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선

사랑이라는 장미

아빠와 함께 2025. 1. 26. 09:40

어떤 사람은 사랑이 연약한 갈대를 삼켜버리는 강물 같다고 말한다. 또 어떤 사람은 사랑이 영혼에 상처를 입히고 다치게 하는 날카로운 칼날 같다고 말한다. 어떤 누군가는 사랑이 끝이 없는 고통스러운 갈망이라고 말한다. 복음은 사랑이 꽃이라고 말한다. 예수님을 품은 씨앗들이 깜깜한 암흑과 차가운 눈 아래에 감춰진 채, 십자가가 봄의 햇살처럼 잠시 잠시 드리울 때마다, ‘나’라는 껍질이 벗겨지면서 끝 날을 펼치듯 예수님을 피워낸다. 사랑은 받는 것도 아니고 주는 것도 아니다. 꽃이 이미 피었기에 더 이상 씨를 품은 껍질은 발견되지 않는 그 자체가 사랑이다.

꽃이 활짝 피니, 껍데기라는 의미조차도 내가 아니었고, 모형은 그냥 모형이었다. 그 안에 나의 의미는 없었고, 주님의 의미가 살고 계셨다. 예수님 십자가의 영이 모든 것을 다 알아서 이끌고 계셨다. 내 안에 죽음의 텃밭을 만드시고 믿음의 씨앗으로 단단히 자리 잡으셨을 때, 나는 현실만 살 수 있는 환상이었고, 예수님은 꿈으로 움직이시며 사건을 통해 환상을 배제해 주시는 진짜 현실이었다.

주의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주님 쪽으로 향하는 나를 단단히 옭아매서, 주의 일하심과 철저히 단절시켜 주시는 ‘완전한 파멸’까지가 나의 역할이고, 그다음부터는 주의 천사가 일했다. 천사의 활동을 목격하고, 주의 일을 증거하는 소리는 유쾌한 파멸 속에서만 울리고 퍼진다.

이제는 더 이상 상처 입을까 두려워하며 말씀의 연주에 맞춰 춤추는 것을 주저하지 않고, 사랑에서 깨어나는 것이 두려워서 아예 꿈조차 꾸지 않으려고 저항하지 않고, 사랑을 품은 죽음 안에 이미 안겼다면 죽음을 두려워할 일 또한 없다. 먼저 사랑을 시작하신 분이 일방적으로 넣어놓고 가신, 거저 주신 사랑이기에, 거저 전달하는 것을 주저할 일이 없다. 참으로 성도는 아무 할 일이 없다. 오직 예수님만 계셨음을 알리는 말씀의 꽃이 활짝 피니, 성도는 그분의 향기가 되어 주의 미쁘심을 풍기며 찬양하게 된다.

하나님이 주의 이름으로 이 땅에 자신을 드러내셨을 때도, 하나님 자신의 뜻인 율법으로 이 땅에 자신을 알리셨을 때도, 그리고 친히 주의 이름의 실체로 육신을 입고 자기 땅에 찾아오셨을 때도, 인간은 여전히 자기의 이름을 드러냈고, 자기의 소리를 냈다. 어떤 사람이 되어, 또 어떤 사람이 되어, 어떤 누군가가 되어 자기 것을 말하고 또 말했다. 음침한 사망의 골짜기와 같은 인간 마음에 담긴 거짓되고 교만한 말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예수님이 가롯유다만 가득한 세상에 오셔서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자기 몸을 내어주셨다. 인간은 하얀 도화지 같은 인자의 몸을 사람의 몸과 동등으로 여기며, 자기의 생각과 해석으로 그분의 몸을 사정없이 난도질했다. 예수님은 오로지 아버지의 뜻하신 경로대로 사람들의 죄에 잠잠히 몸을 맡기셨고, 죄를 입으셨고, 그 죄로 말미암아 아버지가 주시는 잔을 마시기 위해 제단까지 밀려가셨다. 출렁거리는 인간의 정신에 떠밀려 마침내 십자가로 가셨다.

내가 이렇게 흉악한 자인 것을, 내 존재의 뒤편을 밝히 드러내 주셨건만, 나는 분수를 알건 모르건, 여전히 말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주님은 이 고질병을 고쳐주지 않으셨다. “네가 망하기에 딱, 아주 딱 좋은 환경이다. 그 짓거리 하면서 깨어져라. 정말 바라볼 것은 오직 내 피뿐이지?”

‘글을 잘 쓰시네요. 사기를 아주 잘 치시는 거 같아요. 글을 쓰면서 말씀을 알아들은 척도 할 수 있고 그렇게 자랑질도 할 수 있으니, 참 좋겠네요’

‘맞아요. 제가 투명 인간이 아니라서...껍데기 같은 육신이 여전히 보이니, 보이지 않는 것을 가릴 수밖에 없네요.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육신이 버젓이 있으니, 살아서 움직이는 모든 짓거리는 주님 앞에 사기꾼 짓거리가 돼요. 영문도 모르고, 왜 이래야 하는지도 모르고, 등 떠밀리듯 밀려서 믿지도 않는 말씀을, 알지도 못하는 분을 소개해야 하니, 저조차도 사기 친다는 그 말에 너무 동의가 됩니다’

참, 이상한 건, 이런저런 사태가 벌어지고, 사건이 일어나도, 그래서 그게 나름 삶을 불편하게 만들어도, 그게 싫지 않다는 것이다. 믿어져서 하는 건 아닌데, 왜 이러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그냥 좋다는 것이다. 이것을 선형적 세계관에서는 중독이라고도 하고, 가스라이팅이라고도 하고, 세뇌라고도 하고, 종교적 관점에서는 이단에 빠졌다고 한다.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이 아니라, 세계관의 마주침이다. 선형적 세계관과 비선형적 세계관이 마주할 때, 서로 다른 것을 담고 있어서 다른 말을 하는데, 내가 틀렸다거나 상대가 틀렸다는 생각 자체가 들지 않는다. 너도 맞고, 나도 맞다는 식으로 개체의 부분들을 포용하는 것 또한 아니다.

사랑에 중독됐을 때, 그 사람 안에서 나올 것은 너무 뻔하다. 하루 종일, 내 안을 온통 가득 채우고 있는 그것이 저절로 튀어나오는 현상뿐이지, 네 안에 사랑과 내 안에 사랑이 다르다고 싸울 일도 답답할 일도 없다. 그저 안에 담은 것을 내어놓는 것은 자연스러운 생리이다.

오히려 기절초풍할 일은, 사랑의 대상이 같은 누군가를 만날 때이다. 정치나 경제, 명품 이야기하며 서로 말이 맞으면서 더 많은 말을 하게 되는 어떤 것과는 양상이 다르다. 비선형적 세계의 비밀이 상대의 의도를 비켜서 흘러나오고 있는데, 입에서 무슨 말이 나와도 이유 없이 신이 난다. 척하면 척하고 딱하면 딱하니, 많은 설명이 필요가 없다. 엘리사벳의 뱃속에 세례요한이 마리아의 뱃속에 예수님을 만났을 때는 아예 말조차 필요 없었다. 그냥 덩실덩실 춤췄다.

사기가 신기가 되는 때가 바로 이때이다. 현실에 침투한 꿈속에서 손가락만 움직이고 있음을 감지하게 되고, 그 상황 자체가 내가 치울 수 없는 나를 사정없이 밀어낼 때, 이런 고백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 ‘정말 주님이 살아계시는구나. 거짓말이 아니구나. 말씀만 살아있는 게 맞구나...’ ‘어디서 날아온 거지?’ 우연히 날아온 막무가내 돌멩이 같은 누군가와 어느새 춤을 추고 있다. ‘누가 춤을 추게 하시는 거지?’ 철저히 성령의 꼭두각시가 된 자들은 한결같이 어리둥절한 듯 말한다. ‘나는 뭐가 뭔지 모르겠다’

성경의 말씀을 오해했다. 돌들로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어 주시는 줄 알았다. 그런데 주의 백성들은 그냥 ‘돌’이었다. 예수님이 그 첫 짱돌이 되셔서, 날아와 골리앗처럼 견고한 인간의 역사를 박살 내시며, 인간 존재의 뒷면을 드러내는 틈을 만드셨고, 인간의 탈을 쓰고 있던 짐승의 실체를 들통 내셨다.

주의 성령이 임한 자들은 주님의 돌멩이 역할을 충실히 하며, 형제들에게 사랑의 짱돌을 인정사정없이 날리고 주님의 메시지를 터뜨린다. ‘너는 사람이 아니라고, 너는 살아있지 않다고, 너는 여기 없다고, 주인공은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라고...’ 얼마나 고마운 봉사인지.

우리의 본질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멸망의 가증한 미운 물건을 담은 육체. 그것이 거룩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육체를 채찍질하며 부추긴다. 성령을 받아야 한다고, 예수님처럼 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고. 그렇게 자기의 영광으로 주의 다 이루심을 어떻게든 엉덩이로 깔아뭉개도록 만든다.

사람으로는 도무지 잊을 수가 없다. 교회(성전)를 지키고, 주일(안식일)을 지키고, 모든 율법을 지켜서 천국 간다는 것을 잊을 수가 없다. 과거를 기억하면 지옥 간다는 것을 잊을 수 없는 모순에 갇혀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미련한 자는 죽었다 깨어나도 될 수가 없다.

과거가 잘린 척, 바보인 척 쇼해봤자, 과거가 잘린 진짜 바보가 등장하면 나는 어느새 판단자, 똑똑한 자, 아는 자로 들통난다. 개그는 개그일 뿐, 따라 하면 안 되는 거였다. 사람은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하시는 기이함은 여기 있다.

내가 할 수 없는 걸 분명히 보여주신 그분이, 나를 철저히 밀치시는 그분이 알아서 다 하신다는 것이 믿어진다. 주님이 친히 주님 자신을 위해서 하시니, 나는 더 이상 기웃거릴 필요가 없음에 시므온의 고백이 저절로 튀어나온다.(눅2:29~30)

본성을 못 버리고 자꾸 미련이 남아서 주의 이름의 주변을 얼쩡대기라도 하면, 여기저기 짱돌들이 날아 온다. ‘주님 가리지 말고 저리 안 비켜! 슉! 슉! 퍽! 퍽!’ 아예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만들어 준다. 돌이 돌에 부딪혀 더 큰 돌도, 더 작은 돌도, 돌 위에 있는 돌도 없다. 태산을 이루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에 깨어져 흙이 되는 것이, 먼지가 되는 것이 주님의 돌멩이들의 기쁨이다.

아무 가망 없는 죄인일 뿐인데, 드릴 것은 죄뿐인데, 죄가 담긴 몸을 그대로 써주신다. 그분의 피의 공로로 말미암아 성도는 곤고함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다. 어둡고 차가운 눈 아래 깊숙이 묻혀있지만, 외롭지도 춥지도 않다. 자신이 거기에 있다고 느낄 수 없는 덮어주심의 손길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은 주님의 사랑을 오해하기에, 가려주고 막아주고 가만히 있게 만드시는 주님의 완전 봉쇄를 고마움이 아닌 원망으로 받는다.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신 가, 아니 계신 가. 계신다면 왜 이리 나를 힘들게 하시는가’ 주님이 오지 말라고 밀어버리니, 나도 주님을 밀어버린다. 나 스스로는 완악을 버리지 못한다. 강퍅을 버리지 못한다.

지금도 여전히 인간은 피조물의 본문을 모른 채, 죽음의 광야를 통과하며 맛사와 므리바의 사건을 반복해서 만들어 내는 도구로 사용된다.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사자에게 물어뜯기지 않게 보호하시며 눈동자처럼 지켜주시는 하나님 사랑의 위력을 증거해야 하기에, 하나님이 아닌 마귀에게 제사하는 가증함을 여과 없이 노출해야 하고, 하나님의 질투의 불꽃을 일으켜야 하고, 그렇게 종말의 어떠함을 계속해서 드러내야 한다.

그렇게 주의 분노에 소멸되면서, 현실에서 다시 꿈속에 놓이게 된 자들은 이렇게 고백한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내 자신이 저주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살려고 사는 게 아니라, 죽으려고 사는 자들은 자유롭게 주님 시간의 파편으로 이용당하고 놀아나며, 그분의 손길에 감사한다. “네가 언제부터 듣는 자였냐? 이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역시 그러하고, 앞으로도 듣지 못하는 자, 깨닫지 못하는 자로 눈 아래 깊숙이 숨겨두었다가, 때가 되매 이끌어 갈게. 잘~~~자고 있거라”

짐승들의 피 튀는 힘의 전쟁에 말리지 말라고 성도의 눈을 소경으로 만들어 주고, 얼굴을 뭉개지게 해주고, 자존심을 바닥까지 끌어내려 주신다. 주의 손으로 친히 눈도 가려주고, 얼굴도 가려주고, 귀도 막아주시며 “내가 네가 될 테니, 아무 근심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고 하신다. 그렇게 주님의 하얀 눈 속에 온통 덮이어, 나의 흔적을 조금도 찾을 수 없을 때까지, 성도의 권세가 모두 깨지면서 온전히 인자의 고난만 남겨질 때까지, 주님의 주홍같은 피로 덮고 또 덮으신다.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자가 복되다. 이 세상에 던져진 율법도, 말씀도, 복음도, 듣고 이해하고 알았다고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가려주시고 덮어주심을 받지 못한 마귀뿐이다. 모든 것을 직접 알아서 거룩한 자리에 앉고 싶어 하는 멸망할 악마의 유혹에 더 이상 마음을 뺏기지 않게, 안다고 착각한 것을 들키게 해주시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미련한 자로 새롭게 발견되게 하심이 주님의 사랑이다.

에필로그(epilogue)

진지하고 무거운 분위기, 생존을 위한 몸부림의 쳇바퀴, 한 번만 마시면 다시는 갈증을 일으키지 않을 어떤 것이 있을 거라고는 기대조차 안 했다. 그런 사기에 속지 않는다. 그냥 오늘도 눈을 떴고, 몸이 움직이며 육체가 살려내라고 아우성치니, 땡볕의 고통을 감수하며 물을 긷기 위해 우물로 향했다. 우물 옆에 낯선 사나이가 앉아있다가 물을 달라고 작업을 건다. 그리고 현실에 꿈이 침투한다.

그냥 물을 좀 주면 될 일인데, 여자가 괜한 시비를 건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합니까?’ 그 낯선 타인은 엉뚱한 해석을 내놓는다. “네가 오히려 나에게 물을 구해야 하는 상황인 것을 알려주려고 내가 너에게 물을 달라고 하였다. 됐냐?” 여자는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을 친다. ‘보아하니, 아무것도 당신은 가진 게 없는데? 이 깊은 우물에서 어떻게 물을 퍼요? 이 우물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야곱이 우리에게 하나님같은 분인데, 당신이 그분보다 큽니까?’

“야곱이 준 우물은 퍼도 퍼도 더 살고 싶은 갈증이 오히려 더 커지잖아.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아” 예수님의 해석에 여자는 더욱 미궁으로 빠지며 심술이 난다. ‘그런 허튼소리 그만하고, 나에게 그 물을 한번 줘봐요. 그 물을 마시고 나도 있음에서 나오는 해석 말고 없음에서 나오는 해석을 할 수 있도록, 그 물을 한 번 줘봐요’

예수님은 물을 주지 않으셨고, 그 여자에게 수치를 주셨다. “너, 괜찮니? 먹고살만하니? 이런 종교 놀이가 너에게 물을 주니, 밥을 주니? 남편을 그렇게 계속 갈아치운다고 네가 만족을 느낄 줄을 아니, 감사를 할 줄을 아니? 언제나 갈증뿐이잖아. 이제 내가 너를 갈아치워 줄게. 나를 마셔라. 내가 너의 존재 뒤편으로 들어가서 너에게 생존을 충동질하는 그 사망의 세력을 나의 죽음으로 교체해 줄게”

예수님의 죽음을 마신 자, 그래서 더 이상 갈증을 느낄 수 없는 자, 오로지 그리움과 고마움과 기쁨이 강물처럼 넘쳐서 그분을 만날 날을 갈망하는 그것만 남은 자. 그 남은 자를 주님은 자신의 이름표를 붙인 성도라고 일컬으신다.

 

댓글

이미아

To. 껍데기님
고마워요~♡
                   From. 껍데기가
P.S  설 연휴 즐겁게 보내세요^^

이근호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노래한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사랑을 아름다운 장미로 표현하지만 그 십자가 장미에 찔린 자만이 장미를 아는 자입니다. 죄인으로 들통 난 자신을 영웅의 반열에 슬그머니 세우지 않을 겁니다. 그 대신 자기 안에 들어온 십자가 피를 슬그머니 끄집어 보이는 자입니다. “제 안에 이런 게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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