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8강-YouTube강의(놀이 문화 출애굽기 32:6)20240716-이 근호 목사
제478강, ‘놀이 문화’. 놀이 문화를 좀 고상하게 말해서 ‘예술’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술은 이성에서 나온 게 아니고, 감성 또는 감정에서 나오기 때문에 말릴 수가 없어요.
사람이 삭막하게 살기 싫잖아요. 힘들게 노동해서 사는 일상 가운데서 모든 마음의 짐을 털어놓는 그러한 순간순간을 사람들은 기다리게 됩니다. 거기 가서 억눌렀던 것을 확 풀어버리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서 힘차게 자기 일에 매진할 수 있는 그런 여력이 또 생기거든요. 에너지가 보충되죠. 그걸 레저라 하죠. 또는 취미 생활, 여가 생활이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여가 생활, 놀이 문화 특징이 뭐냐? 돈을 버는 게 아니에요. 돈을 아낌없이 씁니다. 돈을 아낌없이 써요. 도시 근교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사람들, 채소라든지 참외, 딸기 농사 등을 짓는 사람들이 한 여름에 비닐하우스에서, 비닐하우스 온도 한 50도까지 올라가죠, 거기서 힘들게 농사짓다가 수확기 지나면 목돈이 들어옵니다. 그 현찰 들고 도시 근교에 있는 나이트클럽이나 콜라텍 같은 데에 가서 농사짓던 아주머니들이 돈을 신나게 쓰는 거예요.
그러니까 돈 버는 재미보다 더 짜릿한 게 돈 쓰는 재미입니다. 뭐 돈을 써봐야 그 재미를 아는데… 돈 쓰는 재미가 돈 버는 재미보다 더 월등해요. 심지어 돈 쓰는데 자기 춤추고 노래 부르고 하는 데에도 돈 쓰지만, 기부하면서 쓰는 재미가 이건 마약이 주는 쾌감 이상으로 더 짜릿해요. 기부하는 그러한 문화.
그게 바로 감정에서 나오거든요. 이게 예술에서 나온 거잖아요. 예술의 특징은 묻거나 따지지 않아요, 그 가치에 대해서. 자기를 그냥 풀어주는 것, 정신 차리지 않고 그냥 정신줄을 놔버리는 것에 데에서 어떤 누구의 평가도 들을 필요가 없는 그런 완벽한 자유를 만끽하는 순간이 바로 예술 또는 취미, 그 시간입니다. 그 여가 시간에 몰입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말하죠. 예술이야말로 일상에서의 구원이다. 이건 뭐 일상이 주는 행복 이상의 행복을 주니까. 아픔과 고통과 슬픔에서 구원해주는 거예요. 마음껏 자신의 본성을 터트려도 누가 뭐라 하는 사람 없으니까. 소위 일탈이라 하죠. 일탈. 이게 바로 예술입니다.
그래서 예술이 추구하는 것은 인간이 따지고 따지고 이거는 옳다, 그르다 하는 것을 한번쯤은 가끔은 그걸 넘어서고 싶은 거예요. 속을 확 풀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예술이라든지 놀이 문화를 하면서 사람들이 고대하는 것은 내가 하는 어떤 행동에 대해서 네가 평하지 말고 따지지 마라. 그냥 내가 터져 나오는 대로 그렇게 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 예술, 놀이 문화가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이 놀이 문화가 무엇과 비교되느냐 하면 고생 고생하는 일상과 비교해서 힘들게 살아가면서도 고대하는 바가 휴일에 어떻게 잘 먹고 잘 놀 것인가, 맛있는 거 마음대로 먹고 가고 싶은 데 갈 것인가 그걸 희망삼아 산다는 것에서 놀이 문화가 문제가 되는 거예요.
이게 즐거우니까. 즐거움에 대해서 인간은 몸이 말해줘요. 이게 진리다. 나는 즐거울 자격이 있다는 거예요. 그게 나한테는 진리에요. 아무리 깊은 복음이고 뭐고 그게 나를 행복하게 하지 못하고 즐겁게 하지 못하면 그건 나한테 진리가 아니에요. 교회 와서 예배 드리는 것보다 일탈적으로 노는 것이 더 나를 짜릿하게 만든다면 그게 자기한테는 삶의 보람이고 가치고 그게 진리처럼 느껴지는 겁니다. 이게 이제 문제가 되는 거죠. 결국은 복음을, 하나님의 진리를 자기 신체적인 본성이 감성이 가로막고 있는 겁니다.
출애굽기 32장에 모세가 시내산 가고 난 뒤에 백성들이 뭘 했는가가 여기 나옵니다. 6절에 보면, “이튿날에” 이튿날이라 하는 것은 그들이 제단을 만들고 난 뒤 “이튿날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의 절기니까 여호와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나름대로의 행사, 이벤트를 벌이는 거예요.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그다음에 “뛰놀더라”
일어나 같이 흥겹게 뛰노는 것, 이것이 자기 내부 감정이 원래 고대했던 바죠. 뛰노는 것. 점잖게 거룩, 이렇게 정숙해서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 여호와란 신에게 드릴 거 드렸으니까 이제부터는 내 시간이다. 내가 어떻게 몸을 굴리던 뭐하든 그건 하나님이 관여하지 마소.’ 하는 식으로 마음껏 즐거워요.
즐거울 때 물론 주동자가 있을 거 아니겠습니까. 처음에는 사람들이 주춤주춤하다가 사람들 손을 잡아당기면서 “음악 좋잖아. 비트에 몸을 맡기라고. 박자에.” 이렇게 한번 해보면 갑자기 몸이 둥실둥실하면서 누가 더 우수하고 누가 더 선하고 악한 게 아니라 공동으로 여기는 다 같이 함몰되었기 때문에… 강강술래 특징이 손을 잡고 하나가 되는 거예요.
어느 누구를 탓할 수 없이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음을 그들이 목격하고 있으니까요. 우리 망해도 다 같이 망한 거야, 이런 식이에요. 누가 나서서 이래선 안 된다 하지 마. 우린 똑같은 입장이야. 다 같이 그 파티에 함몰됨으로써 누가 나보다 더 고상한 위치에서 지적할 게 아무것도 남지 않은 그런 상황. 그게 바로 예술의 상황, 놀이 문화의 특징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의 행동은 정당화되는 거죠.
그런데 이 놀이 문화가 모세가 산 위에 갔을 때 산 밑에서 이스라엘 사람만 그렇게 한 게 아니에요. 열왕기상 18장 26절에 보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그렇게 쉽게 바알과 아세라 종교에 빠질 수밖에 없었는지 이유가 나옵니다. 바알과 아세라 종교는 자신의 한풀이 또는 흥, 너의 감정에 솔직하게 맡겨라 하는 그러한 방식이 그들의 교리 안에 그들의 바알 섬김의 방식 안에 이게 포함되어 있던 거예요.
26절, 28절 보면 “저희가 그 받은 송아지를 취하여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가로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저희가 그 쌓은 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뛰노니까 바알 선지자들이 먼저 뛰노니까 그 뛰노는 모습을 누가 보겠습니까? 보는 관객들이 있을 거 아니겠습니까. 관객들도 같이 흥이 나는 거예요.
요즘 말로 하면 부흥회하는 거죠. 부흥회. 앞에 전도사가 강대상 부서져라 막 두드리면서 오만한 장로부터 “자꾸 가만있을 겁니까? 장로님부터 같이 흥을 맞춰줘야 교인들도 따라할 게 아닙니까?”라고 젊은 전도사가 나이 많은 머리 허여신 장로보고 이렇게 책망을 하게 되면 마지못해 박수 턱, 턱 치잖아요. “성령의 충만이 그거밖에 안됩니까?” 하면서 갑자기 성령 동원하면 ‘아참, 내가 성령이 충만하지.’ 갑자기… 한번 이렇게 시동을 걸고 발동기에 발동 걸면 처음이 어렵지 나중에는 박자 착착 맞습니다. 그 공간의 진동수가 일치돼요. 물리적으로 이게 가능하거든요. 악기를 하면 모든 악기의 진동수가 일치되는 방향으로 물리적으로 그렇게 흘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뛰놀았죠. 뛰놀았단 말이죠. 그러니까 엘리야가 이제 조롱했죠. “오정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저희를 조롱하여 가로되” “너희 신 어디 출타한 모양이다. 혹시 주무시는지도 모르겠지.” 그렇게 하니까 그게 약이 올라서 28절에 “저희가 큰 소리로 부르고 그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 몸을 상하게 하더라”
칼과 창으로 몸을 상하게 한다는 것은 뭐가 보인다는 겁니까? 신체 피부 안에 흘러야 될 피가 바깥으로 흐를 때 관중들은 미쳐버리는 거예요. 몰입하는 거예요. 승리한다. 귀에 피 흘려가면서, 절대 이번엔 이기리라. 피가 있기 때문에 거기 아멘할 수밖에 없어요. 하나님이 우리 트럼프를 살렸다. 결집될 수밖에 없죠.
앞서서 그러한 행위예술을 누가 하느냐? 종교가들이 하는 거예요. 그게 바알 아세라 종교다 이 말이죠. 이게 놀이 문화에요.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 방식. 이게 종교의 극한이고 많은 사람들이, 850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쉽게 동조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종교에다 놀이 문화를 집어넣어서 흥겨워서 탈아(脫我) 상태, 몰아(沒我) 상태, 자기를 잃어버리는 상태를 인간성으로 조작하는 거예요. 인간이 해낼 수 있는 종교의 극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