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서 25장 2절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 왜 왕 쪽에서, 왕의 지위에선 재판이 필요가 없느냐 하면,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니까 그렇죠.
‘내 멀쩡한 애를 다른 여자한테 빼앗겼다.’ 그것도 하나님이 시키는 일이라면 그걸 감수하라, 이 말이죠. 왕의 위치가 숨어 있는 하나님의 뜻을 백성들을 살핌으로써 백성들의 안목을 왕의 안목까지 높이는 그 역할, 그 역할을 하는 것이 다윗 언약에 속한 하나님의 선택된 왕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 제가 옳았지요? 제가 억울하니 옳은 것 맞지요? 나쁜 짓 한 저 여자가 나쁘지요?’ 상대적으로 저 여자는 나쁘고 나는 옳다는 그러한 것으로 비교되는 세계는 법적인 세계에요. 솔로몬은 법을 능가합니다. 이 숨어 있는 하나님의 뜻이 신약성경까지 이어지거든요.
백성의 수준은 재판이 필요한 수준에서 그들이 살아가고 있고, 솔로몬 수준은 더 이상 재판 같은 것은 일체 필요치 않습니다. 그 레벨 속에 솔로몬이 놓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솔로몬이 재판을 할 때 그 두 여자에게 어떤 결론이 나오는가? ‘너도 나처럼 재판 없는 세계에 살아라.’라는 결론이 나와야 이게 지혜로운 솔로몬의 재판이에요.
로마서 8장 1, 2절의 내용이 포함되지 않으면 어떤 인간도, 소크라테스고 뭐고 어떤 인간도 솔로몬 재판과 같은 레벨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존재 자체가 악이에요. 그러면 주님께서 율법을 준 것은 네 존재에서 비존재로 넘어가라 그 말입니다. 존재에서 비존재로 넘어가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이제는 ‘나는 여기 있다. 뭘 할 것이냐?’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여, 저라는 이 존재에 무엇을 담을 겁니까? 무엇을 실을 겁니까?’라는 것이 우리 존재의 이유에요.
인간은 사용당하기 위해서 피조된 존재입니다. 그런데 마귀가 찾아와서 ‘네 존재는 네가 알아서 책임지고 살아라.’ 하는 거예요. 주님께서의 방법은…, 이스라엘도 마찬가지고 아브라함도 마찬가지고요, 마귀가 들어왔기 때문에 존재는 아무것도 몰라요. 그럴 때 주께서는 “쪼개자, 쪼개자!”
아직 살아 있는 아들을 통해서 두 여자에게 아들이 가는 곳까지 끝까지 가게 하는 거예요. 성경을 볼 때 여러분 끝까지 가세요. 끝 어디까지? 내 존재가 사라지는 곳까지. 나의 이익과 욕심과 탐욕이 다 무의미한 그 순간까지 가자 그 말입니다. 그러면 제대로 묻지요. “주님, 아무 의미도 없는 나를 주께서 어디에 쓰시렵니까?”라는 고백이 나올 때까지.
솔로몬 재판은 하늘의 지혜인데 그 지혜가 뭐냐?
어떻게 하면 육적인 인간, 아버지, 식구, 새끼, 손자, 손녀, 그것밖에 모르는 인간을 어떻게 육신을 벗어나서 왜 저 손자를 주었는지, 왜 남편을 주었고 아내를 주었는지, 왜 내 몸뚱이를 허락했는지, 그것은 로마서 9장에 나옵니다.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저주를 담기 위한 그릇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긍휼하심, “네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 하지만 하나님의 긍휼로 인해서 새롭게 만든 그릇, 그릇이 되는 겁니다.
그 재판이 지금도 한창 이루어지고 있어요. 한창 이루어지고 있다고요. 따라서 성도는 어떻게 사는가? 주님이 주신 하루하루 목숨이 주의 선물이니까 이 선물 가지고 주님의 사랑, 주님 주신 사랑을 내 육신의 욕망에 맡기지 않고 그 사랑을 나타내는 거예요. 그게 뭐냐? 주님의 희생과 거저 주심을 고맙게 여기고 범사에 감사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21장 3절에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라고 했습니다. 그 공간 자체가 더는 율법이 없는 공간이에요. 율법이 없는 공간. 율법과 사망의 법이 없어진 공간이에요. 존재를 깨면서 율법도 같이 깨졌습니다. 이제는 사랑의 법으로 새롭게 만든 새로운 피조물에게는 다시는 눈물이나 아픈 것이 없어요.
고린도전서 6장에 보면 참 기절초풍할 이야기가 나오지요. 2절에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우리는 다 왕같은 제사장이거든요. 왕은 법의 얽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하느냐? 7절에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이 정도 레벨이 되어야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6:9)라는 말씀의 취지를 알아요. 자기 존재 건사하려고, 자기 존재 빛 내려고, 자기 존재를 의롭게 하기 위해서 끝까지 자기 존재와 목숨을 붙들고 사는 사람, 이 사람은 주님의 사랑이 들어오지 않은 사람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도 한창 진행되는 재판 속에서 우리 자신을 벗어나야 비로소 주님의 소유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영광이고 사랑인지를, 큰 선물인 것을 감격하면서 깨닫게 하옵소서. 법에서부터 벗어나고 모든 죄로부터 해방되어 주님과 함께 낙을 누리는 이 큰 복을 이 지상에서 마음껏 감사함으로 펼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