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2016년 10월 30일 본문 말씀: 고린도후서 1:23-24
(1:23) 내가 내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하시게 하노니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1:24)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
창세 전부터 숨겨진 비밀을 ‘복음’으로 전하고 있는 사도에게는 보다 많은 이들이 ‘믿기’를 원했고, 또한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고백을 했습니다. 하지만 소위 믿는 자들의 집단이라는 교회에서 들리는 소식을 접하면서 사도는 심히 실망을 금하지 못하면서 또한 사도 자신의 견해를 정리하는 계기로 여깁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라도 믿음을 주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실제적으로 확인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안디옥에서 두 차례, 예루살렘에서 한 차례 출발해서 실시한 그 모든 전도 여행의 의의는 새롭게 부딪치는 상황 속에서 주님이 일을 어떤 식으로 정립해 나가시느냐를 알게 하십니다.
참으로 ‘예수 안에서 모든 것이 예’가 된다는 사실을 현실 그 자체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원래 사도 요한은 2차 전도를 끝내고 3차 전도에는 에베소→고린도→마케도냐→고린도→예루살렘으로 계획 잡았습니다.(행 19:21) 하지만 현지에 와서 실정에 맞게 에베소→메게도냐→고린도→예루살렘으로 변경시켰습니다.
하지만 이것마저 실패하고 결국 에베소→고린도→에베소→드로아→마케도냐→예루살렘으로 귀환하게 됩니다.(고후 1:16) 이 모든 일을 통해서 ‘믿음’이라는 개념이 둘로 나뉘어진 상태로 성도에게 주어지게 됩니다. 즉 참된 믿음과 거짓 믿음의 차이 말입니다. 인간들은 자기 존재의 불멸이 본성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이나 소망이나 사랑이라는 것도 모두 자기 불멸성을 토대로 해서 그 의미를 연장시키고 완성시키려고 시도하게 됩니다. 하지만 복음은 이런 시도를 거부하는데 그 이유는 복음이 바로 인간들의 보편적인 그런 의도로 인하여 피해 받은 양상이 본 내용이 됩니다. 즉 예수님의 몸에 난 못자국과 창자국이 예수님을 제대로 설명하는 유일한 증거가 됩니다.
그리고 복음에 담길 수 있는 하나밖에 없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죽을 때까지 자신의 안위와 행복과 영광을 멈추지를 못합니다. 따라서 자연적으로 자기를 위해서 신의 세계를 상상해놓고 그 상상의 세계의 권능을 이용하려고 덤벼들게 됩니다. 이게 바로 '종교‘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원하는 것을 주지 않으시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 원하신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기어이 자기 존재의 가치를 포기못합니다. 현재 자신이 갖고 있다고 여기는 것들을 모두 자기 존재의 영광을 위한 것들로 계속 움켜쥐고 삽니다.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유대인들처럼 말씀 실천에 매진하게 됩니다. 말씀을 실천하는 주체자로 자신을 굳게 상정해놓고서 말씀 지켰을 때에 주어질 보상 같은 것을 노리게 됩니다. 그런 것들이 집대성 한 것이 바로 자신의 인생 경력이 되고 ‘과거사’가 됩니다. 이 잘나 보이는 과거사를 쥐고 신에게 구원을 요청할 참입니다.
그동안 늘 조심스럽게 살았고, 자신을 수시로 살피면서 살아왔고, 절제, 또 절제를 거듭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는데 게으름이 없었다고 자부하고 싶은 겁니다. 그러나 이런 자기 행함의 관심사로 인하여 ‘예수님 몸에 난 상처’의 의의는 철저하게 모독받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에 찾으시는 것은 존재가 아니라 ‘기능’입니다.
인간 자신의 육신됨에서 자연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자기 사랑’의 증거들이 어떻게 죄가 되느냐를 보라는 겁니다. 참된 신앙과 소망과 사랑은 원래 성도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에서 비롯된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죄뿐인 세상을 관통하시면서 겪였던 모든 인간들은 면들이 말씀 성취로 이어지면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유일한 믿음, 소망, 사랑이 되십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선물’로 성도들에게 주어지게 되면, 성도의 모든 실내용은 모두 ‘선물 받은 것’이 됩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9) 이 선물로 주어진 참된 믿음은 인간 존재를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상처를 근거로 해서 죄악된 것으로 노출시키는 능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즉 인간 존재를 기능으로 분해시키게 됩니다. ‘내가 믿은 것’이 아니라 ‘주님의 복음을 위해서 믿어짐을 당하는 조치’가 취해진 것입니다. 모든 저주받을 만한 것들이 예수님의 피로 인하여 용서가 되고 긍휼의 대상으로 편입되기 위해 사전에 계획된 바가 있어 그 현상이 기능으로 나타난 겁니다. 이런 사실은 인간들이 요청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실시한 바가 되기에, 이렇게 생겨진 구원 사실에 대해서 구원받은 자가 손 댈 것도 없고 손 대었다고 해서 변경되지도 않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상처로 표현되는 십자가 사건 앞에서 인간들의 존재성은 ‘죽은 자’로 가담되기 때문입니다. ‘벌써 죽은 존재자’가 됩니다. 즉 자신에 대해서 더 이상 손 쓸 여지가 전혀 없는 입장이 됩니다. 사실 모든 인간이 그러합니다. 그동안 인간들이 종교를 가지고 자체적인 구원을 시도하고 온 것은 그들이 모두 악마의 아바타, 즉 분신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개별적 인간들이 어떤 테두리 안에 갇혀 있는가를 보여주십니다. 고린도후서 4:3-4에 보면,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형편이 이런 지경에 놓인 것은 인간들은 감히 상상도 못했습니다. 요한계시록 5:4-5에 보면,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의 내용은, 모든 인간이 마땅히 저주받아야 함에도 유일한 구원되는 방식을 하나님의 자체적인 ‘용서 프로젝트’에 의해서만 가능함에 있음을 보이는 내용입니다. 사무엘하 24장에서 다윗은 인구조사를 한 범죄를 하게 되는데, 하나님께서 그 다윗으로 하여금 아라우나 타작 마당에서 제사를 드리게 합니다.
즉 교회란 자생적으로 성립되는데 그것은 오직 ‘죄를 용서하시는 유일한 방식’, 그 이외에 대해서는 다 털어내는 식으로 복음이 기능적으로 작용한 결과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의 신앙으로 인하여 복음의 의미를 가린 것에 대해서 용서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10강 - 고후1장 23-24절(믿음)16103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1장 23-24절입니다. 구약성경 13페이지입니다.
고린도후서 1:23-24
“내가 내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 하시게 하노니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
지금 사도바울이 어떤 사정을 두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우리는 잘 모를 겁니다. 사도바울이 사도로서 하나님의 숨겨진 진리, 창세전부터 감추어진 진리를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지금 전하고 다니는데, 전하고 다니면서 사도바울이 기대하는 것이 있습니다. 뭘 기대하느냐 하면, 내가 이렇게 창세전부터 하나님께서 숨겨놓은 이 비밀, 이 진리를 복음으로 전하고 있는데 여러분이 좀 믿어줬으면 좋겠다, 이 말에 대해서 동의하고 인정해줬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지요.
그런 생각을 갖고 있으면서 사도바울이 “이것은 정말 숨겨진 진리고 이것은 아무도 모르는 겁니다. 이것은 성령의 세례를 받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겁니다.”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사람들이 처음에는 믿는다고 이야기를 했어요. 믿는다고 했는데, 자기가 믿는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과 뒤에서 들리는 소리들, 교회 내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보니까 맞지가 않아요.
믿지를 않았어요. 믿는다고 이야기를 한 본인들이 전혀 안 믿고 있었다는 것이 자꾸 들통이 나는 겁니다. 그러면 사도의 입장에서는 뭘 생각하느냐? “여러분이 이것을 알게 되면 행복해집니다.” 지금 사도는 그걸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는 이미 삼층천을 본 사람이에요. 이미 천국을 맛본 사람입니다.
사도가 원하는 것은 뭐냐 하면, “천국에 살 수 있는 삶을 미리 보이고 있습니까?” 그걸 원하는 거예요. “열심히 하게 되면 혹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걸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성령 받았으니까 “나처럼 이미 천국에, 미래의 천국에 들어간 사람으로서 세상을 다시 재해석할 수 있고, ‘세상이 이것밖에 안되는구나.’라는 것을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지고 거기에 합당한 삶을 사는 사람이 있습니까?”라고 묻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말로는 믿습니다, 라고 하는데 전혀 믿음에 합당한 모양새는 안 나오고 있으니까, 사도가 ‘내가 고린도교회에 가서 지적을 한 번 해야 되겠다.’ 이렇게 하고 싶었는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막았어요. 그래서 사도가 ‘아하, 믿음은 사도라고 해서 믿음의 주관자가 아니구나.’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성령을 보내준 당사자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사도가 복음 전한다고 해서, 너 천당 가, 혹은 너는 지옥 가, 라고 할 수 있는 권한은 사도에게는 없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해서 사도는 단 한명도 누군가를 구원할 수가 없는 거예요. 믿음의 주관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나는 믿음의 주관자가 아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여러분을 위해서 대신 십자가를 진적이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언급을 하는 것은 이처럼, 나처럼, 나의 행함을 보지 않는 사람이 혹시 계십니까, 라는 뜻이에요.
“나처럼, 이 사도바울처럼, 사도이기에 당신의 믿음을 주관해야 되겠다, 라는 것조차 사도가 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주님에게 온전히 맡길 수 있는 그런 사람이 혹시 계십니까?”를 묻는 거예요. 이 고린도교회가 자기가 기대하기는, 복음대로 살기를 은근히 기대했었어요. 기대했는데 엉망진창입니다. 중구난방이고요. 한마디로 해서 이것은 교회라고 할 수가 없어요.
거기서 사도가 느낀 것은 뭐냐? 교회는 자생적으로 자라가는 것이지 교회라고 만들어놓고 그것을 붙든다고 교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사도가 알게 된 거예요. 그리고 “이처럼 내가 어떤 누구의 믿음도 주관할 수 입장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혹 계신다면 그 사람이 바로 자생적으로,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 친히 주관하시는 살아있는 교회입니다.”라고 말하고자 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이렇게 전도했다 하잖아요. 보통 세 번 전도여행을 했다고 합니다. 예루살렘, 또는 안디옥에 자기 동네인데 거기서 세 번씩이나 요새의 터키와 그리스 쪽으로 왔다 갔다, 왔다 갔다 했다는 말이지요. 안디옥에서 두 번 출발했고 예루살렘에서 한 번 출발해서 세 번 다녀가고 마지막에는 예루살렘에서 또 출발하는데 그것은 자기가 가고자 해서 간 것이 아니에요. 체포되어서 네 번째 로마에 간 겁니다.
그렇게 왔다 갔다 하면서 사도바울이 느낀 점이 뭐냐 하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24절의 말씀처럼, 우리가 너희의 믿음을 주관하는 자가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을 우리가 주관할 수 없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여러분의 믿음을 여러분 스스로, 여러분 속에 들어온 믿음을, 성령을 여러분이 컨트롤 할 수가 없습니다. 혹시 그런 믿음이 있거든 여러분은 땡 잡은 겁니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거예요.
이것을 좀 어렵게 하면, 존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기능으로 생각하자는 겁니다. 어떤 분이 와가지고 “목사님, 저 구원받았어요?”라고 할 때 그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거예요. 앞에 “나 구원 받았어요?”라고 질문했잖아요. 그 ‘나’가 뭐냐 하면, “나라는 존재는 나중에 죽어서 천국 가겠습니까, 지옥 가겠습니까?” 그게 궁금하다는 겁니다.
시작을 나의 존재부터 시작한 거예요. 질문은 존재로 하지만 하나님의 답변은 기능으로 합니다.
“보자, 보자, 네 인생 펼쳐놓고,
하나님은 이 세상을 저주해야 되고
그 가운데서 오직 사랑받은 자만, 긍휼 입은 자만 건지신다는 기능이,
자, 보자, 매일 같이 당신의 삶 속에서 나오는가를 보자.”
하고 기능을 본다는 말이지요.
우리는 그냥 껍데기, 보자기에 불과해요. 이 보자기 안에 들어 있는 각종 모든 우리의 것들은 보자기를 위함이 아니고 그 안에 자체적으로 들어 있는 기능이 발달해서, 믿음이라는 것은 그 보자기가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리고 다른 보자기, 사도라 할지라도 네 믿음을 주관할 수 없다는 겁니다. 물론 목사는 물론이고요. 선교사도 물론이고요.
그 기능은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시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아요.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하나님이 원해서 지금 주어진 거예요. 제가 이걸 어떤 강의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요한 1서와 이 성경 모든 것은 우리가 요청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요청에 의해서 주어졌기 때문에, 구원받았다는 말은 그 구원에 대해서 네가 그 구원을 취소시키려고 아무리 용을 써도 취소가 되지 않는 요소가 이미 보자기 안에 들어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만약에 안 믿게 되면, 보자기가 내 내용물을 구원에 합당한 내용물로 바꿔서 “주여, 이렇게 살았으니 구원해주세요.”라고 결재 맡듯이 들이대는데 그게 바로 기능은 모르고 여전히 존재에 묶여 있는 형국인 거예요. 그러한 양상이라는 말이지요. 제가 여기서 중요한 팁을 드리겠습니다. 만약에 누군가가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해서 여러분의 행복과 번영과 여러분의 구원을 보장한다면 백프로 사기꾼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이렇게 하면 됩니다, 라고 한다는 그 자체가 그 시작을 존재로부터 시작해요. 교회에서 목사들이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은, 오는 고객들이 주님은 생각안하고 내 존재가 죽어서 어느 보험을 들으면 천당 갈 수 있는지, 그런 자기 장래를 챙기기 위해서 왔기 때문에 거기에 부응한다고 “여러분의 존재는 제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이런 존재로 달라질 수 있습니다.”라는 거기에 반응을 보이고 대답한다는 자체가, 오는 고객이나 그 주인장 되는 목사나 둘 다 사기꾼들이에요.
그런 식으로 구원한 적이 없습니다. 그것이 여러분 소원인 것은 인정하겠는데 주님은 절대로 우리의 소원을 성도 안에 담아준 적이 없어요. 우리의 소원대로 해서 주어진 적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놓고 자기 존재로부터 주님을 사랑하고 믿어요? 개가 웃을 일이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 참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는 말입니까? 개는 너무 했고 소가 웃을 일이지요.
종교가 문제입니다. 최태민이가 문제고 영생교가 문제고 종교가 문제에요. 그런 사람이 있어요. 종교는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 되기에 문제가 되는 거예요. 종교 안에 들어가면 거기에 삼위일체 들어 있고, 하나님 들어 있고, 예수 들어 있고, 성령 들어 있고, 복음 들어 있고, 언약이 들어 있고, 십자가도 다 들어 있어요. 그 종교를 왜 믿습니까? 누구 좋으라고? 어떤 존재가 좋아지라고?
결국 그 존재를 믿는다는 말은, 그것은 내가 잘되기 위해서 이용해 먹는 거라는 말이지요. 고린도교회가 엉망진창이라고 했지요. 고린도교회에 성령이 임했기 때문에 고린도교회가 엉망진창이 되는 겁니다. 진짜 믿음은 성령의 선물로 들어와요. 성령의 은사라는 말은, 선물이라는 뜻인데 그 성령의 선물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믿음과 소망 사랑이 들어 있는데 그것은 우리 것이 아닙니다.
우리존재는 아니에요. 우리 존재는 가치도 없어요. 우리 존재는 저주받은 존재인데 무슨 가치가 있겠어요. 그 믿음 소망 사랑은 어디서 나온 것이냐 하면, 예수님님께서 이 땅에 있으면서 생산된 거예요. 예수님 자신이 이 땅을 살면서 아버지와의 말씀관계에서 형성된 그 믿음 소망 사랑, 그것이 예수님의 것인데 그 예수님의 것을 예수님의 것으로만 두지 않고, 성령께서, 성령은 예수님의 영인데 성령께서 그것을 우리에게 택배로 보낸 겁니다.
팔공로 91길, 신동아……, 이렇게 택배로 보낸 거예요. 은사라는 것은 선물이라는 뜻이에요. 성령의 선물이라는 말은 네가 요청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존재로 생각하게 되면요, 우리는 자꾸 뭘 상상하느냐 하면, 천국을 상상해요. 지옥도 지어낼 줄 알고요. 천국도 지옥도 지어내고 무엇까지 지어내는 줄 알아요? 거기 들어가는 방식까지 지어냅니다.
자기가 지어내놓고 자기가 요청해놓고 자기가 믿어요? 시험문제를 자기가 출제해놓고 자기가 푼다?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천국은 예수님만 알고 있었던 거예요. 왜냐하면 숨어 있던 하나님은 예수님의 아버지고 예수님과 아버지, 아버지와 아들 관계는 숨어 있는 비밀입니다. 이 땅에 복음은 비밀이에요. 비밀이 누설되어도 그게 비밀이에요. 희한하지요. 누설되어도 비밀이라니까요?
그래서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그렇다고 사도행전 28장에서 사도바울이 그렇게 이야기한 겁니다. 주님께서 주님이 갖고 있던 믿음 소망 사랑을 양산해서 그것을 선물로 우리에게 줘버리면 여기서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두 종류의 믿음과 두 종류의 소망과 두 종류의 사랑이 생겨버려요. 나쁜 믿음과 진짜 믿음, 나쁜 소망과 진짜 소망, 나쁜 사랑과 진짜 사랑, 이것은 평생 우리 육신이 있는 한 계속 가는 겁니다.
계속 가면서 두 개의 이질적이고 상반되는 것이 늘 평생의 일상을 통해서 부딪치게, 탁탁 충돌하게 되어 있어요. 늘 부딪치고 마주치게 되어 있어요. 그 마주치면서 나온 것이 뭐냐?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갖고 있던 상처, 예수님이 인간에게 살해당한 예수님의 상처와 이유의 원인을 보게 하는 겁니다.
만약에 성령에 의해서 그런 진짜 믿음, 소망, 사랑을 선물로 안 받게 되면 뭐만 남는가 하면, 예수님에게 있던 못자국과 창자국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고 관심도 없고요, 어릴 때 유아세례 받아놓고 평생토록 교회에서 열심, 열심히 “믿습니다!” 하면서 믿었던 그것만 잔뜩 기억하고 그것에 관심 두게 되는 겁니다.
30년 교회 다니고 40년 교회 다녔다. 이것, 이것만 잔뜩 마음에 남아요. 그리고 그것을 갖고 어디 가느냐 하면, 교회에 방문들 합니다. 어느 교회가, 내가 이렇게 수십 년 신앙생활 한 것을 인정해 줄 교회인가, 그런 교회가 혹시 있으면 그것 들이대면서 “나는 이 정도 경력이 됩니다. 난 신참이 아닙니다.”라고 행세깨나 합니다.
다른데 있다가 내가 전입 왔다고 해서 날 무시하지 말라고, 난 이 정도까지 다 안다고. 짊어지고 온 그 보따리 속에 든 자기 경력들을 우르르 쏟아내게 되면 편의점 주인 입장에서는 좋다고, 고맙다고, 훌륭하신 성도님이 오셨다고 박수로 환영하지요. 우리도 박수 쳤습니다만, 그런 식으로 온 교인들은 그 교인에게 신경을 쓰지요. 신앙 잘 합니다, 하고 칭찬들 해주지만 관심은 신앙 잘하는 그것이 관심도 없어요.
‘저 사람 한 달 수입 얼마나 되나? 십일조를 얼마나 낼까? 연금은 좀 되나?’ 그것에만 관심이 있어요. 그게 교회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내용의 모든 것을 털어내 버리느냐는 말이지요. 충돌시키는 거예요. 진짜 믿는 것, 나의 과거사를 믿느냐, 아니면 내 살아온 경력가운데서 전혀 예상치도 못한, 그것을 완전히 찢어버리고 뭉개버리는 어떤 새로운 힘을 믿느냐는 말이지요.
나의 찬란한 과거사, 멋있어 보이는, 성실하게 또 성실하게, 조심스럽게 또 조심스럽게, 이게 성령의 인도함인가, 저게 하나님의 형상 본받음인가, 이게 성화하고 거룩한 삶인가, 하고 조심스럽게 살아온 모든 과거사를 전부 다 찢어버리는 그 능력, 그것은 뭐냐 하면, 그것은 바로 경계선 안에 갇혀 있음을 고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나오는데 사도바울이 전했던 모든 복음에서 사도바울은 경계선, 그 윤곽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사도바울이 말하는 투를 보세요. 내가 전하는 복음은 누설되었다고 해서 그것으로 아는 것이 아니고 계속 가리움이 유효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그 말이에요.
너희에게 납득시키려고, 설득시키려고 복음 전한 것이 아니라는 그 말입니다. 가리움이 반드시 동반된다는 거예요.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다시 말해서 내가 너희에게 택배로 보내준 그 예수님이 가졌던 믿음, 동일한 성질의 믿음은 이 땅에서 망하는 자가 누구냐를 드러내고, 폭로시키고, 윤곽을 드러내게 하는 용도로 쓴다는 겁니다.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여기서 경계선을 치는 겁니다. 이 세상 테두리 그 경계선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은 뭐다? 이 세상 신, 악마가 지배하고 통치하고 있는 상황에 있다는 겁니다. 악마가 통치하고 있는 세계, 그래서 경계선을 이루게 된 그 상황, 그리고 그 경계선은 얼마나 단단한지 어느 인간들의 종교적인 발작과 노력과 그 모든 시도에도 불구하고 단 한명도 탈출이 불가능한 상태에 있었던 겁니다.
뭘 믿는가? 정말 네가 성령 받은 믿는 자라면 “나의 모든 노력이 실패로 끝났습니다.”를 바라볼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를 보는데 그 탈출구가 있다는 증거가 뭐냐? 주님의 창 자국이고 못 자국이에요. ‘모든 인간들이 예수님을 살해했구나.’ 배후에 누가 있는가? 배후에 악마가 있었던 겁니다. 인간은 악마의 아바타에요. 아바타, 분신, 특정 개인이 시키는대로 움직이는 분신이에요.
이걸 어느 강의에서 분신이나 아바타라 하지 않고 ‘현상’이라고 했어요. 인간은 존재가 아니고 어떤 현상을 보여주는 기능들의 덩어리에요. 매일 같이 새로운 기능들을 보여주는 겁니다. 아까 한 이야기 다시 해보겠습니다. “목사님, 저 구원받겠습니까, 아닙니까?” 하고 묻는 자체가 존재로 질문할 수밖에 없는 인간, 하지만 주님의 답변은 기능으로 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하루하루 살면서 악마의 분신으로, 아바타로, 악마가 사주한대로 움직이는, 곧 세상 영광과 세상성공자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생각하고 움직인 모든 것들이 갇혀 있는 저주거리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아시고 그것에 대해서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이미 해결이 난 거예요. 하나님께서 복음을 줬다는 것은, 복음이 우리 속에 들어왔다는 것을 우리가 인식한다는 것은 이미 우리가 우리 자신의 구원과 천국과 영생은 우리 자신도 손댈 형편이 못되고 손댈 입장도 못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요청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면 간단히 방정식을 세울 수가 있지요. 우리가 요청하는 구원은 지옥이고 요청하지 않았는데 주님의 요청에 의해서 통째로 우리로 하여금 주님 자신의 영생과 천국과 구원을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가 사용당한다면 그것은 우리도 변경시키지 못할 구원받은 자가 되는 겁니다. 구원받은 자라 하는 것은 이렇게 항상 결과적으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지요.
그러면 그 차이를 어떻게 아는가? 가짜 믿음과 진짜 믿음이 있는 사람은 매일 같이 티격태격 하는데 진짜 믿음이 없고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자기의 과거사를 더욱더 빛내고, 다듬고 샌드페이퍼로 밀고, 왁스로 발라서 광내고 반짝반짝 윤기 나게 만드는 거예요.
군에서 병사들이 휴가가기 전에 자기 신발을 광내듯이. 사람들이 신발만 보는 줄 알고 있어요. 제대할 때는 만들어놓은 모형 배 같은 것 들고 나와서 넘어져서 다 깨먹고. 또 앨범에 온갖 사진 붙이고 그림 그려서 나오기도 하고. 그것을 세자로 과거사. 자기 과거사를 붙드는 것에 대해서 긍정하고 인정해 달라는 그런 단체들, 종교, 그게 바로 종교입니다.
이 종교가 문제에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에 대해서 여러분이 동의를 하면서도 이런 생각이 들 거예요. ‘사람 사는 재미 그것 밖에 없는데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사람 사는 재미, 우리가 할 수 있는 역량이 그것뿐인데 어떡하라는 말입니까?’ 제 답변은 간단해요. 어떡하기는 뭘요? 그대로 살면 되지요.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이 여러분 보고 고치라는 말이 아니고 새로운 것이 여러분 속에서 그것의 진위, 그것의 본질을 들춰주고 있느냐를 묻는 거예요.
고치라는 말이 아닙니다. 죽을 때까지 인간은 자기밖에 몰라요. 자기밖에 모른다는 것은 그 관계가 끊어진 상태의 성질입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기밖에 모르는 거예요. 그것을 성경에서는 죽은 자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미 죽은 자라 하는 것은 선악과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생명나무 관계가 이어지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이미 죽은 자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죽은 자를 새삼스레 닦달 내겠다는 것이 아니고 죽은 자들은 죽어 있기 때문에 뭔가 모르는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악마에 매여서 악마의 분신, 악마의 아바타가 되어서 살아가면서 그 배후의 조종자를 모르고 있는 거예요. 그저 각자 도 닦는 것, 종교생활, 이렇게 열심히 하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착하게 살면 봐주겠지,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 여기에 성령이 와버리면 주님께서는 우리보고 “그래. 너는 너대로 살아. 그것은 어쩔 수 없어. 하지만 네 배후에는 이런 것이 있다.”라고 알려주는 순간 이미 우리는 홀로가 아니고 혼자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구원받을 때 우리는 혼자 힘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그렇게 이야기했잖아요. 대신 죽으심, 대신 죽으심.
대신으로, 대체로, 대리로. 대리라는 말이 왜 필요할까요? 그 대신 죽으심이 복음인데. 그 대리라는 것이 왜 들어간 겁니까? 주님 보시기에 우리가 같잖거든요. 우리가 행동하는 것이 웃기지도 않아요. 어설프기 짝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진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이런 기도를 하게 됩니다. “주님이여! 제가, 나라는 존재가 예수 믿지 않게 하시고 예수를 소망하지 않게 하시고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게 하옵소서.”
출발이 나부터 출발하기에 그것은 다 무용지물이고 다 마귀 짓이라는 것을 본인들이 알기에 내가 믿게 하옵소서, 내가 소망케 하시고 내가 사랑하게 하옵소서, 이렇게 하지 않지요.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이여! 주님의 사랑을 드러내게 하옵소서.” 그것도 기능으로. “주님의 소망을 드러내게 하옵소서. 주님의 사랑이 펼쳐지게 하옵소서.”
그런데 주님의 믿음 소망 사랑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고 프리즘이 있어요. 햇빛이 프리즘에 들어가서 일곱 색깔로 바뀌잖아요. 그 프리즘역할이 뭐냐? 예수님의 상처받은 그 못자국과 창자국, 그게 프리즘의 중심체가 돼요. 거기서 새롭게 주님의 사랑이 출발하기 때문에 나 잘났다, 주님을 위해서 이렇게 열심히 봉사했다, 전도했다, 강의했다, 하다가 성령께서 십자가프리즘으로 데려가 버리면 그 때부터 나의 존재는 죽은 존재로서 거기서 입을 다물게 만듭니다. 욥처럼.
그 때부터 다시 뒤돌아 보게 됩니다. 뒤돌아보게 되면 나의 멋져 보이던 그 찬란한 과거사가 주님의 용서하심과 긍휼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께서 그렇게 이끌어주신 죄의 역사였어요. 마귀도 사실 주님한테 농락당하고 있는 거예요. 악마도 주님한테 쓰임을 받고 있는 거예요. 죄가 없는 곳에는 기쁨도 없고, 죄가 없는 곳에는 구원도 없기 때문에, 죄가 없는 곳에는 십자가의 다 이룸도 없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과거사가 주님한테 편입된 겁니다. 이미 편입된 거예요.
어떤 농부가 땅이 있으니까 노는 땅이다 싶어서 자기 맘대로 거기에 농사를 지었는데 나중에 시에서 나와서 “나라 땅에다 왜 농사를 짓습니까?” “난 내 땅인 줄 알았습니다.” 벌써 편입되어 있는 거예요. “당신은 몰랐지만 이 땅은 이미 나라 땅으로 편입되어 있는 겁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신 인생인줄 모르고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40년, 50년, 60년, 70년, 87년까지 계속 내 과거사만, 내가 잘났다는 그 자랑질하는 그것만 일삼고 있어요.
거기에 모심고, 대추나무 키우고, 지구가 멸망할지라도 사과나무 한그루 심으리라, 스피노자가 말한 식으로 사과나무 심고, 새마을 운동하고, 대선에 나가고, 계속 심었는데 돌아보니 그게 마귀가 시키는 대로 죄가 무엇인지 드러내기 위해서 부단히 땀 흘리면서 고생고생 하면서 심어놓은 거예요. 그거 심어놓았다고 구원받는 것 아닙니다. 그것은 누구나 다 과거사 심는 것이고 구원되고 안 되고는 거기에 새로운 낯선 믿음과 낯선 소망과 낯선 사랑이 예수님의 상처로부터 재 이해되고 재해석되어야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나는 주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 토대, 그것이 반복되는 위에서만 참된 믿음, 선물로 주어진 믿음이에요. 여러분이 다 아시는 에베소서 2장 8절, 9절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라고 하는 이유가 그것 때문에 그런 거예요.
요한계시록 5장에 보면 사도요한이 웁니다. 우는 이유가 나라꼴 때문이 아니에요. 대한민국이라는 것은 우리과거사의 일부입니다. 그것도 하나의 과거사에요. 이민 간 사람은 걱정도 안 해요. 자기는 이미 시민권을 얻어버렸는데요. 모든 것이 자기중심이잖아요. 그런데 거기 보니 사도요한이 울어요. 우는 이유가 뭐냐? 이 세상을 통째로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는 어떤 비밀은 있는데 그게 봉인되어 있어요. 일곱 도장으로 봉인되어 있으니까 이 세상 어느 피조물도 그것을 뜯어낼 자격이 있는 자가 아무도 없었던 거예요.
비밀은 옆에 있지요. 내용은 알 수가 없어서 사도요한이 엉엉 웁니다. 금요철야기도회에서 우는 것 보면 좀 의심돼요. 사도요한처럼 우주의 비밀을 몰라서 우는지, 애가 공부를 못해서 우는지 의심돼요. 키 작다고 우는지 구조조정 당했다고 우는지 몸이 아파서 우는지 의심돼요. 사도요한이 우는 것은 어느 누가 와도, 부처가 와도 안 되고, 소크라테스가 와도 안 되고, 공자건 누구건 어느 인간이 다 덤벼들어도 이 세상의 비밀을, 악마가 꽉 가두어놓은 이 세상에서 풀 수가 없어요.
그런데 천사가 옆에서 어깨를 칩니다. 토닥토닥 칩니다. “울지 말라. 요한아. 다윗의 후손이,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 반드시 죽음이 있어야 돼요, 죽었다 살아나신 분이 이것을 풀 것이다. 울지 말라. 이제는 기뻐하라.” 하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가 그걸 풉니다. 그렇게 풀 수 있는 예수님의 자격. 사도요한은 지금, 내가 귀양살이 한다, 온 몸이 아프다, 그것은 관심도 없어요. 죄 지은 인간이 저주받는 것이 마땅하지 거기에 대해서 왜 티를 냅니까? 백날 해 봐야 진작 저주받아도 마땅하지요.
신기한 것이, 이 세상이 지옥 같은데 아직도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 신기해요. 심판을 안 받고. 경주에 지진의 진도가 5.9가 나왔다는 것이 이상해요. 9.7쯤 돼야 돼요. 그래서 아예 대한민국이 날아가 버려야 돼요. 그래도 괜찮아요. 그래도 우리는 할 말이 없어요. 아직 일본이 유지된다는 그것이 참 신기하고요. ‘주님의 은혜가 참 대단하구나.’ 그걸 아셔야 돼요.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믿음의 내용이 뭐냐? 딱 하나밖에 없어요. 딱 하나밖에 없는 그것을 구약적으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사무엘하 24장의 그 내용이 나옵니다. 거기 보면 다윗이 인구조사를 해요. 인구조사를 하는데 요새말로 번역하겠습니다. 목사가 교인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세는 거예요.
물론 목사가 직접 세는 것은 아니고 뒤에 서 있는 전도사가 세지요. 요령 없는 전도사는 곧이곧대로 센다고요. 전도사는 계약직이라서 일 년 되면 나가야 됩니다. 눈치 좀 있는 전도사는 한 300명 왔으면 눈치껏 열 명 쯤 보탭니다. 그 정도는 해야 그게 전도사로 살 수가 있어요. 주께서 보고 계신다는 식으로 그대로 세면 이것은 안 됩니다.
숫자를 셌는데 그것이 문제가 되었어요. 요압이 하는 말이, “이 교회 주님 것인데 당신이 왜 숫자를 셉니까? 이 교회에 왔다 갔다 하는 것은 다 주님이 그렇게 하신 거지요. 목사 당신이 설교하고 심방해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 왜 이래요?” 제가 누구한테 메시지를 보낸 기억이 나는데 이렇게 했어요. “저를 보고 칭찬을 하시니 제가복음을 가린 것 같아 너무 죄송합니다.”라는 메시지를 보낸 적이 있어요.
왜 주의 길인데 제가 등장해야 되지요? 다윗이 인구조사를 했다는 말이지요. 그 의도가 뭐겠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하청을 줬다는 겁니다. 주님은 누구한테 자기 일을 하청 준 적이 없어요. 동업자라는 거예요. 누구한테 동업자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다윗은 정신 바짝 차리고 회개합니다.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소용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세 가지 재앙을 제시합니다. 첫 번째는 7년 동안 기근이 일어나는 것인가? 두 번째는 석 달 동안 네가 왕위에서 쫓겨날 것인가? 세 번째는 3일 동안 전염병이 퍼지는 것, 이 셋 중에서 골라라. 7년보다는 역시 석 달이 짧고 석 달보다는 3일, 3일만 버티면 되잖아요. 3일을 선택했어요. 3일 동안 7만 명이 죽었습니다. 그 아까운 숫자 7만이 날라 갔어요.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돼요. 믿음이란 뭐냐? 다 죽일 수도 있는데 7만 명만 죽이는 것은 그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딱 하나의 통로, 딱 하나의 길을 위해서, 하나의 사건을 위해서 자리 잡은 겁니다. 아라우나 타작마당에서 남아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죄를 씻어주는 제사를 드릴 때 오직 그 하나, 그 한 가지 내용, 한 가지 내용의 프리즘으로 모든 것이 집중되어야 돼요.
그 집중되는 것을 늘 유지시키는 것, 오늘 설교에서 제일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그 내용을 늘 유지시키는 것이 선물로 준 하나님의 믿음의 유일한 내용이에요. 그걸 제가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받은 그 창 자국, 못 자국. 내 몸이 아픈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몸이 아픈 것은 믿음의 내용이 아니에요. 그런 것 기도해도 응답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는 것은 뭐냐? 예수님에게 난 상처만 되풀이하고 반복하는 그 복음으로만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그 일과 관련된 사람만 성도가 될 수 있지요. 그러면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왔던 그 과거사는 뭐냐? 아까 교독문 할 때 그 내용이 잠시 나왔어요. 이사야 65장 17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다시 읽습니다. 정말 중요하기에 다시 읽는 거예요.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했습니다. 제가 건방지게 보탭니다. 여러분은 중구난방 엉망진창 인생을 마음껏 보내시기 바랍니다. 인생을 엉망진창으로 마음껏 지내시기 바랍니다. 어차피 생각나지 않을 것이고 어차피 기억나지 않을 겁니다.
이 땅에서 얼마나 고생했고 얼마나 인생이 꽈배기처럼 꼬였는지 이왕 기억나지 않을 것, 이왕 생각나지 않을 것, 이 땅에서 실컷 엉망진창으로 살아도 우리 손해날 것 아무것도 없습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결혼 일곱 번 했다는데 정말 엉망진창이지요. 일곱 번이나 결혼했으니까. 사마리아여인이 결혼 다섯 번 했고 지금 사귀는 남자는 여섯 번째인데 엉망진창이지요.
우리 보기에는 저 행실 나쁜 여자라고 손가락질을 하겠는데 그 손가락질 하다가는 천사가 손가락 부러뜨립니다. 어차피 새 하늘과 새 땅에 가게 되면 모든 것이 새롭게 달라지기 때문에, “내가 언제? 뭐!” 오늘 설교 제목은 “뭐!”입니다. “어쩌라고? 무슨 일 있었어?” 기억나지 않습니다.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동안 우당탕탕, 엉망진창 인생은 뭐냐? 주님한테 우리가 농락당했어요.
주님의 자신의 상처, 십자가 주되심, 십자가 안에 숨겨진, 창세전부터 있던 그 비밀, 창세전부터 예정된 그 비밀을 드러내기 위해서 세상에 선악과 심어놓고, 인간으로 그것을 따먹게 만들어놓고, 마귀한테 아바타노릇하게 만들고, 죄 짓게 만들고, 엉망진창 모든 것은 주님에게는 손해 볼 일이 하나도 없고 그게 다 필요했기 때문에 다 일어나야 되고 발생되어야 할 ‘부글부글’입니다. 라면 끓일 때 부글부글 끓지요. ‘부글부글’이에요.
지난 시간에 이것을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 19절에 보면,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이제야 이 내용이 풀립니다. 봉인이 해제되어 개봉됩니다. 세상에 일어났던, 요한계시록에 있는 모든 짐승들의 활동, 지진과 화산과 폭풍과 기근, 이 모든 것이 정말 우당탕탕 이지요. 울퉁불퉁 이고 엉망진창이고 중구난방입니다.
세상에서는 어떤 평온도 기대하지 마세요. 제가 지난 광주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강의할 때 고함을 잘 안 지르는데 그 때는 화가 나서 고함을 질렀어요. 뭐? 평등? 인간에게 무슨 평등이 있느냐고요. 평등을 추구하는 그 자체가 관념이고 그것이 마귀적이에요. 민주주의가 마귀적이에요. 이 세상은 평등이 없습니다.
회사에서 평등하게 뽑아놓았는데 일 못하면 쫓아내야 돼요. 일도 못하는 거 월급 왜 줍니까? 일 잘하는 사람 놔두고 일 못하는 사람 내 쫓는 그것이 당연한 것이지 무슨 이 세상에 평등이 있어요. 평등한 세상은 없습니다. 마귀들이 민주주의라는 것을 끄집어낸 거예요. 그러면 못살면? 못살면 죽으면 되는 거예요. 그것도 굶어죽으면 되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살아온 것이 사실은 불평등한 거예요. 지금까지 죄를 지었는데 아직도 우리를 살려주잖아요. 뒤돌아보세요. 죄는 죄대로 지었는데 햇빛과 공기를 주지요. 돈은 어떻게 벌었는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하루 세끼, 아침 안 먹고 온 사람은 교회 와서 점심 먹으면 되고, 이렇게 밥도 먹여주고, 우리가 하는 행세에 비해서 너무 과분한 은혜를, 그것도 무상으로 제공해 왔습니다.
모든 인간은 주님 앞에 한 톨의 쌀도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죄라는 점에서 평등할 뿐이지 자기 존재로서의 평등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어야 됩니다. 욥이 하나님 만나고서 주 앞에서 결국 입을 다물고 재를 뒤집어쓰듯이 시커먼 죄 안에서, 무덤 안에서는 모든 인간이 평등할지언정 자기 존재를 주장하는 평등은 입을 열지 말아야 돼요.
그런 것은 하나님의 복음을 버렸기 때문에 나오는 사고방식입니다. 살 놈은 살고 죽을 놈은 일찍 죽으면 돼요. 어차피 생각나지 않을 것이고 어차피 기억나지 않을 겁니다. 몇 년 살았는가, 몇 십 년 살았는가, 내 남편이 누구며, 내 아내가 누구며, 기억나지 않을 겁니다. 이 이야기하는데 갑자기 기분이 좋아요. 그놈의 인연, 이 세상으로 그만 끝냅시다.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끝내요.
이미 성령에 의해서 새 하늘과 새 땅에 필요한 요소가 왔으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고백해야 됩니다. “주님, 예수 믿지 않게 하옵소서. 내가, 내가 예수 믿지 않게 하시고, 내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게 하옵소서.”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상처, 그것으로 인하여 용서받았는데, 용서 받지 못할 자가 그 흘린 피로 용서받았는데 마귀의 분신이 되어서 이것저것 챙기고자 하는 스트레스 받는 우리의 모습, 그것이 가짜 믿음인 것을, 종교놀이인 것을 이제는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