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08a 부산강의 : [시편]69(53:1)-마이너스 인생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시편 53편.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1절) 이렇게 돼 있지요. 여기 (어리석은 자)를 괄호를 했어요. 어떤 이는 사람은, 어리석은 자 빼고 모든 사람은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이 말 맞잖아요. 이게 틀렸습니까? 지금 앞에 ‘어리석은 자’가 딱 등장하니까 사람들은 어리석은 자 안 되려고 성경말씀에서 어리석다는 규정에 안 들어가려고, 그래 하나님이 계시하는데, 성경은 그런 뜻이 아니, ‘어디서 수작을 부려’ 이런 뜻이거든요.
원래 마음에 하나님이 없어요. 우리는 하나님이 없는 마음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보세요. 진실과 거짓 가운데 어느 게 우리한테 유리합니까? 진실과 거짓 가운데 어느 것이 우리에게 유리하냐? 그러니까 이 말 자체를 요 질문 자체를 다시 분석할게요. 이미 질문 내에 답을 갖고 있어요.
어느 것이 더 나한테 유리하면 거꾸로 뭐다? 그게 바로 진실이다 말이죠. 나한테 유리하면 진실이에요. 어느 것이든 나한테 불리하면 뭐가 돼요? 그게 거짓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매일 눈 뜨고 선택하는 것은 뭐냐 하면 바로 어느 것이 나한테 유리하냐, 그것부터 선택하기 때문에 진실과 거짓은 누가 결정하는 거예요? 내가 결정하는 거예요.
내가 결정하는데 시편 53편에서 뭐라 하느냐 하면, 그것이 바로 그 마음에 이르기를 뭐가 없다? 하나님이 없는 거예요. 왜? 내가 결정하기 때문에. 내가 결정하는데 하나님이 왜 필요합니까? 내가 이미 하나님인데. 하나님이 벌써 있는데 왜 또 하나님을 믿어야 돼요. 말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누가 하나님이라 하면 어떻게 해야 돼요? 내가 하나님인데 하나님이라 했으니까 우리는 어떤 조치를 해야 됩니까? 제거해야 되고 죽어야 되지요. 그게 무슨 사건입니까? 십자가 사건인 거예요. 그래서 성도가 교회에 나와 성경을 봐야 될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나는 왜 지옥 가야 마땅하냐, 그것 배우는데 열심히 교회 나오세요. 너는 왜 지옥 가야 되느냐? 아무도 나의 진실에 대해서 이야기해주는 사람이 없어요.
나한테 유리한 게 진실하고, 나한테 불리하면 거짓이다, 라고 할 때 성경은 그게 바로 어리석은 자로 규정하거든요. 그러면 교회 안 나오고 말씀도 안 보면 결국 세상에선 뭐냐 하며 나만 쓰레기인가? 모조리 쓰레기에요. 그러니까 이 땅에는 일괄해서 지옥의 불이 떨어지는 거예요. 얼마나 고맙습니까. 모든 인간이 자기 유리한 데로 살아가는데 지옥 가야 마땅하지요.
문제는 성도도 똑같은데 마찬가지인데 차이가 뭐냐? 왜? 내가 왜 지옥 가야 되는데? 거기에 대해서 궁금하다는 것은 성도에게 일어나는 특이 현상이에요. 다른 사람은 가면 가지, 이러고 끝나는데 “왜 내가 지옥 가야지? 예수님 십자가 죽을 때 왜 내가 예수를 죽이는 자의 마음을 지니고 이 땅에 태어났지?” 이런 거예요. 태어날 때부터. 마음을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잖아요.
돈 벌고 돈 있고 없고, 어떤 기술을 배우고 정비기술 배울래, 안 그러면 농사기술 배울래, 어느 학교 갈래? 이거는 우리가 할 수 있어요. 그러나 딴 건 다 손대도 손 못 대는 게 있습니다. 그게 바로 마음이에요. 마음은 그냥 넘어가요. 손을 못 대고 그냥 넘어간다고요. 그러니 마음이 어떻게 관리 안 되니까 다른 걸 내가 할 수 있는 뭐 정비기술 배운다, 배를 탄다, 농사를 짓는다, 안 그러면 공무원시험 준비해서 합격한다.
이 모든 것은 뭐를 덮는 거예요? 내가 손 못 대는 마음을 어떻게 하면 덮어볼까 하는 거예요. 그래서 만약에 부자가 되었다. 재벌이 되었다. 집이 상가가 열댓 채 있다. 이런 사람이 만약에 이 교회에 왔다. 우리 김OO 권사님 적극 나서지요. “잠깐 이리와 봐. 왜 왔는데? 복음을 니가 알아? 복음이 뭔데?” 심문에 들어갑니다.
이 마음에 대해서는 이게 복음적으로는 안 변해요. 내 유리한 데로 살아가는 이 마음이 변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뭐 새 사람 됐다고? 아이고, 같잖아서. 귀신이 웃을 일, 새 사람 같은 소리하고 있네. 뭘 새 사람 돼요? 교회 부자 오게 되면 박수 칩시다, 이렇게 되는데, 그게 무슨 새 사람입니까? 부자라도 환영해요. 부자라서 오지 말라가 아니라 부자라도 환영합니다. 복음을 안다면.
그런데 아주 비리비리하고 가난한 사람 오게 되면 가난한 사람 환영 안 해요. 복음 알아도 환영 안 돼요. 나중에 부자 돼서 오세요. 우리교회에 불리한가, 유리한가가 중요하기 때문에. 유리교회에 유리하면 그게 진실이 되고, 불리하면 거짓이 되는 거예요. 야고보서 1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바로 인간들이 이런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야고보서 1장에서 이야기하는 건 뭐냐 하면 하늘에서 내려준 은사. 왜 야고보서 1장부터 끝까지 마찬가지입니다. 왜 하늘에서 내려준 은사를 생각하느냐 하면 땅이 지긋지긋하다는 거예요. 땅을 사랑하는 여자들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나니. 야고보서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세상 것을 좋아하는 여자는 하나님께 원수가 된다고 계속해서 일관되게 이야기하다가 야고보서 4장에 가면 인생은 인간은 안개니라. 5장 넘어가면 삯을 주지 않는 자가 분통 일으킨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라. 주께서 문밖에 계시니 곧 들이닥칠 거야. 계속해서 야고보서에서 일관되게 그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하늘의 은사를 강조하기 위해서 왜 땅은 그렇게 지지리 궁상이냐? 왜 땅에서 인간들은 못 벗어나느냐? 방금 이야기한 것을 이 문장으로 제가 말씀드릴게요.
인간의 마음은 뭐냐? 복음: 하늘에 가서 살자. 예수님 가신 그 하늘에 가서 살자, 복음이잖아요. 그럼 이 복음을 사람에게 전하면 이렇게 반응이 나온다고요. 나는 한계 밖으로 안 나갈래. 복음 듣고 교회 안 나오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이거에요. “나는 한계 밖으로 안 나갈래. 나는 나의 한계 안이 좋아. 정들었어. 친근해.” 복음은 당신의 한계를 벗어나야 됩니다. 돌아오는 답변은, “나 한계 안 벗어날래. 나 그냥 이대로 살래.”
요양병원에 만약에 시어머니가 갔다. 젊을 때부터 불도가 심했다. “어머니, 이제 곧 돌아가실 텐데 마지막으로 복음을 받아들이세요.” 엄마가 아직도 정신이 있는 이상 뭐라 합니까? “내비 둬. 이대로 살다 죽을래.” 왜 한계 안이 친근하기 때문에. 한계 안이 내 마음과 부합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한계 밖으로 왜 안 벗어나려고 하느냐? 그러면 뭐가 죽느냐 하면 지금껏 내가 키워온 내가 무용지물이 돼요. 무의미가 된다고요. 그래서 복음 실컷 듣고 어떻습니까, 하면 인생이 너무 허무한 것 같아, 이렇고 있다고. 이게 무슨 뜻이에요? 이 말은 허무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나는 허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내가 살아온 한계 안에 그냥 죽치고 있을래. 이게 바로 복음을 전하면 나오는 반응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걸 모를까요? 아시죠. 알아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한 겁니다. 네가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라. 이건 뭐냐 하면 너는 낚시꾼이 되란 뜻이거든요. 낚시 하면 뻔하잖아요. 어항 속에 금붕어 넣어놓고 낚싯대로 잡아당기듯이 이 세상을 어항으로 간주해서 가둬놓는 거예요. 한계지요. 가둬놓고 그다음에 뭘 던진다? 걸려든 사람은 어느 밖으로? 이 한계 세계 밖으로 나가는 거예요.
베드로 보고 그 일을 하라는 겁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그 실체가 마지막 더 뚜렷이 등장해요. 내가 이 세상에 살다가 밖으로 나간 것처럼 그래서 발생된 게 생산된 게 양이라는 거예요. 너는 내 양을 먹이라. 다시 말해서 내가 양을 위해서 이 세상 바깥에 나와서 나의 세계에 들어올 수 있는 모든 토대는 이미 주님께서 십자가, 요한복음 19장 31절에서 이미 다 이룬 거예요. 다 이뤄놓은 거예요.
그러면 이뤄놨을 때에 인간 속의 악마가 이런 반발을 하잖아요. “나 안 나가, 안 나가, 안 나가.” 그 반발하는 나는 내 세계 속이 좋아. 반발하는 사람들 중에 누가 들어 있느냐 하면 열두 제자가 들어있어요. 십자가 지든 말든 다시 어디로 간다? 나 살던 대로 가는 거예요. 내 한계 속이 이게 정들었어요. 이게 마음의 고향이다. 나갈 데가 있어야지요. 주님은 좋겠다. 혼자 가버리고.
그럼 남아있는 우리의 처신은? 그냥 내가 살던 대로 사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방치했습니까, 찾아왔습니까? 찾아왔지요. 그게 바로 하나님의 뭡니까? 계시의 영이잖아요. 성령으로 찾아온 거예요. 낚시하러 온 거예요. 찾아온 거예요. 찾아올 때는 성령의 능력으로 찾아오기 때문에, 중요한 것 나옵니다.
인간의 마음보다 더 센 마음이 있어요. 주님의 마음입니다. 마음과 마음 싸움에서 누가 졌어요? 내 마음이 깔렸어요, 졌어요. 내 마음보다 세야 이 마음에서 벗어나 주의 마음에 합류가 됩니다. 이 져버린 마음을 시편 53편 1절에서 이게 어리석은 마음이라는 거예요. 인간의 마음이 어리석은 마음이라면 예수님의 마음은 반대로 무슨 마음 되겠습니까? 어리석음의 반대말이 뭐예요? 지혜로운 마음이 되겠지요.
그것 할 때 능력이 사건에서 주어집니다. 그 사건이 십자가에요. 그래서 고린도전서 1장을 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1절에 보면,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해놓고요.
24절에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낚시지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이게 바로 계시를 받은 사람에게 해당되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2장 12절에 이걸 성령 받은 사람에게 해당되는 거예요.
성령은 뭐라고 돼 있느냐? 고린도전서 2장 11절에 보면, 성령은 하나님의 속마음, 깊은 마음이라고 돼 있어요. 센 마음, 하나님의 전체를 아는 하나님의 마음이 부분만 아는 어리석은 우리의 마음을 압도할 때 우리는 낚인 거예요. 낚여서 구원되는 거예요. 마음연구, 공부연구, 말씀연구해서 구원되는 게 아니고 낚여서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성도한테는 뭐만 충만하면 됩니까? 하나님의 계시만 충만하면 그걸로 돼요. 하나님의 계시의 영, 성령이 오시면 주께서 줄 수 있는 건 다 주시는 거예요. 왜? 한꺼번에 다 아니까. 뭘 안단 말입니까? 왜 인간의 마음은 어리석을 수밖에 없는지를, 그걸 다 아시는 거예요.
어리석기 때문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고, 고린도전서 2장 8절에 나온 말씀입니다. 그 못 박힌 채로 네가 나한테 그 짓했잖아, 하고 찾아오면서 그 능력이 압도하면서 우리는 어리석은 자가 되고 주님만이 지혜로운 자가 되는 겁니다. 뭐가 어리석으냐? 나한테 유리한 것이 진실이고 나한테 불리하면 거짓이라고 생각한 그 자체가 어리석다는 걸 발견한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모든 성경을 다 이뤘는데 그러면 성경내용은 뭡니까? 어리석음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내가 어느 면에서 어리석기에 주님께서 어리석은 우리들에게 죽임을 당해야 되는가? 십자가의 의를 가지고 성경해석에 들어가게 되면 성경해석은 계시의 영으로 해석하는 거예요, 전체를. 내가 어떻게 하면 천당 가느냐? 그거는 마귀의 영을 받은 거고. 그게 아니고 어떻게 해서 지옥 가야 마땅함을 아는 거예요.
만약에 계시의 영을 받지 아니하면 아까 이야기했지만 너무 허무한 것 같아. “나 교회 안 가. 틀린 말은 아닌데 인생이 너무 의미가 없어.” 인생이라 하지 말고 자기라 하지. “내가 의미가 없어졌어.” 나 한계 안에 그냥 살래, 이래 되지요. 성령이 와야 등장하니까.
그래서 지금부터 인간이 어느 정도 어리석은가를 제가 설명을 드려야 돼요. 왜냐하면 어리석음에 갔다가 오지 아니하면 성도가 아니기 때문에. 시편 53편에 어리석은 자라 할 때 그 어리석은 자로부터 찍어야 돼요. 그 어리석은 자부터 출발해야 돼요. 나는 구원받았으니까 어리석지 않다 하면 안 돼요. 어떤 점에서 어리석은지를 본격적으로 이제는 우리가 봐야 됩니다.
그러면 그 어리석음을 우리가 어디 가서 경험할 수 있느냐? 어리석다고 돼 있는데 그 어리석음의 경험을 해야 된다는데 그것부터 출발해야 되는데 그 어리석음을 어디서 출발해야 되느냐? 그런 걱정은 여러분 할 필요가 없어요.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어리석은 짓만 하고 있어요.
할머니가 갓바위에 올라가서 수능 백일 앞두고 기도합니다. 할머니의 생각은 이거에요. 업보 가운데서 선한 업보가 있고, 불교에선 업보라 하지만 성경에선 행위라 해요. 악한 업보가 있어요. 중요한 건 이겁니다. 나의 선한 업보가 남한테 이전이 되느냐 하는 문제에요. 기도는 갓바위 가서, 갓바위 칠백 미터 넘는 고지거든요. 그 높은 곳에 올라가서 백일 동안 기도한 그 성과가 기도하지 않은 수능 치는 손자에게 그게 이전이 되느냐 하는 문제에요.
그게 이전 됩니까? 업보는 당사자에게 유리하고 나쁜 업보는 당사자에게 불리한 거예요. 내가 한 행위가 타인에게 전가가 안 되는 것이 불교 교리에 들어있어요. 지금 불교를 왜 언급하느냐 하면 어리석은 자들의 아이디어에서 나왔기 때문에 한 거예요. 불교는 자이나교에서 나왔어요. B.C. 9세기경, 불교는 B.C. 5세기경이니까 사백 년 후에 싯다르타가 창궐해서 종교 만든 게 불교거든요.
자이나교에 있어서 거기에 깨달은 사람이 등장해요. 깨달은 사람은 대웅이라 합니다. 절에 가면 대웅전 있지요. 그 자이나교의 가르침을 여러분 들어보세요. 불교 가르침과 어떻게 같은가? 대웅전에 가도 사람들이 뭘 바칩니다. 대웅이란 깨달은 자, 부처란 뜻이에요. 부처를 칭송할 때 대웅이라 해요.
자기가 분명히 자이나교에서 배울 때는 내 업보는 나에게 돌아오지 남한테 넘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걸 바친다고요. 갓바위에 빌듯이 비는 거예요. 그러면 거기 교리 가르치는 승려가 있는데 승려한테 묻습니다. “내가 이렇게 빌면 손자의 수능 성적이 오르겠습니까?”
승려가 하는 말이, “대웅, 깨달은 자는 인간세계의 어떤 번민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이다. 네가 바친다고 복 받고 안 바친다고 그게 깨달은 자가 아니다.” 깨달은 자는 그 정도가 아니에요. 해탈한 자는 그 정도가 아니라고요. 모든 관계조차도 벗어난 자를 깨달은 자라 하는 거예요. 이게 어리석은 아이디어에서 나온 거죠.
“그러면 내가 이걸 바쳐도 소용이 없단 말입니까?” 하면 승려가, “그래도 열심히 하셔야 됩니다.” “왜요?” “그걸 바쳐도 변화는 일어나지 않지만 바치는 당신이 그 과정을 통해서 정화되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열심히 하세요.” 어떻게 들어보니까 오늘날 목사가 하는 소리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이것 바친다고 복 받는 건 아니지만 바치는 과정 속에서 당신 자체가 변화되기 때문에 당신한테 좋은 업보가 된다는 거예요. 내 행함이 나한테 좋은 결과를 준다는 거예요.
이런 의식을 오늘날 현대식으로 바꿔보겠어요. 갓바위의 할머니가 손자 점수 올리기 위해서 기도할 때 두 아들이 있다 합시다. 큰아들이 말하기를, “어머님, 올라가서 하지 마세요. 연세도 많으신데 높은 산인데 관절 나가면 오히려 수능 볼 손자가 자기 때문에 할머니가 기도하다 엎어지고 자빠지면 시험공부 방해되니 하지 마세요”라고 할 때 둘째 아들은, “어머님, 하세요. 왜냐하면 할머니가 그렇게 손자가 성공하도록 열심히 기도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감명을 받고 할머니도 그렇게 날 위해서 기도하는데 내가 이렇게 수능 앞두고 놀면 되겠어, 하고 각성할 수 있는 기회를 주니까 하세요”라고 했어요. 두 사람 중 어느 게 맞습니까?
이게 한석봉 이야기와 똑같은 거예요. 불 끄자. 나는 떡 썰 때 너는 글을 써라. 이게 얼마나 불공평한 시합입니까? 자기야 칠성시장에서 35년 동안 떡 썰었으니 잘 썰겠지요. 왜 그러냐 하면 자기를 모델로 해서 타인이 나의 행동에 감명을 받을 때에 나는 상대방에게 좋은 업보를 전수한 게 된다는 거예요.
갑자기 확 떠오른 생각이 있지요. 주기철 목사. 주기철 목사가 신사참배 안 해서 순교했다. “목사님, 살아서 복음 전해야지 이렇게 하면 됩니까?” “아니야. 소위 목사가 되어서 교인들에게 좋은 것을 남길 때 교인들이 내 모습에 감명 받아서 그들도 신앙생활 잘할 수 있으니까 나 하나 희생물로 여기고 나는 십자가 지고 주의 길을 따를 테니까 너도 나의 길을 따르라” 이런 식이죠.
도대체가 종교계라는 게 복음은 모르니까 불교든 기독교든 인간을 감명시켜서 내 사람 만드는데 내 소유물 만드는데 교회사람 만드는데 진력을 전력을 다해. 이게 뭐냐 하면 내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무의미하지 않고 의미로 전환시키고자 하는 인간의 나름대로의 노력입니다. 내가 무가치하지 않고 무의미하지 않는 이유가 뭡니까? 나 지옥 갈 사람 아니었었어, 이거 입증하는 거예요.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 정반대에요. 교회라는 게, 그리고 기독교라는 게.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난 뒤에 “아아 나 진짜 의미 없네. 두 번 다시 나한테 그런 소리하지 마. 나 안 들을래. 나 의미 없으니까.” 이게 지금 뭘 모르느냐 하면 이거에요. 허무를 숫자로 하면 0이거든요. 그러니까 인간은 뭐냐 하면 평소에 0이 아니어야 하고, 노력한 만큼 선한 업보, 1+ 때론 행운이 와서 3+ 이렇게 해서 266, 256 이 나이까지 성과를 거둘 때는 이게 의미 없음이 아니고 의미 있음으로 나가거든요.
보통 70대는 뭐였습니까? “애 셋 다 키웠습니다. 대학 다 보냈어요.” 이러잖아요. 그게 뭐예요? 이게 플러스에요, 플러스. 아이 공부 다 시키고 시집장가 다 보내고 다 했다는 거예요. 이게 플러스거든요. 그런데 복음 들으면 이 플러스가 세상적이라 하니까 갑자기 0로 생각하는 거예요. 성경에는 0가 아니고 마이너스입니다.
이것을 죄로 보는 거예요. 인간은 무아가 아니에요. 인간은 있어야 돼요. 뭐로 있어야 돼요? 죄인으로 태어난 거예요. 그게 시편 53편 이전, 이전에 몇 편입니까? 빨리 계산해보세요. 시편 51편. 시편 51편에 다윗이 뭐라고 했어요? 나는 어디서 태어났다? 나는 죄 중에 태어났다. 죄를 증거하기 위해서 태어난 거예요. 그게 이스라엘의 왕이고, 언약의 사람입니다.
무의미로 돌아갈 수 없어요. 그냥 죄인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 계시의 영을 안 받은 사람은 자꾸 0에서 멈춰요. 그리고 복음 전하는 사람은 이렇게 합니다. “그렇게 살 것 같으면 차라리 죽어. 죽으면 그만이지. 죽으면 되잖아.” 그게 가룟 유다에요. 성경은 아주 빠짐이 없어.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기록해놨어요. 그게 가룟 유다에요.
“예수님이 나를 배신 때렸다면 내가 선방 날리겠다. 내가 예수님 팔아먹으면 되지.” 왜? 예수는 나를 허무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런데 왜 우리는 허무하면 안 되지요? 그 이유를 몰라요. 허무한 제로 정도가 아닙니다. 구원받은 제자들, 구원받은 성도가 예수 믿어서 플러스, 플러스하려고 예수 믿는 게 아니에요. 인간의 능력으로 갈 수 없는 자리, 무슨 자리입니까? 플러스 자리가 아니고 무슨 자리? 마이너스 자리.
왜 나는 지옥에 가야 합당한가? 그것을 말씀을 통해서 성령을 통해서 새삼스럽게 파고들어가는 겁니다. 왜?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이미 성령 받았기 때문에, 주님 찾아왔기 때문에. 주님의 고난 받는 의미가 내 남은 생애를 채우는 겁니다. 주님의 환란이 내 남은 생애를 채우는 거예요.
아주 영광스럽지요. 매사 기쁘고 감사해요. 왜? 기쁨으로 내가 망가질 수 있다는 거예요. 내가 기쁨으로 망가질 수 있는 게 바로 나에게 온 진리고 그게 자유잖아요. 그 교회가 무슨 교회? 진리가 자유케 하는 교회. 이 이야기 듣고 다른 사람이 뭐라겠어요? 전부 다 실소를 금할 수 없을 거예요. 밥이나 먹는데 자유롭지….
마이너스의 그 깊이, 마이너스의 넓이와 마이너스의 폭과 마이너스의 높이를 알면 알수록 거기서 뭐가 나오느냐? 사랑이 나온다는 겁니다. 행실 나쁜 여자가 예수님 눈앞에 향수 뿌릴 때에 주께서 하신 말씀이, 적게 용서받은 자는 적게 사랑하고 많이 사함을 받은 자는 많이 사랑한다. 주께서 챙기려하는 것은 오직 사랑뿐이에요.
이미 내가 망가져서 얻은 사랑을 너는 건방지게 안 망가지고 그걸 공짜로 어떻게 페인트칠할 있나? 그걸 붙여서 뭐할 건데? 나중에 심판대에서 가짜는 다 떨어질 건데. 마음속까지 그 사랑이 파고들어가려면 그 십자가 사랑이 우리를 콕콕 찍어서 우리로 하여금 왜 우리는 지옥 가야 마땅한지 어떤 마음이 지옥인지를 거기서 다 일러주는 그것이 말씀에 담긴 뜻이에요.
불교 이야기 약간만 더 하고요. 어리석은 자의 대변사이기 때문에. 그래서 인간은 불교 같은 경우에 0에서 머물러요. 업보를 선한 업보를 이게 남한테 전가가 안 돼요. 전가가 안 되니까 이것 모아 놨다 뭐할 건데요? 누구한테 전가하느냐? 나에게 전가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보시를 하는 것, 헌금하는 거죠.
보시를 하면서 그 속에서 내가 선한 업보를 증식하는 거예요. 착한 일이 착한 일을 낳고, 착한 일이 착한 일을 낳게 만들어서 그 결과물이 나한테 오는 겁니다. 그러면 나한테 오게 되면 나한테 어떤 혜택이 주어지는가? 불교 이야기니까 잘 들어보세요. 인간이 마음에 고통과 번민과 걱정이 넘치는 것은 부처가 연구해보니까 이 세상 끝에 미쳐서 그런 거예요.
첫 번째, 좋은 것에 두 번째 나쁜 것, 좋은 것을 판별하는데, 식이라 해요. 인식하는 것. 인식하는 게 의식이 되니까 불교에서. 생각을 하니까 생각하는 것이 모여서 이게 의식이 되고, 의식 안에 뭐가 있느냐? 기억이 있잖아요. 기억 때문에 과거 때문에 인간이 미치는 거예요. 그래서 좋은 것을 판별하고, 이것도 식으로 입력이 되고 저장이 되고, 나쁜 것도 입력이 돼 있고. 세 번째가 뭐냐? 여기에 좋고 나쁜 것에 인간은 미쳐버립니다.
이게 바로 불교에서 세 가지 독(삼독: 탐욕(貪欲), 진에(瞋恚), 우치(愚癡)가 있으며, 줄여서 탐·진·치(貪·瞋·癡)라고도 함)이라 하는 거예요. 평생 동안 인간은 이것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없으니까 좋은 업보를 써먹을 때가 됐다는 거예요. 이게 마일리지죠. 좋은 업보는 어떻게 마일리지냐 하면 이것을 해탈하는데 써먹는 거예요. 해탈하려면 좋은 것, 나쁜 것에 미치는 이걸 한꺼번에 해소하는 방법은 뭐냐 하면 나를 뭐로 바꾸느냐 하면 무아로 바꾸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있는 플러스 나를 뭐로 바꾼다? 제로의 나로 바꾸는 거예요. 제로의 나로 계속해서 바꿔나가는 겁니다.
한 번 해서 안 되면 여러 번하면 그게 윤회설 되는 거예요. 하지만 질적으로 좋은데 좋은 인간으로 태어날 가능성을 높여가는 거예요. 이렇게 하려면 그 업보를 한 곳에 모아요. 씨앗이에요. 씨 안에 업보를 해서 좋은 업보가 있잖아요. 결과물, 열매가 있잖아요. 그것을 죽음에 넘겨줘야 해탈이 되니까 윤회가 가능하니까 집어넣을 때 이게 시간이 7주 걸려요. 7주 걸리는 이걸 49재라 합니다.
그런데 넘어갈 때 죽는 것을 그리워하느냐? 지금 이런 걸로 불타고 있는 이 등을 불을 꺼야 돼요. 불 끄는 걸 해탈이라 합니다. 타오르는 욕심을 끄는 거예요. 끄면 죽는데 그다음에 똑같은 저질의 태어나면 안 되잖아요. 그러면 좋은 업보를 쌓아서 주식투자하듯이 투자를 계속 해나가면 좋은 업보의 결과물로 새로운 해탈의 부처처럼 내가 새로운 나로 거듭날 수 있는 겁니다. 49재가 되어서 다시 태어날 때는 나도 모르는 남의 여자의 자궁 속에서 다시 태어나지요. 이게 49재거든요.
그러니까 니고데모가 예수님 보고 뭐라 했습니까? 다시 태어나야 된다 하니까 뭐라 합니까? 내가 어떻게 엄마 몸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 본의 아니고 니고데모는 불교도 모르고 자이나교도 몰라요. 모르지만 인간의 본성은 나를 잊지 못해요. 나를 버리지를 못하지만 세상적으로 하여 이러한 욕심과 욕망의 화신은 불타오르니까 어떻게 불을 좀 끄려면 그 가운데도 선악과를 따먹었으니까 좋은 업보를 많이 쌓는 수 외에는 다른 수가 없는 겁니다.
얼마 전에 제가 올해 1월에 장례식에 참석했는데 그분이 젊은 나이지만 갑자기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어요. 돌아가고 난 뒤에 그 부인 되시는 분이 복음 잘 듣고 했는데 주위에서 가만두질 않는 거예요. “이 사람아, 젊은 남편 그래 보내면 안 된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49재 해야지.” 49재는 할 수는 없고 교회 다녔으니까 절에 갈 수는 없고 49재 비슷한 예배를 드리는…. 날짜 계산해서 49재 예배를 드려야 떠도는 영혼이 더 이상 세상에 미련두지 않고 불을 끌 수가 있는 거예요. 올라갈 수 있다는 거예요.
어떻습니까?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이 아이디어가 도대체 어디서 나왔느냐를 봐야 돼요. 복음을 통해서. 이 복잡한 불교라고 내치지 말고 이게 우리 안에 그대로 들어있는 거예요. 불교도 아담의 자손이니까. 아담 내에 도대체 뭘 전수받았기에 이런 아이디어가 계속해서 교회 다니면서 성경 공부하면서 계속 피어나오느냐 이 말이죠. 그걸 발로 끄든지….
실컷 복음 듣고 문 열고 나가면 이 생각 불교로 변하고, 복음이 기억이 안 나. 그게 바로 하나님께서 인간세계에 없는 언약을 앞장세워서 오신 하나님이에요. 직접 인간이란 껍데기를 안에 스스로 집어넣어요. 그래서 나는 스스로 계신 자에요. 여호와께서 언약을 앞장세워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서.
언약을 세우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출애굽기 20장 보겠습니다. 5절,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몇 대?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어디까지 은혜를 베푼다?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삼사 대와 천대의 극심한 차이를 보이는 언약을 주셨어요.
그러니까 이거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보시는 거예요. 삼사 대에 이르는 자와 천대까지, 천대는 영원을 말합니다. 인간이 헤아릴 수 있는 그 너머. 삼사 대와 천대까지 가는 두 부류의 인간을 내가 율법을 제공함으로써, 모세율법이죠, 언약이죠. 언약을 제공함으로써 그 두 양상을 내가 생산해내겠다는 거예요.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 했잖아요. 노아 방주를 만들 때에 다른 이웃사람들이 와서, “할아버지 뭐하십니까?” “비 올 때를 대비해서.” “비 올 때도 있고 안 올 때도 있는 비가 온다한들 이 정도로 많이 오지는 않습니다. 노아 할아버지는 과거를 모릅니까?” 인간의 지식은 어디서 나온 거예요? 과거의 누적된 지식이 현재를 해석하거든요.
그런데 언약이 있는 노아는 뭐냐?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가 미리 침투하는 것을 언약이라 하는 거예요. 해석에 차이가 나는 거예요.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 대비하는 것과 경험하지도 않은 모르는 것에 의해서 나를 납치하듯이 나를 활용해주는 것과 완전히 다르지요. 나를 활용하는 거예요. 그걸 뭐냐 하면 예상 밖인데, 내 인생은 내가 예상했어요. 과거로부터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되고 그것 때문에 인간들은 보험을 들어놓는 거예요.
보람상조 왜 들어갑니까? 미리 예상하잖아요. ‘가시는 길 곱게 보내드리겠습니다.’ 죽은 당사자는 곱게 가든 이미 죽어버렸는데 곱든지 말든 상관없어요. 예상 밖에서 들어올 때는 ‘왜’라는 답변을 할 수밖에 없어요. 왜 하필이면 저에게? 이 답변을 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예상 밖의 문제가 바깥에서 출제했기 때문에.
‘왜’라는 말은 뭐냐? 예수님에게 일어난 사건을 집어넣을 때 왜라는 답변이 나와요. 예수님의 사건이 뭐냐? 십자가 사건이에요. 십자가 사건은 어느 인간도 예상 못했어요. 왜? 인간은 지혜로우니까. 인간의 판단은 섬세하게 모든 상황을 고려해서 심중함의 심중함으로 내린 결과거든요. 주께서, “다했냐? 너의 지혜와 진리 동원 다했어? 그럼 내가 비껴갈게. 니 인생 그렇게 산다고? 다했어? 내 비껴갈게. 네가 예상 못한 것으로 마중 나올게.”
이것이 바로 백번 읽었던 시편 53편이 아니라 어떤 사고 터지고 난 뒤에 예상 못한 사건이 터지고 난 뒤에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시편 53편, 그리고 시편 51편 이런 거예요. 다윗이 밧세바 만나기 위해서 환장했습니까? 그냥 모든 것이 우연이었어요, 해프닝이었어요.
형님 칠순잔치 호텔에서 마치고 돌아갈 때 40년 동안인가 버스 운전했다는 그 사람이 자기 말대로는 브레이크가 안 들었다는 거예요. 그러나 제 개인적 의견은 사람 죽이고 싶어서 환장했어요. 성질나서 확 그냥 세상이고 뭐고 세상도 죽고 나도 죽고 싶은 생각, 나의 육십 넘은 사람들 그런 생각이 불뚝불뚝 나와요. 왜 나오느냐? 예상 못하거든요.
내가 살아가면서 성질나는 게 예상해서 합니까? 아니에요. 이유도 없이 뜬금없이 성질나요. 68, 아시지요? 아무 이유가 없어요. 여자는 좋겠어요. 그걸 갱년기라 하거든요. 여자한테는 갱년기인데 남자는 그걸 다른 말로 할 수가 없어요. 그냥 이유도 없어요. 너 죽고 나 죽자. 일 터지고 난 뒤에 급발진이 어떻고 쓸데없는 소리하고, 브레이크가 안 밟혔다 하고. 나도 죽고 너도 죽자는, 그냥 성질난 거예요. 이거는 개인적인 의견이니까 안 들어도 그만이에요.
왜냐하면 우리 인생이란 매순간 정지상태에요. 정지상태가 연결 된 거예요. 이게 인생입니다. 그러면 뭐냐 하면 인간의 상식과 인간의 한계 속에서 나왔던 자신의, 아까 불교에서 이야기한 자기 판단, 나는 허무하면 안 된다는 것, 내가 가진 플러스를 계속 지켜야 된다는 거예요. 이것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니까 주님의 말씀의 연속성에 이걸 순간순간 끼어드는 셈이에요.
언약의 흐름이 이 지독한 악이 끼어들어서 그 당사자인 인간들로 하여금 아무리 복음이 좋고 하나님이 좋지만 이게 순간순간 단절을 유발시켜요. 정지화면이 된다고요. “그래, 하나님 좋고 복음, 말씀 다 좋지. 좋은데 사는 게 왜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 졸지에 내 인생이 왜 이래 된 거야? 그동안 나 나쁜 짓 안 했잖아.” 갑자기 불교가 막 돼버린 거예요. “주여, 저 그렇게 나쁜 인간입니까? 내가 이런 벌을 받을 정도로 나쁜 짓을 했습니까? 나보다 더 나쁜 짓해도 저렇게 잘 사는데.”
그래서 첫째 강의 결론은 이겁니다. 에서를 거쳐서 야곱 와야 돼요. 야곱 속에 에서요소가 들어가야 된다고요. 함의 요소를 족보를 거쳐야 이게 셈, 아브라함의 족보가 들어온다고요. 근데 우리는 함 거치고 아브라함 들어가려고 성질 급하게 나오는 거예요. 노아는 당대의 의인이죠. 그러나 당대는 뭡니까? 아주 악해야 돼요. 악해야 노아의 의미가 생긴다고요. 노아의 의미가 아니고 노아언약의 의미.
성령 받은 여러분들은 언약의 의미를 위해서 여러분들을 활용하고 있는 중입니다. 누가 반대하느냐? 당사자인 내가 반대하지요. 늘 불평불만이고 내 인생 물어내라고 달려들고, 그렇게 하지요. 그럴 때마다 주께서 이게 ‘십자가에 다 이루었다’의 감사로 넘어오기 위해서는 필수 절차로 그러한 원망과 불평을 하나님께서 다 들어주시면서 우리에게 제공한 것은 그러니까 너의 죄를 이미 다 사했다잖아, 라고 내놓을 때 전에 알던 감사와 다른 폭이 깊은 감사가 튀어나올 겁니다. 10분 쉽시다.
20240708b 부산강의 : [시편]69(53:1)-마이너스 인생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이번 수련회에 신명기 하는데 신명기 들어가면서 먼저 염두에 둘 것이 있어요. ‘인간은 역사의 이면으로 들어설 수 없다.’ 다른 말로 하면 책이죠, 책. 하나님의 말씀. 이면이라 하는 것은 뒷면을 말합니다. 인간은 역사의 이면, 뒷면으로 들어설 수 없어요. 왜 그러냐 하면 역사란 승자의 책이기 때문에. 이긴 자의 책이에요. 그래서 역사는 이긴 자를 뭐라 하느냐 하면 선한 자로 봐요, 착한 자. 그리고 역사는 패배한 자를 악한 자로 봐요.
나쁜 자로 봐서 그다음부터는 역사 뒤쪽으로 못 가니까 앞쪽에서 나는 모든 논리와 법칙이 뭐냐 하면 왜 선한 자는 복 받았느냐, 왜 악한 자는 저주받아야 마땅하냐? 어떻게 해서 악한 자가 되었고, 어떻게 해서 선한 자가 되었는가를 거기서 법칙을 다 끄집어내요. 누가? 후대 인간들이. 끄집어내면 끄집어낸 법칙이 이야기하는 건 뭐냐 하면 이거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살아남은 자가 그것도 승리자로 살아남는 자가 모든 가치를 판정할 수 있는 심판 자리에 앉을 수 있는 겁니다.
‘저 인간은 저래서 망해야 마땅해.’ 왜? 신은 공평하니까 신은 살아계시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저주받아 마땅해. 그리니까 난 하나님을 찬양해. 저렇게 악한 자를 저주케 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라는 말을 누가 합니까? 자기를 승자로 자기를 선한 자로 자기가 착해서 살아남았다는 것을 단정 짓는 자가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이렇지요. 왜 제 때에 화장실을 못 갔느냐? 왜 남한테 화장실을 빼앗겼느냐? 그만큼 게으르기 때문에. 이미 화장실 차지에 패배자가 된 입장에서 그걸 합리화시킬 수 있는 법칙을 그다음부터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한 것은 누구의 뜻이다? 하나님의 선한 뜻으로 본 거예요.
하나님을 선하게 못 봐서 환장들 했어. 왜 하나님을 선하게 봅니까? 그렇게 보는 효과가 뭡니까? 누구 선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고 선한 내가 선하기 때문에. 그 순환논리에서 인간은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역사의 뒤쪽으로 들어갈 수 없어요, 인간은. 내가 쓴 일기장 뒤로 안 가요.
그래서 인간에게 가장 못할 짓은 뭐냐 하면, 그 사람을 죽이는 것? 아니요. 아픈 것? 아니에요. 고문하는 것? 아닙니다. 인간의 돈을 빼앗는 것? 아니에요. 인간을 망가뜨리는 것? 아닙니다. 뭐가 남아요? 인간에게 희망을 빼앗아가는 것, 이게 가장 지독한 형벌이죠. 인간에게 다음에 잘 될 희망이 지금 이 시간부터 애초에 작살나는 것.
만약에 어떤 분이 여러분 존재의 미래, 희망까지 작살낸다면 그 사람이 판사든 검사든 관계없이 재판정에서 어떻게 하겠어요? 몰래 칼이나 총 들고 가서 나에게 희망을 앗아간 그 판사를 총 거두고 죽이겠지요. 그러면 재판정이 아수라장이 되겠지요. 엉망진창이 되겠지요. 그 재판정 현장이 십자가 현장이에요.
십자가에서 예수님보고 한 사람 빼놓고 대다수가 이야기했어요. “네가 뭔데 우릴 심판하느냐?” 이거에요. 네가 뭔데 우리를 심판해. 이렇게 대다수가 반발했는데 그 반발한 사람이 예수님에게 끝까지 요구한 게 있어요. 뭐냐 하면, ‘예수, 당신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소서’ 이걸 십자가 현장에서 성경대로 한다면, ‘우리를 구원해내라’ 이것 누가 이야기했지요? 그 많은 사람 중에서도 심지어 강도 중에 한 사람도 이 이야기를 했어요.
“내가 나에게 희망을 주면 난 당신을 믿을 용의가 돼 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당신이 나와 똑같은 신세가 되었으니까 희망이 작살난 신세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우리에게 내가 여기서 형틀에서 내려올 희망을 제공할 수 있는가? 그래서 고로 따라서 당신은 가짜야.”
그러면 지옥 가는 자에게 예수님은 철저하게 뭐가 돼요? 가짜이어야 하지요. 그 방식을 주님께선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가와요. 내가 잘 되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가짜라는 사실을 들춰내면서 찾아오지요. 그게 우리에게 유일하게 남아있는 희망입니다. 내가 지옥 가야 마땅하고 가짜인 것을 드러낼 수 있는 그 희망.
천대에 이르기까지 복을 받는다고요? 십계명에 나와 있지요. 그럼 제가 물어보겠습니다. 천대까지 복 받는 게 좋아요, 삼사 대까지 저주 안 받는 게 좋아요? 어느 쪽을 선택하실래요? 이론상은 천대가 나아요. 하지만 천대가 될 때는 내가 죽어 없어질 때고, 삼사 대는 내가 있을 때거든요. 미래에 어떻게 좋은 것보다도 당장 내가 힘들다면 인간은 내부적으로 그 복음을 거부하게 돼 있습니다.
이것을 이렇게 보면 돼요. 나의 노선 탈락. 에서의 족보가 창세기 36장에 나옵니다. 성경에서 에서는 야곱에 의해서 이미 저주받기로 확정됐어요. 야곱은 어떻게 됐습니까? 복 받기로 확정됐지요, 아버지한테. 근데 저주 조건을 왜 그렇게 길게 이야기해요? 길게 이야기한다고. 왜 그렇게 하는가? 그다음에 37장, 38장, 39장, 창세기 마지막까지 나오는 그 이야기와 대조시키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36장 내용은 에서 후손에 아무 문제없어요. 다시 말해서 그들이 예상한 노선대로 움직입니다. 그런데 37장의 야곱 이야기는 야곱 가정부터 작살났습니다. 노선이 끊어졌어요, 노선이. 애들 자식이 없어요. 제가 다시 문제 던질게요. 아들 셋 있는데 아들 다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대를 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이게 이번 수능에는 안 나옵니다.
아들 세 명인데 다 죽었습니다. 그 사람이 자기의 대를 이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보세요. 침묵 시간 5초 지났어요. 뭡니까? 누구 입에서? ‘며느리하고 하면 되지, 뭐.’ 이게 나오겠어요, 안 나오겠어요? 못 나오지요. 왜냐하면 며느리와 행음해서 자식 낳는 한 그동안 쌓아놓은 나의 업보, 나의 선한 하나님 섬김, 야곱의 가정에서 하나님 찬양하고 섬겼던 그 모든 의가 어떻게 돼요? 작살나는 거죠, 작살나는 거죠. 대 잇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 자존심이 뭉개지는 이게 제일 급한데요?
시편 53편을 하나님께서 어디다 집어넣느냐 하면 사도 바울 편지에다 그걸 집어넣었어요. 뭘 설명하기 위해서?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래서 시편 53편 2절에,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라고 돼 있지요. 누가 로마서 3장 읽어보세요. 3장 11절부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이 이야기를 어리석은 자로부터 연관시켜서 설명하고 있어요. 우리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를 넘어서서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죄 사함으로 우리가 의인되었다는 것을 미리 알아챘잖아요. 그걸 알아채지 말고 중간에 내가 내 인생이 끊어지는 대목을 찾으라면 뭡니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지요. 자기 의가 없다는 것은 지금 당장 죽어도 대들 어떤 근거가 이미 상실된 자에요. 죽어 마땅한 거예요. 지옥 가도 마땅한 거예요. 그걸 인간이 그 미래를 모른다 치고 인간이 어떻게 그걸 자진해서 들어갈 수 있습니까, 자진해서 들어갈 사람 아무도 없어요.
‘죄 지었다 하는 것은 십자가 피 이야기하려고 죄 지었다 해주는 거야. 나중에 너는 죄 지은 것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없어지고 의인되는 거야.’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남보고 그렇게 시키세요. 그 코스에 들어가면 저 죽어요, 정말.” 왜 그런 걱정을 하지요? 성경말씀은 맞아요. 의인은 없나니 그걸 믿는 자에게는 죽어도 다시 살아서 천국 간다는 걸 알아요. 알거든요. 식이죠. 아는데 못 믿겠어요.
왜냐하면 이게 만약에 믿어지면 큰 탈 날 것 같아. 이런 생각 들어요. 믿고 내가 죽었는데 안 찾아오면, 주님께서 태어나 눈 떠보니 지옥이라면 분명히 천국 간다고 나는 알고 왔는데 주께서 행정조치가 어떻게 돼가지고 너 애초부터 아니었어, 라는 판정을 내린다면 “괜히 믿었어, 해도 소용없는 걸 괜히 믿었어. 이것 속았어. 나, 주님한테 속았어.” 이렇게 되거든요.
이러한 두려움과 염려는 놀랍게도 아브라함, 이삭, 야곱 다 갖고 있었어요.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이해하려면 그들이 하나님 믿는 것 따로 실제로는 자기 자신의 희망을 갖는 것, 두 개의 노선을 갖고 있었고 하나님은 하나의 노선을 쳐버렸다는 것, 친 거예요. 또 문제 하나 나가면 이렇습니다.
롯의 딸들이 아버지와 강제로 동침한 이유는? 소돔과 고모라 멸망 이후에 엄마 뒤돌아보다 소금기둥 됐잖아요. 남은 것은 세 식구인데 갑자기 여기서 대를 이어야 되겠다고 딸들이 나선 거예요. 그러면 두 딸이 아버지에게 술 먹이고 겁탈했지요. 그래서 모압과 암몬 자식을 낳았잖아요. 딸들이 아버지를 겁탈한 이유는 딸의 자기의 존재의 연속성을 위한 거예요.
아버지가 뭐냐,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딸은 자아밖에 모르는 거예요. 나는 여기서 그냥 죽을 없다는 거예요. 죽은 것은 엄마고, 자기들이 잔 것은 아버지지만 나는 내 인생을 살아야 되겠다는. 아버지는 아버지고, 엄마는 엄마고 나는 내 인생 살아야 되겠다는 거예요. 이 딸들이 만약을 복음을 알고 예수님의 십자가 알았다. 그딴 게 무슨 소용 있어요. 그 바탕 자체는 뭐냐? 난 죽기 싫다는 데, 내 노선 끊어지기 싫다는 데요.
그래서 복음을 안다는 것은 어떤 사람과도 헤어질 준비가 돼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난 사람을 믿었습니다. 그런 거짓말하지 마세요. 사람을 믿는 게 아니고 사람 믿은 나를 믿었지요. 나에 대한 불신이요? 나에 대한 불신은 인간은 불가능해요. 안 되는 걸 어떻게 하는가? 또 준비했습니다. 한 장씩 돌리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복잡한 이야기가 아니고 정말 간편한 이야기에요. 간편한 이야기를 간편하게 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하고 난 뒤에 야곱 족속의 유다 가정이 어떻게 노선이 끊어졌는지를, 어떻게 아브라함이 아버지로부터 끊어져야 되는지를, 어떻게 얍복 강가에서 야곱 자체가 끊어져야 되는 것을, 어떻게 요셉이 모든 부모형제로부터 끊어져야 되는 것을, 어떻게 오늘날 십자가가 나 자체를 끊어버리는가? 네 아버진 죽었어요. 죽은 자는 죽은 자로 장사하고 넌 나를 따르라. 어떻게 이 끊어짐, 다시 태어나야 된다는 게 무슨 뜻인지를 왜 하나님은 그런 조치를 했는지를, 이것부터 설명하고 가겠습니다.
여기에 행복이란 노래에 가사 두 개가 나와 있지요. 한쪽은 1978년도 노래고, 하나는 1982년도 노랩니다. 그래서 먼저 두 번째, Albano & Romina Power란 이태리 가수의 <행복>(Felicita)이란 노래 잠시 듣고 가사는 우리는 들어도 모르니까 가락이 어떤 가락인지 듣고 그 가사를 봅시다. 그리고 묻겠습니다. 과연 이게 행복인지를. 이용이 불렀던 <사랑, 행복 그리고 이별>이란 노래 있지요. 그것 개사한 건데 가사를 보겠습니다.
행복이란 손을 맞잡고 멀리 가는 게 행복이야
사람들 사이에서 순수한 당신 눈빛이 행복이야
아이들처럼 가까이 지내는 게 행복이야
행복이란 편안한 배게, 흐르는 강물,
커튼 너머로 떨어지는 빗물이 행복이야
편안하게 낮춘 은은한 불빛이 행복이야
행복이란 작은 빵에 곁들이는 와인 한 잔이 행복이야
서랍 속에 넣어준 당신의 쪽지가 행복이야
내가 좋아하는 당신과 노래하는 게 행복이야
당신은 느낄 수 있지
이미 공중에 떠다니는 우리의 사랑노래
당신이 생각하는 행복처럼 당신을 느낄 수 있어
벌써 공중에 떠있는 따스한 햇살
당신이 알고 있는 그 행복의 미소처럼
행복은 뜻밖의 저녁에 빛나는 달빛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마음에 담은 축하편지가 행복이야
예상치 못한 한 통의 전화가 행복이야
밤의 해변에 부딪치는 파도소리가 행복이야
사랑 가득한 마음의 손길이 행복이야
다시 시작되는 새벽을 기다리는 게 행복이야
당신을 느낄 수 있어
이미 공중에 떠다니는 우리의 사랑
여기에 외국노래에 나오는 가사를 보게 되면 행복은 뭡니까? 자기 행복이죠. 내가 존재해서 느껴지는 당사자가 될 때 행복은 유의미, 의미 있다는 거예요. 주변에 일어나는 사소한 일, 아무것도 아니지만 내가 주관적으로 느끼면 그게 행복이 된다는 겁니다. 여기 나오는 가사 내용이 전부 다 사소하지요.
그런데 그 가사 말고 그 위에 있는 이준례 작사, 작곡, 조경수가 불렀던 <행복이란>이란 노래는 여러분 연배에 얼마나 수백 번 들었던 노래에요.
행복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잖아요
당신 없는 행복이란 있을 수 없잖아요
이 생명 다 바쳐서 당신을 사랑하리
이 목숨 다 바쳐서 영원히 사랑하리
이별만은 말아줘요, 내 곁에 있어줘요
당신 없는 행복이란 있을 수 없잖아요
사랑이 중한 것도 이제는 알았어요
당신 없는 사랑이란 있을 수 없잖아요
이 생명 다 바쳐서 당신을 사랑하리
이 목숨 다 바쳐서 영원히 사랑하리
이별만은 말아줘요, 내 곁에 있어줘요
당신 없는 사랑이란 있을 수 없잖아요
여기서 두 번째 조경수가 불렀던 행복이라 하는 것은 자기를 생각하지 않아요. 그대가 있으면 그걸로 족하다는 겁니다. 그러면 행복은 내가 얻어 챙기는 것이 아니고 당신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거죠. 너와 나의 관계가 있을 때에만 나오는 행복, 다른 하면 복, 그 복은 당신 때문에 내 존재가 지워져야 가능해요. 내가 있으면 안 돼요. 내가 있으면 아까 두 번째의 사소한 것으로 자기 낭만에 빠져버리거든요.
그런데 여기 뭡니까? “이 생명 다 바쳐서 당신을 사랑하리 이 목숨 다 바쳐서 영원히 사랑하리” 이건 레위기에 나오고 율법서의 요약이 뭡니까? 하나님의 율법을 요약하면 뭐가 된다죠?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요? 목숨을 다하여 정성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이같이 사랑하는 게 바로 율법의 선지자고 완성이잖아요.
이 이야기를 하시는 예수님 당사자가 바로 모든 인간에게 인간은 복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 오신 분이에요. 행복 같은 소리하고 있네. 지옥 갈 인간이 무슨 행복을 해. 정말 말씀을 다 이룬다면 이 세상에 그런 인간은 존재해요, 존재하지 않아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걸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해서 그걸 증명하고 노아를 통해서 다 증명해내는 거예요. 언약은 끊어짐이에요. 나로부터 내가 끊어져 내침을 당하는 거예요. 마땅히. 이것은 우리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거예요.
모세와 더불어 있던 모세언약입니다. 항상 모든 게 언약이에요. 모세가 들어올 때 이스라엘이 애굽을 탈출해서 간 곳이 어디냐 하면 바닷가였습니다. 이것은 모세도 당황했고요 남성만 육십만 되는 많은 숫자가 바닷가에 서 있습니다. 노을이나 구경하려고 서 있는 거예요? 왜 서 있는 거예요? 어디 뭐 피서 왔습니까? 주께서 먼저 당도하게 만들었어요. 뒤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느냐 하면 잡아라, 하는 소리가 들리게 만들었어요. 들리게 만들면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단절시켜놨어요.
뭐가 신기하냐? 바다가 있다는 자체는 평소에 바닷가 가본 사람 있을 거예요, 홍해를 살면서. 바다가 있다는 건 신기하지 않아요. 애굽 군사가 화내는 것도 예상한 바입니다. 전혀 신기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믿을만한 게 못돼. 보내준다 해놓고 안 보내줍니다. 공격합니다.
뭐가 신기하냐? 바다가 가로막혀서 못 가는 내가 신기한 것도 아니고, 적들이 쳐들어온 것도 신기한 게 아니고 왜 그들과 나 사이를 이렇게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구분 짓는 이게 신기한 거예요. 구분 지을 필요가 없는데 구분 지을 어떤 자격이나 그런 입장에 있지도 않은데 일방적으로 구분 짓는 거예요. 이게 뭐냐? 말씀은 복 받을 자와 저주받을 자를 일방적으로 지정했다는 사실, 이게 신기한 거예요.
복 받은 사람의 특징은 뭐냐? 본인이 바로 하나님이 예상한 대로 예상 못했다는 거예요. 복 받은 자도 불신자와 똑같이 자기 것을 못 놓고 자기 것을 포기 못합니다. 에서 족보이야기는 수월해요. 그냥 애 낳고 그냥 살았어요. 그런데 야곱 족보에 속한 창세가 37장 유다에 오게 되면 애를 갖는 것이 역사의 승리자에요. 애 못 낳으면 패배자 되는 겁니다.
그게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에서 드러났지요. 블레셋 족장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여자를 못 차지해서 환장했을 때에 거기서 뭔가 예상 못한 징벌부터 먼저 받아버렸어요. 하나님이 나와서 꾸중했거든요. 애굽의 왕도 마찬가지지만. 네가 건들지 말아야 할 자를 건드렸구나. 건들지도 않았어요, 아예. 건들일 뻔했지요. 그런데 그 집안의 여자들의 태가 다 닫힌 거예요. 내가 한 마음 씀씀이보다 너무 과도한 징벌이 먼저 찾아온 거예요.
복음을 듣고 성경을 보고 사람들은 대듭니다. 내가 뭐 그리 나쁘다고 나를 지옥 가는 건 당연하고, 이 세상에 지옥 불이 떨어지느냐? 우리가 한 행위가 거기에 대한 징벌이 균형이 안 맞는다는 거예요. 밸런스가 안 맞는 거예요. 뭐 그리 나쁘다고. 아이 키우고 공부 시키는 게 뭐가 그리 나쁜 짓이라고 지옥 불이, 저주의 불이 그것도 한 번 들어가면 나온다, 못 나온다? 한 번 들어가면 못 나와요. 이거는 희망 자체가 없어진 곳이 지옥이에요. 그러한 징벌이 너무 과하고 중하지 아니하냐. 뭐 그리 잘못 됐냐? 이렇게 이야기해요.
이게 뭐냐 하면 미래의 조치를 몰랐어요. 미래의 조치를 인간과 상대하지 않습니다. 누구와 상대하느냐? 예수님과 상대해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의 의미를 모르는 자는 지옥 불에 해당될 만한 중죄가 되는 겁니다. 심한 죄가 돼요. 십자가 의를 모르는 자는. 반대로 십자가 의를 안다는 사람은 인생이 얼마나 꼴아 박아도 입 다물고 감사해야 돼요.
왜냐하면 미래의 영생의 복을 앞당겨서 이미 받았기 때문에. 천국 비밀을 이미 받았어요. 앞의 번호는 0617+친구의 숫자. 사람들은 그 비밀번호 알려고 <커넥션> 1회부터 14회까지 긴 고통의 시간을 보냅니다. 드라마 이야기입니다. 우리 인생을 왜 삽니까? 하나님의 조치 그게 궁금한 거예요. 천국의 비밀번화가 궁금한 거예요.
유다에게 아들 세 명이 하나는 살아 있지만 둘 죽고 났을 때 갑자기 다급했어요. 그래서 유다가 내린 판단을 들어보세요. 우리 판단과 얼만 똑같은지. 첫째 아들 죽을 때, “하나님께서 뜻이 있어서 죽였겠지.” 그런데 둘째 아들이 형수와 했는데 어떻게 해서 오나니 죽었잖아요. 그때 유다 입장에서는 뭐가 등장하느냐 하면 내 것은 내가 지켜야 된다는.
우리 고장은 우리가 지킨다는 향토예비군처럼 내 것은 내가 지켜야 된다는 숨어있는 나의 근원적인 본심, 나의 노선에 대한 나의 방어책이 나와 버렸어요. 며느리에게, “나가라. 너는 우리 집안을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그래서 깔끔하게 해서 쫓아냈잖아요. 휴우 큰일 날 뻔했다. 여자 하나 들였다고 집안 말아먹게 될 뻔했다, 하고 이야기가 끝난 줄 알았어요.
인간의 조치가 다 끝나고 난 뒤에 유다는 절망에서 뭐로 바뀌었습니까? 지 조치 끝나고 난 뒤에 희망으로 바뀌었지요. 이걸 희망1로 봅시다. “그렇지, 내 선에서 처리해야 되지. 아들 둘 죽은 건 할 수 없다만 다 과거지사고 마지막 아들 남겨야지.” 희망을 가졌습니다. 그 희망을 가진 그 아들의 문제가 아니고 두 아들 죽인 것이 아버지 자신의 DNA를 받아서 죽은 거예요.
죽을 자는 누굽니까? 아들 둘은 왜 죽었느냐? 아버지 유다 본인 때문에 죽은 거예요. 그 본인 죄가 뭐냐?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 있는 며느리를 반발하고 저항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이 나에게 있는 게 아니고 실은 내가 싫어하는 쪽에 하나님의 뜻이 담겨서 나한테 찾아오고 만남이 이뤄졌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까 노래 첫째 가사도 문제가 있어요. 행복이 무엇인지 할 때는 지가 몸 바쳐서 사랑할 만하니까 사랑한 거예요. 그런 사랑으론 하늘나라 가는 사랑이 아닙니다. 하늘나라 사랑은 미워 죽겠는데 결국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랑이에요. 내 사랑이 끝이 나고 난 뒤에 그다음부터 내게 없는 사랑이 새롭게 발생되는 사랑이 그게 바로 에베소서 3장입니까, 사도 바울이 말한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 예상 못한 사랑. 내가 꺼지세요, 했는데 그분이 들고 온 사랑. 나 예수님과 안 놀아. 이제 고기 잡을래 했는데 찾아오는 사랑.
주님의 조치는 희망 갖는 나를 이 희망이 얼마나 엉터리고 가짜인 것을 집어넣는 작업인데 그 작업이 뭐냐? 희망2. 희망2 속에 우리를 집어넣어서 나의 희망에서 주님의 이뤄진 희망, 주님의 소망으로 바꿔치기하는 그 작업에 주께서 우리를 참여시켰다는 이게 바로 언약의 효과입니다. 이게 바로 복의 능력입니다.
로마서 8장에 그런 말씀 나오지요.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다. 백날 로마서 8장에서 무슨 소리하든 우리는 됐고 모르겠고, “나는 내 인생의 소망을 스스로 접을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럼 주께서, “그래 고집 부려. 잘했어. 그러니까 너는 이제부터 왜 지옥 가야 되는 이유를 내가 친절하게 알려줄게.” 그 친절이 문제가 되는 거예요. 내 인생 내 뜻대로 안 되는 작살나는 친절이죠. 친절하게 알려주는 거예요.
사람 낚는 어부 되는 그게 쉬운 게 아니에요. 들을 때는 신났지요. 하지만 내 인생이 거기에 같이 비빔밥으로 들어간다는 사실, 주님의 고난, 아픈 체험에 그게 내 체험으로 전환된다는 사실이에요.
삼 대째 저주받는데 천 대째 복을 받는다 할 때 삼 대째 저주받는 노선과 천 대째 노선 자체가 둘로 나눠져요. 나는 저주받으면 안 되겠다는 자들을 저주케 함으로서 천 대의 복 속으로 이미 들어온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지요. 하나님의 언약방식은 늘 그런 식이에요. 창세기 36장, 방금 그 이야기를 해드렸습니다.
그다음에 소돔과 고모라 끝나고 난 뒤에 롯이 자기 딸과 할 때 술을 먹였잖아요. 술을 먹였다는 말은 제 정신으로 아버지가 거기에 호응할리가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거든요. 왜? 롯은 아브라함의 조카로서 그 더러운 소돔과 고모라에서 나름 경건하게 생활했거든요. 그게 나중에 신약에 나와요.
그런 사람이 딸의 대를 잇는다는 생각도 못했지요. 강제로 술을 먹였지요. 강제니까 이건 비자발적이죠. 내가 구원받는 것은 주님의 비자발적 성질을 우리에게 안겨주는 겁니다.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아니고 나는 안 하고 싶은데 강제로 집어넣는 거예요. 언젠가 설교할 때 그런 이야기했어요.
나는 교회 안 가고 싶은데 나는 복음 듣기 싫은데 불신자가 절에 가던 동화사 주지가, “이 시간에 교회 가야지 절에 와있나. 놀러올 군번이야? 너 복음 들을 군번이야.” 주위의 불신자를 우릴 가만두질 않아요. 이제 모압과 암몬이에요. 그 롯에 의해서 태어난 모압과 암몬의 기능이 뭐냐? 지도를 봐야 돼.
홍해를 건너고 시나이 광야를 가는데 지금 이 노선으로 가면 빨리 들어갈 수 있어요. 여기 에돔, 에돔 위에 모압, 암몬 이 자들이 펜스를 치고 있어요. 어딜 들어가? 못 들어가. 정탐꾼 보내서 보니까 너무 좋아요. 좋은데 막상 들어가려고 보니까 에돔, 모압, 암몬이 딱 버티고 있는 거예요.
에돔은 누구 자손이죠? 야곱에 의해서 저주받은 에서의 후손들이죠. 야곱은 언약백성이잖아요. 언약백성에 에돔은 저주받아야 될 비-언약이죠. 비-언약이 철벽을 장벽을 치고 못 들어간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싸우지 마, 해서 빙 둘러서 들어간 곳이 뭐냐? 사해 옆으로 들어가게 해요. 여기에 여리고성 있는 거예요. 여리고성 들어가서 아이성 치고 여기 약속의 땅에 입성하게 되는 겁니다. 그 아버지, 할아버지의 땅에 입성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역할이 뭐냐 하면 이 와중에 이스라엘 가운데서 홍해 건너온 자는 전부 다 탈락을 시켜요. 이 사해 위쪽이 요단강이에요. 홍해를 건너온 자로 하여금 그냥 건너왔으면 요단강을 건너갈 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요단강을 건너가게끔 불신자들에 의해서 유도해가는 겁니다. 그 요단강을 건너가면서 그들이 알아야 했던 것은 뭐냐 하면 구원은 인간의 소망과 관계없이 일방적인 하나님의 소망이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소망은 어떻게 돼요? 이 과정 속에서 제거해야 되고 철폐해야 되겠지요. 스스로 알아서 자기 희망을 접을 인간은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 이 인간들을 불신자 세계 속을 통과하게 만들어요. 소위 하나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희망을 갖다가 불신자를 통과하면서 좌절을 겪게 됩니다.
“안 돼요. 하나님 저 안 됩니다. 제가 뭘 한 게 있다고 불신자와 진배없어요. 불신자라는 말 자체도 해당 안 됩니다. 저는 그냥 똑같은 인간입니다. 저 안 돼요. 말이 안 되지. 저 같은 것은 구원 희망 접었습니다.”라는 것을 겪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요단강 건널 때 중간에 물이 스톱한 적이 있거든요.
문제 냅니다. 물이 이스라엘 보고 스톱했습니까, 언약궤 보고 스톱했습니까? 이건 다 아는 이야기죠. 뭐 때문에 스톱했습니까? “야 가자, 가자. 물 멈출 거야.” 멈추겠어요, 안 멈추겠어요? 미쳤습니까? 니가 뭔데 멈춰요. 제사장 보고 멈추지 않아요. 제사장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제사장이 뭘 들고 있어요? 언약궤죠. “하나님이여, 하나님의 약속대로 될 줄 믿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이 약속되는 과정 속에서 내가 예상한 나의 노선은 절단돼야 돼요. 내 자아는 0이 아니고 마이너스가 돼야 돼요.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죄인을 부르러 온 거예요. 죄인을 없애려 오신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온 거예요. 그래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어야 돼요. 죄인밖에 없어야 돼요. 지옥 가는 사람밖에 없어야 돼요. 혹시 천국 간다면 이거는 의외입니다. 이거는 예상 밖의 일어지는 거예요.
시편 53편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제가 강의 처음에 이야기했지요. 하나님 없잖아요. 없는 걸 없다 하는데 오히려 하나님 없다는 게 정답 아닙니까. 그 말을 이해를 돕기 위해서 오늘날 과학을 생각해봅시다. 오늘날에는 왜 우상을 안 섬기죠? 2층 이사 갔어요? 아직 안 갔구나. 전보다 덜 요란스러워서.
왜 오늘날에는 절에 가 빌고 그런 짓을 왜 안 합니까? 이게 신을 만들 때는 그 신이 우리한테 뭔가 제공해야 돼요. 신에게 희망대상이어야 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가진 귀한 것을 신의 형상 만드는데 이게 소품으로 재료로 집어넣는 거예요. 어떤 외국에서 온 미국의 어떤 아가씨인데 트롯을 잘 불러요. 그런데 그 아가씨는 홍어 삶은 것을 잘 먹어요. 한국 사람도 잘 못 먹는 거예요. 홍해를 그냥 김치에 싸서 먹일 순 있지만 삶은 건 못 먹어요. 그런데 그 마리아란 가수는 잘 먹어요.
홍해 잘 삶는다, 이야기할 순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고, 재주 있네. 그런데 너 먹어볼래?” 안 먹지요. “목사님, 부산까지 왔는데 갈 때 김치 싸가지고 가세요.” 고맙지요. 그런데 김치 들고 대구까지 우에 들고 갑니까? 고마운 이야기지만 완곡하게 거절할 수밖에 없지요. 이게 제가 적어볼 테니까 실제 이 동네 있는 건데 오다가 적었어요. ‘팔공산 양명대사. 고통 받는 중생 구제해 드립니다.’ 옆에 가로로 해서, ‘풍, 비만증, 체질감정, 살 빼기, 허리, 팔, 다리, 위장, 고혈압’ 길 건너 골목에 있습니다.
이 사람 장사 잘 되겠어요? 장사 잘 안 됩니다. 당신이 어떻게 압니까? 장사 잘 되면 이 동네 안 삽니다. 이 동네에 아직까지 있다는 것은 부동산 값이 싸다는 뜻이고, 월세가 낮고 돈이 없다는 뜻이에요. 요새 풍, 체질감정 위해 이런 데 안 가고 어디 갑니까? 병원에 가잖아요. 그러니까 과학이 신이에요.
왜 지금 우상이 없는가? 인간 위주의 모든 지혜와 모든 연구가 과학 쪽으로 쏠리기 때문에, 과학이 종교를 대신하고, 과학 입장에서 종교는 미신이에요. 교회 다녀서 얻는 이익과 유리한 것과 과학해서 이익 얻는 것과 네가 정신 있거든 비교해봐라. 어느 쪽이 효과 있는지.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도 가고, 병원도 가고. 다리 찢어지겠다. 그럼 교회는, 세상은 과학에 맡기고 과학이 손 못 대는 죽어서 천당 가는 것은 교회가 책임지고. 그런데 결국 이것은 뭐냐 하면 내가 내 노선을 유지하는데 어떤 예외성도 나는 안 믿는다는 거예요. 나는 내가 잘 되는 것만 믿겠다는, 강의 초반에 나왔지요.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입니까? 내게 유리한 것은 이유도 따지지도 말고 진실이고, 내게 불리한 것은 거짓이다. 그걸 위해서 주께선 다른 신으로 오신 거예요. 다른 신, 뭐냐? 사람들이 망가진 신을 누가 믿겠어요? 인간들이 하는 모든 것에 노선을 바꾸기 위해서 인간이 찾지 않는 하나님 모습으로 오신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고, 그 예수님을 통해서 시편 53편을 사도 바울은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이란 것에 근거해서 시편 53편을 바로 로마서 3장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단정해버려요.
53편 2절에,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당연하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십자가를 경유하지 않고 이걸 보면, 그래도 우리는 있잖아, 이렇게 해석한다고요. 그래도 우리는 있잖아 한 자들이 누굴 죽였습니까? 예수님을 죽였잖아요.
십자가를 알고 구약 다시 보세요. 내가 예수님 찾을 위인이 아닌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찾으면 안 돼요. 주께서 나를 찾아서 박살내는 즐거움과 기쁨을 제공해야 됩니다. 왜? 이미 다 미래에 구원받은 자를 확정했다는 티가 확정했다는 그 사실이 내가 망가지는 즐거움과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는 이 현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걸 뭐라 하느냐? 6절에, “시온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줄 자 누구인고 하나님이 그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보세요. 포로 된 자, 사탄과 악마와 그리고 율법과 죄와 그리고 자기 목숨이 자기한테 자기 자존심에 포로 된 자를 돌이키려면 우리는 거기에 포로 됐다는 사실을 남은 인생을 살면서 그걸 확실하게 절여지도록 마음껏 이제는 뭐 마음껏 자유 하면서 내가 이렇게 죄악에 포로 된 자인 것을 외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리석지 않으려고 내가 지옥 안 가려고 하는 모든 수법이 이게 바로 구약의 어리석은 이스라엘이 했던 짓을 십자가를 경유해서 알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이제는 내 마음보다 주의 마음이 우세하고 월등하고 압도적인 것을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