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유독 자리를 중시하는 나름의 국민성이 있는 듯하다. 외국인들이 매우 놀라는 한국인의 유별난 문화 1순위는 자리 맡기이다. 자리를 맡는 자체가 놀라운 것이 아니라, 한 공간에 대해 이미 값을 치르고 들어갔다면, 더 이상 아무 값을 치를 필요가 없는 자리를 위해 자신의 귀한 것을 던져놓는 것이다. 맘에 드는 위치에 지갑이나 휴대폰 귀중품들이 들어있는 가방 등을 사용해서 스스럼없이 자리를 맡는다.
이미 들어간 공간 자체보다 자기가 원하는 위치가 더 중요해진 것이고, 자신의 소중한 것으로 찜한 그 자리는, 마치 자기가 거기에 없어도 있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암묵적 의사표시이다. 물론 이런 행동에는 보이지 않는 믿음이 작용한다. ‘아무도 가져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믿음이 작동한다. ‘자리는 본디 움직일 수 없고, 내 일부가 거기 있는 한, 그 자리는 내 자리’라는 합리적인 듯 비합리적인 믿음.
믿음과 신뢰로 치장된 이런 한국인의 문화는 인간의 남다른 자리 집착의 본성을 상기시킨다. 내 자리, 그리고 내 위신, 내 체면, 내 자존심을 위해서는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강한 투지가 느껴지고, 혹여 누군가 자기의 자리를 건들었을 때, 그런 강한 투지는 살인 병기로 탈바꿈될 수 있다.
어느 자리에서 우연히 이런 대화가 오갔다. 왜 복음 앞에 이근호를 붙이지? 너무 말씀도 잘 듣고, 이야기도 잘 나누었는데, ‘이게 복음입니다’라고 마무리하면 아무 문제 없을 것을, ‘이게 이근호복음입니다’라고 하니 상대가 무척 화를 냈다는 것이다. 이미 들은 내용에 모두 수긍하고, 너무 깊은 말씀이라고 기쁨으로 받았던 그 말씀이, 단지 이름 하나가 덧붙여진 차이로 갈리는 건 뭐지? 복음을 이근호복음이라고 했다고 갑자기 들었던 내용이 변하게 된 건 아닐 텐데.
음식이 맛있다고 방정을 떨며 먹다가, 자신의 앙숙이 그 요리를 만들었다고 하면, 갑자기 상을 엎어버리는 현상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맛있게 먹던 음식이 갑자기 상했나? 요리사의 이름이 밝혀지기 전이나 후나, 음식은 변한 것이 없다. 이렇게 자신의 감정에조차 놀아나는 인간에게 어떻게 진리를 들을 수 있기를 바랄까. 자기 객관화가 된다는 사람도 어디까지나 감정이 자신의 깊은 내면에 잠잠히 있을 때만 가능하다. 수련회 때 어떤 분이 내뱉으신 복음이 다시 떠오른다. ‘네가 언제부터 진리를 듣는 자였느냐?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으면서...’
이야기의 자리가 파하고 난 뒤에, 속에서 꿈틀꿈틀 작동이 일어난다. ‘가만히 있어. 아무 생각도 하지 마. 자꾸 티 나는 행동하면 다들 오해해. 네가 신자인 줄로’ 제법 자기 객관화가 되는 줄 알았는데, 여지없이 감정이란 것에 제압되고 자아에 다시 놀아나고 있다. 더 이상 속이 시끄러워지는 것을 겪고 싶지 않다는 나가 등장해서 나를 단속시킨다.
요나처럼 다시스라는 회피의 공간을 물색하고, 한잠 푹 잘 수 있는 배를 찾듯이, 저번에 거절했던 누군가의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문자를 하고, 괜히 일할 건수들을 만들어 바쁨속으로 들어간다. 이렇게 영적으로 잠을 푹 잘 수 있는 공간을 찾는다.
자극되는 것을 피하려는 무의식의 작동이 결국 의식의 극치를 맛보게 될 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무거운 당나귀 같은 이 육체를 나 홀로 지고, 맘대로 가는 것 같지만 결코 자기 맘이 아닌 채로 가다가,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나를 불쌍히 여겨서 구원해 주실 은혜의 주님을 부를 정도로(찬송가363) ‘나’라는 원수는 예수님과 가깝지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굳이 이렇게 반복적으로 발각당해야 하는지, 실험실의 쥐는 치매 환자처럼 이전의 기쁨을 잊고 다시 발작한다.
실험당하고 사체는 폐기처분당해서 본래 자리로 돌아가고, 주님의 자리에서 자신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게 되는 일이 얼마나 가볍고 기쁜 일인지를 아는 지식이, 감사를 부르는 데 도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독한 귀신을 부른다. 발각 시켜주시는 분을 보지 못하고, 사람인 상대를 보고, 사람인 자신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상대도 이름이 있고, 나도 이름이 있으니, 어느새 생성된 자리에서 스물스물 올라오는 감정의 지배를 받으며 비참함을 느낀다.
실상, 인간은 자신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능욕과 저주를 대신 받고 죽으신 예수님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을 만큼, 세상 신에게 꽉 붙잡혀 있다. 그러나, 피조물의 역할은 세상 신 마귀에게 신나게 속고 놀아나는 것이다. 다만,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이 왜 비참하고 화가 나느냐는, 왜 그 모습을 밝히 비춰주신 분에게 고마워하지 못하고 있냐는 주님의 추궁은 모두가 받을 수 있는 혜택은 아니다.
하나님은 아셨지만, 요나는 몰랐던 것이 있었다. 요나는 기껏 자신의 감정을 기쁘게 해주는 하루살이 박넝쿨은 아끼면서도, 니느웨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르니 심판이 마땅한 자들이라 여겼다. 요나의 말에 틀린 것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좌우를 분변치 못하고, 옳고 그름을 알지 못하는 니느웨 사람들을 아낀 것이 아니라, 그런 버러지같은 자들에게조차 심판을 보류하시는 긍휼, 그분의 자비와 용서를 담을 공간을 아끼셨다. 그 공간에는 요나도 니느웨 사람도 따로 자기 자리를 맡거나 흔적을 남겨서는 안 된다.(욘4:10~11)
그러나 자신이 지옥 가 마땅한 존재인 것을 눈치채게 해주시는 주인의 손길이 닿아야만 어둠의 한계를 빠져나올 수 있고, 빠져나온 자만이 철저히 어둠이 되는 것을 마땅함으로 받고, 도리어 그걸 알려주신 분에게 고마워할 수 있게 된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죄만 보이는 어둠인 자신에게 더 이상 관심갖고 미련 두지 않고, 비쳐 주시는 빛만 요리조리 따라다니는 자리 없는 그림자가 될 수 있다. 더 나아가, 해나 달의 비췸이 필요 없는 곳, 하나님의 영광이 친히 비추시고 어린양이 등이 되는 새 예루살렘 성에서는 더 이상 그림자의 역할도 필요 없다.
그러나 육체를 입고 어둠으로만 있어야 할 이곳에서는, 빛만 보이게 되는 순간은 찰나이고, 그 순간은 빛의 속도만큼 빠르게 사라지고, 그 짧음은 내 손에 잡히지 않고, 그때의 기쁨과 감사는 느낀 적이 있었나 할 정도로 기억에서 사라지고, 나는 또다시 불평하는 원수의 역할을 충실히 하는 주님의 십자가 증거 제작기로 놀아난다.
이런 반복과정 자체를 가볍게 즐기게 하시는 능력이 어찌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을까. 그 불가능성의 순간, 사건, 사건이 종료되는 한 지점에서 잠시 주님의 기쁨이 이용하신 피조물에게 공유되는 그것만으로도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만큼 황공한 일이다.
사람은 감정이 주인이기 때문에 자신이 누구라고 규정하는 것은 반칙이다.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내가 이럴 줄 알고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제 말이 맞잖아요.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신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욘4:1~2) 귀신도 믿고 떠는 하나님을 내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렇다. 요나는 요나 자신을 몰랐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몰랐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알고있음으로 말미암아, 여전히 하나님을 모르기에 계속 마귀에게 까불림을 당한다. 나는 나름의 스마트함을 유지하며, 다시는 안 속으려고 다짐의 다짐을 하지만, 결국 더욱더 자존심이 박살 날 수 있는 결과는 언제나 확정되어 있다. ‘주님에게 이용당하는 것이 저에게 기쁨이고 영광입니다. 이용해 주시니 감사합니다’라고 한때, 자기 입으로 스스로 서원하듯 뱉었던 이 말에 김추자의 노래가 화답한다. ‘웃기고 있네. 이 위선자...거짓말을 어디서 밥 먹듯...’
요나는 어느새 자신을 선지자로 규정했다. 하나님의 뜻을 다 아는 자가 되어 있었다. 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요나의 자리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요나 자신이 만든 그 자리로 집 나간 귀신이 다시 돌아와서 살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얘들아, 요나에게 자리가 없어서 내가 있을 곳이 없었는데, 요즘 리모델링도 하고 청소도 다 되어 있데. 예전보다 자리가 더 넓어져서 너희들도 같이 가서 살자’ 요나는 이전보다 심히 악독해졌다. (눅11: 24~26)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 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찌라도 합당하니이다”(욘4:9) 내가 하나님에게 성을 내다 죽을지라도 저는 합당합니다. 정당합니다. 육체가 있는 한, 우리는 철저히 독한 마귀에 빙의되어 하나님에게 원망을 쏟아내고, 하나님을 향한 한 맺힘의 살기는 그분이 보이지 않기에, 손에 닿지 않기에 분함을 못 이겨, 스스로 자신을 죽여서라도 한을 풀어내고 싶을 정도로 지독하다.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 인간은 정말 인간이 아니다.
일방적으로 요나를 바다 무덤 속으로 던져주시고, 물고기 배속인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삼켜주시고, 필요하심에 죽음 속에서 뱉어내어 이용해 주신다. 이 ‘이용’해 주심이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를 요나는 깨닫고 잊어버리고, 깨닫고 잊어버리고를 반복한다. 그래야 요나 자신은 무엇으로도 규정되지 못하게 되고, 하나님은 자신의 메시지가 반드시 전달되게 하면서, 오로지 하나님 자신의 말씀을 향한 지독한 사랑을 계속 표출시킬 수 있다.
그 말씀이 신약에서 육신을 입고 오셔서, 이 세상에서 홀로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할 때 마침내 마귀는 움직였고, 그 발작에 가담되어 모든 인간이 한마음으로 말씀을 죽였던 증거가 십자가이고, 죽음을 뚫고 지옥에서부터 말씀 자체 이신 아들을 살려내시고, 하나님 사랑의 결정체인 부활 생명으로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분리하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히셨다. 하나님이 인정하신 유일한 자리는 하나님의 우편,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가 마침내 메시아가 되신 예수안 뿐이다.
이제 주님보다 높은 곳에 있는 피조물은 없다. 모두 주님의 발아래 있고, 모두가 주의 원수의 자리에 놓여있다. 우편의 자리에서 성령의 낚싯줄이 내려와 물고기를 낚을 때, 모든 물고기는 아직 원수 된 자리에서, 죄인 된 자리에서 주님께 발각당한다. 파닥파닥거리며, 분수도 모르고 난리가 난다. 상을 엎는다. 왜 내 자리를 건드냐고.
주님이 이름을 대동하고 오셨기에, 온 인류가 가해자가 될 수 있었던 예수님의 죽음이 내포된 그분의 이름 앞에서 입을 막지 못하는 자는 저주이고, 재를 뒤집어쓰며 입 막힘을 당한 자는 복이라 칭함을 받는다. 예수님이 친히 해주신 죽음의 입맞춤을 받은 자들은 본격적으로 생명의 일에 연루되기에, 서로 발을 씻어주는 자로, 서로 입 맞추는 자로, 서로 간에 피차 자신들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는 자로, 오직 주의 이름의 빛 앞에서만 행하는 자로 발견 당한다.
이것이 ‘복음을 듣는다’와 ‘이근호복음을 듣는다’의 차이일 것이다. 이근호복음이라는 말은 복음을 들은 누군가가 붙였고 그렇게 복음 앞에 이근호라는 이름이 붙여진 현상으로 말미암아, 분쟁이 유발되기도 하고 사람의 내부에서 불쾌함이 올라오게 하는 사건이 유발된다. ‘그냥 복음이라고 하면 될 건데, 네가 이근호복음이라고 말하니까 내가 불쾌하잖아.
그리고 이목사님은 복음이 그런 식으로 모독받고 있는 것을 아시면, 자기의 이름을 붙이지 말라고 나무라고 책망하셔야 하는데, 왜 가만히 계시는 거야. 아무런 저지를 안 하시니까 계속 이런 말이 돌고 그래서 내가 불쾌하잖아’ 정작 불쾌한 이유는 자신도 모른다. 그냥 싫은 게 싫은 것은 이유를 내가 아닌 나의 주인에게서 찾아야 마땅하다. 그런데 왜 여전히 껍데기인 ‘나’를 내세우게 될까.
복음이라는 자리에서 ‘나’도 ‘너’도 도무지 자신의 흔적을 지우지 못한다. 복음이라는 테이블에 자신의 제법 소중한 일부(?)를 던져놓고, 이건 내 자리라고 우기는 모습을 들킬 기회를, 이 복스러운 사건을, 복음 앞에 붙은 누군가의 이름이 봉사하고 제공하고 있는데, 모두 자신의 죽은 이름을 끝까지 포기 못 하기에 정작 살아있는 분의 보이지 않는 활동을 놓치고 있다.
우리 모두를 포도원 주인의 아들을 죽인 잔혹한 농부들로 들키게 해주고 계시는데, 예수님의 살과 피로 참여하게 하심을 기뻐하지 못하고 있다.(눅20:16 “사람들이 듣고 가로되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하거늘”) 예수님은 이곳에서 오셔서 오직 아버지의 기록된 말씀의 성취만을 생각하셨다.(눅20:17)
말씀을 전하는 자나 듣는 자나 하나로 뭉쳐져 예수님 앞에서 모두 복음을 듣는 자, 들을 수 있는 귀를 선물로 받은 자가 되고, 복음을 제대로 듣고 있다면 어느 누구도 자기 이름을 제발 복음에 함께 붙여달라고 원하는 자는 있을 수 없다. 그런데 복음을 전해 들은 누군가의 안에서 작동되는 대로 복음 앞에 이근호를 붙였다는 것은, ‘이근호’라는 첫 번째 이름은 자신의 의미(자아)와 함께 찢기고, 두 번째 이름인 주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의미를 전달하고 있는 메신저인 것을, 그 사람은 눈치챈 것이다.
혹여 이근호복음이라는 명칭에 거북스러움이 올라왔다면, 복음에 ‘나’라는 오물을 투척해서 복음 한쪽에 자리를 점거한 마귀의 짓거리가 발각되면서, 내 속에서 괴물이 불쾌함을 느끼는 것이다. 오물을 치우려는 주님의 작업으로부터 내 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안달하면서, 나를 치우려는 주님을 미워하고 죽이고 싶은 악이 발동하는 것이다. 나의 본래 자리는 처음부터 쓰레기장이었는데, 그 자리는 자신이 맡고 싶은 자리가 아니기에 분이 난다.
이런 분쟁에 말려든 사도바울은 정중히(?) 부탁한다. 제발 저 좀 건들지 마시고요. 제 안에 어떤 분의 상처가 있어요. 그분의 상처 때문에 저는 날마다 죽음으로 넘겨져요. 있지도 않은 나, 나는 좀 제발 찾지 마시고, 있지도 않은 너, 너도 좀 찾지 마시고, 당신도 할 수 있다면 한 번 넘겨져 보세요. 물고기 뱃속 같은 그분의 죽음 속으로’
나는 이근호라는 분이 목사님이고 어디에 살고, 이런 외모적 정보는 대략 알고 있으나 그분이 누구인지 잘 모른다. 처음 유튜브를 통해 복음을 들었을 때, 가장 궁금했다. ‘이분은 누구지?’ 정말 누구인지 궁금해서 나온 물음이 아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참으로 신기해서였다. 어떻게 말을 하는데 그 사람이 안 느껴질 수 있지? 비록 짧게 산 인생이지만 통틀어, 한 번도 사람이 말할 때 사람이 안 느껴지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부모든, 선생님이든, 의사든, 경비아저씨든, 친구든, 나도 마찬가지이고, 모두가 할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하면서도 자신을 중심으로 놓고 ‘말’이라는 것을 한다.
그들이 대놓고 ‘나는 나다’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모든 표현에 핵심 요소는 항상 이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내 귀에 들리는 이 복음은 그 앞에, 이근호든, 장동건이든, 무슨 이름을 갖다 붙여도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이 그 말 안에 포함되지 못하고 있고, 복음이 가려진다는 것이 오히려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지니 신기한 것이다. 복음 앞에 자신의 이름이 붙었는데, 자신이 그 복음에서 찾을 수 없는 자가 되어 있다면, 오히려 그의 이름이 복음 앞에 붙여짐으로 복음이 복음다워진다. ‘나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이미 죽은 자입니다’라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하게 되기 때문이다.
처음 이 복음을 듣고 언니에게 말씀에서 예수님만 들린다고 말했을 때, 언니는 그게 무슨 생뚱맞은 말이냐고, 좀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말이 되는 말을 하라고 했을 때, 그때부터 나는 말씀에 매인 채, 듣고 또 들었다. 언니의 반응이 납득이 갔기 때문이다. 누가 나처럼 이런 식으로 복음을 표현하면, 나라도 언니와 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 같다.
‘예수님의 십자가만 증거하는 말씀’이라는 정답은 이미 던져져 있었지만, 그 정답에 대해, 나를 내가 납득시키지 못하고 있었기에 알 수 없는 의심이 계속 상주했다. 말에서 사람이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예수님만 들린다고 대충 말을 바꾼 것은 아닐까...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듯, 납득이 99퍼센트이고, 의심이 1퍼센트라고 해서, 복음을 제법 듣고 있다는 말은 있을 수 없다. 믿음과 불신은 퍼센트로 가늠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공존 불가이다. 0.0001퍼센트의 의심이 나머지 모든 믿음을 전복시키는 것은 단지 주님이 정하신 ‘때’의 문제이다.
내 안에 자리 잡은 울림은 ‘나는 왜 믿음이 없지, 믿음이 부족하다’라는 류가 아니었다. ‘내가 여기에 왜 있지...’라는 부조화를 체감하며, 그저 처음에 먼저 넘겨받았던 정답,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복음 안에서 예수님을 드러나게 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을 안고 말씀에 계속 끌려갔다. 무슨 근거로 예수님만 들린다고 말했는지, 그냥 상상적, 감성적, 신비주의처럼 넘어가는 느낌 같은 느낌 말고, 정말 그 근거가 뭔지 이끌리고 또 이끌렸다.
그리고 이제 그 답의 근거를 ‘이근호복음’이라는 이 명칭이 알려준다. 사망의 이름과 생명의 이름이 공존하는 자를 통해 전해지는 복음이 생명을 품은 또 다른 누군가를 어딘가에서 발견하는 현상. 이것이 사람을 이용하시는 주님의 가장 지혜로운 전도 방식이고, 눈에 보이는 게 전부인 사람들에게는 가장 미련한 전도이다.(고후4:12~14)
전해진 복음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출현 된 자들에게서 생명이 발현되는 주님의 전도 현장에서 피차간에 주님을 목격해 버린 증인들이 등장한다. 내가 목격된 것도 아니고 네가 목격된 것도 아니다. 서로가 그저 출연한 사건 안에서 발견된 무리인 ‘우리’를 목격하며, 그 새로운 창조 작업의 근원이 되시는 하늘에 있는 어머니, 새예루살렘을 증거하는 것이다.
엘리야가 엘리사를 떠나 위로 올려질 때, 그 둘을 갈라놓은 것은 불과 바람이었다. 엘리야와 완전히 단절되는 순간, 엘리사는 덩그러니 남아 홀로 제 길을 가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자신의 의미를 찢듯, 본래의 자기 옷을 찢었다. 엘리사는 이제 엘리야에게서 떨어진 겉옷을 입고, 엘리야의 의미로 사는 것이 아니라, 엘리야의 하나님의 의미로 살게 된다.(왕하2:12~14)
엘리사가 부르짖으며 애타게 찾았던 건, 엘리사의 하나님이 아닌, 엘리야의 하나님이었다. 이미 찢어진 자가 찢어져 없어진 자신의 하나님을 찾는다는 그 자체가 거짓이다. 찢어진 자는 오직 자기를 찢으신 그분, 불과 바람으로 올라가신 그분의 이름을 부른다. 그분의 하나님을 찾는다. 예수님을 위로 올리신 분이 하나님인 것을 알고, 하나님이 올리신 그분이 내 마음을 찢으신 예수님인 것을 알기에, 예수님을 그리고 예수님의 하나님을 부른다.
엘리사가 부르짖은 아버지, 그리고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은 장차 신약에 오실 우리의 뿌리, 우리의 왕이신 예수그리스도이셨다. 나를 찢고 삭제하시는 주님과 주 사이에서 생성된 새로운 무리들, 그 무리를 ‘우리’라고 부른다. “주께서 내 주께” 사이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우편에 앉히신 주님 사이에서 발생된 ‘내’로 이름 붙여진 우리, 그 ‘나’는 엘리사처럼 이미 찢긴 자들이고, 요나처럼 이미 십자가에 삼켜진 자들이다.
이제 엘리사는 엘리야의 겉옷에서 공급되는 능력으로 하루하루 살려진다. 요나는 십자가에서 이미 죽은 자로써 하루하루 생명으로 토해져서 주의 활동을 증거한다. 복음 앞에 붙는 이근호라는 이름이 이미 찢긴 이름인 것을 감지한 자들은, 이제 이근호를 찢으신 예수님의 하나님을 찾게 될 것이다. 나를 위해 하나님을 찾았던 그 ‘나’를 삭제해 주시면, 더 이상 내 자리, 나의 위치에 연연하지 않고, 속해진 공간 자체로 기뻐하며 자유롭게 떠다닐 것이다.
예전이 천연 화장품 CF에서 이런 말을 들었다. ‘먹지 마세요. 피부에 양보하세요’ 말씀은 늘 나를 향해 이렇게 책망한다. ‘죄를 먹지 마세요. 피에 양보하세요’ 죄다 죄인 행위에 의미를 두며 곱씹고 소화 시키려고 애쓰지 말고, 이제 주님의 십자가에 재료로 드려짐에만 감사하라는 책망이 말씀 속에 쟁쟁하다.(고전11:29) 혹시 그럴 기회가 다시 올지 알 수 없지만, 언니가 다시 나에게 그때와 같은 물음을 던진다면, 이제는 주저없이 답할 수 있다. ‘언니, 말씀에서 예수님만 들려!’
댓글
공은주
시작부터 끝까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기 부인이 없으면 다른 복음입니다. 전하는 자나 듣는 자나 자기 부인이 없으면 '우리'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근호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부인이 없기에 다른 복음이고, 그 복음을 듣고 불쾌함을 느끼는 것도 자기 부인이 없기 때문에 한 통속입니다.
오히려 다른 복음을 듣고 기쁨이 넘치고 감사가 넘치는 감격입니다. 갈라디아서1장의 말씀이 살아서 활동하시는 체험의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갈1: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갈1;16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
지 아니하고...
구자근
“~말씀에서 예수님만 들려요.” 했듯이,
윗글을 한 시간동안 읽으면서 정말 예수님만 들립니다. 어떻게 나에게 감히 이런 글을 읽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는지. 감사, 감격... 이라는 말조차 너무 무색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그래서 뭐라도 표현하고 싶은데 말로 할수록, 글의 의도에서 벗어나버릴 것 같은 두려움으로 조용히 있습니다만...
‘아, 할 수 있는 한 가만히 있자. 저자에게 예의다. 전 지구적 돌폭풍 앞에서...’
<내 안에 자리 잡은 울림은 ‘나는 왜 믿음이 없지, 믿음이 부족하다’라는 류가 아니었다. ‘내가 여기에 왜 있지...’라는 부조화를 체감하며, 그저 처음에 먼저 넘겨받았던 정답,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복음 안에서 예수님을 드러나게 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을 안고...>
이 부분을 읽으면서, ‘아, 자기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를 어떻게 저렇게 정확하게 끄집어낼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쩌면 인간은 이 땅에서 자신의 한계를 정말로 인지할 수 없고, 알 수도 없기에 일평생 높은 이상을 세워놓고 달려가다가 급기야는 병든 쭈글이가 되어서, 어느새 어디로 간 건지 사라지고야 마는 먼지 같은 존재 정도로 살고 있으니까요. 아니, 먼지라면 얌전하기나 하지, 이건 끝까지 자기 알아달라고, 내가 옳다고 성내어 죽기까지 해서라도 자기 한을 풀어야 마땅하다는 듯 지랄지랄하다가 흙덩이로 가라앉을 뿐이니까요.
한계없음을 절감한다는 표현은 자주들 하지만 그것은 이 시간의 수평선상에서나 하는, 자기 되먹임의 겸손한 표현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야말로 아무런 의미없는 수다에 불과한 셈이죠. 오히려 “그래서 너희들은 기껏 이 땅에서 서로 울겨먹기에 여념없는 짐승이라는 것이다!”라는 말씀 앞에 세워놓으면 금방 발각되기에 딱 좋은 인간 본연의 ‘자기선함’ 정도의 표현이라고나 할까요... 그래서 복음 안에서의 ‘한계절감’과 그 증상이라는 것이 느껴질 때는, 이미 본인으로부터가 아님을 눈치채게 된다.
<~그리고 이제 그 답의 근거를 ‘이근호복음’이라는 이 명칭이 알려준다. 사망의 이름과 생명의 이름이 공존하는 자를 통해 전해지는 복음이, 생명을 품은 또 다른 누군가를 어딘가에서 발견하는 현상. 이것이 사람을 이용하시는 주님의 가장 지혜로운 전도 방식이고, 눈에 보이는 게 전부인 사람들에게는 가장 미련한 전도이다(고후4:12~14).>
저도 감히 윗글 표현에 절감합니다. 오늘날에 와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십자가’라는 말자체는 사람들에게 너무나 잘 들리고 이해가 가는 말이죠. 그렇지만 ‘이근호복음’이라고 했을 때는 불편함, 보이지 않는 분쟁, 이단 소지...등의 공격을 얼마든지 받을 수 있는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합니다. ‘복음은 가히 전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야 한다... 또 사람들은 다음 물음이 나와야 한다. 왜 이근호복음이라고 했는지... 그래서 주고받으면서 왜 예수님의 피와 살이 찢기시고, 그 이름에 합하는 자는 똑같은 구멍 안에서 자기 인식, 자아가 찢기면서 저 피의 복음이 자리하는지를...’ 이 대답을 저 윗글의 글쓴이는 너무나 충실하게 보여주었음을 몇 번을 읽을수록 더욱 확인하게 된다는 겁니다.
<~지금 내 귀에 들리는 이 복음은 그 앞에 이근호든, 장동건이든 무슨 이름을 갖다 붙여도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이 그 말 안에 포함되지 못하고 있고, 복음이 가려진다는 것이 오히려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지니 신기한 것이다. 복음 앞에 자신의 이름이 붙었는데, 자신이 그 복음에서 찾을 수 없는 자가 되어 있다면, 오히려 그의 이름이 복음 앞에 붙여짐으로 복음이 복음다워진다. ‘나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이미 죽은 자입니다’라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하게 되기 때문이다~>
글쓴이의 글을 대하면서 수련회 녹취에서 보았던 말씀 자락이 떠오른다.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출 33:22-23)”. 하나님께서 모세로 하여금 하나님의 긍휼이 생산되는 현장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끼어들 수 없게 합니다.]
복음이 쏟아지는 현장을 수시로 왔다갔다 해도,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은 오롯이 “내 주와 주님”(시 110:1)만의 사이에서 맺어지신 약속, 그 비밀의 세계에서 아무도 못 알아듣는 방식으로만, 저주와 심판을 가르시면서 복음에서 복음으로, 믿음에서 믿음으로 전해짐을 감사합니다.
공은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사도행전4장12절 말씀처럼 '그리스도 복음'외에 그 어떤 이름도 붙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오죽하면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했겠습니까. 예수님 외에 다 저주입니다.
이 댓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속에서 마귀는 자기 의미를 놓지 않으려고 울부짖는 사자처럼 찾고 있습니다. 나오는 것은 다른 복음외에는 나올 것이 없습니다. 저주 받아 마땅합니다. 죽은 시체 맞습니다.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신 주님께 깊은 감사드립니다. 영원히 찬송 받으시기 합당합니다.
임청일
한국은 유독 자리를 중시하는 나름의 국민성이 있는 듯하다. 외국인들이 매우 놀라는 한국인의 유별난 문화 1순위는 자리 맡기이다. 자리를 맡는 자체가 놀라운 것이 아니라, 한 공간에 대해 이미 값을 치르고 들어갔다면, 더 이상 아무 값을 치를 필요가 없는 자리를 위해 자신의 귀한 것을 던져놓는 것이다. 맘에 드는 위치에 지갑이나 휴대폰 귀중품들이 들어있는 가방 등을 사용해서 스스럼없이 자리를 맡는다.
중요하지 않은 것을 놔둔다. 혹시 잃어버릭 경우에 대비해서 손해보지 않고자 하는 속셈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누가 내 자리를 옮겨논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염려를 하면서 일어나지 않은 일은 미리 걱정 하지 않는다
고 애써 진정시킨다.허지만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일이라는 방패를 가지고 있다.
어느 자리에서 우연히 이런 대화가 오갔다. 왜 복음 앞에 이근호를 붙이지? 너무 말씀도 잘 듣고, 이야기도 잘 나누었는데, ‘이게 복음입니다’라고 마무리하면 아무 문제 없을 것을, ‘이게 이근호복음입니다’라고 하니 상대가 무척 화를 냈다는 것이다. 이미 들은 내용에 모두 수긍하고, 너무 깊은 말씀이라고 기쁨으로 받았던 그 말씀이, 단지 이름 하나가 덧붙여진 차이로 갈리는 건 뭐지? 복음을 이근호복음이라고 했다고 갑자기 들었던 내용이 변하게 된 건 아닐 텐데.
음식이 맛있다고 방정을 떨며 먹다가, 자신의 앙숙이 그 요리를 만들었다고 하면, 갑자기 상을 엎어버리는 현상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맛있게 먹던 음식이 갑자기 상했나? 요리사의 이름이 밝혀지기 전이나 후나, 음식은 변한 것이 없다. 이렇게 ㉮자신의 감정에조차 놀아나는 인간에게 어떻게 진리를 들을 수 있기를 바랄까. ㉯자기 객관화가 된다는 사람도 어디까지나 감정이 자신의 깊은 내면에 잠잠히 있을 때만 가능하다. ㉰수련회 때 어떤 분이 내뱉으신 복음이 다시 떠오른다. ‘네가 언제부터 진리를 듣는 자였느냐?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으면서...
㉮감정에 놀아나지 않는 이가 어디있나?
㉯전혀 묵시적인 관점이 아니다
㉰ 네? 내?
‘나’라는 원수는 예수님과 가깝지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굳이 이렇게 반복적으로 발각당해야 하는지, 실험실의 쥐는 치매 환자처럼 이전의 기쁨을 잊고 다시 발작한다.
발작하다가 뜻밖의 새로운기쁨에 소스라친다..
자신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게 되는 일이 얼마나 가볍고 기쁜 일인지를 아는 지식이, 감사를 부르는 데 도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독한 귀신을 부른다
자신의 행위의 결과로 보는 점
그러나 지금 내 귀에 들리는 이 복음은 그 앞에, 이근호든, 장동건이든, 무슨 이름을 갖다 붙여도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이 그 말 안에 포함되지 못하고 있고, 복음이 가려진다는 것이 오히려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지니 신기한 것이다. 복음 앞에 자신의 이름이 붙었는데, 자신이 그 복음에서 찾을 수 없는 자가 되어 있다면, 오히려 그의 이름이 복음 앞에 붙여짐으로 복음이 복음다워진다. ‘나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이미 죽은 자입니다’라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하게 되기 때문이다.
장동건 복음?
이제는 주저없이 답할 수 있다. ‘언니, 말씀에서 예수님만 들려!’
선줄로 안자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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