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강의

십자가-종말의 연속

아빠와 함께 2024. 11. 26. 21:24

대전-십자가를 아십니까(33강) 벧후3:8(종말의 연속) 20241125b(강의: 이근호 목사)


『십자가를 아십니까』 p.139 하겠습니다. 밑에서 7번째 줄부터 그 대목을 제가 한번 읽어볼게요. [역사에 관심을 둔다는 것 자체가 성경 자체에서 마음이 떠났다는 말이다.] 성경 자체에서 마음이 떠났다. [성경만 가지고서는 여러 가지 구구한 해석들이 있어 확신이 서지 않으니 역사를 통해서 확실한 해결책을 찾겠다는 심보이다.]

그런데 이게 굉장히 어리석은 생각이에요. 어느 역사의 한 지점에서도 구구한 해석, 다양한 해석은 그 시점에도 여러 가지 있었어요. 그 해석 가운데 유력한 해석이 하나 등장한다는 말은 그만큼 그 당시에 그게 대세였고 힘이 셌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은 힘의 세계이고 인간은 그 힘에 대한 의지로서 서로가 뭉쳐서 살아간다.

그걸 아주 노골적으로 언급한 학자가 있었죠.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 독일의 철학자)에요. 니체가 그런 이야기했어요. 그래서 ‘이성보다 힘의 의지가 더 강렬하고, 양심보다 힘을 찾는 욕망이 더 강렬하고, 세상에 일어나는 것은 힘을 얻기 위한 몸부림이고 투쟁이다. 세상을 그렇게 보자. 사람이 착하다? 그게 힘이 되기 때문에 사람은 착하려고 한다. 힘이 안 되는 착함은 인간은 행사하지 않는다. 착해야 남한테 인정받으니까 착하려는 것밖에 되지 않죠.’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해결책 있는가? 그들의 특징은 뭐냐? ‘모르겠다’에요. 실컷 이야기해놓고 모르겠다는 거예요. 해답 없다. 해답 없으면 뭐냐? 갈 때까지 가보자. 강남스타일이에요. 그냥 갈 때까지 가보겠다는 거예요. 갈 때까지가 어디까지가 갈 때까지냐? 자기 죽을 때까지. 아무 해답도 없고 이유도 모르는 채 잠깐 왔다가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꺼지죠. 촛불 꺼지듯이. 니체라는 촛불은 꺼집니다. 결국 그 사이에 주장하는 것은 ‘내 생각에는…’. 맨날 ‘내 생각에는…’

그러면 성경에서 성경을 두고 내 성경해석은 성립됩니까, 성립되지 않습니까? 성립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해석이 필요치 않습니다. 이유가 뭐냐? 말씀이 스스로 활동하기 때문에. 그러니까 주님은 지금 바빠요. 너무 바빠요. 인간의 모든 일을 묵사발 낸다고 되게 바빠요.

그럼 인간은 뭐냐? 말씀세계의 언저리에서 노는 거죠. 말씀세계가 동그라미라면 인간은 말씀세계에 못 들어가고 옆에 붙어있어요. 관람하든지 구경하든지 어떤 사람은 3m 벗어난 사람이 있고 15km 벗어난 사람도 있고 하여튼 말씀에 침투하지 못하고 다 언저리에 있는 겁니다.

왜 인간이 말씀에 침투하지 못하느냐 하면 이 말씀의 세계 테두리는 예수님의 죽음으로써 테두리가 정해졌기 때문에 그래요. 성령은 어디서 나오는가? 성령은 이 땅에서 죽으신 예수님에게 성령이 나옵니다. 이 땅에서 예수님이 죽지 않으면 우리에게 성령이 온다, 안 온다? 안 옵니다.

따라서 이 땅에 있어서 본인을 산 인간으로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성령 받은 적이 없는 사람이에요. 이 말씀의 세계는 이 땅에서 죽으신 분의 세계, 다 이루었다의 세계에요. 이게 말씀의 세계에요. 자기가 살아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말씀의 세계 속에 못 들어갑니다.

그러면 성도는 뭐냐? 이미 죽었던 분의 영이 임하게 되면 그 사람은 말씀의 세계에 속하면서 말씀의 세계에 속해 있어요. 말씀의 세계에 속했다 이 말이에요. 지금 이렇게 평면으로 그리면 그림을 못 그려요. 못 그리면 어떻게 하는가? 입체로 그려야죠.

위 아래로 접시 두 개를 그려요. 위에는 말씀의 세계, 아래쪽에는 인간들이 말하는 그냥 세계. 성도가 아래세계에 있으면 성도는 말씀세계의 그림자요 모형으로서 활동하고 있으니까 하늘에 있는 하늘의 구름이 아래세계까지 축 늘어졌다고 보면 되죠. 중첩되어 있는 거예요.



이렇게 입체적으로 중첩되어 있는데 그림으로 두 개의 차원을 하나로 만들어버리면 그림을 그릴 수가 없어요. 그림을 그릴 수 없으면 이렇게 그려야 되죠. 말씀의 세계(동그라미)를 실선으로 그리지 말고, 기껏해야 점선으로 그려서 ‘이 세계 안에 말씀의 세계가 이미 들어와 있다.’ 이렇게 설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의 사람들이 이미 들어와 있다.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살아가는 인간들의 입장에서는 이 말씀의 세계에 들어올 수 없는 거예요. 그냥 성경연구해요. 십자가를 아는 것이 십자가를 믿는 겁니까? 아니죠. 십자가를 못 믿기 때문에 십자가를 알고 있는 거예요. 십자가 세계에 들어가지는 못하고 뭐는 해야 되겠고 그럼 십자가를 연구하는 거죠. 예수님이 죽어서 그 피로 우리는 구원받는다, 뭐 이런 이야기한다고요. 그거 연구하는 거죠.

여러분들이 썬팅을 아주 짙게 한 차 안에 들어 있는데, 어떤 지나가는 아주머니께서 ‘어? 거울 비치네.’하고 창문에 얼굴을 비추면서 화장 고치고 있으면 그때 어떻게 해야 됩니까? 가만있으면 안 되고 ‘똑똑’하면 ‘아이고, 놀래라. 미안해요.’하고 가잖아요.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데 차 안에는 못 들어가고 십자가 찍어 바르고 난리라. 찌익- 하고 창문 내리면 얼마나 쑥스럽고 민망스럽겠습니까? 뭐하니? 뭐하세요, 지금? 뭐 구원받을라고? 신천지나 가세요, 신천지나.

말씀의 세계가 오게 되면 나의 죽음을 하나님께서 하나도 버리지 않고 살아있는 주님의 뜻을 드러내기 위해 이 죽은 나를 가지고 마음껏 활용하시고 사용해주시는 겁니다. “오늘은 쓰레기 비우는 날, 바깥에 쓰레기 내놔야지.” “맞다. 오늘은 재활용.”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말씀에 관한 일이에요. 주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거 할 때 우리를 죄인으로 보거든요. 그래서 제가 자주 써먹지만 그래도 정말 중요한 것은 이거에요. 죄인이라면, 중간에 하나 넣읍시다, ‘정말 정말 죄인이라면, 진실로 진실로, 아멘 아멘, 왜 인간이 말씀에 침투하지 못하느냐 하면 이 말씀의 세계 테두리는 예수님의 죽음으로써 테두리가 정해졌기 때문에 그래요. 성령은 어디서 나오는가? 성령은 이 땅에서 죽으신 예수님에게 성령이 나옵니다. 이 땅에서 예수님이 죽지 않으면 우리에게 성령이 온다, 안 온다? 안 옵니다.

어제 설교 마치고 난 뒤에 우리 사위가 이런 질문을 해요. 설교하고 난 뒤에 교회에서 내가 설교를 올리거든요. 올리고 있는데 ‘하나님이 숙소에서 모세를 왜 죽이고자 했습니까?’하고 훅 질문이 들어왔어요. 낮 설교 끝나고 난 뒤에. 왜 하나님은 모세를 숙소에서 죽이고자 합니까? 바쁜데 훅 들어왔잖아요.

그래서 나도 훅 답변했죠. 언약을 살리기 위해서. 모세는 죽여야 했다. 모세가 죽지 아니하면 언약이 살질 못한다. 따라서 네가 지금 해야 될 일이 언약 살리는 일이라면 너는 늘 계속 너의 생각은 삭제되고 죽어야 된다.

언약을 살리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말씀세계 살리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이게 중첩된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내가 왜 이 지저분한 일을, 내 인생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인생을 왜 사느냐? 언약을 살리기 위해서. 아니꼽냐? 싫어? 왜? 거부하고 싶어?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씀세계에 들어오지 못하고 그 언저리를 맴돌고 있어요. 자꾸 말씀세계에 들어오지 않고 있습니다. 들어오지 않을 때 아까 p.139의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냐? 안 들어왔으니까 그들은 뭐를 찾느냐 하면 그들이 할 수 있는 걸 가지고 조립해요. 그게 역사라는 거예요. 역사.

지금 이 문맥 단락이 [십자가와 주일 성수]죠. 주일 성수니까 이건 시간문제잖아요. 십자가와 시간의 관계에 대해서 지금 계속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5강에서 하고 있는데 p.139 중간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좋은 교회는 좋은 전통 위에 유지될 때 좋은 교회라고 세상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가져야 될 좋은 전통을 찾고자 하는 노력의 결과가 ‘주일 성수’다. 오늘날의 교회가 그렇게 하는 것은 초대교회와 연결고리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 비롯되었다. 초대교회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정통적인 교회라면, 오늘날의 교회도 초대교회의 좋은(?) 전통 속에 있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다. 즉 역사의 중요성을 인식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나타나는 것이 전통의 중요성이다.])

그럼 좋은 전통이라니까 좋은 전통은 버려야 된다, 안 버려야 된다? 그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안 버려야 되겠죠. 좋은 전통을 버리지 말아야 될 것은 그동안 그들이 긴긴 과거 역사를 통해서 많이 실험하고 실제로 적용을 해보니까 좋은 효과를 냈다는 것이 증명이 되었으니까 이것은 좋은 전통의 항목, 리스트에다가 집어넣고 계속해서 그걸 이어나가고자 하는 거예요. 그 좋은 전통 중에 하나가 바로 주일 성수라는 겁니다.

그래서 주일 성수를 만약에 교회에서 이야기하지 않고 이것을 말하지 않는다면? 한번 적어볼게요. ‘주일 성수를 강조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어떻게 되겠느냐?’ 여기서 내가 항목을 하나 더 집어넣을게요. 1.교회는 어떻게 되겠는가? 저는 항목을 집어넣습니다. 2.주님은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이걸 집어넣는 거예요. 주님은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1.교회는 어떻게 되겠는가? 개판되죠, 뭐. 개판되죠. ‘여러분, 주일에 교회 안 나와도 괜찮아요.’ 이러면 교회 나오겠어요, 안 나오겠어요? 안 나오죠. 왜냐하면 7주째 기름 값이 오르기 때문에.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할 때 이 행동이 옳으냐, 그르냐는 뭐냐? 소비된 비용보다 효과가 있었느냐를 따져서 감가상각을 따져서 비용보다 남는 게 있으면 잘했다, 남는 게 없으면 못했다,가 되는 거예요. 못했다,가 되는 겁니다.

이번 주 교회 나오시면 불고기 파티 있습니다. 나오죠. 주일 성수하죠. 왜? 가만 보자. 갔다 오는데 기름 값이 오천오백 원 들었지. 그러면 불고기가 최소 만 원이니까 만 원어치 더 먹으면 되지. 아침 굶고 가면 되지. 그럼 남는 장사 아닙니까. 모든 계산을 돈으로 계산하는 거예요, 인간은. 돈으로.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은 자기의 몸뚱아리를 감당 못한다는 거예요. 자기 몸뚱아리를 감당 못해요. 주일날 몸살기가 있다. 교회 오게 되면? 몸살기 있고 집에 그냥 누워있어서 판콜 에이 하나 먹고 있으면 저녁에 나을 확률이 몇 퍼센트다. 그런데 교회 갔다 오게 되면 그 다음날 사흘 동안 판콜 세 병 들어간다면 판콜 한 병에 이천오백 원 정도하는데 그동안 일도 못 나가면 내 수입이 적어지잖아요.

모든 걸 돈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거에요. 인간의 육신은 에너지의 투입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에너지의 투입으로. 에너지입니다. 에너지 알죠? 에너지라 하는 것은 물리학에서 힘에 대한 표식이 에너지에요. 인간의 육신은 지탱하는 힘이 없으면 지탱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2번 보세요. 주님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빨리 죽어, 에너지 빼고.” 이거거든요. 에너지 빼고 빨리 죽어. 이거란 말이죠. 그러니까 2번은 인간이 채택을 안 해요. 왜냐 하면 그동안 자기 육신 편하기 위해서 살아왔는데 주님의 말씀 앞에서는 육신이 용납이 되지 않습니다. 육신은 죄를 계속 생산하기 때문이에요.

물론 주님의 뜻이 와야 부르지, 그냥 가면 또 안 받아줘요. “당신은 5년 뒤에 오세요.”하고 보내버린다고요. “5년 동안 더 죄 짓고 오세요. 어디서 이게 호강하려고… 미리 오려고 해요? 5년 죄 짓고 오라고.” 보낸다고요. “그럼 이 육신 감당 못하는데….” “감당 못하고 오라고! 당신이 육신을 감당 못할 때 당신은 어떤 더러운 짓까지 할 수 있는가를 체험하고 오라고.” 이렇게 보내버린다고요. 이 융통성 없는 천사들.

그런데 이게 싫은 거예요. 싫어서 육신의 품위는 유지하고 싶고. 자, 품위는 어디서 온다고요? 자부심에서. 내가 존재하는 품위는 나의 자부심에서. 자부심은 뭐냐? 내가 할 도리는 제대로 하고 있다는 거기서 자기의 품격이 주어지죠. ‘내가 뭘 주부로서 못했노?’ 이게 자기 의 아닙니까. 그게 품격 유지에요.

품격 유지가 되는데 만약에 내가 얼굴에 화상을 입었다. 교회 안 나가죠. 품격 유지에 손상을 입었기 때문에. 그러니까 이 교회라는 게 뭐냐 하면 자기의 자랑질을 할 수 있는 자들이 잠시 모여서 자랑질을 꼭 말이 아니라 보여주는 거죠. 전에 했죠. 손톱에 네일아트 했으면 일부러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면서 “아우, 골치야. 왜 이렇게 자꾸 안 풀리는지 몰라. 자꾸.” 자기 애 고3이라고 생전 교회 안 나오다가 교회 데려와서 “아이고, 너 어떻게 고3인데 왔네.” “수능 쳤거든요.” 이게 뭐냐 하면 의대 갈만한 성적 나왔다 이 말이죠.

인간은 자기 육신을 감당 못합니다. 감당 못하는데 육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앞에 포장지를 그럴싸한 포장지로 둘러쳐야 돼요. 이게 보통 에너지가 많이 들어가는 게 아니에요. 엄청 돈이 많이 들어가고 노력을 많이 해야 돼요. 그러나 이렇게 자기가 에너지를 많이 들여서 멋있는 포장지가 된다면 인간의 포장지는 광주강의에서 이야기했듯이 나라는 것은 누가 있을 때 비로소 나의 존재 의미가 있다? 나 말고 누가 있어야 돼요? 타인이 먼저 존재하고 그 타인에 의해서 좋은 평을 듣기 위해서 그다음에 있는 게 나에요.

그래서 자기 남편이 죽고 난 뒤에 살 마음이 확 없는 이유가, 그것도 한 2개월 동안만 그렇지만, 살 마음이 없는 이유가 내 존재감이 박탈당한 거예요. 나보고 이렇다고 할 수 있는 내 존재를 설명해줄 사람이 없어요. 타인이 없으면 나도 같이 없는 거예요. 같이 손잡고 님아, 같이 강 건너가자고 손잡아도 융통성 없는 천사가 와서 손 팍 떼버려요. 떼버립니다.

그래서 주일 성수 전통을 강조하지 않으면 교회는 문 닫습니다. 자랑할 거리만 나온다면 자랑할 거리 자랑하기 위해서 나오기 때문에 소위 세상에서 자랑할 거리 없는 사람은 점점 더 ‘너희끼리 놀아라.’하고 그다음부터는 교회 안 나오죠. 그걸 주일 오후 때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상위 포식자’ 이게 세상구조입니다.

세상구조는 피라미드 형식이 되어서 상위 구조자, 상위 포식자가 ‘내가 너희를 잡아먹는다.’를 증명하기 위해서 일구어낸 현실이에요. 이게 이 세상의 조건입니다. 이 세상의 조건이거든요. 그런데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상위 포식자를 경험케 했어요. 그 당시 상위 포식자가 누구냐, 이스라엘 멸망할 때? 누구죠? 무슨 나라? 바벨론이죠.

바벨론이라는 상위 포식자 밑에서 노예가 될 때 비로소 세상을 알아요. 세상이라 하는 것은 나의 맞춤, 내가 생존하는 조건을 허락한 적 없고 오직 상위 포식자가 계속 존속하는 조건에 내가 거기에 빌어먹고 사는 거예요. 빌붙어 사는 거예요. 직장생활 하는 사람들 이거 체험하는 중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왜 이렇게 이 세상에 보냅니까? You are 다니엘. 여러분들이 다니엘이 되어야 되기 때문에. 다니엘.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성도는 중첩되어 있죠. 이미 이 땅에 있으면서 소속은 어디 소속이에요? 상위 포식자를 작살낸 그분의 세계잖아요. 그분의 세계를, 진짜 주님이 무덤에서 부활했다는 걸 알려면 그다음 차례 우리가 주님이 겪었던 그 경로를, 주님이 체험했던 그 포식자의 세계를 우리가 평생 죽을 때까지 철저하게 이걸 체험해야 되는 거예요. 체험해야 돼요.

옛날 조선시대나 조선시대 아니라도 그 후 일제시대도 마찬가지지만 시집온 여자의 상위 포식자가 누굽니까? 바로 시집이잖아요. 시아버지, 시어머니. 돌아가신 분은 이미 돌아가셨기 때문에 상위 포식자가 아니지만. 농사를 짓기 때문에 일사분란하게 누가 깃발 흔드는 사람이 있어 따라하지 않으면 농사가 안되죠.

똑바로 심어. 고추 똑바로 심어! 이렇게 지시하면 일당 품꾼으로 시집왔는지, 안 그러면 며느리로 시집왔는지 분간이 안 된다니까요. 초짜 너는 집에서 참이나 만들고 나중에 이고 오너라. 또 논두렁 오다가 넘어지지 말고 제대로. 며느리들 총동원해서 열매 딸 때 열매 따고 전부 다 해야 돼요.

그래서 뭐라 합니까? ‘나는 너를 며느리로 생각하지 않고 딸처럼 생각한다.’ 그게 딸처럼 생각하는 거예요. 왜? 에너지가 없으면 못 사니까. 육신은 에너지가 없으면 감당을 못하니까. 야야, 너 식구 생각해봐라. 시아버지, 시어머니, 시동생 봐라. 전부 다 육신 에너지 덩어리가 얼마냐. 따라서 이 에너지를 계속 보충하려면 자기 자신을 챙기는 것 말고 이 구조(피라미드)에 편입되어야 됩니다. 어쩔 수가 없어요.

그러면 남편들은 촌이 싫다. 도시에 간다. 도시는 노골적이죠, 이 구조가. 이 구조가 노골적이잖아요. 전에 광주에서 그런 이야기했죠. 회사 다닌다는 말은 내 자아를 분질러놓는 거예요. 회사는 내 자아를 일체 용납하지 않습니다. 자아 유지하려면 퇴직해야 돼요. 퇴직해야 됩니다.

회사가 나를 생각해서 알맞은 일거리를 준다? 알맞은 일거리를 안줘요! 월급이 100만원이라면 꼭 150만원만큼의 일을 줘요. 그래야 50을 상위 포식자가 뜯어먹죠. 100만원어치 일하고 100만원 월급 주는 게 어디 있어요? 150 이건 좋은 조건이에요. 200주고 100 뜯어가고. 이것도 양심적이에요. 어떤 데는 300만큼 일주고 200 뜯어가요. 양아치도 그런 양아치가 없습니다. 싫으면 니가 사장하든지. 싫으면 니가 사장해.

그러니까 쌍화탕 박스에다가 돈 5만원 짜리 넣어서 ‘승진시켜주세요’ 하잖아요. 상위 포식자에서 더 높은 상위 포식자. 에너지는 적게 하고 월급은 더 받는 상위 포식자로 승진했다고 또 마을에 누구 검사장 됐다고 플랭카드 걸고. 그것을 혹독하게 겪어요. 마치 촘촘한 거미줄 구조 같아요. 거미줄 구조.

남편들이 퇴근할 때 완전히 허리가 구부러지잖아요. 허리가 구부러진 게 아니고 자아를 분질러놔서 그래요. 자아가 분질러져서 그래요. 그것도 모르고 아내는 와서 “내가 몇 번 말했어. 양말 똑바로 벗어놓으라고.” 지금 양말을 제대로 벗어놓을 힘이 없다니까요. 에너지가 없어요. “벗어서 빨래통에 넣으라 했지?” 넣을 힘이 없다니까, 지금. 스트레스가 머리 꼭대기까지 차올라서. 아이고, 남편이나 아내나.

이 세상의 구조를 소위 뭐가 감당 못한다? 육신이 감당 못해요. 육신이 감당 못하니까 어떻게 돼요? 칭찬받으면 힘이 나잖아요. 그럼 칭찬을 어디 가서 받아야 돼요? 교회 가서 받아야죠. 좀 위로해주소. 한번 적어볼게요. 좀 위로해주소.

“하나님의 복음이 그렇게 만만하니?” “위로받는 게 그렇게 나빠요? 위로받겠다는 게 그렇게 나빠요?” 이러고 있다고요, 탕웨이가. 좀 좋은 말, 긍정적인 말 그거 듣길 원하는 게 그렇게 나쁜 짓입니까? 위로도 없지, 긍정도 없지, 맨날 죽으라 하는데 그 교회 될 리가 없죠. 박살나야 되죠.

이 모든 것이 주일 성수에 모입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모이기를 힘쓰라(히 10:25). 모이기를 힘쓰라. 어떻게 돼요? 나중에 마귀가 가만둡니까? 모일라 했는데 회사에서 급한 전화해서 마지막 서류 다 작성하라 하고. 이게 점점 더 가속도가 붙어요. 모이기 싫어서 안 모이는 게 아니고, 생산된 장점이 아직까지 내 목표량에 미치지 못해서. 그냥 쌩얼에 갈 수는 없으니까 뭘 찍어 바르고 가든지 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럴 기회조차 이 마귀 세상은 용납하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주일 성수가 되게 되면 거기서 위로받고 좋지 않으냐 하죠. 이걸 아셔야 돼요. 이런 것은 여러분들이 그동안 몰랐을 거예요. 이제 알아야 돼요. 교회가 상위 포식자입니다. 왜냐? 모이는 이유는 설교 듣기 위함이 아닙니다. 광고 듣기 위함이에요.

“이번에 주차장 하나 기도응답 받아서 구입했습니다. 그동안 제 목사 월급부터 반 자르겠습니다. 제가 깃발 들지요.” 목사 월급 이천만 원인데 반해도 천만 원밖에 안 해요. “제가 천만 원 내놓을 테니까. 장로님 몇 분입니까? 손들어 보세요. 오천, 오천, 오천, 오천, 오천. 권사님들 오백, 오백, 오백.” 그것도 남녀 차이가 그렇게 나요. 불평등이라. “집사님들 천, 천, 천, 천.”

왜 모이느냐? 광고 듣기 위해서. 광고 전하기 위해서 모이게 하신 거예요. 그냥 하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여기에 뭐가 필요하냐? 성가대가 필요한 거예요. 부아앙~하고 전자 오르간으로 은혜 팍 올려놓고 그다음에 진짜 본 내용은 광고시간이에요. 광고시간.

왜냐하면 목사가 설교 안 듣는 거 알아요. 들을 사람도 안 듣고 자는 사람도 안 들을 줄 알고 아예 AI에서 베껴가지고 그냥 설교하고. AI, ChatGPT 있잖아요. 거기 다 나와요. 원어까지 다 나와요. 그렇게 하고 중요한 것은 광고시간이에요. “이번에 농어촌 교회 열군데 더 선교하기로 했습니다. 한 건당 50만원, 여러분 애 공부시킨다 생각하고…”

또 애를 들먹여야 돈이 나와요. 돈이 나온다고요. “여러분들이 세상 아이들 만들지 말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크게 쓰실 애로 키우려면 하나님께 먼저 바치고 그다음에 애를 특목고 보내든지 다른 데 보내든지 하세요.” 작전이 그거에요. 그럼 부모들은 어디에 약합니까? 부모들의 제일 약점이 뭐에요? 아킬레스 건이 뭡니까? (자식). 자식? 아니죠. 자슥이에요, 자슥! 자식은 집 나간 자식이고, 자슥한테는 못 이긴다고요.

하나님께서 오죽 했으면, 아버지가 누굴 죽여요?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죽이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인간은 혈통을 못 이깁니다. 내가 모은 모든 에너지를 누구한테 준다? 자식이 아니라 자슥한테 주고 그것도 모자라서 자슥의 자슥, 누구? 손주한테 주는 거예요. 손주가 폐렴 걸리면 예수고 하나님이고 눈에 뵈질 않아요. 이번에 아민이가 폐렴 걸렸었어요. 주여, 이럴 수가. 아민이가 얼마나 예쁜데…. 갑자기 이상하게 역사와 전통이 튀어나와버려요. 갑자기. 역사와 전통이.

그러니까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자,가 아니라 이미 역사 덩어리에요, 우리가. 역사 덩어리이고 그 역사는 에너지의 누적으로 근근이 계속해서 이어져온 거예요. 에너지 누적으로. 그것이 창세기 5장에서 아담의 후손으로 이미 제시되어 있었습니다. 그 아담의 후손들, 창세기 5장, 6장 넘어가면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 죽였죠. 다 죽였어요. 왜? 땅에서 난 인간들 내 그럴 줄 알았다.

땅에서 다 죽였어요. 누구도 죽였습니까? 노아도 죽였죠. 노아도. 노아도 죽었다고요. 노아는 죽어서 어디 안에 있었어요? 방주 안에 딱 들어있어요, 방주 안에. 이 방주가 무슨 뜻이냐 하면 일종의 무덤이죠. 땅에서 물에서 떠오른 무덤. 일종의 무덤이죠. 예수 그리스도를 표상하고 있는 겁니다.

다 죽었는데 죽은 채로 살아있으신 분은 예수님밖에 없죠. 부활이니까. 죽었다는 것을 내용으로 담고 부활하신 분이에요. 그게 뭐냐? 예수님의 부활이라고 해도 되지만, 그건 간격이 너무 멀고, ‘언약의 유지’ 이게 합당한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언약을 유지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역사라는 것은 왜 있느냐? 시간이라는 것은 왜 있느냐? 시간은 없어요. 없고 역사도 없습니다. 다만 언약의 그림자로서만 시간이 있고 역사라는 것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거예요. 우리의 인생도 우리의 인생이라는 게 있지만, 우리 인생을 구성하는 이 스토리는 성도한테는 주님의 그림자로서 주님 가신 그 경로에 포함된다는 조건 하에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허락하신 거예요.

허락하시면서 뭘 하게 하느냐? 이것저것 다 체험하는 겁니다. 다시 한번 쓸게요. ‘인생은 그림자다.’ 이사야 45장 15절 읽어보세요.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계시는 하나님이시니”

여기서 두 단어를 생각해봅시다. ‘스스로’라는 말을 했고요. 그다음에 어떻게 계시다? 숨어계시는 분이다. 스스로+숨어계시는 분. 숨어계시는 분이니까 안 나타나는 것은 당연하고. 그러면 나타나는 것은 뭐냐? 그림자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그림자. 달리 하면, 하늘에 붕 떠있는 언약, 하늘에 숨어있는 언약의 그림자가 이스라엘 역사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건 숨어있다는 뜻이고요. 앞에 뭐가 붙어요? ‘스스로’죠. 그럼 출애굽기 3장 14절, 하나님은 자신을 말하기를 “나는 스스로 계신 자다”. 출애굽기 3장 ‘나는 스스로 계신 자’에서 이사야 45장 15절에는 스스로 계시는 것이 어떻게 계시는가? 숨어계시는 분이다. 스스로 숨어계시는 분이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숨어계시려면 나타난 게 있어야 ‘숨다’가 성립될 거 아닙니까. 그 나타난 게 뭐냐? 역사고 나타난 게 시간이 되는 겁니다. 시간. ‘주일 성수가 나쁘다.’라고 하지 마시고 ‘주일 성수하는 것부터 해서 모든 인간들의 시간은 스스로 숨어계시는 하나님의 그림자로서 이 땅에 허용된 것이다.’ 이렇게 정립하시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 입장에서는 뭡니까? 이 역사, 이 시간 거기서 마음껏 만끽해야죠. 살아있을 동안은 그 속에서 마음껏 온갖 체험과 경험들을 다 해주셔야 되는 겁니다. 왜? 주님도 바로 그 경로를 오늘 우리와 더불어서 같이 겪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p.141 봅시다. p.141 중간에 [교회란 인간이 만들어낸 역사의 산물이다. 역사란 권위와 전통의 허구적 대치물이 된다. 시간이라는 작업대 위에서 성경과 인간의 열심히라는 공작기구를 동원해서 예쁘장한 교회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 소망한다.] 이렇게 되어 있죠. 오늘은 [십자가와 주일 성수] 다 하겠습니다.

그 다음에 p.145 봅시다. 거기 보면 안식 후 첫날에 모였다 했잖아요. 그런데 초대교회에서는 매일 모였습니다. 매일 모였어요. 날마다 모여서 떡을 뗐어요. 날마다 모여서. 이상하죠? 그들은 뭐 직업도 없나? 왜 날마다 모였느냐? 낮에 안 모이면 밤에 모이고 수시로 모였다고요. 수시로.

왜 모였느냐? 왜 모였느냐 하면 더 이상 그들이 이 역사와 시간을 진척할 생각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이 모임에서 인생 종치려고 하는 겁니다. 남의 장례식이 아니라 자기 장례식을 자기가 만들어보고 싶은 거예요. 늘.

그런데 늘 모이게 되니까 이 모이는 것을 누가 흩었어요? 누가 흩어버렸습니까? 유대인들이 흩어버렸죠, 유대인들이. 모이지 마. 모이지 마. 다 흩어버렸어요. 흩어버리니까 어떤 효과가 있느냐 하면 복음이 자동적으로 전파되는 효과가 있는 거예요. 끝이다. 자기들끼리 모여서 “끝이다.”하다가 이제 흩어져서 흩어진 저기 먼 나라에 가면서 거기서 “모든 것이 끝났다. 끝날이다. 지금 우리는 매일 끝날을 맞이하고 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럼 그 이야기를 듣고 사람들이 뭐라고 하느냐? “무슨 끝날이 왜 이리 길어?” 왜 기냔 말이죠. “남자라는 이유로 울어볼 날이 왜 이렇게 기냐. 끝날이 지루해 죽겠어. 끝날이 왜 그렇게 길어.” 이렇게 하겠죠.

그런데 여러분들이 끝날이라고 생각한다면 끝날이 지루한 게 아닙니다. 끝날이 즐거워요. 왜냐하면 끝날 자체를 즐기기 때문에. 끝날을 기다리는 게 아니고 끝날 자체를 즐기는 거예요.

자, 성령 받은 신약 성도들이 뭘 생각하느냐 하면 말씀세계죠, 말씀세계. 그들은 어디 안에 있다 했습니까? 이미 말씀세계 안에 있죠. 그러면 말씀세계는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말씀세계는 다 이루었죠. 다 이루었단 말이죠. 그럼 여기 p.145에 보면 성경구절 쫙 나와 있어요. ‘주의 날에’, ‘주의 날에’, ‘주의 날에’,…. 그러니까 이미 매일 주의 날이에요. 주의 날이 계속 되는 거예요. 끝날이 계속 되는 거예요. 끝날이.

표현을 이렇게 해봅시다. 여러분 지금 이해를 못하고 있는 눈치들을 하고 있는데. 어느 백화점이 있어요. 백화점이 장사를 접어요. 접어서 플랭카드에 ‘사장님이 미쳤어요’부터 해서 ‘폐업합니다’. 이제는 폐업합니다. 폐업한다 하니까 사람들은 오늘 폐업하는 줄 알고 십만 원짜리를 만 원에 파는 걸 이참에 사가지고 나올 때 슬퍼요, 기뻐요? 사고 싶었던 십만 원짜리를 만 원에 사니까 즐겁잖아요. 즐거운데 다음 날 가니까 또 폐업이라. 또 즐겁게 와요. 그 다음 날 또 폐업이라. 또 즐겁게 오죠.

그러니까 초대교회 성도들은 모일 때마다 즐거워요. 더 이상 내가 내 인생에 대해서 신경 안 쓰는 존재라는 것을 매일같이 확인할 수 있는 기회 주심을 매일같이 즐거워하죠. 매일같이.

그래서 어제 오후 설교 기도에 그런 게 있었죠. 과거를 삭제하면 미래도 같이 삭제한다. 중요한 것은 지금 주께서 먹이시고 입히시는 참새나 백합처럼 현재 주님께서 먹이시고 입히신다는 사실이 오지도 않는 미래보다 훨씬 더 우리에게 소중한 겁니다.

“내일 염려는 내일 하라.” 이 말은 뭐냐? 내일이 너의 날이 결코 아니라는 거예요. 잊지 말라는 겁니다. 주와 함께 있는 그날이 내일까지 이어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함께 있는 그 날로 충분하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왜? 하나님은 영광만 받아 챙기면 돼요. 우리가 몇 살 더 오래 사는 것은 하나님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너의 존재함을 통해서 내가 감사와 기쁨 얻으면 그걸로 하나님이 우리 구원하는 것은 다 뽑아냈죠. 내일 됐는데 내일 살려줬다는 말은 뭡니까? 내일 돼서 또 쪽쪽쪽 다 뽑아내는 거예요. 다음 날 되면 또 뽑아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하고 주님하고 궁합이 잘 맞아가지고 짝이 잘 맞아서 매일같이 종말을 즐기는 새로운 집단을 만드는 것이 교회다 이 말입니다.

그게 스바냐 1:14, 2:2, 아모스 5:18,… 쭉 나와 있잖아요. 이게 뭐냐? 구약의 말씀에 그날이다. 그날. 마지막 때가 온다. 마지막을 즐기는 거예요. 마지막을. 이래도 여러분 얼굴 별로 기쁜 얼굴도 아니니까 하나 예를 들겠습니다. <톰과 제리>에서 그거 너무 써먹는다만, 미안하지만 또 써먹어야겠어요. 톰이 막 따라오니까 제리가 도망가죠. 도망가다 보니까 너무 바빠서 허공으로 가죠. 아래가 절벽인데. 고양이하고 쥐하고 게임하다가 도망가는데 쥐 한 마리가 허공에 떴어요. 이게 얼마나 즐거워요.

종말을 즐긴다는 말은, 세상은 더 이상 이룰 것 없어요. 말씀은 절벽까지가 말씀이에요. 그다음부터는 뭐냐? 허공은 그 말씀의 완성상태에 이미 놓여있는 겁니다. 완성상태에 놓여있는 거예요.

허공에서 만약에 근심을 한다? 이거는 수상하죠. 아나니아, 삽비라가 사도행전 5장에서 헌금문제 때문에 부부가 의논했죠. 반을 숨기고 반을 드리자, 이렇게 된 거예요. 그런데 반을 숨기고 반을 드리자 할 때, 그들이 즐겁게 했겠습니까, 고민을 했겠습니까? 고민했겠죠. 이게 문제인 거예요.

마태복음 19장에 부자청년이 주님께 왔습니다. 주님께 온 이유와 목적이 있어요. ‘어떻게 하면 내가 영생을 얻겠습니까?’ 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예수님 말씀 듣고 예수님과 함께 돌아갔는데 돌아갈 때 어떻게 돌아갔어요? 기쁘게 돌아갔습니까? ‘야, 큰일 날 뻔했네. 다 빼앗길 뻔했다. 이단한테 다 빼앗길 뻔했다.’ 이렇게 돌아갔습니까? 아니면? 근심하며 돌아갔죠. 사실은 이건 분노에요. 니가 뭔데? 니가 뭔데 돈에 대해서 내놔라 마라 관여하느냐. 이거 내 돈이야.

그러면 종말에 이르지 못한 사람은 자기의 육신을 감당도 못하는 주제에 결국 끝까지 내놓지 못하고 감당하려고 하는 거예요. 감당하려면 에너지가 필요하죠. 에너지는 뭡니까? 이 상위 포식자 구조에서 비굴하게 돈을 벌어야 되는 거예요. 뭐 그렇다고 돈을 안 벌겠다는 건 아니고.

목적이 나한테 있는 거예요. 나한테. 그러니까 자기가 죽지 않는 한 그 사람한테는 종말이라는 것은 없는 거죠. “종말을 믿어라.” “안 믿는다.” “왜?” “내가 아직 안 죽었으니까. 종말은 너무 성급하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마지막 때면 내가 아무것도 못하는데 그러나 내가 엄연히 살아 있잖아. 내가 엄연히 살아 있으면 뭘 해야 돼요? 그림도 그려야 되고 파크 골프 노인네들 하는 그것도 쳐야 되고. 내일 대회 있는데 오늘 종말 되어버리면 주님 재림하면 내가 금상을 못 타잖아. 안 돼~ 아직 내 자랑거리를 다 못 긁어모았는데 안 돼~.

이제 우리가 시간과 작별할 순간이 왔습니다. p.145 끝에 있는 성경구절 봅시다. 베드로후서 3장 8-10절. 참, 이 말씀을 우리보고 이해하라고 주신 말씀 아닙니다. 이해 안 되는 말씀인 것을 염두에 두고 보시기 바랍니다. “내일 염려는 내일 하라.” 이 말은 뭐냐? 내일이 너의 날이 결코 아니라는 거예요. 잊지 말라는 겁니다. 주와 함께 있는 그날이 내일까지 이어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함께 있는 그 날로 충분하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왜? 하나님은 영광만 받아 챙기면 돼요. 우리가 몇 살 더 오래 사는 것은 하나님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의 육신으로서는 경험할 수 없는 시간 체험입니다.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것은 왜 체험이 안 되느냐? 우리가 천년을 안 살아봤어요. 이 말은 뭐냐? 너의 시간 체험을 하나님 쪽에서 무시하는 그 순간이 네가 종말을 맞이해야 될 마음자세라는 거예요.

너를 믿지 마라. 너의 시간감각을 믿지 말라. 그건 너를 버려놓는 거예요. 육신이 체험했던 모든 것은 오히려 육신을 더욱 더 붙잡는 기능밖에 안돼요. 포기할 만한 것을 우리에게 제공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이 납득이 안 되니 우리가 이걸 못 받아들이죠.

그 다음에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이렇게 되어 있어요. 우리 생각은 뭐냐? 더뎌요. 주께서 아직도 오시지 않는 것은…. 그동안 주께서 오신다고 기름 준비 많이 했죠? 그 기름 도로 팔고 싶어요, 진짜. 씽크대에 기름 버리고 싶어. 뭐 기름 준비한 보람이 있어야지. 아직도 안와. 온다, 온다 한 게 벌써 몇 번이에요? 약속을 뭐 지킬만해야 지키지. 안 지켜도 너~무 약속을 안 지켜. 너~무 더뎌요. 더딘 이유가 뭡니까? 기존의 우리의 육신적인 시간의식으로 무장되어있기 때문에 이게 더딘 거예요.

끝으로 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말씀이 직접, 우리가 말씀에 속했으니까, 말씀이 우리 속에 직접 들어 와버린다면 우리에게는 어떤 현상이 일어나겠습니까? 말기 암입니다. 말기 암. 어제 모세 이야기했잖아요. 바구니 안에 있을 때부터 모세는 이미 동동 뜬 죽은 존재에요. 말기 암일 때, 내가 언제 산 적이 있었던가?

왜냐하면 기억은 있지만 이미 과거는 없어진 거예요. 현재 누가 뭐래도 속일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은 내가 죽음과 함께 있다는 이 사실, 이게 말기 암 환자의 거짓말할 수 없는 솔직한 자기 체험이에요. ‘나, 죽는다.’에요. 이 순간에 확 들어오죠, 이 말씀이. 모든 것이 말씀대로 나를 죽은 자로 확정시켜주는군요.

그렇다면 성령 받아 중첩된 사람은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주님이 알아서 계획 잡힌 대로 착실하게 계속해서 부지런히 일하시면서 모든 것이 말씀대로 다 이루어질 겁니다. 따라서 매일이 주님이 일하는 주의 날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지킬 주의 날은 없는 것을 이제 깨닫게 하옵소서. 주님의 스케줄대로 움직이는 것이기에 매일이 주의 날이고 매일이 종말인 것을 우리는 이제 주와 함께 같이, 주님이 즐기는 것처럼 같이 즐길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우리로부터 자유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강의 중 언급된 그림은 첨부파일에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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