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죽노라
2016년 6월 5일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15:29-34
실생활에서 복음으로 인한 비장함을 드러낸다는 것은 세상 사람과 다른 현실관을 갖고 있다는 말입니다. 보통 현실이란 ‘죽고자’가 아니라 ‘살고자’ 하면서 형성됩니다. 그런데 사도는 말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즉 본인이 그렇게 살고 싶어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다른 분에 의해서 이런 식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특이한 현실관이 그 입장에서 제시됩니다. 그 세계관은 바로 일괄적으로 세상은 하나님의 분노와 저주와 심판 아래에 놓여 있다는 세계관입니다.
사람이 죽는 것은 세포가 맥이 빠져 죽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몰라서 죽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살았다’와 ‘죽었다’는 오직 예수님의 죽으심과 예수님의 살으심 뿐입니다. 곧 하나님과 예수님에 의해서만 성립되는 그 언약의 펼침의 범주가 곧 하나님이 생각하는 현실이었던 것입니다.
평소에 인간들이 토해내는 것들은, 천국에 부합되지 않는 것들로서 꾸준히 인간들의 몸을 구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인간들이 살려내고자 애지중지하는 이 몸은 죄로 가득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몸은 ‘죽음으로 끝날 몸’이 아니라 ‘반복되는 죽음이 가능한 몸’으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그 몸은 예수님에 의해서 제공됩니다. 즉 날마다 성도는 죽고 그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는 몸으로 성립되는 몸이 등장합니다.
성도가 보는 현실은 머물어야 될 자리가 아닙니다. 관통해서 계속 떠나야 될 곳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성도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증거자로 선택되어 살아갑니다. 이게 ‘죽음의 현재성’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초연하게 세상을 대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말씀을 보셔야 되는 이유가 성경말씀과 우리가 평소에 무심코 살아가는 사고방식과 갭이 있어요. 뭔가 끊어져 있어요. 그래서 성경보면서도 그렇게 심각성을 못 느끼는 겁니다. 그 비장함을. 우리는 이 시대를 살아가려고 하잖아요. 사도는 이 세대를 통과하려고 합니다. 나그네니까, 우리의 고향은 따로 있으니까 사도바울은 훌훌 털어버리고 통과하려고 하는데 우리는 어디에 죽치고 살까, 라는 것이 주된 관심사가 되어 있어요.
그러면 사도가 보는 현실관은 뭐냐? 우리가 살다보면 죽겠지, 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죽인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죽여서 죽는 것이지 살다보면 맥 빠져 죽는 것이 아니에요. 날마다 주께서는 죽이시는 겁니다. 뭐로? 말씀으로 죽이고 율법으로 죽이고, 날마다 죽이는 거예요. 죽음에 두 종류가 있어요. 한 번 죽으면 끝인 죽음이 있는 반면에 반복해서 죽는 죽음이 따로 있어요. 반복해서 죽는 죽음은 그 몸이 특수한 몸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나는 날마다 나에 대해서는 패배하고 그 패배한 나를 예수님의 승리로서 또다시 새로운 날을 맞이하고 새아침, 새 새벽을 맞이해서 오늘도 살아가고 있다. 내일되면 그렇게 해서 내 자아는 또 실패해서 죄로 인하여 죽게 되지만 주께서는 그런 죄인을 또 뜻이 있으면 살려낼 것이고.”
예수님이 현재 살아 있는 분으로서 활동하고 있음을 늙어가는 우리 몸을 통해서 마음껏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면 진리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진리는 본인이 진리화해서 동반해서 같이 수정되어야 되거든요.
무의미한자들의 집단이 의미 있는 예수님을 살해한 겁니다. 그 살해한 것을 되받아 와야 그게 구원의 능력이 돼요. 그 앞에서, 의미 있는 분 앞에서 내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고백을 해야 그게 나에게 구원의 능력이 된다고요.
매일같이 진리를 못 찾으면, 달리 이야기해서 매일 같이 자기가 종사하는 그 업 속에서 날마다 죽이시는 그것을 못 찾으면, 달리 이야기하면, 날마다 위험을 무릅쓰고 산다는 의식이 없으면……. 포도농사 지으면서 ‘날마다 위험을 무릅쓰고 지금 포도 농사짓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이 없으면……. 지금 포도농사 지으면서 포도를 맹수로 봐야 돼요. 맹수와 싸우는 거예요. 그리고 포도농사 지으면서 속으면 안돼요. 이 포도농사의 작황에 좋은 것에 속아서는 안돼요. 목회하는 사람은 이 교인수가 많은 것에 속아 넘어가면 안돼요.
이처럼 머물려고 하지 말고 통과하는 중에 우리는 그러한 느낌을 공유해서 받게 되는 겁니다. 저는 그냥 칼빈신학자체를 이단으로 봐요. 칼빈주의, 개혁주의신학을 이단으로 간주하는 이유가 개인구원과 관련되어 있어요.
마귀가 만든 현실이에요.
모든 인간은 선택합니다. 문제가 뭐냐? 선택한 그것을 선택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그 자체에 대해서 이미 창세전부터 주님의 선택에 의해서 우리가 거기에 몰아세워져 있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교회를 핍박하고 예수 믿는 자를 잡아 죽였는데 나중에 주님을 만나고 보니까 나의 선택이라고 여긴 그것마저 주님의 선택이었던 겁니다.
나의 선택보다 주님의 선택이 우선이었고 우선권을 갖고 있었던 겁니다. 내가 하는 모든 것은 주의 은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삼손이 그렇게 여자를 밝혔으면 죽어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삼손이 구원받게 된 것은 이미 자기 이전에, 자기 자신 이전에 이미 다른 분에 의해서 자기가 그분을 증거 하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것을 소급해서 알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버지여, 이 몸 가지고 주의 뜻을 이루게 하옵소서. 나실 인의 뜻을 이루게 하옵소서.”하고 희생물이 될 때 주님을 위해서 희생물 되라고 그동안 내가 인생을 그렇게 살아왔다는 것을 뒤돌아보면서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개인구원이 아니고 전혀 예상 못한 낯선 선택이 우리 인생에 침범한 거예요. 침투한 겁니다. 마치 사도바울처럼, 마치 삼손처럼, 그리고 많은 선지자처럼.
각자 다른 현실가지고 동일한 현실이라고 우기는 정신병 환자입니다. 조현증 환자에요. 정신분열증. 우리 몸에는 이 세상에 대한 정의 가시가 가득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처리하면 안돼요.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싶은 것은 우리의 죄를 우리가 처리하지 마세요. 손대지 마시고 그냥 그대로 반납하세요. 이게 날마다 즐겁게 죽는 모습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달리 보게 하옵소서. 술 도가니에 거품이 일어난 것처럼 봐야 되는데 우리는 이 세상에서 지고 남에게 패배한다고 얼마나 짜증내고 울분을 터뜨렸습니까? 왜 나에게는 나의 안식처를 주지 않느냐고 얼마나 항의했습니까? 주여, 다시 한 번, 하나님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얼마나 격차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