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대구강의]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06 - 매 순간 끊어냄
24,10,07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오늘은 교재 30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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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분명히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 듣는 쪽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목사님 우리가 아무 것도 안 해도 됩니까?" 라고 묻습니다. 그러니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는 행위', 그것을 자기가 의지하면 자기가 구원되는 줄 알고 있는데,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의 행위가 빠져버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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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사님, 그러면 우리가 아무 것도 안 해도 됩니까?
이렇게 "우리가 아무 것도 안 해도 됩니까?" 라고 묻는다는 것은, 여전히 자기 자신만 쳐다보고 있다는 것인데, 그렇지요? 그래서 여기에 보면 "그것은 예수님의 행위가 빠져버린 것입니다" 라고 되어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피조물인 자신을 쳐다볼 것이 아니고, 창조주께서 무슨 일을 하시는지, 그것을 쳐다보면 되는데, 그것을 '믿음'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믿음의 전제조건은 자신의 행위를 쳐다보지 않는 것인데, 즉 자기를 믿지 않는 것이라는 겁니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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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그들은 "성경에 '하라, 하라'가 이렇게 많은데 이걸 다 빼버리면 어떻게 하느냐?" 라고 하면서 걱정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본인이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고 자기가 그렇게 잘못 생각을 했기 때문에 그런 질문이 나온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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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그렇게 걱정을 한다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믿음이 없다는 것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모든 인간은 이미 종교를 가지고 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즉 이미 종교인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종교인은 믿음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데, 그러니까 "모든 인간은 믿는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렇게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믿는데, 그러면 무엇을 믿는고 하니, 자기 능력을 믿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것을 알까요? 모를까요? 당연히 아시는데, 모든 인간은 종교인으로 믿는데, 자기 능력을 믿는다는 것이죠. 그러면 예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인간이 자기 능력을 믿는 것을 무엇으로 전환시켜주시는고 하니, 피조물이 자기 능력을 믿는 것이 아니고, 창조주의 능력을 믿도록 해주신다는 겁니다.
* 믿음과 행위 !!
로마서에서는 인간이 이렇게 자기의 능력을 믿는 것을 '행위' 라고 하고, 반면에 예수님께서 하신 행위를 믿는 것을 두고는 '믿음'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인간의 믿음에서는 행위가 나오고, 예수님의 행위에서는 믿음이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이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이 인정하는 믿음이라고 할 수 없는데, 그것은 행위라는 말이죠. 즉 자기 종교에 예수님을 끌어당긴다는 겁니다. 여전히 자기를 믿고 있으면서, 여기에 내용상 예수님을 하나 더 추가시킨다는 것이죠.
그렇게 함으로서 계속해서 자기를 믿는 믿음을 유지하려고 하는데, 그게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종교성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아예 처음부터 종교인으로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즉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은 어떻습니까? 행위로 무장이 되어있고, 믿음은 전혀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택한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십니까?
선물로 주시는 것이 있는데, 그게 바로 믿음이라는 겁니다. 이것을 두고 "복음을 믿음으로서 구원을 얻는 능력이 생긴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어제 주일 낮 시간에 했던 로마서 1장 16절과 17절의 의미라는 것이죠.
(롬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그러니까 인간에게 영생은 없는데, 그 없는 영생을 하나님이 주시는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 선물로 온 믿음을 복음과 매치를 시키면, 그게 영생을 얻는 구원의 능력이 된다는 겁니다. 복음은 예수님 담당인데, 그런데 그 예수님의 행위를 믿는 믿음조차도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서, 그게 에베소서 2장 8절에 나온다는 말이죠.
(엡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러면 우리가 평소에 알고 있던 것은 무엇입니까? "나는 내가 사는 대로 살다가, 교회에 나와서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서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을 그대로 믿어버리게 되면, 그러면 나는 구원을 받는다" 라는 것인데, 하지만 이것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을 선물로 받게 되면, 그러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고 하니, 자기 행위를 의지하고 믿는 것, 바로 그것이 파괴가 된다는 것이죠. 즉 자기 종교의 파괴라는 겁니다.
* 모든 인간은 종교인이다 !!
여기서 "모든 인간은 종교인이다" 라는 것을 조금 더 세밀하게 해보면, 그러면 그 다음에는 "모든 인간은 자기를 포기할 의사가 없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더 나가면 "모든 인간은 자기 행위를 포기할 의사가 없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성경에서 "무엇을 하라" 라고 하면, "그것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지?"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것은 자기가 만든 종교를 지키기 위한 자기의 본성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란 말이죠. 그게 인간의 행위인데, 물론 여기에는 자기 생각도 포함이 된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은 그것을 포기할 마음이 전혀 없는데, 그래서 좋다는 것은 다 끌어당긴다는 것이죠.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에 간다" 라고 하니, "오케이, 좋았어" 라고 하면서 지기 종교에 편입을 시킨다는 겁니다.
* 저게 바로 이단이구나 !!
이러한 경향은 교회에 가면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 목사부터 비롯해서 장로와 집사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다 나온다는 말이죠. 거기에 가득 가득 담겨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거기서 차이를 느껴야 하는데, "저게 바로 이단이구나" 라고 하면서 말이죠.
여기서 더 나아가면, "모든 인간은 종교단체를 만들고 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런 인간들이 만든 종교의 공통점은 과연 무엇일까요? 이것을 우리가 모른다고 할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태어나서 이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말이죠.
우리 인간은 자기의 행함을 가지고 자기를 구성하면서 살아왔다는 것인데, 저와 여러분은 이것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믿음을 선물로 받지 않은 자들은 이것밖에 없다는 겁니다.
* 사람은 사람다워야 한다 !!
인간들의 가장 기본적인 공통점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을 지금부터 설명을 해드리겠는데 말이죠. 그것은 바로 "사람은 사람다워야 한다" 라는 것인데, 그것이 공통점이라는 겁니다. 불교, 기독교, 천주교, 이슬람교 등 모든 종교가 다 그러하다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바리새인, 사두개인, 그리고 서기관과 장로들인데, 이들 그룹이 결정적으로 한 일이 무엇입니까? 물론 밥을 먹고 잠도 잤지만, 결정적인 것은 누구를 죽인 것인데, 누구를 죽였습니까?
* 그들은 하나님을 살해했다 !!
그들은 하나님을 살해했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으로 보았는데,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의 베드로의 신앙고백 이후에, 제자들에게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마 16:20)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어제 주일오후 시간에 이 대목을 이야기했지 싶은데, 메시야라는 것은 하늘에서 내려오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건지기 위해서 오셨고, 그들 외에 다른 민족들은 심판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말이죠. 다니엘서를 비롯한 여러 곳의 성경말씀에서 그런 분을 메시야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번 겨울 수련회는 다니엘서를 하지 싶은데, 인자와 같으신 분이 하늘에 계시다가 마지막 심판을 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다는 말이죠. 하나님의 언약백성인 이스라엘은 건지시고, 그 이외에는 다 심판하기 위해서 오시는 분, 그분이 바로 메시야, 즉 그리스도라는 겁니다.
* 예수님은 곧 하나님 !!
세례요한의 경우에도 "내 뒤에 오시는 분이 심판을 한다" 라고 했고, 그리고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라고 직접 말씀을 하셨다는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자기 정체를 분명히 밝히셨는데, 즉 "나는 하나님이다" 라고 하셨는데, 그런데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과 장로들이 주동해서 그 하나님을 살해했다는 겁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았는데, 과대망상증 환자로 보고 죽어도 상관이 없다고 여겼다는 것이죠.
* 예수님은 절대 메시야가 아니다 !!
그들이 예수님을 어느 정도로 무시했는고 하니, "바라바라는 살인강도는 살려줄 수 있어도, 예수는 죽이는 것이 맞다" 라고 할 정도로, 그렇게 자기들을 해롭게 하는 살인강도보다도 더 못하게 보았다는 겁니다. 요즘 뉴스에, 화가 난다고 길을 가던 여고생을 죽인 놈이 나오는데, 그런 정신병자보다도 더 못하다는 말이죠.
그들은 장담을 했는데, 예수님은 그냥 정신병자이고 과대망상증 환자이지 메시야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이 체포가 될 때 긴가민가했다는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을 죽인 놈들이나 제자들이나 별반 다를 바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지막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라고 하셨는데, 주님은 인간을 너무나 잘 아신다는 것이죠. 모든 인간은 이미 종교인이고, 즉 자기가 행한 것에 의해서 살아가기 때문에, 자기가 납득이 되어야 비로소 믿는다는 겁니다. 우리는 아담에서 그렇게 태어났다는 말이죠.
사도바울이 "인간의 말과 지혜로 지혜로 가르친다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다" 라고 했는데, 왜 그런 말을 했겠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성령을 받아야, 즉 믿음을 선물로 받아야 한다는 것이죠. 정성을 다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고전 2: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고전 2: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 인간들은 왜 예수님을 믿지 않는가?
그러니 먼저 우리는 이들이 왜 예수님을 믿지 않게 되었는지, 그것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죠.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사람은 사람다워야 한다" 라는 것으로 철두철미하게 자기를 무장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인간은 종교인인데, 그 종교 안에서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내가 사람이라고 하면 최고 경지의 사람, 가장 완벽한 사람, 그 누구에게라도 흠을 잡히거나 욕을 얻어먹지 않을, 신이나 인간은 아니더라도 인간으로서는 최선의 도리를 다 하는 사람이 되자" 라고, 그것을 인간들은 자체적으로 경쟁하고 있다는 겁니다.
지금 여러분이 다니고 있는 교회가 바로 이 모습이 아닙니까? 인간은 여기서 벗어날 수가 없는데, 남들보다 뛰어나서 남들에게 존경을 받는 인간이 되고 싶다는 말이죠. 존경까지는 아니더라도 "저 사람은 사람답네" 라고 하는 평가를 잃어버리지 싶지 않다는 겁니다.
그게 "사람은 사람다워야 한다" 라는 것인데, 이것이 우리 인간들이 만든 종교의 공통점이라는 말이죠. 그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인간은 자신의 본분을 지켜야 한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 인간은 자기를 몰라 !!
이것을 제가 강조하는 이유가 다 있는데, 사람들이 평생을 교회에 다니고 성경공부를 해도, 여전히 자기 내부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모른다는 말이죠. 계속해서 성경지식을 축적하고, 그리고 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면서 남들에게 존경을 받기도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라는 것에 신경을 쓰다가보니, 정작 중요한 "내 안에 어떤 것이 들어있는가? 라는 그것에 대해서는 전혀 간파하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자기 자화상에 대해서는 말이죠.
물론 그런 것은 CT촬영을 해도 전혀 나오지를 않는데, 설령 촬영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관찰하는 것이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그래서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관찰자가 엉터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 짐승과 비교해서 !!
그래서 우리 인간은 "사람은 사람다워야 한다" 라는 것을 무엇으로 결정하는고 하니, 자기는 아무리 사람답다고 하더라도 외부에서 아니라고 해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를 짐승과 비교를 한다는 말이죠. 즉 짐승이 살아가는 것과 비교해서, 차이가 나게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 장로들의 주장은 무엇인고 하니, 한결같이 "어떻게 사람이 개나 돼지처럼 사는가? 이 악한 자들아, 너희는 저주가 마땅하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들은 이 주장으로 당시 유대사회를 하나로 통일시켰는데,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다 있다는 겁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외부에서 이런 주장을 하니까, 거기에 설득이 된다는 말이죠. 자기 안에 들어있는 것을 자기가 파낼 때는 모르는데, 그런데 그것을 남들이 이야기를 해주니, 거기에 호응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 맞다, 게보린 !!
그게 바로 "맞다, 게보린!" 이라는 것인데, "그래, 맞아. 나는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어" 라고 한다는 말이죠. 인간이 되어서 어떻게 자기가 화가 난다고 해서, 일면식도 없는데 칼로 죽일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회사에 취직을 하면 약속된 시간에 출근을 해야지, 지각을 하면 안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자꾸만 지각을 하면서 핑계를 댄다고 하면, "그러면 나가라" 라고 하는데, 그것은 바꾸어 말하면, "너는 사람도 아니야" 라는 소리라는 겁니다.
저의 경험에 의하면, "어떻게 남자 화장실에서 여자가 담배를 피우는가?" 라는 것인데, 한 번은 화장실에 들어가니 여중생으로 보이는 학생이 담배를 피우고 나오더라는 겁니다. 그게 좋게 보일 리가 없는데, 그 집의 가정교육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 너무나 자연스럽기에 !!
여러분, 지금 이게 굉장히 어려운 말입니까? 오히려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인데, 그런데 그것이 문제가 된다는 겁니다. 사람들의 이러한 평가, 즉 "인간도 아니다. 짐승과도 같다" 라는 것이, 자기가 한 평생을 살아오면서 구축이 되어있는 윤리와 도덕의 기준에 의해서 이런 평가를 내린다는 말이죠.
중국 사람들이 덥다고 웃통을 다 벗고 돌아다니는데, 그게 우리나라의 제주도에 와서 그렇게 하면 눈살을 찌푸리지만, 자기 나라에서는 아닐 수 있다는 겁니다. 인도 사람들이 밥을 수저가 아닌 손으로 먹는데, 그것을 안동 권씨 집안에서 본다면 뭐라고 할까요? "저게 짐승도 아니고 뭐야?" 라고, 대번에 짐승이라는 말이 나온다는 것이죠.
* 굳이 메시야는 필요가 없어 !!
그런데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사람이 서양에 가게 되면, 역시 미개하다는 생각을 그들이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미개하고 미개하지 않는 것이 진리입니까? 진리는 따로 있습니까? 짐승같이 살지 않는 것이 진리입니까? 진리는 따로 있습니까?
분명히 진리는 따로 있는데, 그런데 인간들이 만든 인간종교에서는 짐승보다도 나으면, 그것이 진리가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인간답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굳이 메시야는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기의 이성과 지성과 같은, 그런 윤리적이 도덕적인 감각으로도 얼마든지 창조주가 만든 피조물에 합당하게 재창조가 되고, 새롭게 될 수 있다고 자부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게 인간이라는 말이죠.
지금 이것이 오늘날의 현실, 특히 교회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것을 성경에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들이 누구를 죽였습니까? 일개 인간이 아니고,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죽였는데, 심판주를 말이죠.
그러하면 이것 자체가 분명히 문제가 있는데, 그러면 여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아무리 교회에 다고 오래 살아도. "그게 문제가 있으니 다른 곳으로 탈출해야 한다" 라고 했을 때, 그 '다른 곳'이 없다는 말이죠.
여기에 충실하고 싶은 것이지, 이것말고 다른 원칙을 이야기해주는 사람도 없고, 거기로 갔다는 사람도 없고, 그게 인간의 전부라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들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 그들의 의식 안에서 "누가 더 여기에 완벽을 달성하는가?" 라고 하는 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저 사람이 더 인간 같은가? 내가 더 인간 같은가?" 라고 하는 보이지 않는 비교와 경쟁 의식, 즉 "누가 더 완전한가?" 라는 것인데, 그리고 그런 것 외에는 달리 다른 대안도 없다는 겁니다.
이것 전체가 곧 인간의 행함의 세계인데, 그래서 복음을 전하면 상대방이 뭐라고 합니까? "그러면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것인가?" 라는 반박이 튀어나온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그런 구조 안에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물론 처음에는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소리가 좋게 들릴지 몰라도, 만약에 그렇게 아무 것도 하지 않다가 마지막에 심판을 받아서 박살이 나면 어떻게 하느냐는 말이죠. 책임도 지지 못하면서 그런 말을 왜 하느냐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궁금한 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아니라고 하면, 그러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느냐는 말이죠. 이러한 원칙 아래에 있는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있는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다른 세계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도대체 어떤 세계냐는 겁니다.
만약에 지금까지 이야기한 이런 세계에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아니고, 격려를 해주시면서 하늘나라로 다시 갔다고 하면, 그러면 우리는 지금까지 사람들이 살아온 것처럼 살면 된다는 말이죠. 하지만 예수님의 세계는 이런 세계와 대립이 된다는 것인데, 그러니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 새로운 피조물의 세계 !!
그러면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는 무엇이냐?" 라는 것인데, 그것을 제가 말씀을 해드리겠습니다. 질문은 던진 자가 답변을 하는 것이 맞는데, 그렇지요? 바로 그것은 새로운 피조물의 세계라는 겁니다.
여기서 '새롭다' 라고 하는 것은 수리나 개선이 되지 않는다는 의미라는 말이죠. 그러니 기존세계에 대한 완전한 단절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고쳐지거나 개선된 피조물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겁니다.
바로 이 새로운 피조물의 형상, 그러니 이것은 인간의 형상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었다는 것인데, 그런 기존의 인간의 형상이 아니고, 새로운 피조물의 형상을 우리에게 몸소 보여준 분이 계신다는 말이죠.
* 하나님의 형상, 예수님 !!
다시 말해서, "제대로 된 하나님의 형상은 이것이다" 라고 하면서 이 세상에 오신 분이 계신다는 겁니다. 그분이 누구인고 하니, 골로새서 1장에 15절에 보면,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라고 한다는 말이죠.
(골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그런데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기의 형상을 따라서 지었다고 했는데, 즉 하나님의 형상을 창조했다는 겁니다. 인간이란 이름으로 말이죠. 그게 천사는 아니고 인간이라는 겁니다.
(창 1: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그런데 그 인간의 형상은 흙이 되고 마는데, 뱀의 형상이 되어서 취소가 되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창조의 완성을 위해서 제대로 된 하나님의 형상을 보여주는 분이 계시는데, 그 형상을 담아서 오신 분이 누구인고 하니, 바로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그게 아니고, 예수님이 이 땅에서 오셔서, 수리, 개선, 고침, 그러한 것을 일체 소용이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그런 것은 인간이 인간다워야 하는 세계에서 통용이 되는 것인데, 그래서 인간들은 부지런히 그것을 시도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신이시여, 나를 고쳐주세요" 라고 하는데, 흔히 그것을 '치료한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죄를 지은 나를 죄를 짓지 않지 않는 나로 개선시켜달라" 라는 것인데, 마치 중고 자동차를 잘 고쳐서 새 자동차로 만들 듯이, 그렇게 해달라는 겁니다.
자기를 버리지 말고, 자기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으로 개선이 되고 회복이 되게 해달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 회복은 통일교나 신천지에서 많이 주장하는데, 그리고 침례교에서도 한다는 겁니다. 그러고 보니 요즘은 장로교나 감리교에서도 하고 있는데 말이죠.
* 강의를 처음부터 다시 해보면 !!
강의를 처음부터 다시 해보면, 모든 인간은 종교인인데, 그러니 그 종교인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겁니다. 자기가 종교의 주인이라는 것인데, 그러니 신이든 누구든 자기를 위해주어야 한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자기 종교이니 말이죠.
그래서 인간들은 "제가 무엇을 행하면 됩니까?" 라고 하는데, 무엇을 행하면 자기가 짐승같이 되지 않고 인간이 되겠느냐고 자꾸만 묻는다는 겁니다. 천주교, 그리고 감리교나 기독교장로회(기장)에서 그런 것을 많이 하는데, 그래서 동성애도 그쪽에서 옹호를 한다는 말이죠. 그것은 인간에 대한 연민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는데, 인간이 불쌍하다는 겁니다.
일종의 동지애인데, 그들은 외로운 자들이라는 말이죠. 외롭다고 하는 것은, 비록 가진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사는 것이 고달프다는 의미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강도를 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서, 그렇게 선한 사마리아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합동측은 무엇인고 하니, "죽으면 지옥에 가니 교회에 나와서 구원받아라" 라는 것인데, 간단하다는 겁니다. 물론 여기서 핵심은 교회라는 말이죠. 그러면 고신측은 무엇인고 하니, "우리가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 유일한 교단인데, 우리가 제시한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렇게 하면 깔끔하게 정리가 되는데, 그러면 여호와증인이나 신천지는 무엇인고 하니, "우리만이 택한 백성이다" 라는 겁니다. 지방교회도 그러하고 말이죠. 그러니 우리 집단에 와서 모든 것을 다 바치라고 한다는 겁니다.
* 나는 완전한 인간이 되고 싶어 !!
방금 교단 이야기를 했는데, 이들 주장의 공통점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완전한 인간이 되는 것이란 말이죠. 그 어떤 방식을 채택해도 목적은 하나인데, 자기가 완전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짐승처럼 살지 않는 것인데, 그러면 짐승처럼 사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죄를 짓고 사는 것인데, 그러니 자기는 거기서 빠져나오고 싶다는 것이죠. 자기는 그들보다도 더 높은 경지의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인데, 하지만 그게 바로 바리새인들이고, 그것이 하나님을 죽인 자들의 의식이라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감을 잡아야 하는데, 그 누구도 여기서 예외가 될 수 없다는 말이죠. 남들보다 더 위대한 인간이 되고 싶은 욕구, 그것은 바로 모든 인간은 이미 자기를 신봉하는 종교인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도 교회도 다니지 않고 절에도 다니지 않는 무신론자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무신론자는 없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자기가 이미 신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물론 지금은 그런 상태가 되지 않아서 기분이 나쁜 것이지, 자기도 언젠가는 신이 된다는 것이죠.
* 시간을 벗어난 새로운 피조물 !!
지금 '새로운 피조물'에 대해서 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준비하신 새로운 피조물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시간을 벗어나는 것이다" 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말은 간단하지만, 그 내용은 복잡하고 어렵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 그렇게 구성이 되는데, 그러니까 시간 속에 있다는 것은, 계속해서 실선으로 왔다가 현재에서 미래로 가는 것은 점선이라는 겁니다. 아직 남은 것이 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그만큼 자기는 계속해서 성장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으로, 그게 시간 안에 있는 존재의 특징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새로운 피조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간이 아닌 예수님이 오셔서 만든 피조물인데, 예수님은 시간 바깥의 존재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미 자기가 죽고 사흘만에 부활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그래서 그것을 미리 제자들에게 말씀을 하신다는 것이죠.
(마 16: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합니까? 그런 각본을 창세 전에 미리 아버지와 같이 짰다는 겁니다. 그래서 시간에 구애를 받지 않고 넘어섰다는 말이죠. 그렇게 넘어선 예수님이 곧 하나님의 형상인데, 그러면 주님이 그 새로운 피조물에 무엇을 집어넣는고 하니, 예수님 자신을 거기에 새로운 피조물로 찍어버린다는 겁니다.
그러한 성도의 특징이 시간을 벗어나는 것인데, 물론 예수님은 이 땅에서 시간 속에 계셨지만, 즉 처음에는 아이였다가 청년으로 성장을 하셨다는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은 시간 안도 알고 시간 바깥도 아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죄가 있는 육신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으니 말이죠.
그렇게 시간 속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시간 바깥도 다 아신다는 겁니다. 그것과 동일하게 새로운 피조물이 된 성도는, 시간 안에 살고 있으면서 동시에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는 말이죠.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았다는 겁니다. 그렇게 두 가지를 다 중첩되게 가지고 있는 자가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이죠.
(엡 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엡 2: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
그러니 "나는 짐승처럼 살기 싫어" 라는, 자기의 개인적인 종교놀이에서 빠져나와야 하는데, "나는 저 사람보다 훌륭하고, 저 사람보다 기도를 잘해" 라고 하는 짓거리는 그만 하자는 겁니다. 둘 다 시체인 주제에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하던 평소의 고민거리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들이냐는 겁니다.
이것을 "모든 시간 안에 일어나는 일은, 나의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이다" 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을 새로운 피조물인 성도만이 알 수 있다는 것이죠. 부활하신 주님이 시간 안에서 모든 것을 관장하신다는 겁니다.
헤어스타일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괜찮은데, 왜냐하면 곧 마음에 드는 미장원이 나온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것은 자기 일이 아니고 주님이 하신 일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조건이 있는데, 그 나라와 의와 관련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주님이 알아서 챙겨주시는데, 우리는 내일 일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너는 나의 행위만 믿어라. 너의 행위는 믿지마" 라는 것인데,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라고 하는 것도 믿지 말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선물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믿습니다' 라는 것도 우리 안에 꽂혀서 들어오는 주님의 일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성도는 어떻다는 겁니까? 기존의 있던 '나의 일'과 꽂혀서 들어온 '주의 일'이 시간을 초과할 것인지, 아니면 그 미래에 자신을 성장시킬 것인지, 그 대결구도가 성도 안에서 계속해서 일어난다는 것이죠.
그러면서 그런 대결구도가 바깥으로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모양새로 드러나게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증거한다는 것은 자기 완전은 전혀 기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인데, 거기서 완전은 무슨 얼어죽을 완전이냐는 말이죠.
* 1,000가지의 반찬을 만들어주는 짐승 !!
제가 옛날에 본 다큐가 생각나는데, 남편이 체육교사인데 암에 걸렸다는 겁니다. 그래서 시골에 가서 그 남편을 보살피는데, 밑반찬이 무려 1,000가지라는 말이죠. 제가 볼 때 우리나라에서 남편을 섬기는 아내로서는 탑이지 싶은데, 그런데 만약 그 다음 해에 1,002가지를 해주는 아내가 나타난다면, 그 사람은 그만 2등으로 밀려버린다는 겁니다.
그것이 곧 인간세계인데, 이 인간 세계에서는 남을 이기면 뿌듯한데, 그런데 만약에 자기보다 덜 짐승이 사람이 오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는 졸지에 짐승이 되고 마는데, 남편에게 1,000가지 반찬을 만들어주는 짐승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기가 죽어서 산다는 겁니다.
* A : 나는 시어머니에게 한 달에 한 번씩 꼬박꼬박 용돈을 드린다.
* B : 참 대단하네. 얼마를 드리지?
* A : 하얀 봉투에 깨끗한 돈으로 3만원을 드린다.
* B : 치워라. 나는 2달에 한 번이지만 20만원을 드린다.
이렇게 되면 3만원을 드리는 것이 그만 짐승이 되고 말았는데, 물론 너무 적기는 적은데 말이죠.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인간은 어떻게 나옵니까? 더욱 더 괜찮은 인간이 되기 위해서, 용돈을 5만원으로 올려드리든지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뭐라고 할까요? "세리와 창기가 너보다 먼저 천국에 간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 세리나 창기가 되려고 애를 써야 합니까? 그것은 아닌데, 그래서 예수님은 "많이 용서를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한 일의 느낌보다도 주님이 자기에게 넣어준 일에 대해서 흠뻑 몰입이 되고, 거기에 반해 버리는 것인데, 자기를 잃어버릴 정도로 말이죠. 그런 자는 주님만 쳐다보고 살아간다는 겁니다. 주님만을 말이죠.
* 우리는 늘 시간 속에서 죄인으로 !!
바로 그런 모습이 되게 하기 위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하신 작업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는 늘 시간 속에서 죄인으로 몰아세운다는 것인데, 시간 속에서 말이죠. 시간 바깥에서는 이미 의인이고, 시간 속에서 그렇다는 겁니다.
여기서 고린후서 4장을 보겠는데, 10절과 11절입니다.
(고후 4:10)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 4:11)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 10절에서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라고 하는데, 이게 시간 속의 일이라는 말이죠. 시간 속의 중첩된 일이 우리에게 왔을 때, 그것이 주의 일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는고 하니, 그때 바로 이 말씀이 기준이 된다는 겁니다.
* 성도는, 예수 안에서 날마다 죽음을 !!
방금 시간 속에 있는 우리는 언제나 자기 위주로 살아가기 때문에 죄인이 된다고 했는데, 그래서 주님께서 이런 죄인을 처리하는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까, 우리로 하여금 날마다 죽게 하신다는 말이죠.
여기서 죽는 장소가 중요한데, 예수 안에서 우리를 죽게 하신다는 겁니다. 예수님 안에는 우리가 반복해서 죽어야하는 블랙홀, 혹은 우리의 관, 혹은 묘지를 주님이 친히 준비해주셨다는 것이죠. 우리가 누울 수 있는 곳을 말이죠.
외손주가 집에 오면 항상 눕는 곳이 있는데, 할머니가 이불을 개어놓은 곳에 눕는다는 겁니다. 주님께서 그런 자리를 따로 마련해주셨는데, 그것을 신약에서는 '세례' 라고 하고, 구약에서는 '할례' 라고 한다는 것이죠.
그러한 할례와 세례의 의미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죽을 곳을 자기가 마련한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는 친히 자기 안에 우리의 자리를 마련해주셨다는 것인데, 그런 주님의 친절함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겁니다.
* 인간은 다 계획이 있어 !!
그러면 시간 속에서 우리의 삶은 무엇인고 하니, 새해가 되면 1년 스케줄이 나오는데, 그래서 달력에 표시를 한다는 말이죠. 만약에 손주가 수능을 친다고 하면, 할아버지가 되어서 가만히 있으면 안 되고 기도로서 응원을 하고 싶다는 겁니다.
그런데 계획이 있으면, 우리는 자기 행위를 믿기 때문에, 그 계획을 달성하기 위해서 약간이라도 자기 행위를 첨가하려고 한다는 말이죠. 물론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믿기는 믿는데, 그런데 자기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좀 섭섭하다는 겁니다. 먼저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보다 더 수월하게 달성하기 위해서 조금의 힘이라도 보태려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시간 속에서 우리는 일단 계획을 세우는데, 그런 목표를 계속해서 세워나간다는 겁니다. 오늘 성경공부를 마치고 나면 점심을 먹는데, 그렇게 점심을 먹고 나면 또 각자의 계획이 다 있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그렇게 계속해서 계획이 있어주어야, 그게 자기가 살아있는 이유가 된다는 겁니다.
* 모든 것은 주님의 일 !!
그런데 이 고린도후서 4장 10절과 11절에 의하면, 우리가 점심 때 추어탕을 먹는 것이 자기 일입니까? 주님의 일입니까? 주의 일인데, 그런데 그것을 우리는 시간 속에서 자기 목표로 규정을 했다는 말이죠.
여기서 주님께서는 개입을 하셔서, "그것은 네가 정한 것이 아니고, 너를 통해서 내가 정했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아니, 내가 정했는데?" 라고 하게 되는데, 그러면 주님께서는 "너는 죽어야 한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주님이 정하신 일을 인간이 가리우니까, 주님께서는 그 가리는 '나'를 죽여서 없애버리신다는 겁니다. 그래야 현장에서 주님의 일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런 방식을 시간 속에서 반복하는 것, 그게 성도가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일상이라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내일 병원에 예약이 되어있다고 한다면, 그러면 누가 봐도 그것은 사람의 일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막상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기 위해서 침대에 눕게 되면, "하나님이 나를 아프지 않게 하면 되는데, 왜 이렇게 병원에 오게 하셨지?" 라는 생각이 든다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진작에 죽어야 하는데, 주님께서 지금까지 살려주셨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주님의 살아있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인데, "내 안에서 주님이 활동하신다" 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말이죠. 그래서 점심시간에 추어탕도 먹게 하고, 병원에서 검사도 받게 하신다는 겁니다.
*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구나 !!
그러면 우리는 주님이 하시는 일에 어떤 역할을 합니까? 조력자가 아니고 방해꾼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결국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자가 바리새인들이나 로마군인들이 아니고,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겁니다. 거기에 우리가 합세를 했다는 것이죠.
그러니 우리는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하면서 오직 예수님의 공로만을 드러내는 것, 그것이 성도의 남은 인생이라는 겁니다. 우리의 육신이 다할 때까지 말이죠. 그러니 의외로 간단하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간단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이렇게 긴긴 이야기를 했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인가요?" 라고 하는, 그야말로 흔하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 그게 다 필요해서 나오는 이야기라는 겁니다.
* 할례와 새로운 피조물의 관계 !!
그렇다면 먼저 할례 이야기를 해보겠는데, 할례와 새로운 피조물의 관계에서 대해서 말이죠. 할례는 끊어내는 것인데, 개선하고 수리하고 개량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만약에 할머니가 사랑하는 손주를 천국에 보내고 싶다고 한다면, 그것은 누구의 계획입니까? 주님이 그런 마음을 주셨으니 주님의 계획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그 다음부터 그 아이에게 "인간은 죄인이야" 라고 하면서 가르치고 하는 것은 자기 행함이 가동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손주가 할머니의 정성이 너무 고마워서 할머니가 이야기하는 것을 다 믿는다고 한다는 말이죠. "예수님의 피를 믿어야 한다" 라고 하면, "예, 믿겠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우리가 기대하는 바인데, 그런데 주님의 뜻은 무엇인고 하니, 끊어내는 것이란 말이죠. 피를 믿는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닌데, 성경을 달달 외워도 안 된다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아담의 노선을 끊어내는데, 그 손주의 아버지가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예수님과 형제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을 누가 방해하는고 하니, "이것은 내 자식이야" 라고 하는 혈육이, 즉 육신이 거기에 개입을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주님께서는 그 손주를 구원하기 위해서 "내 자식이야" 라고 하는 의식을, 그렇게 일가친척을 비롯한 혈육을 잘라내는 작업을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할례를 행했다고 하는 것은, 할례를 할례답게 하기 위한 무구한 역사, 즉 사건들이 할례를 중심으로 해서 벌어진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게 바로 이스라엘 역사라는 겁니다. 할례가 중심이라는 것인데, 아마 이게 쉽게 납득이 되지 않을 수가 있는데 말이죠.
* 각각의 단면을 통해서 전체를 !!
우리가 이러한 성경공부모임을 통해서 알아야 하는 것은, 이 한 시간을 통해서 전체를 다 알아서, 지금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어야 하는데, 그것이 목표라는 겁니다. 물론 저의 목표인데(ㅋㅋ), 아무튼 지금 당장 죽어도 아쉬움이 없어야 한다는 말이죠. 일부가 아닌 전체를 다 알아야 한다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할례 중심으로 보게 되면, 세상 전체를 어떻게 다 알 수 있느냐는 겁니다. 이것을 믿음 중심으로 보게 되면 세상 전체를 어떻게 알 수가 있느냐고 할 수 있는데, 또는 땅 중심으로 보게 되면, 이 세상 전체를 어떻게 다 알 수가 있느냐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마치 다이아몬드에 여러 면이 있어서, 이쪽으로 봐도 전체가 보이고 저쪽으로 봐도 전체가 보이는 것과도 같다는 말이죠. 우리가 살아있는 이상, 우리는 전체를 다 볼 수 있는 단면들에 접촉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여기서 갈라디아서 6장 12절을 보겠는데, 누가 읽어보세요.
(갈 6: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라
* 할례 받음과 십자가 !!
지금 사도바울이 하는 이야기가 난해하기가 짝이 없는데, 지금 사도바울이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라고 하는데, 이것은 할례를 받은 자들을 의미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렇게 할례를 받은 자들은 어떻게 나온다는 겁니까?
"나는 하나님에게 인정을 받았다.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했다. 나는 할례를 받은 택한 백성이다. 그러니 메시야가 오시면 구원을 받는다. 하지만 할례를 받지 않은 자들은 다 지옥에 간다" 라고 한다는 것인데, 그게 유대인들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사도라고 하면 이들에게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 할례는 소용이 없어. 이미 다 때가 지났어. 할례를 받은 받지 않은 이방인들도 구원을 받았어. 그러니 그것은 이제 잊어라" 라고 하지 싶은데, 그 정도로 이야기를 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말이죠.
그런데 사도바울은 뭐라고 합니까? 그 다음에 보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라" 라고 하는데, 그러면 굳이 이 말을 왜 집어넣느냐는 겁니다.
오늘 강의를 다시 생각해보면, "그러면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인가?" 라고 했을 때, "주님께서 일하셔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즉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주님께서 일하게 하시는 것이 주의 일이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라고, 그렇게 정리를 하면 된다는 것이죠.
* 그것은 십자가를 모독하는 일입니다 !!
그런데 그게 아니고,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인가?" 라고 했을 때, "그것은 십자가를 모독하는 일입니다" 라고 하게 되어버리면, 그러면 듣는 자들은 그것을 연결한다고 아주 분주해진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앞뒤가 서로 맞지 않으니 말이죠.
그런데 왜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는고 하니, 처음에 이야기를 했지만, 인간은 자기가 잘 되는 것을 원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구원을 받는다고 하니, 그래서 자기는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자기만 편하고 좋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자기가 편하고 좋은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관련이 있습니까? 그것은 관계가 없다는 말이죠. 복음, 복음이라고 하지만, 그런데 그 복음을 통해서 자기가 편하게 살아보겠다는 의식이 여전하다면, 그것은 개선이고 개량이라는 겁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를 챙기는 것으로, 새로운 피조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그것은 새로운 피조물이 아닌 옛 피조물에게 약간의 업그레드를 한 상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래서 성경이 어려운데, 우리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전혀 피해가지 않는다는 겁니다. 자기도 미처 모르는 자기의 원천을 성경말씀이 기어이 파고 들어온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아파서 반항을 하는데, "제발 조용히 살게 내버려두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것을 하기 이전에 로마서 5장 3절을 보겠습니다.
(롬 5: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여기에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라고 하는데, 즐거움은 언제 나옵니까? 환난이 없을 경우인데, 그렇지요? 반대로 환난이 있다고 하면 우리는 결코 즐겁지 않다는 말이죠. 그런데 여기서 사도바울은 뭐라고 합니까? 환난 중에도, 즉 환난이 벌어지는 것 자체가 즐겁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게 무슨 말씀인지 궁금해해야 하는데, 그런데 우리는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성경말씀을 본다고 하면서 이런 구절들은 그냥 지나가 버리고 만다는 것이죠. 그냥 자기가 편안한 대로 하면 하면 그게 신앙생활이고 즐거움이냐는 말이죠. 사도바울은 분명히 환난 중에 즐거움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죠.
* 다시, 할례와 새로운 피조물 !!
이것과 할례를 연결시켜보면, 할례는 끊어내는 것인데, 즉 새로운 피조물은 기존의 피조물과 연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것은 자기가 계속해서 살아있는 것인데, 그것은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우리의 육신은 마귀가 작동을 하기 때문에 굉장히 고집이 센데, 그래서 주님께서는 할례를 통해서, 즉 끊어냄을 통해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주시겠다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기 몸의 꼬추 끝을 잘라내면, 그것이 할례인 줄로 알았다는 것이죠. 요즘은 꽈추라고 하는데 말이죠(ㅋㅋ).
그래서 고린도후서 5장 16절에서 사도바울은 새로운 이 피조물에 대해서 뭐라고 합니까? "이제부터는 그리스도를 육체로 알지 않는 자", 그렇게 정의를 내린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이죠.
(고후 5: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예수님만을 육체로 아는 것이 아니고 모든 인간을 육체가 아닌 영적인 관점으로 보는 것, 즉 마귀와 더불어 살고 있다고 하는, 그렇게 영적으로 볼 수 있는 자가 새로운 예수님의 눈알이 박힌,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월급은 얼마를 받고 아파트는 몇 평이고,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런 육체로서 평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평가를 내리는, 바로 그런 자가 새로운 영이 들어온 자라라는 말이죠.
우리나라에 104살이 된 철학자가 있는데, 사람들은 그런 사람을 보면 부러워한다는 겁니다. 명예도 있고 오래 살고, 참으로 부럽기도 하도 좋아 보인다는 말이죠. 하지만 과연 그렇습니까? 복음도 모르면서 아무리 오래 산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겁니다.
과연 복음이 들어있는지 없는지, 그것을 볼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하는데, 여기에 대해서 "복음이 들어있는지 없는지, 그것을 당신이 건방지게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가?" 라고 했을 때, 하지만 알 수 있다는 말이죠. 어떻게 말인가요?
* 하나님을 죽었다 !!
예수님을 죽인 것이 사람을 죽인 것이지, 하나님 자체를 죽인 것인지, 그것을 모른다고 하면 복음이 들어있지 않다는 겁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다" 라는 것에 대해서 질문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사람을 죽였는가? 하나님을 죽였는가?" 라는 것인데, 하나님을 죽였다는 말이죠.
여기서 제가 '죽였다' 라는 것을 왜 집어넣는고 하니까, 우리 속에도 바로 그러한 사고방식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이다" 라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그 하나님이 우리 인간 손에 맞아죽었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육신 속에도 그와 동일한 의식이 들어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그러니 영적인 안목으로 이 세상을 바라볼 수만 있다고 하면, 누가 뭐라고 해도 그런 자가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겁니다.
"자식에게 유산을 남겨주지 못해서 마음이 아프다" 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하지만 자식에게 유산을 남겨주지 않는 것이 영적으로 올바르다고 하면, 그러면 제대로 된 유산을 물려주었다는 겁니다. 부모로서 자식들에게 자기가 알고 있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 그것보다 더 큰 유산은 없다는 말이죠.
그런 유산은 자식들에게 줄 때 나눌 필요도 없는데, 전체를 다 줄 수 있다는 겁니다. 이왕 유산이라는 말이 나온 김에, 이제 다들 나이를 제법 잡수셨으니 유산 문구를 제가 친절하게 적어드리겠는데 말이죠.
* 끊어내라, 너를 !!
여기에 적은 이 6글자만 해도 충분한데, "끊어내라, 너를!",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왜 그렇습니까? 이미 죽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끊어내는 것이 당연하다는 겁니다. 그동안 자기가 걸치고 있었던, 즉 학력, 직업, 재산, 자식 등등을 말이죠.
"나는 아버님의 손자를 이렇게 훌륭하게 잘 키웠습니다" 라고 하던지, 혹은 "나는 짐승처럼 살지 않고 인간으로 살았습니다" 라고 하는, 이런 모든 것들을 다 끊어내라는 겁니다. 그런 것을 다 끊어내고 영적으로 보라는 것이죠.
예수님이 돈을 잘 벌었습니까?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았습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옷도 한 벌 걸치지 않았다는 겁니다. 피조물에게 뺨도 맞았는데, 인간답게 산다는 것을 전혀 하지 못했다는 말이죠. 인간의 기준에 전혀 미흡했는데, 그런데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겁니다. 아니 아예 하나님이라는 것이죠.
그런 진짜 하나님의 뜻을 놔두고서, 우리가 어디에 정신이 팔려있느냐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고 있다는 말이죠. 아무 것도 모르는 인간들끼리 키키덕거리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도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살아갈 것이냐는 겁니다.
노인정에 가면 매일 하는 소리가 "자식에게 무엇을 좀 남겨주었습니까?" 라는 것인데, 그러면서 "미리 좀 남겨주는 것도 괜찮아요" 라고 하는데, 그러면 옆에서 "미리 남겨주었다가 거들난 사람도 많아요" 라고 한다는 말이죠.
우리가 남겨줄 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내가 나 자신에게서 끊어진 것처럼, 너도 나처럼 끊어지기를 바란다" 라고 하는 것인데, 즉 자기 자신의 종교에서 탈출하라는 겁니다. 자기가 신이 되는 짓을 멈추고 말이죠. 그것은 우리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이제 한 가지만 더 하고 마치겠는데, 그렇게 해서 끊어내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자기는 아무 것도 없는데,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창세기 15장 1절의 말씀이 있다는 것이죠.
(창 15:1)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 나 여호와가 너의 유산이 된다 !!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오셨는데, 그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한 것이 있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이 직접 너의 상급이 된다" 라는 것인데, 여기서 말하는 상급은 유산인데, 즉 "나 여호와가 너의 유산이 된다" 라는 의미라는 말이죠.
* 네가 있는 곳에 나도 끼어 들게 !!
이것은 "네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다" 라는 것도 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고, "네가 있는 곳에 나도 끼어 들게" 라는 것인데, 이것을 조금 더 자세하게 말하면, "네가 있는 시간 속에 나도 끼어 들게. 그래서 네가 하는 모든 일들이 주의 일이 되게 해줄게"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이것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최고의 보상인데, 더 이상의 유산은 없다는 겁니다. 그 어느 것 하나 자기의 일은 없는데,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말이죠. 그렇게 주님의 일에 편입이 되게 해주는 것인데, 그러니 아예 상표를 바꾸어버린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나 누구는 한 평생 이렇게 살았다" 라고, 그렇게 상표가 바뀐다는 말이죠. "나 예수는 평생 너를 이렇게 만들었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하고 나서 우리의 세계를 거두어낸다는 겁니다.
손주가 와서 자는 자리가 정해진 것처럼, 예수 안에는 끊어진 자기가 죽음을 맞이하는 죽음의 자리가 있는데, 그 자리를 사도바울은 십자가라고 했다는 말이죠. 달리 말하면, "네가 몸에 할례를 해서 믿는다고 하는 티를 내는 것은 십자가 자리에 대한 모독이다" 라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너희들, 그만 죽어라" 라고 하시는데, 그런데 우리는 살아서 신앙인의 티를 내려고 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것을 인간답게 사는, 즉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것으로 자꾸만 오해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모든 것이 주님의 일인데, 그런데 우리는 육신이 있어서 수시로 주님의 일을 방해를 한다는 말이죠. "주님, 이러시면 정말 곤란합니다. 저처럼 이렇게 해야합니다. 아무리 주님이라도 저의 일을 방해하시면 안 됩니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 죽은 자에게는 초조함이 없어 !!
그래서 자기 혼자 초조해하고 불안해서 떤다는 말이죠. 그렇게 상대방이 초조해하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고 하니, 상대방의 말을 들어보면, 걱정근심이 가득 담겨서 나오는 말들이 있다는 겁니다. "이게 안 되면 안 되는데, 큰일이 나는데" 라는 식으로 말이죠.
하지만 죽은 자에게 큰일이 나고 사단이 날 일은 없는데, 죽을 자가 아니고 이미 죽은 자라는 겁니다. 죽은 것 자체가 제일 큰 낭패인데, 더 이상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는 것이죠. 그러니 안 되면 하지 않으면 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자기 딸이 40살인데 이번에 선을 보러갔다는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 딸이 이번에 17번째 선을 보는데, 제발 말을 좀 잘하고 행동을 가지런히 해야 할텐데" 라고 하면서 초조해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때는 누가 점심을 먹으러 가자고 해서 같이 음식을 먹어도, 그 음식의 맛에는 그렇게 관심이 없다는 말이죠. 여기에도 내일 강릉에 있는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야 되는 분도 있는데, 그러면 지금의 성경공부는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는 겁니다(ㅋㅋ).
그래서 그 어떤 결과가 나오든지 간에, 설령 6개월 안에 죽는다고 해도, 그것이 주의 일이기 때문에, 우리가 신경을 쓸 것이 무엇이냐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가 않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매사에 얼마나 주님의 십자가를 방해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죠.
* 모든 것이 주님의 일이기에 !!
로마의 군인들처럼 창으로 찔러야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아닌데, 자기의 일상생활 속에서 얼마나 주님을 밀어내면서, 자기에게 다가오는 환난을 거부하고 있느냐는 겁니다. 자기의 뜻을 관철하려는 고집, 즉 "나는 나다워야 즐겁다" 라고 하면서, 그렇게 우리는 매 순간마다 죄를 드러내는데, 그런데 그것이 바로 주의 일이라는 말이죠.
주님이 다 이루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천국에 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이 육신을 가지고, 예수님이 이 땅에 얼마나 고난을 받으셨는지, 그것을 드러내면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그 환난 중에서 즐거워하게 되는데, 그게 성도의 길이라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부분이 아닌 전체를 알게 하옵소서. 곧장 잊어버리게 될지라도, 전체를 알아서 모든 것이 주님의 일이라는 것에 대해서 기뻐하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24,10,17 오후 5시에 마침.
산산이 부서지는 나의 계획 가운데,
모든 것이 주님의 일임을 깨닫고 언제나 감사하게 하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