이 돼요. 이동하던 어두움이 어두움 속에 소복이 둘러싸인 거예요. 누가?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밤이 이동하기 시작하니 여호와의 밤이에요. 여호와의 밤이 이스라엘과 이동하다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전쟁을 하게 되는데 거기까지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이끌었습니다. 약속의 땅에 도착 되면 구름 기둥과 불기둥은 이제는 없지요.
언약궤가 안치되는 장소가 구름 가운데 있는 어두움의 장소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뭘 오해했느냐? ‘하나님은 초라하다. 자기는 백향목 궁에 사는데 하나님은 너무 보잘 것 없는 성막 안에 거하시니 안됐다. 나라도 하나님을 잘 모셔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게 생각했어요.
실제로 우리 인간들이 그런 생각 많이 합니다. 어릴 때 엄마가 고생 많이 하면서 자기를 키운 것을 생각하지요. ‘엄마 호강시켜 드려야 하는데, 우리 엄마 호강시켜 드려야 하는데.’ 그래서 나중에 성공했다고 엄마 차를 사드리는데 1억짜리 차를 사줍니다. 렉서스! 간접광고 비슷한데요. 이게 일본제 차인데 좌석이 그렇게도 편하대요. 나이 들면 허리가 불편하다고 1억짜리 렉서스를 떡 사줘요.
사주면서 “엄마! 안 탄다고 하지 마세요. 무조건 타야 합니다.” 자식이 그렇게 하면서 마음이 흐뭇한 거예요. 그런데 이미 아들도 1억짜리 차를 타고 있다는 거예요. 내가 호강하는 것처럼 엄마도 호강해야 내 맘이 편하다는 거지요. 다들 부모들한테 1억짜리 차 사주고 있죠, 지금?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게 인간이 갇혀 있는 사고에요. “정말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하나님이 어디에 계셔야 합당하느냐를 생각을 못 하고 ‘하나님 잘 모시면 나도 하나님 덕 본다’라는, 결국엔 자기 챙기는 것을 감안해서 하나님을 잘 모시려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네가 나 호강시켜 주려고 집 지어 준다고? 그래?” 하나님의 뜻은 이거에요. “네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아느냐?”에요.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사무엘하 7장 14절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지금 하나님이 계시는 곳은 인간이 지어놓은 호사로운 집이 아니에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아들이 아들답게 또는 아들이 다윗 언약을 다 이루어서 생성되는 주 자리가 바로 하나님이 계시는 자리입니다. 갑자기 이렇게 함축해서 이야기했죠.
그걸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다윗이나 솔로몬이나 구약 사람이 되어 가지고 하나님이 계시는 집을 지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인간이 자기를 자연 세계의 비바람과 찬 공기가 있는 이런 데서 안전하게 보호하려면 하우스, 집이 필요하잖아요? 이왕 집 짓는 거 호사스럽게 영광스럽게 지으면 더 좋죠. 기분도 좋죠. 내가 나를 보호하는 집은 자연 세계에서 구한 자재 가지고 집을 짓는 거예요, 인간들은.
그런데 다윗과 솔로몬이 오해한 것은, 다윗 언약에 의하면 집은 자연 세계에 속한 자재로 짓는 집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자연이라는 외연을 떠나서, 불 수레 타고 다른 나라, 하늘나라 올라가는 것처럼 하늘나라 전체를 담아 둘 수 있는 새로운 집은 바로 아버지와 아들에 의해서 자연 세계 바깥에서 자연 세계 전부를 포괄하는 새로운 외연으로 짓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빛과 어둠을 관장하고 자연 세계에 낮과 밤을 만들었잖아요, 창세기 1장에서? 그런데 다윗 언약이 지나가면서, 다윗 언약에서 새 언약으로 가면서 이 세상 자체가 어둠이 돼 버려요. 애굽 자체가 어둠이 돼요. 그러면 빛은 어디 있느냐?
이 세상 말고 바깥 외연에 빛의 세계가 있어요. 다윗 언약은 바로 그쪽으로 가야 돼요, 목적이. 언약궤가 다윗의 시온성에 정착했다고 하는데, 맞아요. 언약궤는 정착한 게 맞는데 이제부터 언약궤가 그 깊이를 더합니다. 깊이를 더하면서, 정착된 언약궤가 그 깊이에 폭을 더하면서 자연 세계에 갇혀 있는 인간을 벗어나서 인간들이 상상도 못 하는 자연 세계 바깥에 외연적인 그러한 방식의 새로운 집이 마련되면서 언약궤가 그 집에 놓이게 됩니다.
“솔로몬아!” “예” “네가 다윗 언약을 오해했다.” “어떻게 오해했습니까?” “네가 지금 나를 위해서 집을 지었잖아.” “예, 집을 지었죠.” “그 한계를 네가 못 벗어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네가 지은 성전? 불타야 한다. 불타버려야 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거든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불타야 해요.
불탈 때는 하나님의 뜻이, 언약이 더 깊어져요. 더 깊어지게 되면 성전을 지었다는 것, 인간이 만들어낸 그 영광으로도 하나님의 어둠, 어두운 곳에 계시는 그 깊이를 다 감당하지 못하고 수용하지 못합니다. 할 수가 없어요.
지금 표정들을 보니까 ‘무슨 소리 하느냐’ 하는 표정인데 간단하게 말해서 이사야 45장 15절입니다.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계속 숨어있는 하나님이에요. 왜? 다윗도 솔로몬도 어두워야 하니까.
그런데 다윗과 솔로몬은 ‘우리는 이제 밝았고, 하나님은 이제 어두운 데 계시니까 음성화 된 하나님을 양성화시키겠다.’라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 손에 의해서 양성화되면 안 돼요. 왜냐하면 하나님을 양성화시켜서 인간 옆에 하나님이 계시고자 하겠다는 이 자체를 하나님은 어둠으로 보십니다.
이제 신약 성경을 보게 되면 제가 하는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인지 슬슬 다 풀립니다. 요한복음 1장 5절에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간단하잖아요.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여기서 빛은 뭐냐? 빛과 어두움을 만드신 그 당사자가 빛으로 오신 거예요.
구약에는 그렇게 생각 못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밝은 것은 밝고 어두운 것은 어두운데, 하나님의 백성 우리는 밝은 곳에 살고 있는데 하나님의 언약궤는 어두운 곳에 있기 때문에 내가 성전 하나 지어서 어두운 데 계시는 것을 양성화시켜서 밝은 곳에 오시게 되면 하나님도 여기 계시고 그 옆에 빛의 자녀인 우리 이스라엘도 거리감 제로가 되듯이 같이 한 가족처럼 있으면 좋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을 한 거예요.
왜 그렇게 생각했느냐? 언약궤가 정착되었으니까, 이제 이동하지 않으니까 여기서 그냥 잘 모시면 되지 않겠느냐는 거예요. 그런데 언약궤가 정착해서 하나님의 활동이 멈추는 것이 아니고 그 언약궤의 어두움이, 멈춰진 이스라엘 전체를 어두움으로 전환시킵니다.
하나님이 계심으로써 비로소 내가 어두움에 속했다는 것을 깊이 있게 발견하는 계기가 된다, 이 말입니다. 요한복음 3장 19-20절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솔로몬 수준이 아니죠? 더 깊이 있게, 깊이 있게 내려가 보니까 빛 자체가 되시는 분이 오심으로서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그 모든 인간들이 뭐였다? 어두움 그 자체였단 말이죠. 왜? 빛을 빛으로 못 알아보니까요.
그것도 모르고 솔로몬은 바로 옆에 이웃집, 자기는 왕궁에 있고 옆에 성전이 있고 그렇게 나란히, 나란히 하나님하고 같은 레벨에, 자기 현존과 주님의 현존을 나란히 같이 붙어 있을 수가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요한복음 20장에서 도마가 하는 고백이 나오는데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무슨 오해를 했느냐?
솔로몬의 오해와 똑같아요. 예수님이 자기 랍비, 자기 인생길을 인도하는 스승님이니까 같이 늘 붙어 있으면 예수님 나라가 곧 자기들의 나라라고 그렇게 오해를 한 겁니다. 그렇게 생각을 한 거예요, 예수님이 바로 곁에 있으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이 어디 가려고 하니까 “가지 마세요. 가시려거든 나도 따라가겠습니다.” 이렇게 된 거예요. 예수님 옆에 자기가 붙어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아주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다. “네 자리 없다. 나 있는 자리에 네 자리 없다. 내가 만들어야 해. 너희들 자리는 내가 만들어야 해.” 이 말은, 애초부터 열두 제자의 자리는 없습니다. 같이 붙어 있을 동안에 예수님 자리는 있지만 제자들 자리는 없어요.
주님의 자리는 있지만 교회 50년 60년 나온 교인들의 자리는 천국 어디에도 없습니다. 없어요. 구원? 무슨 구원을 받아요, 자기 자리가 없는데.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지 몰라요, 이 교인들이. 자리 없습니다. 주께서 하는 작업은 뭐냐?
빛이지만 먼저 하는 작업이 어두움 속에 오심으로써 이 세상 모든 인간이 빛을 사모하지만 빛을 사모하는 그 자체가 어두움이라는 것을 그들은 모르고 있었던 거예요. 빛을 사모하고 하나님 사모하는 그들이, 사모하는 그것이 어두움의 현상이라는 것을 그들은 모르고 있었던 겁니다. 빛이 왔으되 깨닫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왜? 어두움이기 때문에.
그래서 도마도 “선생님, 선생님!” 이러고 있단 말이죠. 그렇게 하다가 도마가 바뀝니다. 요한복음 20장 28절에 보면,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했어요. 랍비가 아니에요. 이젠 스승님이 아니고 나의 ‘주’시고 나의 ‘하나님’이 되는 거예요.
나의 주시고 나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뭐냐? 빛 앞에서 나라는 개성은 소실 되었다, 소멸되었다, 날아간 거예요. 내가 하나님의 일의 일부고 주의 일부가 되었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 자, 이쯤에서 솔로몬 다시 해봅시다. 왜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이 다윗 언약에 대해서 오해해서 내 옆에 하나님을 붙여놓으려 한 그 이유가 뭐냐?
그것은 다윗 언약 자체가 예수님 기능하고 똑같아요. 다윗 언약 자체가, 하나님을 내가 모시겠다고 하는 이것이 다윗 언약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 없고 완전히 오해한 그런 자라는 것, 그 오해에 참여시키기 위해서 솔로몬으로 하여금 성전 짓는 것을 허락하신 거예요.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교회 나와서 예수 믿는 것을 허용하십니까? 그게 어둡다는 것을 알려줌으로 말미암아 진짜 어두움을 몰랐는데 진짜 어두운 자로 주의 일에 참여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용납하신 거예요. 들어보니 어떻습니까? 이 죄짓는다는 게 보통 큰 선물이 아니죠?
하나님에 대해서 잘못 믿은 것이 하나님의 큰 축복이라는 사실을 여러분 아셔야 해요. 하나님을 잘못 믿은 게 큰 축복이에요. 하는 족족 하는 행동 자체가 모조리 뭘 하든 엉터리, 엉터리, 엉터리로 드러나게 해주시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 다윗 언약의 완성입니다.
‘나의 주님’이라는 고백이 나의 모든 행위에 마지막 허점이 드러나는 순간 비로소 주님과 나는 조인트가 되는 거예요. 조인트가 돼요, 조인트가. 내가 주를 위해서 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 내가 믿는 것도 전부다 엉터리라는 사실을 전부 다 기쁨으로 감동으로 느껴질 때 비로소 우리는 죄를 모르는 나를 죄인 되게 하는 이 자체가 주께서 친히 우리를 참여시킨 주의 일이고 하나님 일이 되는 거예요. 내 안에 하나님 일이 살아있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 죄인으로 드러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감격이고 이게 바로 복음의 기쁨이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있거든요. 그거 주의 일이 되는 순간 다 날아갑니다. 왜? 우리의 어떤 짓거리도 어두움 그 자체기 때문에, 어떤 짓거리도. 뭐 찬양, 영광, 헌금 뭘 해도 어두움이에요. 그래서 도마는 이제 알았어요. “나의 주님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껏 내가 태어나서 한 모든 일이 나의 일이라고 여겼는데 전부 나의 일이 아니고 주의 일에 합류되고, 주의 일의 일부로서 가담되는 거예요. 어두움은 모든 것이 보편적으로 다 어떤 것도 개성 없이 다 어두움인 것처럼 빛 안에서는 모든 것이 빛이 돼요. 빛의 조각, 조각이 돼요.
사도행전 9장 3절에 보면 사도 바울 되기 전의 사울이 나옵니다. 사울이 뭐라고 했느냐 하면 “예수님은 믿을 필요 없어. 예수님은 이단이니까, 사기꾼이니까 믿으면 안 돼. 하나님의 영광을 가려. 예수님 믿는 사람은 족치고 옥에 가둘거야.” 하고 아주 의기양양하게 예수 믿는 사람을 찾기 위해 다메섹으로 내려가요. 다마스커스, 지금 시리아의 수도죠.
그쪽으로 가고 있는데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이게 바로 사울이 생각했던 그 외연, 자기한테 갇혀 있던 외연이 빛에 의해서 완전히 노출된 거예요. 뚜껑이 열린 겁니다. 뚜껑이 날아가니까 예수님 자체가 빛이고 빛 앞에서 나는 졸지에 어둠이 된 거예요.
사울이라는 사람이 어두움이 된 것을 어떻게 아느냐? 갑자기 빛이 오니까 장님이 되고 말았습니다. 보는 것도 아는 것도 어두움이 되었어요. 장님이 되어서는 뭘 하려고 해도 할 게 없어요. 장님이니까, 더듬거리니까. 그래서 아나니아한테 가서 안수받고 비늘 같은 게 떨어지니까 그 다음엔 빛이 빛으로 확, 모든 것이 예수님의 활동 아닌 게 아무것도 없었고, 심지어 내가 언제 출생했다는 그것 조차도 나의 일이 아니고 우리 주님의 일이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거예요. 심지어 내가 죽는 날도 내 스케줄이 아니고 주님 스케줄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예요.
사도 바울이 이러한 빛을 알고 난 뒤에 했던 이야기가 바로 고린도후서 3장 18절에 나옵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런 뜻이에요. ‘나처럼 예수 만난 사람 있나 한번 보자.’ 이런 식으로 고린도후서 3장 18절을 이야기합니다. 그 앞에 이야기가 있는데 그 앞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모세 수건 이야기에요. 모세는 하나님 만나고 내려왔고, 나머지 백성들은 하나님 못 만나고 있으니까 둘 사이 외연에 차이가 생긴 거예요. 그만큼 인간이 갇혀 있다, 이 말이죠. 갇혀 있으니까 자기 아는 것만 그게 진리인 줄 알고 있어요.
그런데 모세가 내려오니까 문제는 그 모세가 하는 말의 내용은 나중 문제고요, 모세 얼굴조차도 볼 수가 없었어요. 왜? 모세 얼굴에 비치는 그 광채를 어두움에 속한 본인들이 눈 뜨고 볼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모세가 답답해서 하늘에서 본 건 전해야겠고, 저들은 지금 내 얼굴에 40일 동안 비쳤던 광채는 보질 못하고 무서워서 피하고 있으니까, 모세가 신광타올,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어요.
가리니까 모세 얼굴에서 나는 광채가 뭘 뚫어내지를 못하느냐? 모세 수건을 뚫어내질 못하고 그때야 대화가 되는 거예요. 그 모세 수건에 해당하는 게 뭐냐? 오늘 본문에 솔로몬의 성전이라 그 말이죠. 그러니까 수건을 한다는 말은 구약이에요. 솔로몬 성전을 짓고 하나님 여기 계시다는 것도 구약이에요.
신약에서는 어떻게 되는가?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신약에서는 그 수건이 그 밑으로 주르륵 내려가고 떨어지는 거예요. 떨어지게 되면 어두움에 속한 어떤 인간도 주님을 못 봅니다. 볼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수건 같은 역할을 하기 위해서 수건 대신 하나님의 영광과 함께 있으면서도 하나님과 교제가 가능한 게 뭐냐?
고린도후서 3장 18절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주의 영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이 대목을 보면서 사도 바울처럼 기뻐해야 하는데 영 기쁨이 없는 이유가 뭐냐? ‘하나님, 우리 눈으로 좀 봅시다. 주의 영이라고 하는 게 무슨 이야기인지는 모르겠고 그 눈부심을 내 시력 1.5, 1.5로 봐서 아, 주님 믿습니다, 이렇게 되면 안 되겠습니까?’ 하는데 그렇게 자꾸 생각하고 싶은데 사울은요, 장님 됐어요.
장님 한 번 되게 해 줘요? 주님을 봤는데 장님 되었다는 그 말은 무슨 뜻입니까? 현재 육체에 달린 1.5, 1.5 이 시력 가지고는 주님을 못 본다는 거예요. 도마가 눈으로 봐야 믿겠다고 했던 그 도마가 주님 보는 것 말고 주님의 창 자국과 못 자국을 만질 때 희한한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주시고 나의 하나님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앞에서 내가 존재한다는 자체가 어두움 그 자체였습니다.” 내가 감히 빛을 보고자 하는 이런 욕구, 욕망 이것이 추잡하고 더러운 것이었습니다. 내가 봐서 뭐 할 건데요? 내가 보면 하나님을 내 소유로 할 것 아닙니까?
그런 것은 주님을 안 만났을 때나 일어나는 사고방식이에요. 주님을 왜 내 소유로 합니까? 왜 주님을 내 옆에 두고자 합니까? 주님 옆에 내가 있으면 되는데 내 옆에 주님이 있으면 안 돼요. 주님에 의해서, 빛에 의해서 발생한 나여야 하지, 내가 주님을 이용할 가치가 있어서, 필요해서, 천국 가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내가 주님을 옆에 두면 안 되죠.
그래서 고린도후서 4장 3절에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자꾸 복음을 가린다고 이야기해요. 그다음 4장 4절에 “그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자, 이렇게 제가 말씀드려도 무슨 뜻인지를 모르겠죠?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주께서 일을 하는데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어떤 착한 생각, 바른 생각, 신앙적 생각, 어떤 생각을 해도 그것이 바로 어두움에 불과하다는 것을 발견하는 작업은 우리가 하지는 못하고 주께서 우리에게 영광스럽게 찾아오니까, 빛이 찾아오니까 우리는 졸지에 가만히 있는데도 어두움이 된 거예요.
이 말은 내가 어두움이니까 비로소 빛이 누군가를 아는 거예요. 빛만 있으면 돼지 나 같은 거 뭐가 문제입니까. 끝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옥은 뭐냐? 예수님이 없는 곳이에요. 이게 지옥이고 천국은 뭐냐? 행복한 거 아닙니다. 내가 잘 사는 거, 아니에요.
천국은 예수님이 있는 곳이에요. 내가 있으면 안 된다고요, 천국은. 주님이 계셔서 비로소 있는 나여야지, 내가 가고 싶은 곳은 지옥이지 그것은 천국이 아닙니다. 천국은 주님 계심에 일어나는 결과물로 내가 거기에 가는 게 천국이에요.
따라서 주님께서는 그 작업을 하는데 네가 어두움을 아는 것은 빛이 되는 내가 네 마음속에 들어왔기 때문에 네가 뭘 해도 어둡다는 것, 이게 빛이 이미 너를 빛 안에 포함했기 때문에 그런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끝까지 주님만 계시면 돼요, 주님만!
그러면 우리 안은 뭐냐? 빛으로 가득해서 내 육신이 하는 모든 것은 뭐든지 어두움이 되는, 바로 그 빛으로 가득한 그걸 에베소서 5장에는 빛의 자녀(엡 5:8)라고 하는 겁니다. 그걸 죽은 데서 살아나는 현상이라고 하는 거예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빛으로 오신 분 앞에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언약을 지키고, 십자가를 믿어서 구원되는 줄 생각하는 이 모든 것이 다 어두움으로 발각되게 해주심을 감사합니다. 빛 앞에서는 모든 것이 어두움인 것처럼, 이 세상 어두움 속에서 우리는 어두움 아닌 것이 없다는 사실을 빛을 통해서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