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강의

언약으로 본 사회

아빠와 함께 2024. 6. 12. 07:40

20240610a 부산강의 : [시편]68(52:7)-언약으로 본 사회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52편이요. “강포한 자여 네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고” 그렇게 돼 있지요. 이게 누구의 시냐 하면, 다윗이라 돼 있어요. 그러면 악인이 뭐냐? 악인은 간단한 거예요. 다윗이 알고 있는 것과 다른 알고 있는 것이 빠져 있는 사람, 악인. 굉장히 쉽지요. 악인이라 하는 것은 다윗이 알고 있는 것이 없는 사람, 다윗이 알고 있는 바가 없는 사람, 이게 악인입니다.

이 세상에 스스로 악인 되고자 한다든지 악인이라고 인정하는 사람 있어요, 없어요? 아무도 없지요. 인간들은 자기 내부를 계속 파고, 파고 가면 나중에 달그락하는 소리가 나요. 바닥인데요. 애들에게 배고플 때 떡볶이 해주면 애들이 미친 듯이 달려들잖아요. 나중에 떡볶이 먹다보면 뭐라 합니까? “냄비 빵구나겠다” 하겠지요. 달그락 소리, 바닥이 나오잖아요.

떡볶이 냄비의 바닥이 있는 것처럼 인간의 바닥이 뭐가 있을까요? 인간의 바닥은 선악 지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것 다 아는 이야기인데 아는 이야기만 우리 다시 한 번 생각해봅시다. 인간의 바닥은 철판이 깔려있는데 그 철판은 선악지식이에요. 그런데 선악지식은 여러분 알다시피 선악지식은 뭐가 있느냐 하면, ‘하지 말라’에요. 또는 ‘따먹지 말라’에요. ‘알지 말라. 네가 소유해서는 안 된다’하는 하나님의 엄명이 선악지식입니다. 그게 바닥에 깔려있는 거예요, 바닥에. 그게 인간의 기초가 되는 거죠.

그러면 선악지식은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 했는데 이게 오늘날 현실 속에서는 이 선악지식이 어떤 모습으로 발현되고 이것이 모습을 띠고 있느냐는 거예요. 첫째는 내가 신이다. 이거는 성경에 나오는 거죠. 내가 신이라는 이유는, ‘나는 그 어떤 경우에도 잘났다’에요. 그러니까 이게 어느 정도로 잘났느냐 하면, “신이시여 내게 손대지 마소서” 이 정도까지 나가야 돼요. 그래야 자기 자신을 제대로 하는 거예요. 신이라 할지라도 내게 손 타지 마세요.

그래서 우상의 특징이 뭐겠어요? 우상의 특징은 교환입니다. 줄 것 주고, 받을 것 받아내는 거예요. 그게 창세기 4장에 나오는 신에게 하나님께 제물 드리는 사람 나오지요. 아담과 하와의 첫 번째 아들 이름이 뭡니까? 가인이죠. 그 가인이 제사를 드리지요. 줄 것 주고, 받을 받겠다는 겁니다.

그 제사의 시작은 가인부터 시작했지요. 가인이 그만큼 신은 내가 다룰 테니까 신이 먼저 나를 선빵 날리지 말라는 겁니다. 줄 것 주고, 받을 것 받을 테니까 좋은 관계 유지할 테니까 신이시여 궁극적으로는 나한테 너무 잔소리하거나 공격하지 말라는 거예요. 손대지 말라. 그걸 신약에선 자기 의라 하지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인간의 내부를 파고 들어가면 달그락 소리가 나오는데 그 달그락 소리가 뭐라 했습니까? 선악지식이에요. 나도 알만큼 안다. 두 번째가 뭐냐 하면 선악과의 특징이 뭐냐?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지요. 이걸 제가 다른 말로 하겠습니다. 아름답다. 선악과는 참으로 아름다웠어요.

아마 생명나무 과실이 선악과보다 아름답지 못한 것 같아요. 다른 어떤 과실보다 선악과가 가장 아름다울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계속 아담과 하와의 탐심을 자극했으니까요. 그리고 뱀이 다른 과실을 소개한 게 아니에요. 선악과가 탐낼만한 과실이기 때문에 마귀도 그렇고 인간도 그렇고 선악과를 따먹도록…. 아름답다는 말은 인간은 자기 자신의 의를 뭐로 바꾸느냐 하면 자기 안에서 아름다움으로 자기 자신을 구성을 해요. 설정을 한다고요. 아름답게.

선악과 따먹으면 그다음에 두 번째 나오는 경우는 어떤 거냐 하면 자아의 세계를 아름답게 포장하고 아름다운 세계로 자기에게 함몰됩니다. 아름다운 나의 모습으로 함몰돼요. 연세 많은 사람에게 트롯 노래를 들려주는 거예요. 예를 들면 <목포의 눈물> 들려줬을 때에 그 노래 듣는 순간 연세 많은 사람들이 뭐가 주마등처럼 지나가느냐 하면, 과거에 열아홉 살에 시집온 것부터 시작하죠. 왜 열아홉에 시집오는지 몰라.

열아홉에 시집와서 층층지하 시아버지부터 제사 다 드리고 다 섬기면서 아이 낳고 시누이, 시동생 다 챙기고 내 새끼 챙기면서 살아왔던 맵디매운 시집살이 다 견뎌왔던 것이 목포의 눈물 딱 듣는 순간 그게 확 오는 거예요. 왜? 그때 위로 됐던 노래가 목포의 눈물이에요. 진짜 마음 같으면 목포의 눈물, 틀어주고 싶다. 목포의 눈물 한 번 들어보시랍니까? 말로 하는 것보다 목포의 눈물 알지만, 실제로 실감이 안 나지요. 못 찾으면 할 수 없다. 하여튼 그런 노래 있어요.

목포의 눈물이란 노래 들었을 경우에 자기의 고생 많았던 것이 고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아름답게 뭐가 되지요? 포장되지요. 아름답게 포장되는 거예요. 내 고생한 것을 하나도 잃어버리기 싫은 거예요. 내가 얼마나 아름다운 세월을 살아왔는지를 자기에게 매몰될 수 있는 그 재료를 본인이 놓칠 수가 없어요.

이게 바로 선악과 따먹으면 자기 인생을 아름답게 자기 안에 침잠, 거기에 함몰되는 겁니다. 나는 나로 인하여 스스로 위로받는 거예요. 마지막 연세 많을 때 더러운 세상, 나를 열아홉에 시집와도 이렇게 누가 알아준 사람도 없고, 자식은 지 힘대로 사는 줄 착각하고 하지만 나는 그런 고생 하나하나가 버리는 게 아니고 다 주어모아요. 주어모아서 내 인생은 이렇게 나름 아름다웠다는 것을 포장하는 게 선악과 지식을 따먹은 증거에요.

이것이 연세 많은 사람의 자아 내부를 이렇게 계속 파고 들어가면 나중에 달그락 소리 나는 것, 마지막 바닥이 나와요. 바닥은 뭐냐? 선악지식이에요. 그렇다면 열아홉에 시집와서 새삼 고생한 것 이야기하는데 만약에 스무 살 때 교회 와서 교회에서 온갖 성경 공부한 것, 봉사한 것, 그 사람이 만약에 나중에 권사도 퇴임하고 팔십 넘었다 합시다.

그 사람 속에 뭐가 형성돼 있겠어요? 교회에서 행세했던 모든 힘든 봉사, 고생이 자기 자신을 위로할 수 있는 마지막 위로할 수 있는 뭐냐? 내 인생은 아름다웠다가 되겠지요. 그러니까 교회 다니나, 안 다니가 그냥 시집살이하나 나 자신을 아름다움에 함몰시키는 그 점에 대해서는 여전히 그 바닥은 뭐냐? 선악지식이 작동하고 있는 겁니다.

그 선악지식, 아름답게 보는 예를 들어서 목포의 눈물 같은 노래, 내가 이십 대 고생할 때 들은 노래를 다시 듣게 되면 그게 회상이 되는데 그게 노래도 그렇고 내가 또 힘들 때 나를 아름답게 만드는 가장 절정적인 것은 뭐냐? 냄새입니다. 내가 이것 육십 년대 들었던 냄새, 칠십 년대 들었던 냄새가 드는 순간, 낯선 여자에게서 내 남자의 향기가 올 때, 그 냄새가 나로 하여금 그때 시절을 끌어가고 있어요.

그래서 인간은 이 아름다움 속에 내가 신이라는 속에 인간의 시간은 정지됩니다. 나이 많이 먹었다, 세월이 흘렀다 없어져요. 나는 그때 그 사람 돼요.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때 그 사람(그게 심수봉이 나훈아를…).

인간은 그때 그 나로 멈춰있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몸이 닳아지면 뭐도 날아가요? 상대적으로 나의 세계의 아름다움과 내가 신이라는 자신의 역량, 에너지가 발휘되지 못한다는 것을 자기가 알거든요. 몸은 망가지지만 나의 시간이 멈추는 시절의 아름다운 나는 망가질 몸을 대체하지 아니 하면 내가 아직도 살 여력이 없어요. 보람이 없다고요. 사는 기쁨이 없잖아요.

그래서 내가 신이다, 아름답다, 이게 선악과 보기에 먹음직하고 탐스럽기 짝이 없는 것, 그래서 선악과가 내 안에 들어와서 뭘 만들었다? 나를 만든 거예요. 내가 선악과의 열매 그 자체입니다. 이게 인간들이 이런 모습으로 돼요. 제가 지금 이야기한 것은 뭐냐 하면 나에 대해서, 나, 다른 말로 자아지요. 나에 대해서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이 정리는 성경적 정리는 이렇게 됩니다. ‘기계+악마의 마음=나’ 기계에다 악마의 마음을 집어넣는 거예요.

그러면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이야기하면, 지금 시편 52편하고 있는데 시편 52편 1절에, “강포한 자여 네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고” 딱 나오지요. 여기 계속해서 악인들이 나오거든요. 여러분 먼저 들은 사람들은 아시지요. 누굴 악인이라고 하던가요? 다윗이 알고 있는 바가 빠져있는 사람을 악인이라고 하는 거예요. 왜? 시편 52편이 다윗이 지었기 때문에. 간단하지요.

그러면 다윗이 알고 있는 것이 빠져있는 사람을 악인이라고 누가 규정해요? 다윗이 규정하죠. 다윗, 네가 뭔데 함부로 나를 규정하느냐? 다윗의 배후에 누가 있어요? 바로 언약의 하나님이 있는 거예요. 언약의 하나님이 다윗에게 뭘 집어넣었다? 언약을 집어넣은 거예요. 그럼 악인은 뭐냐? 언약이 없는 자가 악인입니다. 논리가 그렇게 되는 겁니다. 간단해요.

더 나가서 언약이 없으면 그 사람은 무슨 재미로 사는가? 내가 신이고, 나는 나 자체로서 아름답기 그지없고, ‘나는 지난날 추억을 생각하면서 나 이대로 죽어도 좋아’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그 모습이 뭐가 빠진 상태에요? 하나님의 언약이 없는 상태, 이거는 비언약이에요. 비언약이 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인간의 자아다, 이 말이죠.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코카콜라 공장에 보면 코카콜라도 있지만 거기에 공장장도 있겠지요. 선반에 움직이는 코카콜라가 공장장의 마음을 압니까? 코카콜라는 유리병이에요, 유리병. 그거는 물체고 사물이에요. 일종의 사물, 기계라니까요. 코카콜라가 공장장의 마음을 모르잖아요.

공장장이 다윗이고 공장장이 언약이라면 악인들은 뭡니까? 코카콜라를 왜 만드는지를 몰라요. 공장장은 알아요. 목마를 때 시원하게 마시면 돈으로 환산된다. 그건 아는데 코카콜라는 그냥 선반 위에 움직일 뿐입니다. 그 선반이 뭐냐? 시간이에요. 인생이라 하는 것은 뭘 쳐다보느냐? 같은 코카콜라만 보는 거예요. 둘 다 동일하게 ‘저 사람 좀 늙었네.’

옛날 코미디에 이런 것 있어요. 볼빨간사춘기란 코너가 있는데 경로당에 나이 80세 이상끼리 모인 조폭이야기에요. 신참이 70대가 경로당에 처음 오니까 텃세하는 팔십 넘은 경로당 조폭이, “야 신입이!” 듣잖아요. “어 들리네?” “이리와 봐.” “왜요?” “재 걷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나의 80 넘으니까 걷는 것도 불안하고 들리지도 않는 거예요.

인간들은 시간이란 컨베이어벨트에서 똑같이 보면서 똑같이 가는 거예요. 살면서 똑같이 코카콜라만 주고받기 때문에 공장장의 마음을 알아요, 몰라요? 아무도 몰라요. ‘어, 들리네?’ 자기가 안 들리니까 젊은 사람이 들리는 게 신기했던 모양이죠. 그래서 이거는 기계인데 언약이 없으니까 언약이 없잖아요. 다윗은 언약이 있단 말이죠. 기계에서 악마의 마음이, 여기 선악지식이 악마의 마음입니다. 악마의 마음이 들어온 게 뭐라고요? 나, 또는 인간이라 하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다윗은 악마의 마음이 있었어요, 없었어요? 있었지요. 그러면 인간에게 언약이 온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지금 있는 악마의 마음, 네 속의 ‘기계+악마의 마음’이에요. 제가 기계란 말을 쓰느냐 하면, ‘물체+악마의 마음’을 왜 안 쓰고 기계라 하느냐 하면 기계가 기계를 만들어내요. 인간이 칼, 도구, 모든 자동차 전부 다 만들어내지요. 기계가 기계를 만들어내요. 기계가 인공지능까지 만들어낸다고요. 도구를 만들어내는 존재가 인간이잖아요. 백날 만들어도 인간의 마음은 그대로 유지되는 겁니다.

그래서 보통 인간인데 여기에 무엇과 비교하느냐 하면 다윗과 비교해보자. 다윗을 태어날 때 어떻게 태어났습니까? 다윗의 고백에 나와요. 시편 51편, 다윗은 어디서 태어났지요? 악에서 태어났지요.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잖아요. 그러니까 겉모습은 기계에요. 움직이니까. 연구를 하고 기계도 만들고 국가를 통치하니까 분명히 움직이는 기계처럼 보이는데 그 안에 뭐가 있습니까? 악이 있었잖아요.

제가 어제 낮 설교제목의 뭐냐? [사단의 자식]이죠. 이게 맞는 말인데 이상하게 생소하게 들리는 이유가 뭐죠?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큰 대궐 같은 집에 세 식구가 산다. 우리는 같은 코카콜라끼리 주고받으면, ‘야 좋겠다. 저 큰 집에 달랑 세 식구 사네. 수영장도 있고 지 하고 싶은 대로 살겠다.’ 우린 같은 코카콜라끼리 비교하는데, 주님 보시기에는 뭐냐? 대궐 같은 깁에 시체 세 구가 있는 거예요. 그러면 문제는 그 시체 세 구가 대궐 같은 집에 산다고 다시 시체가 아닌 걸로 부활할 수 있습니까, 다시 소생할 수 있습니까? 안 되죠. 안 되는 거예요.

다윗은 자기가 악에 있기 때문에 선악과 지식의 달그락 거리는 바닥, 아까 예를 들기를 무슨 냄비라 했습니까? 떡볶이 냄비에 숟가락 댈 때 결국 바닥은 선악지식으로 깔려있지요. 이렇게 깔려있던 그 다윗이 하나님의 언약, 다시 말해서 나단 선지자가 찾아왔지요. 하나님의 언약을 이야기할 때 이제 중요합니다.

질문입니다. 악마의 마음이 없어졌습니까, 있습니까? 야 이게 중요합니다. 악마의 마음이 내 속에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을 비로소 다윗은 발견한 거예요. 죄인이 의인 된 게 아니고 이걸 발견하게 된 겁니다. 발견하기 때문에 다윗은 무엇을 해야 되느냐를 나중에 하나님이 알려줘요.

아라우나 타작마당에서 다윗이 제사장이 형식적으로 하던 제사를 대표적으로 왕의 입장에서 아라우나 타작마당에서 제사를 드리니까 그 효과가 나타나서 이스라엘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멈췄잖아요. 그 장소가 바로 모리아 산이에요. 모리아 산하면 생각나는 것이 창세기 22장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데입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오늘 강의 시작합니다.

지금 우리 목적이 뭐냐? 악인이 뭐냐는 거예요. 다윗에게는 언약이 있다는 여러분에게 말씀드렸고, 이제는 언약의 뿌리를 추적해보는 거예요. 추적해보니까 방금 누가 이름이 나왔어요? 아브라함 나왔지요.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바치는 거예요. 바칠 때 아브라함도 죽었고 이삭도 죽었어요. 마땅히 죽어야죠. 죄인이니까 죽어야 되죠. 대궐 같은 집에 시체 세 구 있잖아요. 그건 이미 죽어야 돼요.

죽었는데 수풀 속에 어떤 인물, 존재가 등장해요. 수풀 속에 주께서 숨겨놓은 존재, 양이 그다음에 뭐냐? 아브라함과 이삭을 대신해서 제물로 바치는 행위가 언약행위에요. 그걸 바침으로써 아브라함과 이삭은 누구를 대신하는 삶을 살게 된 것, 그게 언약맨, 언약의 사람입니다. 나의 이름으로 사는 게 아니에요. 주의 이름을 살아가는 인생이 시작된 거예요. 그게 언약이 안에 들어온 겁니다.

‘기계+악마=나’였던 것을 이 악마의 마음은 없어지지 않아요. 이 전체를 묶어서 또 하나의 여기에 누가 등장하느냐 하면 미지의 인물, 신약적으로 하면 다 이루었다는 인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나온 거예요. 나는 존재잖아요. 이분은 뭐냐? 지금은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게 아니고 뭐로 다가와요? 사건으로 다가온다고요. 사건과 존재의 만남입니다.

쉬운 예를 들게 되면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은 무엇을 제시했느냐 하면 내가 죽고 사흘 만에 부활한다는 사건을 제시했지요. 그 사건을 제시할 때 베드로가 그게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고 현재 예수님 존재 있고, 나라는 존재 있고, 열한 제자 존재가 있으니까 존재끼리 뭉쳐서 일을 이뤄봅시다. 하늘나라 이 땅에 이뤄봅시다. 나왔다 이 말이죠.

그런데 주님이 제시한 것은 죽고 사흘 만에 사는 사건이죠. 존재는 그 사건을 통과 못하고 튕겨져 나오는 거예요. 그럴 때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그다음에 나온 말이 뭡니까? 사탄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이랬습니까? 그게 아니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거예요. 사람은 사탄의 자식이에요. 그게 통하고 있다고요. 사탄은 인간을 놔주지 않습니다. 안 놔줘도 괜찮아요. 왜? 비법이 마귀를 이겼으니까요.

날마다 사탄의 자극받는 우리 자신에게 날마다 주께서 승리하고 또 승리하는 사건만 연발되면 된다고요. 나라는 존재가 나에게 해줄 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전도, 기도, 봉사, 헌금 백날해도 나는 그것으로 내가 아닌 내가 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이 주님의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의 영역, 장, 사건이 사건으로 구석구석 파급하는 영역이죠.

그러면 이 사건에 반발하는 것이 뭐겠습니까? 존재겠지요. 그 사건에 반발하는 존재 중에 우리가 포함돼요, 안 돼요? 제일 야무지게 반발하고 있지요. “주님, 그러시면 안 됩니다.” 자, 아브라함에 대해서 자신을 반발한 사람은 제가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창세기 21장에 어떤 여인 하나 등장합니다. 창세기 21장 15절, 16절,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가죽부대의 물이 다한지라 그 자식을 떨기나무 아래 두며 가로되 자식의 죽는 것을 참아 보지 못하겠다 하고 살 한 바탕쯤 가서 마주 앉아 바라보며 방성대곡하니” 방금 읽었던 그 대목과 창세기 22장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시는 대목, 이 둘의 공통점은 둘 다 하나님에 의해서 죽을 지경이라는 사실, 이게 공통점이죠.

언약이라는 사건이 오게 되면 우리가 존재의 우리의 생리, 내 존재를 유지하고 시켜내야 마땅하다는 그것이 위기를 느끼게 돼 있어요. 언약이 다가오게 되면. 한쪽은 아브라함은 뭡니까? 그냥 자식 데리고 하나님 제단에 가는 거예요. 제단이 뭐하는 곳이에요? 하나님 만나는 모리아 산 제단이 하는 기능이 뭡니까? 도대체 제단이라는 게 하는 일이 뭐예요? 누굴 죽이겠다는 거예요. 죽이겠다는 거거든요.

가인의 제단은 죽이기 전에 ‘신이여 거래합시다’가 가인의 제단이잖아요. 하나님 덕분으로 이렇게 곡식이 잘 됐으니까 곡식을 받아주시고 다음 해에 또 풍성한 수확을 기대합니다, 라고 하는 것이 가인의 제사잖아요. 그런데 아벨은 뭐였습니까? 아벨의 제사는 어디서 끝납니까? 그냥 양 죽은 걸로 끝납니까, 아니면 본인이 죽는 걸로 끝납니까? 본인이 죽는 것이 끝나는 거예요.

왜? 가인은 제사 드리는, 제사는 일종에 판문점이에요. 판문점에 북한대표와 한국대표가 만났을 때 그들이 도로 어디로 와야 돼요? 자기 집으로 돌아와야죠. 판문점에서 만난 뒤에 자기 집도 없는데 평양 가겠다고 고집하면 그건 월북이죠. 안 되잖아요. 가인은 신의 영역에 가기 싫어요. 왜냐? 내 인생이 아름다우니까. 나는 내가 신이 되는 것을 인정하는 나름대로 인생을 꾸려왔으니까 아깝지 않아요, 고생한 인간. 열아홉에 시집와서 목포의 눈물 들어가면서 고생한 그게 너무 아깝잖아요. 다시 내 세계가 파괴되기 싫은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선 아벨의 제사를 받는 게 아니고 아벨을 받아버린 거예요. 양의 피가 아벨의 피가 나와야 그게 아벨의 피의 완성이에요. 아벨의 기능입니다. 아벨의 피와 뭐와 연관됩니까? 예수님의 피와 관련됩니다. 사가랴 선지자의 피와 아벨의 피 그 노선으로 내가 왔다고 예수님 이야기하셨지요. 그렇게 아벨이 피를 흘림으로써 이 세상이란 환경이 언약에 속한 사람을 피 흘리게 만드는 환경이 눈에 보이진 않지만 이미 완전히 자리 잡았다는 것을 폭로하는 기능이 바로 언약적 기능입니다.

다윗은 두 가지 기능을 다 보여줘요. 다윗이 왕으로 자기의 존재의 정당함을 주장하기 때문에 밧세바란 여인과 그 남편 있잖아요. 기혼녀니까 유부녀니까 남편이 있어요. 남편 죽이고 다윗이 밧세바를 빼앗아왔습니다. 그때 그 다윗에 나왔던 죄의 결과로 희생자가 생겼지요. 우리야 장군. 그 기능을 바로 누가 하느냐? 언약의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겁니다. 언약의 기능을 하긴 한 거예요. 그러면 다윗의 희생 가운데서 다윗은 악인의 역할도 하고 그다음에 언약적 기능을 하고 복합적으로 둘 다 있지요. 그게 오늘날 성도,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예수 믿고 난 뒤에 육신이 그대로 있어야 돼요, 없어야 돼요? 육신이 있어야 되고, ‘기계+악마의 마음’은 그대로 유지가 돼줘야 돼요. 그래야 내 존재가 구원되는 그건 날아가 버리고 뭡니까? 내 안에서 주님이 계속 사건을 일으키면서 주께서 실제로 움직이고 활동하는 운반체가 되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성도라고 하는 겁니다. 그게 성도에요. 그게 없으면 성도 아니지요.

내 존재보다 사건이 우선돼야 돼요. 나로 하여금 더욱더 죄인 중에 괴수되게 하는 그 사건. 그 사건할 때 뭐냐? 나를 주님의 안목으로 사건적 안목으로 십자가 안에서 나의 정체를 이제는 제대로 파악이 된 거예요. ‘아, 나는 마귀 자식이다.’ 마귀 자식은 뭐해야 돼요? 심판받아 마땅하고 저주받아 마땅하죠. 이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아주 유쾌한 일이죠. 이걸 뭐라고 하느냐? 유쾌한 파멸.

이게 바로 이삭과 아브라함이죠. 창세기 22장에서. 그런데 지금 우리가 보려고 하는 건 창세기 21장이에요. 창세기 21장 14절에서 16절 봤지요. 하갈이 쫓겨나서 갈 데 없지요. 물 다 떨어졌어요. 질문 들어갑니다. 왜 하나님은 하갈에게 물을 주십니까? 그냥 물 떨어져서 갈증 일으켜 굶어죽게 하지 왜 물을 주시느냐? 더 나아가서 하갈이 울지요. 왜 울지요?

아브라함과 이삭이 제사 드리면서 아들 죽는다고 울었습니까? “아이고, 아이고 내 새끼야. 하나님이 바치라 하니 바친다마는 참 네 인생도 가련하다. 여기서 네가 가네.” 여기서 막 울었어요, 마지막으로? 그런데 하갈은 왜 울지요? 내 인생은 그동안 누가 관리하고 누가 챙기며 살아왔습니까? 자기 관리지요. 자기 한계 때문에 이른 거예요.

하갈은 뭐냐? 그동안 광야에 쫓겨나기 전에 물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나름대로 물이 있었잖아요. 제가 무슨 이야기하려냐 하면 왜 우리가 물 먹고 살아야 되지요? 그걸 질문을 하갈이 해본 적이 없어요. 왜 나한테는 마실 물이 근처에 있고, 나한테는 자식이 생기고, 뭔데 나는 계속 살아야 돼? 누구야, 누군데 나를 살려줘, 라는 생각을 했어요, 안 했어요? 안 했어요.

이게 뭐냐 하면 하갈이 하나님을 밟은 거예요. 왜? 자아가 너무 세기 때문에. 내가 사는데 급급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밟아온 거예요. 남편이 아브라함이잖아요. 거부 아닙니까. 양도 많고 소도 많고. 아쉬운 것 없이 살았어요. 물론 나중에 아기 낳고 그 하갈이 첩이 됐지요. 근데 아브라함은 그 하갈한테 신사기 때문에 못 해줄 생각이 없다 이 말이죠. ‘뭘 원해? 한남동 집이야?’ 사나이답게.

그런데 본처가 나가라는 거예요. 처음으로 하갈은 본처의 종이니까 아기 낳고 난 뒤에 이스마엘 낳고 난 뒤에 그다음부터 추방대상이 된 거예요. 쫓겨난 거예요. 참 언약이 어떤 의미에서 신기하게 작용하고 있어요.

아브라함 보겠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으로 와요. 하란에서 그리심 산, 에발 산(같이 불어있어요) 이리로 왔다가 그다음에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애굽에서 헤브론으로 갔다가 브엘세바로 갔다가 마지막에 자기가 죽는 곳은 헤브론에서 죽어요. 갈대아 우리 자기 집이죠. 이것 누가 불러냈습니까? 하나님이 불러냈지요. 그러면 갈대아 우르에서 뭐예요? 쫓겨난 거죠.

애굽은 여러분 아시고, 이스라엘에 사해가 있어요. 제일 꼭대기에 예루살렘이 있고, 중간에 헤브론, 제일 밑에 브엘세바가 있어요. 벧엘은 나중에 야곱, 예루살렘 위에 있는데 하여튼 하란은 지금의 터키, 그리고 갈대아 우리는 지금의 이라크. 이렇게 이 동네에 사는 거예요. 여기서 이삭 낳고, 야곱도 여기서 태어나고. 야곱도 삼촌 집 하란에 갔다가 헤브론이나 이런 데 사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는 뭐냐 아브라함도 인간세계에서 쫓겨난 거죠. 쫓겨나서 이렇게 다녔다는 건 뭐냐? 갈 바를 알지 못한 거예요. 그러면 하갈은 어디서 쫓겨났어요? 아브라함 집에서 쫓겨났지요. 그런데 갈 바를 역시 알지 못했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렇게 하면서 막 울었습니까?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았잖아요. 왜냐하면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의 언약이 함께 있기 때문에 이게 지금 내 인생이 아니고 나의 스토리가 아니에요. 언약 자체의 스토리에요. 언약의 이야기에요.

결국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왔다 갔다 하지만 결국 그 세 사람이 알게 된 것은 언약의 출처가 이 지상이 아니고 하늘에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이런 생각을 해봅시다. 여러분 머리 좋으니까 상상할 수 있을 거예요. 투명한 막을 가지고 위에 하늘 있고, 땅의 세계라면 하늘세계에서 어떤 분들이 좌우로 움직이고 이동하는 이것을 빛을 비추면 실루엣, 그림자가 비추겠지요.

이 그림자가 약속의 땅이라는 이름으로, 하늘나라는 약속이죠. 지상은 뭐가 있다? ‘약속+땅’ 약속의 땅에 그 실루엣, 그림자가 왔다 갔다 하겠지요. 이 그림자에 해당되는 자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고 다윗이다 이 말입니다. 오늘날 성도다 이 말이죠. 이쪽은 실체고 이쪽은 모형과 그림자요, 히브리서에 나오잖아요. 이 실체가 하늘이 막을 뚫고 실제로 사람으로 오신 분이 누굽니까? 예수님이에요. 이게 언약의 구조거든요. 다윗도 이 안에 포함돼 있어요.

그러면 더 극단적으로 말해서 다윗이 밧세바를 건드린 것은 누구의 설계다? 주님의 설계인 거예요. 주님에게 다 계획이 있었던 겁니다. 우리야 장군 죽이는 것은 누구의 뜻입니까? 주님의 뜻이지요. 이 이야기 듣고 갑자기 우리가 얼굴에 화색이 돌지요. 내가 서서히 이제부터 내가 사기를 쳐봐? 문제는 사기는 우리가 예상하는데 다윗과 아브라함과 이삭은 본인이 예상 못하고 후달리고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다윗도 마찬가지로 ‘기계+악마의 마음’이죠. 다윗도 이걸 몰랐어요. 모르고 주님의 사건보다 뭐가 우선이냐 하면 자기 존재성을 붙들고 있는 이게 더 우선되는 겁니다. 목포의 눈물 찾아봐야 되는데, 갑자기 미리 준비 안 돼서…. 나중에 합시다. 연세 많은 사람은 목포의 눈물이지만 제 나이 때는 양희은 노래에요. <작은 연못> 이런 것. 그 당시에 나오는 기타 치며 부르는 포크송, 김민기의 <아침이슬> 그 노래 들으면 어떤 느낌이 드느냐 하면 나도 참 고생 많이 했다는 걸 느낀다는.

갑자기 복음 이야기하고 십자가 이야기하다 뭐로 돌아왔어요? 나의 존재가 아름다울 수가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지금은 망가졌지만. 망가진 그 나름대로 아름다운 거예요. 그래서 20대, 30대 젊은 사람들 지금 교회 안 가는 이유가, 우리가 지금 아름답다하는 그 아름다움의 재구성, 재설정 작업을 20대부터 하고 있는 거예요. 교회보다 지금 유럽여행 가는 내 모습이 아름답다고 그걸 사탕 포장하듯이 계속 포장하는데 하루하루를 다 보내는 거예요. 어느 맛 집 찾고 맛있는, 그걸 하나하나 내 아름다움을 유지하는데 전력을 다하는 거예요.

하늘나라를 그렇게 땅에 비췄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런 이야기는 뭐냐? 다윗이 알고 있던 언약, 오늘날 성도가 알고 있던 언약적 관점이에요. 자, 언약적 관점 치워버리겠습니다. 언약적 관점 치워버리고, 그건 성경에서 주장하는 일방적 이야기다. 그럴 때 물이 없어 운다, 이것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기계+악마의 마음’이죠.

성도는 여기서 뭐가 포함돼 있습니까? 언약이 다 이루었다, 십자가 사건 할 때 ‘다 이루었다’의 반복성, 이것 놓치면 안 돼요. 반복성, 반복성. 존재는, ‘나는 오년 전에 은혜 받았어’로 끝이지만 그거는 존재고, 사건은 매일같이 십자가 사건이 우리에게 관여합니다. 지금 물이 없어 운다는 것은 뭐가 빠진 거예요? 십자가 언약 빠지고 악마의 마음이 왔잖아요. 그렇거든요. 언약이 없으니까.

언약이 없으면 뭐라고요? 하갈, 악인이에요. 그러면 언약이 없으니까 이 사람한테는 이런 관점, ‘인간=기계+악마의 마음’ 안 믿어요. 믿지도 않지요. 언약이 없으니까. 이거는 언약이 있을 때 총괄적으로 나를 파악할 때 파악되는 사실이고요. 그럼 이걸 지워버려요. 없습니다. 그러면 물이 없다, 운다. 얼마나 자연스러워요. 양식이 없다, 운다. 얼마나 자연스럽습니까. 우리는 매일같이 이렇게 살아요.

성경에서는 이게 악마의 마음이라고 해도 그거는 난 모르겠고 중요한 것은 내가 사는 게 힘들다, 끝이에요. 이걸 가지고 뭐냐 하면 광야 생활이에요.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 이스라엘로 하여금 광야 생활 보내서 본성을 드러내게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고 뭐고 다 귀찮고 중요한 것은 우리 집에 돈이 떨어졌다는 사실이에요. 내 몸이 아프다는 거예요. 왜 울지요? 아름다운 나에게 바치는 하소연이죠.

나는 나를 믿는 신앙인인데 내가 신이니까 내가 신인 동시에 나는 그 신에 절대 복종하는 유일한 신자가 나거든요. 내가 나에게 복종하는 종교를 만든 거예요. 나는 오직 어떤 경우라도 배신하지 않는 오히려 마지막 남은 신자가 나에요. 물이 없어, 운다. 아이는 아프지 나도 아프지, 돈을 떨어졌지 할 게 뭡니까? 우는 거예요.

그러니까 운다는 건 뭐냐 하면 죽는 것이 무섭다. 죽는 것이 왜 무서운가? 죽는 것은 무섭지 않아요. 여러분들이 그걸 아셔야 되고, 우는 것은 아직 살아 있을 때나 우는 거예요. 죽으면 안 울어요. 자기가 자기한테 속고 있는 거예요. 죽음이 무섭다는 것은 아직 덜 죽었다는 뜻이에요. 죽을까봐 우는 거예요. 죽을까봐 무서운 거예요. 죽으면 무섭지도 않아요.

죽는 것이 무섭다는 것은 무엇을 거부하느냐 하면 그동안 나는 나만 바라보고 살아왔다는 것을 티내는 겁니다. 이제 내가 사라질 판이에요. 그럼 사라지면 되잖아요. 안 돼요. 나는 내가 영원해야 돼요. 이 고집이에요. 하나님은 우리 몸을 죽을 몸을 만들고, 우리는 그걸 강제로 악마의 마음으로 거부하면서 ‘안 돼. 나는 불멸해야 돼.’

그래서 나온 게 뭐냐? 종교라는 게 나왔어요. 내 몸은 죽어도 내 영혼은 산다는 모든 종교의 공통점, 불멸사상. 불멸사상이 어디서 나왔어요? 누구의 마음에서 나와요? 악마의 마음에서 종교, 기독교, 불교, 천주교, 이슬람교, 힌두교가 나온 겁니다. 전부 다 나의 불멸성, ‘나는 꼭 구원받아 돼’ 이유도 없어. ‘무조건 남은 지옥 가도 나는 천국 가야 돼’와 관련되어서 종교가 만들어지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20240610b 부산강의 : [시편]68(52:7)-언약으로 본 사회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갈대아 우리에서 하란, 하란에서 에발 산, 그리심 산 그 밑에 애굽에 갔다가 그다음에 벧엘 갔다고 그다음에 헤브론, 브엘세바 다시 헤브론으로 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하나님께서 자꾸 자기를 그림자로 자기 인생스토리가 장차오실 어떤 분의 스토리로 미리 당겨서 연극무대에 있는 마치 배우처럼 그렇게 자기를 사용하고 있거든요. 그게 다윗의 원천이에요.

언약이 아브라함에게 왔으면 무슨 언약? 아브라함언약. 언약이 다윗에게 왔으면 무슨 언약? 다윗언약. 그 다윗언약에 연계해서 장차 예수님이 오시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그 언약, 언약, 노아언약까지 포함해서 파악하면 거기 공통점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공통점이 있겠지요. 그게 있어줄 때 그것으로 우리 인생을 이렇게 관리할 때 비로소 우리는 뭐냐 하면 언약의 사람, 성도가 되는 거예요. 그게 의인되는 겁니다.

그 과정 속에서 아까도 했지만 다시 한 번 정리할 것은, 언약이 왜 오느냐? 언약이 와야 이 세상에는 물이 없으면 우는 세계에요. 요즘 말로 하면 돈이 없으면 방성대곡, 통곡하는 그 세계, 통곡하는 시대입니다. 여기 언약이 투입되면 이 전체가 뭐냐 하면 비-언약이에요. 언약이 없을 때.

똑같이 땅에서 쫓겨나고 한쪽은 아브라함은 자기의 본향이 이 땅에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고, 어디서 발견합니까? 자기 고향은 하늘나라에 있는 거예요. 내가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아니고 이미 하늘나라에서 나를 이 땅에서 주님의 인생을 내 속에 삽입시켜서 나를 데리고 다녔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겁니다.

종교라는 게 뭐냐? 종교는 자기 자신의 존재가 계속 강력하게 강하게 유지되게 만들어요, 나라는 것을. 아까 마태복음 16장 이야기했지만 존재는 뭘 통과 못합니까? 사건을 통과 못해요. 왜? 사탄의 마음이니까. 존재 자체가 사탄의 마음이에요. 곧 사람의 마음이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에 대해서 사건을 통과할 수가 없는 겁니다.

통과 못하면 결국 몸이 닳아지겠지요. 몸이 닳아지면 인간은 본인이 원해서가 아니라 외부의 요소에 의해서 이게 죽습니다. 내 몸이 사라져요. 내 몸이 사라지는 것을 인간이 미리 알아요, 몰라요? 알지요. 아니까 몸은 포기하더라도 그동안 고생하며 살았던 그 목포의 눈물과 더불어서 고생했던 그 사실을 포기 못하는 거예요. 분명히 나한테 있었는데 기어이…. 이것 누가 불렀느냐 하면 아즈마 아키라는 일본 가수가 부른 거예요.

하나 같이 옛날에 알았던 그 기억, 추억을 버릴 게 하나도 없어요. 그게 지금 나이가 칠십이든 팔십이든 지금 나를 구성하기 때문에. 이게 왜 그러냐 하면 기독교를 이슬람을 믿는 게 아니에요. 힌두교를 믿고 불교를 믿는 게 아니에요. 나를 믿는 방식을 그 종교에서 채택하는 거죠. 종교라는 것은 그냥 메이크업이에요. 실제로 믿는 것은 나에 대한 신봉입니다. 나를 포기를 못해요. 그래서 물이 없으면 우는 겁니다.

누구를 향하여 우는 겁니까? 내가 나한테 하소연하고 있는 거예요. ‘야 너 무엇 좀 해봐라. 네가 이렇게 죽을 거야? 뭔가 해봐야지.’ 그런데 하갈은 해볼게 없습니다. 여기에 누구 물을 줍니까? 참 이게 신기하지요. 여기 보면 창세기 21장, 하갈아 무슨 일이 있느냐, 19절에,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시매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웠더라” 하나님이 하갈을 살립니다.

여기서 질문 하나 들어가죠. 하나님이 하갈을 살렸으니까 하갈을 다시 아브라함 집에 보냅니까, 아니면 안 갑니까? 하갈은 아브라함과 합세합니까, 합세하지 않습니까? 합세하지 않지요. 왜? 하갈은 비-언약적으로 하나님께서 키워줘야 되니까. 비-언약이 계속 유지가 돼야 십자가 사건이 필히 일어나야 되는 거예요.

악마의 세계가 더욱더 악마의 세계로 확실해져야 돼요. 구체화돼줘야 십자가 사건 터집니다. 예수님 이 땅에 왔을 때 단 한 사람이라도 예수님 편에 들면 안 돼요. 그러면 이 세상은 전적으로 망해야 될 세상이 아닌 거예요. 이 세상이 전적으로 살았다는 이유 때문에 지옥에 가야 돼, 인간은. 내가 여기에 태어났고 살았다는 그 이유만으로 우리는 지옥 가는데 충분한 조건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해줘야 천국은 오직 예수님만의 세계며 어떤 인간도 들어올 수 없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 수제자라고 들어가려도 거부당했지요. “주님 따라가겠습니다.” “네 자리가 없다.” 너의 자리가 없어요. 처소가 없는 거예요. 처소가 없다는 말은 미리 마련했다는 뜻이 아니거든요. 처소가 없는 거예요, 아예. 천국에 우리가 있을 자리가 없는 겁니다.

그럼 창세전에 택한 백성, 그거는 베드로의 존재가 살아 있는 한 해당이 안 돼요. 인간은 사건 속에서 존재가 진짜 존재, 저주받을 존재로 전환돼야 돼요. 히브리서 9장 27절 적어볼게요. “사람이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요” 대궐 같은 가정에 세 식구 산다면 시체 세 구 있지요. 문제는 그 시체가 자기를 미화한다. 시체가 자기를 살아 있는 것처럼 꾸미는데 평생을 다 소비하고 있습니다. 모든 평생을.

그러니까 이래 보면 제일 재미있어요. 해골이 있는데 해골이 주섬주섬 옷 껴입고 지팡이 짚고 해서 마치 해골 아닌 것처럼 사람 흉내하고 길에 나서는데 거기서 입에서 나오는 것은 전부 다 비-언약이 이에요. 같은 코카콜라에요. 저쪽 인간도 코카콜라, 둘 다 할 수 있는 대로 위장은 다 했어요. 이제 그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시체가 어떻게 미화하는지를 그것도 아름답게 꾸미는지를.

그래서 잠시 여기서 우리는 성경을 잊으세요. 왜냐하면 시편 52편에 나오는 악인이라 하는 것은 다윗의 언약이 없는 겁니다. 시편 52편 8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와요. 이거는 시편 1편 무엇의 연속이냐 하면 3절에서 4절과 통합니다. 제가 읽어볼게요.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시편 52편 8절에 보면 누가 읽어볼까요? 제가 읽을게요. “오직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영히 의지하리로다” 이게 지금 이야기하는 것이 어떤 환경 속에서 이야기하느냐 하면 악인들 이야기하는 거예요. 악인들 이야기하면서 악인을 뭐라고 표현하느냐 하면 7절에 나옵니다. 이거는 다 같이 읽어봐야 돼요.

52편 7절 누구 크게 읽어보세요. “이 사람은 하나님으로 자기 힘을 삼지 아니하고 오직 그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제 악으로 스스로 든든케 하던 자라 하리로다” 여기 나오는 단어들을 그냥 조립하게 되면 오늘날 비-언약 세계를 그대로 표현하고 있어요. ‘사람’이란 단어 나왔지요. 그다음에 재물의 풍성함을 의지하지요. 재물의 풍성함을 의지하면서 여기서 누가 빠져버렸습니까? 하나님이 빠져버렸지요. 하나님은 다윗이 알고 있는 하나님이에요. 이 시편을 다윗이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언약의 하나님을 말하는 거예요.

다윗언약의 특징은 뭐냐? 다윗 자손의 후손의 땅에 이스라엘 백성이 산다는 겁니다. 땅을 제시하는데 그 땅은 다윗언약 속에 들어온 사람들만이 살 수 있는 땅, 그 땅이 약속의 땅이에요. 아브라함언약 같은 경우에는 아브라함언약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만이 살 수 있는 땅이 아브라함언약이 말하는 약속의 땅. 그럼 모세 같으면? 머리 좋은 사람 다 응용할 수 있겠어요. 모세는? 모세 율법대로 완전히 다 지킨 사람이 갈 수 있는 땅이 바로 모세 율법에 의한 언약의 약속의 땅의 백성.

그런데 언약이 아브라함언약에서 멈추지 않고 모세언약에서 멈추지 않네요. 그리고 다윗언약에서도 멈추지 않아요. 마지막 언약은 뭡니까? 그 다윗언약의 완료성,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이니까. 그 마지막 언약이 무슨 언약이냐 하면 십자가 사건이에요. 십자가 사건 안에 들어온 사람만이 살 수 있는 백성이 여기 성경말씀을 이해하는 유일한 최후의 마지막 이스라엘 백성이 됩니다. 그게 언약이에요. 언약 안이냐 비-언약이냐 그 문제입니다.

다윗언약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사람’은 언약적으로 하나님께 탈락해버리고 그 대신 뭘 했습니까? 재물의 풍성함을 든든히 의지하지요. 우리가 하갈이라고 생각해보세요. 뭐 이상할 게 없지요. 당연한 거잖아요. 그걸 가지고 “제 악으로 스스로 든든케 한다” ‘악’이 나와요. 악한 것. 그런데 나는 이런 식이 아니고, 재물의 풍성함이 아니고 오직 여호와의 집에 나는 기거한다고 돼 있어요.

지금 두 번째 시간에 본격적으로 할 시체가 자기를 미워하느냐, 그것 보기 전에 성경 한 구절 보고 가겠습니다. 시편 9편 5절, 15절, 19절, 20절. 제가 쫙쫙 읽어보겠습니다. 시편 9편 5절부터 보겠습니다. “열방을 책하시고 악인을 멸하시며 저희 이름을 영영히 도말하셨나이다” 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그분이.

15절, “열방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그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도다” 누가? 자기 백성들이. 누가? 비-언약, 다윗언약을 모르는 사람. 끝으로 19절, 20절. “여호와여 일어나사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열방으로 주의 목전에 심판을 받게하소서 여호와여 저희로 두렵게 하시며 열방으로 자기는 인생뿐인 줄 알게 하소서”

이게 불신자한테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인생은 인생이에요. 내 인생이 나에게 전부고 그게 삶의 이유고 목적이고 의미입니다. 가치에요. 그런데 성경은 지금 이상한 소리하고 있어요. ‘인생아, 너는 인생이잖아.’ 불신자는, “그래서 뭐? 내 인생 내가 사는데 네가 보태준 거 있어?” 그게 악인이라는 거예요. 말 되는 소릴 해야지. 내 인생 그만큼 힘들게 살았는데. ‘너는 인생뿐이다.’ 그것 당연한 것 아니에요? 너는 네 인생뿐이지? 그래서 너는 나빠서 저주받고 멸망당한다는 거예요.

이게 여러분들이 이해가 안 된다면 그동안 여러분들이 교회 도대체 뭐하고 살아온 거예요. 언약은 나를 파괴하는 겁니다. 행복한 파괴지요. 왜냐하면 히브리서 9장 27절 말씀처럼 사람이 죽는 것은 정해진 거죠. 그러면 그 정해진 것을 우리 속에 주께서 삽입해버렸어요. 그러면 우리의 인생의 의미와 목적이 어떻게 돼요? 살겠다는 것은 돼요, 안 돼요? 안 되지요. 그거는 이미 주님이 정하신 것을 내가 애써 강력하게 반발하는 것밖에 안 되니까. 죽어요.

내가 죽는다면 그럼 이 코카콜라가 죽는다면 죽는 인간을 하나님께서 어디에 쓰시려고 죽이시는가? 나의 죽음을 주님이 어디다 쓰시렵니까? 앞에다가 ‘오늘’을 집어넣으세요. 이게 오늘의 기도입니다. 오늘 사는 게 기적이기 때문에 오늘 사는 게 기적인데 나의 죽음을 어디다 쓰시렵니까? 이 기도할 때 방성대곡합니까, 막 울어요? 아브라함이 제단 쌓았지, 아까 뭐라 그랬습니까? 제단의 기능은 나를 죽이는 거예요. 오늘은 여기서 죽고, 내일은 내일 죽고 또 살려주거든 그 자리에서 죽어라. 대전서 죽었다가 부산서 죽고 하셔야 됩니다.

문제는 목회자들이나 목사 사모들이 이걸 못 받아들인다는 거예요. 왜 그렇습니까? 종교를 통해서 자기의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한테는 이런 설교를 못해요. 설교를 못할뿐더러 이런 설교를 못 받아들여요. 이게 뭐냐? 시체의 미화. 자기 시체를 아름답게 포장하는 겁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이 시체가 언약이 없는 비-언약 세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네 가지로 점점 더 발전시켜요. 도구, 상품, 상징, 기호.

인간은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누구와 상대하느냐? 가인처럼 신하고 상대해요. 신과 인간이 더불어 화합해서 만드는 나도 죽지 않고 당신도 죽지 않는 그저 좋은 말로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돌봐주는 신과 인간의 공동체 세계를 꿈꾸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비-언약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 자신의 악마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를 그것 말씀드리는 거예요.

인간이죠. 여기 인간을 다른 말로 하면 ‘나’가 되겠지요. 나를 첫째로 뭐냐 하면 이렇게 인간과 신으로 시작해서 확대시키면 사회가 돼요. 제가 지금 인간 사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인간 사회는 뭐냐? 자기 자신을 도구로 사용해요. 도구는 사용가치. 열아홉에 시집왔을 때 무서운 시어머니가 갓 시집온 새댁한테 이렇게 함부로 길들이기 합니다. ‘도대체 친정에서 뭘 배웠기에 이런 것도 하나 못하나?’ 무슨 가치입니까? 사용가치에요.

방금 시집온 열아홉 살이 뭐 알겠습니까? 할 줄 몰라서 못하는 게 아니고 환경이 새로운 집안 뭘 요구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모든 일이 서툰 거예요. 신입이 와서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다 뭔가 그릇이라도 깨면, “아이고 하는 짓 봐라. 너 시집와서 우리 살림살이 다 깰라 하나?” 열아홉 먹은 며느리는 부엌에 꿇어앉아서 엉엉 방성대곡하며, “어머니여 나 시집 포기하고 다시 집에 갈래” 이러고 있다고요. 그러니까 친정과 화장실은 멀리 있어야 된다고.

자신의 사용가치가 새로운 환경에서 실망스럽게 느껴질 때 인간은 사용가치에서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나요. 타인으로부터 인정받는가, 불인정 받는가? 이게 사용가치에서 교환가치로 넘어옵니다. ‘나는 잘할 수 있어. 나는 줄넘기 잘해.’ 혼자 있을 때 줄넘기에 대해선 잘해요. 그런데 줄넘기 잘하는 그 청년이 삼성그룹에 원서를 냈어요. “너 뭐 잘하노?” “줄넘기 잘해요.” 남 어지럽게 할 일 있습니까. 본인은 줄넘기 잘하는 사용가치가 삼성그룹에서는 인정을 못 받지요. 인정을 못 받으면 뭡니까? 교환가치가 없어져요. “너는 집구석에서 줄넘기나 많이 해라” 보내버립니다.

사회에서는 사용가치가 사회가 요구하는 그런 가치여야 할 때 사용가치가 뭐로 바뀝니까? 인정받는 교환가치로 돼요. 만약에 사회에서 인정하지만 뚝 떨어진 전혀 쓸모짝이 없는 교환가치가 없는 거예요. 그걸 뭐라 하느냐? 인간은 도구에서 시장의 상품가치에요. 춤 잘 춰요. 춤 잘 추는데 취직은 못해. 새로운 가치를 장착을, 컴퓨터를 배우든지 해서 교환가치가 돼야 돼요.

여기서 우리가 중요한 것은 인간이라는 것은 몸이 늙어가고 있다는 사실, 자기 시한폭탄. 그러니까 이미 죽는 것은 뭐한다 했습니까? 이미 죽는 것은 정해진 거예요. 세포 전체가 죽음을 향하여 촉수를 내밀고. 오징어 발 정도가 아니고 수많은 촉수가 나와서 죽음을 향해 가고 있어요. 그런데 나는 불멸의 존재이고 싶어요. 몸은 죽음인데 나는 신이고 싶어요. 안 죽고 싶어요. 그러니까 버티는 거예요. 자꾸 사용가치, 교황가치로 버티는 거예요.

그다음에 교환가치 되어 인정받지요. 영 성이 안 차요. 회사에서 날 인정해주고 월급 주고 남들이 출세했다고 하는데 문제는 나만의 상징이 있습니다. 나만의 자존감이에요. 나만의 자존심이 있지요. 회사에서 잘해주긴 하지만 내가 이 회사에서 기술 배워서, 다시 말해서 사회에서 인정하는 교환가치 배워서 자영업, 따로 독립해서 나도 회사 차리고 싶어. 그게 누구한테 맞다? 그게 내 성격에 맞는 것 같아, 하고 독립을 부르짖는 거예요.

독립 부르짖는다고 주위의 가족들 노후자금 작살나는 거죠. “아버지, 한 번만 좀 도와주세요. 3억만 대출해주면 안 되겠습니까?” “뭐하려고?” “카페하려고요. 바리스타….” 바리스타 배우는데 얼마나 쉽다고요. 그것 해서 퇴직금 집어넣어 홀라당 다 날려버렸어. 왜 그렇습니까? 남 인정해주잖아요. 육십 되어 퇴직 당해버렸어요. 퇴직 당하니까 내가 퇴직 당할 때까지 노는 수준이 있잖아요. 내가 남한테 인정받는 그 레벨을 유지하면서도 나에게 발전된 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자존감을 현실화시킬 수밖에 없어요. 이게 상징 되는 거예요.

상징이라는 것은 명함에 새겨져 있지요. “너 뭐하노?” “나 이거 한다. 사장님이다.” 상징체계, 자존감이에요. 상징체계는 특징이 자존감이기 때문에 교환가치에서 훨씬 발달했어요. 여기서 나온 게 뭐냐 하면 거저 줌, 남에 대한 배려, 그리고 증여, 남에게 기꺼이 선물을 줌. 그러니까 이건 뭐냐? 성공한 아버지가 자식한테 보이는 아버지의 대범함, 아버지의 위신 같은 거죠.

그러니까 돈이 있어야 교환가치가 아버지가 남들한테 인정받아야 가정에서도 무슨 존재가 돼요? 나 아버지 본받을래. 아버지처럼 되면 좋겠어, 라는 하나의 우상화, 상징적 존재가 되는 거예요. 아버지가 내 인생의 목표야, 라고 내세울 수 있는 거예요. 이것을 우리 자신이 그걸 내가 더욱더 가치가 향상됐다고 간주하는 겁니다.

네 번째, 이것만 해도 대단한데 또 뭐 남았습니까? 남아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나 하나가 절대적 기호가 되는 거예요. 기호가 뭐냐? 차이 가치. 이거는 이 세상에 나만한 존재는 둘도 없는 거예요. 절대 안식. 절대적 존재가 되는 거예요. 신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이 펼쳐놓은 확정지은 이 사회라는 것은 결국 각자의 노림수가 있지요. 지향점이 있어요. 뭡니까?

내가 내 속의 악마가 시키는 대로, 그거는 성경에서 이야기하니까 제쳐두고, 나는 삶의 목적이 결국 내 속의 잠재성, 나는 신이 되어야 비로소 만족하는 그런 욕망이 작동하고 있는 존재에요. 신은 돈이 많다, 부자 됐다, 남한테 존경받는다, 그걸로 성이 안 차요. 신이라 하는 것은 나와 똑같은 존재가 절대로 있어야 돼요, 없어야 돼요? 없어야 돼요. 독보적인 존재여야 돼요.

홈쇼핑의 물건이 그게 문제에요. 자기 딴에 한정판이라 샀는데 한정판이 왜 그리 많은지. 내가 입고 나가니 시내에 다 입고 있어. 무슨 이런 한정판이 있어. 한정판은 기호적 가치가 부여됩니다. 페라리 한정판, 운동화 한정판. 한정판은 둘도 없다는 것, 오직 나만이 신었고, 나만 입었다는 거예요. 독보적인 거죠.

이 상징적 존재에서 주로 동원되는 게 선물이죠. 거저 줌이죠. 이게 바로 결혼하기 전에 약혼한 사이나 서로 사귀는 사이일 때 커플 티, 커플반지를 하는 이유가 이게 상징입니다. 커플 반지를 해주잖아요. 그다음 날 보니까 반지가 없어. “내가 어제 준 반지 어디 갔느냐?” “고가라서 팔아먹었어.” 이러면 이거 뭡니까? 나라는 존재를 반지를 낀다는 것은 상대방의 존재를 내가 귀히 여기고 간직한다는 뜻인데 그걸 시장에다 교환가치로 거꾸로 가버렸어, 팔아먹었어요. 안 돼, 그러면 안 돼.

어떤 사람은 나이 많은 여자인데 늘 어떤 모임에 호두를 갖고 온답니다. 강의 중에 호두를 갖고 와서 교수가 궁금해서 물었어요. 그 나이 많은 여자 학생이 하는 말이, “이게 죽은 내 약혼자가 나한테 준 겁니다.” 이게 무슨 가치에요? 사용가치입니까? 아니지요. 시장에서 돈 되는 교환가치? 아니지요. 무슨 가치입니까? 이 호두가 있다는 말은 그때 그 남자와 사랑했던 그 시절과 추억을 내 자아의 가치의 재료로서 나는 포기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럼 그 남자는 죽어도 호두가 있다는 말은 그 남자는 내 안에 살아 있다는 뜻이에요. 그러면 오늘날의 부부는 호두나 안 줘도 뭐가 있습니까? 뭐가 있기에 아직 헤어지지 않고 있습니까? 왜 시큰둥해서 지금 헤어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는데 왜 부부로 삽니까,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됐느냐? 뭔가 상징적 가치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자식이죠. 제3의 요소가 우리를 묶어주는 거예요. 어지간하면 참고 사는 거예요. 왜? 자식 봐서. 자식을 봐서라도 참는 거예요. 돈, 돈 때문에 그런 게 아니에요.

지금 문제가 이거에요. 교환가치로 퇴직했잖아요. 특히 대기업 임원하다 퇴직했으면 남자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나 퇴직했다. 자유다’ 이러거든요. 그동안 일에 매이고 직장에 매여서 하고 싶은 걸 못했는데 유럽여행, 동유럽 갔다 오고 빈에다 헝가리에다 체코 갔다 오고 이제 마음껏 내 시간 돈 들여 살고 있다.

그러니까 남자가 해방을 하면서 퇴직하고 그다음에 “돈 줘. 내가 준 돈 내놔라. 내가 준 것 있잖아.” “살림에 다 보탰는데. 애들 공부시켰는데. 딸 시집갈 때 니가 준 돈으로 다 했는데.”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그 남자는? “그래. 자식 결혼할 때 보탰구나. 내가 이렇게 상징적 존재가 되다니.” 이렇게 되는 게 아니고, 지금 내가 회사에서 잘 나가던 남들이 친구들이 나를 대단한 존재로 보는 그걸 자기가 누그러트릴 수가 없어요. 왜? 잘 나갔는데 하루아침에 그걸 어떻게 유쾌한 파멸, 파괴 안 돼요.

아내에게 돈 내놔라 하니까 아내가, 돈 없다. 그럼 어떻게? 돈 벌어. 그 월급 안 주는데? 이백만 원이 뭡니까, 백오십 만원이라도 벌어와. 그러면 남편이 하는 말이, 그럼 나는 언제 퇴직하니? 퇴직 못하지 뭐. 퇴직 못해. 왜냐하면 남편이 돈 벌어왔고 그동안 아내는 가정에서 자기 나름대로 상징적 존재로 이미 선점했어. 가정은 하나인데 접수를 한 거예요.

가정에서 일어나는 스물네 시간, 특히 낮 시간은 누구 나와바리입니까? 여자 나와바리에요. 아침에 너는 가라, 이 말이죠. 네가 없던 시간을 내가 점령했잖아. 네가 왜 끼어들어? 끼어들어서 점심 내놔라, 밥 내놔라. 삼식이도 아니고, 참. 나가 사 먹어. 저녁 때 기어들어와. 나가 그냥. 꼴 보기 싫어. 있는 자체가 싫어, 그냥. 나가. 너 때문에 암 걸리겠어. 너 때문에 골치 아파서 안 되겠어, 나가. 이게 바로 상징적 기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멈추지 않고 어디로 나갑니까? 기호적 가치, 절대적 가치로 나가요. 이제는 누구와 다투기도 싫어요. 내가 신이니까. 이것을 사용가치 흐르게 하는 이 요소를 아까 성경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악마의 마음이라 했지요. 성경을 제쳐버리고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이걸 욕망이라 하는 거예요. 인간이 욕망을 갖고 있는 게 아니고 욕망이 인간을 가졌는데 그 욕망이 아담의 욕망이에요. 인간은 어디서 태어나든 언제 태어나든 욕망에서 못 벗어나게 돼 있어요.

인간의 욕망은 인간의 의식적으로 제거 돼요, 제거 안 돼요? 제거되지 않아요. 그 욕망 중에 하나가 뭐냐? 자기가 이미 신이에요. 불멸의 존재. 나는 불멸의 존재가 욕망의 얼굴입니다. 그 얼굴이 내 마음속에 있는 한 내가 아무리 돈이 많고 4조 2천억 가져도 아무리 뭘 해도 이 욕망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아니 내가 채우려 해도 욕망이 내뺍니다. 더더더더 따라와. 안 돼. 그 정도로 안 돼. 그 정도로 내가 성에 차겠어? 더더 하고 계속해서 따라오지요.

그러니까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거에요. 진즉에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겁니다. 나는 십자가 복음 싫어. 두 번째, 나는 교회도 싫어. 귀찮아. 안 다닐 거야. 세 번째, 나는 나 하고 싶은 대로 살 거야. 여러분 주로 누가 이런 이야기하지요? 여러분이 제일 중요한 존재로 여기는 게 누굽니까? 자식이 이야기해요. 자식들이 이 이야기한다고요.

그런데 제가 진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렇게 어디로 가느냐 하는 거예요. 그들이. 그렇게 비-언약이 어디로 가느냐, 어디에 사느냐는 거예요. 어디에 살겠습니까? 하갈의 세계.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하갈을 살릴 이유가 있지요. 악인들이 번성할 이유가 있지요. 악인들만의 세계를 항상 언약 주변에 상황 주변에 늘 있어야 될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언약은 대조 아니면 차이남이 없으면 언약이 언약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나는 십자가 복음 싫어. 나는 교회 안 갈 거야. 나는 나 하고 싶은 대로 살 거야, 라는 것이 집결하는 곳, 그게 바로 비-언약의 세계, 하갈의 세계입니다. 지옥이죠. 언약이 없으니까 지옥이잖아요. 이들이 가는 곳을 사회죠. 오늘 제목을 제가 미리 정해봤어요. [천국의 사회성]이에요. 천국이란 사회는 어떤 식으로 움직이고 있는가? 그걸 하려고 제가 미리 정해봤어요.

천국의 사회성을 알기 위해선 뭐냐? 소위 사회란 것이 뭐로 구성돼 있는가를 알아야 돼요. 이제 아셨지요. 이런 나들이 이러한 식의 나들이 악마의 마음들로 가득 차있는 나들이 악마의 마음에 그게 거슬린다면 자기 욕망, 그것도 확정된 욕망이에요. ‘신이시여 예수란 이름으로 나를 건들지 마세요.’ 나는 뭐라고? 나는 신이기 때문에. 신들이 집결한 곳이 뭐다? 사회입니다. 이게 사회고 이게 바로 KBS, MBC 뉴스로 계속 나와요. 밀양이 어떻고, 성폭행이 어떻고 계속 나오고. 유튜브에서 계속 나오고, 애들 유튜브 세계에서 살고 있어요.

거기서 뭐하는데? 미흡한 욕망을 채워야 될 것 아니겠습니까? 처음에 무슨 가치? 사용가치. 두 번째 무슨 가치요? 교환가치, 상품이죠. 하나는 수단이고. 세 번째는 뭐냐 하면 나는 나 나름대로 뭘 이루었다는 상징성. 네 번째는 그걸 극단화시키면 나는 뭐다? 신이다. 나는 신이다. 나는 너하고 달라.

그래서 어떤 학자가 그런 이야기했어요. 인생을 살면서 두 명 내지 세 명의 친구만 있어도 그거는 대단한 거라 했어요. 이 말은 사실은 친구란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에요. 인간의 욕망의 끝은 친구가 없어요. 유일한 친구는 내가 내 안의 친구에요. 나는 내 자체만으로 아름답도록 조성해왔기 때문에. 부부가 나이 들면 친구로 살면 되지 않느냐? 무슨 친구가 날마다 싸우는 친구가.

제가 주일 오후 때 이야기했는가? 오전에 이야기했구나. 왜 결혼을 했는가? 말이 통하는 것 같아서. 그 말 언제 끊길까요? 그다음부터는 전부 다 묵언수행하고. “아는?” “잔다.” “밥도.” “자.” 그리곤 자기의 사회, 인터넷 세계, 휴대폰 세계에 빠지는 거예요, 각자. 각자 거기서 나의 차이는 어디고, 나의 위치는 어디고, 나의 수준은 어딘지, 나의 상징성은 지금 어디까지 왔는지, 자기 욕망은 같이 있는 옆의 식구가 채워주는 게 아니고 휴대폰의 유튜브가 채워주는 거예요.

늙은 사람은 안 돼. 유튜브 못해. 할 수 있으면 그 세계에 빠지겠는데 아직 할 줄을 몰라요. 젊은 사람들은 유튜브 있는데 교회를 왜 나갑니까? 유튜브 있는데 예수를 왜 믿어요? 나의 가치가 보존돼 있는 곳이 사회인데 내가 천국 사회에 왜 기어들어갑니까?

그러면 이제 남은 시간, 천국 사회는 어떻게 유지되는가? 언약의 상호침투와 언약의 상호공격으로 이루어진다. 이게 아까 시팬 9편, 오늘 시편 52편이죠. 따라서 이걸 알기 위해서 시편 1편을 봅시다.

여기 복 있는 사람은, 복이 먼저 나오지요.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않는다고 돼 있지요. 여기서 복이 뭔지 알기 위해서 반드시 무엇이 드러나야 돼요? 악인이 드러나야 돼요. 악인은 항상 언약 곁에 있습니다. 언약을 형성하는 그 주변의 상황이 악이에요. 그러면 오늘 강의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악인에게 없는 게 있다 했지요. 복습입니다. 악인에게 언약이 없지요. 율법이 없는 거예요. 왜? 그딴 게 필요치 않기 때문에. 율법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한테 간섭받겠다는 거예요. 간섭받는 즐거움으로 살겠다는 거예요. 그걸 제가 강의시간에 예를 든 게 뭐냐? 마동석이 치는 사람 두 종류가 있다 했지요. 한 방 때리면 나가떨어지는 사람 있지만 붙들고 늘 때리는 사람.

마동석 영화, <범죄의 도시> 보면 친근하면서 악인으로 등장하는 사람 있지요. 조선족으로 나오는. 마동석이, “너 이리 와” 해서 괴롭히죠. “날 왜 자꾸 괴롭혀” 이러거든요. 1편, 2편에서 괴롭히고, 3편에도 괴롭히고, 4편도 괴롭히잖아요. 5편 나오면 또 괴롭힐 거예요. FDA 자기는 특수경찰인줄 알고, F가 폴리스(police) 같으면 P여야 하는데 F에요.

주님께서 패는데 안 놓고 패는 거예요. 이게 뭐냐? 언약적인 침투가 언약적인 공격이 되는 거예요. 율법이 그런 거예요. 날마다 율법이 마동석이 되어서 매일같이 줘 패는 거예요. 팰 때마다 뭐가 나와요? 존재는 무너지고 사건이 나오죠. 율법이 말씀이 내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사건이 늘 나옵니다.

그러면 우리는 사회 자체지요. 사회는 뭐라 했습니까? 악이죠. 악인데 우리도 포함돼 있지요. 다 포함돼 있어요. 색깔로 하면 전부 다 똑같은 색깔이에요. 갑자기 여기에 뭐가 오느냐? 율법이 침투해요. 언약이 침투해요. 모세언약이 침투해버리면 색깔이 갑자기 특이성을 보여줍니다. 이게 뭐냐 하면 기호적 가치에요.

그러니까 천국도 기존 사회와 똑같아요. 마지막에 뭡니까? 기호적 독특한 가치, 언약적 가치. 이걸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에요. 이게 이스라엘입니다. 기호적 가치를 바로 줘버려요. 사용가치, 교환가치 필요 없이 바로 기호적 가치에요. 죄인으로 하여금 사용하고 개 같은 우리를 사용함으로써 동시에 예수님이 우리 안에 삽입돼 들어와 버리면 우리는 가라 하는 대로 가고 오라 하면 오는 겁니다.

그러면 이 기호는 무슨 기호냐 하면 이거는 사건인데 어떤 사건이냐? 사건은 사건인데 예수님의 존재를 드러내는 다 이루었다는 분이 따로 있음을 드러내는 기호적 가치에요. 그러면 이 기호적 가치에서 누가 불멸의 존재고 누가 영생입니까? 예수님의 영생이죠. 영생의 가치가 우리 안에 들어와 버리면 우리는 뭐냐? 영생 받은 분 안에서 함께 영생을 공유하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이건 불멸 존재 정도가 아니고 우린 복 되게 영원히 사는 거예요. 참 쉽지요.

말씀으로 매일같이 말씀을 누가 어떤 목사가 전하는 게 아니고 사건이, 말씀 사건이 우리 앞에서 계속 우리로 하여금 네가 악인인 것을 들춰내는 이 고마운 작업이 쉬지 않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시 시편 1편 봅시다.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죄인과 오만. 오만이란 것은 독자적으로 자기가 잘난 체하는 거죠. 나는 나뿐이다.

여기서 2절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예수님께서 이를 온전한 자, 또는 완전한 자로 이야기했어요.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이사야 66장의 말씀으로 하면 온전히 거룩한 자를 두 자로 줄이면, 성도. 성도는 완전하고 온전해요. 말씀과 율법에 하자가 없어요. 다 이룬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마동석한테 늘 얻어맞고 있기 때문에. 그 관계성, 주님과 우리 죄인과의 관계성이 온전하기 때문에 성도는 온전해요. 아무도 우리를 고소할 자가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단독으로 있는 게 아니고 주님과 함께 있기에 아무도 우리 죄를 시비 걸 사람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비로소 알아요. 우리 자신이 십자가 앞에서 온전한 개념을 갖고 있다는 것, 어떤 온전한 개념? 죄의 온전한 개념을 우리가 지니고 있는 즐거움이 있어요.

죄는 우리가 지어서 죄를 아는 게 아니라 완전한 죄인이에요. 완전한 죄인이 그 완전 때문에 주님의 사회에서 완전한 자로 인정받는 겁니다. 완전한 죄인, 이게 시편 51편에 나는 어머니의 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온전한 죄인이 돼요, 다윗은. 그렇다면 나라는 존재는 율법 세계, 율법의 사회성, 천국 사회성, 완전히 이루신 율법 안에서 우리는 주님의 이웃사랑의 혜택을 입는 자가 되겠죠.

이웃사랑의 혜택을 입은 자로 온전하기 때문에 주께서 우리를 쓰시려는 그 현장에서 온전한 사람이 주님에 의해서 나옵니다. 네가 원하는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그다음에 나오는 말씀이 뭡니까?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와서 걸으라고 사도행전 3장에 나오지요. 그것 누가 했습니까? 베드로와 요한이 했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그 사회에 있던 사람들은 각자 자기 존재를 생각하기 때문에 당신이 했잖아, 라고 나오잖아요.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은 그 현장에서 온전함을 사건으로 설명해버려요. 내가 한 게 아니고 나와 함께 있고 당신에게 그 죄인에게 있는 주님이 그렇게 했습니다, 라는 이 온전함, 이게 바로 의의 관계에요. 죄인이기 때문에 늘 의가 나오도록 우리 속에 말씀이 사건화 돼 있는 상태, 이게 바로 언약의 사람입니다.

그것을 미리 그림자로 아까 막 있지요. 실루엣, 그림자로서 다윗에게 이야기했고 그래서 다윗이 쓴 오늘 시편 52편이죠. 시편 52편 8절, 9절 다 같이 읽어봅시다. “오직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영히 의지하리로다” 9절,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스톱, 그것만 하면 돼.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뭐다? 완전한 거룩한 사람으로 성도로서 천국에 이미 사회 속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것이 말씀대로 된다는 그 예수님의 말씀이 십자가로서 다 이루었다는 것이 헛말이 아니고 그게 팩트요, 그게 제대로 된 현실인 것을 이제 받아들이는 늘 그런 기쁨 속에 사건이 일어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부산강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설의 주인공  (3) 2024.09.11
마이너스 인생  (0) 2024.07.11
율법과의 불일치  (0) 2024.04.10
태어난 언약  (6) 2024.03.14
재물의 효능  (1) 2024.0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