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8-2강-YouTube강의(놀이문화-2 이사야 11:6)20240903-이 근호 목사
제478강, ‘놀이문화’. 요즘 들어서 취미 가운데 현대인들의 여가 활동 중 하나가 교회 다니기입니다. 교회에 재미를 찾아서 왔다가 떠날 때도 재미없다 하고 그냥 가버리죠. 그만큼 자유롭다 이 말이죠.
교회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말은 나는 그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는 사람인 것을 교회 와서도 확인하고 싶다는 겁니다. ‘나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얽매이지 않고 하나님의 법보다 내가 정한 법이 우세하다’, 그걸 교회 다니면서 점검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교회 나왔다가 안 나온 사람들의 심리를 보면 하나님 약 올리기 심보가 있어요. ‘나 교회 안 나올 테니까 때리려면 때려봐. 나 십일조 안낼 테니까 때리려면 때려봐.’ 이런 식으로. 그리고 아무 일 없잖아요. 거 봐. 하나님 없잖아. 하나님 없으니까 내가 교회 다녀도 대충 다닌다든지 건성건성 다녀도 ‘그 정도 해도 나는 성의를 표하는 거다’ 라고 큰 소리 칠 수 있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서 새삼 점검되는 것은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다’하는 사실이에요. 그건 집에서도 할 수 있는데 굳이 교회 와서 활동하면서 그걸 확인하고 싶어하는 겁니다. 목사님들이 하시는 설교를 의도적으로 위반해보는 거예요. ‘아무 일 없잖아, 봐. 아무 일 없어. 괜히 하는 소리지. 실용성 없어. 역시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내 속의 신의 음성 또는 내 양심의 소리 듣고 바르게 살면 돼.’ 그렇게 되죠.
교회에서 그런 사람을 붙들기 위해서 ‘그냥 쉬었다 가세요’ 하는 정도의 장치들, 시스템을 가동시킵니다. ‘재밌습니다. 우리 교회에 노인회도 있고 청년회도 있는데 뭐 솔로 그런 데 가지 마시고 교회 아가씨들 많으니까 마음 맞으면 좋은 아가씨를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고객이 만족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많이 만들어놔요.
노는 것도 교회 와서 놀아라. 특히 주일학교 애들도 마찬가지고요. 교회에서 놀다 보면 믿음 있어가지고 나중에 커서 어른 되면 교회 나올 생각이 있겠지. 적어도 모태 신앙이니까. 태어나면서 유아세례 받았으니까. 그런 식의 제도를 성당에서 꾸준히 해왔고 교회도 그것을 본받아서 그렇게 해왔습니다.
오늘 제목이 ‘놀이문화’인데 인간은 왜 자유롭게 놀고 싶냐? 그것은 바로 에덴동산에서 만들어진 육신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에덴동산 출신이에요. 노는 출신이. 에덴동산에서 만끽했던 그 의식이 무의식으로 계속 후손들에게 남겨지겠죠. 육신이 그 의식을 따른다 이 말이죠.
그럼 에덴동산에서 잘 놀면 되는데 이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놀기는 놀되 지가 대장질하면서 놀게 돼버렸어요. 그러니까 놀기는 놀되 내가 대장질하고 놀기까지는 놀이가 재미가 없어요. 자기가 최고가 되는 놀이, 그것은 뭐 사회에서 ‘출세했다’고 간단하게 이야기해요. 출세했다, 승진했다, 성공했다,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최고 있으면 나와. 최고, 나하고 붙자. 나는 네 자리 뺏을 거야.’ 이러한 의욕이 그 지루한 인생에 더 추진력을 가하는 에너지 동기가 되겠죠. 그게 바로 놀이문화에요.
그냥 놀면 되는데 최고까지 되겠다는 것은 내가 신처럼 되겠다는 그러한 무의식이 인간을 가만 놔두질 않는 거예요. 심지어 자기가 시달려서 자기 야망에 본인이 피곤해요. 피곤에 절어가지고 집에 오면서도 그래도 죽지 않는 것이 몸은 피곤한데 야망, 욕망은 도무지 피곤할 줄을 몰라요. 인간의 야망이라는 것은.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을 미끼로 던집니다. 하나님 말씀, 예언에. 그 미끼가 이사야 11장에 나옵니다. 그 미끼를 제가 한번 읽어드리겠습니다. 6절에서 9절까지.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걸 한마디로 말하면 ‘스트레스가 없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스트레스가 없는 세계. 경쟁이 없죠. 그 자체로 족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족하기 때문에 목표나 목적이라는 것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죠. 그냥 누리는 거죠. 그래서 여기서 주인공이 누구냐? 젖 먹는 아이고 어린 아이에요.
어린 아이의 특징이 뭐냐 하면 그냥 가정에서 허락한 대로 노는데 도사, 노는데 스물 네 시간을… 스물 네 시간까지 아니다, 노는데 한 여덟 시간 보내고 나머지는 잠자고. 그냥 그렇게 지내는 것이 어린 아이 아닙니까. 아무도 자기를 해코지할 데가 없기 때문에.
그러니까 이 말씀을 미끼로 던졌다는 말은, 이 세상은 여기 이사야에서 예언한 천국과는 꼭 반대라는 뜻입니다. 온 천지가 행함이고 온 천지가 나를 노리고 나를 잡아먹으려 하니까 거기에 대해 방어를 해야 되죠. 잡아먹히지 않더라도 힘들어요, 벌써. 방어한다고 힘들어요.
처음에 에덴동산에서는 죽음이 없었습니다. 죽음이 없었거든요. 맞죠? 그런데 여기 이사야 11장에 나오는 이 세계도 죽음이라는 게 없는 정경을 보여줍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해결책이 나와야 되겠죠. 어떻게? 어떻게 하면 여기 미끼처럼 던진 아름다운 낙원, 이런 세계에 살 수 있는가?
이사야 29장 4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와요. 신나게 한번 놀았으면 좋겠는데 영원토록 신나게 놀 수 있는, 제대로 하나님이 주신 은혜 가운데 놀려면 먼저 우리 자신의 욕망과 야심, 야망이 모조리 다 박살나야 됩니다. 그게 이사야 29장 4절에 나옵니다.
3절부터 읽어보면 “내가 너를 사면으로 둘러 진을 치며 군대로 너를 에우며 대를 쌓아 너를 치리니” 그러니까 나보다 더 센 게 나타나서 비굴해지거나 어처구니없이 일방적으로 때리는 대로 맞아야 될 그러한 황당한 처지에 가게 됩니다. 우리는 야망이 있기 때문에 뭐든지 나 하고 싶은 대로 하는데 강제로 그걸 못하게 되면서 찌질하게 되는 거예요. 진짜 죽기보다 더 마이너스가 찌질한 거잖아요.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이 짓은 못한다면서 그 짓하고 있는 거예요. 일반 사회생활이 그렇잖아요. 참, 내가 죽는 게 낫지, 하면서도 헤헤거리고 다 하잖아요.
4절에 보면 “네가 낮아져서 땅에서 말하며 네 말소리가 나직이 티끌에서 날 것이라” 티끌, 낮다, 땅에 긴다, 이거 뱀에게 준 저주입니다. 뱀의 말을 들으니 뱀이 받은 저주를 네가 공히 같이 누리게 되는 거야. 그 저주에 내려가야 그다음에 뭐가 보이는가? 낙원이 보이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아, 지금 네가 좀 살만하니까 뭐 설쳐대는데 너보다 센 게 와서 전쟁해서 너는 참혹하게 패배할 거야. 다시 말해서, 네가 나다운 걸 건질 게 아무것도 없게 만들 거야. 높아질래야 높아질 건덕지가 없게 만들어서 땅에 발발 기는 거, 목소리도 큰소리 못 내서 마치 티끌에서 나는 목소리처럼 될 거야. 지렁이 같은 그러한 비굴함의 극치. 이럴 때 비로소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선물과 은혜가 내 노력함보다 월등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실컷 놀 천국의 그날까지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난 그 이유 때문에 이렇게 망가지고 힘들지만 오히려 그것조차도 주의 일인 것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