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대구강의]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04 - 뗏목
24,09,02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오늘은 교재 23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
*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영적인 전쟁이 벌어지는데, 양편으로 편이 나누어져 있습니다. 이 요한계시록의 특징은, 악마가 자기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숨어있다는 것인데, 그리고 예수님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
(계 12:7)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계 12:8)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계 12:9)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 보이지 않는 두 편 !!
요한계시록 12장에서 이 세상이 예수님과 마귀, 그렇게 양편으로 나눠져 있는데, 예수님도 숨어있고 마귀도 숨어있다는 겁니다. 성경에서는 분명히 양편으로 되어있다고 하는데, 그런데 막상 그 나누어진 최고 지휘부는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어떻게 알 수가 있을까요? 그것은 인간들이 두 종류가 있다는 것인데, 예수님에게 속한 자들이 있고, 또 악마에게 속한 자들이 있다는 겁니다. 성경에서 구분이 되었다고 하니 구분된 것이 분명 맞는데,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인식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자기가 말씀의 세계 속에 놓여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가 없다는 겁니다.
여기서 일단 문제는 던졌는데, 분명히 보이지 않는 두 개의 세력이 있는데, 그런데 인간세계에서는 양쪽이 다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그렇게 두 패로 나누어진 힘이 보이는 인간세계에 나타났을 때, 어느 쪽이 예수님이 편이고 어느 쪽이 악마 편인지,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떤 조치를 취하시느냐는 겁니다.
그러니 이게 중요한 문제인데, 지금 "나는 예수님 편에 속하고 싶어요" 라는 것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의 요구사항이라는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어떤 무리를 두고, "너희들은 예수님께 속했다" 라고 이야기를 하시느냐는 겁니다.
그게 교재 25페이지에 나오는데, 거기에 보면 "마치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 태가 죽었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산 것처럼, 마치 이삭이 없는데 생긴 것처럼"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아브라함이 등장해서, "하나님 쪽에 속한 사람은 이러한 공통적인 현상을 나타낸다" 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이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 즉 믿음의 샘플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속한 자에게는 아브라함에게 일어난 일과 동일한 일이 계속해서 일어난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은 우리 인간이 손을 쓸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사라의 태는 죽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것을 아브라함과 사라가 다 인정을 했는데, 그리고 동네 사람들도 다 인정을 했는데, 그런데 놀랍게도 그 죽은 태가 작동을 하면서 임신이 되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여기서 교재 25페이지를 보겠는데, 거기에 로마서 4장의 말씀이 나온다는 겁니다. 4절에서 8절인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롬 4: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롬 4: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롬 4: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롬 4:7)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롬 4:8)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 죄를 묻지 않고 의인이 됨 !!
이게 누구에게 나타난 일이고 하니,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다는 말이죠. 여기에서 놀라자빠질 일이 발생하는데, 그것은 '죄를 묻지 않고 의인이 됨' 이라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사라의 태가 죽었는데 임신이 됨' 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죠.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이 자기를 죄인이라고 한 적이 있습니까? 그런 내용이 나오지 않는데, 신약에서는 죄인이라는 이야기가 수없이 나오지만, 구약의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그런 것이 없다는 겁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이,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한 적이 없다는 말이죠.
아브라함은 자기 성깔대로 살아가는데, 그것을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지켜보신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가는 곳마다 드론을 띄워서 촬영을 하신다는 말이죠. 아브라함은 죄의식도 없이 살아가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의인으로 만드셨다는 것이죠.
이것이 어려운데, 그렇게 죄의식이 없이 의인이 되었다고 하면, 여기 교재 25페이지에 나오는 로마서 8장의 '의인됨', 그것이 어디서 왔는고 하니, 그게 믿음에서 왔다는 겁니다. 그래서 5절에 보면,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아브라함이 믿었던 믿음이 의라는 것입니까? 아니면 아브라함에게 생겨난 믿음이 의라는 것입니까? 아브라함에게 생겨난 믿음이 의라는 것인데, 그러니 아브라함과 상관이 없이 죽은 사라의 태를 통해서 임신이 되면서, 거기서 믿음의 근거가 출생하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자식을 낳으려고 특별한 노력한 게 아닌데, 그냥 자식이 없으면 없는 상태로 그냥 살아갈 뿐이라는 겁니다. 물론 요즘은 시험관 아기 시술도 있지만 말이죠. 그렇게 형편 따라서, 상황 따라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드론을 띄웠다는 것도 모르는데, 왜냐하면 "예수님 편인가? 악마 편인가?" 라는 게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말이죠. 우리의 관심사는 자기에게 있는데, 즉 "나의 생활이 안정적인가?" 라는 것이 관심사라는 겁니다. 물론 성경을 보기는 보는데, 진도를 나갈 뿐이지 자기 실생활과 관련해서 보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죠.
* 이삭은, '죽었다가 살아난 자' !!
그런데 하나님께서 죽은 사라의 태를 통해서 임신을 시킴으로서, 믿음의 근거가 되는 인물이 태어나는데, 그게 이삭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삭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죽었다가 살아난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이삭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사건은, 하나님의 의도적으로 아브라함에게 지시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이죠.
그게 바로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바치는 것인데, 즉 이삭이 제단에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겁니다. 지금까지는 어려운 것이 없는데, 그런데 뭔가 중요한 것이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습니까?
* 덮쳐진 구원 !!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바뀌게 될 때, 여기에는 죽었다가 살아난 자가 들어가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아브람과 아브라함이 분리가 된다는 말이죠. 이것을 신약에서는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 '구원'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의 태가 분명히 죽었는데, 그런데 살아났다는 말이죠.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가 임신이 되도록 노력한 것이 아닌데, 그냥 주어진 상황에 맞추어서 살아가는데, 그런데 그만 구원이 덮쳤다는 겁니다.
* '아브람' VS '아브라함' !!
그러면 아브람과 아브라함의 차이점은 과연 무엇일까요? 아브람은 자기의 운반체이고, 반면에 아브라함은 죽었다가 살아난 이삭의 운반체라는 말이죠.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의 언약의 운반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 자랑거리를 만들기 위해서 살아가는데, 그러면 아브람이 자랑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자기 가족과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그게 그의 자랑거리라는 말이죠. 즉 자기 자랑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자랑거리는 과연 무엇일까요? 죽었다가 살아난 이삭, 즉 하나님의 언약을 자랑한다는 것이죠.
이 전체가 곧 구원인데, 그러면 구원이란 무엇인고 하니, '나'와 '나' 사이가 쪼개지면서, 이전에는 '나'를 운반했는데, 즉 "나는 이런 사람이다" 라는 것을 운반했다는 겁니다. 이것을 좀 더 어렵게 말하면, '타인으로부터 인정받는 나'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이 타인이 그만 날아가 버리는데, 그러면서 무엇을 자랑하는고 하니, 죽었다가 살아난 분의 운반체이기 때문에, 즉 하나님의 언약의 운반체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이 무엇의 근거가 되는고 하니, 조금 전에 했는데, 이게 믿음의 근거가 된다는 말이죠. 그리고 이 믿음 근거에서 하나님의 의가 나온다는 겁니다.
그것이 로마서 4장 4절의 말씀인데, 즉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라고 한다난 겁니다. 그러니까 의롭다고 하기 위해서는 경건이 다 빠져나가야 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경건이 있게 되면 그것은 곧 자기 자랑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경건으로는 구원이 될 수 없는데, 경건이란 것이 자기가 일한 대가로 주어진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말이죠.
(롬 4: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그러니 아브라함의 경우에, 하나님께서 "경건치 아니한 자를" 라고 하시는 것은, "네가 경건하든 말든, 일단 너는 의인이 되었다" 라는 겁니다. 그것을 두고 조금 전에 "죄에 대한 의식이 없는데 의인이 되었다" 라고 했다는 말이죠.
이것은 우리가 좀 생각을 해봐야 하는데, "나는 내가 죄인인 줄도 모르고 있는데 의인이 되었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황당하지 않느냐는 겁니다. 뭔가 주는 것이 있어야 받는 것이 있다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라는 말이죠.
* 하나님, 용서해주세요 !!
"하나님, 제가 이렇게 죄를 지었습니다. 제발 용서해주세요" 라고 하면, 하나님은 "그래, 네가 그렇게 용서를 구하는구나. 내가 용서해줄게" 라고 하시는데, 그러면 우리는 "앗싸, 나는 이제 의인이 되었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고방식인데, 하지만 이렇게 되면 '나'와 '나' 사이가 과연 분리가 되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분리되지 않는데, 그럴 경우에는 자기 의를 유지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자기의 '회개' 라는 재료로 집어넣어야 한다는 말이죠.
왜 옛날 여러분이 초등학교를 다녔을 때, 겨울에 교실에 석탄난로가 다들 있었지 싶은데, 그런데 그 난로가 꺼지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계속해서 석탄을 집어넣어 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거기에 알루미늄으로 된 사각도시락을 올려놓곤 했다는 말이죠.
그렇게 "제가 잘못했습니다" 라고 하는 재료를 집어넣어야, 그 결과로서 "그래, 네가 의인이구나" 라고 하는, 그런 의가 생산이 된다는 겁니다. 그게 우리의 상식인데, 우리는 다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죠.
하지만 이렇게 되면 두 번째 '나', 즉 '나2'가 사라지고 마는데, 그러면 첫 번째 '나', 즉 '나1'과 '예수님'이 상대하는 것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그런데 경건치 아니했음에도 불구하고 의인이 되어버리면, 이 '나1'은 어떻게 되는고 하니까, 그만 '단절'이 된다는 겁니다. 즉 구원받은 나와 지금의 나가 끊어지고 만다는 것이죠.
여기서 제가 물어보겠는데, 이삭은 누구의 아들입니까? 아브라함의 아들인데, 그렇다면 아삭은 아브람의 아들은 아닙니까? 아닌데, 왜냐하면 그때 사래의 태는 죽어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약속은 아브람이 아닌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서 주어진다는 말이죠.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서 메시야가 태어나게 되는데, 그래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는 겁니다.
* 새롭게 정립되어야 하는 '구원' !!
이렇게 되면 여기서 우리는 구원에 대해서 다시 새롭게 정립할 필요가 있는데, 왜냐하면 그동안 우리는 자기 구원을 위해서 성경말씀을 보고 교회에 다니면서 주님과 상대를 했었다는 말이죠.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다는 것이죠.
하지만 거기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개입을 함으로서 주님은 우리와 상대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나2'와는 상대를 하신다는 말이죠. 그렇게 '나1'에서 단절이 되면서 '나2'가 새로 생기게 되면, 이것을 두고서 '구원'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구원의 시작은 "나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 라는 것인데, 그런데 이 '나1' 이라는 것이 만만치가 않다는 말이죠. 이 '나1'은 자기 자랑, 즉 하나님으로부터, 예수님으로부터, 타인으로부터 자기 자신이 자랑거리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엄청나게 노력을 많이 한다는 겁니다. 인정받기 위해서 애를 쓴다는 말이죠.
강의처음에 이 세상은 예수님에게 속한 세상과 악마에게 속한 세상으로 나누어졌다고 했는데, 그러면서 그게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는 겁니다. 다만 보이는 것인 인간인데, 그러면 어느 쪽이 예수님 편이고, 어느 쪽이 악마 편인지,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말이죠.
그것이 '나1'과 '나2'의 단절로 답변이 되는데, 기존의 '나'가 아닌 예수님 안에서 새로 생긴 '나', 즉 '나2'가 되겠는데, 그런 '나2'가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바로 예수님이 손을 댄 자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자가 예수님 편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나1'이 단절이란 현상도 없이 계속해서 구원받기 위해서, 천국에 이르기 위해서 애를 쓴다고 하면, 그런 자는 구원된 적이 없는 자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천국과는 거리가 먼 자라는 말이죠.
우리가 다음과 같은 생각도 해볼 수 있는데, "아브라함은 참 좋겠다. 죽은 아내의 태를 통해서 눈에 보이는 이삭이라는 확실한 구원의 증거물을 받았으니 참으로 좋겠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브라함의 경우에도 아브람이 계속해서 남아있었다는 점을 생각해봐야 한다는 말이죠.
육신, 즉 '나1' 인데, 이것을 지키려고 하면 할수록 하나님은 '나1'에서 나온 뜻을 의도적으로 깊이 빠뜨려 버린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아브라함은 자기 자랑을 하고 싶은데, 그런데 주님은 점점 더 난처한 지경으로 몰아넣는다는 것이죠.
그래서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이 자기가 죄인이라고 하면서 죄 용서를 구하는 경우는 없지만, 그러나 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아비멜렉에게 자기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거짓말을 한다든지, 그렇게 아브라함이 처한 상황자체가 힘들게 되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몰아가신다는 것이죠.
이것은 무엇을 보여줍니까? 예수님에게 속한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현상은, 물론 이미 의인은 되었지만, 자기 몸뚱아리, 즉 '나1'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은,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 뜻이 무엇입니까? 자기를 둘러싼 하나님과 타인에게 인정을 받는 것인데, 그게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래서 아브라함은 '나1'과 '나2'가 끊어졌다는 것을 이삭을 통해서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 자신을 자기가 끊어낼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 운반체가 되고 싶다는 것이죠.
그러면 여기서 누가 조력자로 나서는고 하니, 그게 악마라는 말이죠. 이미 의인이 된 것과 새삼스럽게 의인이 되고자 노력하는 그 격차, 그것을 더욱 더 뚜렷하게 하기 위해서 악마가 '나1'을 부추긴다는 겁니다.
* 악마의 부추김과 선과 악의 확장 !!
그러면 악마가 왜 그렇게 부추기는고 하니, 지금부터 그것을 설명해드리겠는데, 이것도 약간은 어려운데 말이죠.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는데, 그리고 우리는 그 아담의 후손인데, 그러면 우리 안에 선과 악을 평가할 수 있는 지식이 들어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담만 선과 악을 아는 것이 아니고 오늘날 우리도 선과 악을 하는데, 이게 그만 골칫거리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아담 이후에 환경에 주어지면서, 선과 악에 대한 내용이 확대가 되고 확산이 되면서 그 깊이를 더하게 된다는 겁니다. 선과 악이 말이죠.
율법을 통해서, 즉 "율법을 지키면 선이고 지키지 않으면 악이 된다. 그래서 선한 자는 복을 받고 악한 자는 저주를 받는다" 라는 것이 구약성경에 나오는데, 그런데 이것은 선과 악에서 아예 벗어나 버리는 것이 아니고, 선과 악의 확장이라는 겁니다.
이러한 선과 악에 대한 확장, 우리 인간은 매사에 그렇다는 말이죠. 즉 모든 일에 있어서, "이것은 악이고, 또한 이것은 선이다" 라는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선과 악이 확장된다는 것인데,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라는 것이죠.
유대인들은 하나님에게 율법을 받아서, 그 율법을 누구를 죽이는데 사용을 했습니까? 예수님을 죽이는데 사용을 했는데, 거기서 예수님 편과 악마 편으로, 그게 십자가를 통해서 확연히 드러났다는 겁니다. 그러면 악마 쪽에 속한 자는 무엇을 고집하고 있습니까? 확장된 선과 악을 계속 붙들고 살아가는 자들이라는 말이죠.
오늘날 구원받은 자들은 죄 의식도 없이 이미 의인이 되었는데, 그런데 악마가 어떻게 합니까? 우리에게는 선과 악의 지식이 들어있는데, 그것을 악마가 집어넣어 놓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악마는 그것을 그냥 놔두는 것이 아니고, 계속 건드린다는 말이죠. 그러면 선과 악에 대한 지식도 역시 확대가 된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 것은 무엇이 됩니까? 선이 되고 마는데, 그러면 로마서 4장 5절에서, "일을 하지 않아도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 라고 하는 원칙에 어떻게 됩니까? 맞지가 않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이미 우리의 의지와 상관이 없이 의인이 되게 했다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무엇입니까? 자기의 선악지식에 기반해서 자아를 살리는 쪽으로, 그렇게 해서 의인이 되고 싶어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자기 자랑거리가 생긴다는 것인데, 경건하다는 자기 자랑거리가 말이죠.
이것을 마귀가 도와주는데, 마귀는 선과 악밖에 모른다는 겁니다. 그래서 마귀는 "이것은 선이고, 이것은 악이다" 라고 하면서, 그렇게 계속해서 우리를 추궁하면서 밀어 부친다는 겁니다. "악한 자가 되면 안 돼. 착한 사람이 되어야지. 경건한 사람이 되어야지" 라고 한다는 것이죠.
그러면 우리의 '자아1'이 그것을 알아듣습니까? 알아듣지 못합니까? 잘 알아듣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무엇을 잊어버리게 됩니까? 그만 '자아2'를 잊어버린다는 말이죠.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이미 의인이 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 근거는 자기가 아니고 죽었다가 살아난 이삭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마귀의 부추김으로 인해서 그만 그 연결고리를 잊어버리게 되는데, 그러면 마귀는 당연히 신이 날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를 보고는 더욱 더 "제대로 해봐. 똑바로 해야지. 어디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어?"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 이 샘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
우리가 이런 사정을 알았다고 하면, 찬송가에 보면 "이 샘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라고 하는 가사가 있는데, 이게 구약적 발상입니까? 신약적 발상입니까? 그것은 구약적 발상이라는 말이죠. 언약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그 언약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그렇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샘에 죄를 씻으면 자기가 깨끗하게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 뭐라고 합니까? 예수님이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라고 하시니, "그런 물을 나에게도 주옵소서" 라고 한다는 겁니다.
(요 4:1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요 4: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 4:15)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우리가 그런 차이를 알았는데, 그러면 이것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겁니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한다고 되는 게 아니고, 왜냐하면 그것은 악이 아닌 선에 속하려고 하는 마음가짐이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그런 것을 프레임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선과 악의 프레임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가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이 의인이 되었다는 것이 별로 내키지 않는데, 우리는 현재 자기에게 있는 것을 붙들고 싶다는 것이죠.
* 예수님의 자아 !!
그러면 그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면서도 인간인데, 바로 여기서 겹치는 것이 예수님의 자아라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에, 아브람은 아브람이지 아브라함은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여기에 언약이 개입함으로서 이삭이 태어나게 되는데,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주셨다는 겁니다.
그렇게 죽었다가 살아난 이삭이 개입되면서 '나1'에서 '나2'가 되고, 그러면서 그 '나2'가 구원이 된다는 말이죠. 이것은 그냥 "나2가 구원된다" 라는, 그런 의미가 아니고, 전에는 '나1'이었는데, 즉 과거에는 아브람이었는데 이제는 아브라함이 되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전에는 나의 운반체였는데, 이제는 이삭(약속)의 운반체가 되었다" 라고 하는, 그런 의미라는 말이죠. 그렇게 자기를 통해서 계속해서 약속이 운반되어지는 것, 그것을 두고 뭐라고 하는고 하니, '구원됨', 혹은 '구원받은 상태'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러한 예수님과 인간, 그 공식이 누구에게 겹치는고 하니, 그것이 그대로 아브라함의 '나1'에게 겹치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됩니까? 자기밖에 몰랐던 아브라함이, 장차 오실 예수님의 품성을 닮게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당시에는 이삭인데 말이죠.
* '자아1'과 '자아2'가 겹쳐진 아브라함 !!
전에는 자아가 인간 안에 있다가, 그런데 언약이 오면서 자아가, 여기에는 인간 요소도 있지만, 하나님 요소에 겹치는 이 부분에 자아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앞의 것이 '자아1'이 되고 뒤의 것은 '자아2'가 된다는 말이죠.
자아1은 선과 악을 주장하는데, 즉 선과 악의 프레임 속에 있는 것이고, 반면에 '자아2'는 하나님의 언약이니, 아무런 일도 한 것이 의인이 된다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아브라함에게 겹쳐져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아브라함은 '자아1'이나 '자아2'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자아1'과 '자아2'가 포개져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아브람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우세하게 되는데, 즉 '자아2'가 우세하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긍휼, 혹은 믿음의 노선이라는 겁니다.
* '선악구조' VS '은혜구조' !!
그래서 여기 교재 25페이지에 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답게 부각시키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그 은혜 안에 뭐가 들어있는가 하면, 예수님의 행하심이 들어있습니다" 라고, 그렇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인데, 그런데 그 은혜는 얼마든지 우리의 허락 없이 도 들락날락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은혜가 셉니까? 자기의 선악 프레임이 셉니까? 당연히 은혜가 세다는 말이죠. 바로 그것을 아브라함이 자기 인생을 통해서 증거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게 예수님에게 속한 자의 특징인데, 그러니 예수님에게 속한 자라고 해서 선악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일반인들과 전혀 똑같은데, 매사에 옳고 그름을 따진다는 겁니다. 어제 그런 설교를 했는데, "인간은 항상 옳은 결정을 하고 싶어한다" 라고 말이죠.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한강다리에서 뛰어내렸다고 하면, 그것은 자기 나름대로는 옳은 결정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 사람에게는 선악구조가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인데, 즉 선악구조보다 더 센 것이 그만 누락이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은혜가 없으니, 즉 그저 주시는 의가 없으니, 구원받지 못한 자가 된다는 겁니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선악구조를 붙들고 있는 악마에 속한 자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죠.
보이지 않는 두 패가 나타난 인간을 통해서 어떻게 드러나는고 하니, 선악구조를 버리는 것이 아니고, 그런 것은 없다는 겁니다. 인간은 매사가 선악구조인데, 그런데 그것보다 더 강한 것이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구원이 되려면 '나1'이 유지되어주어야 하는데, 다만 은혜가 그 '나1'보다, 즉 죄보다 더 세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은혜가 선악구조를 만나면 어떻게 될까요? 로마서 4장 4절에서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라고 하는 그 말씀, 그것을 모든 인간에게 계속해서 그 이야기를 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은혜인데, 그러니 일하는 자는 이러한 은혜에 대한 감각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미 의인이 되었다" 라는 것을 너무나 터무니없는 생각이라고 여기고, 그런 것은 살아가는데 있어서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선악을 알고 있는 자기가 성실하게 살아서, 그 누구에게라도 자기의 성실함을 인정받고 싶어하는 것인데, 그것을 두고 "나는 나를 운반하는 운반체가 되고 싶다" 라고 표현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것을 말씀을 통해서 하게 되는데, 그러니 은혜구조가 없고 선악구조만이 있는 사람은 그 말씀을 밀쳐낸다는 말이죠. 그냥 선악구조를 붙들고 있는데, 즉 "나는 그 따위 이야기를 듣기 싫어. 나는 옳고 그름만 생각해"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은혜라는 것은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 샘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라고 하게 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만큼 정하게 되었으면 똑바로 살아야지" 라고 하는 것이 뒤따라 나오게 된다는 겁니다. 은혜로 가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안다고 하면서 넘어가고, 최종적으로 선악구조만 붙들고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도 역시 선악구조만 붙들고 사는데, 그런데 은혜구조가 그것보다 더 강력하기 때문에, 선악구조를 계속해서 붙드는 일이 잘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자기는 착하기 살고 싶은데, 그게 만만치 않는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악마의 세계에서는 모든 일들이 다 확대가 된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어제까지는 제대로 했는데, 그런데 오늘이 되면 그 선악구조에 의해서 자기는 죄인으로 드러나고 만다는 것이죠. 쉽게 말해서 나쁜 사람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런 갈등이 있을 때 이것을 어떻게 해소하면 될까요? 물론 그 방법이 있다는 말이죠. 오늘 강의제목을 '뗏목'으로 삼고 싶은데, 나이가 제법 든 사람들은 뗏목이라고 하면 두만강이 생각나지 싶은데, 도로가 없어서 나무를 베어서 뗏목으로 만들어서 강을 통해서 운반했다는 겁니다.
나무가 떠내려가면 안 되니 서로 묶는데, 그리고는 그 위에 사람이 올라타고는 긴 막대기를 가지고 방향을 조절해준다는 말이죠. 뗏목이 배라고 하면 이 사람은 사공인데, 그러면 이 사공은 무엇 위에 군림하고 있습니까? 뗏목 위에 군림하고 있는데, 그런데 이 뗏목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선악구조라는 겁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우리 인간이 죽는 이유가 분명히 나오는데, 그것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모든 인간이 선악구조를 알고 있다고 하면, 그 이유로 인해서 모든 인간은 다 죽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사공은 죽음 위에 서있는 것인데, 인간이 그런 선악체계 위에 있다는 것은 곧 죽음 위에 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죠. 그렇게 죽음 위에서 노를 서서히 저으면서 살아가면, 그것이 바로 성도의 삶이라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가정이든 직장이든 교회이든 간에, 매사에 우리는 무엇인가를 타고 있다는 말이죠. 이 뗏목을 좀 더 고상하게 표현하면 '성도의 현존성'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성도는 죽음 위에 떠있고, 이미 그 죽음을 안다는 겁니다.
* 인간은 유령과도 같은 존재 !!
그냥 "선악과를 먹었다" 라고 하면 복잡해지지만, 이것을 뗏목으로 설명하면 아주 간단하다는 말이죠. 그것을 이번 신명기 여름수련회에서 '유령성(幽靈性)' 이라고 했는데, 우리 인간은 유령과도 같은 존재라는 겁니다. 즉 인간은 이미 죽은 존재라는 것이죠.
그냥 늙어서 죽어가는 수준이 아니고, 선악 프레임 때문에 이미 죽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죽음 위에 떠다니기 때문에, 자기가 하는 모든 일은, 즉 선악구조에서 나오는 모든 일은, "그래, 너는 죽어 마땅해" 라는 것으로 귀결된다는 겁니다. 마치 사공이 나무로 만든 뗏목을 타고 결국 목재소로 가듯이, 인간은 죽음으로 돌아간다는 말이죠.
이 뗏목의 모습을 예수님이 먼저 보여주셨는데, 아까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중첩된 것이 예수님의 자아라고 했는데, 그 인간은 죄 있는 인간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죄 있는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다는 말이죠.
그러면 죄가 무엇일까요? 아브라함은 죄 의식이 없다고 했는데, 왜냐하면 자기는 항상 옳은 일만 최선을 다해서 했다는 겁니다. 선과 악 중에서 아브라함은 악은 버리고 선만 추구했다는 말이죠. 하나님까지 동원해서 선한 쪽으로 행동을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그것으로 의인이 된 것이 아닌데, 자기가 똑바로 행동을 하는 것과 이미 의인이 된 것과의 차이성, 그것을 아브라함은 자신의 인생을 통해서 보여주게 된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의인이 된 것은 그의 행동과는 전혀 상관이 없고, 중간에 누군가가 끼어 들었기 때문인데, 그게 바로 이삭이라는 말이죠.
*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
"이 샘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라는 것은 구약에서 신약을 보면서 예언된 것인데, 그러면 구약에서 어떻게 예언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시편 57편인데, 1절을 보겠습니다.
(시 57:1) [다윗의 믹담 시, 영장으로 알다스헷에 맞춘 노래,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굴에 있던 때에]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이 재앙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여기에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이 재앙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라고 하는데, 이때는 뗏목 위가 아니고 날개 아래에 있다는 겁니다. 아직까지 신약의 십자가 사건 이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보호를 받고 싶어한다는 말이죠.
이번에는 시편 32편 1절을 보겠습니다.
(시 32:1) [다윗의 마스길]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셔서 "똑바로 살아라. 그렇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 라고 하시면서, 그게 신명기에 분명히 나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 시편 32편에서는, 왜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라고 하시느냐는 말이죠.
우리가 아는 복은 무엇인고 하니, 율법대로, 즉 말씀대로 살 때 복이 주어지는데, 그래서 단 하나라도 어기면 저주를 받는다는 겁니다. 그것이 신명기의 말씀인데, 그런데 여기 시편은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여기서 말하는 복은 무엇인고 하니,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율법을 모두 이룬 복된 분이 계시다고 하면, 그분이 율법도 하나 제대로 지키기 못하는 우리를 자신의 날개로서 덮어줄 때, 그게 곧 복이 되고, 의인이 되고, 죄 용서가 되고, 구원이 된다는 겁니다.
조금 전에 은혜의 구조가 우리의 선악구조보다 더욱 더 세다고 했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성요소가 더 세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여기서 시편 91편을 살펴보겠는데, 4절을 누가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시 91:4)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나니
여기에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라고 하는데, 즉 주님의 날개가 우리를 덮어주신다는 겁니다. 이것을 우리가 알았다고 하면, 다음과 같은 것을 한 번 생각해보자는 말이죠.
* 우리의 양심까지 파고든 선악구조 !!
인간세계에는 악마가 있다고 했는데, 그 악마가 하는 일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선악체계의 확장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선과 악을 이야기하는 수준이 아니고, 우리의 양심까지 파고든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서, 저기에 컵이 있는데, 그러면 그 컵에 스푼이 있는 것이 좋을까요? 없는 것이 좋을까요? 지금까지는 스푼이 있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있는 것이 좋은데, 그게 바로 선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모든 경우에까지 다 확장을 시켜버린다는 말이죠.
그래서 자기가 다른 신발로 바꿔 신어서 발목이 아프다면, 그것은 악이 되는데, 그래서 또 다른 신발로 바꿔 신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이 율법에 나옵니까? 성경에 나옵니까?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의 행동은 매사가 전부 선과 악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살면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죠.
우리 인간은 악을 피하고 선하게 살고 싶어하는데, 즉 선의 운반체로 살아가기를 원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세상이 자기 뜻대로 됩니까? 전혀 되지 않는데, 그러니 짜증이 난다는 것이죠. 그래서 열을 받고 '자아1'이 아픈데, 즉 자기 몸이 아프다는 말이죠.
그런데 왜 이 세상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느냐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 뜻은 과연 무엇일까요?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선하시니 우리도 선해야 합니다" 라고 하는데, 인간이 이미 선악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대답을 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 선과 악은 마귀가 집어넣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직장생활을 하던 무엇을 하던 힘들지 않을 수가 없는데, 사장이 "잘할 수 있습니까?" 라고 하면, "예, 잘하겠습니다" 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선이라는 말이죠. "나는 못합니다" 라고 하면 취직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런 말은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직장생활을 열심히 잘해야 한다는 것이죠.
* 선악체제와의 칼부림 !!
그러니 이 세상에서 인간과 인간의 만남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을 선악체제와의 싸움으로 보자는 겁니다. 서로 칼싸움을 하는데, 즉 "나도 베이고 너도 베이고", 그렇게 모두가 다 베인다는 말이죠. 그러니 인간들을 만나면서 살아가는 것이 힘들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여기에는 날개로 덮어주고 하는 게 없는데, 그런데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날개가 있는 곳이 있었다는 말이죠. 그것이 곧 언약궤인데, 날개가 언약궤를 덮고 있다는 겁니다. 그 언약궤 안에는 율법이 있는데, 하나님이 그 율법을 확장시키셨다는 말이죠. 율법이 확장되는 곳에 선악이 활개를 치는데, 그게 이 세상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천사가, 그것을 '케루빔(Cherubim)' 이라고 하는데, 보통 아기천사로 묘사가 된다는 말이죠. 그 천사의 날개가 그 모든 선악의 죄를 덮어서 용서해주는데, 그게 구약부터 계속해서 예언이 되어왔다는 겁니다.
여기서 룻기 2장을 보겠는데, 12절입니다.
(룻 2:12)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이게 보아스가 룻에게 하는 이야기인데, 여기에 보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지금 룻이 자기 나라 모압을 버리고 이스라엘로 돌아왔는데, 이것은 뗏목을 운반하는 사공의 상태라는 겁니다.
그게 룻기 1장 16절과 17절에 나오는데, 제가 빨리 읽어보겠습니다.
(룻 1:16)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룻 1: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여기 17절에 보면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라고 하는데, 이것은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를 보고 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이죠. 그런 차원이 아니고, 어머니가 소속이 되어있는 환경, 즉 하나님의 언약을 룻이 알았다는 것인데, 즉 언약이란 날개 아래에 들어가기를 원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언약은 어디서 왔습니까? 아브라함에게서 왔는데, 아브라함은 일한 것도 없는데 이미 의인이 되었다는 말이죠. 그 의인됨의 근거를 아브라함에게서 찾을 수가 없고, 죽었다가 살아난 이삭, 그 모체에 근거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아브라함 시대에는 율법이 없었는데, 430년 이후에 율법이 주어진다는 말이죠. 그렇게 율법이 없으니 죄 의식도 없는데, 이삭도 야곱도 죄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언약이 강력하게 작동을 하니, 죄 의식은 없는데 하는 일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야곱의 경우에는 특별히 사랑해서 채색옷까지 입혀서 키운 요셉이 죽고 말았는데, 실제론 죽지 않았지만 야곱에게는 죽은 것과 같았다는 겁니다. 자식들이 장사꾼에게 넘기고는 아버지에게 말하지 않았는데, 그게 야곱의 인생이었다는 말이죠.
여기서 시편 17편을 보겠는데, 6절에서 8절입니다.
(시 17:6) 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는고로 내가 불렀사오니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
(시 17:7) 주께 피하는 자를 그 일어나 치는 자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인자를 나타내소서
(시 17:8)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
케루빔이라는 날개가 달린 천사가 언약궤를 보호한다고 했는데, 언약궤는 제사의 중심으로, 피가 마지막으로 발려지는 곳이라는 겁니다. 거기에 희생제물의 피를 뿌린다는 말이죠. 즉 "피가 모든 허물과 죄를 용서해준다" 라는 것을 구약적 관점에서 표현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서 구체화가 되는데, 그것을 주님께서는 구약 때부터 천사를 동원해서 꾸준히 보호하고 계셨다는 말이죠. 즉 "내 사람은 내가 지킨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지금까지 구약을 보았다면 이제 신약으로 넘어가서, 이 신약은 뗏목을 생각하면 된다는 말이죠. 구약은 인간 쪽에서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서 호소하고 요청하고 간구하고 갈구하는 느낌이 강한데, 그게 시편에 나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성경의 계시가 구약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구약에서는 언약 속에서 인간이 하나님에게 돌보아달라고 요청을 했다는 말이죠. 즉 "제가 비록 죄를 지었어도 주의 은혜로 덮어주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주의 날개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한다는 말이죠.
*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
그러면 신약은 무엇인고 하니, 마태복음 6장의 주기도문에 나오는데, 13절에 보면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라고 한다는 겁니다. 구약인 창세기 22장의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했는데, 그런데 신약에서는 아예 그 시험에 들어가게 않게 해달라고 한다는 말이죠.
(마 6: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이렇게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 구약이 아닌 신약인데, 이 시험은 그냥 유혹의 수준이 아닌, "새삼스럽게 내가 어느 정도인지 테스트할 수 있는 식으로, 그렇게 나를 측정하지 않도록 해주세요" 라고 하는, 그런 의미라는 겁니다. 자기 믿음을 측정하는 측정기에 자기를 밀어 넣지 말라달라는 것인데, 그렇게 기도하라고 예수님이 가르쳐주셨다는 말이죠.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는데,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 말을 듣고 나서 기분이 좋습니까? 별로 입니까? 기분이 좋다고 하면, 그게 얼마나 오래 가는지 보겠는데, 요한복음 6장 39절입니다. 누가 한번 큰소리로 읽어보세요.
(요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
여기에 보면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라고 하는데, 이것을 누가 하신다는 겁니까? 예수님이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을 맡긴 것이 아니고 예수님에게 맡겼다는 말이죠.
그러니 자기가 탈락되지 않기 위해서 자기 믿음을 가지고 나온다고 하면, 그것은 시험이 빠지는 일이 된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인데, 헌금을 하면서 반으로 쪼겠다는 말이죠.
(행 5:1)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행 5:2)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왜냐하면 그 정도만 해도 대단한 믿음이라고 자기들이 생각한 것인데, 어떤 상황에 대한 믿음의 테스트를 자기가 하고 있다는 겁니다. 즉 자기 믿음에 대한 테스트를 자기가 했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렇게 되면 요한복음 6장 39절이 완전히 모독을 당하고 마는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구원은 이미 예수님에게 맡겨놓았다는 겁니다. 완벽한 구원을 말이죠. 그런데 자기가 왜 거기에 '믿습니다' 라고 하면서 건방지게 끼어 드느냐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그러면 나는 가만히 손을 놓고 있으라는 말인가? 예수님이 하시는 대로 지켜보고만 있으면 되는가?" 라고 할 수 있는데, 하지만 섭섭해할 이유도 없고 허전한 느낌이 들 이유도 없다는 말이죠. 그동안 한 것이 없다는 겁니다. 선악구조 속에서 "믿음은 선한 것이다" 라고 하면서 살아왔는데, 그러니 한 것이 뭐가 있느냐는 말이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게 마옵소서" 라고 기도하라고 했는데, 그러면 그 말씀의 성취는 누가 합니까? 제자들이 합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합니까? 그것도 역시 예수님이 하신다는 겁니다. 그게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데, 19절을 누가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마 18: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여기에 몇 사람이 나옵니까? 두 사람인데, 목사가 시험에 들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 바로 이것인데, 그게 "교인수 + 헌금" 이라는 겁니다. 목회가 하나의 직업이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여러분이 목회를 하는데 교인수가 50명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만 한 주만에 50명으로 줄어들었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냥 가만히 있을 수가 있을까요? 심방을 하든지 아니면 기도원에 가든지, 그 무엇이라도 한다는 겁니다. 즉 선악구조 속에서 자기 잘못을 찾아서 고치려고 애를 쓴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다음 주에는 두 명이 나왔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시험에 들지 말라" 라고 하는 말씀이, 그게 자기가 "나는 정신을 차려야지" 라고 하는 의미가 아니고, 예수님 쪽에서 그 말씀을 완성하신다는 것이죠.
언약궤 위의 날개와 같은 역할을 예수님이 하시는데, 그러면 주의 날개 아래에 거하는데 있어서, 그것이 100명이 낫습니까? 50명이 낫습니까? 아니면 2명으로 충분합니까? 100명이 있으면 날개가 튼튼해지고, 2명이 있으면 날개가 부러지고 하느냐는 겁니다. 그런 것은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기분상 교회에 와서 사람들이 많이 있으면 은혜가 넘치는 것 같고, 그런데 목사와 사모 달랑 두 사람만이 남아있다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당장에 "여보, 우리 이제 망했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ㅋㅋ)
그러면 그동안 과연 무슨 생각을 했느냐는 말이죠. 교인수가 100명이 될 때 자기는 시험에 들지 않는다고 장담을 했었는데, 그런데 선악체제의 확장으로 말미암아서 어떻게 됩니까? 그것도 역시 시험에 든 상태에 있었음이 발각을 당하게 된다는 겁니다.
자기 자식이 학교에 다니는데, 20명이 중에서 평소에 시험을 치면 10등을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중간이라도 하니 되었다" 라고 하고 있는데, 그런데 이번 기말고사에서는 그만 20등을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아이를 위해서 기도를 등한시했나?" 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러면 주의 날개 그늘 아래가 그만 다 날아가고 말았다는 것이죠.
* 선악 프레임은 사라지지 않아 !!
예수님이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해라" 라고 하신 것은,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도록 열심히 기도한다고 해서 시험에 들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 속에 있는 선악체계는 우리 손으로 뽑아낼 수가 없는데, 우리가 죽을 때까지 선악의 프레임은 그 어떤 경우에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이죠.
복음서가 신약성경에 있지만, 그게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오는 중간단계인데, 그 중간단계에서 예수님이 "시험에 들지 말라" 라고 하셨는데, 그러면 완전히 신약으로 넘어와서 사도바울이 전한 편지, 즉 로마서와 같은 곳으로 넘어오면 드디어 뗏목이 나온다는 겁니다.
그 이전에 먼저 누가복음을 보겠는데, 17장 21절입니다.
(눅 17: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라고 하셨는데, 하지만 제자들을 믿지 않고 다들 도망을 쳤다는 겁니다. '자아1'이 살아있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 나라가 아예 우리 안에 키워지고 있었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소자한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라고 하셨는데, 우리 안에서 하늘나라가 커나간다는 말이죠.
예수님이 마귀에게 시험을 받았는데, 그게 돌이 떡이 되게 하는 것이고, 남에게 인기를 얻는 것이고, 그리고 이 세상의 권력도 함께 누리는 것인데, 여기에 대해서 우리 인간은 도저히 빠져나갈 수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내가 얼마나 더 착해야 돈과 인기와 권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라고 하면서, 그게 우리 인간들의 기도내용이라는 말이죠. 그것 자체가 이미 시험에 빠져있는 것인데, 악마에게 놀아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해라"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두 사람이 있어도 예수님만 있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두 사람이 있으면, 왜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느냐는 말이죠.
이미 주님께서는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의인이 되게 하셨는데, 그런데 그런 주님의 은혜와 그 조치는 무시해버리고, "제가 한 것이 꼴랑 두 명입니까?" 라고 하면서, 자기가 한 것을 쳐다보고 있느냐는 겁니다.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야할까요? 그게 신약의 사도바울의 편지에 오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성도의 현존성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이야기한다는 말이죠. 그것을 하기 전에 먼저 사도행전 9장을 보겠는데, 36절과 37절입니다.
(행 9:36)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행 9:37)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뉘우니라
물론 사람이 죽으면 안타깝지만, 특히 구제와 선행을 많이 하던 도르가가 죽자, 교인들이 매우 안타까워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여제자에게 있어서 선행과 구제가 전부였을까요? 그것은 아니라는 말이죠.
그런데 그 죽은 자를 베드로가 와서는 다시 살려내었다는 겁니다. 이것은 아까 이야기한 죽었다가 살아난 것인데, 그것을 도르가라는 여제자를 통해서 실제로 보여주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고린도전서나 갈라디아서나 로마서 등에 보면, 아예 성령께서 우리 안에 와버린다는 겁니다.
* 우리 속에 거하시는 예수님의 영으로 인해서 !!
그렇게 되면 우리는 도르가처럼 육신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지는 않는다고 해도, 우리 안에는 죽어도 다시 사는 영이 있다는 겁니다. 그게 로마서 8장에 나온다는 말이죠. 즉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있으면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롬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예수님께서는 자기 사람은 하나도 잊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에는 모두 다 살린다고 하셨는데, 그렇게 하시면서 실제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그것은 예수님 자신의 영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주님께서는 자신의 일을 완료시켰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행한 것이 하나도 없고 오직 예수님만이 행하셨는데, 바로 그것이 우리 안에서 의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이 하신 일이라는 말이죠.
바로 그런 자들이 여기 교재에 나오는 예수님에게 속한 자들인데, 그러한 자는 그 안에 성령이 있어서, "예수님이 모든 것을 다 했습니다" 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오직 예수님만을 운반하는 예수님 운반체라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가 아닌, 주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해주셨는지를 생각해보면서, 왜 우리는 자기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전혀 손을 쓸 수 없는 존재인지, 그것을 같이 깨닫게 하여주시옵소서. 날마다 뗏목을 탄 사공처럼, 이미 죽은 자인데 주님이 살려주시는 자아로 살아가고 있음을 항상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24,9,24 오후 4시에 마침.
예수님 운반체로 살아감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