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선

돌이 아브라함 자손이 되기까지

아빠와 함께 2025. 1. 11. 08:09

어떤 사람들은 삶은 수고와 땀으로 점철되어 있고, 마치 형벌 받는 인생인 것 같다고 말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 지옥 같은 세상에 그다지 미련 두지 않고 소소한 행복으로 잠시 잠시 숨을 고르며 최소한 자신에게만큼은 부끄럽지 않고, 그래서 고마울 수 있는 하루가 되도록 최선을 다해 산다고 말한다.

그러나 주의 성령이 임한 자들은 ‘지옥 같은’ 곳의 삶을 사는 게 아니라, ‘지옥 가 마땅한’ 삶을 미리 경험한다. 험난하고 고통스러운 고난을 상상할 필요는 없다. 어떤 특정 상황을 상정할 필요도 없다. 감사의 대상이 교체되는 현상은 ‘죽어 마땅한’ 마음을 쉬지 않고 공급받는 구조 안에서만 일어난다.

내가 나와 헤어지지 않고는 감사는 대상을 붙이든 안 붙이든 언제나 ‘나’가 되기에, 인간에게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고마워할 대상이 바뀌지 않는다. 감사는 하는 게 아니고, ‘누구에게’ 향하고 있는가의 문제였다. 이미 죽었는데, 정말 다시 살아나신 한 분, 예수님이 다시 찾아와 주셨기 때문에, 그분의 피와 만나고 죽음에 합류되어 그분이 미리 거쳐 가신 심판 속을 거침없이 통과한다. ‘나’로는 불가능한 일이 내가 이미 죽었음을 통보해 주신 ‘주님’이 대신 사시니, 불가능이 가능이 된다.

“이 말씀 한 번 들어보세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들려요”
한 이방인이 대답했다. “예수님이 누구예요?”
한 교인이 대답했다. “그래요? 한번 들어볼게요. 저는 이미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거든요”

이방인은 관심이 없었기에 자리를 떠나고, 교인은 익숙한 분야라 여겼기에 상대에 대한 성의를 보이며 일단 들어보았다. 말씀을 듣고 난 후, 그 교인은 걱정스러운 눈빛을 던지며 친절히 말해주었다.
“당신이 걱정되어서 해주는 말인데, 이상한 교리에 빠진 거 같아요. 이거 안 듣는 게 좋을 거 같은데..., 도대체 여기에서 무슨 예수님이 들린다는 거죠? 교회에 대한 비방이고, 2천 년 기독교 역사와 교회를 지켜내기 위한 주의 종들의 숭고한 희생을 모독하는 내용뿐이잖아요. 이건 예수님이 피 흘려 값 주고 사신 교회와 그분의 사랑을 모독하는 것과 같은 내용이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만 들리게 되는 건데. 예수님의 피를 욕보였던 존재한다는 모든 것들이 죄다 예수님의 피 앞에 도로 모독받고, 그분의 분노의 불 앞에 태워 없어져야 하는 증거들, 이 세상의 교회도, 교인도, 인본주의적인 다른복음과 다른 말씀도 다 태워지고, 복음을 전하는 데 쓰시는 성도라는 존재조차도 죽음으로 넘겨지고 남으시는 한 분, 예수님이 완성하신 십자가만 들리게 되는 건데...’

그래서 저절로 감사가 나오게 되는 건데. 나를 철저히 죄인으로 규정하시는 말씀 앞에 부인할 길이 없어서 감사가 나오는 건데. 사람은 못 하지만 하나님은 하신다는 말씀의 성취 앞에 놀라면서 할 말을 잃는 건데. 그렇지 않고는 어떻게 인간이 자신을 부인한단 말인가. 어떻게 마귀가 자기 자신을 부정한단 말인가.

공기가 없이는 소리가 전달되지 않듯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우기며 제아무리 아우성을 치고 까불어도, 주님이 호흡을 불어넣어 주지 않는 자들의 소리는 하나님에게는 단 한 마디도 전달되지 않는다. 생명의 공기 없이 죽음으로 호흡하는 기도는 하나님이 듣지 않으시는 게 당연하다.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피조물이 이미 듣고 있고 세상에 가득 찬 복음을 불순종이 가득 채운 육체는 듣지 못한다.

성도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바람이 부는 곳에서 소리를 전달하기 위해 잠시 출현한다. 복음은 황량한 광야 세상에 보이지 않는 소리만 울리는 것과 같지만, 존재만 보이는 이 세상은, 더구나 기술 발전이 이루어 낸 더욱 화려해진 문명은 광야를 도리어 환상으로 뒤바꾸고 보이지 않는 소리를 세례요한같은 선지자로, 보이는 존재로 바꾸기를 더욱 힘쓰고 있다.

‘나’라는 존재가 죽음으로 넘겨지는 현상을 설명할 필요는 없는데,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말할 필요는 없는데, 현상은 말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말의 세계를 찢고 말씀이 작동되는 사건으로 나타나는데, 굳이 누군가는 그 쓸데없는 것을 해야 하기도 한다. 주께서 죄인으로 들통 내는 방법은 죄인이 스스로 정하는 것이 아니다.

분명히 살아 움직이고 있는 몸이 있는데 시체로 비치는 경우는 내가 있는데 나를 보지 않고 나 아닌 다른 것을 발견한 유령같은 타인을 통해서 내가 없음이 확인된다. ‘넌 대체 누굴 보고 있는 거야?’ 이 낯선 상황이 왜 이리 고마운지. 안면몰수하는 그 상황이 마치 내가 부인할 수 없는 나를 누군가 대신 부인해 주기에 그것이 희생이고 봉사임을 깨닫게 된다. 서로가 서로에게 낯선 유령이 되면서 그 자리에는 오직 성령의 주선만 남는다.

빌립도 에디오피아 내시도 서로에게 관심이 없다. ‘당신은 직업이 뭐요? 어디에서 살아요? 몇 살이에요?’라는 이딴 거 하나도 관심 없다. “선지자가 말하는 이가 누구를 가리킴이요?” “빌립이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행8:34~35) 둘의 관심사는 한 분에게 꽂혀있고, 그렇게 복음을 나누며 행복하게 살았다는 해피엔딩이 아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둘 사이는 쪼개짐이 일어났다. 마음 아파하며 서운해하지 않았다. 그들의 마음에는 이미 기쁨의 대상이 담겨있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서로’는 없다는 고백이, “우리는 죽었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 것이다”라는 말씀이 친히 껍데기를 통해 비치는 그것이 나에게는 죽음의 현상이고 주님 앞에는 생명의 현상이다. 구약의 이스라엘이 주목했던 언약궤가 신약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 친히 안착하셨다. 주의 살과 피가 성령을 통해 마음까지 파고들었을 때, 주님과 주님의 만남은 이렇게 유령끼리의 만남이 된다.

내가 나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도 아니다. 내가 형제를 알아보는 것도 아니고 그렇기에 내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도 아니다. 숨어계신 하나님이 주의 이름을 앞세워 홀로 일하셨던 것처럼, 아버지와의 약속을 성취하신 예수님의 다 이루심의 공로가 여전히 은닉된 채 홀로만 살아계시고 홀로 활동하신다.

얼마나 인간이 구제 불능이고, 선악 바이러스에 심각하게 감염되었으면, 하나님이 친히 육신이 되시고, 그분의 살과 피를 주러 오셔야 했을까. 이 세상에 구해야 할 주의 백성이 있음이 그분의 찢기신 몸과 그 몸에서 뿜어져 나왔던 피로 말미암아 명확해진다. 애굽에서 이끌어낸 이스라엘은 예수님의 새로운 피조물이 미리 비친 비유였다. 피에서 나온 백성, 그리고 그들을 하나 되게 해서, 어린양의 피로 뭉쳐서 만드신 나라, 이스라엘.

어린양의 피가 발라졌고, 그 고기가 이스라엘의 몸에 담겼다. 그들이 무엇으로 살고 있는지를 상기시키는 만나가, 피를 내기 위해 갈기갈기 찢기 어린양의 고기처럼, 그렇게 이 땅에 오셔서 찢기실 예수님의 살처럼, 하늘에서 내렸다. 만나가 새벽이슬처럼 내려앉았다. 하나님 홀로 일하시는 밤이 지나고 나면, 잠자듯 죽어있던 자들에게, 죽었으니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자들에게, 밤새 홀로 일하신 주님의 공로가 일방적으로 주어지고 먹여졌다.

주께서 일방적으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시고,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말미암아 어느 법에도 얽매임 없이 자유롭게 성령의 하시는 일을 증거하게 하신다. 그리고 여전히 이 모든 주의 일에 저항할 수 있는 죄를 육신에 그대로 남겨두셨다. 깨끗하게 치워주지 않으셨다. 주의 의의 충만이 어떠함을, 사랑의 힘이 무한에 닿음을 보이시려고 죄가 담긴 육체를 함께 품으셨다. 주의 질투의 분노가 무한하심을 보이시기 위해 죄까지 삼키셨다.

성도는 죽음같이 강한 주의 사랑과 지옥같이 잔혹한 주의 질투를 담고 주님이 꾸시는 꿈을 함께 꾸는 기계가 된다. 주의 사랑하는 자는 주께서 깨우실 때까지 신나게 주의 꿈을 꾸어야 하고 꿈에 휘둘린다. 성도는 매일 똑같은 꿈을 꾼다. 주의 언약을 미워하며 버리고, 그렇게 버려진 언약이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가동해 나가는 꿈이다. 예수님의 이름만 빛나도록 내 이름인 아담의 이름값을 제대로 하면서 들러리 노릇을 잘하게 하신다.

들러리 역할은 간단하다. 자기가 주인공인 줄 착각하며 죽기 살기로 말씀을 지키려고 하면 되고 복음을 목숨보다 귀히 여기면 된다. ?   아브라함이 언약의 아들 이삭을 지키려고 한 것처럼, 이삭이 복의 근원인 맏아들 에서를 지키려고 한 것처럼, 야곱이 사랑하는 여인의 맏아들 요셉을 지키려고 한 것처럼, 유다가 언약의 통로라 생각한 셋째 아들을 지키려고 한 것처럼,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율법을 지키려고 한 것처럼, 그리고 베드로가 목숨 걸고 예수님을 지키려고 한 것처럼, 주의 꿈을 꾸는 기계들은 막무가내로 복음을 사모하면 된다.

그래야 보인다. 한낱 비유인 주제에 언약을 지키려고 애를 쓸 때, 정작 진짜 하나님의 뜻은 나로 인해 미움을 받고 버려지고 있었다는 것을. 주의 말씀을 거역하는 짓만 할 수 있는 자가 뭘 했다는 순종은 성립될 수가 없다. 버려진 그곳에서 마치 다윗의 등불처럼 하나님이 친히 보호하시고 꺼지지 않게 지켜내시고 이루어내셨다는 다 이루심의 언약 완성이 나타난다. 은닉된 채 보이지 않게 주의 이름이 홀로 일하시면서, 오직 주께만 범죄 할 수 있는 자가 되게 하시고, 주께서 꺾으신 뼈로 기뻐하도록, 예수님의 죽음 속에 기쁨으로 참여할 수 있게 하신 것을 감사하게 만드신다.

하나님이 지극히 작고 약한 모습 뒤에 숨어계시기에, 이 세상에 몸담은 어느 누구도 육체로 나타나신 보이는 하나님 앞에 교만해질 수 있다. 하나님의 매복 작전에 걸려들어, 하나님의 패배하시는 모습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도사리는 교만의 왕, 마귀의 궤계가 만천하에 밝혀질 수 있다. 인간 대 인간으로 상대의 티를 꺼내주는 어줍잖은 판단은 해줄 수 있지만, 자기 자신의 속으로 들어가 들보를 꺼내는 자신의 완전한 패배는 오직 주님의 패배당하신 모습이 우리 속까지 찾아오셔야 가능하다.

예수님의 희생 앞에 무조건 항복을 외칠 수 있는 철저한 범죄자로 발각당한 사람은 이 세상을 다 가진 자보다 더 행복한 자이다. 진정한 항복은 사랑을 주시는 분 앞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다. 두 팔을 들고 항복이라고 외치며, 더 이상 내가 사랑할 필요가 없고, 내가 믿을 필요가 없고, 더 이상 내가 지킬 필요가 없는 나로부터의 온전한 자유를 주님의 사랑 안에 갇혀서 무시로 느끼기만 하면 된다.

이제는 주안에서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것은 없고 육신을 통해 ‘생긴 일’만 비치면서 주께서 육신의 껍데기 벗겨주실 때까지, 호흡을 거둬주실 때까지 돌멩이처럼 가만히 있기도 하고, 때로는 주님의 발길에 차여 구르기도 하고, 주께서 던지시면 떨어진 그곳에 그대로 있으면 알아서 다 하신다. 누가? 아무것도 아닌 무가치한 돌멩이를 쓰시는 그분이.

 

 

댓글

정대은

아멘. 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으니 화를 내는게 기본값인것 같습니다.넌 무엇이길래 죽음에대해 두려움이 없는가?  그것은 인간적인 결의와 결이 다른것이라서 그런 반응이 나오는 거겠지요.긍휼이 여기는마음이 가끔은 들지만 저도 육의 몸인지라짜증나는것은어쩔수업네요. 빨리 주님보는게 소원입니다!아무튼 무가치함에서 나오는 자유야 말로 삶이 기쁨으로 넘치는 이유가 됩니다. 감사합니다.

이근호

육신에서 시작해서 자체로 우상이 되고, 그 우상이 돌에 불과함이 되고, 그 돌에서 ‘죽음의 힘’이 나오고, 그 ‘죽음의 힘’에서 주님에 대한 저주로 나아가고, 그 저주를 받아 주님에게서 ‘피’가 나오고, 그 피에서 “다 이루었다”가 나오고, “다 이루었다”에 근거해서  ‘최후의 심판’이 주어질 때, 성도는 비로소 ‘나를 위한 나의 육신’이 아니었음을 알게 됩니다. 비로소 내가 나에게 남이 됩니다. “‘나’란 지긋지긋한 과거의 진장이다.”   “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 3:9)                                                            ? 연장?진상?

임청일

"들러리 역할은 간단하다. 자기가 주인공인 줄 착각하며 죽기 살기로 말씀을 지키려고 하면 되고 복음을 목숨보다 귀히 여기면 된다. ?   아브라함이 언약의 아들 이삭을 지키려고 한 것처럼, 이삭이 복의 근원인 맏아들 에서를 지키려고 한 것처럼, 야곱이 사랑하는 여인의 맏아들 요셉을 지키려고 한 것처럼, 유다가 언약의 통로라 생각한 셋째 아들을 지키려고 한 것처럼,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율법을 지키려고 한 것처럼, 그리고 베드로가 목숨 걸고 예수님을 지키려고 한 것처럼, 주의 꿈을 꾸는 기계들은 막무가내로 복음을 사모하면 된다. 그래야 보인다."

의사전달이 불가능한 언어! 위의 문장을 보면서도 행위처럼 들리는 이유가 무얼까? 내 속의 마귀떄문이라고 답하면 정답일지는 모르겠지만  주님의 하시는 일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려고하는 무리수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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