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신7:8)
신명기는 하나님의 자기 백성에 대한 사랑을 미리 확인 시켜주시는 말씀으로 다가온다.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고, 하늘에서 이루신 그 사랑을 땅에서 이루어지게 하신다. 장차 등장할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불같은 사랑이 시범 조교인 이스라엘을 통해서 표출되었다.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 그분의 등에 업혀서, 하나님이 친히 동행하셨기에 신발도 해지지 않고 옷도 낡아지지 않았다. (출19:4, 신,1:31, 신29:5)
사실상 그들은 신발을 신을 필요조차도 없고, 더이상 자기를 치장하고 부끄러움을 가릴 옷도 무용했다. 이스라엘이 주체가 아니기에 언약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그렇게 아무런 행함의 흔적이 남지 않았다. 선악을 분변하는 마음을 품은 인간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신1:35, 39) 그렇게 인간 쪽에서의 움직임을 제로로 처리하시는 분의 사랑만, 언약의 움직임만 생생히 남았다.
사랑은 일방적으로 베푸신 하나님 자신만 알고 계셨다. 사랑을 입은 이스라엘이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하게 해주심이 도리어 하나님의 사랑이었다.(신29:4) 몰랐기에 원 없이 망해보고 원 없이 실패했다. “너는 맘껏 네 맘대로 해라. 신명이 나게 죄의 춤을 춰봐라. 내가 너보다 앞서서 행하고, 네 옆에서 함께 달릴게.(아8:14) 너를 죽도록 사랑하기에 내가 꼭 죽어 줄게. 그리고 너를 죽여 줄게”
물도 안 주고, 떡도 안 주고, 포도주도 안 주는 신이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는 진짜 하나님인 것을 알려주시려고(신29:6) 하나님은 움직이고 계시는데, 이스라엘은 정착해서 안정감을 느끼도록 도와주는 애굽의 신이 하나님이기를 믿는 믿음을 버리지 못했고 마침내 원망이 터져 나왔다. ‘우리를 죽이려는 신을 하나님이라고 우기는 모세는 이단이다’ 그들은 죽고 싶지 않았다. 죽지 않으려 했다.(신5:25) 시범 조교의 역할을 충실히 보여주는 이스라엘이 얼마나 고마운지.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아니, 사랑은 변하는 게 아니라 움직이는 거야”
인간이 알고 있는 ‘사랑’이라는 말보다 사랑이 먼저 있었다. 먼저 있었던 것을 나중에 등장한 인간이 언어로 듣고 읽어서 인식하고 이해하고 느껴도, 나보다 앞선 의미에 도달할 수 없다. 사랑은 인간의 지혜에서 나온 사전적 정의처럼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이나 감정같은 어떤 것이 아니라, 말씀 안에 순수 사랑은 하나님과 언약의 진짜 주인공 사이에 움직임, 그 자체이다.
“사랑이 움직이시니 나도 움직인다”(요5:17) “모든 지식과 지혜로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산을 옮길 믿음이 있어도 움직임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고전13:2)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을 통틀어 고정된 의미의 중심축은 오직 하나뿐이라는 진리가 이미 예수님의 몸으로 완성되었고, 정지된 한 분을 증거하는 활발한 움직임을 유발하는 것이 복음에서 말씀하는 사랑이다, 이제 땅에서 모든 것을 이룬 예수님이 여기 계시지 않기에, 이 세상에서 사랑은 멈출 수 없고 그래서 머무를 수 없다. 그리고 중심이 변하지 않기에 사랑도 변할 수 없다.
인간이 멈춰 서서 움직이고 있는 사랑을 파악하려고 하니 자신은 멀쩡한데, 사랑이 변했다고 오해하고 원망한다. 주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말씀의 수용체가 될 수 없어서, 그저 할 수 있는 것은 세상 지식을 습득하듯이 성경을 읽고 복음을 듣고, 율법을 배운다. 이 굴레에서 스스로 빠져나갈 수 없으니, 할 수 있는 것만 한다. 나의 고정된 동질성을 유지하려고 계속 의미를 수집하면서, ‘나’라는 덩어리를 안착시킬 둥지를 점점 견고히 한다.
복음은 인간이 이미 죽었기 때문에, 이러한 한계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고 인간은 성경을 해석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 말을 듣고 여전히 해석하며 느낀다. ‘그렇구나. 나는 죽었구나. 그래서 한계를 벗어날 수 없구나. 알 수 없구나...’ 그리고 다시 ‘알고 있음’의 굴레를 맴돈다. 성경에 나오는 야곱의 말이 너무 내 말 같이 쏙쏙 마음에 합한다. “안다! 나도 안다! 다 안다!”(창48:19) 그렇게 야곱의 고백까지도 곡해한다.
언약에 휘둘려 무한 실패를 반복하며 이동하면서, 험악한 세월 안에서 튀어나온 야곱의 고백은 ‘내가 움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움직이신다’라는 것을 몰랐다는 무지의 고백이었다. 언약 위에 얹혀있는 시체였는데, 마치 자신이 움직이고 있다고 착각한 것이다. 이것이 야곱만의 무지가 아닌 이유는, 인간은 아무도 죽은 자 가운데서 스스로 살아나지 못하기에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막12:24~25) 해석은 인간이 하는 게 아니라 공간이 한다.(요일2:8~9) 이제 율법을 지키는 것이 복이 아니라, 참 빛이 비취는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 십자가의 세계로 해석 당하고 지적당하는 것이 복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눈이 밝아진 후, 하나님이 꾸시는 꿈속에서 깨어났다. 하나님의 해석과 단절된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의 인형이 아닌 흙이 되었고, 흙은 그냥 흙이면 되는데 자꾸 자신이 인간이라고 우기는 내면의 법에(롬7:23) 사로잡혀서, 부스러지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떠도는 말을 수집해서 의미를 부여하고 흙을 뭉치듯이 ‘나’라는 덩어리를 유지한다. 답답한 어떤 것이 수집된 의미를 통해 말로 표현될 때, 내가 있음이 확인되며 쾌감이 올라오고 잠시 안정감을 느낀다.
이렇게 나만 챙기는 흙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예수님 보혈의 공로를 믿는다. 십자가를 믿는다’라는 마음을 어떻게 품을 수 있을까. 꿈을 꿔본 적도 없으면서 왜 꿈속(창세기 2장)에 있는 흉내를 자꾸 내는 걸까. 내 육체에는 율법이 주어지면 그 법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을 부인하고 자체적으로 하나님을 만들어서 믿도록 하는 시스템이 작동한다. 그러니 ‘믿어라. 지켜라’라는 말은 용납해도 ‘믿지 마라. 지키지 말라’라는 말씀은 안에서 충돌하고 분노를 유발한다. ‘감히 하나님에게 지옥 가라는 거야, 뭐야? 내가 하나님인데’
주님이 이 세상에 부재하시기에 중심이 비어 있는 게 정상인데, 비지 않고 이미 ‘신’으로 채워있다면, 그 신을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 주님, 부처님, 뭐라고 부르든 그건 백프로 우상이다. 분명 내가 있고, 그 상태에서 예수님의 존재를 논하고 참 하나님을 말한다는 것은 마치 보물이 없는데 보물찾기하는 헛수고와 같다. 그리고 보물을 찾고 있는 ‘나’가 마침내 보물을 찾았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가장한 마귀의 형상이다.
특이한 사건에 침투당하지 않고서야, 말씀의 세계는 인간에게 언제나 공상이고 허상이다. 하나님은 광야로 인도받은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셨고, 아담이 선악과를 건들 듯 반대로 율법이 와서 인간 안에 숨겨진 본래적 상처를 건들어 주었을 때, 그들은 주저 없이 원망을 쏟아놓았다. 율법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이 친히 오셔서, 자기 것도 아닌 것을 너희들이 건들었음을 책망하시며 상처를 후벼 파내시고 그 상처를 다시 예수님의 육신에 담으셨다.
그들 안에 상처를 대신 가져가시는 예수님을, 유대인은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죽였다. 하나님의 상처를 품고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이 부활 생명으로 찾아와 준 자들은 주님이 보여주시는 상처로 인해 선악 체제가 붕괴하고, 그들 안에 말이 아니라 말씀이 박히면서 주님의 해석을 통해 한계가 한계로 들춰진다. 예수님과 완전히 단절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광야로 이끄셔서 율법으로 말미암아 자아의 껍질을 벗기고 그들 안에 짐승의 본능을 고스란히 드러나게 하신 것처럼, 이제 십자가의 법이 우리 마음에 침투되면서 구약의 물리적 광야가 마음속에 셋팅되고 하나님의 작업장이 된다. 주님의 꿈을 담은 하나님의 인형이 된 것이다.
내가 어떤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체가 공간의 일부가 되어버리면 내가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가 머무르는 곳이 이전과 동일한 장소라도 전혀 다른 환경이 된다. 남들 눈에는 똑같은 시간이지만, 다른 시간의 적용을 받는다.(출12:2) 율법이 조성한 이중환경에 놓여있게 되면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 비어 있는 육신이 되고, 그 안에 담긴 본래적인 어떤 것, 그 낯선 어떤 것이 표출되도록 환경의 지시를 받는다.(롬7:23~24)
한 나라에 속해 있든, 가문과 가족에 속해 있든, 너나 나나 그저 ’나‘로 고정된 삶, 존재로 정지된 삶을 살며, 큰 의미체계 안에서 그 뜻에 부합하도록 나의 의미를 확장 시키며 살고 있는데, 홀연히 등장한 사건으로 말미암아 한쪽이 움직이기 시작할 때,(창12:4, 창37:28, 출12:31, 수2:21, 눅2:12, 마24:40~41) 여전히 멈춰있는 인간과 움직이는 인간 자체가 차이 나는 것이 아니라, 움직임 자체가 차이 그 자체이고, 그 움직임이 차이를 만든다.
움직이는 쪽에 놓여있다고 해서 그 움직임의 이유를 멈춰있는 자에게 납득시킬 수 없다. 소리가 들리면서, 그 소리에 붙들려 움직임에 합류된 자들은 그 원인을 찾지 않고 움직임이 만들어 내는 결과만 바라보게 되고 그 사건에 붙여진 이름을 주목한다. 그 이름이 함유한 상처의 주인을 부르는 것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공백의 중심에 자리 잡으신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여러 빛깔의 사건들이 주님의 지체들을 통해 방사되고, 사건에 붙여진 이름들이 다시 주의 이름에 통합되며, 한 분 예수그리스도를 반복적으로 증거한다.
십자가에서 흘러넘치는 어린양의 피가 사건들 위에 덮이고 연루된 모든 신체가 한 이름에 소속된다. 주의 이름은 부르는 것이 아니라 움직임이 만든 결과들이 주인공을 가리키는 외침이었다. 소리가 들려도 그 움직임이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지를 본인도 모르기에, 어디로 갈지 생각할 수 없다.(요3:8, 히11:8) 그저 소리가 들리니 그곳을 향하게 된다. 전에는 들리지 않았기에 바라볼 수도 없었고 그래서 없는 곳이었는데, 이제는 그 공백이 누구의 자리인지, 도대체 그분이 누구이신지 알려주는 해석에 귀를 기울인다.
마치 이전에는 귀가 없었는데 난데없이 귀가 생긴 것처럼, 예수님이 누구신지 설명해 주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막4:9,23, 계2:29) 소리가 있음에 내가 없어도 되는 존재인 것을 더욱 분명히 알아가며, 이 현상을 만들어 내시는 예수님의 피의 공로 안에서, 육체 안에 나는 없고 죄가 있음의 증거들을 신나게 게워 낸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이제는 한쪽 구석에서 자리만 차지하고 외면당하는 인형들을 하나하나 정리했다. 버리는 순서는 쌩쌩하고 손이 덜 탄 멀쩡한 인형들이 일 순위이다. 그리고 내 맘대로 버리지 못하는 인형이 있는데, 손을 너무 타서 너덜너덜 해어지고, 아무리 세탁해도 거무튀튀한 아이의 애착 인형이다. 아이는 그 인형을 ‘꼬까’라고 불렀다. 엄마인 나는 ‘꼬까’가 무슨 의미인지 몰랐지만, 아이가 그렇게 부르니 나도 그 이름을 같이 불러주었다.
그 이름의 의미를 알려고 애쓰지 않았던 이유는, 그 이름으로 함께 불러줄 때 아이가 기뻐하는 모습이면 충분했기 때문이다. 아이는 항상 그 인형과 동행하고, 잘 때도 안고 자고, 뽀뽀해 주고, 만지고 또 만지고, 어찌나 사랑을 받았는지 그 모습이 마치 볼품없는 술람미 여인을 닮은 것 같다. 그 인형이 우리 집 밖으로 벗어난다면 제일 먼저 소각될 외모를 지녔지만, 안에 있기에 그 인형은 사랑 덩어리 그 자체였다.
마음이 패역한 죄인 주제에 하나님이 이용하시는 인형이 된 것이 영광인 줄도 모르고, 주님의 의로운 손길이 다가올 때마다 ‘또 못살게 구네! 왜 자꾸 나만 가지고 그래!’라고 원망을 터트리게 된다. 그 원망을 감사로 바꿔주시는 성령의 책망이 항상 동행하시기에, 죄사함을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들통나는 죄를 통해 점점 더 알아가게 되고, 주께서 만지시고 안아주시고 할 때마다 여기저기 닳고 해지지만, 그렇게 존재감이 희미해질수록 그 신체를 통해 그리스도의 형상은 더욱더 무르익어감에 기뻐하고 감사한다.(빌3:9~11)
댓글
이근호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창 1:31)’고 하시면서 죄가 그 안에서 발생되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죄를 통해서 피조세계와 하나님 나라와 명확한 경계선으로 활용하십니다.
그리고 경계선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보내십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려내시는 거룩과 영광은 그 경계선에서 활약하신 오직 하나님의 아드님을 통해서만 완성이 됩니다. 죄가 마련되어야 예수님의 활동 자리가 마련되는 겁니다. 이로서 “언약? 다 이루었다”(요 19:30)
임청일
쓰여진 모든 글들에 이의를 달 생각은 전혀 없다. 그러나 역시 오해와 의아함은 없어지지 않는다, 왜 끊임없이 복음을 설명하려 하는가? 이번 수련회를 통해 출애굽의 취지.나그네 고아 과부의 하나님이란 의미를 확실히(?) 알게 된 것 같다.그동안 남들과 다른 방향에서의 의문점들 때문에 너무 답답했는데 수련회 마치고 오는 차중에서 오목사 딸 다인이의 말 한마디에 감추져있던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마치 새로운 안목이 열린듯한 느낌을 받았다.나를 통해 주님이 증거된 적이 없다는 느낌 자체가 생생하게 살아있는 나임을 발견하니 참으로 고맙고 감사하다. "주님은 복음을 알아듯지 못하게 하시려는데 장로님은 왜 남을 복음으로 설득하려하세요?" 남의 글을 대할 때마다 석연치 않은 그 무엇도 마친가지임을 느낀 수련회의 귀향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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