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6강-YouTube강의(너와 나 잠언 16:19)20240702-이 근호 목사
제476강, ‘너와 나’. 너와 나라는 것은 둘 사이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어요. 너만 있는 게 아니고 나만 있는 게 아니고, 나에게 네가 있고 너에게 내가 있다. 우리가 서로 엮이는 이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고 하나님의 뜻이다. 따라서 나는 ‘나’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내 속에 네가 있어야 되고, 너는 ‘너’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네 속에 내가 있어야 된다. 보통 그럴 때 ‘나와 너’ 하잖아요.
그러면 나와 너 사이에 무엇을 거기다 집어넣어야 되는가? 하나님께서 너는 왜 나를 만나게 하고 나는 왜 너를 굳이 만나게 하고 알게 하시는가.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잠언서 16장 18절-19절 보면 이런 말씀 나와요.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교만이라든지 거만은 홀로 있는 게 아니고, 나와 너의 만남에서 무엇이 교만이며 무엇이 거만인가가 나타나요.
예를 들면, 모세가 바로 왕을 몰랐어요. 전에 자기가 알던 양부(양아버지)는 이미 죽었고 자기가 애굽에서 떠나서 양을 쳤던 그때에 바로 왕이 바뀌어요. 그리고 모세가 새롭게 자기가 알지 못하는 바로 왕을 만납니다. 여기에 대해서 모세는 만나고 싶어 하지 않아요. 나는 지금 평안한 여생을 보내고 있는 이대로 그냥 살겠습니다.
이건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지금껏 자기가 열심히 살아온 그것이 아까워서라도 새삼스럽게 누굴 만나서 새로 사귄다는 것이 보통 부담되는 게 아니에요. 연세 많아서 아들 며느리 맞이할 때도, “그래, 네가 참 친정에서 잘 배웠구나.”하고 그다음 말은 ‘우리 같이 살자’가 아닙니다. “그래, 내 아들하고 나가서 잘 살아라.” 그러면 며느리가 “어머님, 제가 모실게요.” 하면 어머니는 뭐라고 합니까? “아이고, 무서운 소리하지 마라. 뭘 모셔. 나는 나 혼자 사는 게 제일 편해.”
다시 말해서 나와 너의 관계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새로운 너를 만나기가 힘든 거예요. 그동안 살아온 게 있기 때문에. 그래서 사람들은 물론 아담의 죄이기도 하지만 혼자 사는 게 제일 편해요. 경제적인 아쉬움이 없다면. 경제적으로 후달리지 않는 조건 하에서는 혼자 사는 게 제일 좋습니다. 나 하고 싶은 대로 뭐든지 하니까요. 남 구애받지 않으니까 이게 얼마나 좋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걸 허락하지 않습니다. 모세도 바로 왕 만나는 게 안 좋아요. 싫어요. 바로 왕도 마찬가지에요. 모세 만나는 것도 싫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바로를 만나게 합니다. 그것은 교만이 무엇이며 강퍅이 무엇이며 거만이 무엇인가는 누구를 만나는 가운데서 그것이 드러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혼자 도 닦고 혼자 반듯하게 살면 교만과 거만, 그런 게 자기한테 있다는 걸 생각도 못하죠.
그러면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조치에 대해 반발하면서 ‘그럼 저 혼자 살래요.’하고 계속 고집을 부리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잠언서 16장 19절에 보면 “겸손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겸손한 자와 함께 하는 것. 그것은 우리가 혼자 사는 것이 겸손이 아니라는 거예요. 혼자 살면 어느새 우리는 마음이 많이 교만해져있고 거만해져있습니다. 나를 지적하는 타인이 없으니까 나는 내 자신에 대해서 굉장히 편하게 생각되는 거죠. 그런데 잠언서 16장 19절에 보면, 겸손한 자와 함께 하라. 왜? 그래야 마음을 낮추니까.
그렇다면 여기에 대한 신약적 해답은 딱 나왔죠. 예수님과 함께 하는 이유는 예수님께 배우는 거예요. 예수님이 모델이 되는 겁니다. 혼자 사는 내가 모델이 아니고 예수님이 모델이 되는 거예요. 그럼 예수님이 모델이 된다는 조건이 뭐냐? ‘남하고는 만나지 말라’가 되죠.
이게 이제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인데, ‘남하고 만나지 말라’고 할 때 ‘그래. 나는 남하고 만나기 싫어. 혼자 사는 게 내 소원이었잖아요. 제가 전부터 이야기했잖아요, 하나님. 혼자 산다고.’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잠언서 18장 8절에 보면 내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거예요.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
인간이 혼자 산다고 해서 정말 혼자 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남을 씹는 가운데서 혼자 살죠. 남을 씹어보는 재미. 그렇지. 사는 맛이 이 맛이지. 씹는 맛이에요. 씹는 맛에 사는 거예요. 자기보다 못한 거, 자기보다 말썽꾸러기. 그게 인간 뱃속에 차곡차곡 쌓이는 거죠.
그러면 하나님 뜻은 뭐냐? 잠언서 18장 9절에, “자기의 일을 게을리하는 자는 패가하는 자의 형제니라” 인간들이 이 땅에 태어나면서 주께서 하신 일이 있어요. 그 하신 일을 누구한테 배우는가?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이 세상에서 가장 겸손한 자와 함께 하면서 내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우리는 배워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아까 모세 이야기를 다시 하면, 모세는 애굽에 안 가려고 했어요. 그냥 혼자 살고 싶어 해요. 그러나 하나님이, 네 지팡이와 같이 가라. 지팡이가 뭐냐 하면 하나님하고 같이 움직인다는 그러한 표식이 지팡이에요. 네 지팡이 못 버리잖아. 그처럼 지팡이는 너를 버리지 않을 거야. 내가 너를 버리지 않을 거야.
그래서요? 내가 하고자 하는 기적을 이제는 기적을 베풀지 못하는 네가 그것을 행사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남들 보기에는 ‘모세가 저기 있네.’로 출발하겠지만 결국은 남들 보기에 ‘하나님이 저기 있네.’라는 일이 바로 네가 해야 될 일이다. 우리 자신이 해야 될 일이에요.
이제 우리가 예수님과 동행하는 이유를 아시겠죠? 예수님은 무척이나 겸손했어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신데 굳이 사람이 될 필요가 없어요. 그것도 죄인이 될 이유가 하등 없습니다. 그런데 일부러 사람 되시고 일부러 죄인 되셨어요. 왜냐하면 우리 인간과 죄인과 더불어 함께 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겸손입니다.
함께 안 해도 되는데 함께해주시고자 오신 분의 성의를 생각해서 그 분의 취지를 생각해서 우리는 매사에 주님과 더불어 해야 돼요. 16장 19절에 “겸손한 자와 더불어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더불어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려서 이 성경말씀 전체는 우리의 마음을 겨냥해서 주신 말씀이다. 우리의 마음. 우리의 마음까지 주님의 마음으로 섞어서 바꾸어버리는 그 작업이 주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입니다.
이 교만한 인간아. 그 더러운 마음, 나와 같이 하여 예수님의 겸손한 마음처럼 같이 겸손하게 되게 하시는 것. 이것이 바로 모세 옆에 지팡이가 있는 이유기도 한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