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기준
2017년 7월 30일 본문 말씀: 고린도후서 10:9-1
성도는 예수님만을 증거하면서, 주님이 이 세상에서 통과한 그 길을 주님과 더불어 가고 있는 중입니다.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는 “너 죄인 맞잖아.”라는 그런 선입감으로 복음을 전해요. 죄인이라고, 죄라고 제시하고 그 위에 복음을 얹어서, 하나님의 의를 얹어서 제시하는 겁니다. 그러면 복음을 달랑 가져가면 안 되고, 그 밑에 깔려있는, 쟁반처럼 깔려있는 그 밑에 뭐가 있느냐 하면, “네가 이렇게 죄인이기에 주께서는 이렇게 복음을 전달할 수밖에 없다.”라는 겁니다.
인간의 욕망은 어디서 나오는데요? 인간의 욕망은 본인의 의도에서 나와요. 하지만 인간은 욕망만 있는 것이 아니고 충동도 있다니까요. 욱하는 게 있어요. 욕망은 조절이 되지만, 충동은 조절이 안 됩니다. 이거는 신이 되지 않고서는 만족하지 않는 것이 나와요. 욕망이 뭐냐 하면 신이 돼야 하는데, ‘이게 아마 나의 최고의 행복일거야.’라고 욕망으로 딱 해보니까, 이것도 며칠 안 가서 시시해져요. 또 이것 하다가 시시해지고. 그걸 대리보충이라고 합니다. 자꾸 충동이 나오는 구멍을, 맨홀 뚜껑을 덮는 거예요. 뭐로? 내가 하고 싶은 욕망을 적당히 비윤리적인 것은 떼 내고 윤리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으로 덮는 거예요. 내가 뭘 재미있어하느냐, 본인들이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뭘 원하느냐, 본인들이 정하는 것이 아니고 뒤에 소켓에 배선을 통해서 전해오는 악마가 정하는 거예요.
2000년 교회 역사는 신앙을 없애는 역사입니다. 2000년 교회 역사에 신앙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세력화 된 교회뿐이에요. 예수 믿는 사람끼리 어떤 정치적인 힘을 모으자! 그걸 가지고 교단이라고 합니다. 교단. 그게 교회고 교단이에요. 그 사람들 정치세력들입니다. 정치집단이에요. 예수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에 대한 대리 보충물이에요. 추상적인 예수를 나에게 보탬이 되고 힘이 되는 예수가 된 거예요. 자기를 지키는 복음이라는 거예요. 그게 복음의 내용이고 기준이라는 겁니다.
결국은 모든 인간이, 가룟 유다하고 우리하고 차이점이 없잖아요. 뒤에 악마의 소켓이 꽂아있기는 마찬가지라고요. 가룟 유다만 욕하지 마세요. 열 두 제자 다 도망갔고, 베드로는 수제자라고 하면서도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했고, 듣는데서 저주했습니다.
“나 저 사람 모릅니다! 나 저 사람을 저주합니다!” 그걸 삼창해야 돼요. 주여! 삼창하지 말고. “나 저 사람 모릅니다. 나한테 이득이 되지 않으면 저 사람 믿지 않습니다!” 이걸 삼창해야 된다고요. 왜?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동행이라고 하는 것은 늘 그것을 반복시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믿는다는 그것이 얼마나 거짓된 망상이라는 것을 노출시키기 위해서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동행시키는 거예요. 노리는 것이 없이 무슨 교회를 옵니까? 내가 지금보다 더 신으로 접근해 가는데 어떤 영향력을 주께서 행사해달라고 빌기 위해서 온 거예요.
사도바울이 아는 절대 기준은 뭐냐, 절대기준은 바로 ‘이중처벌은 없다’입니다.
복음이 뭐냐 하면 바로 이중처벌금지법에 의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평생 동안 지을 모든 죄에 대해서 이미 우리는 처벌받은 자로 확정짓고 말았습니다. 이제부터 우리에게 남은 것은 소매를 걷고 하고 싶은 대로 죄를 짓는 겁니다.
근데 어떤 것이 죄냐 하면, 산상설교라는 주님의 설교에 모범사례가 나와 있습니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는데 알게 한 게 죄고, 기도할 때 뭐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죄고, 금식할 때 찡그리는 것이 바로 죄고, 구제할 때 알게 하는 것이 죄가 되고, 어떤 여자 그냥 예쁘다고 했는데도 그게 음란죄가 되고, 누구보고 기분 나쁘다고 하는 것도 살인죄가 되고, 하나님 앞에 맹세하는 것도 그게 죄고, 무엇을 입을까, 마실까, 먹을까를 365일 동안 단 하루라도, 아침 7시 46분에서 47분까지 1분 동안 그걸 생각했더라도 그게 죽을죄에 해당돼요. 죽을죄가 아닌 게 없어요.
우리는 이것을 즐겁게 맞이해야 합니다. 왜? 이중처벌법이 없기 때문에. 그 근거가 구약에서 넘어와요. 구약 출애굽기 33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9절, “나는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20절,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하나님을 보고 살 자가 없다는 것은 다 죽은 자라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죽은 자인데 여기에 은혜가 주어지게 되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자가 만나게 되는, 그걸 앞장세워서 일하시는 분이 진짜 살아계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나님이 자기소개를 이미 해놓은 거예요.
여기서 얼굴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얼굴은 뭐냐 하면 인간의 모든 판단과 결정을 내리는 모든 외부의 감각이 얼굴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이게 표정으로 나타나거든요. 하나님의 얼굴을 볼 자가 없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니가 갖고 있는 얼굴은 내가 보기에는 하나님을 왜곡되게 만드는 출처가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것은 얼굴을 보고 마주했음에도 살아있을 때 그게 바로 영생이고 구원입니다.
■사람이 얼굴을 갖고 있다는 말은, 그 얼굴이 수상한 얼굴이에요. 이게 다른 세력을 표현해주는 배후에 어떤 숨겨진 괴물의 속성과 괴물의 본질을 보여주는 그런 표정들이 튀어나오는 얼굴들을 각자 소지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 얼굴에서 뭐가 나오느냐, 최종판단이 나와요. 누구에 대한 판단? 예수 당신이 메시아냐, 아니냐를 판단하는 모든 자료와 근거가 되는, 그러한 누적된 경험담. 지성, 이성, 감성, 그것들이 얼굴의 표정을 통해서 우리가 표출하고 있는 겁니다.과학입니다.
이 세상은 신이 창조했다는 거예요. 그게 마귀생각이에요. 성경에서는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창조했어요. 지금 그 차이에요. 그 차이. 예수님이 창조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했다는 것을, 창조과학회가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그들이 과학적인 산물가지고 연구를 해보면 신에게 얼추 연결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러나 예수님이 창조했다고 보면 아무리 유물이나 어떤 화석을 조사해 봐도 거기서 나사렛 예수가 안 나옵니다. 그래서 대리보충이에요. 복음을 가리기 위해서 유신론으로 가로막아버린 거예요. 그래놓고서 신자라고 우기는 겁니다.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준다는 하나님의 이 말씀은 은혜만 던져주고 팔짱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은혜에 따라서 활동한다는 거예요. 활동하는데, 어떤 활동을 하느냐 하면
㉮어떤 인간의 얼굴도 나의 얼굴을 볼 자가 없다는 것으로 다 부숴놓는 거예요. 어떤 인간의 판단과 이성적인 결정도 내가 내린 본 뜻하고는 정면으로 배치가 되는, 악마가 좋아하는, 악마가 시키는 대로 움직인 것이라는 것을 다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구원받은 자의 특징이 뭐냐, 얼굴을 뭉개버려야죠. 얼굴을 뭉개버립니다. 성도의 특징은 얼굴을 뭉개버리는 겁니다. 그 얼굴 뭉갠다는 것이 어디에 나왔느냐, 우리가 얼마 전에 했어요. 고린도후서 3장에서 했습니다. 모세가 저쪽 얼굴을 뭉개버려야 하는데 자기 얼굴을 뭉개버립니다. 수건을 써버린 거예요. “나 얼굴 없다~”
주님 쪽에서 온 얼굴은 얼굴이 없습니다.
㉰그 얼굴을 누가 대신하느냐, 고린도후서 3장에서 그 얼굴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얼굴 없는 우리를 대신할 거예요. 없는 얼굴을 대신해버리면 우리는 뭐가 되느냐 하면 갑자기 우리가 동작하는 사람이 아니고 동작 그만하라는 금지를 당한 사람이 돼요. 동작 그만하라고 금지를 당한 사람. 동작 그만! 동작금지가 뭐냐, 쉽게 말하면 이겁니다. 여러분들이 세상의 본심을 보려면, 인간들이 너무 바빠서 본심을 볼 수가 없어요. 인간들에게 얼음! 해야 해요. 모든 것을 동작 금지시켜야 해요. 동작 스톱시키는 거예요.
㉱그걸 묵시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묵시. 동작이 정지된 사람. 동작이 정지되게 되면, 모든 사람의 동작이 정지가 되면 누가 활동을 하느냐, 그 사이사이에 주님의 은혜가 활동을 하는 거예요. 주님의 은혜가. 우리가 너무 분주하기 때문에 주의 은혜를, 우리의 여망과 우리의 기대치와 우리의 욕심이, 주신 은혜를 다 가로막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오셔가지고 “동작 그만!”하면 글을 쓰고 있다가 스톱하는 거예요. 동작을 그만하게 되면 세상 돌아가는 것, 참새가 짹짹거리고, 들풀이 피고, 해가 움직이고, 이 모든 움직임, 그리고 내 속에 심장이 뛰는 그 모든 소리에, 그리고 잠자면서 꿈에 나타나는 그 모든 것은 누구의 솜씨고 누구의 활동이냐면, 그것은 오직 아무도 없이 홀로 계시는 분, 예수님의 자기세계에서 자기 활동입니다. 예수님의 혼자만의 활동. 우리는 거기에서 등짝에 소켓이 꽂혀가지고 주님의 활동으로 그렇게 살아온 거예요.
모세는 수건으로 덮고, 고린도후서 3장에 보면 모세가 하늘나라 수건을 덮었습니다. 덮으면서 하는 말이 “이것은 너희들이 예상도 못한 하늘의 영광이 이 수건에 담겨있다. 하나님이 이 수건을 벗어버리게 하면 너희들은 다 죽어. 왜? 이 영광, 이 주의 영광을 너희들은 감당 못하기 때문에.”
우리 자신들이 수건 쓴 모세이기를 원합니다. 바로 성령께서, 예수의 영이 우리에게 왔다면 우리만이라도 스톱이 될 수 있어야 해요. 스톱이 되는 근거가 뭐냐, 이미 우리는 살인자기 때문에 그래요. 이중처벌금지법이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그리스도가 복역을 하면서 “이리와! 니는 나와 같이 복역을 해야 돼.”
주님께서 우리가 지은 모든 죄 값을 아버지 앞에 저주받아서, 이미 우리는 주님과 같이 죄 값을 받았습니다. 죄 값을 이미 받았기 때문에, 이 세상 살면서 더 설쳐봐야 주님께서 죄 값 치른 것 외에는 더 이상 나올 게 없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 고린도교회가 사도바울에 대해 지금 화를 내고 있는 거예요. 당신 복음에는 들을 것이 하나도 없다고요. 얻을 게 없다고요.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이 죄인아! 니가 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동작 그만하라고 하는 것이다. 니 등짝에 소켓 꽂아서 주님 증거 하라고 교회 오게 하는 것이다.” 그 인생을 그 따위 식으로 살게 만드는 거예요. 그 인생을. 주님 증거 하라고. 남의 인생 부러워 하지마세요. 그쪽은 그쪽대로 죄 짓게 만들고, 나는 내 식으로 죄 짓게 만드는 거예요.
이게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 10장 13절에 “그러나 우리는 분량 밖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량으로 나눠 주신 그 분량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자기가 각자 맡은 분량대로 이중처벌법에서 제외시킨 자의 자유함.
예수님께서는 죄인도 아니면서 죄인으로 이 땅에 오셔서 무사히 성공했습니다. 무사히 천국 가는데 성공했습니다. 그 가운데 홍해처럼 길이 쫙 나있습니다. 우리는 그 길로 가고 있는데, 문제는 그 길을 가고 있는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보이지 않는 분을 모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가 하는 일은 하나의 반주입니다. 반주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갔잖아요. 홍해를 건너갔을 때, 그들은 건너가면서 자신들이 건너가는 것이 아님을 그들만은 알아야 했습니다. “이거는 내가 건너가는 게 건너가는 게 아니다. 이거는 뭐냐, 동행자가 건너가는데 나는 그냥 딸려서 건너가는 것이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은 지옥인데, 못 가게 만드는 겁니다. 지옥도 주의 뜻이 아니면 못 가요. 세상 돌아가는 모든 것이 원칙에 맞혀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돌아가는 그 자체가 원칙이에요. 돌아가는 그 자체가.
그래서 어떤 것이 옳다고 하지 마세요. 이미 죄인에게는 옳다고 하는 것이 있으면 안 돼요. 옳다고 여기는 것, 얼마 지나지 않아서 비겁한 변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밥 먹고 살기 위해서 핑계 댄 거예요.
우리가 진리를 가질 필요가 없어요. 진리가 우리 앞길을 열어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얼굴을 없애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판단하고, 내가 결정하고, 내가 미래에 대해서 확정짓고, 꾸미고, 신경 쓴 이 모든 것이 결국은 노림수였고, 나만 절대적인 신이 되고자 하는 악마의 본성인 것을 날마다 깨우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