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

지옥의 현상

아빠와 함께 2024. 7. 21. 17:13

광주강의20240719a 열왕기상 22장 22절(지옥의 현상)-이 근호 목사


<기독교의 허상> p.92【심판과 지옥】. 지옥에 대해서 오늘 이야기합니다. 지옥, 성경에는 있다고 되어 있고 인간세계에는 지옥이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존재 자체가 지옥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옥이라는 것이 있게 되게 되면 지옥이 있는 게 겁나는 게 아니고 그게 문제가 아니라, 심판을 당하고 난 뒤에 그다음 두 개로 분류되잖아요. 천국과 지옥. 그래서 ‘지옥이 없다’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은 누가 나를 심판하는 자가 따로 없다는 말들을 세상에서는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럼 세상에서는 나에 대해 전혀 심판이 없는가? 있죠. 그게 뭐 대법원 판사까지 올라가죠. 다른 사람이 나를 심판하는 거예요, 다른 사람이. 다른 사람이 심판하는데 좀 기분 나쁘지 않은가? 라고 생각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나를 심판할 때 그게 기분 나쁘지 않은 이유가 이미 애초부터 본인이 본인을 심판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심판하는 것과 내가 나를 심판하는 것이 별 차이 없어요. 견해 차이가 별로 없어요.

그래서 다시 말을 줄이면, 심판은 내가 나한테 하는 심판으로 종결되는 거예요. 내가 나한테 하는 심판으로. 수련회에 참석 안한다. 내가 나한테 심판을 했어요. 결정했어요. 판단을 해버렸어요. 갈까말까를 내가 심판해버렸다니까요. 최종 심판은 내가 나한테 하는 심판이에요.

그래서 인간에게 성경에서 말하는 지옥은 없고 본인이 본인한테 심판해버리면 거기에 유사천국, 유사지옥이 만들어지겠죠. 본인이 본인을 심판하게 되면 나오는 것이 유사천국, 유사지옥. 유사천국은 행복한 것, 행복의 극치. 유사지옥은 지옥의 극치. 지옥이 있다면 이런 곳일 것이다. 파주에 물난리 났을 때 북한에서 탈북한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했죠. 지옥이 있다면 이런 곳이다. 이것은 유사지옥이죠. 지옥의 극치. 이건 누가 판정하죠? 본인이 본인을 심판, 판정 또는 판단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미 자기 나름대로 자기가 행복하면 천국이고, 자기 뜻대로 안되고 자기가 불행하면 지옥으로 느껴지죠. 이것이 이미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 ‘본인이 본인에게’라고 되어 있죠, 그러니까 성경에 나오는 지옥은 나의 존재가 막는 겁니다. ‘지옥은 나의 존재가 막고 있다.’ 성경에 나오는 지옥은 나의 존재가 가로막고 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성경에 나오는 지옥은 없습니다. 없는 이유를 아까 설명했는데 요새 연세들이 있으니까 잊어버렸겠죠. 왜 성경에 나오는 지옥은 없는가? 성경에 나오는 지옥과 천국은 심판을 외부에서 한다 이 말이에요. 심판이니까 감사(監事)죠. 감사를 외부에서 하는 것, 감사(監事)합니다. 드라마 제목이에요. 외부에서 감사를 하는 거예요. 외부에서.

외부에서 감사가 진행되게 되면 평생동안 일생동안 내가 나한테 판정내린 것은 무효가 되는 거예요. 무효가 돼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대목이 중요하기 때문에. 인간이 인간을 판단할 때 판단기준이 뭐라고 했습니까? 판단기준이 여기 성경에서 말하는 외부는 하나님이지만, 이 세상에서의 판단기준은 남이 한다 했죠. 그 남이 하는 것이 상식에 반(反)하는 것이 아니고 상식적인 판단이에요. 그러니까 내 생각과 별 차이가 나지 않아요.

남자하고 남자하고 살림 차렸다. 살림을 살았을 때 의료보험을 뭐 일반가정으로 좀 해달라, 라고 했는데 법원 1심에서는 안 된다. 그런데 대법원 판결 의제에서는 된다, 이렇게 했죠. 그게 사실혼하고 뭐 차이 없다, 판정 내렸습니다. 9대 4로 대법원에서 승소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혜택을 입은 남성과 남성의 동거인은 세상 판단이 자기 판단과 별 차이 없어요.

세상 판단에서 남성과 남성이 살림살이하는데 의료보험을 다른 사람이 결혼 생활할 때 받는 의료보험혜택과 동일하게 해 달라. 남성과 남성이 같이, 자기들 딴에 부부죠, 같이 살림 살면서 그렇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은 딱 이 한 마디에요. ‘우리 둘이 사는데 남에게 해 입힌 적 있냐?’ 이겁니다. 우리 둘이 사는데 우리 둘이 산다고 해서 갑자기 뭐 폭우가 내리거나 그런 거 있어요?

‘너희는 너희 둘이 남자, 여자 붙어 살아. 난 남자하고 살 거야.’ 이렇게 했단 말이죠. 우리 둘이 붙어가지고 조용하게 사는데 그게 남한테 해를 입힌 적이 있어요, 없어요? 물리적으로? 없죠. 없는데 왜 우리 인간의 사적인 행복권, 내 선택의 존엄성 그걸 이 나라에서 왜 차별화시키느냐? 이렇게 나온 겁니다. 그 사람이 그거 할 때 외국 사례를 얼마나 많이 봤겠어요.

그러면 전에는 그게 왜 안됐는가 하는 거예요. 전에는 왜 안됐는가? 해를 입힌다는 것이 뭐 돌 던지고 돈 훔치고 그것뿐만 아니고 사회의 전통적인 기강, 관습이나 관행과 건전한 풍습에 문제가 되는 거예요. 자손들에게 또는 어린 청소년들에게 사람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도 해 입힌 걸로 간주했기 때문에 전에는 그게 용납이 안됐던 거죠.

그럼 뭐 그땐 틀리고 지금은 맞다. 지금은 왜 갑자기 이게 맞는 게 되는가? 그것은 타인의 판단은 나의 판단과 동일시되면서 점점 더 확산되는 거예요. 남이 어떻게 사는가,보다도 정신적으로 이 사회는 자본주의가 극도로 발달한 사회잖아요. 남자끼리 산다고 사기 친 적 없잖아요. 그렇죠? 남자끼리 산다고 뭐 음주운전한 적 없단 말이죠.

그러니까 돈과 무관할 때는 용납하자는 말은 돈에 손해 입히면 이건 무조건 그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어야 된다. 지옥이 뭔가 맛을 봐야 된다. 이것이 점점 강화되면 돈 빼놓고 돈으로 해를 입히지 않고 돈을 손해 보지 않는 경우는 뭐든지 점점 더 용납되는 거예요.

돈은 실제적이지만 이 정신 문제는 각자의 판단 문제로 넘어가기 때문에 돈으로 남에게 손상 입히지 않을 경우에는 뭐든지 용납해주고 그걸 인정해주고 존중해주는 것이 극대화된 인간 존엄성의 세계죠. 극대화된. 그럼 극대화된 인간 존엄성을 드러내는 사회의 교훈이든 가훈이든 간에 그 방향성을 한 문장으로 딱 응축시키면 뭐냐? ‘나는 신이다’ 이거죠. 나는 신이다. 판단도 내가 하고. 내가 남한테 해를 안 끼치는 이상 판단도 내가 하는 거예요.

집사님 아들이 없으니 하는 말인데 만약 아들이 있다고 치고 그 아들 나이가 서른 되었는데 “아빠, 나 결혼하게 되었어요.” “누구야~? 아빠가 이뻐 해줄게. 어서 들어와.” 보니까 남자라. “너 죽을래?” “내가 언제 아버지께 재정적인 손해를 입혔습니까? 이제 나도 성인이니까 내 판단은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 때 뭐라고 이야기해야 되겠어요? 간단하죠. 세 자. “나가라.” 그 다음 두 번째, “또 찾아오면 죽인다.” 아들이 나가면서, 이유를 달라. 이유를. 내가 나가야 되고 죽어야 될 이유를 달라. 방금 아들이라고 이야기했지만 딸도 마찬가지에요. 예외가 없죠.

그래서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 보면 우리가 이 민주사회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나의 가치는 내가 판단한다. 내가 결정한다. 다시 말해서, 나보다 더 권위를 가진 그 어떤 초월적 규제를 거부한다. 나보다 더 권위를 가진 어떤 초월적 규제 또는 지시, 기준을 나는 안 받아들입니다. 내가 최종적인 절대적 기준이고 싶다 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이 자본주의 사회, 현대 민주주의 사회죠.

그런데 이런 현상이 성경도 미처 몰랐던 현상입니까, 아니면 성경 안에 있는 현상이에요? 이런 현상들이 성경 안에 이미 있죠. 성경에 천상회의라는 게 있어요. 천상회의. 열왕기상 22장 22절 같은 경우에 천상회의. 여기 천상회의 대목이 나오는데 이 천상회의의 분위기 주도권을 누가 쥐고 있느냐 하면 놀랍게도 사탄이 쥐고 있어요. 스가랴 3장도 마찬가지고.

여러분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스가랴 3장이나 욥기 1장이나 열왕기상 22장 22절에 나오는 천상회의를 보게 되면 이상하게 다른 천사들은 가만있고 꼭 말발 센 천사가 악마에요. 그 회의를 왜 하나님이 주재하죠? 희한하죠. 열왕기상 22장 2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가로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 하는 영이 되어 그 모든 선지자의 입에 있겠나이다”

미가야가 있던 그 시절에 미가야가 400명의 다른 거짓 선지자들과 함께 있을 때에 미가야가 천상회의를 봤는데 천상회의를 봤을 때 그 회의에서 인상 깊은 것은 사탄이 다른 천사들보다 대장질하더라, 그 이야기에요. 그리고 그 천사가 그냥 천상회의에서만 대장질하는 게 아니고 거짓말하는 영이 인간세계에까지 오게 되면 인간 마음의 모든 주도권을 누가 쥐고 있는가? 사탄이 쥐고 있는 거예요.

지난 오후 설교 때 그런 이야기했죠. 요한복음 13장 2절에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여기 지금 주인공이 누구에요? 주인공이 가룟 유다가 아닙니다. 인간이 주인공이 아니에요. 마귀가 인간에게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은 거예요.

이 구절을 통해서 악마의 일관된 뜻이 노골적으로 나타나죠. 마귀의 모든 일의 목적, 마귀가 인간 생각의 모든 것을 장악하고 인간 생각들을 지배하는 목적은 단 한 가지에요. 예수님을 없애버리는 거예요. 예수님을 이 땅에서 지워버리고 없애는 겁니다. 마귀는 알아요. 예수님이 악마 자기마저 심판하는 심판주가 된다는 사실을 악마가 미리 알기 때문이에요. 몰래 교무실 가서 출제된 거 다 봤어. 마지막에 심판 출제 다 봤어요.

악마가 마지막에 하나님의 천국이냐 지옥이냐, 지옥이냐 천국이냐를 가름하는 기준을 봤어요. 그 기준을 보니까 문제가 딱 한 문제에요.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너희는 인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딱 한 문제에요.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호와 말고 삼위일체 말고 하나님 말고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마귀가 유다의 마음에 넣었잖아요. 그러면 이것은 제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처럼 인간의 마음은…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가룟 유다가 자기가 자살할 때까지 내 마음은 내 마음이 알아서 내 마음대로 한다고 생각한 거예요. 내 마음대로. 자살이 뭐에요? 자기 처분이잖아요. 남이 죽입니까? 어디 물난리 나서 엘리베이터에 갇혀 죽었어요? 아니죠. 뭡니까? 본인이 본인을 죽이는 거예요. 본인이.

본인이 본인을 죽이면 그게 자살이 되는데 본인은 죽죠, 자살로. 그러나 뭐는 살아있습니까? 내 죽음은 내가 했다는 그 사실은 남아있죠. 내가 나를 죽였다. 그러면 죽인 나 있고 나로 인하여 죽음을 당한 나 따로 있죠. 이 과정과 절차 속에서 외부가 투입되었습니까, 안 투입되었습니까? 투입 안했죠.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로 말미암아 나에게로 돌아가는 거예요. 시작도 나고 끝도 나고. 이걸 자기 처분으로서 보여주잖아요.

가룟 유다는 끝까지 마귀가 나를 죽였다는 생각을 절대로 하지 않아요. 끝까지 그는 안했습니다. 그러니까 악마가 인간에게 집어넣은 생각은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 집어넣었어요. 예수님이 있으면 내가 궁극적인 판단자가 아니잖아요, 내가. 내가 누구한테 꿀리잖아요. 그럼 기분 되게 나쁘다니까요.

‘내 인생인데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처분하든 죽든 살리든 내가 주인공이지, 나 말고 다른 누가 있단 말이냐.’ 이런 생각을 악마가 집어넣었고 또 한 가지는 그런 생각을 하는 게 나지, 외부에 악마를 비롯한 예수님을 비롯한 하여튼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이런 생각을 집어넣지 않았다는 것을 내가 확고하게 간직하게 하는 것, 이게 악마의 작품이죠.

천상회의에 이상한 분위기가, 사탄이 큰소리치는 거. 사탄이 그 분위기를 장악해요. 스가랴 3장에 보면 여호수아 옷이 허름하니까 “아, 옷 더럽다.” 욥기 1장에 보면 욥이 믿음 좋다 하니까 “내가 한번 꼬셔볼까요?” 이런 식으로. “내 손에 안 넘어가는 인간이 어디 있습니까? 내 장담합니다. 욥은 하나님 원망하게 되어 있어요. 내가 한번 해볼까요?” “해봐라.” “해볼게요.” 이렇게 된 거예요. 덕분에 욥만 죽어났죠.

그래서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지옥은 누가 막는가? 인간이 자기 판단에 의해서 지옥을 막습니다. 그럼 지옥을 막았다는 말은 덩달아 천국도 막은 게 돼요. 그런데 이 사정 저 사정 다 아는 세례 요한이, 물론 주님의 뜻에 의해서이지만, 마태복음 3장 2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야 참… 한번 적어볼게요. 이게 얼마나 어렵고 무서운 말인지요. “천국이 가까이 왔다.” 세례 요한이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했는데 듣는 사람은 뭐로 들어야 되느냐 하면 “회개하라 지옥이 가까이 왔다”로 이걸 같이 묶어서 이해를 해줘야 돼요. 같이 묶어서.

천국이 가까이 왔다면 환호를 해야 될 텐데 앞에 뭐가 보이느냐 하면 ‘회개하라’고 되어 있어요. 너희들은 천국에 해당사항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지옥이 가까이 왔다는 말을 왜 하느냐? 가까이 오나 마나 지옥을 만들고 있어요. 사탄이 통치하는 세계 그 자체가 지옥이죠. 그럼 이 세상은 지옥이 가까이 온 게 아니고 이미 지옥이었고 천국이 가까이 와서 지옥의 지옥 됨을 노출시킬 때 이것이 ‘최종 기준에 의한 심판 날이 가까이 왔다’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걸 한번 정리해봅시다. ‘인간은 이미 지옥생활 중이다.’ 약간 유명한 노래의 가사를 개사해보면 이렇습니다. ‘앉으나 서~나 지옥생각~ 앉으나 서~나 지옥생각~’ 사람들은 지옥생각한다 하면 막 화낼 거예요. 지옥생각한 적 없다니까! 그럼 바꾸면 되지. ‘앉으나 서~나 세상생각~ 앉으나 서~나 세상생각~’ 24시간 세상생각만 하고 있어요.

세례 요한에 의하면 이 세상은 뭡니까? 지옥이죠. 그래서 이미 지옥에 있기 때문에 이 지옥은 인간 각자가 분업화되어 있어요. 자기가 할 수 있는 재주가 있거든요. 자식들이 놀면 부모가, 너도 한 가지 재주는 있어야 네가 밥 빌어먹고 살잖아. 그 재주. 그 재주를 발휘하는 것이 지옥을 운영하는 데에 분업화된 업무를 하나 맡는 거예요. 취직이라고 이름하죠. 보통 취직이라 하죠. 지옥을 다 같이 분업해서 협동해서 만드는 그 일을 하는 거예요. 대법원 판사도 이거 하나 했죠. 물론 9대 4긴 하지만. 각자가 하는 일에서 지옥 만들기에 열심을 다 하고 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단순히 재주를 발휘해서 취직하는 문제가 아니에요. ‘평소에 나오는 모든 말, 언어죠, 말들이 지옥생활을 난사한다.’ 난사 알죠, 난사? 텅 텅 텅. 빅토리. 트럼프. 인간은 바깥에 말을 할 때 생각해서 하는 게 아니에요. 그냥 난사해요. 지옥이 누르잖아요. 제초제 같은 거 뿌리는 걸 분무기라 하죠. 인간은 분무기에요. 안에 지옥이 들어있고 슈욱 슈욱 뿌리면 지옥 말이 난사돼요. 이게 발사가 돼요, 발사가. 모든 게 지옥 말의 발사에요.

성경적으로 보면 난사되는 이것을 ‘무의미’라 합니다. 무의미에요. 어떤 말을 해도 무의미해요. 같은 말로, 어떤 말을 해도 하찮아요. 하찮고 같잖고 그런 거예요. 하찮아요. 아무 중요치 않은 말이에요. 평생 했던 모든 말이 하찮은 거고 무의미한 말이에요.

이걸 캐치해서 영화 스물 몇 개를 만든 감독이 있습니다. 홍상수 감독. <오! 수정> 같은 그런 영화에 보면 나오는데, 똑같은 일이에요. 앞에 있는 이야기와 뒤에 있는 이야기가 똑같은데 남자 입장에서의 기억이 다르고 여자 입장에서의 기억이 달라요. 그런 영화가 있어요.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그 영화도 비슷한데요. 그것도 마찬가지에요. 일은 일어났는데 서로의 말이 다 달라요.

그럼 어느 것이 진리냐? 진리를 묻지 마세요. 다 하찮고 같잖은 거예요. 남자와 남자가 살림하는데 의료보험 혜택 줘. 의미 없어요. 이 의미 없다는 성경적 근거가 뭐냐? 성경의 의미는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죽음이에요. 어차피 죽잖아, 너. 남자끼리 살림 살다가 죽잖아. 한번 상상해보세요. 남자와 남자가 혼인해서 혼인한 지 60년 동안 살면 할아버지 둘이 60년 동안 정답게 살다가 나이 95에 돌아가셨다, 뭐 이런 거. 뭐? 그게 뭐에요, 그게? 의료보험 혜택 받았다. 받겠지. 그런데 그게 뭔데, 그게?

그게 뭐냐 하면 모든 인간 속에 배후에 누가 있다 했습니까? 천상회의록에 담긴 대로 이 세상은 그대로 진행되잖아요. 그럼 천상회의에서 누가 말발 있습니까? 악마가 말발이 있어 악마가 하자는 대로 했어요. 왜? 하나님이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라 했으니까 악마가 이 땅에서 휘젓고 다니는 거예요. 악마가 휘젓고 다니고 거기에 후차로 누가 뛰어들고? 거기에 하나님 아들 예수님이 뛰어들어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악마하고 정식으로 초반부터 한판 붙었잖아요.

그러니까 아무런 의미가 없다니까요. 의미가 없다는 말은 아까 내용과 같이 연관해서 보면 나의 판단과 결정은 아무 의미 없어요. 왜? 죽으니까. 째깍 째깍 째깍 죽음이라는 시한폭탄을 쥐고 째깍 째깍 째깍 다 하찮은 거고 진짜 하찮지 않은 것은 내가 죽는 이유만 중요하지, 나머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순진하고 무식한 아내가 사기 당하고 그다음에 그 남편도 같이 나중에 몇 년 뒤에 같이 사기 당하고. 사기 당하는 사람이 왜 그리 많은지요. 그런데 그 사기 당하는 상황을 다시 한번 리바이벌해보세요. 사기꾼1 등장. 그다음에 바람잡이 하는 사기꾼 친구 둘. 바람잡이 하는 사람은 사기 당할 사람과의 친분을 이어가고 얼추 친분 쌓았다 싶으니까 본격적으로 사기꾼 등장시켜서 다방에 앉아서 사기 쳐서 한 이천 만원 빼먹었다.

이렇게 할 때, 그 사기꾼이 폭력을 행사했습니까? 막 멱살 쥐고 돈 내놔! 이랬습니까? 화기애애하죠. 화기애애. 분위기가. 사기 당한 사람은 그 사람이 고마워 미치는 거예요. 자기의 지루하고 별 흥미도 없는 인생에 갑자기 행복을 주니까요. 소망을 주니까 엔돌핀이 확 올라가는 거예요. 엔돌핀이 너무 올라가서 아드레날린까지 나오고. 무의미한 내 삶에 의미를 제공하니까. 참 세상에, 이렇게 고마운 사람이 다 있노. 항상 사기꾼과의 마지막 멘트는 그 멘트였어요. 세상에 이렇게 고마울 데가 있나. 자식보다 낫다. 이 멘트로 마감이 돼요. 이 멘트로. 화기애애하다고요.

그러니까 사기꾼이 잡혀도 할 말이 있어요, 없어요? 할 말이 있죠. 나는 그 사람들에게 삶의 의욕을 부여했습니다. 사는 이유를 알려줬습니다. 사는 이유는 인간에게 뭐 밖에 없어요? 돈 벌어야 행복해요. 그게 천국이에요. 자기는 그런 판단으로 살아왔던 겁니다. 그 판단을 누가 도와주고 그걸 호응한 겁니까? 사.기.꾼. 이걸 성경적으로 말하면 거짓 선지자. 거짓 목사들이죠. 거짓 선지자. 사기꾼들이죠. 미가야 같으면 거짓 선지자들. 악한 영들이 전부 다 장악해서, 너도 살고 나도 살자. 너 덕분에 나도 살자.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시도 자기가 자기를 처분하지 않는 순간은 없었다. 결국은 사기를 당한 사람이 ‘속았다. 너한테 속았다.’ 이렇게 말하지만 자기가 자기를 처분하는 행동을 멈춘 적이 없어요. 자기 판단에 이익이다 싶어서 거기 투자를 하고 같이 동참을 한 겁니다. 사기꾼과 동참을 한 거예요.

사기꾼이 등장하는 것은 결과를 놓고 이야기하는 것이지, 사기 당하지 않았더라면 여전히 그 사람은 나한테 참 좋은 이웃이에요. 주의 말씀에 무슨 말씀이 있습니까?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라. 사기꾼만큼 이것을 실천에 옮기는 사람이 없어요. 사기꾼만큼. 잘해줄 때 나를 믿고 믿으면 돈 나온다. 이 원칙을 사기꾼이 그렇게 적용하는 거예요. 그럼 사기꾼이 왜 그렇게 남을 사기 치느냐? 본인도 남한테 사기를 당해본 아픔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이런 결론 냅니다. 인간 속에는 오직 하나에요. 한 맺힘. 한 맺힘 이게 원인이거든요. 그럼 결과로 뭐 해야 돼요? 복수심. 한 맺힘과 복수심. 여기서 나오는 모든 말투는 무의미. 다 하찮은 거예요. 지옥은 이렇게 해서 지금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어요. 더 발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이 지옥에서 벗어나고 싶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요. 왜냐하면 이 세상이 좋든 나쁘든 내가 복수해야 될 복수의 대상들이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나 네가 보란 듯이 성공하고야 말리라. 내가 취직 안했다고 날 무시했지? 엄마, 아빠가? 복수할 거야. 또는 승리할 거야.

이러한 지옥의 인파 속에서 물결 속에서 같이 지금 울렁울렁 거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울렁울렁 웅성웅성. 요새 갑자기 왜 의태어가 이렇게 많이 나오나. 오골오골 우글우글 집단화된 인간들. 똑같이 집단화된 거예요. 지금 이 순간도 한 맺힘과 복수심으로서 무의미한 그런 발언들을 쏟아내고 있어요. 그것이 배후의 악마가 바로 이 세상을 만드는 방식이에요.

그런데 결국 한 맺힘과 복수심을 의도적으로 노출시키고 그 한 맺힘과 복수심을 자기에게로 이끄신 분이 누구십니까? 바로 예수님이죠. 그 예수님이 하늘로 가고 난 뒤에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진 게 뭐냐 하면 복음입니다. 복음. 그래서 갈라디아서, 로마서 같은 경우에 사도 바울은 알죠. 복음을 전해야 거기에 마귀의 활동이 비치기 시작하는 거예요. 복음을 전할 때. 예수님 왔을 때 마귀가 예수님을 주목한 것처럼 복음을 전하면 마귀가 이제 자기 정체를 드러내죠. ‘어디서 복음을 전해?’ 하죠.

복음은 앞에 뭡니까? ‘십자가’ 복음이에요. 그럼 십자가 복음이 아까 그 논리를 따라가게 되면 이건 유일한 심판의 문제(question)에요. 문제 기준이에요.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인간의 죄로 인하여 죽으신 분입니다.” 인간의 죄. “그럼 너는?” 저 때문에 죽으신 분이라는 것. 그게 유일한 문제죠. “저 때문에 죽었습니다.”

네가 뭐가 잘못됐는데 예수님이 죽었느냐? 오늘 강의 핵심에 들어갑니다. 내가 나를 처분하는 것. 어떻게 처분하죠? 마지막에 나를 어떻게 처분합니까? 성경을 봤으니까, 네? 나를 구원시키려고. 나를 천국에 보내기 위해서 내가 나를 처분한 이것 때문에 누가 돌아가셨다? 예수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핵심은 간단하죠.

지옥에 있으면서 감히 뭘 내다봐요? 자기가 벽인데 자기가 지옥을 가리고 있는 벽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거기서 인간이 자기 자신을 치울 생각 안하고 가짜지옥, 유사지옥, 유사천국을 만드는 나는 제발 손대지 말라는 거예요. 나를 때리지 말라는 거예요. 나를 안 때리고 나를 피해가서 천국, 지옥을 만들어 놓고 거기 천국에 나를 집어넣어달라는 거예요. 진짜 말도 안 되는 우김이죠. 말도 안 되는 거예요. 말도 안 되는 거. 나 빼놓고 무슨 짓해도 괜찮은데 나는 때리지 마세요. 꽃으로도 때리지 마세요. 꽃으로도.

예수님 빼놓고 모든 인간들은 죄인이기 때문에 의인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합당한 조치에 의해서 멸망당해야 마땅합니다. 마땅해요. 그래서 아까 나눠드린 거 있죠. 이걸 왜 나눠드렸는가? 마귀가 천상회의에 의해 이 땅에 내려와서 인간들 전부다 장악하면서 마귀는 알아요. 예수 그리스도가 결국은 오셔서 모든 걸 심판한다는 걸 악마는 알아요. 귀신들도 알잖아요. 귀신이 귀신같이 아는 게 그거에요. 자기는 이미 심판받아 지옥에 있다는 사실을.

그럴 때 악마가 인간 속에 들어갑니다. 들어가서 인간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성을 가리는 아이디어를 그들로 하여금 끄집어내게 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인간들 손에 의해 신(god)만들기를 실시합니다. 인간들 손으로 신을 만든다면 어떤 신을 만들겠는가? 일종의 미술시간 같은 거예요.

‘너희들이 신을 한번 그려봐.’ 그건 아주 순한 미술시간이고, 약한(weak) 반발은 ‘하나님에 대해서 그려와’ 이렇게 되지만, 강한(strong) 반발은 뭐냐? ‘네가 신을 직접 만들어봐’에요. 신을 만들어봐라. 네 복수심과 한 맺힘을 주 내용으로 해서 ‘내가 이만하면 나는 이 신을 섬길 것이다’ 하는 신을 네가 한번 만들어보라고 이미 악마는 태어난 족족 태어나고 있는 모든 인간에게 이미 그 일을 실시했어요.

그러면 이 그림(세피로트의 나무, The Tree of Sepiroth, The Tree of Life)은 뭐냐? 여기 나오는 이 그림, 카발라의 신. 이 그림은 유대교에서 나왔거든요. 카발라(Kabbalah, 헤브라이어로 은밀하게 전해지는 전승(傳承)을 뜻함. 중세 유대교의 신비주의).



유대교에서 나왔다는 말은 유대교 전통이 뭐냐?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독대해서 따로 만나서 그냥 빈손으로 내려온 게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뭘 받아서 내려왔다는 거예요. 모세의 위상이 유대인에게 중요한 것은 모세 말고 어느 누구도 하나님과 같이 하늘나라에서 40일 동안 산 자가 없다는 사실. 이게 아주 특이해요.

그리고 하나님과 살았으면 거기서 죽어야 해요. 내려올 필요 없어요. 그런데 거기도 살고 여기도 살았다는 거예요, 모세가. 40일 동안 있었고 다시 지상에 내려와서 하늘나라에 40일 산 사람으로서 지상에서 하늘나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전달했다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뭘 인정하느냐? 모세가 올 때 빈손으로 내려온 것이 아니고 율법을 가지고 내려왔다는 거예요. 율법을 가지고. 율법. 그러니까 악마가 인간들을 잠식해서 인간들에게 뭘 시킨다 했습니까? 인간들이 자기 자신을 괜찮게 처분할 수 있는, 자기 자신을 안전빵으로 처분할 수 있는 내가 원하는 신을 만들 그러한 마음자세를 줬는데 여기에 율법까지 주어지니까 나는 신을 만들고자 하는데 율법이 그 내용으로 들어가겠죠. 내용으로.

그럼 율법에 뭐가 있느냐 하면 창세기 있습니다. 창세기 율법에 뭐가 있느냐? 딱 두 가지 측면이 나오죠. 하나는 생명나무, 또 하나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두 가지 나오죠. 이게 바로 카발라 신에서 이야기한 생명나무입니다. 얼마나 보고 싶을까요, 생명나무가? ‘카발라’라는 뜻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밀한 것이에요. 하나님께서 주신 은밀한 것을 받게 된 것, 이걸 카발라라고 해요. 받아들인 것. 보통 유대교 신비주의라 하죠.

하나님이 줬는데 그걸 받게 되었다. 모세가 받게 되었는데 40일 동안 율법만 알았겠어요, 율법 외의 것도 알았겠어요? 40일 동안 있는데. 율법 읽어봐야 한 몇 시간만 해도 다 읽어요. 그러면 율법 말고 또 뭘 알았겠냐? 율법 말고 그 외에 자기가 본 것도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율법+모세의 전승 이걸 합쳐서 함축을 해놓으면 이렇게 생명나무로 갈 수 있는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거예요. 지식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해서 준 정보, 율법+전승을 공부하게 되면 하늘나라에 우리가 합류할 수 있다는 것, 이게 바로 카발라의 신입니다.

그럼 사람들한테 이 이야기하면 믿겠어요, 안 믿겠어요? 안 믿죠. 당신의 말을 믿지는 않는데 한번 들어는 보자, 이렇게 할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이 유대교 신비주의 카발라의 신 율법과 전승이 이 지상에 왔을 때 지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과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 해, 달, 별 그건 물론이고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을 어디다가 다 집어넣으면 되겠어요? 율법과 전승으로서 그 상자 안에 다 집어넣으면 되겠죠. 다 집어넣으면 되잖아요. 다 집어넣은 게 이 카발라의 세피로트의 나무에요.

세상에서 과거에 일어난 것, 현재에 일어나는 것, 앞으로 일어날 것이 이 안에 다 들어있습니다. 이 그림에 동그라미 있잖아요. 동그란 원 있죠. 이 동그라미(세피라, Sephirah)가 10개에요. 10개 맞죠? 10개인데 중간에 Da'at(다아트, 세피라가 아니라 케테르의 무한한 가능성 중에서 바깥으로 표출된 부분)라는 게 있죠. 이거는 10개를 통합하는 숨어있는 지식. 사실은 점선으로 표시해야 돼요. 그래서 10개에요.

10개인데 10개에 속속들이 숨어있는 지식이 있어요. 이 지식을 다 알면 돼요. 하나님을 섬기는 게 아니고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고 알면 된다고요. 처음에는 각자 10개 속에 숨어있는데 숨어있는 이걸 나중에 하나로 다 모으게 되면 비로소 Da'at(다아트)라는 부분에 이릅니다.

이것 설명하고 10분 쉽시다. 10개의 세피라들이 모여 세피로트가 되는데 그럼 세피라가 뭐냐? 또는 세피로트가 뭐냐? 10개 말고 궁극의 근원이 있어요. 이 근원에서 빛이 나오는데 케테르(kether), 왕관이죠, 이 왕관에서 빛을 보내면 빛이 있던 밝음은 어둠이 되고 빛을 받은 쪽은 빛이 되겠죠. 어두움이었는데 빛의 속성이 들어와요. 그 빛의 속성을 세피라 또는 세피로트라 해요. 그 빛이 또 빛을 방출해서 제일 바닥 말쿠트(Malkuth, 왕국)까지 내려와요. (세피로트의 나무의 위에서 아래로 가는 경로(path); 번개의 길)



빛의 속성이 실제 물질계까지 왔으니까 아는 방법은 뭐냐? 물질부터 해서 이 세상을 알게 되면 점차 점차 숨어있는 진짜 생명나무의 지식이 파악되는 거예요. 인간 본성상 누구를 섬길 수 있는 그러한 자세는 인간에게 없습니다. 다만 인간은 아는 것에는 호기심을 갖고 미치도록 매달리게 되어 있죠. 그래서 섬기는 것은 인간에게 없고요. 이미 자기를 섬기기 때문에 섬길 대상이 없어요. 없고 알아가면 되죠. 신을 라이벌로 여겨서. 알아가는 그 작업을 마귀가 시키는 거예요. 10분 쉽시다.


*그림은 첨부파일 참고바랍니다

 

 

 

 

광주강의20240719b 열왕기상 22장 22절(지옥의 현상)-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이 생명나무를 제가 그려보겠습니다.



궁극의 근원이 있는데 궁극의 근원은 보이지 않아요. 다른 것도 안 보이기는 마찬가지지만. (*궁극의 근원: 세피로트의 나무 맨 위 케테르 너머에 존재하는 3개의 드러나지 않는 세계.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세계를 의미하는 세피라와는 달리 인식할 수 없는 세계를 뜻함)

처음에 보이지 않는 빛이 있는데 빛을 밑에 있는 세상 창조에 소비하다 보니까 본인은 어두워지고 첫 번째 받은 그 빛이 왕관이 되고 지혜가 되고 이해가 된다. 이렇게 설명하고 그다음에 이걸 삼각형으로 표현하면 △(왕관-지혜-이해를 잇는 삼각형)이렇게 되겠죠. 궁극적 빛이 내려오는 경로를 빨간 걸로 표시해보겠어요. 케테르-호크마-비나-헤스드-게부라-티페레트-네자르-호드-예소드-말쿠트 이 길을 따라서 빛이 내려오는 거예요. (빛의 경로)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물질계에 가깝기 때문에 그 빛의 가치가 점점 더 약화되죠. 중간계(신성계) 삼각형은 거꾸로 삼각형▽, 그 밑 아스트라계 삼각형도 거꾸로 삼각형▽ 이렇게 3개, 3개, 3개+1로 물질계(현상계) 이렇게 되는 거죠.



빛이 이런 식으로 내려가면 밑으로 내려갈수록 점점 더 어두워지다가 가장 밑에는 아주 어두워지는 거예요. 어두워진다는 것은 빛의 요소 찾기가 아래쪽으로 갈수록 있긴 하지만 점점 더 희박하다는 거예요. 그런데 점점 더 올라갈 때는 빛에 가까워지는 느낌을 주는 거예요.

그러면 신이 내려왔던 하명(下命)길(번개의 길)을 도로 거꾸로 올라가면 계단화되어서 생명길로 갈 수 있겠죠. 이걸 복명(復命), 명을 복귀하는 생명길을 뱀의 길이라 해요. 뱀의 길(경로). 내려왔던 그 길 따라서 그대로 올라가면 뱀의 길이 돼요.

세 가지 축이 있는데 가운데 궁극에서 바로 내려오는 것은 생명나무의 방향이라면 걸쳐서 올라가는 것은 선악과 나무의 길로 해서 걸쳐서 올라가는 거예요. 올라갈 때는.


그러니까 이 생명나무, 선악과 나무가 어디 나오는 거죠? 율법에 나오죠. 창세기에 나오죠.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생명나무를 감춰놓고 선악과를 제시했잖아요. 그 말은 무슨 뜻이냐? 선악과를 알면 생명나무를 따먹을 수 있다,가 되는 겁니다. 생명나무를 따먹을 수 있다.

그럼 그걸 따먹으려면 어떻게 하느냐? 곳곳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물질적, 비-물질적, 신성계, 영계에 있는 모든 것 중에서 빛이 남긴 자국을 따라 발췌해내면 되겠죠. 명상을 하든 기도를 하든 어떤 방식으로든 그걸 찾아내는 거예요. 그 빛을. 생명나무의 빛을 찾아내게 되면 찾아낸 구석구석에 대해서 이러한 10개의 빛이 통과하는 또는 빛이 모아지는 그러한 개념들이 이 세상에 이미 주어져있다는 거예요.

과학적 물질계 돌, 나무, 의자 뭐 이런 것은 눈에 보이지만, 위로 올라가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무시할 수 없는 개념들, 눈에 보이는 것은 짐승과 같아요, 짐승 같은 거 말고 인간이라면 추구해야 될 그런 것들이 이미 군데군데 이 세상에 있는데 지금 영광과 승리에 도취되면 안 되는 이유가 더 깊은 명상과 더 깊은 영적 지혜를 가지게 되면 거기에는 사랑과 정의가 나타나고 그보다 더 깊이 가면 이해(해석)와 지혜, 그리고 최종적인 왕관에 도달하게 되고 그렇게 10개를 다 모으면, 포켓몬이죠, 10개를 다 모으게 되면 생명을 얻은 게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 하나하나에 대해서 ‘뭐 이것도 하나의 어떤 종교 아이디어네.’ 하고 우리가 쉽게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그게 아니고 세상에 나오고 앞으로 나올 거고 세상에 나왔던 모든 종교 있잖아요, 모든 종교를 여기다 하나씩 집어넣을 수가 있어요. 통합할 수 있어요. 통합. 단순히 여러 종교 중 하나가 아니라 세상에서 인간에게서 끄집어낼 수 있는 모든 종교, 그 모든 종교의 교리를 여기다 다 집어넣으면 이 곽 속에 다 들어갈 수 있는 체계다 이 말이죠.

그래서 기독교에서 또는 불교에서 교리 꽤나 다 관통했다고 으스대고 까불까불거리는 사람 있잖아요. ‘칼빈의 교리 다 알고 기독교 전통 알고 복음 나 다 꿰었어.’ 라고 만약에 나온다면 ‘너는 그 수준이 지금 어느 수준이냐 하면 정의, 사랑 수준이야.’ 그렇게 되는 거예요. ‘난 이슬람의 신비주의 다 알고 모든 윤리도덕이고 모든 인간의 지혜를 다 알았어.’ ‘넌 그 수준이 신선계 수준이야.’ 이런 거.

아무리 이 땅의 인간들이 자기 종교에서 모든 신비체험을 다 하고 알거 다 알았어도 이 카발라 생명나무에 도달하면 이건 아직도 한참 먼 사람이에요. 아직도 멀었어요. 허경영은 어디쯤 되겠어요? 허경영은 아직 물질계도 못 벗어났어요. 맨날 상담하는 법륜 스님 같으면 물질/ 비-물질계 정도.

인간의 모든 의식과 무의식 전체 내용을 이렇게 좌우 선악과와 중간에 관통하는 생명나무 노선으로, 율법에 나온 대로 모세가 받았던 율법책과 창세기에 나온 율법과 생명나무 선악과 그 체계 안에서 모든 것을 다 넣을 수 있고 그것을 우리가 인식한다면 당신은 영원한 생명나무 천국에 도달합니다.

그럼 도달하기 위해서 이 땅에 있는 물질계는 왜 필요하냐? 이게 하나의 에너지체가 돼요. 우리 몸의 에너지체가 되고, 에너지체 따로 있고 그 에너지체를 동양에서는 백(魄)이라 하는데 혼(魂)이 따로 있어요. 영체가 따로 있어요. 합쳐서 동양철학에서는 혼백(魂魄)이라 하는데 에너지체가 되는 거예요.

에너지 신체란 말이죠. 에너지란 말을 왜 집어넣느냐? 에너지라 하니까 양자물리학까지 포함시킬 수 있죠, 물질세계에서. 에너지체+영체, 영체는 과학이 못 따라오니까. 과학은 물질계에 속해요. 아랫동네라니까요. 그럼 뱀이 허물 벗듯이 칼집에서 칼을 뽑듯이 죽는다는 것은 우리 육신은 칼집이고 거기서 완성된 이런 생명의 지혜를 갖고 있는 우리 영체가 빠져나오는 거예요. 칼집에서 칼이 빠져나오면 거기서 영광, 왕관(케테르)을 쓰는 거예요. 신의 영광을 입는 새로운 몸을 입게 된다는 거예요. 뱀이 허물을 벗듯이. 그 용어를 탈각(脫却)이라 해요. 탈각하는 거예요.

탈각함으로써 우리 이 땅의 삶이 그냥 공연히 무의미로 보낸 것이 아니고 이러한 군데군데 있는 빛의 흔적들, 빛의 쪼가리들을 하나하나 밟아나가면 벌써 여기서부터 진화되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이 완성에 도달할 때까지는 진화가 덜 된 겁니다.

언제까지 애벌레로 있을래? 나방이 되어야 되는데. 나비가 되어야 되지 않습니까? 애벌레 같은 이 세상을 지나서 나비로 활짝 만개할 수 있는 그 세계가 따로 있으니 그것을 바로 모세에게 하나님이 알려줬으니 우리는 이런 말씀과 이런 것들을 통해서 그 이해도, 해석도를 높여가게 되면 구원에 이른다는 거예요. 구원에 이를 때까지 우리는 늘 영적으로 진화해야 된다는 거예요. 성숙해야 되고 성장해야 된다는 그 이론입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왕관, 지혜 저게 뭔지를 하나하나 보겠습니다. 중간에 있는 이 삼각형 두 개를 합쳐보면(△+▽) 바로 다윗의 별(✡)이 돼요. 이스라엘 국가(국기의 문양). 국가가 등장합니다. 그래서 유대교 신비주의라 할 수 있어요.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자기 속성이 모든 창조세계에 다 들어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들은 창조한 게 아니에요. 자기 속에 있는 내부가 빠져나온 거죠. 멍게 잡을 때 어떻게 합니까? 멍게 껍데기에서 알맹이 쏙 빼잖아요. 자기 몸이 빠져나와서 자연의 일부로 섞여 있다가 그걸 주워 모으면 온전한 신과 합일이 되는 거예요. 신도 그 과정을 거쳤다고 보는 거예요.

첫 번째, 왕관. 왕관은 케테르(Kether)라 되어 있죠. 왕관은 신과의 합일된 상태인데 이 왕관의 지혜를 얻은 사람은 스스로 있는 자에요. 그러니까 이건 여호와에요. 여호와를 창조세계 제일 위에 둠으로써 진짜 신은 여호와 이상(以上)에 있다는 거예요. 여호와 그 이상. 언어나 어떤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그 이상에 궁극적인 근원이 있고 동양에서는 이것을 무극(無極) 또는 태극(太極)이라 해요.

모든 것의 시작점은 여호와부터 시작되니까. 여호와는 스스로 있는 자잖아요. 궁극의 근원은 없음이에요. 있음보다 없음이 더 우선되니까요. 스스로 있는 자, 여호와에요. 그러니까 여호와를 여기 하나 배치해둠으로써 여호와가 궁극적인 게 아니고 여호와도 인간에게 나타난 신이 만든 신 중에 하나다 이 말입니다. 물과 불과 흙과 공기의 근원, 이것이 바로 왕관 자리에 있는 자입니다. 왕관 자리에 도달한 의식에 있는 자에요.

두 번째가 호크마(Chokmah), 지혜라는 건데 이거는 두 번째 영광으로 신과 합일의 광채에요. 합일의 광채로 빛이 나는 것, 이게 지혜입니다. 신과 하나가 되어서 드디어 몸체에서 광채가 빛날 때 이 수준 되는 거예요.

그런데 궁극의 근원에서 케테르는 일자로 내려오다가 지혜와 이해, 사랑과 정의, 승리와 영광 이것은 양쪽으로 갈빗대처럼 벌어졌죠. 벌어졌다는 것은 이게 선-악이에요. 선-악. 동양철학으로 하면 양과 음. 오른쪽이 양, 왼쪽이 음. 선-악, 선-악으로 벌어진 거예요.

선악으로 벌어졌으니까 가운데 수직적으로 내려오는 생명나무 노선 말고 좌우로 벌어진 선악노선에서는 한 개 한 개 자체마다 선과 악이 따로 형성되어 있어요. 선과 악을 따로 형성시켜서 배치하는 이유가 이 땅에 살다보면 좋은 것도 있지만 어떤 것도 많이 눈에 띄고 느껴집니까? 악한 것도 있죠.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좋은 일/나쁜 일, 그 모든 것도 이 안에 다 배치가 가능한 구조에요. 어쨌든 간에 이 세상에서 일어났던 일들은 전부 다 이 안에 배치가 가능한 거예요. 그런데 1번 왕관과 2번 지혜에서는 악덕이 없어요. 이미 광채가 되었기 때문에.

세 번째, 이해(비나, Binah)는 신앙의 어버이 또는 어미에요. 이걸 아멘이라 합니다. 아멘. 진실로 그러하다. 신앙의 시작이 여기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신앙이 끝이 아니고 신앙 위에 더 어른들이 있는 거예요. 지혜와 왕관이 또 따로 있어요. 신앙은 이해부터 신앙이 시작되는데 이게 어미에요. 어미기 때문에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왕관-성부, 지혜-성자, 이해-성령 또 성모. 성모 마리아. 여기 다 배치해요. 그 정도 지식이 되어야 이 자리에 들어갔다 할 수 있어요, 생명의 트리에서. tree of life, 생명나무니까요. 그렇게 되어 있는 거예요.

이걸 이렇게 배치함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인간이 만든 모든 종교에 그 최종 목표가 이 표 안에 다 들어있게 만드는 거예요. 날고 기어도 세 번째라. 믿습니다, 하면 세 번째에요. 믿습니다, 하는 믿음을 뛰어넘을 때 그때 2번, 1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거예요. 믿지 않고 아는 것. 영지주의 같은 것은 믿지 않고 아는 거죠. 신앙의 시작이에요. 어버이니까 마리아니까 어떤 것을 계속 생산해내는 그런 작용도 하죠. 이게 바로 영계(靈界), 영적 세계고요.

그다음 신성함. 영계보다는 못하지만 신성한 것. 그런데 세 번째부터는 선과 악이 내부적으로 있어요. 3번 이해부터 선악이 있는데 미덕은 침묵이에요. 욥기에 보면, 제가 입을 다물겠습니다. 재를 뒤집어쓰고. 침묵. 이게 선이에요. 3번 자체의 악이 뭐냐 하면 탐욕이에요.

왜 저렇게 좋은 것만 안하고 탐욕 같은 악덕을 언급하느냐? 이 세상에서는 아무리 수준 높아도 반드시 거기서 뭐가 발생된다? 어느 정도 훌륭하게 되었다, 이만하면 나는 이제 완벽하다 하지만 그 자체에서 뭐가 발생돼요? 또 악이 생기죠. 왜냐하면 생명나무 루트가 아니고 선악 루트기 때문에 항상 선악의 모든 요소가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탐욕이 세 번째에서 악덕이 되는 거예요.

네 번째, 사랑. 헤세드(Chesed) 사랑이에요. 사랑은 여기부터 시작돼요. 자비는 여기부터 시작되는데 여기서 선은 복종이고 악은 완고함, 위선, 밥 많이 먹는 폭식, 남을 지배하는 독재. 이게 사랑이라는 지식 안에 도달해도 거기서 그 순간에도 부덕, 이러한 악함이 살아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머물면 안 된다 이 말이에요. 4번에서 3번으로 가되 악덕이 있으니까 머물면 안 되고. 탐욕이 있을 수 있으니까. 그 탐욕이 모든 죄의 끝부분이에요. 그다음 2번 지혜부터는 뭐가 없습니까? 1번 왕관에는 뭐가 없어요? 악덕이 없어요. 탐욕이 악의 마지막, 마지노선이다.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는다. 야고보서에도 나와요.

그다음 사랑의 상대편에 뭐가 있느냐 하면 다섯 번째, 정의(게부라, Geburah)가 있어요. 정의의 신은 능력의 하나님. 그러니까 지식을 알게 되면 하나님께 능력을 받는다. 그 능력이 무슨 능력이냐 하면 숫자의 능력. 숫자에 힘이 있다는 거예요. 숫자 자체를 신비화하는 거예요. 이 세피라(세피로트의 구성요소)도 10개잖아요. 10개인데 3+7로 되어 있어요. 옛날 수학에서 7은 정육면체의 아래, 위, 좌우, 앞뒤, 정육면체 중앙 합해서 7. 7은 완전체가 돼요.

하여튼 할 짓 없는 인간들이 그 당시에 TV도 없고 하니까 이불 속에서 그냥 아무 말 잔치에요. 어떻게 하면 신이 되느냐 하는 것은 겉으로 한 것이고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어떻게 하면 이미 나는 신인가를 자기 아는 지식으로 확인하고 싶고 증명하고 싶은 거예요. 그 배후에 누가 그렇게 했겠어요? 마귀가 인간을 그렇게 만든 거예요. 마귀가.

5번 정의의 미덕, 선은 뭐냐? 에너지 그리고 용기에요. 악은 힘이 있으니까 잔인한 파괴. 아주 잔인한 파괴. 힘은 있는데 그걸 파괴하는 데에 사용할 때 악이 되겠죠. 힘이 있는 것은 정의고요. 힘이 되는 지식. 이 정도 정의 수준이 되게 되면 판·검사, 변호사들.

지식인데 그 지식은 사회 정의를 위해서 쓰고 잘못 쓰면 잔인한 파괴가 돼요. 잘 쓰면 용기 있게 아닌 것은 아니라 할 수 있는 거죠. 그래서 대통령 된 사람 있잖아요. 윤석열 대통령. 앞에 보니 김건희와 윤석열 탄핵해야 나라가 산다고 플랭카드 붙여놨던데요.

그러나 이러한 카발라 신에 의하면 그거 해봐야 아직 멀었는데. 그거 해봐야 이건 몇 단계에요? 기껏 5단계에요. 아직 갈 길이 멀어요. 갈 길이 멀었어. 이거 해놓고 인생 뭐 진리 안다 하면 안돼요. 5단계에 지나지 않아요. 4단계, 3단계, 2단계, 1단계 있는데요.

여섯 번째, 조화. 사랑, 아름다움(티페레트, Tifereth)에요. 여기 누가 있는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있어요. 희생. 희생하는 것. 여기는 인자(人子), 희생의 신이 여기 들어가요. 아, 예수님이 6단계밖에 안돼요. 그래서 여기서의 선은 위대한 일에 헌신하는 것, 이게 선이에요. 악은 자만하는 것. 이만하면 됐다고 자만하는 것. 이게 6단계에요.

자, 일곱 번째, 7단계는 승리(네짜흐, Nezach). 승리의 하나님. 여기까지 오면 어떤 신을 알 수 있느냐? 만군의 하나님을 알 수 있어요. 전부 다 유대교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이에요. 만군의 하나님. 여기에 선은 뭐냐? 이타심. 악은 음란과 정욕과 악덕이에요.

여덟 번째 영광(호드, Hod). 암수 한 몸. 이게 뭐냐 하면 동성애 같은 그런 거죠. 암컷이냐 수컷이냐를 초월하는 인식을 가질 때 영광 수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어요. 여기의 미덕, 선은 성실함. 여기 악은 불성실, 나태죠. 그리고 거짓하는 것.

그다음 아홉 번째가 기초죠. foundation 기초(예소드, Jesod). 영광에서는 남녀가 암수 한 몸이죠. 암수 따지지 않잖아요. 기초에 오면 여기는 물질과 비-물질 중간이라 따지게 되어 있어요. 모든 물질세계, 인간세계의 대표자가 여자입니까, 남자입니까? 남자죠. 이 기초에서의 상징은 벌거벗은 남자에요. 벌거벗었다는 건 부끄럽다는 뜻이 아니고 자랑스럽다는 거예요. 그만큼 위대하다 대단하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이 신은 전능하신 신이에요. 전능하신 신이 벌거벗은 남자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이 기본에 있어서의 실내용은 물질적 이익이에요. 이익이니까 오늘날 학문으로 하면 경제죠. 부자 되는 것. 경제가 기초, 기반이다. 이게 물질세계의 지향점이에요. 이 물질세계에서 모든 인간이 지향하는 것은 돈을 잘 버는 거예요. 여기서 선은 뭐냐? 독립하는 것. 딱 맞죠. 돈이 있어야 독립하지, 돈도 없는데 무슨 독립이 돼요. 악이 뭐냐? 게으름. 너 참, 너 밥벌이나 좀 해라. 게으르지 말고. 평생 백수하지 말고.

제일 밑에 열 번째, 물질계의 대장이 놀랍게도 뭐냐? 벌거벗은 여자에요. 요한계시록에 이 세상 단일세계의 최고 왕은 누구죠? 음녀죠. 벌거벗었다는 것은 그만큼 떳떳하다, 자랑스럽다 그런 뜻이에요. 대단하다, 나만이 자유롭다 뭐 그런 뜻이죠. 이 세상에서 판별력이 선이고 악은 탐욕. 그리고 게으름을 넘어서서 무기력. 게으름보다 더 악한 것은 무기력한 것. 아무것도 못 하겠어. 내 배 째라. 아무것도 못해.

열 번째쯤 되면 궁극적인 빛과는 거리가 너무 멀어요. 먼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물질계, 그리고 물질계와 비-물질계의 경계계, 그다음 신성계, 영계 이걸 통해서 군데군데마다 생명의 흔적들을 이렇게 남겨둔 거예요. 남겨둠으로써 직통으로 가는 게 아니고, 삐뚤삐뚤하게 올라가요, 뱀처럼. 뱀의 길이니까.

지그재그로 올라가면서 뭘 느낍니까?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선인가를 친히 배우면서 이 계단을 밟아서 궁극적인 왕관에 도달하는 그 지식. 그 지식 안에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다 있다는 겁니다. 인간이 하는 행동과 마음자세, 행동보다도 마음자세, 영적 상태, 영혼의 상태 중 여기서 빠진 거 있어요, 없어요? 빠진 거 없죠. 빠진 게 없죠. 사랑, 지혜, 해석, 정의, 승리, 영광. 그리고 영광스러운 관까지 쓰는데 여기 뭐가 빠졌어요? 다 채워져 있죠. 물질은 현재 있는 왕국이에요. 물질계에 다 집어넣으면 되고요.

그 물질계가 추구하는 것은 바로 기초. 물질계에서 볼 때는 돈이 있어야 되고 영적 세계는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돈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그건 영혼이다. 이렇게 시작하는 거예요.

자, 그러면 이러한 이야기에 대해서 성경은 뭐라고 평가합니까? 성경은 뭐라고 평가하죠? 이번 수련회에서 신명기 하니까 신명기 한번 보겠습니다. 4장 19절, “또 두렵건대 네가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일월 성신 하늘 위의 군중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친히 만민을 위하여 분정하신 것을 보고 미혹하여 그것에 경배하며 섬길까 하노라” 라고 되어 있죠.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순환하는 자연세계조차도 지옥을 가로막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세상이 이미 지옥인데 인간들은 지옥에서 탈출하고 벗어나기 위해서 하늘 가까이 움직이고 있는 자연의 순환 있잖아요, 해와 달, 별 그것에 인간들은 마음 빼앗기고 거기에 희망을 걸고 있는 거예요. 희망을 거는 것이 뭐냐? 바로 이러한 마음자세, 이렇게 지적 수준을 진화시키고 높이기 위해 하늘에 박혀있는 천지 자연물에 그것을 결합시켜서 그것을 모델로 삼아서 경배한다든지 자연세계에 있는 자유로움을 자기 마음에 그대로 입력시키려고 애를 쓰는 거예요.

저 해와 달의 특징이 뭐냐 하면 밤에도 빛나는 것은 달이고 낮에 빛이 난다는 거예요. 빛이 나니까 궁극적 근원을 빛으로 본 거예요. 그런데 빛이 전부겠는가? 빛 뒤에 뭐가 있다? 빛을 줘버렸으니까 자기는 빛이었는데 빛이 날아가버리고 어두움이 돼버렸죠. 창세기 1장 2절에 보면 어두운 수면 위에 성신이 함께 있음이라. 어두움이 먼저라는 거예요. 빛보다 어두움이 먼저에요. 왜냐하면 빛이 언제 만들어졌죠?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있었다. 첫째 날이에요.

그러니까 유대교의 카발라는 구약 성경을 제외하지 않아요. 창세기 1장 4절,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그 빛이 있기 전에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카발라의 생명나무, 선악과 여기에 대해서 이것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 세상 모든 종교적 현자, 승자, 뭐 예수든 부처든 간에 다 오라 이 말이에요. 한판 붙자. 인간이 끄집어낼 수 있는 것은 전부 다 해태 종합선물세트로 인간 역사상 있는 것은 다 가져와서 이 안에 다 집어넣어버린 거예요. 지금도 이걸 기준해서 만든 점(占)이 있어요. 무슨 점이냐? 타로점이에요. 타로점은 자기가 그냥 해보는 게 아니고 이 자연과 통한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자연현상, 별자리와 관련시키죠.

예레미야 한번 봅시다. 예레미야 14장 14절, 이거는 선지자 이야기죠.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도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명하거나 이르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거짓 계시와 복술과 허탄한 것과 자기 마음의 속임으로 너희에게 예언하도다”

여기서 뭐를 우리가 생각해야 되느냐 하면 자기 마음이라 했죠. 자기 마음. 지금 이 카발라 여기에 심취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뭐냐 하면 여기 물질계에서 영적 세계로 올라가야 되지 않습니까. 올라갈 때는 자기가 목적하는 바, 자기가 계획하는 바에 대해서 그것을 항상 생각하고 긍정적 마인드를 가지고 상상해야 되는 거예요. imagination(상상), 이미지를 만들어서 저 높은 곳을 상상하게 되면 네가 뜻한 그대로 되리라.

심지어 이것은 타로점 뿐만 아니고 물리학 양자역학에서 그런 소리를 해요. 인간의 두뇌는 전자의 흐름, 파동과 에너지로 되어 있죠. 양자로 되어 있어요. 전자의 원칙은 양자 얽힘으로 되어 있는 거예요. 이것은 뭘 뜻하냐? 내가 여기서 뭔가 생각한다는 것은 두뇌 속에 있는 전기적 물질 속에 전자나 양자가 지금 작동하고 있다는 뜻이고 이게 작동한다는 뜻은 내 생각한 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 나에게서 멀리 떨어진 다른 우주의 변수들이 나한테 시그널을 보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가 돼요. 한다, 된다, 된다, 된다 하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서 가르치는 것은 아침에 일어나서 5분, 밤에 잠들기 전에 5분 동안 항상 자기 목적한 것을 미리 당겨서 이미지화시켜서 그걸 생각하면서 나쁜 것을 제거하고 긍정적 마인드로 살아가게 되면 언젠가 네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 이것이 이 우주의 원칙이고 이건 세상과 바꿀 수 없는 진리라고 그렇게 가르치고 있죠. 여기에 누가 부추겨줍니까? 복술, 거짓 선지자들이 희망을 주는 거예요.

예레미야 23장 21절도 같은 말씀이죠(“이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하였은즉”). 18절 봅시다. “누가 여호와의 회의에 참예하여 그 말을 알아들었으며 누가 귀를 기울여 그 말을 들었느뇨”) 이렇게 되어 있죠. 22절, “그들이 만일 나의 회의에 참예하였더면 내 백성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로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게 하였으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성경은 천상회의에 의하면 이 세상은 이미 저주 아래 있고 지옥이에요. 천상회의에서 말발 센 마귀가 이미 인간세계를 다스리고 있으니까요. 욥기 1장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면 계절의 순환, 자연세계의 순환마저도 이 세상의 지옥 됨을 가리고 있는 입장에서 하나님께서 그럼 천국을 어떻게 만들어내는가?

아까 마태복음 3장 2절에 뭐라고 합니까? 천국이 가까이 왔다 했죠. 천국이 가까이 왔다 했는데 실제로 온 게 뭐에요? 천국이라기보다는 심판주가 가까이 왔죠. 심판주. 그 심판주가 누구시죠?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가까이 온 거예요.

그러면 이러한 지옥에서 모든 인간이 종교를 만들고 만들어진 종교는 이 곽 안에 다 포함이 돼요. 인간이 끄집어내는 학문, 인문학, 물리학, 과학, 철학 어떤 것도 이 밖을 못 벗어나요, 이걸. 과학이야 뭐 물질계니까 10단계 밖을 못 벗어나고 소위 윤리 도덕이라는 것도 영광과 승리를 못 벗어나고 영적인 것은 그 위의 것을 못 벗어나요. 사랑, 정의를 어떻게 벗어나요? 사랑이 전부라 하는데. 그런데 사랑, 정의도 4, 5단계밖에 안돼요.

그래서 아까 교회 온 사람이 뭐라고 했습니까? 여기 희생, 조화, 아름다움, 십자가죠. 십자가를 볼 때 희생이잖아요. 카발라 종교에서는 그것도 집어넣어요. 단계가 몇 단계입니까? 6단계밖에 안 되는 거예요. 십자가에서 멈추면 안돼. 더 있다는 거예요. 더 영적인 게 있다는 거예요. 십자가를 딛고 그다음 정의와 사랑을 펼쳐야 된다는 거예요. 그게 개혁주의 신학이죠.

자, 그러면 끝으로 이러한 지옥 풍경, 이 재료 안에서 모든 인간은 각자 신을 만들어요. 신을 어떻게 만듭니까? 자기가 인생을 살면서 체험한 거 있잖아요. 건강이 안 좋다든지 물질적 체험도 있지만 영적으로 누굴 만나서 눈물 흘리고 너무나 누구를 사랑하고 또 누구를 미워할 때 그 하나하나 재료가 뭐냐? 그것이 점점 더 나를 진화시켜서 신의 영역으로 올려 보내는 그러한 디딤돌로 인간들은 활용하는 본능을 마귀로부터 부여받은 거예요. 네가 원하는 신을 네가 네 손으로 만들면서 살아라. 그게 네게 평생에 주어진 기회다. 그 기회를 통해서 네가 진화할 만큼 진화하면 되잖아. 발전하면 되잖아.

여기에 대한 대책을 위해서 카발라의 생명나무 다 지우겠습니다. 성경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1.길은 없다. 너무나 명쾌하죠. 길은 없다. 같은 말로 목자는 없다. 2.전도하지 말라. 내가 전도한다. 다시 말해서, 남을 구원할 생각하지 마라.

이런 종교를 만드는 문제가 뭡니까? 누가 나를 좀 구원해달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악덕과 미덕이 자꾸 내부에서 갈등을 일으키니까 바르게 살고 싶은데 얼추 이 정도 올라갔으면 이젠 악한 생각이 안 나야 되는데, 아까 봤죠?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1단계, 2단계 빼놓고 3단계부터는 계속해서 뭐가 생깁니까? 아까 마지막 악덕이 탐욕이죠. 분명히 3단계 갔으면 보통 애쓴 게 아닌데 그 3단계 가서도 욕심이 생기는 거예요.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는 것처럼 욕심이 생기니까 탈출이 곤란한 거예요. 그러니 누가 나를 구원 해달라 하잖아요.

그게 없는 거예요. 나에 대한 구원이 애초부터 없었던 거예요, 성경에는. 전도는 주님이 전도해요. 주님이 전도한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주님이 선택해서 택한 백성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다. 땅땅땅. 결정 내렸어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길은 없는 거죠. 길은 없는데 그걸 인도하는 목자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미 실습을 해봤습니다. 목자 같은 목자 있던가요? 목자 같은 소리하고 있네. 무슨 목자가 있어요? 다 사기꾼들인데. 없어요. 그 목자가 사람을 전도하려고 했단 말이죠.

그럼 예레미야나 선지자의 특징이 뭡니까? 전도입니까, 안 그러면 심판입니까? 심판이죠, 심판. 세례 요한도 마찬가지에요. 회개하라. 심판주가 가까이 왔다. 그냥 심판을 알리는 거예요. 누구 하나 못됐다,가 아니라 전체 다가 한 저주의 바구니, 저주의 곽 안에, 상자 안에 갇혀있는 거예요. 그게 로마서 5장에 나오죠. 어디 안에 갇혀있다 했습니까? 죄 안에 갇혀있죠.

진리는 아까 뭐가 진리라고요? 뭐가 진리입니까? 죽음이 진리죠. 죽음만이 의미 있어요. 죽음 안에 갇혀있기 때문에. 인간이 내뱉는 모든 의미는 죽음에서 나오거든요. 길은 없는데 목자도 없어요. 그럼 주께서 어떻게 옵니까? 목자로 오면 되겠죠. 이건 뭐 성경구절 안 찾아봐도 알죠. 요한복음 10장. 내가 목자로 옴으로써 그 목자가 어딜 겨냥하느냐? 목자가 스스로 죽어요. 요한복음 10장에 누가 죽이는 게 아니라 스스로 죽는다 했어요.

요한복음 10장 18절에,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내가 스스로 버린다 했죠. 내가 스스로 버린다. 내가 죽기 때문에 목자라는 거예요. 죽기 때문에. 목자가 죽으면 양도 없어지죠. 그렇죠? 아니, 목자는 살아있어야 양을 구원할 거 아닙니까. 이게 바로 카발라 신이잖아요. 뭔가 지식이 있고 지혜가 있어야 우리가 살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 목자가 없다는 말은 이 땅에 뭐가 없다? 생명이 없는 거예요. 사람들은 생명을 원하고 탐하고 이 땅은 생명 없음을 분명히 하고. 그걸 분명히 하기 위해서 누가 오셨어요? 예수님이 오셨잖아요. 그러니까 요한복음 10장 20절에서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저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귀신 들리고 미쳤다. 누가 누구보고? 유대인들이 예수님보고. 구원 받고자 애쓰고 있는 자들이 예수님보고 귀신 들리고 미쳤다. 그럼 예수님 믿는 자들은 뭐가 돼요? 귀신 들리고 미친 분을 믿는 거예요. 같이 미치지 않으면 안 되거든요. 미쳤다는 말이 뭡니까? 내가 구원되는 것이 죄다. 이게 마귀 짓이다. 내가 구원되고자 희망하는 것이 마귀 짓임을 아는 것. 이것은 일반 인간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해석할 수 없습니다.

다시 요한복음 봅시다. 그렇게 해서 길이 없다 이 말이죠. 목자도 없고. 구원하는 목자가 죽어버렸는데 무슨 목자가 있어요. 없잖아요. 그런데 그 목자가 죽으면서… 여기 요한복음 10장 봅시다. 28절, “내가 저희에게” 뭘 주노니?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라고 되어 있죠.

예수님은 자기가 죽는 것을 아버지의 일로 본 거예요. 자기 일로 보지 않고. 아버지 일의 핵심이 본인이 죽는 거라면 아버지가 살아있는 한 자기의 죽음이 효과를 발생하는 거예요. 예수님 자기 죽음이. 안 죽으면 효과 없어요.

그런데 죽음으로 효과를 발휘하고 그 효과가 뭐냐? 생명이 발생되고 생명이 발생됨으로써 그 생명이 도달되는 쪽에 비로소 양이 생기면서 천국의 좁은 길, 영생의 길이 그 양 자체를 통해서 드디어 확인되고 결실을 맺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합니다. 30절에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

방금 이 이야기를 다 듣고 듣는 사람이 피식 웃었습니까? 어떻게 했습니까? 31절, 죽여버릴 거야, 내가.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돌을 들어 쳐서 죽이려고 했죠. 그 이유가 뭐냐? 33절에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내 하는 일이 죽는 일이 곧 하나님이 하는 일이다. 유대인들은 그 하나님을 생전 처음 들어봤고 우리는 그걸 도저히 못 받아들이겠다. 대신 네가 내 손에 죽어야 된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에게서 십자가가 왜 중요한지 알겠죠? 십자가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총동원된 인간의 지혜와 그 지혜가 얼마나 악마적인가를 보여주는 사건이 무슨 사건? 십자가 사건. 십자가 사건 안에서 우리는 이 세상과 하늘나라 내막을 계시의 영에 의해서 알게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하신 일 주께서 우리에게 십자가 사건의 내막을 알려줌으로써 이미 우리는 영생 받은 대상이 되었음을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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