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를 위하지 않는 삶
2020년 4월 5일 본문 말씀: 빌립보서 1:21-24
(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1:22)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1:23)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1:24)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사도가 된 것은 사도 바울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 이상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유익함’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제대로 아는 자인 사도 바울은, 평소에 자신의 삶의 태도에 대해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자아란 현실 구성의 주체로 작용하게 마련입니다.
즉 내가 원하는 세계관을 본인이 원하는 식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그 만들어진 현실 속에 익명적으로 들어앉아서 세상 돌아가는 추이를 나름대로 주시합니다. 이게 바로 ‘자기를 위한 삶의 태도’입니다. 작게는 가정으로부터 시작해서 크게는 국가관에 이르기까지 모두 ‘나를 위함’이라는 성격이 함유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아는 사도에게는 이런 것이 용납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안에 사는 자가 자기가 아니라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빌 1:21) 과연 사도 바울이 이러한 고백인 단순한 사적인 개성에 불과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행 19:15)
사도 바울의 고백과 입장은 모든 성령 받은 사람들의 대표적 고백과 삶의 모습입니다. 공통점은 ‘나를 위하여 살지 않는다’입니다. 흔히 말로만 ‘주님을 위한 산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를 위해 살지 않는다’는 겁니다. 달리 이야기해서, ‘나에게 소망이 있는 데 그것은 내가 내 육신을 버리는 것이다’입니다.
사도 죽고 싶은 것은 사도 본인에게 유익이 되어서가 아니라 우리 주님에게 유익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즐거운 겁니다. 하지만 사도의 이러한 소망을 붙들어 늘어지는 경우도 사도는 같이 생각합니다. 사도는 아직 죽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사도가 전할 복음을 들어야 할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사도처럼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다’를 위해서 사도는 아직 봉사할 것이 남아 있다는 겁니다. 과연 지금 죽느냐 아니면 아직 더 살아야 하느냐에 대해서는 본인이 선택하지 않고 주님에게 맡기겠다고 합니다. 바로 이런 모습이 진정 십자가를 아는 자의 모습입니다. 십자가 사건을 두고 깊이 연구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십자가를 아는 사람이 아닙니다.
일상의 삶을 통해서 항상 반영되어 나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사도가 밝힌 바에 의하면, 십자가 앞에서 모든 인간은 범죄한 게 맞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범죄한 인간들이 생각한 신은 당연히 거짓된 가짜 신, 혹은 우상인 것도 맞는 말입니다. 만약에 인간이 범죄한 존재가 아니라고 여긴다면 여기서 필히 윤리성에 입각한 신이 나오게 됩니다.
선악과 인식에 준해서 투영된 신이 곧 ‘윤리적 신’입니다. 이 윤리적 신이 참된 신이라면 인간은 자신의 윤리성으로 가지고 신과 교류가 가능해져 버립니다. 즉 신과 인간이 동일한 개념을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로서 인간의 구원이란 일방적인 하나님의 공로가 아니라 인간이 윤리적 노력을 하면서 부족한 분을 신이 마저 채우면 구원이 된다는 논리가 성립합니다.
즉 그 어떤 경우라도 인간은 죽어 있으면 아니되고 무능한 자가 되면 아니된다는 겁니다. 약간이라도 유능해 있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합니다. 하지만 로마서 4장에서 제대로 십자가 복음을 아는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4-8)
왜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투영해서 만들어낸 ‘윤리적 신’을 피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인간들이 이미 무쇠난로같이 딴딴한 자체적인 자아성을 내부적으로 응축해 있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힘을 비축해두었다가 ‘자기를 위함’ 혹은 ‘자기 유익’에 부합되지 않는다면 단호하고 상대를 공격할 태세가 되어 있는 태도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이것이 ‘자아가 구성의 주체로서 한 세계관’입니다.
반대로 눈사람같은 경우를 생각해보세요. 겨울에는 빵빵하게 예쁜 동그란 실체를 갖고 나뭇가지로 만든 손이나 팔이 꽂아있는 ‘겨울왕국’이라는 만화영화 속의 눈사람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되면, 예쁜 실체는 간데없고 예쁜 빨간 나뭇가지를 놓을 자리도 없게 마련입니다. 눈사람은 그저 흙탕물이었던 겁니다.
딱딱한 무쇠난로 대 소멸되는 눈사람, 과연 십자가 앞에서 어느 비유가 우리 인생에 부합될까요?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간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바 되어 마르나이다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시 90:5-7)
무쇠난로처럼 내부적으로 강력한 반발심으로 무장되어 있는 사람은 아무리 오랫동안 교회 다녀도 종교 낙서만 남기로 사라질 존재입니다. 그런 사람이 구약에 나옵니다. 사무엘하 14장에 보면 요압이라는 인물과 압살롬이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둘 다 다윗 시대의 이스라엘에서 실력자들이었습니다.
요압이라는 사람은 압살롬을 차기 왕으로 밀어주는 장군입니다. 그 당시에 이스라엘에서 다윗 다음으로 제2인자입니다. 요압의 의견은 상식적으로 합당합니다. 왜냐하면 왕자들 중에서 백성들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정의롭기까지 합니다. 얼굴은 호감형입니다.
백성들이 원하는 왕이 다윗 이후에 이스라엘 왕이 되어야 나라가 안정을 찾고 외세에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요압입니다. 우리가 이 요압이나 압살롬의 이 상식적인 견해에 동의한다면 이것이 바로 ‘나를 위하여’에 해당되는 생각입니다. 십자가만 내내 생각한다고 해서 ‘나를 위하여’라는 의식에서 벗어났다고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요압과 압살롬에 제시하는 바는, 모든 인간은 각자의 자질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공평하게 제공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결코 무능한 자들이 아니기 때문이랍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생각은 다릅니다. 이스라엘의 왕의 자리는 ‘무조건 하나님의 선택의 자리’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지만 ‘일하지 않는 자라 할지라도 의롭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공로가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라면 결코 ‘자기를 위한’ 세계관을 주장하지 않을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함’이라는 핑계로 ‘나를 위하여’ 살지 않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7강-빌 1장 21-24절(나를 위하지 않는 삶)20040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빌립보서 1장 21-24절입니다. 신약성경 317페이지입니다.
빌립보서 1:21-24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러나 내가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찐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오늘 이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자기의 형편에 대해서, 자기심정에 대해서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사도바울은 성령을 받은 사람이지요.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예수님이 이미 확인해주었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귀신들도 하는 말이,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고 했습니다. 귀신이 예수님만 아는 것이 아니고 그 옆의 종인 바울도 귀신의 세계에서 유명인사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사도바울의 고백이 단순히 사적인 고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빌립보서라는 하나님의 계시에 포함이 되어 있어요.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정말 신앙이 있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 수밖에 없는가, 그 마음가짐을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사도바울은 신이 났어요.
어떤 점에서 신이 났느냐? 이미 나는 무엇이 즐거우냐 하면, 죽는다는 사실이 그렇게 즐겁다는 거예요. 이거 미친 사람 아니에요? 죽는다는 것이 그렇게 좋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죽는 것이 나한테 유익이라서 좋은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에 자기가 즐겁다는 겁니다. 나한테 유익되는 것이 아니고, 나 말고 예수님에게 유익된다는 것이 나는 그렇게 기쁘다는 겁니다.
그걸 통해서, 사도바울은 자기를 위해서 살지를 않아요. 주님을 위해서 살고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산다. 그 한 가지 말만 해버리면 누구나 흉내 낼 수가 있습니다. “주를 위해서 살자. 여력 있거든 주를 위해서 살아야지. 그것이 인간존재의 의미다. 창조의 뜻이다.” 누구나 그런 소리 할 수 있는데 그 앞의 말을 할 수 있어야 돼요. “주를 위해서 살자”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살지 않겠다.”는 겁니다.
두 개가 순서가 짝이 맞아야 돼요. 그냥 “주를 위해서 삽시다.” 그게 아니에요. 나를 위해서 살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게임은 끝난 거예요. 나를 위해서 살지 않는 것. “나의 유익을 위해서 나는 여기 이 땅에 살지 않는다. 다른 말로 하면 나의 행복을 위해서 나는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아니다. 그 점을 알게 된 것이 나는 감사합니다.”
왜? 나는 태어남조차도 주님의 행복과 주님의 유익을 위해서 태어남을 이제야 내가 알았으니 이것은 진짜 아주 사는 게 즐거워요. 여유만만 합니다. 그런데 뒤에서 자기 바짓가랑이를 붙드는 것이 있어요. 내가 소원이 있다면 빨리 죽어서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인데 뒤에서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긴다는 말이지요.
보니까 뭐냐 하면, “내가 떠나는 것이 좋은데 하나님의 성도들을 위해서 내가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를 못하고 있다. 그것은 주님 보시기에 내가, 사도가 아직 살아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해서 유익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떠나지 않는 것이다.”
이 불평, 아직 살고 있다는 것, 아직 살아있다는 이 불평은 참 아름다운 불평이지요. 이 땅에서 죽을까 싶어 환장을 한 그런 지저분한 불평이 아니에요. 신종코로나가 번진 뒤에 마스크를 한다는 것이 그렇게 성가십니다. 세상이라는 것, 산다는 것이 이렇게 성가신 것이었던가? 그걸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들지요.
사도바울의 이 느긋함, 여유 있음, 여유만만, 이것이 바로 귀신들도 알고 있는 진짜 성령 받은 진짜배기, 진짜배기성도의 세상을 대하는 자세입니다. 이 여유만만 함. 그런데 우리는 이 여유만만 함을 내 것으로 한번 가져보겠다고 되도 않는 시도를 해보지요.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내 마음에 담기 위해서 그렇게 노력하고, 십자가노래를 부르면서 십자가가 내 마음에 들어오라고 하는데 한번 따져보세요.
그 십자가가 내 마음에 들어와야 되고, 십자가 때문에 구원을 받는다면 그것은 누구의 유익입니까? 말로는 주님의 유익이라 하지만 실은요, 아직 자기자신을 포기 못한 주책을 부리는 거예요. 평생을 교회 왔다가 주책의 낙서만 남기고 떠나간 사람. 교회 다니면서 종교적인 낙서만 저지르고 가버려요.
분명히 아까 제가 언급했잖아요. 주님을 위해서 사는 사도바울은 앞에 뭔가 전제되어 있다고요.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는 것,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살지 않아요.
그런데 자기가 천당 가겠다고, 구원받겠다고 교회 오는 것은 치사하고 지저분한 짓이에요. 그런 짓은 해서는 안되는 겁니다. 무슨 성경이 우리 구원을 위한 성경이 어디 있어요? 그런 성경은 없어요. 그런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 인간들끼리 설친다면 성경은 왜 있습니까? 성령은 활동을 왜 하고 주님은 왜 살아서 활동하시는 겁니까?
우리를 그냥 놔둬버리면 우리는 치사하고 더러운 인간밖에 되지 않지요.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연구하고, 그의 죽으심을 연구하고, 그 피를 연구해봤자 구원 못 받습니다. 십자가를 제대로 아는 사도바울의 모습은 평소의 삶, 그것도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삶을 통해서 그냥 노출되게 되어 있어요. “나는 나를 위해서 살지 않는다. 그러니까 남들이 나보고 충고하고 뭔가 잔소리를 하거든, 일단 나는 나를 위해서 살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나에게 잔소리하고 충고해라.”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를 위해서, 자기행복을 위해서, 자기구원을 위해서 살고 싶어 하니까 사도바울도 그런 줄 알고, 남들도 그런 줄 알고 자기가 자기식대로 남에게 충고질을 하는데 들어보면 아무 들을 가치도 없는 거예요. 사람은 인생을 곱게 살지 않습니다. 아주 추하게 살아요. 아주 몸부림을 쳐요. 여유가 있을 때는 상당히 뭔가 점잖다고 하지만 ‘거리 1.8미터 띄우기’ 이런 식으로 나와 버리면 사람은 ‘도대체 내가 왜 사나’ 싶지요.
그래서 인간들은 자기 편할 때는 엄마 아빠 좋다고 하다가 좀 어려우면 엄마 아빠한테 이렇게 물어요. “이러려면 왜 저를 낳았습니까?” 자식 입에서 나를 낳아놨다고 부모 보고 닦달 내잖아요. 그 문제가 뭐냐? 주어와 목적어 그 자리에 자기자신을 채우는 거예요. “엄마 아빠 내가 질문할게. 이러려면 나를 왜 낳았어?”
그게 아까 말한 대로 나를 위해서 살아가는 그런 자세입니다. 나를 위해서 살다 보니까 나오는 모든 질문들이 “신이시여 어떤 분입니까? 하나님은 왜 저에게 이런 짓을 합니까?” 나오는 질문들이 전부다 ‘나를 위해서’가 깔려 있어요.
정말 십자가를 아십니까? 정말 사도바울처럼 성령 받았습니까? 십자가 붙들고 연구한다고 그거 흉내 낼 수 없어요. 평소의 삶 자체가 나를 위해서 살지 않는 것, 나의 유익을 고려하지 않는 것, 이런 삶이 나오면 누가 뭐래도 십자가 아는 사람이에요. 고린도전서 13장에 사랑은……, 이렇게 죽 나열되어 있습니다.
사랑이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한다. 자기의 유익을 요구하지 않는다. 자기의 유익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자기 이익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그게 바로 사랑을 선물로 받은 사람의 특징이에요. 오늘 본문을 볼 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어떻고……, 그런 이야기를 제가 안하겠습니다. 안하고, 이 땅에서 정말 하나님의 십자가를 아는 사람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어떤 차이가 있느냐, 그것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거의 TV를 잘 안 보는데 어떻게 하다가 보니까, 남녀를 주선하는 게임을 하고 있었어요. 70된 노인이 셋 나오고 60대 할머니들 셋 나와서 만남을 주선하는 프로그램이었어요. 보통 캠퍼스커플을 ‘CC’라고 합니다. 요새는 ‘BC’가 유행한다는 거예요. ‘복지관커플’이라 해서. 카메라 열 몇 대가 좍 깔려 있고 공중파로 나가고 있습니다.
프로그램진행자가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유도하기 위해서 음악을 틀어놓고 짝을 맞춰 춤을 추도록 합니다. 70대 중반의 할아버지가 춤을 추면서 60대 여성에게 다가가서 손을 내밀었어요. 그런데 제가 그거 보면서 깜짝 놀랐어요. 보란 듯이 그 60대 여성이, 춤을 추면서 다가가 손을 내민 그 할아버지 손바닥을 내리쳐버린 거예요.
손바닥을 그대로 내리쳤어요. 카메라 열 몇 대가 뭘 찍고 있든 관계없어요. 다 보는데서 손바닥을 내리쳐 버렸어요. 아, 그걸 보면서 생각했어요. 그 60대 여성분이 혼자 살아왔거든요. 숨기는 것도 뭐하다. 탤런트 이숙이라는 분이에요. 그분이 평소에 혼자 사는 모습을 그냥 자신도 모르게 여과 없이 나타낸 거예요.
혼자 산다는 것은 뭐냐? 뭔가 힘이 내부로 응축되어 있습니다. 스프링처럼 수축되어 있다가 상대방으로부터 뭔가 자기가 예상 못한 것이 들어왔을 때는 웅크리고 있던 힘이 튀어나오면서, 손바닥을 내려치면서 ‘나 너 같은 인간하고 손 안 잡고 싶어.’ 아주 차갑게 하는 거예요.
이거 뭐 단호함입니까? 소신을 보여주는 거예요? 차가운 거예요? 그걸 보면서 그 인간이 평소에 얼마나 자기면역체계, 자기사수와 방어, 완전히 사드 배치한 것 같아요, 그렇게 자기를 위한 무기가 자기 안에 꽉 차 있다는 것, 힘이 응축되어 꽉 차 있다는 거예요. 그걸 어렵게 말해서 인간의 자아란 세상을 구성하는 주체가 되는 겁니다.
이숙이라는 그 탤런트뿐만 아니고 모든 인간은 나름대로의 자기세계관을 구성을 하는데 그 구성의 주체는 뭐냐? 자아가 그 구성의 주체가 돼요. 구성의 주체가 되면서 자기는 그 안에 익명적으로 들어 있다가 자기유익, 자기이익이 된다 싶으면 약간 문을 열어주지만 만약에 자기한테 이익 되지 않는 것이 쑥 들어오면, 예를 들어 그 이숙이라는 탤런트는 말로 할 수도 있는데 순간적으로 상대의 손바닥을 내리쳐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상대방 70대 노인은 난감하고 민망해서 그 내리침을 받은 손을 어떻게 처리해야 될지 몰라서 노래 부르면서 더 이상 안 마주치고 쓱 돌아서 빠져버린 거예요. 사도바울이 십자가를 알았다는 말은 이런 뜻입니다. “인간이 십자가를 통해서 범죄한 것이 맞다. 그게 확증되었기 때문에 범죄한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은 다 범죄한” 거예요. 이게 사도바울의 십자가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그러면 범죄한 인간이 믿는 신은 당연히 거짓된 우상입니다. 하나님이 우상이라는 말이지요. 만약에 인간이 범죄한 존재가 아니라고 여긴다면……, 물론 사도바울은 십자가를 알았기 때문에 범죄한 인간으로서는 뭐든지 죄라는 것을 아는데, 만약에 인간이 범죄한 존재가 아니라고 여긴다면 필시 여기에 뭐가 들어가느냐 하면, 윤리성이 발현되게 되어 있어요.
어떤 신이냐 하면, 윤리적신이 신으로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윤리적인 신이라면 그 다음부터 하나님과 인간과의 교류할 수 있는 장이 열려요. 내 안의 윤리적인 면과 하나님의 윤리적인 면이 서로 소통, 교류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것은 뭐냐? 하나님과 인간이 동일한 채널을 갖고 있다는 뜻이고요, 그 다음부터 인간이 구원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요청한 것을 인간이 윤리를 발휘해서 그 요청에 부응하게 되면 구원이 된다는 거지요.
물론 인간이 신처럼 완전하지 않으니까, 인간이 할 수 있는 부분만 인간이 최선을 다해서 하고 나머지는 하나님의 은혜로 마저 채우게 되면 인간은 구원이 된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겁니다. 이것은 어떤 경우라도 인간은 죽어 있으면 안되고, 살아서 펄떡거려야 되고, 인간은 무능한 존재가 되면 안되고, 어떤 면에서 유능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을 나타내는 존재일 경우에만 구원이 성립된다는 논리, 이것이 바로 우상이에요. 이게 악마가 만든 신입니다.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타나기 전에도 이미 선악에 기준한 하나님을 투영하지요. 자기내부의 선한 것과 아름다운 것, 진선미를 끄집어내서 그 진선미의 극대치를 신이라고 가정하고 그 신에게 통용될 수 있는 연결고리를 본인이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렇게 말해서는 잘 모를 테니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남편이 술만 먹고 들어오면 아내를 패는 거예요. 그런데 그의 아내는 자식 때문에 이혼을 못하고 있고요. 그 남자가 때리는데서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그 남자가 얼마나 간교한지, 한번 때려놓고는 다음날 되면 술김에 그랬다고 이야기하면서 아내를 데리고 백화점에 가서 원하는 것, 신상부터 해서 마음대로 사주는 거예요. 막대한 비용을 아내에게 들이는 겁니다.
“내가 잘못 했다. 네가 알다시피 내 성품이 고운 것은 알지? 술만 들어가면 내가 개가 되는데 네가 사람 좋아 나 같은 인간 그만큼 봐줘서 고맙다.”라고 진심어린 사과인 것처럼 하면서 평소에 필요한 것 다 사준다는 거지요. 그러면 다른 사람 보기에 “네가 너무 손해 보는 것 아닌가?” 하지만 그 남편은 절대로 손해 보지 않아요.
왜냐하면 자신의 율법을 아내한테 심어놓은 겁니다. 아무리 잘해주고, 아무리 원하는 것을 해주면서 행복하게 해주려고 하지만 그 밑에 깔려 있는 것은 ‘그러니까 나에게 함부로 대들지 말란 말이야.’라는 악함이 딱 깔려 있어요. ‘대들지 마라. 너 맞는다.’
그러니 이것이 뭐냐? 잘해주면서 실체는 ‘너는 내 밑에 있어.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된다.’ 하는 갑을관계를 심어놓는 거예요. 하나의 칩처럼. 하나님의 성령을 받지 않은, 악령이 들어 있는, 마귀가 그대로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뭐냐? 하나님의 율법을 자기가 자기에게 심어놔 버려요. 심어놓고는 자기가 자기를 혼내주는 겁니다. “너 이러면 지옥 가. 이러면 천당못가.”
그리고 자기가 늘 스스로 개발하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의로움, 착함의 카탈로그를 만들어요. 일람표를 만든다고요. 본인이 문제내고 본인이 푸는 겁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내가 하나님께 구원을 받았으면 받은 사람답게, 사랑을 받았으면 사랑을 받은 사람답게 티를 내야 된다. 티를 내기 위해서 내가 헌금도 하고, 헌신도 하고, 봉사도 해서 나만 구원받을 것이 아니고 이 넓은 세상 다른 사람도 구원받도록 내가 시간을 바치고 몸을 바쳐서 하늘나라 확장하는데 보탬이 되어야 나중에 하늘나라 직행할 것’이라는 생각, 그러니까 이런 생각들이 뭐가 문제냐?
거기에 나는 이미 죽었다는 생각이 없어요. 나는 살아 있어야 되고, 나는 무능하다는 생각도 없어요. 나는 유능할 수 있는 자질이 있다는 것을 항상 내포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죽으면 안 되잖아요. 살아서 더 성과를 얻어야 나중에 보너스가 많을 테니까.
그런데 로마서 4장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4, 5절에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카탈로그 필요 없습니다. 내가 살아 있을 이유도 없습니다. 내가 유능할 필요도 없습니다. 일하지 않는 자에요. 6절에 보면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일한 것이 없이. 무능하지요. 일한 것도 없이 의로 여김을 받을 때. 시편을 인용해서 7절에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그 복이 주님의 유익을 위한 복이지 나의유익을 위한 복은 아닙니다. 주님의 유익을 위해서, 주님의 이익을 위해서 그 복을 난데없이 우리에게 준 겁니다. 우리 안에 심어진 거예요. 나 따로, 내가 유능하기 위해서, 나는 내가 내 힘으로 살기 위해서 응축된 스프링의 잠재적 힘을 누적할 필요 없어요.
평소에 나는 남에게 무시 안당하기 위해서 ‘나는 이 정도야’ 하다가 우연히 선보는 자리에서, 그 많은 카메라가 있는 자리에서, 어차피 프로그램이니까 잠시 춤이나 추면되는데 사정없이 내리쳐요. 난 너 같은 인간하고 춤출 의사가 없다고.
그동안 혼자 산다고 얼마나 자기내부가 긴장이 되었을까요? 이게 힘으로 나온다는 것은 말보다 힘이 본질에 가까웠다는 거예요.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행동이 본질에 더 가까운 법이니까 행동으로 그만 손을 내리쳐버린 거예요. 이게 그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에요. 모든 인간이 그래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한다 할지라도 가까이 오게 되면 “2미터 떨어져. 왜 안 떨어져? 떨어져.” 이게 뭐냐 하면, ‘나는 나를 위해서 살고 싶어. 너도 마찬가지잖아. 그러니까 서로 그 의견 존중해주자. 나는 날 위해서 산다.’ 거기에 대해서 귀신이 성령 받은 인간으로, 귀신나라에서 쳐주겠습니까? 귀신나라에서도 다 알고 있어요. 너는 아무리 해도 교회에서 장난이나 치는 것이고, 놀이삼아 왔다 갔다 한 인간이지 그거 성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 땅에서 십자가가 어떠니, 예수님 십자가가 죄사함이니, 백날 이야기해 봐야 삶 자체가 여전히 자기를 위해서가 있는 한 그것은 자기 자신이 따로 힘을 응축해서 그 힘은 내가 일한 대가라는 거예요. 분명히 로마서 4장에서는 일한 것이 없다 했는데 본인은 일한 것, 공들인 것이 있어요. 평생 동안 쌓아놓은 공들인 것이 있는 거예요.
이걸 어떤 70대 노인이 와서 건드리니까 순간적으로 손바닥 내리쳐 버리지요. 얼굴 벌개져서 벌벌 떨면서 자기자리로 돌아와 버렸어요. 여유가 없어요. 나 지키는 것이 최우선이기 때문에 달리 여유가 없어요. 나는 내가 지켜야지 누가 나를 대신 지켜주지 않는다는 강한 긴장감이 있습니다. 이것은 결혼하나 혼자 사나 마찬가지에요. 애들도 마찬가지고요.
그렇다면 그 반대가 뭐냐? 진짜 십자가를 아는 사람은 뭐냐? 겨울왕국이라는 만화에 ‘울라프라’는게 나와요. 울라프가 뭐냐? 눈사람입니다. 몸통이 통통하지요. 예뻐요. 하얀 몸체에 빨간 나뭇가지로 꽂아서 얼굴 나오고 팔 다리 나와요. 울라프라는 눈송이를 애들이 그렇게 좋아해요.
그렇게 통통한 아름다운 실체, 하얀 눈송이, 얼마나 예쁘고 멋집니까? 그런데 여름 되니 그 울라프 눈송이가 다 녹아버리고 예쁜 나뭇가지는 꽂을 자리도 없네요. 눈송이가 눈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흙탕물이었어요.
사도바울은 십자가를 알고 난 뒤에 자기자신이 녹고 있다는 거예요. 하나의 눈송이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이 녹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녹고 있고 소멸되기 때문에 더 이상 ‘나를 위해서’가 성립이 안돼요. 주님 앞에 서게 되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그냥 시커먼 흙탕물일 뿐인 나, 평소에 ‘나를 위해서’를 거기에 걸칠 그것이 없다니까요.
이사야 6장 5절을 여러분이 아시지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주님 앞에 떡 서게 되면 우리는 강력한 나밖에 모르는 인간 아니에요. ‘나밖에 모르는 인간’ 하게 되면 늘 생각나는 것이 있어요. 국민학교 때, 저에게는 초등학교가 없었고 국민학교 때, 겨울에 때는 무쇠난로, 도시락 얹어놓는 벌건 무쇠난로가 생각납니다. 그 무쇠난로는 무쇠로 만들어서 씨도 안 들어가요.
모든 인간들이 자기를 위해서 살게 되면 어느새 그 자체가 무쇠덩어리, 무쇠난로가 다 되어 있어요. 주고받는 말은 전부 다 형식적이에요. 상투적인 것. 두 시간 동안 대화해도 위선적인 대화만 오고 가고 자기 잘났다는 이야기밖에 안 나오지요. 그냥 다섯 사람 모이면 무쇠난로 다섯 덩어리에요. 얼마나 두껍고 단단합니까? 건드리면 대번 반격 나오지요.
그게 바로 ‘자기를 위해서’의 결과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계관을 구성할 때 자아란, 무쇠같은 나는, 내가 구성한 세계에 들어앉아서 빠끔히 세상을 내다보는 식으로 살아갑니다. 사는 것이 이게 몸부림이고, 무서움과 알 수 없는 공포에 시달리고 있는 거예요. 전 세계가 다 그렇고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고요. 무쇠난로 이거 흠집나면 안된다고 맨 날 조마조마 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울라프 눈송이는 결국은 녹아지고 죽잖아요. 그러니까 나를 죽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주님의 유익을 위해서 태어나게 했다가, 주님의 유익을 위해서 죽여주니까 그 과정을 통해서 내가 죽어 마땅함을 내가 알고 있다는 이 사실, 거기에 대해서 굉장히 감사히 여기는 겁니다.
값없이 아무것도 행함도 없는데, 평생 동안 나만 지키기 했는데 그 행한 것도 없는 나에게 값없이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이게 바로 복음입니다. 이게 복음이에요. 윤리적 신 아닙니다. 도덕적 하나님 아니에요. 도덕적 신을 믿는다는 것은 나의 유능함을 하나님 앞에서 자랑질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무쇠 난로 같은 나가 어떻게 울라프 같은 눈송이처럼 되느냐? 그것은 이 난로 말고 초과적인 것이 나와야 돼요. 아무리 내가 윤리적이고, 도덕적으로 연구하고 또 연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기 위해서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은 내가 알 수 있는 것 가지고 돌리는 거거든요. 내가 알 수 있고, 할 수 있는 것 가지고 영광 돌려봤자 그것은 자기자랑밖에 안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초과적인 것, 내가 할 수 없는, 더 넘어서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성령의 오심입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나를 아예 무능한 자로 만들어버려요. 뭘 해도 소용없는 자로 만들어주시는 그 가벼움, 그 자유함. “나는 네 솜씨 안 받는다. 네 재주 안 받는다. 네가 네 인생 살기 위해서 평생 얼마나 공들였는지 나는 일체 안 물을게.”
그거 말고 너한테 없는 것, 더 초과적인 것, 플러스알파, 초과적인 것, 그것이 사도바울에게 찾아왔기 때문에 귀신들도 말하기를,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고 그렇게 이야기한 겁니다. 바라기는 우리들 자신도 귀신나라에서 좀 알아줬음 좋겠어요. 저 인간은 자기의 솜씨 부리면서 사는 인간이 아니고, 여분의 초과 것에 의해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 죽는 것도 좋다고 오히려 죽는 날을 기다리는 자유로운 사람인 것을 마귀나라에서 좀 알아줬음 좋겠어요.
하지만,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내가 죽고 싶은데, 하지만 내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기는 것이 있거든요. “사도바울님, 죽으면 안돼요. 복음 더 전해줘야 돼요.” 하고 요청하는,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는 거예요. 자기의 사명이 있는 겁니다.
그러면 그 초과적인 것 안에 뭐가 포함되어 있느냐? 바로 봉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네가 죽고 싶은 것은 아는데 사도바울아 좀 참아라.” 현재 사도바울이 옥에 갇혔습니다. 옥에 갇힌 채로 이제는 사형이다, 하고 좋다고 하는데 “아니야, 아니야. 네가 옥에 갇혔어도 너는 뭔가 계속해서 봉사해야 되고 일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봉사하고 일을 한다는 것은 뭐냐? 사도바울처럼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는 사람을 만나는 거예요. 사도바울, 내가 나를 위해서 살지 않는 것처럼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에게 봉사를 하게 하는 겁니다.
봉사를 할 때 그것이 봉사냐, 아니면 그것도 나의 자랑질이냐를 어떻게 아느냐? 본문 22절에 나옵니다.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찐대” 내가 육신으로 남아 있는 이것도 하나님의 열매인데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무엇을 선택해야 될지 나는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뭐냐? 봉사는 자신이 몰라야 돼요. 그래야 봉사하는 것도 초과적인 것이 되고 내 여분의 것이 돼요. 노리고 봉사하면 안 된다는 말이지요. ‘나는 우리교회 꽃꽂이 해야지.’ 이렇게 노리고 봉사하게 되면 말씀은 안 들어오고, 자기가 한 그 꽃꽂이가 잘 있는지, 물 언제 줘야 되는지 그것만 신경 쓴다고요.
자기가 봉사하는 것에 집중해버리면 그게 자기의 우상이 되어버려요. 누가 자기 것 건드리면 화를 내게 되어 있어요. 돌아가신 자기 할아버지 때 부흥사에게 속아서, 집 팔아서 자기 집은 전세 살면서 교회에 목돈 냈다고 합시다. 철없는 주일학교 애가 예배당벽돌 발길로 찬다거나 훼손한다 싶으면 그것은 자기할아버지를 건드리는 거예요.
그게 무슨 봉사입니까? 주식투자한 거지요. 그 교회에 투자한 것이지 봉사가 아닙니다. 헌금을 해도 나는 모르겠다고 헌금해야 돼요. “나는 모르겠으니까, 나는 유능한 것이 아니고 무능하니까, 주께서 하라고 해서 했을 뿐입니다.”가 봉사가 되어야 된다 그 말이지요. 누구 옆 사람 안면 트고 그렇게 하지 말고. 신천지는 단체로 아멘이라. 기침만 해도 아멘이라.
이게 뭐냐 하면, 자기가 알아서 그냥 아멘, 하는 거예요.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그냥. 눈치보고 하는 거예요. 왜 눈치를 봅니까? 돌아오는 것이 결국 자기의 이익이 되고, 나는 신앙인이라고 남들이 이야기해줄까 싶어서 그걸 노리고, 그 분위기 봐서 행동하는 겁니다. 그래서 봉사가 무엇이냐? 또는 주님의 유익이 무엇이냐를 언급하려면 무엇이 봉사가 아닌지, 하나님의 뜻에 무엇이 위배되는지를 보는 것이 좋겠지요.
사무엘하 14장에 보면 압살롬이라는 사람과 요압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사무엘하 13장 38절에 “압살롬이 도망하여 그술로 가서 거한지 삼년이라 다윗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 향하여 간절하니 암논은 이미 죽었으므로 왕이 위로를 받았음이더라.”라고 되어 있어요. 그 다음에 14장 1절에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로 향하는줄 알고” 이야기가 이렇게 전개됩니다.
구약에 나오는 압살롬, 성경 좀 본 사람은 압살롬이 어떤 사람인지를 아실 거예요. 모양새는 테리우스 같습니다. 긴 머리에 너무 잘생겼어요. 이스라엘 중에서 제일 잘생긴, 미스터 머슴아, 제일 잘 생긴 남자가 압살롬이에요. 요압은 이스라엘의 제 2인자입니다. 이 사람 이야기가 사무엘하에 죽 나오고 열왕기상 2장까지 나옵니다.
압살롬과 요압이 같은 마음이 되는데 이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이스라엘이 국가권력을 행사하고 이스라엘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왕이라는 최고 권력자가 누가 될 것인가에 대해서 기회를 공평하게 주는 것이 옳지 않느냐, 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요압과 압살롬이에요. 문장이 기니까 짧게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누가 될 것인가에 대해서 ‘능력 있고 유능한 사람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는 것이 합리적인 생각입니다.’ 라고 여겼던 사람들이 요압과 압살롬이에요.
들어보니 상당히 공정성 있는 것처럼 보이지요. 다윗은 지금 늙어가고 있고 차기 왕이 궁금한 거예요. 그럴 때 요압은 누굴 밀어주느냐? 압살롬을 밀어주는 거예요. 압살롬이 인기짱이거든요. 인물 잘 생겼지요, 사람들에게 호감형이지요, 요즘 같으면 조국교수라고 보면 돼요. 요압이 딱 보니 백성들의 마음이 압살롬에게 다 가 있는 겁니다.
다윗왕은 늙어가고 있고 빨리 차기 왕이 정해져야 국가가 안정이 되고 외세로부터 버텨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어떤 결정을 안내리고 있어요. 그러니까 요합이 사무엘상 14장에서 꾀를 씁니다. 어떤 여인을 불러서 연기를 시키는 겁니다. 상복을 입혀서, “네가 백성인척 하고 왕에게 들어가서 이렇게 연기를 해라.”
“나는 과부인데 남편이 죽었습니다. 아들 둘이 있는데 하나가 다른 아들을 때려죽였습니다. 아들 하나로 그만 되었다 싶었는데 이웃이 가만두지 않고 ‘어떻게 동생죽인 그 형을 그냥 살려두느냐 그 형마저 죽여야지.’라고 달려듭니다. 임금님, 저는 그 아들이라도 하나 있어야 대를 잇는데, 그 아들마저 죽어버리면 대를 잇지 못하는데 현명하신 다윗임금이여, 해결책을 제시해주옵소서.”
이렇게 울면서 자기집안사정 이야기인 것처럼 호소를 하지요. 배후에는 요압이 있는 거예요. 요압이 압살롬에 대한 다윗왕의 마음을 떠보려고 그렇게 한 겁니다. 처음에 다윗은 몰랐지요. 그래서 “걱정마라. 이웃사람들이 하나밖에 없는 네 아들 죽이지 못하도록 내가 조치해줄게.”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그러면 이야기가 거기서 끝난 거예요. “내가 네 아들 안 죽도록 조치해 줄게. 됐냐? 집에 가.” 이랬는데 그 여인이 집에는 안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우리 집은 그렇게 해주면서 왜 왕 본인은 그 귀한 아들을 죽이려고 하십니까?”라고 나온 거예요. 감히 백성이 지금 왕한테 잔소리를 한 거예요.
그러니까 다윗이 그때는 정신을 차려서 “네 배후에 누가 있느냐? 누가 너 보냈느냐?” 할 때 요압이 보냈다고 이야기했어요. 요압은 압살롬을 밀고 있었으니까. 지금 제가 하는 이야기가 뭐냐? 노골적으로 “나는 나의이익을 위해서 삽니다.”라고 떠벌리지 않더라도 인간이 평소에 세상을 살아가면서 내 자아라는 것이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세상을 구성한다 했거든요. 기억나십니까? 설교초반에 이야기했지요.
인간은 자기를 위한 것을 전제로 해서 자기만의 세계를 구상해요. 만들어낸다고요. 그 만들어낸 구상가운데서의 행동은 속일수가 없어요. 본색이 딱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예를 제가 요압과 압살롬의 예를 드는 거예요.
요압에게는 또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사무엘하 3장 27절에 보면 “아브넬이 헤브론으로 돌아 오매 요압이 더불어 종용히 말하려는 듯이 저를 데리고 성문으로 들어가서 거기서 배를 찔러 죽이니 이는 자기의 동생 아사헬의 피를 인함이더라.”
아브넬이라는 사람은 다윗 왕이 인정한 귀순한 장군인데 이스라엘의 제 2인자 요압장군에게 피살당했습니다. 죽인 이유가, 전에 아브넬이 요압의 혈육인 동생 아사헬을 죽였기 때문에 형으로서 ‘저 인간 언젠가 만나면 꼭 죽여 버린다.’고 해서 죽인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다윗은 뭐라고 하느냐? 사무엘하 3장 29, 30절에 “그 죄가 요압의 머리와 그 아비의 온 집으로 돌아갈찌어다 또 요압의 집에서 백탁병자나 문둥병자나 지팡이를 의지하는 자나 칼에 죽는 자나 양식이 핍절한 자가 끊어지지 아니할찌로다 하니라 요압과 그 동생 아비새가 아브넬을 죽인 것은 저가 기브온 전쟁에서 자기 동생 아사헬을 죽인 까닭이었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다윗이 자기 2인자 요압에게 저주를 퍼부어버린다고요. 다윗이라는 하나님의 선지자 왕이 저주를 내뱉는 것은, 그 요압이라는 인간이 필히 저주받게 되어 있습니다. 열왕기상 2장 31-33절부터 보면 요압이 결국 솔로몬왕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이야기가 나와요.
“왕(솔로몬)이 이르되 저의 말과 같이 하여 저를 죽여 묻으라 요압이 까닭 없이 흘린 피를 나와 내 부친의 집에서 네가 제하리라 여호와께서 요압의 피를 그 머리로 돌려보내실 것은 저가 자기보다 의롭고 선한 두 사람을 쳤음이니 곧 이스라엘 군대장관 넬의 아들 아브넬과 유다 군대장관 예델의 아들 아마사를 칼로 죽였음이라 이 일을 내 부친 다윗은 알지 못하셨나니 저희의 피는 영영히 요압의 머리와 그 자손의 머리로 돌아갈찌라도 다윗과 그 자손과 그 집과 그 위에는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평강이 영원히 있으리라.”
왜 이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되었을까요? 왕의 자리는 인간의 능력을 가늠해서 앉힐 자리가 아니고 하나님이 선택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선택하는 거예요. 유능하냐, 무능하냐를 비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네 재주부릴 시간이나 기회도 줄 필요가 없어요. 그냥 찍은 거예요. “너 왕 돼!” 찍어버린 겁니다.
아까 로마서 4장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지요. 값없이 의롭다 하심이라고. 그렇게 찍어버린 겁니다. 값없이 의롭다 하심으로 찍어버린 그 사람이 바로 성도가 되는 거예요. 값없이. 내가 내 유익을 위해서 살려고 애쓰고 공들인 것 아무짝도 소용없어요. 내가 의롭게 되어야 천당 간다는 그 윤리적신 앞에서 윤리적인 모든 열매를 다 주워 모아서 “하나님 나 이정도 착한데 천국 넣어주세요. 상급주세요.” 이거 소용없어요. 그런 것은 이단들이 주장하는 거예요. 그것은 악마가 만든 신입니다.
그게 삼위일체든 뭐든 다 가짜에요. 그냥 선택해버린다고요. 여러분 그 점을 알아야 돼요. 성경에서 일방적으로 선택했을 때 선택하고 난 뒤에 어떤 자가 그 선택에 대해서 무슨 근거로 반발하는가, 그 반발을 한번 보세요. 오늘날 우리의 삶하고 똑같아요. 바로 나를 위해서, 나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겠다는 그 모습을 그대로 반영해주고 있습니다. 성경전체가 다 반영해주고 있어요.
우리는 그 사실에 대해서 감각이 없이 그냥 옛날 다윗 때 압살롬 이야기, 그 다음에 요압이야기를 들으면 ‘그럴 수도 있지. 오히려 다윗임금이 좀 이상하네. 능력 있고 백성들에게 인기 있는 사람을 왕으로 해야지. 엉뚱하게 왜 솔로몬이 왕이 되지? 솔로몬의 출생자체가 상당히 추접한 간음사건이 담겨 있는 사람인데 그 사람을 왜 다윗의 차기 왕으로 했을까? 하나님이 좀 이상한 것 같아. 옛날이니 그런 일도 있었겠지. 그냥 넘어가자.’ 그냥 넘어가버려요. 이게 바로 우리 자신을 보고 하는 이야기인데.
여러분이 성경 볼 때 다윗을 택했다고 다윗 편에 서지 마시고 요압 편에 서시고 압살롬 편에 서세요. 거기 서야 돼요. 거기 서게 되면 요압이나 압살롬이나 오늘날 우리나 똑같이 동일한 사고방식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요압과 압살롬, 이 사람들이 여호와를 안믿는 것이 아니에요. 요새말로 하면 그 사람들이 교회 안다니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교회 다니고, 하나님도 다 믿어요. 하지만 그 사람들은 전혀 신앙인이라고 해도 신앙인이 아니에요. 신앙 아닌, 신앙 같은 그런 신앙. 신앙인 듯, 신앙 아닌, 신앙 같지도 않은 그런 신앙.
그것을 귀신들도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가짜신앙. 자기유익을 위해서, 자기 구원을 위해서 교회 나오는 그 가짜 신앙, 자기 천당 가려고 교회 나온 그 가짜신앙. 평소에 자기 윤리도덕을 총동원해서 “하나님, 이 정도 착한 사람 버리면 하나님이 나쁩니다.” 하고 반발하는 그 가짜신앙. 그러나 하나님은 값없는 자에게 그냥 꽂아줘 버립니다.
시편 90편 9-10절, 유명한 말씀입니다.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거기에 보탤까요? 신종코로나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진노를 맛보라고 한 거예요.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보면서, 힘들게 살아가면서, 왜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우리를 힘들게 하고 고생을 시키는지, 이유를 몰라요. 왜? 자기는 잘났으니까, 자기는 유능하니까. 자기에게 선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하나님 믿고 성경대로 지켜서, “내가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는지 그런 기회라도 부여해서 내 잘난 맛에 본때 나게 살도록 기회를 주옵소서.” 이러고 있다는 말이지요. 요압이나 압살롬하고 똑같아요.
봉사라 하는 것은 나는 몰라요. 봉사하는 사람, 진짜 봉사가 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나를 위해서 살지 않는 사람을 서로 만나는 거예요. 자기 이익, 유익과 자기구원을 위해서 살지 않는 사람이에요. 주께서 하게 하셨던 겁니다. 그걸 수학에서는 합동이라고 해요. 모양새가 달라도 밑변 같고 각이 같으면 그것은 합동이에요. 동일한 백성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 모든 일은 뭔가 들어가는 것이 없으면 출력도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주어진 값이 없으면 출력하는 것도 없다고 여기는 것, 그것을 함수관계라고 하는데, 인간은 자꾸만 뭘 해야 된다는 거예요. 지금 주께서 숨 쉬게 하고, 주께서 살려주시는데, 그것은 봉사하라고 하는 거예요. 어디에 봉사할지 본인은 몰라요.
현재 주께서 그 때 그때 알려줄 겁니다. 그래야 주님의 공로가 살잖아요. 값없이, 일한 것도 없는데 하나님께서 의롭게 하시는 그 가치를 살리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떤 자세여야 하느냐? “주여, 내가 이 땅에서 그냥 있는 것도 짜증납니다. 주와 함께 있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주께서 “그냥 오지 말고 봉사하고 오너라. 너를 내게 필요한 사람 되게 만들게.”라고 하시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언제 죽을지 모르겠지만 사나 죽으나 그 사이에 끼어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죽고 싶다는 말은 뭐냐? 죽음보다 더 좋은 것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유들유들하고 정말 가벼운 거예요. 내 죽음보다, 내 목숨의 가치보다 더 좋은 가치를 발견했을 때는 우리는 더 이상 부러울 것이 없이 기쁘지요. 그 기쁨으로 봉사해야 돼요. 바로 그 기쁨으로. 얼마 전에 그런 사람 하나 났어요. 언뜻 TV를 보는데 보였어요.
미스터 트롯에 출연한 장 민호라는 사람이 있는데 나이 40대가 되어서 눈가에 잔주름이 끼어 있어요. 어떤 분이 그 장 민호라는 트로트 가수가 너무 좋다보니 “나는 당신의 그 잔주름에 끼어죽고 싶어요.” 우리는 주님의 그 하늘나라 보좌에 끼어죽고 싶어요. 얼마나 그 사람이 좋았으면, 그 잔주름에 끼어서 죽어도 좋을 만큼 팬이라는 뜻이거든요.
그 사람은 분명히 장민호만 있다면 자기유익을 구하지 않을 사람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때문에, 용서 때문에, 주님의 의롭다하심 때문에 우리의 유익을 구하거나 우리를 위해서 살지 맙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정말 주께서 성령 줬다면 말할 수 없는 봉사의 기쁨을 같이 주신 줄 믿습니다. 힘이 있어서 봉사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살아가는 그 자체가 봉사인 것을 진즉 우리가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