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9강-YouTube강의(불평등 출애굽기 9:26)20240716-이 근호 목사
제479강, ‘불평등’. 어떤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조직이 되고 조직이 있으면 사람들은 나 말고 타인들을 보게 됩니다. 남을 보게 되죠. 그런데 인간이 남을 볼 때 그냥 순하게 ‘남이 거기 있네.’라고 보지 않아요. 비교의식을 가지고 봐요. 대조하면서 봅니다. 그 사람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가방은 어느 제인지, 옷은 어디서 샀는지 어느 백화점에서 샀는지, 요새 건강한지.
이렇게 타인을 볼 때 타인을 바라보면서 자기와 견주는 이유가 인간은 어릴 때부터 남으로부터 지시받고 명령받으면서 내가 구성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버릇이 죽을 때까지 계속 가요. 남들이 인정해주면 그게 곧 내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남들이 인정해줄 때 싫은 소리하면 그건 빼고 좋은 소리만 골라서, 그게 나다.
누가 나한테 좋은 소리했을 때 사람은 정말 그 모임에 참석할 보람을 느낍니다. 힘들게 멀리서 와도 누가 나를 칭찬해주면 그 모임에 갑니다. 그래서 보통 교회에서 청춘 남녀들이 교회를 아주 착실하게 다니는 이유는 분명히 사귀는 사람 있으면 주일날 새벽기도부터 오라 해도 갈 용의가 돼 있어요, 인간은. 남을 보면서 나를 정립하는 것, 인간은 어릴 때부터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럴 때 인간들이 제일 불만을 갖고 있는 경우가 어떤 경우냐 하면 남하고 비교하기 때문에 상대방에게는 좋게 대해주는데 나는 천시하고 박대하고 무시할 때 참을 수가 없죠. 그 때 사람들은 말합니다. 불평등이라고 이야기하죠. 오늘 479강 제목을 ‘불평등’이라고 지어봤습니다. 불평등.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공평하게 다루기를 원하고 다들 평등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을 제대로 안 봤으니까 자기 위주로 생각하니까 어디 가도 자기 꿀리지 않기를 바라고 있는데 실제로 성경을 보게 되면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불평등이에요. 아주 무섭게 불평등합니다.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고 자연환경을 통해서 불평등을 내립니다.
출애굽기 9장 23절에서 26절을 보게 되면 이런 말씀이 나와 있어요. 애굽 나라에 이제 재앙을 내립니다. 히브리 족속을 애굽에서 내보내달라고 할 때 바로 왕이 안 보내기 위해서 버티고 버티다가 재앙을 받는 그 대목입니다.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지팡이를 들매 여호와께서 뇌성과 우박을 보내시고 불을 내려 땅에 달리게 하시니라” 야, 불을 내려서 땅을 달리게 했다. 적절하게 상상되죠. 특히 달린다는 이 대목에서. “여호와께서 우박을 애굽 땅에 내리시매 우박의 내림과 불덩이가 우박에 섞여 내림이 심히 맹렬하니”
참 이상하죠. 우박은 얼음 덩어리인데 불은 뭐냐? 그냥 뜨겁잖아요. 차가운 물과 뜨거운 불이 같이 병행해서 섞어서 주어진다? 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애굽 사람들 사는 지역에 이렇게 내렸으면 어떤 벌이 됐든 재앙이 됐든 간에 사람이 같이 벌 받고 재앙 받으면 마음이 덜 아파요. 나만 고생이야? 뭐 이런 식으로 버틸 수 있는데,
여기에 “우박이 애굽 온 땅에서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무릇 밭에 있는 것을 쳤으며 우박이 또 밭의 모든 채소를 치고 들의 모든 나무를 꺾었으되”라고 해서 하나님께서는 공평하게 애굽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모조리 다 우박과 불로 그 채소와 짐승을 다 쳤어요. 이게 공평한 거예요. 좋게 공평하진 않지만 어쨌든 공평해요.
그런데 25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의 거한 고센 땅에는 우박이 없었더라” 이것은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불평등을 조성해서 자연현상과 모세 입을 통해서 전달되는 하나님의 요구사항과 관련성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모세가 바로한테 말할 때 바로 입장에서는 그냥 한 인간이, 그것도 자기보다 보잘 것 없는 한 늙은이가 젊은 나에게 그냥 인간들의 말을 나한테 틀리도록 하는 것, 그게 전부에요. 사람이 대화하는 것이 뭐 대단한 일입니까. 흔한 일이고 평범한 일이고 그럴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여기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자연현상을 통해서 그 말을 뒷받침해주는 겁니다. 우박과 불의 재앙이 떨어지는 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거예요. 모세가 네 앞에 서 있는 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죠. 저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나한테 전달되죠.
그러니까 바로 입장에서는 무시할 만한 인간이 무슨 소리를 해도 이것은 떽,하고 무시하면 그만인데 무시하고 난 뒤에 주어진 결과는 참혹합니다. 이거는 뭐 돌이킬 수 없어요. 애굽의 경제사정이 너무나 나빠졌어요. 밭의 모든 채소가 다 없어졌습니다. 우박이 떨어졌으니까.
그때 이제 바로가 이렇게 합니다. “바로가 사람을 보내어 모세와 아론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이번은 내가 범죄하였노라 여호와는 의로우시고 나와 나의 백성은 악하도다 여호와께 구하여 이 뇌성과 우박을 그만 그치게 하라” 이게 바로 왕이 이야기한 겁니다.
그런데 바로 왕은 이 말을 하면서 내가 범죄했다 했거든요. 이게 또 범죄에요. 범죄했다고 용서를 구하는 자체가 또 범죄에요. 범죄했으니까 날 고만 건드리라는 겁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회개, 반성 전부 다 그런 식이죠. 하나님, 제가 잘못되었으니까 저 그만 괴롭히세요. 자기 안 잃을 생각해서 용서를 구하는 척 하는 거예요.
30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왕과 왕의 신하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아직도 두려워 아니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아, 속여도 누굴 속여요. 하나님을 속이고 모세를 속일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모세가 대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것은 뭐냐 하면 아직까지 남아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35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심과 같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이 본문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에서 모세 빼고요. 그 자리에 예수님을 한 번 집어넣어 보세요.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말씀하심 같이’ 그리고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여‘ 할 때 바로에 우리의 마음을 집어넣어보세요.
예수님이 죽으셔야 우리 죄가 용서된다는 말은, 우리 죄가 어디서 파악되느냐 하면 예수님의 죽으심에 합력할 때나 파악이 돼요. 아휴 주님 고맙습니다. 우리 위해 죄 씻음 해주시고 용서해주시고 대신 죽으시니 얼마나 고맙습니다. 아…그거, 하나님이 아직도 알아요. 그게 나를 너무 나무라지 말라는 자기 방어체제, 수법이라는 거 주께서 너무 잘 알아요. 예수님 믿을 테니까 십자가 믿을 테니까 피 믿을 테니까 내 인생 이제 내가 원하는 대로 좀 풀리게 해주시면 안 됩니까. 그 뒤에 괄호 열고 괄호 닫고. 괄호 안에 자기 소망을 막 집어넣죠.
그러니까 바로 왕이 우리보다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그런 점에서 공평해요, 주님께서는. 바로 왕이나 우리나 똑같아요. 특별대우 받는 것은 특별히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이야기한 대로 우리가 실시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자가 특별대우 받는 사람이에요. 이 사람은 하늘나라의 내부를 알게 된 사람이에요.
하늘나라 내부에서는 인간하고 상대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예수님과 상대해서 그 말씀 그대로 이루어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특별대우 했잖아요. 오늘날 불공평하게 성도를 특별대우 해주는 것, 이게 하나님이 실시한 불공평함입니다.
찬양할만하죠. 예수님이 하는 일을 예수님께서 이미 이 세상을 향하여 이야기했다는 것을 감 잡고 그걸 알아챘을 때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특별대우를 받는, 남들 보기에 불신자 보기에 불공평한 대우를 받는 그러한 성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