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천사의 작업장

아빠와 함께 2025. 1. 31. 08:46

천사의 작업장 

2025년 1월 29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6:23-28

(6:23) 내소 안에 감람목으로 두 그룹을 만들었는데 그 고가 각각 십 규빗이라
(6:24) 한 그룹의 이 날개는 다섯 규빗이요 저 날개도 다섯 규빗이니 이 날개 끝으로부터 저 날개 끝까지 십 규빗이며
(6:25) 다른 그룹도 십 규빗이니 그 두 그룹은 한 척수, 한 모양이요
(6:26) 이 그룹의 고가 십 규빗이요 저 그룹도 일반이라
(6:27) 솔로몬이 내소 가운데 그룹을 두었으니 그룹들의 날개가 폐었는데 이 그룹의 날개는 이 벽에 닿았고 저 그룹의 날개는 저 벽에 닿았으며 두 날개는 전의 중앙에서 서로 닿았더라
(6:28) 저가 금으로 그룹에 입혔더라

성전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인간은 성전을 지었다고 우깁니다. 심지어 성전에 들어 있는 천사상까지 사람 손으로 지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그게 아닙니다. 천사가 성전 안을 지키는 수호 천사가 됩니다. 창세기 3:24에 나오는 말씀, 즉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대로입니다.

하나님께서 지키고 싶은 것은 인간이 아닙니다. 생명나무 과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이 ‘있음’이며 무엇이 ‘없음’인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이 땅에서 계속 있는 것은 주님과 악마입니다. 곧 ‘여자의 후손=주님’과 ‘뱀의 후손=악마’는 영원합니다.(창 3:15) 반면에 인간은 ‘흙’이 되어 소멸합니다.(창 3:19)

이로서 이 세상은 계속 존재하는 주님과 악마의 갈등이 일어나는데 그 목적인 악마에 대한 영원한 저주와 주님에 대한 영원한 찬양을 성사시키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사람(백성)을 통해서 영원한 찬양을 받고 싶으신 겁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미 마귀의 손에 넘어가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짓도록 허락하시면서 그 성전의 최종 막힌 공간, 곧 지성소를 두 천사가 선점해서 차지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두 천사 사이에는 언약궤가 놓여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계시가 나오고 돌아오는 자리가 생명나무를 지키는 천사(그룹)들로 하여금 수호토록 하신 겁니다.

즉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곳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백성들로 하여금 참여하도록 조치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태어나면서 죄인이요 죽은 자로 태어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취지는 이러합니다. 죄를 지었다고 지옥가는 것이 아니라 ‘죄 용서’를 안 믿으면 지옥갑니다. 그만큼 인간은 벌써 자신이 죄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죄는 자신의 ‘있음’부터 인식됩니다. 본인이 엄연히 그 ‘있음’의 가치와 의미를 망치지 않으려고 발바둥칩니다. 흙이 되어가는 주제에 그래서 나름대로 소중하다고 자부합니다. 이런 자기 존재 의미는 이미 악마로부터 부여받은 욕망의 질(質)에서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네가 신처럼 되리라”는 의식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성전 건축을 허락맞은 이스라엘 사람이나 솔로몬도 예외가 아닙니다. 만약에 오늘날 사람들이 솔로몬 성전으로 관광하려 간다면 동쪽 입구로부터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뜰에 커다란 제단을 보게 될 겁니다. 그리고 제사장들이 성소에 들어갈 때마다 손과 발을 씻는 물두멍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3층 높이로 곧게 서 있는 두 기둥을 성전 현관에서 만나게 될 것입니다. 각 기둥의 이름은 야긴과 보아스입니다.(왕상 7:21) 그리고 가이드는 계속 성소 안으로 들어가서 벽면에 있는 종료나무 문양을 보게 될 것입니다. 드디어 지성소를 구경하게 되는데 거기서 거의 5m나 되는 두 천사상을 만나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라면 그냥 “거기 두 천사상이 있네”라고 보고는 돌아서서 관광상품 파는데 가이드가 데리고 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사상이 있는 곳, 바로 거기에서 성전은 막혀 있기 때문입니다. 동쪽으로 들어와서 서쪽에서 막히게 됩니다. 하지만 성전을 만드신 하나님의 취지를 살린다면 그저 관람하는 것으로 진정한 의미가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다음과 같이 고백해야 합니다. “천사가 저기 있다면 나는 없다”가 됩니다. ‘천사도 있고 나도 있다는 것’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천사가 있다면, 곧 영원한 존재가 있다면 그 존재로 인하여 우리는 결코 영원하지 않고 곧장 없어져도 마땅한 존재가 됩니다. 즉 ‘있어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천사의 최종 공간에 천사를 두시는 겁니까? 그것은 이미 인간은 영원한 존재인 악한 천사 악마의 수중에 놓여져 있어서 인간에게 마치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처럼 부추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 성전이 있어도 결국 그 성전이 불타버리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기 때문입니다.

우상은 뭘까요? 이사야 44:14에서 우상은 ‘자기를 위하여’ 신을 찾는 것을 말합니다. “그는 혹 백향목을 베이며 혹 디르사 나무와 상수리 나무를 취하며 혹 삼림 중에 자기를 위하여 한 나무를 택하며 혹 나무를 심고 비에 자라게도 하나니” 또 시편 115:4-7에서는 우상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알려주십니다.

“저희 우상은 은과 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으로 소리도 못하느니라 ”

그런데 이러한 우상 표현은 지금 하나님께서 인간을 보는 평가 그대로입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하나님의 생명나무의 가치를 높이는데 있어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영원히 하나님께서 사수하시려는 생명의 가치를 훼방하고 방해하는 중입니다. 자기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는 바로 그것은 아무 가치도 없는 우상의 진수입니다.

반면에 천사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복음을 전합니다. 바로 업무 달성을 위해 천사는 가차없이 심판을 해버립니다. 따라서 성전과 연관해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가 있습니다.

⒈ 성전이 있고 천사도 있다.
⒉ 성전이 없어지고 천사는 있다
⒊ 성전이 없어지고 천사는 심판을 감행하고 성신은 있다. (겔 10:18 “그들이 서면 이들도 서고 그들이 올라가면 이들도 함께 올라가니 이는 생물의 신이 바퀴 가운데 있음이더라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을 떠나서 그룹들 위에 머무르니)
⒋ 성전은 없고 주님은 오신다
⒌ 성전도 없고 주님도 떠나지만 성령은 오신다
그들이 서면 이들도 서고 그들이 올라가면 이들도 함께 올라가니 이는 생물의 신이 바퀴 가운데 있음이더라
⒍ 성령은 계시고 성전도 새로 생기고 주님도 계시고 천사도 옆에서 찬양한다.

바로 이와 같은 성사된 성전의 모습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갈 2:20)

골로새서 3:5에는 오늘날의 우상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밝혀주십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완성된 성전 안에서 다음과 같은 고백이 가능합니다. “내가 누군지 모르는 것은 내가 어느 장소에서 발견되는지를 모르는 것과 같다. 따라서 새 성전 안에서 비로소 내가 누군지를 안다. 나는 죄인이었다. 용서를 수긍하는 죄인이다.” 여기서 무한한 웃음이 계속 나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성전 건설에 참여하게 된 것을 무한히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5강-열왕기상 6장 23-28절(천사의 작업장) 250129-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 열왕기상 6장 23-28절입니다.

열왕기상 6:23-28

“내소 안에 감람목으로 두 그룹을 만들었는데 그 고가 각각 십 규빗이라 한 그룹의 이 날개는 다섯 규빗이요 저 날개도 다섯 규빗이니 이 날개 끝으로부터 저 날개 끝까지 십 규빗이며 다른 그룹도 십 규빗이니 그 두 그룹은 한 척수, 한 모양이요 이 그룹의 고가 십 규빗이요 저 그룹도 일반이라 솔로몬이 내소 가운데 그룹을 두었으니 그룹들의 날개가 폐었는데 이 그룹의 날개는 이 벽에 닿았고 저 그룹의 날개는 저 벽에 닿았으며 두 날개는 전의 중앙에서 서로 닿았더라 저가 금으로 그룹에 입혔더라”

성전을 짓는데 성전의 제일 중심에 딱 맞닥뜨리면 거기에는 그룹, 천사가 있습니다. 성전의 입구는 동쪽인데 계속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게 되면 막히게 되어 있어요. 어디서 막히는가 하면, 천사 있는 곳에서 막힙니다. 그러면 이 성전의 구조는 뜰의 제단, 제물을 태워죽이는 제단부터 해서 제사장이 손발을 씻어야 할 물두멍이 있고, 다음에 현관의 계단이 있습니다.

그 계단 여덟 개를 딛고 올라서면 거기에 두 기둥이 있어요. 열왕기상 7장 21절에 “이 두 기둥을 전의 낭실 앞에 세우되 우편의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야긴이라 하고 좌편의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보아스라 하였으며”라고 되어 있어요. 높이는 한 15미터 정도 되는 두 기둥이 버티고 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관광 가이드라면 관광객들에게 성전을 소개할 겁니다. “이것은 제단이요, 이것은 물두멍입니다. 볼 것 빨리 보시고요, 쇼핑하러 가야 합니다. 얼른 훑어보고 기념품 보러 가게요. 어서 들어가 봅시다. 자, 이제 지성소에 들어갑니다. 뭐가 보이지요?” 여기서 “천사가 보입니다.”라고 하면 안 돼요.

두 천사가 있고 가운데 언약궤가 있습니다. 언약궤 위의 천사는 날개를 펴서 마주하고 있어요. 두 그룹(천사)이 있는데 그 높이가 약 5미터, 4.76미터, 상당히 높은 천사의 상이 있다는 말이지요. 세상적인 가이드 같으면 “언약궤 위에 날개를 펼치고 마주 보는 천사의 상이 두 개가 있습니다. 다 봤지요? 이제 더 볼 것 없어요. 기념품 사러 갑시다.” 하겠지요.

그런데 진짜 하나님의 성전의 의미를 안다면 가이드가 “뭐가 보입니까?” 할 때 “천사가 보입니다.” 하면 안 돼요. “내가 보이지 않습니다.” 내가 보이지 않습니다. 천사가 보이는 나를 저 동쪽 입구로부터 끌어당겨서 중간중간 나를 없애고 없애다가 결국은 천사의 상이 있는 언약궤까지 왔다면 “우리는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돼야 해요.

알기 쉽게 해서 ‘인간은 존재한다.’가 천사 앞에서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로 전환되는 겁니다. 인간이 존재해버리면, 인간이 여기 있어 버리면 일은 누가 하는가? 존재하는 내가 하지요. 그런데 천사 앞에서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동안 일은 누가 했는가? 천사가 일을 했어요. 왜냐하면 천사는 융통성이 하나도 없어요.

천사의 특징은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합니다. 그런데 인간존재는 내가 시키는 대로 해요.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성전이 왜 있는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이유는, 마지막 맞닥뜨리는 곳, 거기에 뭐가 있는가를 보라는 거예요. 맞닥뜨리는 곳에서 “성전이 있다.”라고 하면 이것은 아직도 성전을 모르는 거예요.

‘성전이 있다.’가 아니라 ‘천사가 있다.’가 되어야 해요. 천사가 있으면 성전은 없어져야 합니다. 성전은 불태워져 날아가야 해요. 성전을 지었던 인간도 날아가야 합니다. 성전이 계속 있게 되면 인간은 성전에서 계속 하나님을 만나려고 할 거예요. 그러니까 성전은 없어야 해요. 인간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왜? 인간은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인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딱 둘밖에 없어요. 악마와 주님, 딱 둘만 존재합니다. 그러면 인간은 뭐냐? 흙이에요. 그것도 없어질, 사라질, 부서져야 할 흙입니다. 인생에 있는 모든 것은 모래성 같아서 모래가 있는 것 같으나 와르르 무너져서 다시 흙으로 섞여 버리지요. 뭔가 있는 것 같고 대단한 것 같은데 인간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을 왜 이렇게 만들어 놓았는지? 그 안에 천사가 버티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보고 “스톱! 여기까~지. 너희는 거기까지다.” 이제 천사가 바통을 쥡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도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신약에 오면 그 이야기가 아주 분명합니다. 신약에서는 ‘내가 여기 있지 않고 주님이 여기 있다.’ 그렇게 됩니다. 내가 여기 있지 않고 주님이 여기 있다.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나는 죽고…’, 다시 말해서 ‘나는 여기 있지 않고,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이 말씀으로 인하여, 오늘 본문에서 그 ‘천사의 있음’도 그것도 구약까지예요, 천사의 있음이 뭐로 바뀌느냐 하면, 신약에서는 ‘주님이 여기 계시다.’가 되는 겁니다.

‘나도 있고 주님도 계시다.’ 이러면 안되고요, 주님이 여기 계신다면, 옛날의 그 천사를 바라보면서, 힘이 좍 빠지면서 ‘천사가 이 성전을 가동시켰구나.’ 하는 사실, 제일 깊숙한 안쪽에 천사가 버티고 있고 천사가 언약궤를 지키고 있으니까 인간은 언약궤를 지킬 어떤 자격과 명분조차도 없어요. 그러면 인간은 무용지물이에요.

하나님의 언약궤를 지키지 못한다면 이것은 있으나 마나 한 존재가 되고 마는 겁니다. 이러한 천사를 통해서 인간은 성전을 지어도 구원받지 못한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됩니다. 구원받아야지, 구원받아야지 했지만 성전 안쪽에서는 “스톱! 거기까지. 구원받고자 해? 구원받고자 하는 나도 같이 날아가야” 합니다. 주님과 천사의 일을 통해서 언약궤가 완성이 되는 겁니다.

자, 천사의 일은 무엇인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찬양하는 것과 또 하나는 복음을 전달하는 일을 천사가 해 왔었습니다. 찬양하는 것, 이 말은 인간은 찬양하지 못한다. 복음을 전달하는 일. 이 말은, 인간은 복음을 전달하지 못한다. 이게 구약 말미에 성전이 떠나가면서 천사가 그 자리를 채우게 돼요.

신약으로 넘어가면서 구약 마지막에 등장하는 성전이 에스겔에 나옵니다. 에스겔 10장 18, 19절에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을 떠나서…” 성전 문지방은 언약궤가 있는 곳을 말합니다. “…성전 문지방을 떠나서 그룹들 위에 머무르니 그룹들이 날개를 들고 내 목전에 땅에서 올라가는데 그들이 나갈 때에 바퀴도 그 곁에서 함께 하더라 그들이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는 동문에 머물고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그 위에 덮였더라”라고 되어 있어요.

이 말은 뭐냐? 원래 하나님의 신이 성전에 그동안 있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성전에서 철수를 시도한 거예요. 외국 회사에서 한국에 지점으로 세운 마트가 장사가 안되면 “우리 회사 철수한다.” 하잖아요. 철수하면서 물건 다 빼가면 기존의 건물은 아무 의미가 없지요.

하나님께서 자기 목적을 달성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얼마든지 철수하십니다. 철수할 때 언약궤 위에 하나님의 천사가 함께 있으면서 철수합니다. 그렇다면 철수는 하면서 그냥 하늘로 가시는 것이 아니고 동쪽 문에 머물러 있는 거예요. 왜 동쪽 문에서 머물고 있는가? 천사의 할 일 때문에 그렇습니다.

천사의 할 일이…, 성전이 우상숭배로 훼손될 때 그 책임추궁까지 담당하는 자들이 누구냐? 천사들입니다. 심판을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심판하고 세상 민족을 심판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천사들과 함께 성전 동쪽 문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출동!” 하면 출동해서 심판을 하게 되는 겁니다.

다시 한번 순서를 알기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성전 있다. 천사 있다.’ 같이 가지요. 그런데 ‘성전 없다. 천사 있다.’ 같이 갑니다. 그다음에 ‘성전 없다. 심판하는 천사 있다.’ 같이 갑니다. 그다음에 ‘천사 있다. 성신 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다음에 ‘천사 있다. 주님 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다음에 ‘천사 있다. 주님 있다. 성령 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마지막에 뭐냐? 그 성령이 있는 곳을 하나님의 성도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빨라서 못 들었으면 다시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순서가 그렇게 돼요. 순서가 왜 이렇게 복잡하게 이어져야 하느냐? 인간은 없는데, 인간은 ‘내가 여기 있다.’라고 이야기해요. 인간이 여기 있어 버리면 어떤 결과가 되느냐 하면, 있는 자기를 위해서 신을 섬기는데 그것이 바로 에스겔의 천사에 의해서 심판받아야 할 우상숭배가 되는 거예요.

이사야 44장 14절에 “그는 혹 백향목을 베이며 혹 디르사나무와 상수리나무를 취하며 혹 삼림 중에” 그다음에 나오는 말이 “자기를 위하여” “자기를 위하여 한 나무를 택하며 혹 나무를 심고 비에 자라게도 하나니” 이처럼 자기를 위하여 섬기는 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그런데 천사는 ‘자기를 위하여’가 없어요. 그래서 성전에서 천사를 만날 때는 ‘자기를 위하여’가 아예 삭제되기 위해서 천사가 있는 그 장소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는 없는 존재로 규정을 해버립니다. 성전이 좋은 점이 뭐냐? 내가 있어도 없는 존재가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천사의 그 취지를 모르고 그냥 성전에 관광차 왔다 합시다. 그러면 여기 있는 내가 계속 있게 돼요.

내가 계속 있게 된다면 어떤 식의 구원, 어떤 식의 하나님을 계속 우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가? 제가 생각해 봤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천국 보낼 때 하늘에서 시험을 치는데 이런 문제를 냈다 할 때 여러분이 생각을 해 보세요. “1\4(4분의 1)미터가 몇 센티미터지요?” 하나님이 천국 가려는 인간들보고 묻습니다. “1\4미터가 몇 센티미터인가?”  

하나님께서 왜 천국 들어가기 위한 시험문제를 그렇게 안 내느냐는 말이지요. 답은 25센티미터에요. 그러면 하나님이 낸 그 문제에 대해서 “25센티미터입니다.”라고 답변이 나온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하나님이 묻습니다. “1\4(4분의 1)의 개념은 누가 만들었고, 1미터는 누가 만들었고, 센티미터는 누가 만들었느냐?”라고 물어요.

그러면 인간들이 말합니다. 살아 있는, “살아 있네!” 하잖아요, 그 “살아 있는 우리가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땡, 탈락이에요. 왜? 천사가 해야 할 복음 전파, 찬양, 심판, 성전 지킴이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심판, 구원 기준에서 확 빠지게 되는 거예요. 성전의 본래구조하고 안 맞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은 뭐냐? 하여튼 내가 있으면 내가 풀 수 있는 문제를 우리가 자꾸 시도하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이걸 빼는 거예요. 또 하나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제가 <인간극장>을 TV로 봤어요. 영광이라는 시골의 교회에서 크리스마스 축하 예배를 하는 장면이 나왔어요.

딸이 교회 문밖에서 뒷자리에 앉아 있는 집사님을 불러서 예배 중인 자기 엄마를 불러달라고 한 거예요. 지금 한창 기도하고 찬양하고 그런 중인데. 목소리를 작게 낮춰서 “우리 엄마 좀 불러주세요. 어머니가 휴대폰을 놔두고 교회 오셔서 그래요.” 그래서 “집사님, 딸이 왔어요. 나가보세요.” 엄마가 나와서는 “왜 왔어?” 하니까 “엄마! 마늘, 냉장고 어디에 두었는데?”라고 물었어요.

일가친척들이 와 있어서 식사대접을 해야 하는데 마늘이 어디 있는지는 못 찾겠고, 전화 하려니 휴대폰도 집에 두고 교회에 가버렸고요. 자, 그럴 때 교회 안 나가는 딸의 입장에서 천국에 어떻게 들어간다고 생각할까요? 교회를 안 나오는 그 딸의 입장에서 만약에 천국이 있다면, 그리고 자기가 하나님이라면 천국의 문제를 어떤 식으로 출제를 해서 천국에 넣어주는 기준으로 하겠는가?

이런 식으로 낼 거예요. “엄마의 마늘은 어느 냉장고에 들어 있을까?” 문제 그렇게 내면 되겠지요. ‘내가 여기 있음에 내가 아는 것을 언급하면 나는 답변할 수 있고 답변이 되면 나는 구원받는다.’ 교회 안 다니는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자기의, 자기 잘남을, 내가 살아 있는 의미와 가치를 그런 식으로 챙기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죄를 지어서 지옥 가는 것이 아니에요. 죄지어서 지옥 가는 것이 아니고 죄 용서를 안 믿어서 지옥 갑니다. 죄를 짓는 이것은 기본이에요. 인간이 존재하면 나올 것이 죄밖에 없는데 그것을 어떻게 닦달 냅니까? 죄만 나오는데.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죄 용서를 안 받아들이는 것, 죄 용서를 안 받아들이는 그것으로 인하여 지옥 가는 겁니다. 어떤 죄도 용서만 받아들인다면 천국행입니다.

자, 그런데 죄용서가 생산되는, 만들어지는 그 시스템이 뭐냐? 성전이에요. 그 성전에서 제발 인간은 나대지 말라는 겁니다. 제발 좀 나대지 말라는 거예요. 제발 나대지 말라. 인간이 나대면 뭐가 되느냐 하면, 나대면 인간은 슬퍼요. 가슴 아픕니다. 인간이 나대면.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라는 영국 작가(Lewis Carroll, 1832~1898)가 쓴 책이 있어요. 그 동화에서 엘리스가 이상한 나라의 토끼 굴에 빠졌는데 그 세계의 현상 중에 하나가 있어요. 거기 나오는 고양이, 체셔 고양이(Cheshire Cat)라고 해요, 고양이가 없는데 웃음은 남아 있어요.

거기서 뭐가 중요하냐 하면, 웃는 주체는 없는데 웃음은 여운으로 남아 있다 그 말이죠. 그러니까 죄지은 인간은 주께서 없앴는데 그 죄에 대해서 용서함으로 주어지는 그 웃음, 그 만족감, 다 이루었다는 행복감은 계속해서, 계속해서 영원히 남는 거예요. 어디서? 천국에서.

그래서 이 시간에는 도대체 막다른 그 서쪽 벽의 닫힌 공간, 천사가 그렇게 마지막 장소를 점유하고 있는 그 이유에 대해 이 본문을 통해서 한번 생각을 해봐야 돼요. <사운드 오브 뮤직>이라는 영화에서 줄리 앤드루스, 극 중에서 마리아죠, 마리아가 처음 취직을 해요. 수녀를 하다가 말썽을 부려서 “너는 그냥 세상에 취직이나 해라. 그것도 하나님의 일이다.”라고 수녀원장님이 쫓아냈죠.

쫓아내는데 마리아가 “나는 수녀 외에는 잘 못 하는데요.” 할 때 수녀원장이 이런 이야기를 해요. “걱정하지 마라. 주님께서 한쪽 문을 닫을 때는 다른 한쪽 문을 열어주신다.”라는 말을 해요. 저는 이 말이 비 복음적이고 잘못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수녀원장이 하는 말은, 마리아의 존재를 계속 ‘있음에서 있음’으로 질질 끌고 가요.

그런데 이 세상의 특징이 뭐냐? 인간은 아무리 존재해도 이 세상에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뭐 뉴질랜드로 이민 가고, 어디로 또 가고, 한국은 싫다면서 다른 데로 가고 아무리 돌아다녀도 인간은 자기 몸 하나 담을 장소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인간은 죽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고 인간은 이미 죽은 채로 태어났기 때문에 죽는다는 것은 기본이고 인간에게는 다른 죽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다른 죽음에 대해 아는 사람이 누구냐? 인간은 몰라요. 인간은 모르고 천사는 알고 주님은 압니다. 이 철딱서니 없는 인간은 성전을 뭐 이렇게 저렇게 생각은 하지만 그 언약궤를, 마지막 장소를 딱 지키고 있는…, 언약궤는 뭐냐? 언약이 계속 쏟아지는 장소, 계시가 쏟아지는 장소거든요. 언약궤를 지키고 있는 것은 인간이 아니고, 그 파수꾼이 인간이 아니라 천사입니다.

그러면 천사가 왜 언약궤 옆에 있느냐? 그것은 창세기 3장 24절에서 하나님께서 생명나무를 지키는 수비대가, 수호자가 누구냐? 천사들이에요. 천사들이 두루 도는 화염검 가지고 생명나무를 끝까지 사수하는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생명나무를 누가 노리느냐, 하는 거예요. 인간이 노리고, 악마가 노립니다.

그런데 인간은 존재하지 않고 사라지고, 그러면 누가 노리느냐? 악마가 생명나무까지 노리고 들어오는 겁니다. 그래서 마지막 전쟁, 악마와 미카엘, 천사와의 전쟁이 요한계시록 12장에 가면 마지막 전쟁이 그거예요. 주님께서 지키고자 하는 것은 생명이에요. 우리를 지키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천사가 어떤 식으로 지키는가? 그것은 누가복음 2장 14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라고 먼저 천사가 찬양을 가지고 지상에 있는 목자에게 전달하며 나타납니다. 목자는 나대지 않았어요. 목자는 그냥 양이나 쳤어요. 양이나 쳤습니다.

없는 존재, 살다가 결국 늙어 사라지는 없는 존재인 그 목자에게 생명이 어떻게 공급이 되느냐 하는 문제에 목자는 전혀 개입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영생을 얻고 내가 천국 가는 것? 그건 내가 나댄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내가 거기 관여가 안 됩니다. 그러니까 웃어야 하는 거예요.

사실 정확하게 말해서 내가 나대도 소용없다는 것을 두고 우리는 울어야 하고, 그 울음 속에서 우리는 영원한 웃음, 체셔 고양이의 웃음, 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웃음이 생기는 이 기이한 나라, 기이한 천국, 그 나라를 우리가 미리 경험하게 되죠.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구원받은 기쁨과 웃음은 계속 흘러나온다면 이건 우리 솜씨가 아니잖아요.

우리보고 나대지 말라고 해놓으시고 다른 쪽에서 활동을 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러면 이런 천사의 일을 하면서 인간이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인간이 해야 할 것은 바로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는데 충실해야 하죠. 상당히 역설적이에요.

왜냐하면 내가 여기 분명히 있는 데 있는 나를 내 힘으로 없앨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묘안을 짜내시느냐?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자기밖에 모른다는 것이 너무나 명확하게 잘 아니까 그 인간 안에다가 성전, 순전히 천사가 활동하는 성전을 지어버린 거예요.

결론부터 먼저 말씀드릴게요. 결론부터 먼저 말씀드리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논리가 좀 어려워서요. 성전 내용은 예수님 홀로 한 분께서 일하시는 내용뿐입니다, 성전의 모든 내용은. 그게 요한복음 5장 39절,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은 뭐냐? 인간이, 내가 누군지를 모르는 것은 어느 장소에서 발견되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내가 누군지를 모르는 거예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내가 누군지를 전혀 모르는 것은, 내가 어느 장소에서 발견되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 장소가 성전인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장소를 계산 안 하고 “엄마! 마늘 냉장고 어디에 넣었어?” 이것은 ‘내가 원하는 장소를 내가 만들면 되지.’ 이런 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이건 내가 만든 장소지 내가 발견되는 장소가 아니잖아요.

주님께서 이스라엘에 성전을 주셔요. 성전을 주시면서 성전을 점점 키웁니다. 키워버리면 이스라엘 전체가 성전이라는 그 장소 안에서 발견되게 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에요. 나 있고, 외부적인 것이 덮칠 때 외부적인 요소가 나를 없애주고 외부적인 요소가 여기 덮쳤다는 그 현상은 체셔 고양이의 웃음처럼 팍, 하고 퍼지게 만드는 거예요.

누가복음 2장 다시 보겠습니다. 목자 있습니다. 양 돌봅니다. 목자가 양 돌본다, 설명해 볼까요? “목자는 살아있고 양도 살아있다. 목자는 살아있는 나를 계속 밥 먹이고 돈 벌면서 살도록 양을 키운다.” 이게 뭐가 이상해요? 4분의 1미터는 몇 센티미터? 25센티미터. 이게 뭐가 이상합니까? 

“내가 살기 위해서 양을 키운다. 양을 키우면 돈이 생긴다.” 이게 뭐가 이상한 거예요? 이게 뭐가 잘못된 겁니까? 만약에 하나님께서 천국의 심판을 할 때 내가 경험했던 거, 익숙한 거 그거 질문하면 우리는 답변해 드리면 되잖아요. “너 누구야?” “열심히 살았습니다.”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고 “어떻게 열심히 했어?” “평생토록 열심히 살았습니다. 애 키우면서 열심히 살았습니다.” 주님께서 “그래서? 그래서 뭐 어쩌란 말이냐? 다들 열심히 사는데 그래서 어쩌란 말인데?”

“천사가 계시는 환경이 나를 덮쳤습니다.” 또는…, 천사 다음에 뭐가 오느냐 하면, 하나님의 성신이 와요. “성신이 덮치는, 성전이 망하고 난 뒤에 성신에 의해서 새로운 성전을 만들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환경이 덮친 겁니다.” 그다음에 “예수님이 오셔서 예수님이 십자가 환경 속에서, 이 땅 위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그다음에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셔서 성령이라는 그 속에서 우리가 다시 발견되었습니다.” “바로 그거야.” 바로 그거예요. 천사가 함께 있는 성전, 그 당시에 성전 말고 일반 이스라엘의 가정에는 천사가 없어요. 유독 성전에만 천사가 있고, 그 천사 있는 곳에는 인간이 범접하지 못하고 거기 접근하지 못합니다.

성전의 지성소, 그 앞까지만 너희들은 도착할 수 있고 그 외에는 되지 않는 거예요. 여기서 성전 앞에 왔을 때 “너 있음이야, 나 있음이야? 둘 중 하나만 선택해. 나 있음이야, 너 있음이야?” “나도 있고 천사도 있고.” “아니야, 아니야. 그게 아니야. 나 있음이야, 너 있음이야?” “천사 있습니다.” “그러면 천사가 있는 곳에서 너는 발견되게 될 것이다.” 그게 바로 성전을 건설하는 이유입니다, 취지입니다.

천사가 왜 인간들이 있는 그 세계에 끼어들었겠어요? 차별 하기 위해서, 차이 나게 하는 겁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천사가 있는 이유는 딱 이거에요. “나대지 마라. 말씀 지키는 거? 그건 다른 분이 하는 거야.” “그럼 우리는 뭐 할까요?” 그게 이제 중요한데요, 인간은 이건 뭐 시켜서가 아니라 성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을 섬겼습니다.

자, 우상을 왜 섬길까? 성전이 있는데 우상을 왜 섬길까? 그것은 인간은 없고, 인간 안에 악마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귀가 있어서 그래요. 마귀는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 신이 되게 했습니다.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네가 신처럼 된다.’라는 거예요. 신처럼 된다는 말이 뭐냐? 창세기 4장에 보면 그것은 가인이 보여줍니다.

그게 뭐냐? 욕구, 욕망이에요. 인간이 사는 게 왜 힘드냐 하면, 욕망이 있는데 욕망을 항상 키워요. 키우면 지금 욕망보다 내가 기대한 욕망이 더 벌어지게 되면 거기 빈칸이 있잖아요? 그 빈칸을 애써서 마저 채우려고 하루하루 악바리처럼 계속 활동하게 되어 있어요. 욕망이 있고, 욕망이 나에게 요구하는 게 있고, 요구하는 게 있기 때문에 우리는 쉬지도 못하고 욕망을 달성해서 내 욕망의 결핍을 마저 채우려고 애쓰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그 욕망이 일시적으로 채워지면, 또 욕망이 더 커져요. 자꾸 커져요. 암세포 같아, 이 욕망이라는 것은 암세포와 같아서 자꾸 키우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는 태어날 때 이미 죽었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죽고 사는 문제에 대해서 네가 신경 쓸 수가 없다. 네가 바르게 산다고 안 죽는 게 아니다. 이미 죽었는데 이제 남아 있는 것은 하는 것은 ‘왜 네가 죽어 마땅한가?’를 네 환경 변화를 통해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시편 115편 4, 5절을 제가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저희 우상은 은과 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라고 되어 있거든요. 우상을 그렇게 이야기 하는 겁니다. 이거 설명이 좀 필요해요. “저희 우상은 은과 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왜 우상에 대해서 주님께서 이렇게 친절하게 설명하느냐 하면, 네가 곧 우상이라는 거예요. ‘우상이 있다.’가 ‘우상이 행한다.’하고 연관이 없다는 거예요. 우상이 있어도 “네가 보기에 그 우상이 있어도 말 못 하지? 못 듣지?” “예.” “네가 그 우상이야. 네가 어떤 말을 하고 행동을 해도 하나님께서는 너를 그냥 금속 덩어리로 보고 있어. 너는 아무리 해도 널 구원하지 못하고, 너의 변화, 너 인간의 변화는 네 행동으로 달라지지 않는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인간이 우상을 만듦으로서, 비로소 하나님께서 인간이 우상 만드는 것을 허락함으로써 자기들이 보기에도 우스운 그 우상 모습과 같이 하나님이 나를 볼 때 우상처럼 그렇게 우습게 본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준 겁니다.

솔로몬 때 성전을 만들었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이 성전이 있는 한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성전 자체가 우상이라면 어떻게 하겠어요? 건물이 살아있는 건 아니에요. 그 안에 천사가 살아있죠. 천사가 활동하죠. 천사가 찬양하고, 천사가 심판하고, 천사가 복음을 전합니다.

천사가 복음을 전한다는 이야기는 누가복음 1장에 나옵니다. 천사가 와서 임신한 마리아보고 복음을 이야기해요.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 1:31-33).

‘네가 임신한 사람은 인간의 죄를 용서하실 우리 다윗의, 약속된 다윗의 자손이다.’ 이거 천사가 안 알려주면 마리아가 어떻게 알았겠어요? 자기가 임신한 분이 특별한 분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자, 여기서 한번 정리해 봅시다. 천사는, 하나님의 지시가 먼저고 천사의 존재는 나중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먼저고 천사의 존재는 나중입니다. 왜? 지시에 따라야 하니까. 하나님께서 천사 있는 성전을 만든 이유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천사처럼 되기를 원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시가 먼저 있고, 명령이 먼저 있고 죽어 마땅한 우리가 지시와 명령에 의해서 천사처럼 움직일 수 있는 그러한 백성, 그 백성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나대지 말라는 것은 뭐냐? 가만히 숨도 쉬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지시가 떨어지면 그때 움직이면 된다는 거예요.

참 쉽죠? 제가 예를 들겠습니다. 누가복음 1장에 사가랴라는 세례 요한의 아버지가 있는데 아버지가 열심히 제사를 드리죠. 순번제로 제사를 드릴 때 자, 세례 요한 아버지가 자기가 살아있기 때문에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어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것을 하나님 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세례 요한 아버지 사가랴를 어떻게 만들었느냐? 입을 다물게 만들어요. 말을 못 하게 만들어 버립니다(눅 1:20).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자기 존재를 의식하고 있는 사가랴, 그 내가 갑자기 말을 못 하니까 슬프죠? 이건 울어 마땅하죠? 울어 마땅한데 울면서 주님의 지시가 나대지 말라는 식으로 “너 가만있어!”

주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인데 가만히 있으라고 하면서 추가적인 지시가 왔는데 그 지시는 예상도 못 한 주의 일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임신이 돼서 태어난 거예요. 이름까지, 이름도 사가랴가 짓지 못하고 요한이라고 이름을 따로 지어야 했습니다. 그 이름을 지시대로 서판에 쓰고 난 뒤에는 말문이 터졌죠(눅 1:63,64).

이게 뭐냐? 우리가 우상과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경험케 하시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니니까, 울음 속에서 뭐만 남아요? 아무것도 아닌데 주님의 죄 용서하는 작업에 참여시켜 줬으니까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은 체셔 고양이의 웃음밖에 없죠. 아무것도 아닌데 자꾸 웃음이 나요.

그게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 우리에게 웃음으로 발현되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우상 아닌데요? 우리는 절에 안 가고 부처상 안 만들고 마리아상 안 만듭니다.” 이렇게 하잖아요. 그럴 줄 알고 골로새서 3장 5절이 있어요.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다시 말해서 “네가 거기 있느냐?” “예, 있습니다.” “네가 있는 게 아니고 탐심, 욕구와 욕망이 거기에 있다.”라고 너는 그렇게 너 자신을 그렇게 발견해야 한다는 거예요. 새로운 성령 안에서, 내가 누군지 몰랐는데 새로운 장소에 오니까 비로소 내가 우상이며 욕망덩어리라는 것을 발견하는 데서 나오는 터질 것 같은 웃음.

아, 십자가 앞에서, 피 흘리는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하나의 죄인이 아니고 그냥 죄였던 겁니다, 주일 낮의 설교처럼. 그냥 죄였던 거예요. 이것을 발견하는 것, 발견할 때 우리는 죄의 용서 안에, 그런 환경 안에 놓이게 되는 거예요. 죄 용서받은 그 환경 안에 우리가 재발견 되는 겁니다.

“나는 여기 있지 않고 용서하신 주님이 내 안에 계십니다.” 옆에 보니 “어? 천사도 저기 있네.” 천사가 뭐라고 해요? 우리가 “천사님, 수고했습니다.” 하면 “아이고, 그러지 마세요. 전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이렇게 하죠. 마찬가지로 이러한 주님과 함께 있는 환경에서, 나대지 마세요.

왜냐하면 모든 일은, 모든 성경 내용은 예수님께 다 쏠리고 예수님이 혼자 다 이룰 일입니다. 아무것도 한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뭐 하느냐? 바로 내가 우상이었다는 사실, 내가 나한테 나만을 위해서, 내가 가진 것, 내 가족, 내 위신, 체면, 내 사회적 포지션, 나에 대한 긍정, 이것만 붙들고 살았다는 사실을, 그걸 발견하는 데서 무한한 웃음이 계속 흘러나오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할 수밖에 없고, 기뻐하지 않을 수 없고, 주님 앞에 고마워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러한 새로운 환경 속에서, 십자가라는 환경 속에서 우리가 죄인인 것을, 죄 자체인 것을 드러내 주시니 비로소 나는 죽고 주와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기뻐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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