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선

행실이 좋지 않은 자

아빠와 함께 2024. 6. 17. 22:16

‘또 뭘 쓰는 거야? 참, 가지가지 한다. 언제까지 하는지 한번 보자. 자기가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무식함을 한없이 드러내는 짓을, 모르는 건지 알아도 뻔뻔한 건지 멈출 줄 모르네’ 내가 나를 보며 비웃는 이런 여유(?)로운 시간이 나에게 늘 지옥을 선사해 주는 걸 알면서도 여전히 죽기 싫고 늘 살고 싶다는 생각, 그 자체를 의심한다. 누가 도대체 살고 싶다고 충동질하고 있는지...

사고로, 병으로 또는 나이 들어 죽는 죽음이 죽음이 아닌 것을 진작 복음을 통해 알았다 한들, 옛사람을 벗어버리는 죽음을 통해 새사람이 되는 것은 인간이 손댈 영역이 아닌 것만 발견된다. 그럼에도 여전히 십자가를 바라보며 예수님의 죽음으로 덧입혀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심보가 하나님이 지옥을 만드신 정당성을 더욱 뚜렷하게 만들뿐이다.

날마다 죽는다는 고백을 신이 나서 했던 사도바울은(고전15:31) 십자가를 단순히 바라본 사람이 아니라, 이미 십자가에 의해서 자신이 제거되고, 십자가가 스스로 예수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 새사람이었다.

명연기자들이 말하는 연기의 비결은 대사의 정확한 전달, 맡은 캐릭터를 잘 분석하고, 잘 공감하고, 완전히 동화되는 이런 시시콜콜한 것들이 아니다. 한 배우는 자신을 믿지 않고 자기를 찾아온 대본, 그 스토리의 힘을 믿는 것이 자신의 연기 비결이라고 했다. 다른 한 배우는 50년간 연기를 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그 50년을 지우는 일이라고 했다. 아무도 아닌 사람이 되어야 새로운 누군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제까지의 역할에 잔재가 조금도 남지 않도록 옷을 벗어버리듯 완전히 자기를 벗어버리고, 오늘의 새로운 역할의 옷을 다시 입는 것이다. 세상에 속한 연기자들조차도 이런 엄청난 연기를 하고 있다. 하물며 이 세상에 없는 하나님의 시나리오가 삽입되어 주께서 친히 베풀고 계시는 연기를 수행하는 것은 세상에서 감당할 수 없는 새로움이 분명한데, 복음을 듣고 있다는 나에게는 어제의 나가 오늘도 있고, 5년 전의 나가 오늘도 있다. 그러니 나는 거짓이다.

말씀의 스토리를 듣지 않기만 하면 아무 문제 없는데, 기어이 듣게 되고, 듣고 나면 어느새 강퍅한 자, 복수를 꿈꾸는 자, 돈에 환장한 자, 잘 좀 봐달라고 굽신굽신 아첨하며 몸을 파는 자가 되어서 연기를 시작하고 있다. 스토리가 나보다 강하기에 내 쪽에서 연기를 멈출 수 없다. 자꾸 존재로 돌아와서 불안해지면서 ‘이건 내가 아니야.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 나도 뭐가 뭔지 모르겠어’라는 말을 하는 자체가 소음일 뿐이고 참 쓸데없는 옛사람의 메아리이다.

나는 여전히 어제의 나를 붙들고 싶은데 말씀의 분쇄기가 가림막을 모두 난도질해서 결국 다 드러나게 한다. 옛사람이, 이미 새롭게 다시 갈아입힌 오늘날의 새사람을 가리려는 몸부림이 반드시 실패로 돌아간다. 그렇게 복음만이 지옥의 존재성을 선명히 드러내며 영원히 복음이 된다.

내 안에는 복음으로 죄를 발각당함을 기뻐하는 나와 부끄러워서 피하고 감추려는 나가 공존한다.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서 온 힘을 다해 기뻐하며 벗은 몸이 드러나도록 춤을 추는 다윗과 그런 다윗의 천박한 행동을 창가에 서서 고상하게 바라보며 멸시하고, 주의 언약을 짓밟는 미갈이 함께 있다.(삼하6:15~16, 20)

그 경계선에서 ‘어느 쪽이 나다’가 아니라, 반드시 믿지 못했기에 하나님의 원수가 되고 예수님의 죽음을 유발한 가해자로 이미 설정된 채, 넘지 못하는 한계인 그 바닥에서 발각됨만 있다. 그렇게 하나님 아들의 대신하신 죽음이 반복적으로 증거되는 도구로 쓰인다. 최고의 명예로운 연기상을 받은 세상 연기자들조차도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새로움이 사람이 아닌 기계같은 몸에서 나오고, 그 새로움은 죽음속에서 나오는 꿀처럼 달콤한 비밀이다.(삿14:8)

예수님의 죽음이 찾아온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의 차이는 하나이다. 자기가 죄사함 받았음을 증거하는 사람과 십자가를 앞장세운 죄사함 자체가 스스로를 증거하려고 쓰는 사람의 차이이다. 복음에 이용당하는 몸은 주변에, 혀를 차며 머리를 흔들며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라는 수군거림과 비방이 있는 현장을, 현상을 만들어 낸다.(요8) 주위에서 행실이 좋지 않은 죄인으로 평함을 받는다.(눅7:37~39)

그 여자가 죄인이라는 것을 주변 사람도 알고 예수님도 안다는 것에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주님 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을 압도했다. 예수님은 그 죄인을 사랑하셨고 바리새인은 그 여자를 경멸했다. 여자가 눈물을 흘린 것은 자신의 처지를 생각한 것이 아니라 아마도 주님의 발을 닦아드려야 하기에 마침 흘러나온 물일 것이다.

이러하든 저러하든 주님을 증거하는 자들 안에는 마르지 않는 샘이 장착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그것이 말씀으로 나오기도 하고 눈물로 나오기도 하고 여러 다양한 모양새로 나오지만, 동일한 것은 예수님만 증거하는 것이다.

듣지 않으면 아무 문제 없이 제법 맘 편하게 일상적인 일에 집중할 수 있는데, 말씀 듣는 것을 스스로 멈추지 못하는 것은, 내가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나로 규정될 수 없는 그 잠시의 순간에만 느낄 수 있는 진짜 주인공이 나보다 더 중요하게 된 것은 나의 뜻이 아니다. 내 뜻이 무용하니 나는 없어도 아무 상관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 인간은 아무 쓸모가 없기 때문에 그런 하나님의 뜻이 안(땅)에서 이루어진 자만이 예수님의 몸을 드러낼 수 있다.

지고지순하게 언약궤만 향했던 다윗이 어제를 지우지 못하고 지켜야 할 것이 생기면서, 자신의 의로움에 눈을 돌렸다. 곧바로 일어난 사건은 언약궤만을 향하고 있는, 언약의 효과를 입은 자를 죽이는 살인이었다. 다윗은 자기의 행위를 스스로 책망하고 반성하지 않았다. 자기가 살해한 건 우리야 장군이 아니라 주님인 것을 알게 하신 분께(시51:4) 제물과 제사가 아닌 상한 심령을 내놓으며 자기의 본질을 알려주신 주께 감사했다.

그는 주님의 죽음과 하나가 되어, 장차 일어날 ‘주께서 내 주께’ 하신 약속의 성취가 어떻게 이루어질지를 드러낼 하늘의 그림자가 된 것을 무한 영광으로 여겼다.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마귀를 숭배하는 열심인 것을 몰랐기에 예수님을 핍박하고 죽였고,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유언을 성취하셨기에, 주님의 죽음이 택한 백성에게 찾아오셔서 핍박자라고 불러주시는 그 자체가 복음이고 기쁨이 된다. (행7:58, 행9:4)

성령은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그리고 심판에 대해서 우리를 책망하신다.(요16:8) 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진리 가운데로 강제소환 시켜서 지적하신다. 예수님의 죽음이 살아서 이 육신을 주의 이름이 일하시는 땅으로 사용한다.

그 땅이 비처럼 내리는 복음을 흡수해서 생명의 열매가 발아 되면서(히6:7) 나라는 존재의 껍질이 벗겨지고 죄가 터져 나오는 사건을 일으키시는 의로운 한 분,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말씀을 전하는 자와 말씀을 받는 자가 한 몸인 것이 비치는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성도끼리 나눌 유일한 양식이다.(요4:34)

 

 

댓글

 

이근호목사

세찬 장맛비 속에 사람들은 자기만의 생활에 지장을 느낀다. 야외에서 소풍 가는 계획도 접는다. 예쁜 자태의 꽃잎도 사정없이 떨어진다. 말씀의 소낙비 속에서 성도는 비로소 자기 생활이 따로 있을 수 없음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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