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영적전쟁)을 읽고서
책은 그냥 펼쳐서 읽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러나 책보다 앞선 것들이 있었다. 책의 표지에서, 책 안쪽에서, 책 안에 박혀있는 한 단어 한 단어가 예수님 자신의 몸을 비틀어 짜낸 흔적들이었다. 마치 악마가 성공했고 주님은 실패한 것으로 보였다. ‘이걸 어떻게 읽지? 읽을수록 더 혼란스러워지는 거 같아. 괜히 마귀의 시험에 들지 않도록 이 책에 시간 허비하지 말자. 보더라도 대충 후딱 보자. 이게 아니어도 볼 책이, 들어야 할 강의와 설교는 많이 있으니까...’
책은 이미 보이지 않는 전쟁을, 심판의 불을 지나온 것 같다. 외면하고 싶은 너덜너덜 찢기고 만신창이가 된 한 분의 몸이 펼쳐지고, 책망의 음성을 발한다. 네 안에 담긴 말씀에서, 네가 가지고 있는 복음에서 탈출하라고. 네 의미로 덕지덕지 도배된 너를 변호하는 복음에서 나와서, 복음이 스스로 복음을 변호하는 영적 전쟁터 자체가 되라고.
롯을 끌어낸 천사의 손이 없다면, 아무리 믿는다 한들 나갈 수가 없다. 나갈 수 없음을 아는 순간, 믿었다는 믿음도 악마의 품을 나가고 싶다는 마음도 거짓임이 드러난다. 청함을 받아서 복음을 들었어도 선택함이 입혀지지 않으면, 나의 무덤을 스스로 빈 무덤으로 만들 수 없다.
이미 창세 전에 붙여놓으신 이름, 그분의 이름으로 불러서 나오게 해 주시지 않으면, 여전히 나의 무덤 안에서 죽은 자로 마귀의 수족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예수님이 무덤 밖으로 불러내신 몸은, 시체의 수족을 동이고 있던 세계관의 붕대가, 악마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수건이 벗겨지면서 주변에 썩은 냄새가 나고, 꼴불견이 그대로 노출되지만, 주님의 지시가 작동되고 있음을 감지한 자들에게는 도리어 그것이 복음의 향기로, 생명의 활동으로 보여진다. (요11:44)
“그 창 자국, 못 자국에 손가락을 넣어 예수 믿는 자가 되지 말고, 내 상처의 일부가 되어라. 그렇게 만들어 줄게” 에베소서 속의 십자가를 이해하려고도 판단하려고도 말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시는 계시가 몸을 통해 흘러나오게 해 주신다고, 결코 파괴할 수 없는 나를 친히 제거하시고 새로운 나로 자리 잡으신 분의 노래가 반주 없는 라이브처럼 청명하게 울리게 만드신다고 말씀하신다.
1강 침투
인간은 빈 공백, 빈자리를 담고 태어난다. 마치 인간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작은 공간이 태어난 것처럼, 나보다 먼저였던 그 자리가 후에 생긴 자아에 의해 가려지고 감춰진다. 후차적으로 생긴 자아는 먼저 있던 자리의 조종을 받는다. 꼭두각시 자아는 가만히 있지 못하고 뭔가를 늘 하고, 또 하고, 어떤 것이든 해서, 그렇게 나의 존재를 스스로 증명하는 주체임을 확인한다. 즉, 모든 것이 조작이지만, 아무것도 스스로는 조작이라 말하지 못한다.
보이지 않는 자리의 충동질로 움직이는 모습을 성경은 명확히 정의해 주신다. 우리가 알 수 없는 하나님, 그 하나님에게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알 수 없는 것은 신경 쓸 필요 없다. 알수 없는 신도 물론 마찬가지이다. 모든 개념 정립은 내가 알 가능성이 있기에 신경이 저절로 쓰이는 쪽으로 이루어진다. 나에게는 나 보존의 법칙만 존재한다.
나는 내가 신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겸손해야 한다는 나의 윤리 개념을 준수해야 하기 때문에. 그래서 내가 모시는 나를 자체 분리해서, 나를 위해 섬기는 하나님을 만든다. 내가 납득가는 것보다 타인이 납득가야만 내가 인정할 수 있는 신이 되기에, 화장하듯 나의 하나님을 꾸미고 구체화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이 본질을 아무리 파고들어 깊이 더 깊이 연구해도, 스스로 넘어갈 수 없는 자아의 막에 막혀서 진짜 본질에 이르지 못한다.
본래적 주인공인 마귀가 발각되려면 매개의 침투가 이루어져야 하고, 성령의 침투 없이는 주를 위한 그 어떤 고귀한 희생도 나의 영광을 위한 우상숭배이다. 본래의 자리에서 인간을 충동질하는 힘이 예수님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죄가 율법의 주인과 마주한 순간, 죄의 진짜 의도한 바가 예수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드러났다.
이로써 십자가의 죽으심이 예수님의 이미 이기신 전쟁으로 모든 상황을 뒤바꿨고, 이는 하나님의 뜻인 율법 완성의 진정한 모습이었다. 이제 악마의 자리 역할을 하던 모든 인간은 죄 아래 놓였음이 밝혀졌고, 인간은 모두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바짝 마른 뼈일 뿐이다. 인간은 죽을 수 없는 본래적인 것으로 말미암아 그것과 함께 죽을 수 없는 상태로 영벌에 들어갈 운명이고, 마귀의 구원인 인간 구원이라는 말은 원래부터 없는 말씀이었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파괴해주실까? 누가 죽음을 맛보게 해 주실까?’라는 물음이 자기 자신의 소리가 아닌 성령의 탄식으로 나오는 입들이 참 기이하다. 이미 일을 다 끝낸 분이 자신의 죽음을 먹여주셨다면, 이미 죽음을 맛본 자이고, 이미 죽은 자이고, 이미 산 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분의 생명이 접속된 자들이다.
2강 통보
나의 구원에 실패했다는 외부의 통보를 받게 되면 ‘당신은 하나님을 버릴 수 있습니까? 예수님 없이 살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드러난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다시 임하시면 답을 담고 있는 질문이 스스로 물으신다.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시작이신 예수님의 질문이 친히 답이 되신 끝점에서 ‘너희가 모두 선택받을 권한이, 구원받을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을 이제는 알지?’라고 물으신다.
예수님은 열하나를 택했다고 하지 않으셨다. 십자가를 통해 영적 세계의 비밀이 공개되면서, 주님이 흘리신 피로 말미암아 비밀이 심히 비밀 되었다. 피의 선택만 남아서 두 개의 통보가 일방적으로 전달된다. 영생 아니면 영벌. 아무도 자기 의로는 피의 죽음에 동행 될 수 없고, 그래서 그 너머에 영생이 있는 진정한 죽음에 동참 될 수도 없다.
아버지께서 그토록 원하셨던 예수님의 몸의 죽음, 그렇게 하나님과 아들이 단절되는 죽음이 하나님의 아들을 대신 심판하심이고 예수님의 대신 저주받으심이다. 이로써 이 땅에 백성이라 예정된 어떤 육체도 그 순간 예수님과 함께 단절의 예비 상태로 들어간다. 하나님에게 온전히 버려지는 ‘나’의 파괴는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함을 가장 먼저 보여 주신 분이 처음 인간이고 유일한 인간이신 예수님이시다.
아버지의 다시 살리심이라는 순수 선택이 아들을 부활의 몸으로 재창조하셨다. 자신의 몸을 아버지께 단번에 제물로 내어드린 예수님의 몸이 새로운 세계를 만들 터가 되셨고, 예수님의 버려짐이라는 모퉁이 돌이 먼저 놓였기에, 이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담긴 그리스도의 영이 피의 선택을 따라 창세 전에 예정된 백성의 몸에 보내진다.
주님이 대신 받으셨던 저주 안에 ‘함께’ 합류되어야 한다는 성령의 통보가 죄 된 육신에 침투하셨을 때, 성도 내부에서 일어나는 계속된 분리 작용(환란)으로 말미암아 본격적인 ‘막힘’을 체험한다. 육체에서 끊임없이 자기 의를 세우고자 분투하는 옛사람과 더 이상 자신의 의로 사는 것이 불가능한 죄의 뿌리를 들추는 새사람이 다툰다, 성도의 몸은 이미 예수 안에 있기에 티끌 하나도 섞일 수 없는 하나님의 의로 충만한 채, 공의의 심판주가 활동하실 환경으로 온전히 드려진다.
3강 유한과 무한
유한 안에 무한이 담기는 종말의 징후가 교회의 출현이다. 무언가가 담겼다는 것은 본래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것이 밖으로 밀려 나왔다는 것이고, 그렇게 예수님의 왕 되심을 원치 않는 증거들이 빛 앞에서 낱낱이 밝혀진다. 속에 있던 영적 존재가 돌출되는 모습은 마치 쫓겨나가는 내가 새롭게 담기는 나를 핍박하는 모습으로 표현되는데, 옛 나가 쫓겨나가는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포효처럼 ‘네가 뭔데 내 자리를 빼앗느냐? 이건 원래 내 것이었다’라고 울분을 터뜨린다. 그 자리에서 주님은 필히 형의 자리를 훔친 야곱같은 사기꾼이고, 도둑놈이 된다.
세계관의 전복 없이는 모든 일을 주님의 일로 바로 볼 수 없다. 기존 법칙의 세계에서 나를 뜯어고치고 개선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자아가 몸에서 찢겨나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율법 아래에서 난 이스라엘에게 자아의 찢김은 곧 율법의 찢어짐과 같은 청천벽력이고, 이스라엘 나라 밖에 있었고, 약속의 언약들에 대해 외인인 이방인에게는 외부 요소가 난입해서 후레쉬를 비춰서 단번에 자아의 이면을 밝히 보여 주시니, 요나의 멸망 통보에 이방인들이 하나같이 죽음으로 옷 입고 하나님의 긍휼 앞에 납작 엎드리는 찢김과 같다.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사42:6) 여호와는 새로운 나이신 ‘너’에게만 마음을 주시고, 뜻을 나누신다. 율법이 있는 이스라엘에게는 예수님 자체가 새로운 언약으로 임하시고, 율법이 없는 이방인에게는 예수님이 빛으로 임하신다. 하나님은 새롭게 낳으신 아들, 부활의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에만 집중하신다.
예수님의 의로운 피에 자신의 공로를 덧입히고자 하는 시도에서 자유 하지 못하는 인간을 털어내시고, 깎아 내시고, 제거하시는 것이, 예수 안에서 기쁨을 입은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간섭하심이고, 예수님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 표출되는 결과이다. 유한 안에 담긴 무한의 일이 드러나는 현상이 바로 영적 전쟁이고, 쫓겨나가는 나와 새롭게 자리를 차지한 나 사이에 싸움이 여전한 것은, 아직 주의 지체가 땅에 있기에 혼돈이고, 머리 되신 예수님께서 이미 하늘에 앉아계시기에 또한 다 이루심의 고요함이 교차하고 공존한다.
‘걱정말아요, 그대’라는 주의 음성이 하늘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처럼 순간순간 아래로 전달된다. 나를 철저히 투명 인간 취급해 주시는 것이 옛 나에게는 분을 유발할지언정, 도리어 그것이 십자가 완성을 더 찬란하게 빛나게 하니, 주님이 나를 개무시하심에 대한 고마움으로 마감된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4:26~27) 내가 뭘 어떻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고마움이 덮쳐서 마귀가 충동하려는 틈을 막는다,
전쟁이 격렬할수록 예수님의 심판주 되심의 증거는 더 뚜렷해진다. 그러니 피 흘리기까지 싸우게 하시는 사건에 방어하거나, 회피하는 옛 나에게 틈을 주지 말아야 한다. 종인 주제에 주인인 척하면서 두 ‘나’ 사이에서 자신이 판단하고 분별하려고 하면서 갈팡질팡, 흐지부지하는 방해꾼을 주께서 가차 없이 뱉어내고 치워주신다. ‘하나님이냐 바알이냐’라는 선택은 인간에게 있지 않고, 선택은 하나님의 불이 택하신 그곳, 그 제단 위에 놓인 제물의 피가 한다.
주께서 피로 값을 치르시고 사신 교회는 무한을 담은 유한한 개별지체의 어떠함이 아니라, 지체들이 언약 안의 관계성으로 인해, 여럿이지만 하나를, 한 분만을 보이는 증상의 발현이다. 마치 커다란 몸 안에서 말씀이 신경과 혈관을 따라 유통되듯이, 내 일과 너의 일이 아니라, 모두를 휩쓸고 다니는 말씀만이 노출되고, 경로들은 잠시 스쳐 지나가기에, ‘내가 말씀의 경로다’라는 흔적이 남을 수 없다.
믿는 도리의 소망을 굳게 잡도록 모이기를 힘써야 한다는 말씀은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는 자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목소리로도 문자로도 주님이 중매하는 어느 곳이든 모임은 성사된다. 그곳이 어디든지 육체가 시들어가는 모습을, 우리들의 영광이 떨어지는 모습을, 서로의 붕괴되는 현장을 통해서 말씀이 생생하게 서는 기쁜 소식이 모이는 곳이면 충분하다.
그렇게 모인 소식이 또다시 예수님의 피를 타고 연결된 다른 지체들에게 흘러가고, 전파되고, 나눠지는 것은 이미 한 몸이기에, 한 공간 안이기에 가능하다. 그것은 모이기에 힘쓰라는 말씀이 스스로 작동하는 모습이기에 성도에게 뒷담은 성립될 수 없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말씀의 장이 될 뿐이다. 복음서를 쓴 마태나 마가나 누가, 그리고 요한이 다른 제자들의 뒷담을 적은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어떠하심과 그분이 누구인지만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말세에 출현하는 교회는 무엇을 나누든지 오직 예수님과 그분의 십자가만 전하는 모습이 된다.
4강 무죄와 의
창조의 공간은 구원의 공간을 재창조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작업장이었다. 언제든 죄를 지을 수 있는 공간에, 뱀의 유혹이 침투했고, 죄가 스며든 인간의 육체가 번성함으로 말미암아 죄가 점점 세상에 퍼져서 어느 것도 죄 아닌 것이 없는 죄로 관영한 세계가 되었다.
이미 죄로 충만한 세계로 오셔서, 죄로 말미암아 찢기신 예수님의 몸을 통해 새로운 공간이 창조되었고 그 안에서는 무엇을 해도 죄가 성립되지 않는, 하나님의 의만 충만한 세계가 되었다. 예수 안을 품은 성령이 유한한 몸으로 침투하실 때, 자아가 찢기고 근원이 노출된 육체는 율법의 마침이 되신 예수님의 십자가 피날레를 반복 재생하는 상영관으로 허락하신 때까지 땅에 머무른다.
성령으로 말미암는 십자가 사건의 재현은, 쫓겨나는 나와 새로운 나, 두 나 사이를 예리하게 잘라 내시고 끊어내시는 성령의 일이 인식의 세계를 무시하며 예기치 못한 곳에서 벌어진다. 나의 역사 선상에 이어져 오는 직렬구조를 비켜나서 새로 등장한 병렬적 노선에서 주님의 활동성이 목격될 때, 복음을 안다고 하는 나, 복음을 전한다고 착각하는 어느새 도드라진 나의 행위 자체가 박살 나서 평지가 된다.
그렇게 닦아진 길이 진짜로 주께서 벌이신 사건으로 소급적으로 안내한다. 재현된 십자가 사건 앞에서 여전히 직렬구조에 놓여있는 나는 복음을 빙자한 복음 훼방자로 드러난다. 옛 나를 담은 나와 새로운 나가 함께 있는 육체를 성령께서 마음껏 호작질 하시도록 수시로 얻어터지는 몸이 세상적 관점에서는 저주이고 복음적 관점에서는 복이다.
성령께서 쫓겨나는 옛 나를 소환하시고 사건을 일으키실 때, 괜히 착한 척, 사람인 척하지 말고 ‘너만 없으면 이 포도원은 내 것인데’라는 원초적 마음 그대로, 나는 내 것이라는 주인의식으로 결코 아들을 살려두지 않겠다는 악독과, 살인 의지가 충천하는 현상 그대로를 노출 시키면서 나의 분노 대상인 새로운 나를 마주하게 해야 한다.
반대로, 분노의 상대를 마주할 새로운 나를 표현하는 몸이 될 때도, 환란을 예측하며 십자가의 핍박을 애써 면하려고 율법과 겸손으로 꼼수 부리지 말고, 성령의 일에 온전히 자신을 내어드릴 때, 피 흘리는 이웃의 모습으로 오신 주님의 고난이 육체를 통해 그려지고, 내 몸이 아픈 것이 아니라 예수님 몸이고, 내가 조롱과 비웃음과 수치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이 당하심에 참여된다.
이 둘 사이에서 ‘나는 무엇이다’라는 규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표출되는 고난이 내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님께 자행한 핍박이고 살인인 것을 알게 해 주시는 것이 성령께서 책망하시는 죄에 대한 것이고, 의에 대한 것이고 그리고 심판에 대한 것임을 알면 된다.
이때 환란 중에 나오는 것이 ‘나는 내가 아니고 죄를 담고 있는 죄인이다’라는 고백이고 내가 나를 놔버리는 것이 아니라, 알파와 오메가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처음과 끝 사이에 쳐진 빠져나갈 수 없는 괄호‘( )’ 안에 갇혀서, 통일된 그리스도 안에서 감사함으로 똑똑히 ‘나’를 지명하게 된다. “내가 아니라 죄로다”
5강 하늘에 앉히시니
의로 가득 찬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기에, 주 안에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이들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어느 것도, 추악, 탐욕, 거짓, 음란, 속임수, 위선, 살인, 그 어느 것도 성도를 구속할 수 없는 이유는. 이런 모습이 나보다 먼저 있던 자리가 뚫렸기 때문에 쏟아지는 죄와 허물인 것이 밝혀지는 것이 도리어 내가 나에게서 놓이고, 내가 제거되는 결과물이 되기 때문이다. 부끄러워서 도로 가리려고 인위적 선함으로 변명하고 숨기려는 방어가 오히려 새로운 피조물을 흉악으로 다시 결박시키는 꼴이다.
예수 안에 놓였다는 것은, 기존의 인간이 낯선 새로운 공간으로 옮겨진 것이 아니라, 마리아가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한 것처럼, 세상에 없던 피조물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예수 안이라는 자궁에 잉태된 것이고, 유한체가 예수님을 임신한 몸이 된 것이다. 이미 죽은 자를 통해 속수무책 쏟아지는 죄를 담은 죄인을 부르시고 써주시며 ‘의’를 이루신 한 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사건에 합류되었기에, 그토록 회수하고자 집착했던 자기 의가 얼마나 더러운 옷인지를 더불어 확인하게 된다.
우리 육체를 덮고 있는 자기 의를 벗겨내시고, 예수님의 죽음의 옷으로 덮으신다. 인간은 예수 죽인 것을 스스로 인정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을 아시기에, 그릇에 담긴 어린양의 피를 끼얹듯 입히셔서, 모든 처분은 피의 주인에게 맡겨졌음을 인정하게 만드시고 동시에, 그토록 애쓰는 짐들이 내 손을 떠난 가벼움으로 예상치 못한 감사가 나온다.
위로부터 났고, 하나님의 보내심으로 예수님이 오신 이곳은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의 세계이고 본질상 진노의 행위를 뿜어내는 곳이었다. 예수님은 다시 하늘로 가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 의해 친히 하늘에 앉히셨다. 아들의 ‘앉혀짐’의 커다란 계획이 성사된 곳은 예수님의 몸, 하나님의 뜻만 작동되는 주의 이름의 제단이었다.
단군의 나라가 아니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통해 주어진 율법이 주어진 이스라엘 안에서, 하나님의 법의 체계가 작동되는 예루살렘에서 유대인에 의해서 예수님이 죽임을 당하셨고, 그렇게 율법을 주신 분이, 율법을 받은 손인 유대인을 들어 아들을 잡으셨다.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난다.
하나님을 가장 잘 알아야 하는 유대인에게서 구원자가 나셨고 그들에게 버려지셨기에, 이 세상에는 구원이 성사될 수 없는 것이다. 싫어하는 것을 간절히 바라는 것이 가능하다고 우기는 것이 인간 믿음이고, 인간 믿음의 음흉한 속셈이 내부에서 충동질하는 마귀가 원하는 구원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지만, 그 바람은 내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온 믿음이다.
“내가 본즉 도와주는 자도 없고 붙들어 주는 자도 없으므로 이상히 여겨 내 팔이 나를 구원하며 내 분이 나를 불들었음이라”(사63:4~5)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언약의 통일체로 구원해 내셨고, 이로써 예수 안에 만물이 통일되어 한 분의 통치 아래 놓인다. 십자가가 만든 빈 무덤 안에서 사랑을 품은 저주와 심판을 품은 저주가 둘 다 나온다. 여전히 ‘나’라는 시체로 채워있는 저주만 나오는 무덤과 미리 사랑으로 호출받았기에 더 이상 ‘나’가 없이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었음을 증거 하는 빈 무덤으로 갈라진다.
6강 새로운 환경
원래 하늘과 인간은 막혀 있는데, 십자가로 말미암아 막힘이 더 단단히 막혔음을 알기에 그 ‘앎’으로 인해, 6강을 헤어나지 못했다. 6강에 도돌이표가 있는 것처럼, 미로에 갇힌 듯이, 7강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다시 1강으로 가서 6강, 또다시 1강으로 되돌려지기를 반복했다. 무슨 음흉한 의도가 감춰져 있기에 본심을 거슬러 여전히 말씀을 붙들고 있는 것일까.
인간은 지독스럽게도 지옥이 싫다. 가롯유다처럼 되기 싫다. 그래서 예수님이 친히 가롯유다의 자리까지도 자기 쪽으로 잡아당기셨고, 마귀가 그토록 가기 싫어하는 지옥까지 내려가셨다.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자리는 열한 제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사단으로 말미암아 공백이 된 한 자리를 잠복된 주의 뜻이 표출되는 우연의 자리로, 인간이 침범할 수 없는 빈자리로 만드셔서 성령의 작업장이 되게 하셨다.
그 빈자리가 채워지는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온전한 열둘의 실체이신 주님의 몸, 머리 되신 분의 뜻이 실행될 교회가 출현한다. 모두가 지옥 가 마땅한 모습이 그려지는 한 자리를 통해 열하나가 함께 합류하는 빈자리가 될 수 있고, 이렇게 열둘이 하나가 되는 주님의 몸만, 하나님의 말씀만 영원히 남게 하신다.
육체를 가진 성도에게는 여전히 공백이고, 없는 곳인 예수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는 의와 평강과 희락의 순간을 함께 하고, 넘치는 감사를 교류하기도 잠시, 순간은 단절되고 또다시 전쟁 준비가 시작된다. 이미 치워졌던 ‘나’가 어느새 ‘막혔음을 알았다’라는 지식으로 자동 생성된 좌표에서 이미 죽은 ‘나’를 소환시켜 고정하는 것이다. 내가 ‘나’를 상정하는, 그렇게 어떻게든 인간이 되고자 하는 가상의 고정점이 생성될 때, 다시 하늘로부터 나신 한 분, ‘나’와 땅에서 난 ‘나’가 충돌한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분의 영이 임한 자들은 이 세상에 갇힌 주의 백성에게 탈출구를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오물 같은 죄가 밖으로 나오기에 천국은 우리가 꿈꿀 수 없는 곳인 것을, 모든 것을 단념하게 하는 허무를 전하기를 기뻐하고, 우리의 죄가 유발한 예수님의 상처에서 쏟으신 피만 말한다.
새 신을 신겨주신 분으로 말미암아, 십자가 위에서 사건 자체로 폴짝폴짝 뛰어오르게 하실 때마다, 육체의 무거움으로 오래 머무르지는 못해도, 위에 계신 주님을 좀 더 가까이 만나는 기쁨이 바닥으로 다시 떨어지는 아픔을 능가한다. 성령의 활동인 십자가 사건의 제자리 뛰기가 활발해질수록 육체를 벗고 온전히 주와 함께 거하고자 하는 소원은 짙어진다.
7강 사랑을 입은 자
사랑을 입히심은 이미 깨끗하게 된 몸과 마음이 준비되고 그 위에 사랑을 입혀주시는 인간적 관점의 사랑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2:9)
주님의 공로만을 찬양하는 입으로, 예수님만이 이루신 일을 사모하고 앙망하는 눈과 마음으로 덧입혀지는 사랑이니, 극히 일방적이다. 나의 원함도 기대도 그 어떤 것도 상관이 없어서 어리둥절하다. 아직 죄와 허물이 그대로 있는 연약한 상태일 때, 우리가 아직 죄인일 때,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부어진 그분의 대신 죽으심 앞에서, 그저 ‘어찌하여...어찌하여’만 연발한다.
어째서 내가 죽어야 하는데, 예수님이 대신 죽으셨는지를, 이대로 아무것도 모르고 마귀와 함께 지옥 가도 무방한데, 어째서 이 사실을 알게 하셨는지. 이제 그분의 처분만이 나에게 전부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만나게 되는 것이 단절이다. 나에게서 내가 끊어졌기에 비로소 마주하게 되는 두 개의 나로 놓인 상태가 된다. 스스로는 갈 바를 알지 못하기에 성령의 지시만 있고, 지시의 실행만 있다.
이것을 말씀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 예수님이 자신의 피 묻은 몸으로 덮으셔서 악마의 환경과 강제로 차단하신 그리스도의 할례라고 하신다. 사람이 죄 된 몸을 벗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죄를 정한 예수님의 몸을 버리시고, 아버지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서 다시 살리신 예수님의 몸이 사랑의 공간이 된다.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는 것은 마치 커다란 유리돔이 날아와 세상에 속했던 죄인을 덮어버린 것과 같다. 분명히 동일하게 보이고, 기존처럼 말하고 행동하는데,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는데, 이상하게도 여전히 생생히 보이고 속해있는 이 세계의 풍조를 따라 함께 흐르지를 못한다.
이전에는 하늘로부터 오는 의의 환경과 완전히 단절되었던 것이, 이제는 사랑이라는 투명막에 갇혀서 죄의 환경과 단절되는 새로운 막힘 안에서, 한때 나였던 실체를 확인시키는 새로운 눈이 죄의 실상을 낱낱이 파헤치고, 성령께서 책망의 말씀으로 나와 죄를 분리시키는 작업으로 인해, 비언약과 언약 사이에서, 옛것과 새것 사이에서, 옛 나와 주님이신 나 사이에서 나오는 이미 용서하심의 희생만 피어난다.
나의 이름을 변호하고, 나의 의를 회수할 선악적 방어선이 붕괴되었기에, 복음적 사건 앞에 분내고, 두려워하고, 배척하는 그 자연스러운 현상에 몸이 맡겨지고, 분을 내는 주체를 노출 시켜서 갈라내고 발라내는 말씀의 칼춤으로 말미암아 결코 죄가 죄 될 수 없고, 죄를 지을 수 없는 일방적 조치에 놓인다.
분노하는 나에게 밀침당하시는 모습으로 반복적으로 찾아오셔서, 예수님을 미워했고 싫어했다는 증거인 십자가로 다시 덮어주시는 주님의 막무가내 사랑은 이 세상이 말하는 사랑도 아니고, 이 세상이 감당할 수 있는 사랑도 아님을 알아간다. 그 사랑 앞에 나를 점점 잊어간다.
8강 막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 줄 때, 너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는 악마의 속삭임이 마치 하나님의 사랑을 담은 메시지라고 믿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들려오는 주님의 호출은, 하나님을 향한 나의 사랑을 무참히 짓밟으며 나의 이름을 삭제하셨고 나를 언제든 말씀이 오면 사라져야 할, 안개같은 막으로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호출로 말미암아 그분에게로 가서 ‘죄’가 되었고, 주님의 용서가 입혀진 ‘막’이 되었다.
우리가 이미 죽었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기에 전쟁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다. 내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나’가 이미 알고 있는 나 사이를 가로막으며 ‘막’을 형성한다. 주님을 증거하는 사건이 발생할 때,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마음이 더 쓰이는 옛사람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충돌을 통해 도리어 공격받고 있는 새사람이 확인되니, 옛것이 없이는 새로운 나를 알 수도, 흠모할 수도, 찬양할 수도, 감사할 수도 없다.
사건이 말씀을 담고 막에 침투하실 때, 막의 역할은 단단한 경계선 역할이 아니라, 녹아 없어지고 사라지는 것이다. ‘넌, 빠져’ 경계가 희미해질 때 벌어지는 것은 격렬한 전쟁뿐이다. 유한한 인간이 자기 한계를 드러내며 사라지는 자리, 그 공백 자체가 무한의 공로가 빛을 발하시는 현장이다. 죄가 더욱 죄로 드러나는 전쟁의 현장에서만 내가 제거되고 각자의 기능으로 표출되는 말씀만이 그곳에 남겨지며, 주님이 동행하시는 증거가 그렇게 나타난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계14:12~13)
주님이 동행하시면 주께서 다 지키신 계명과 그분의 믿음이 담겨서 이동하기에, 우리의 행함이 족족 주님의 행함임을 부인할 수 없게 되고, 그렇게 우리의 수고는 그치고 주님의 행하심과 고난의 증인이 된다. 주의 사랑의 강권으로 ‘나를 위함’이 자동으로 포기된다. 여전히 육체 가운데 있는 성도의 인내는 여기에서 발생한다. 나를 변호하고자 하는 마음이 복음을 변호하고자 하는 마음과 싸운다.
‘네가 했잖아. 여기 너 말고 또 누가 있어? 다 네가 너의 입으로 말했잖아’라고 묻는 이들에게 ‘행하신 분은 주님이다’라고 말하는 그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 감내할 일이다. 주변 사람들이 끝까지 베드로와 요한만 쳐다봐도, 사도들은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3:12)라고 말했다.
복음은 복음이 스스로를 변호한다. 오히려, 해석에 해석을 더하다가, 도리어 복음을 이용해 자기 이름을 변호하는 함정에 빠지게 된다. 허락하신 분량만큼으로 적절히 쓰고 계시는 성령의 손에 이미 의탁 되었음을 믿고, 주께서 구원하실 자를 반드시 구원하심을 믿기에 사도들은 이렇게 외쳤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행3:16) 좀 더 친절한 말은 이러하다. ‘나도 몰라. 달리 뭘 어떻게 말할지 모르겠어. 나는 원인과 끊어져 있는 결과물 자체일 뿐인데, 이게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왜 나에게 물어? 네 안에 믿음에게 물어야지’
이적은 병 고치고 물 위를 걷는 이런 것뿐만이 아니다. 간음한 여인처럼 현장에 질질 끌려가는 믿음의 사건도 마찬가지이다. 사소한 실수부터 해서, 입에 담기도 힘든 것까지, 이 모든 것들이 자신의 몸을 통해 나오기에 ‘제가 한 것이 아닙니다’라는 증거는 옛 나에게는 너무 수치스럽고 민망한 일이고, 주변 사람이 눈살을 찌푸리는 것을 넘어서 죽이고 싶은 마음을 유발하는 것은 당연하다.
네가 잘못해 놓고, 왜 책임을 회피해? 네가 그렇게 했잖아!!! 모든 책임을 떠안고 자살하는 것이 더 양심적이잖아!!! 새로운 피조물인 내가 믿음 없는 옛 나에게 끝까지 자기 이름을 변호할 기회를 주지 않으시는 것이 성도에게 표출되는 인내의 모습이다.
예수님을 만난 수가의 한 여인은 어떤 대단한 이적을 통해 예수님이 메시아인 것을 안 것이 아니라, “내가 행한 것을 말하는 분, 나의 죄를 모두 알고 있는 분”이라고 고백하며 기쁨으로 마을로 달려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고백했다. 책망이 도리어 기쁨을 안겨주는 자마다 한결같이 고백한다.
제가 한 것이 아니라 창세 전에 이 모든 것을 예비하신 분께서 이 몸을 통해 모든 것을 하셨습니다.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요3:21)
9강 내부전쟁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 뽑혀 인류를 대표하는 샘플이 된 것은 하나님의 무기가 되기 위해서 였다. 이스라엘 자체가 하나님의 무기가 되는 근거는, 백성의 수효도, 그들 각각의 역량도, 의로운 심성도 아니었고, 오직 이스라엘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는 유월절 문설주에 발린 피의 의미 존속 여부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세상 신의 권세에 잠식당했고, 하나님께서 변질된 무기인 이스라엘을 친히 치실 때, 원래부터 움직이시고 일하셨던 것은 문설주의 피의 주인이신 주의 이름뿐이었음이 본격적으로 드러났다. 언약궤에 뿌려지는 피의 낙수 현상이 만들어 내는 취지를 하나님께서 친히 보호하셨다.
이스라엘이 국가를 지키려 했기에, 자신들의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려 했기에, 결국 그들은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을 공격하는 무기로 변했고, 하나님의 뜻대로 마지막 유다 왕가가 이방 나라의 손에 박살 나면서, 피의 심판이 이방으로 파급되었다. 부패한 이스라엘과 이방 국가의 합작품인 십자가는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방에까지 하나님의 심판의 빛이 힘차게 비치게 했다.
이제 언약 국가인 이스라엘과 비 언약 이방 국가 간에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류의 전쟁,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전쟁으로 온 세상이 하나님의 전쟁터가 되었다. 분명히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였는데, 은혜로 말미암아 피를 머금은 언약궤가 죄 아래 놓인 육체에 침투되고 연결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십자가의 영이 내부로 들어오면서, 안에서 벌어지는 분열 증상은 부르짖음이다. ‘어찌하여 버리십니까’ 주제 파악이 얼마나 안 되면, 어느 정도로 상태가 심각한 죄인인지 알지 못하면, 부패한 상처 자체인 ‘나’를 도려내시는 분을 향해 도리어 울분을 토하게 되는 걸까.
아직 내 사랑이 담겨있어, 예수님의 사랑이 담기지 못하면, 사건으로 밀고 들어오는 예수님과의 마주침은 언제나 첫 만남이고, 한결같이 싫고, 거북스럽고, 얼굴을 돌리고 싶은 만남이 된다. 버려지고 분리되는 고통이 나의 고통이 아닌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아닌 이 안에 새로운 피조물을 만나기를 원하는 아버지의 아들을 향한 충만한 기쁨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산모가 아기를 만나는 기쁨을 느끼기 전에, 서로 분리가 되는 산고가 먼저이다. 분리되는 진통이 더 잦아들수록 아기와 마주할 순간은 더 가까이 와 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고통과 눈물이 잦을수록, 주님과 더 가까이, 가장 가까이, 마음속까지 주와 하나 되는 나의 소멸의 순간이 가장 가까이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아버지에게 버려지시는 그 순간이 아들과 아버지가 가장 가까이 있는 순간이었다.
십자가 사건을, 그 순간을 계속 비쳐내는 성도의 몸은 이제 영적 무기가 된다. 이 무기는 구원을 위해 나를 지키는 무기가 아니라, 구원을 바라는 내부의 나, 그리고 외부의 나들의 복제품들을 공격하는 그리스도로 무장된 하나님의 무기이다.
결코 나를 위해 살 수 없고, 나를 위해 싸울 수 없는 무기가 된 채, 주의 은혜 아래에서 마음껏 자유롭게 움직인다. 자신의 움직임이 주의 손에 들린 무기의 움직임인 것을 알기에 어디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말하고, 듣고, 쓰고, 행한다. 그리고 세상에서는 가장 약한 모습이나, 하나님의 약함은 사람보다 강하심을 체험하게 되고, 세상에서는 가장 미련하나, 하나님의 미련이 사람의 지혜를 우습게 여기심을 체험한다.
누가 과연 복음을 믿어 구원에 이를 수 있을까. 사람은 할 수 없다. 나의 진짜 실체를 알게 되면, 그 ‘나’가 영원히 하고 싶지 않은 것이 복음을 믿는 것임을 알게 된다. 그렇기에 이 몸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나와 아무 상관 없음이 더 분명해진다.
이 모든 행함이 예수님의 행위였고, 예수를 대적하는 훼방자이고 핍박자이고 포행자였던 그 행위조차, 예수님이 자기 자신을 치시는 예수님의 행위였음을 드러내고자, 자신의 죄를 밝히 드러내는 빛으로 더 가까이 끌어내는 사건 안에서 힘을 뺀다. 나의 나 된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보이는 두 개의 ‘나’가 결국 진짜 주인인 새로운 나의 승리로 완결된 전쟁의 전리품이 되는 것이다.
나의 모든 것을 빼앗으신 분의 세계에 놓여, 믿음으로 작동되는 전리품들은 무화과나무가 되어 예수님의 저주를 표현하는 몸이 될 수도 있고, 뽑혀서 바다에 심기우라는 주님의 지시에 따르는 뽕나무가 되기도 하고 옮겨지는 산이 되기도 한다.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값 주고 사신 몸은, 몸의 주인이 능력을 발휘하시는 움직임이고, 지시의 결과를 보이는 어떤 것일 뿐이다.
댓글
이근호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라는 책에서
주인공 엘리스는 가던 길이 막혀 버렸다. 나는 어디로 가야하는 걸까? 그때 늘 활짝 웃는 고양이에게 물었다. ”여기서 어느 길로 가야하는지 가르쳐 줄래?“ ”그건 네가 어디로 가고 싶은지에 달렸지“ ”어디로 가고 싶은지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럼 어느 길로 가든 상관없어. 결국 어디든 도착하게 되어있거든. 누구를 만나도 상관없어 다들 미쳐있어“ 그러고서는 또 다시 활짝 웃고 고양이는 사라진다. 실체는 사라져도 웃음은 계속 남아 있다. “십자가 피날레를 반복 재생하는 상영관”, 바로 이들이 성도이다.
이를 위해 마르다/마리아 오빠 나사로는 제대로 웃을 준비가 되었다. ‘이미 죽었음’의 옷으로 갈아 입었기 때문이다.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요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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