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강의

계시+몸

아빠와 함께 2024. 10. 30. 17:34

[24대구강의]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07 - '계시 + 몸'

24,10,21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 하나님의 계시와 인간의 계시 !!

오늘은 교재 41페이지의 '2. 계시론'에 대해서 하겠습니다. 계시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님의 계시와 인간의 계시가 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인간 계시의 형태가 무엇인고 하니, 그게 최종적으로 항상 국가로 나타난다는 말이죠.

이 국가는 다니엘서에 보면 짐승인데, 그러니까 인간의 계시 안에는 인간의 힘, 즉 인간의 지혜가 들어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탑인데, 그게 바벨탑이라는 말이죠.

그 바벨탑이 쪼개진 것이 현재 220개국에 이르는 국가라는 겁니다. 그것이 국제축구연맹에 피파(FIFA)에 가입된 국가를 기준으로 한 것인데, 193개국인 국제연합인 유엔(UN)보다도 더 많이 가입을 했다는 말이죠.

그러니 인간들의 마음을 하나로 결집할 수 있는 것이 축구라는 것인데, 아무리 가난해도 공 하나만 있으면 축구는 가능하다는 겁니다. 우리나라의 축구선수로는 손흥민이 제일 유명한데, 왜 유럽에서는 남자들이 교회에 가지 않고 그 시간에 축구장에 가서 흥분을 하는지 알만하다는 것이죠.

일종의 종교와도 같은 역할인데, 일주일동안 직장에서 힘들게 일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것을 어디에 가서 풀면서 위로를 받는다는 겁니까? 교회도 아니고 성당도 아니고, 그게 바로 축구 경기장이라는 겁니다.

아무튼 인간이 추구하는 것은, 자기 속에 있는 마음을 바깥으로 형상화를 시키는 것이란 말이죠. 출애굽기 20장에 보면 십계명이 나오는데, 그런데 그것이 1계명, 2계명, 3계명, 4계명이 사실 같은 의미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1계명에서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라고 하시면서, 그 다음에 2계명으로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라고 하시는데, 이게 참 재미가 있다는 말이죠. 재미라고 하기는 좀 그렇고, 그것이 아주 흥미롭다는 겁니다.

(출 20: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출 20: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 인간의 손에서 나온 신의 형상 !!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이 말고 다른 신의 형상이 어디서 나오는고 하니, 그것이 인간의 손에서 나온다는 말이죠. 즉 인간에게서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 속에 계시가 들어있습니까? 없습니까? 이미 들어있는데, 그것이 마귀라는 말이죠. 마귀의 마음이 인간이 원하는 신을 형상화를 시키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계시가 두 종류가 된다는 것인데, 그래서 인간 계시는 인간의 지혜와 힘, 즉 인간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인간의 능력으로 인간의 계시를 만들고, 그 계시는 계속해서 인간의 능력을 요청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재주껏 합시다. 열심히 합시다. 단결합시다. 결집합시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렇게 인간의 능력에서 나온 인간의 계시를 우리 인간은 믿는데, 즉 "믿씁니까? - 믿씁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 나는 나의 능력을 믿씁니다 !!

그러면 무엇을 믿는다는 겁니까? 자기가 내뱉은 능력이 자기 계시를 형상화하는 것을 믿는다는 말이죠. 즉 "내 노력과 땀의 결실물을 나는 믿씁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인간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렇게 인간은 믿는데, 자기의 능력을 믿는다는 겁니다. 그것이 신천지, 통일교, 여호와 증인과 같은 집단들인데, 여호와 증인의 경우에는 자기 착함을 믿는다는 말이죠. 그래서 항상 단정한 옷차림으로 다니고, 행동을 조심한다는 겁니다.

미국에서 온 몰몬교도 이와 비슷한데, 그들도 항상 옷차림이 깔끔하다는 말이죠. 남들에게 선행이 먹혀 들어간다는 것인데, 즉 "나의 착함에 이끌려서 우리 조직에 들어올 수 있다" 라는 겁니다. 그렇게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것들의 집결, 그것을 인간이 선뜻 믿게 되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애써서 행해서 형성한 것이니 말이죠.

제가 신천지나 여호와 증인, 그리고 몰몬교를 언급했지만, 결국은 그 화살이 교회로 갈 수밖에는 없는데, 즉 교회가 인간의 믿음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인간의 능력, 즉 인간의 자기 희생, 봉사, 헌금이 집결된 곳이 교회라는 말이죠.

* 인간의 능력 VS 십자가의 능력

그런데 교재 41페이지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방금 인간의 능력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지만, 그런데 여기에 보면 인간의 능력이 아닌 십자가의 능력이 나온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계시는 십자가의 능력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그 십자가가 예수님이 자살해서 생긴 십자가입니까? 아니면 어떤 능력과 충돌해서 생긴 십자가입니까?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인간의 능력과 대충돌을 해서 생겨난 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 이라는 겁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에게서는 자신의 능력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제거를 했다는 말이죠. 그런데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그 십자가에서 구원이 능력이 나온다는 겁니다.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 구원의 능력은 오직 십자가에서만 !!

이 얼마나 신기한 일인지 모르는데, "저기서는 절대로 천국에 갈 수 있는 능력이 나올 수가 없다" 라고 해서 짓밟고 밀쳐버렸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밀침을 당한 쪽에서만 유일하게 천국에 갈 수 있는 능력이 나오는데, 그것이 십자가의 능력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십자가의 능력을 받은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십자가의 능력을 받기 이전까지는 "예수님은 저리가세요. 나는 하나님만 믿을 겁니다" 라고 했는데, 그래서 유대인들은 하나님만 믿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능력을 받게 되면 누구를 밀치게 됩니까?

* 나를 밀치는 십자가 능력 !!

그동안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을 밀쳤는데, 그런데 바로 그 십자가 사건이 자기에게 오게 되면, 이제는 자기를 밀쳐야할 판국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6장에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그리고 그것을 요한복음 12장에서는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라고 하는데, 그게 하나님의 계시라는 말이죠. 참으로 엄청난 인인데, 계시가 그냥 우리에게 오는 것이 아니고, 자기 속에 있는 악한 계시와 대충돌을 일으킨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게 구원의 능력으로 작용한다는 것이죠.

(요 12: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이미 우리 인간 속에는 수상한 자기 계시가 있는데, 그 사실을 십자가의 능력이 아니라면 우리는 도저히 알 길이 없다는 겁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아니라고 하면, 우리는 자기 속에 하나님의 계시를 거부하는 능력이 들어있다는 것을 도무지 알 길이 없다는 말이죠.

* 나는 누구인가?

이것이 상당히 부정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는데, 이것을 긍정적으로 설명해보면, "비로소 이제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았다" 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시이고 능력이라는 말이죠.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아는 것이 계시인 줄 알았는데, 자기 자신이 어느 정도밖에 되지 않는지, 그것을 아는 것도 하나님의 계시에 포함이 되더라는 겁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아는 것이지, 인간의 능력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래서 마태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라고 하셨는데,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이 얼마나 오묘한지 모른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여기서 우리가 죄인과 의인에만 신경을 쓸 것이 아니고, 불러주어야 갈 수가 있다는 것이죠. 그게 천국이라는 말이죠.

(마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를 부를 때, "너는 참 착하구나. 훌륭하구나. 대단해. 그리고 교회에 충성과 봉사를 많이 하는구나" 라고 해서 불러주시는 것이 아니고, "너는 죄인이야. 이리와" 라고, 그렇게 죄인으로서 불러주신다는 겁니다.

이것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라고 하면서 시작하는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30절에 나오는 말씀, 바로 그것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쏙 집어넣는다는 말이죠.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Come to me, all you who are weary and burdened, and I will give you rest.
(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 11: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그동안 우리가 힘든 인생을 살았고 물론 지금도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데, 우리가 특히 정신적으로 힘들게 살아가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고 하니까, 그것은 그동안 '나' 라는 존재가 주의 일을 방해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방해를 하고 있었을까요? 자기 잘난 척을 하고 있었다는 것인데, 남들보다도 더 잘난 존재가 되고 싶어서 환장을 했다는 말이죠. 물론 더 잘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그동안 자기 잘남을 지키고 방어하는데 있어서 힘들었다는 겁니다. 나이 60이 되고 70이 될 때까지 너무나도 힘들었다는 것이죠.

여기에 적합한 노래가 있는데, 조항조가 부른 '남자라는 이유로' 라는 곡이라는 겁니다. 남자이기 때문에 사회에서 울면 안 된다는 것인데, 그렇게 해서 참으면서 살아온 세월이, 그게 길어도 너무 길었다는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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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라는 이유로(조항조) ]

누구나 웃으면서 세상을 살면서도
말못할 사연 숨기고 살아도
나 역시 그런저런 슬픔을 간직하고
당신 앞에 멍하니 서있네
언제한번 가슴을 열고 소리내어
소리내어 울어 볼 날이
남자라는 이유로 묻어두고 지낸
그 세월이 너무 길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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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인생이 짐이 되었다는 것인데, 아이들을 키우면서 그 세월동안 자기 입에서는 나온 것은 "나는 잘나야 한다. 우리 식구들도 다 잘나야 한다. 남들에게 뒤지면 안 돼" 라는 것인데, 즉 "나는 존재다" 라는 겁니다.

이게 계속해서 누적이 되니, 너무나도 힘이 든다는 것이죠. 어떤 사람은 26.5톤, 어떤 사람은 78.9톤이라는 겁니다. 삼성그룹의 회장은 2500톤은 족히 되지 싶은데, 그만큼 많은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그게 짐으로 느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는 겁니다.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애써 거부하고, 잘난 의인으로 행세한다는 말이죠. 그것은 자기 손가락으로 자기 눈을 찌른 것과도 같다는 겁니다.

* 내가 찔러줄 게 !!

그래서 예수님은 친절하게 뭐라고 하십니까? "네가 네 손으로 찌르지 마라. 내가 찔러줄 게"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것이 로마서 3장 10절에서 18절에 나오는데, 이 말씀 하나 하나가 주님의 손가락인데, 그것이 우리의 눈을 찌른다는 겁니다. 제법 길지만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롬 3:10)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 3: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롬 3: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롬 3:13)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롬 3: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롬 3:15)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롬 3: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롬 3: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롬 3:18) 저희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 몸보다 센 혀 !!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라고 하면서 시작을 하는데, 이게 바로 우리 자신에게 해당이 된다는 말이죠. 특히 13절에서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라고 하는데, 우리 속에는 독사가 들어있다는 겁니다. 야고보서에도 같은 취지로 이야기를 하는데, 3장 5절에서 8절을 보겠습니다.

(약 3:5)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약 3:6)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약 3:7)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은 다 길들므로 사람에게 길들었거니와
(약 3:8)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여기 5절에 혀가 나오는데, 혀가 큽니까? 신체가 큽니까? 당연히 신체가 큰데, 그런데 작은 혀가 큰 신체를 가지고 논다는 말이죠. 표현이 노벨 문학상감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6절에 지옥 불이 나오는데, 그 지옥 불에는 마귀가 간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지옥 불이 어떻게 타고 넘어와서는, 우리의 혀를 통해서 바깥으로 튀어나오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몸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로서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인데, 물론 그 몸에서 마귀가 튀어나오지만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의 계시가 인간의 몸까지 확장되었다는 겁니다. 즉 우리 인간의 몸은 계시의 운반체라는 말이죠.

그리고 여기 8절에 보면,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라고 하는데, 우리 인간이 동물이나 새나 물고기는 다룰 수가 있는데, 그런데 무엇은 안 된다는 겁니까? 우리 인간의 내부에 장착이 되어있는 자기 혓바닥, 그것은 도저히 안 된다는 겁니다.

* 속상해서 못살겠다 !!

사람이 전혀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자살은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혀를 가지고 공격하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흔히 "속상해서 못살겠다" 라고 하는데, 그게 과연 무슨 의미일까요?

과거에 며느리가 시집을 갔다가 도망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시어머니가 굶겨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 시가 식구들이 자기를 사랑해주는 것이 아니라 미움을 발언을 마구 내뱉을 때, 그러면 "이러다가는 내가 말라죽겠다" 라고 하면서 뛰쳐나오게 된다는 것이죠.

여러분은 남들에게 모함을 받아본 적이 있습니까? 그런 일을 경험하면 그날 밤에는 잠을 이룰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밤새도록 복수의 칼날을 가는데, "네가 감히 나를 건드려?" 라고 하면서 말이죠.

이렇게 되면 졸지에 자기는 죄인이 아닌 잘난 존재, 즉 의인이 되고 마는데, 바로 그 의가 문제라는 겁니다. 로마서 3장에서 의인은 없다고 했는데, 그런데 갑자기 왜 의가 튀어나오느냐는 말이죠. 그러면서 교회에 50년을 다녔다고 하는데, 물론 50년을 다녔을 수는 있지만, 그러나 여전히 자기는 잘난 존재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원인이 자기가 잘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자기가 어떻게 통제할 수 없는, 즉 자기를 능가하는 능력이 이미 자기를 장악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그러니 "나는 의인이 되지 못해서 서글프다" 라고 하지 말고, 오히려 기뻐하라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바로 "이제야 나는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알았다" 라고 하면서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십자가의 계시라는 겁니다. 그런 사람은 오늘밤에 죽어도 어디에 갑니까? 천국에 간다는 말이죠.

우리는 그런 것으로 인해서 기뻐하자는 것인데, "이번에 내가 더욱 더 완전할 수 있었는데, 참으로 아깝다" 라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어버리면 점점 더 등에 짊어지고 있는 짐의 무게만 늘어날 뿐이라는 것이죠.

* 노벨 문학상 작가 '한강' !!

예를 들어서, 저나 여러분은 TV에 나와봐야 아무도 쳐다보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채널을 그냥 돌려버리는데, 물론 나올 일도 없지만 말이죠. 그런데 유명한 연예인들의 경우에는 좀 다른데, 그런 사람들은 남들이 쳐본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결코 좋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이번에 한강 작가가 노벨상을 타서 유명해졌는데, 그만큼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겁니다. 물론 상금도 13억 5천만원을 탔지만 말이죠. 그렇게 유명인사가 되면 매사에 조심해야 하는데, 지하철도 쉽게 탈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저는 아주 자유롭게 지하철을 탄다는 것이죠.

하지만 이렇게 자기가 다른 사람들에게 의해서 부러움을 산다든지 인기가 있는, 그렇게 유명세를 탄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것인데, 왜냐하면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는 십자가로부터 멀어진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더 무서운 것은 이 세상이 주는 인기로 인해서 십자가를 가리는, 그렇게 악마가 시키는 짓을 하는 악마의 앞잡이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십자가를 믿지 않아도 이렇게 잘 먹고 잘 사는데, 굳이 십자가를 믿을 이유가 뭐가 있노?" 라고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는 겁니다.

* 마귀가 제공하는 유혹, '인기' !!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마귀이게 시험을 받을 때, 첫 번째는 돌이 떡이 되게 하는 것이고, 두 번째가 무엇입니까? "예루살렘 성전에 뛰어내리면 천사가 받아줄 것이고, 그러면 사람들이 당신을 메시야로 여길 것이다" 라고 하는 인기, 즉 유명세라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마귀가 제공하는 시험이고 유혹이라는 겁니다.

물론 돈도 있고 인기도 있으면 좋은데, 그런 것을 일부터 버리라는 것이 아니고,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구인가?" 를 잊지 말라는 것이죠. 아무리 인기가 있고 하더라도 "나는 죽을 죄인이 맞습니다" 라고 하는 것을 기억하자는 것인데, 그게 십자가 앞에서 비로소 밝혀진다는 겁니다.

그러니 십자가가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 모르는데, 백살 가까이 살아도 여전히 자기를 모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는 말이죠. 그것이 99.99퍼센트는 족히 되지 싶은데, 교회에 가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 깃털의 가벼움으로 !!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아는 사람, 그것은 성령의 계시를 받아야만 안다는 것이죠. 그러면 얼마나 가벼운지 모르는데,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겁니다. 너무나 좋아서 참을 수가 없는데, 갑자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라는 밀란 쿤데라의 소설이 생각나는데, 영화로도 만들어졌다는 것이죠.

아무튼 그런 사람은 더 이상 자기에게 신경을 쓰지 않고, 십자가의 중력 안에서 주님과 같이 활동을 한다는 겁니다. 깃털처럼 가볍게 말이죠. 그러니 성령을 받은 사람은, 주어진 형편에 따라서 언제 어디서나 가볍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계시가 곧 십자가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자는 언제 어디에서나 가볍게 살아갈 수가 있다는 말이죠. 여기서 언제는 시간이고 어디는 공간인데, 그러니 성령 안에는 있는 자는 시간을 초월하고 공간을 초월한다는 겁니다.

지금 자기 나이가 적든 많든,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어떤 여자는 남편이 이태리에 여행을 보내주지 않는다고 이혼을 하자고 하는데, 그 여행이 무려 천만원짜리라는 겁니다. 이게 제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고, '이혼숙련캠프' 라는 TV프로에 나오는 내용이라는 말이죠.

거기서 서장훈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재산이 10억이 넘으면 몰라도 1억이면 좀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갔다오면 후회하지 싶은데요?" 라고 하니, 그러자 그 여자는 "이태리에 갔다오지 않으면 후회가 되고, 이혼은 후회가 되지 않아요"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은 자기를 미워하거나 포기해서 가볍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에 얽매이면서 계속해서 자기를 무겁게 가지고 간다는 말이죠. 그야말로 쇳덩어리를 매단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 무거운 인생을 사신 예수님 !!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떠했을까요? 예수님은 초반에 굉장히 무거웠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인 예수님에게, 이 세상 인간의 모든 것을 합한 것보다도 더 무거운 인생을 주셨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면서 지옥과도 같은 경험을 하는 것이 너무 무거워서,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를 했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자신이 수용을 함에 있어서, 그것이 너무나도 힘들었다는 말이죠.

그게 도저히 수용이 되지 않으니까, 죄 있는 육신을 입고 있어서 말이죠. 그래서 기도를 하시는데, 그게 땀방울이 아니고 실핏줄이 터졌는지 몰라도 핏방울처럼 되어서 흘러내렸다는 겁니다. 인간의 육신으로는 그것을 도저히 넘을 수가 없었다는 말이죠.

(눅 22:42)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눅 22:43)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눅 22: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예수님이 그렇게 힘드셨는데, 다른 인간들이 그것을 넘어 새 사람이 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가능하다는 것은 다른 인간들은 불가능하다는 의미인데, 즉 우리의 환경 자체가 악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이죠.

그러니 인간은 죄를 짓는 것이 아니고 죄에 갇혀있다는 겁니다. 괜히 착한 척을 하지 말라는 것인데, 그 어떤 짓을 해도 다 죄라는 말이죠. 그것이 시편 51편에 나오는데, 다윗이 "모친이 죄 중에 나를 만들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시 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그러니 죄가 만든 생산품이 바로 우리 인간인데, 우리는 이것이 기쁘게 들려야 한다는 말이죠. 우리가 살아가면서 잘난 인간이 될 수 없고, 다만 잘난 척을 하는 못난 인간이 될 뿐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신혼여행을 베트남의 다낭에 갔다온 것과 이태리에 갔다온 것 중에서, 어느 것이 잘났습니까? 베트남보다는 이태리에 갔다온 것이 더 잘났다는 말이죠. 그것을 애써 부정하지 말라는 겁니다.

지금 북한에서 우크라이나 러시아 전쟁에 파병을 보낸다고 하는데, 그러면 북한군들 사이에서 전쟁에 갔다온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 사이에서 누가 더 잘났을까요? 갔다온 자들인데, 김정은이 그것을 노리고 있다는 말이죠. 살아가는 것이 다 똑같은데, 우리도 과거에 월남전에 갔다왔다는 겁니다.

여기서 고린도전서 2장 9절을 보겠는데, 제가 읽겠습니다.

(고전 2:9)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 못하고, 못하고, 못하고 !!

여기에 보면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라고 되어있는데, 눈과 귀와 마음이 나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어디에 달려있습니까? 우리 육신에 달려있는데, 이 마음이라는 것은 태어나면서부터 구성된 것으로 가득히 차있는 것인데 말이죠. 그런데 이것들이 어떻다는 겁니까?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생각지 못하였다" 라고 하는데, 그렇게 '못하고' 라는 것이 3번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계시는 "못하고, 못하고, 못하고" 라는 것인데, 즉 멀리 바깥에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죽어서 천국에 가겠다는 것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짓인지 모른다는 겁니다.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 생각지 못하면서 어떻게 천국에 가느냐는 것이죠. 계시도 전혀 모르면서 말이죠.

* '간다' VS '못 간다' !!

그러면 십자가 계시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간다' 라는 것이 아니고 '못 간다' 라는 것인데, 즉 "너는 때려죽어도 천국에 갈 수 없다. 너는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라는 것, 그것을 인식시켜주는 것이 계시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앞에 보면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라고 하는데, 그러니 우리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위해서, 즉 예수님 본인을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 예비가 되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못하고, 못하고, 못하고" 라는 것이 자기에게 해당이 된다는 것을, 즉 "나는 눈으로 보아도 안 되고, 귀로 들어도 안 되고, 또한 마음으로 깨달아도 안 된다" 라는 겁니다. 그게 인간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 인간이 깨달은 것이 지체 중에서 혀를 통해 나온다고 했는데, 즉 "나를 건들면 죽여버린다" 라는 것인데, 그것은 "나는 잘난 존재다" 라는 의미라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잘난 존재는 지옥밖에는 갈 곳이 없다는 말이죠.

그렇게 "못함+못함+못함" 이라고 한다면, 그러면 주님의 십자가 능력이 어디에 있어야 할까요? 우리의 눈 앞에 있으면 됩니까? 우리의 눈과 귀와 마음, 그것을 모두 다 부수고 뚫고 들어와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데 주님의 사랑이 바깥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게 되면, 그러면 "나는 못한다, 못한다, 못한다" 라는 것을 날마다 들추어내게 되는데, 그것보다도 더 큰 사랑은 없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계시의 능력이고 십자가의 능력이라는 겁니다.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는 자들이 있는데, "성경에 선악과를 따먹으면 죽는다고 했는데, 나는 선악과를 따먹은 적이 없어요" 라고 말이죠.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데, 나는 그때 태어나지도 않았어요" 라고 하는 자들도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왜 그런 이야기를 합니까? 그것은 "나는 눈으로 보지 못했고, 귀로 듣지 못했다. 그러니 나는 마음으로도 모른다" 라는 것인데, 그것이 우리 인간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여기서 교재 41페이지를 보겠는데, 지금부터는 교재 43페이지까지 천천히 읽어가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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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인간들의 계시론은 뭐냐 하면 인간의 '인식론' 입니다. 인식론에 대해 제가 간단히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지금 여기 물이 있습니다. 이것이 물인지 술인지 어떻게 압니까? 이것이 물인지 술인지 아는 것은 이것을 마셔보면 알겠지요. 마셔보면 '아! 이것이 물이다' 하고 압니다. 그럼 그것이 어떻게 물인지를 물어본다면 전에 먹었던 물이 머리 속에 기억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물 맛과 지금 마셔본 물의 맛이 같기 때문에 아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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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인식론' 이라는 어려운 용어가 나오지요? 그리고 맛을 아는 혀, 그것을 기억을 하고 있던 두뇌가 동원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 물 맛과 지금 마셔본 물의 맛이 같기 때문에 아는 것입니다" 라고 하는데, 그렇게 '안다' 라는 것이 바로 인식론이라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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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금 더 나가봅시다. 전에 먹었던 그 물이 물인지 어떻게 압니까? 그것은 술을 마셔보니까 아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술을 마셔보니까 물맛과 술맛이 다르겠지요. 술과 물의 차이점을 이걸 표시한 것을 가지고 '문자' 라고 합니다. 이것이 물과 술이 되는 것은 물과 술의 차이 때문입니다. 물과 술이 다른 것은 그 차이 때문인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횡단보도에 빨간불은 서라는 것이고, 파란불은 가라는 것이지요. 이런 빨간불 자체는 아무 의미가 없지만, 빨간불이 파란불과 함께 있으니깐, 빨간불은 서고 파란불은 가라는 의미를 만들어 내지요. 그래서 변별성이 생기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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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술과 물의 차이점, 즉 문자가 나오는데, 그러니 언어까지 동원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빨간불과 파란불 신호등이 나오는데, 그것이 의미를 만들어내고, 거기에서 변별성이 생긴다는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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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면 좀 더 쉽게 설명해보겠습니다. 사람의 뜻을 아는 것은 차이를 통해서 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왜 신은 신입니까? 인간보다 능력이 월등하기 때문에 신인 것입니다. 그런데 '신을 만나 봤소?' 라고 물으면 '못 만나 봤다' 라고 합니다. 그런데 신이 있는 것을 어떻게 알아요? 그러면 '사람은 앞만 볼 수 있지만, 하나님은 뒤에서 일어나는 일도 다 알잖아. 그러니 사람보다 능력이 뛰어나잖아. 그러니 신이지' 라고 합니다. 이것이 인간들의 인식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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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인간의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까, 신은 인간보다 월등한 능력을 가졌다는 것인데, 그게 바로 신이라는 겁니다. 사실은 그런 신이 인간 내부에 창작이 되어있는데, 물론 마귀가 집어넣었다는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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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이라는 것은 인간보다 능력이 많으신 분이라고 이해합니다. 그것을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하지요. 그래서 뭔가 아쉬울 땐 기도를 하고, 그래서 기도를 해서 복 받고 구원을 받는다고 하잖아요. 그게 다 엉터리죠. 인간이 만들어낸 하나님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계시론은, 인간의 인식론에서 만들어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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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신, 즉 하나님이라는 것은 인간들의 인식론이 만들어낸 것인데, 그게 바로 우리 인간의 한계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인간의 인식론이 교회에 자리를 잡았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사람들을 꼬드길 수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아시죠? 그러면 믿으면 됩니다" 라는 것인데, 그것으로 끝이라는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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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이 진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들은 하지만, 실제로 하나님이 이 땅에 오니까 하나님의 말을 안 듣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가 내 말을 안 믿는 것은 너희 아버지가 악마이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악마의 자식이다'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런 계시론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고, 악마가 만들어서 인간에게 심어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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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을 인정해주고 나서,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더 보태면 됩니다' 라고 했으면, 그러면 예수님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이야기하신 것이 아니고,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사건이 터진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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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께서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그야말로 결정타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들이 믿는 하나님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낸 자가 아니다" 라는 인식론적인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죠.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물러서지 않고, "너희들이 나를 거부해? 나를 밀어내? 하지만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너희들의 아버지가 아니라 나의 아버지에게로 갈 자가 없다" 라고, 아주 강력하게 나오신다는 겁니다.

그들의 아버지가 누구입니까? 바로 악마인데, 그 악마에게로 가라는 말이죠. 그런데 그들의 아버지는 죄를 지어서 지옥에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들은 지옥에는 갈 수 있지만, 천국에는 갈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은 이 땅에 왜 오셨습니까? 그 어떤 인간도, 단 한 사람도 예수님 외에는 아버지에게로 갈 자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인간에게 약을 올려서 극한까지 몰고 가셨다는 말이죠.

* 세례요한은 왜?

세례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줄 때 성령이 세례요한에게 왔습니까? 오지 않았는데, 그러니 세례요한은 메시야가 아니라는 겁니다. 사람들은 세례요한은 메시야를 딱 보면 안다고 여겼는데, 실제로 요단강에서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어린양이다" 라고 했다는 것이죠.

그런데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세례요한이 감옥에 갇혀있으면서,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에게 보내서 뭐라고 합니까?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라고 묻는다는 겁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세례요한조차도 죄인이라는 말이죠.

(마 11:2)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마 11:3)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물론 세례요한은 처음에는 자기가 죄인인 줄 몰랐는데, 그런데 예수님이 일을 하심으로 말미암아서 알게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과 세례요한이 모두 다 선지자이지만, 예수님은 자기가 넘어설 수 없는 다른 시공간에 속한다는 것을 세례요한이 알게 된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라는 것인데, 그래서 자기 제자들이 예수님에게로 가니까, 세례요한은 "모두 다 가거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초기 제자인 안드레와 베드로와 빌립은 다들 세례요한의 제자였다는 것이죠.

* 계시와 자리 !!

지금부터 어려운 이야기를 해보겠는데, "계시란 이 세상에서 무엇을 남기는가?" 라는 겁니다. 그게 바로 '자리' 라는 것인데, 즉 포지션이라는 말이죠. 여기서 마태복음 18장 20절을 보겠는데, 누가 읽어보세요.

(마 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여기에 '곳' 이라고 나오는데, 이것은 자리, 장소, 혹은 공간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두 세 사람이 모인 자리, 이것은 인간이 사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런 곳에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라고 해서, 예수님도 거기에 같이 계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자리가 인간이 마련한 자리가 있을 수 있고, 또 하나의 자리는 예수님이 계신 곳인데, 그곳이 자리가 된다는 말이죠. 여기서 인간이 만든 자리는 시간과 공간에 제한을 받는데, 하지만 예수님의 자리는 그런 한계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교회 예배의 경우에, 서울과 같이 멀리 있는 사람은 올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렇게 멀리 있지 않아도, 나이가 80이 넘고 해서 운전도 못하고 몸이 약해서 참석할 수 없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분이 치매에 걸리고 하면, 더욱 더 참석하기가 힘들다는 말이죠. 그러다가 그분이 돌아가시면 어떻게 됩니까? 죽은 사람이 어떻게 예배에 참석합니까? 안 된다는 겁니다. 화장터에서 타 태우고 신체 자체가 없는데 말이죠.

그게 인간이 만든 자리인데, 그러면 예수님의 자리인 경우에는 어떻게 될까요? 치매에 걸리던 죽어서 장사가 되던, 예수님의 자리는 참석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북한에서 예배를 드리던 남한에서 예배를 드리던, 예수님이 계신 곳이라고 하면, 그게 하나의 자리라는 말이죠.

* 예수님이 마련해주신 처소, '성령' !!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예수님이 마련한 처소가 나오는데, 예수님이 하늘에 올라가셔서 지상에 있는 제자들에게 마련해주신 처소가 바로 '성령' 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성령이 곧 처소라는 말이죠.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목사님,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라고 하는데, 제발 우리의 눈과 귀와 마음과 같은 것을 의지하지 말라는 겁니다. 우리는 "못함, 못함, 못함" 이라는 말이죠. 눈과 귀로 확신을 하려고 하면, 사탄이 벌이는 기적에 현혹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그것은 마귀 쪽이라는 것이죠.

(요 14: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
(요 14: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어제 오후시간에 사무엘상 3장을 했는데, 거기에 보면 하나님이 어린 사무엘을 부르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같은 공간에 있던 엘리 제사장은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말이죠. 그게 나이가 많아서 귀가 어두워서 그런 것일까요?

엘리 제사장에게는 들리는 것도 보이는 것도 없는데, 그런데 사무엘은 하나님과 통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물론 어린 사무엘은 처음에 그것을 모르고 스승인 엘리 제사장이 부른 줄을 알고 찾아갔는데, 그런데 자기 스승이 부른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죠.

(삼상 3:4)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삼상 3:5) 엘리에게로 달려가서 가로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가로되 나는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그가 가서 누웠더니

여기서 로마서 8장 30절을 보겠습니다.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 부르심 !!

여기서 순서를 보면, "미리 정하심 → 부르심 → 의롭다 하심 → 영화롭게 하심",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부르심' 이라는 것인데, 그렇게 부르심이 없다고 하면 의롭다 하심도 없고, 영화롭게 하심도 없고, 그리고 미리 정해졌다는 것도 모른다는 말이죠.

창세 전에 그렇게 미리 정해졌다는 것을 불러주실 때 비로소 한꺼번에 다 알게 된다는 겁니다. 불러주심이 딸려서 다 들어간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무엇을 한 것이 전혀 없는데, 죽은 자를 주님이 그냥 불러주셨다는 겁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는 말이죠.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헌금을 하다가 죽었는데, 죽을 만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여보, 우리 반만 하고 반은 감추자" 라는 것은 주님의 부르심을 모독하는 짓이라는 말이죠. 십자가 계시를 모독하는 짓이라는 겁니다. 자기의 능력이 거기에 왜 가미가 되어야 하느냐는 것이죠. 죄 짓는 능력을 거기에 왜 섞느냐는 겁니다.

우리는 그냥 가볍게 살아가면 되는데, 이 세상이 들썩들썩하고 움직일 때, 우리는 깃털이 되어서 같이 움직이면 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그 시공간을 주님이 날아다니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과 같이 날아다니면 되는데, 몸무게가 조금 많이 나가도 역시 깃털이라는 말이죠(ㅋㅋ).

우리의 평생 숙제를 이미 주님이 다 해놓으셨는데, 그러면 남은 것은 무엇인고 하니, "왜 내가 행한 것과 주님이 행한 것이 차이가 나는가?" 라는 겁니다. 우리는 그 차이를 통해서 기뻐하고 감사하면 된다는 것이죠.

자기가 자기를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서 애썼던 그 모든 것들을 주님은 발로 차버리는데, 그런데 우리는 죄의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날마다 우리에게서 나온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방금 말한 로마서 8장 30절이라는 말이죠.

* 육신에 새겨진 할례 !!

그렇다고 하면 신약에 이런 계시가 있다고 하면, 구약에는 어떨까요? 물론 구약성경에도 있다는 겁니다. 그것을 두 가지로 이야기해보겠는데, 첫째가 할례라는 말이죠. 그 할례가 무엇인고 하니, 육신 속으로 파고 들어온 하나님의 계시라는 겁니다. 마치 문신을 새기듯이 들어왔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계시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육신 속으로 새겨졌는데, 그것이 할례라는 겁니다. 남성 생식기 끝을 자름으로서 "이제부터 너는 계시와 더불어서 움직이는 자다" 라고, 그렇게 하나님이 미리 정해버렸다는 말이죠.

그런데 구약의 경우에는, 그게 육신에만 새겨진 것이지, 마음 속까지는 들어오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육신에 박힌 할례가 마음까지 들어오는 긴긴 스토리, 그것이 바로 언약의 전개이고 완성이라는 말이죠.

여기서 히브리서 10장을 보겠는데, 15절과 16절입니다.

(히 10:15)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되
(히 10:16)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

여기 16절에 보면,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라고 하는데, 즉 주님이 우리의 마음을 접수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내 마음 나도 몰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법이, 이전에는 "십계명을 지켜라. 할례를 행해라" 라고 하다가, 그렇게 우리의 마음 바깥에서 계속해서 지시를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의 계시가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물론 우리의 허락도 받지 않고 말이죠. 그렇게 해서 자기가 주인공으로 버티고 있는 자기만의 세계에, 그 은밀한 세계에 주님의 말씀이 들어와서는, 그 은밀함을 쫓아내어 버리고 자리를 잡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 안에서 누가 살게 됩니까? 자기는 죽고 그리스도께서 사시게 된다는 말이죠. 그게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인데, 그러니 이제는 자기 마음이 아니고 주님의 마음이고, 거기서 십자가 사건이 계속해서 이어진다는 겁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주님이 억울하게 죽은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인데, 잘난 척을 하는 인간들에 의해서 말이죠. 죄도 없는 의인이 죄인들에게 죽은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건이 우리 마음 속에서 되풀이가 된다고 하면, 우리의 역할은 잘난 척을 하는 것이라는 말이죠.

물론 잘난 체만 하면 지옥으로 가는데, 그런데 그렇게 잘난 체를 하는, 남들에게 지기를 싫어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을 위해서 대신 돌아가신 분이 있다는 겁니다. 즉 "그분이 우리 대신에 자기 피와 살을 내어주셨다" 라는, 그게 계속해서 반복해서 우리의 삶을 통해서 벌어진다는 말이죠.

그것이 구약만이 아니고 신약성경 전체까지, 사도바울이 전한 것까지 우리 속에 들어온다는 겁니다. "우리가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 라고 하는 사도요한의 말씀까지도 말이죠.

(요일 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러면 우리는 "내가 미쳤나? 내가 살기도 바쁜데, 다른 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다니, 이것을 말도 안 된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때 손위 동서에게서 전화가 걸려오는데, "우리 집 아이가 간이식을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혹시 네 아들이 검사를 한번 받아보면 안 될까?" 라고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요한일서 3장 16절이고 뭐고 간에, 나는 이미 십자가로 구원을 받았어. 나는 몰라" 라고 하게 되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그것은 우리에게서 나온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신다는 겁니다.

우리는 날마다 그것을 확인하면서 살아가는데, 제 아무리 신앙이 있는 척을 해도 들통이 난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주님의 신앙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지, 우리의 신앙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이 주님과의 관계인데, 자기가 주님을 쳐다보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미리 정하셨다고 하는, 그 주님의 관계가 더 강력하다는 말이죠.

* 자기밖에 모르는 지독한 죄 !!

그러면 우리의 할 일은 간단한데, 우리는 죄만 지으면 된다는 겁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지독한 죄, 그런데 그 죄를 지을 때마다 은혜와 감사가 터져 나온다는 말이죠. 단 거기에는 조건이 있는데, 자기 자리가 누구의 자리가 되는고 하니, 이미 주님의 자리가 되는 조건이라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부러 죄를 지으려고 하지 말고, 그렇게 되면 그것은 자기 자리라는 말이죠. 성령이 오지 않은 상태에서는, 아무리 해도 그것은 흉내를 내는 것이고 자기 자리라는 겁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접수한 계시의 자리, 즉 십자가의 자리가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성도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가벼운지 모른다는 겁니다. 주변의 나타나는 상황에 대해서 성질은 성질대도 다 부리면서, 그렇게 해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이 다 들통이 나고 만다는 것이죠. 하지만 그것이 기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 사도바울이 증거한 십자가 !!

그래서 "주님, 제가 이것밖에 안 된다는 것을 또 다시 체험을 하게 됩니다" 라고 하게 되는데, 즉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는 말이죠. 로마서 5장 20절 말씀이 그냥 있는 게 아닌데, 이러한 자들은 이미 자기 자리가 성령에 의해서 접수가 되었다는 겁니다.

(롬 5: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그리고 로마서 7장에서도 사도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내 안에 선과 악이 있는데, 악이 선을 이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러한 사망의 몸에서 누가 구원해주신다는 겁니까? 그분이 주의 성령이라는 겁니다.

(롬 7: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렇게 되면 자기의 구원보다도 무엇을 증거하게 됩니까? "나는 구원을 받았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가 자기 안에서 계속해서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을 증거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게 새언약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그런 하나의 도구이고 운반체인데, 그게 바로 성도라는 말이죠. 즉 "나는 죄인이고, 주님은 그러한 나의 죄 때문에 희생을 당한 분이다" 라고 하는 것이 다같이 들어있는 그릇, 그것이 성도라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가 자랑하는 것은 무엇이라는 겁니까? 자기가 아니고, 오직 예수의 십자가라는 말이죠. 그것말고 다른 자랑거리가 튀어나온다면, 그것은 성도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오직 십자가만 자랑했다는 것이죠.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 계시는 외래적이다 !!

그러면 여기서 또 한 가지 우리가 살펴봐야 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첫 번째는 할례였다는 겁니다. 이것은 조금 어렵지 싶은데 말이죠. 여기서 룻기 4장을 살펴보겠는데, 16절과 17절입니다.

(룻 4:16) 나오미가 아기를 취하여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룻 4:17) 그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주되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 하여 그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비인 이새의 아비였더라

17절에 보니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 라고 하는데, 나오미는 룻의 시어머니라는 말이죠. 그런 여인이 어떻게 아들을 낳겠느냐는 겁니다. 그런데 그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는 것인데, 그 이름이 오벳이라는 말이죠. 오벳은 '종' 이라는 의미인데, 그가 바로 다윗의 할아버지라는 겁니다. 오벳이 이새를 낳고, 이새가 다윗을 낳았다는 것이죠.

이게 왜 중요한고 하니, "계시는 외래적이다" 라는 겁니다. 즉 계시는 외부에서 와야한다는 말이죠. 이렇게 계시가 외래적이라면 내부는 무엇일까요? 룻은 사사시대인데, 그 시대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그게 사사기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데, 즉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삿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그런데 룻기 마지막 장인 4장에 보면 다윗이 태어나는데, 다윗은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서 태어난 자입니까?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말이죠. 그런데 사사시대는 왕이 없는데, 즉 개인이 있을 뿐이라는 겁니다.

* 인간 내부 = 개인 + 율법 !!

그렇다면 내부적으로는 각각의 개인들이 무엇을 붙들고 있었는고 하니, 그들은 "개인 + 율법" 이라는 계시를 붙들고 있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각각의 개인이 율법을 해석할 때, 그것은 인식론으로 한다는 겁니다. 즉 "율법을 지킴으로 나에게 이익이 온다" 라고 하는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게 된다는 것이죠.

* 사사시대의 12토막 송달사건 !!

사사시대에 무슨 일이 있었는고 하니까, 어떤 레위인이 자기 첩이 집단 강간을 당해서 죽게 되자, 그 시체를 12토막을 내어서 각 지파들에게 보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이 궐기를 했는데, "우리가 정의를 사랑하는 이스라엘이라면 당연히 그 범인들을 색출해서 처단을 해야한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래서 그만 이스라엘에 내전이 일어나고 말았는데, 그래서 처음에는 누가 이겼습니까? 정의의 편일까요? 불의의 편일까요? 범인으로 지목된 베냐민 지파가 정의의 편인 지파 연합군에게 승리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 자기들의 소견대로 하나님이 따라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말이죠. 두 번째도 패배하게 되는데, 그러자 그들이 하나님께 기도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 과연 우리에게 그럴 자격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라고 말이죠. 그게 사사기 끝 부분인 20장과 21장에 나온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정의로운 분은 맞지만, 자기들이 정의 편이라는 근거가 없다는 말이죠. 그것은 자기들 각자의 소견이었다는 겁니다. 20장 24절과 25절에 보면, 정의의 편이라고 하는 자들이 18,000명이 죽게 되는데, 이게 두 번째 전투였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때 불의의 편인 베냐민 지파는 전혀 이상이 없었다는 겁니다.

(삿 20:24) 그 이튿날에 이스라엘 자손이 베냐민 자손을 치러 나아가매
(삿 20:25) 베냐민도 그 이튿날에 기브아에서 그들을 치러 나와서 다시 이스라엘 자손 일만 팔천을 땅에 엎드러뜨렸으니 다 칼을 빼는 자였더라

그리고 그 앞의 전투에서는 정의의 편이 22,000명이 죽었다는 말이죠. 40만명과 26,700명이 붙었는데 결과가 그렇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연합군은 40만명 중에서 4만명이 죽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도대체 정의의 편이 왜 이렇게 작살이 납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계시가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주어지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내부는 하나님의 율법을 마치 자기가 아는 것처럼, 그렇게 구성이 되어있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그것을 결합시켜서 자기를 계시의 사람으로 간주한다는 겁니다.

여기에서 오늘 공부한 전체를 생각해보면, 자기가 계시를 받았다는 것은 자기가 죄인이 된다는 겁니까? 의인이 된다는 겁니까? 죄인이란 것인데, 그러면서 계시가 결합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은 "저것들은 나쁜 놈들이고, 우리는 착하다" 라고 해서, 자기들을 하나님의 율법과 결합시켰다는 겁니다.

* 다시 룻기로 돌아와서 !!

다시 룻기로 돌아와서, 나이가 많은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고 하는데,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나오미가 속해있던 엘리멜렉 가문은 자식이 없었는데, 그런데 율법에 의하면 자식이 없다는 것은 저주를 받은 것이란 말이죠.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각 지파에게 땅을 분배해주셨는데, 땅은 원래 여호와 하나님의 것이었는데, 그래서 그 땅을 하나님이 그들에게 임대해주셨다는 겁니다. 그게 약속의 땅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그 땅을 어떻게 해야할까요? 가문의 대를 잇는 자식이 열심히 노동해서, 하나님이 주신 그 상속분을 계속해서 유지해야하는 책임이 뒤따른다는 겁니다. 물론 그게 아들이 해야할 몫인데, 딸은 시집을 가면 그만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엘리멜렉 가문은 아들이 없는데, 장가를 보내도 자식이 생기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땅에 살다가 가뭄이 너무 심해서 모압 땅으로 갔는데, 그런데 거기에서 있는 아들들마저도 잃게 된다는 말이죠. 미처 자식도 낳지 못하고 그만 죽고 말았다는 것이죠.

이 일로 인해서 나오미가 무엇을 알게 됩니까? "가뭄이 든다고 해서 약속의 땅을 버리고 모압 땅으로 가니, 여기서 하나님의 죽은 율법이 아닌 살아있는 율법이 우리 가문을 저주받는 가문으로 만들었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나오미' 라는 이름은 '기쁨의 여인' 이란 의미인데, 그래서 나오미는 자기 이름을 '마라'로 바꾸게 된다는 말이죠. 이것은 '슬픔의 여인' 이라는 의미인데, 제대로 깨달았다는 겁니다. 자기는 죄인이라는 것인데, 그 죄인과 율법이 만났다는 것이죠.

그러면 이렇게 저주를 받은, 즉 자식이 없는 것에서, 이것이 구원받는 천국노선과 연결이 되려고 하면, 그 중간에 아들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나이가 많아서 자식을 낳지 못하는데, 그러면 유업을 잊지 못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약속의 땅에서 끊어진다는 말이죠.

그런데 룻기 4장 17절에 보면 나오미가 아들은 낳는데, 그러면 그 아들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내부입니까? 외부입니까? 외부에서 왔는데, 외래적이라는 겁니다. 완전히 다문화 가정이라는 말이죠. 모압 여인이 그 율법을 따라왔다는 겁니다.

* 나는 이 율법과 함께 있겠다 !!

그러니 룻은 시가 집을 보고 시집을 와서 있었던 것이 아닌데, 그 집에 하나님의 율법이 살아서 작동한다는 것을 알고, 그 찬스를 놓치지 않고 붙잡았다는 말이죠. 즉 "내가 다시 모암 남자에게 시집을 가는 것보다도, 이 하나님의 율법과 함께 있겠다" 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율법이 시가 집을 박살낸 것은, 여전히 율법이 살아있다는 의미라는 말이죠. 그렇게 룻은 그 계시 안으로 풍덩 뛰어들면서, 율법에 의해서 제법 괜찮은 남자인 보아스를 만나게 된다는 겁니다. 재벌가에 시집을 간 것인데, 그래서 자식을 낳게 된다는 것이죠.

물론 나오미가 뒤에서 코치를 조금 해주었는데, 그게 "여자가 달려드는데 거부할 남자는 이 세상에 없다" 라는 식이었다는 겁니다. 사실은 조금이 아니고 아주 자세하게 방법까지 가르쳐주었는데, "그의 발 밑에 누워 있다가 살살 기어올라가라" 라고 말이죠(ㅋㅋ).

* 룻에게서 !!

여기에 대해서 보아스는 점잖은 남자가 되어서 정식으로 절차를 밟자고 하는데, 그런데 보아스는 순번이 두 번째였다는 겁니다. 그런데 첫 번째가 포기를 함으로서 결혼을 하게 되는데, 그래서 아들을 낳게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드디어 '룻에게서' 다윗이 태어나게 된다는 겁니다.

(룻 4:17) 그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주되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 하여 그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비인 이새의 아비였더라
(룻 4:18) 베레스의 세계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았고
(룻 4:19) 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룻 4:20)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룻 4:21)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룻 4:22)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그런데 그 다윗마저도 어떻게 됩니까? 밧세바를 통해서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죄인들로 구성된 이스라엘인데, 물론 백성들도 잘난 척을 하지만, 그들의 왕 차제가 죄인 중의 괴수라는 말이죠. 그리고 그렇게 깨닫게 하는 계시가 들어오게 될 때, 이스라엘은 제대로 된 진짜 이스라엘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미리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그 모든 구성체는 외부에서 주어진다는 말이죠. 그렇게 외부에서 와서 내부의 한계를 드러내는 계시, 그것이 계속해서 저와 여러분에게도 주어지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가 성령을 통해서 들어와서, 자기처럼 질이 나쁜 인간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그런 깃털과 같은 가벼운 즐거움으로 인해서, 수고하고 무거운 모든 짐들이 다 떨어져 나가는 순간들을 경험하면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24,10,29 오후 7시에 마침.

비록 그 깃털이 빗물에 젖더라도 가벼움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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