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겨울수련회 제 9강
창세기 24장 60절을 보겠습니다.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
‘천만인의 어미’라든지, ‘원수의 성문’이라든지, 지난 시간에 했던 ‘잉태치 못한 여인’ 그리고 ‘할례’ 또 ‘피 제사’ 창세기 48장에 가면 ‘어긋맞겨’ 축복하는 것이 나옵니다. 어긋맞기면 축복이 저주고 저주가 축복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핵심 단어들이 창세기에 있는데 우리는 이런 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왜냐? ‘내 구원 받기 위해서 창세기에서 어떤 것을 얻을 수 있을까?’ 이런 관점에서 성경을 보기에 그렇습니다. 핵심 단어들을 하나로 모아봅시다. 할례를 행한다는 것은 여자로 하여금 남편 없는 여자로 만들어요. 사라가 남편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라를 남편 없는 여자로 만들기 위해서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행합니다.
할례는 차단성이에요. 생명나무로 갈 수 없다는 차단성을 가족의 몸이 새기는 것입니다.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출4:25).” 이런 것은 모든 바탕과 근원을 잘라서 이 땅에서는 절대로 구원되지 못할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구원 받을 생각을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러면 성경은 왜 있는가? 자기 누이동생 결혼하는데 ‘네가 원수의 성문을 얻으리라.’ 이렇게 나오면 그게 결혼하는 동생에게 할 말입니까? 성경 전체가 우리에게 뭔가로 가려져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 성경을 본다면 본래의 의미를 놓치게 됩니다. 카메라에 자기 얼굴을 들이밀면 그 카메라에는 자기만 보입니다.
성경을 보면서 자기 얼굴을 들이미니까 자기만 보입니다. 성경을 보면서 자기 잘난 것을 보고 있으니까 성경이 별 의미가 없어요. 성경에서 자기 얼굴을 치워야 합니다.
20세기 초 일본에 ‘물 없는 정원’이 나와요. 정원에 물은 없고 대신 모래가 있고 돌이 몇 개 놓여 있습니다. 그러면 자연의 여백의 미가 나옵니다. 일본의 이러한 요소와 민화 등이 20세 유럽의 후기 인상주의, 반 고호의 작품에 영향을 미칩니다.
물 없는 정원에 놓인 돌을 우리라고 생각해 봅시다. 그렇다면 이 돌 사이를 누비고 다니면서 뒤처리를 해주는 이것이 바로 잉태치 못한 자의 후손 메시아가 이 일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성경을 볼 때 나라는 존재를 카메라에 갔다대니까 돌 사이를 누비고 다니시는 이분의 흔적은 전부 제거되고 만 거예요. 성경을 100번 읽어도 소용이 없었던 것입니다.
정원의 돌들이 이삭, 야곱, 요셉 이런 자들이에요. 창세기를 보면, 에서든 야곱이든 자기 살 길을 찾아서 나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몸부림 치고 있어요. 누가 장자가 되어 아버지의 상속을 받을 것인가? 또는 ‘누가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하는가? 그놈을 죽이자.’ 하고 10 아들이 합세해서 요셉을 죽여 버렸어요.
여기에 ‘산 제물’이 나오는데, 아브라함에게는 이삭을 잡아 죽이는 사건을 주었습니다. 이게 언약의 요소거든요. 노아가 방주를 만든 것 역시 언약의 요소인 것처럼. 물 심판을 대비해서 방주를 만든 것처럼 아브라함이 아들을 죽임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구원 근거를 마련한 겁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 이후에 이삭, 야곱의 이야기는 사람이 죽는 이야기가 똑같이 나와요. 창세기에서 첫 번째 이야기가 뭔가 하면 ‘산 제물’입니다. 살아있는데 이게 제물이 되는 겁니다. 아브라함 언약의 초반에는 삼년 된 암소를 제물로 죽였잖아요. 죽인 것은 짐승 제물인데 그 속을 하나님이 통과 하셨고, 하나님 자신이 죽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네가 산다는 거예요.
짐승 제물을 하나님이 이삭으로 대체해 버렸습니다. 이삭은 약속에 의해서 태어난 자식이에요. 아브라함에게서 태어난 것이 아니고 여자의 후손, 이삭이 있음으로 사라가 여자가 되는 식으로 거꾸로 규정받는 거예요. 후손이, 아들 요소가 하늘에서 투입이 되고, 이 자리는 멀쩡한 육신이 이 자리와 결합된 이유 때문에 하늘로 바뀝니다. 이게 구원이에요.
자기밖에 모르는 우리 사이를 누비시는 잉태치 못한 자의 후손이 우리를 품에 앉으셔서 구원하시는 겁니다. 마태복음 16장 17절에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하늘로부터 새로운 것이 투입된 거예요.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는 말씀 역시 베드로의 능력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육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라고 했지요? 이런 말을 왜 합니까? 카메라에 네 얼굴 들이밀지 말고 치우라는 것입니다. 카메라에 얼굴 들이밀고 “어떻게 하면 구원 받습니다. 무엇을 하면 복 받습니까?” 이러지 말라는 거예요. 이렇게 하지 말라고 하면서 그 일을 시키는 이유는 그렇게 했던 자가 야곱이었고, 그에 맞선 에서였습니다.
창세기 25장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야곱이 죽을 쑤었는데 에서가 들에서부터 돌아와서 심히 곤비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곤비하니 그 붉은 것을 나로 먹게 하라.”고 했을 때, 동생은 이런 조건을 제시합니다.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날 내게 팔라.”
에서가 보기에 야곱은 부질없는 조건을 제시한 거예요. ‘형의 자리를 내게 양보해라. 그러면 이제 내가 형이 되고 형은 동생이 된다.’ 이런 이야긴데, 이게 가능한 이야기입니까? 어떻게 형, 동생의 서열이 바뀌겠어요. 그러니까 에서는 동생의 제안을 수용하고 팥죽을 얻어먹었습니다.
그런데 서열이 바뀌었어요. 시간의 역전입니다. 에서는 (수평적으로)바뀔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수직적으로)바뀌고 말았어요. 야곱이 속였든 말든 장자의 명분을 얻었습니다. 야곱은 복을 따내기 위해서 자기 본성을 유감없이 발휘했습니다. 야곱이란 이름 자체가 빼앗는 자, 속이는 자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야곱이 자기 아들 요셉을 잃어버려요.
하나님이 산 제물을 받을 때, 죽은 짐승을 제물로 받는 것이 아니고 이 제물이 점점 더 인격화 되면서 나중에는 하나님 자신이 제물이 되는 경우에만 천국에 합류할 수 있다는 것을 창세기부터 알려줍니다. 그러면 제물이 인격화 되는데, 그 인격이 고상하고 착한 인격인가? 이삭의 경우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인격이기에 그렇게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이삭에서 야곱으로 넘어오게 되면 이 인격이 고상한 것이 아니고 자기밖에 모르는 개떡 같은 인격 때문에 아무 죄도 없는 아들 요셉을 죽게 만듭니다.
아버지 야곱에게 자식 요셉은 없는 자식이에요. 짐승에게 물려 이미 죽었습니다. 심증만이 아니라 물증까지 있었습니다. 특별히 사랑해서 입혀준 요셉의 옷에 피가 묻은 것을 보았기에 죽은 것이 명백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에게 요셉은 죽은 자식이에요.
아브라함은 자식(이삭)이 죽었다가 깨어난 시간이 짧았지만 야곱의 자식(요셉)은 그 시간이 길어도 너무 길었어요. 아니 아예 아들을 잃어버렸어요. 우리는 ‘산 제물을 바친다.’고 하면, “예수님 십자가 피 믿습니다. 구원 받았습니다. 고맙습니다.”하고 되돌아서고 말아요. 그런데 아브라함 언약이 도, 레, 미, 파, 솔 --- 야곱 언약이 진행되면 우리의 남은 모든 일생이 예수님처럼 우리 자신이 가장 아끼는 것을 잃어버리는 체험을 하는 여생을 보내는 겁니다.
‘죽은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까 주님 때문에 살았군요.’ 잃었다가 되찾는 기쁨을 우리에게 주시는 겁니다. 내 인생은 죄뿐이고, 그 긴긴 시간이 나의 시간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주님의 시간이었음이 밝혀질 때 우리는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산 제물’ 자체를 이제는 어떤 인간이 죽었다가 아니라 그 인생 자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그것이 바로 자기 대신 요셉이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의 후손에서 여자로 가담하게 되는 겁니다.
두 번째가 뭐냐 하면, 야곱에게 죽음을 유발시키는 환경이 되지요. 요셉이나 이삭 이야기에서, 섬들이 각각 있는데 이 섬 사이를 주님이 누비고 다닙니다. 모텔이나 호텔에 아침이 되면 청소하는 아줌마들이 와서 일하잖아요. 투숙객이 남긴 모든 지저분한 것들을 깨끗하게 처리합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하시는 일은 바로 섬들 사이를 누비면서 인간들이 내뱉은 모든 더러운 것을 거두어 처리해 주는 일을 하십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이에요.
주님이 우리의 주변을 누비면서 우리가 흘려놓은 더러운 것을 처리해 주시는 것이 보여야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카메라에 자기 얼굴을 들이대는 것은 신앙생활 아닙니다. 그냥 우리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어요. 우리의 본성상.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이 사실은 예수님이 보이는 환경이어야 되는데 내가 보이는 환경으로 우리가 일방적으로 왜곡시킨 겁니다.
섬들은 실선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어떤 인물이 등장해서 섬들 사이를 누비고 다닙니다. 이것은 점선이에요. 점선으로 된 인물이 와서 점선으로 움직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가면 실선으로 보이던 우리가 점점 점선으로 바뀌면서 사라질 지경이고, 그와 병행해서 점선으로 보였던 주님이 뚜렷하게 우리 마음에 실선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만이 존재가 되고 존재라고 여겼던 우리는 사라질 하나의 사건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제가 첫째 시간에 말씀 드렸어요. 우리는 성경책 속에서는 존재가 되지만 밖으로 나오면 사건이 된다고.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알아도 막상 현실에 나서게 되면 내가 실선이고 남은 시간을 이용해서 내가 더 거룩하고, 성화되고, 착하고, 고상하게 만들어 뽐낼 수 있는 시간이라고 착각을 하는 거예요.
그런 착각으로 살아가니까 교회 목사들이게 돈을 갈취당하는 거예요. 우리 주변을 다니면서 우리가 흘린 더러운 것을 깨끗이 처리하시는 주님의 손길은 보지 못하고, 자신만 실선으로 보이는 겁니다.
멀리 강원도 강릉에서 오신 이상진 집사님 부부와 3명의 자녀(찬희, 대희, 환희)가 뒤에 앉아 있는데, 부모의 눈에 자녀가 실선으로 보일 때 부모 마음이 어떻겠어요? 찬희는 MIT, 대희는 예일, 환희는 프린스톤 대학에 보내서, 남들에게 자식 잘 키웠다는 소리 듣고 싶잖아요.
그런데 찬희가 와서 “어머니, 우리 형제가 힘을 합해서 원수의 성문을 열겠습니다.” 이런 말을 했다면 부모의 반응이 어떻겠어요?
우리는 ‘원수의 성문을 연다.’는 성경 말씀에 별 관심이 없어요. 우리는 야곱이에요. 내가 가진 힘을 더욱 키우는 삶을 살 뿐이에요. 나를 자랑하기 위해 스펙을 쌓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이제 강의 마지막 시간이 되었는데, 강의 끝난 후에 이곳을 떠나면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돼요.
‘여자의 후손, 잉태치 못한 자, 할례, 원수의 성문’ 이런 고상한 것은 다 잊고, 생활의 지혜에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어요. 예를 들면, ‘고등어 구울 때 커피가루를 뿌리면 냄새가 제거된다. 싱크대 찌든 때는 미지근한 물에 식초를 타서 씻으면 깨끗해진다. 가스레인지에 묻은 때는 레몬 껍질로 문지르면 된다. 냉장고 속의 냄새는 소주 병뚜껑을 열어놓으면 사라진다.’ 이런 것을 알아야지 ‘여자의 후손’ 안다고 생활에 보탬이 됩니까?
창세기 48장에 보면, 야곱이 손자들에게 축복하면서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을 거론하는데, 다 천국에 가 계시는 분들입니다. 다들 자신밖에 모르던 인간들이 천국에 가 있어요. 왜 그렇습니까? 섬 사이를 누비면서 뒤처리 해주시는 주님이 계셨기 때문이지요.
이분이 성경의 주인공입니다. ‘모든 성경은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나는 주인공이 아닙니다.
여하간 야곱이 손자들을 앞에 놓고 안수를 했는데, 팔을 어긋맞겨 얹었어요. 그 때 아들 요셉이 아버지의 어긋맞긴 손을 바로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계속해서 어긋맞게 안수를 했습니다. 누가 구원받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구원 받았다’ 이것이 구원의 내용이 아닙니다. 손이 어긋맞게 되는 이 과정이 구원이에요.
내가 바뀌지 아니하면 절대로 구원 못 받습니다. 나를 바꾸기 위해서 우리가 되고자 하는 높은 자리보다 제일 낮은 자리, 십자가에 오신 그분 때문에 우리는 구원받는 거예요. 그 관계가 성령의 열매입니다. 사람이 용서를 알 때 죄를 알아요. 용서가 먼저고 죄는 나중입니다. 구원이 먼저고 잉태가 나중이고.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을 뒤바꾸면 정답입니다. 나를 죄인 되게 하는 것이 주님의 의의 작용이고, 헌금 안 하는 것이 헌금이고, 예배 참석 안 하는 것이 예배 참석이고, 밥 먹는 것이 금식이고, 잠자는 것이 철야입니다.
거지 나사로가 몇 명 전도했습니까? 노아가 몇 명 전도했어요? 자기 식구 외에는 없습니다. 지난 시간에 라캉의 주장을 잠시 언급했는데, 여자의 자리는 여자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남자가 마련해 줘야 여자의 자리가 생겨요. 그런데 남자는 모든 것이 사무적이기 때문에 사랑을 몰라요. 여자가 사랑을 내밀 때 비로소 사랑을 알아요. “나는 당신 때문에 존재합니다.”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남자는 여자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어요.
여자가 ‘무엇이 될까?’하는 것은 남자가 챙겨줘야지 여자 본인이 챙기면 안 돼요. 여자는 남자 곁에 붙어있기를 원합니다. ‘여자의 후손’이라고 할 때 남자는 없어요. 예수님이 우리를 여자로 만들어버렸어요. 보통 남자는 나로 인하여 살고 싶은데 그 남자의 이름은 ‘흙’이에요. ‘흙’을 달리 말하면 ‘먼지 혹은 허무’입니다. 그냥 죽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남자로 보지 않고, 남자를 없애버리고 남자 자리에 여자로 만들어버리니까 여자는 자기 자리를 자기가 만들면 안 되지요. 주시는 자리를 감사해야지요. 그것도 소급해서. “내가 살았던 모든 인생이 주님 증거하라고 마련해준 자리인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자기를 위한 신앙은 개에게나 주세요. 쓸데없는 짓입니다. 신앙생활하지 맙시다. 신앙을 버리세요. 그래야 비로소 신앙이 보입니다. 나를 위한 신앙은 우상숭배입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겼다고요? 그것은 야곱 언약에서 나온 거예요. 창세기가 그만큼 중요합니다. 도레미송을 부를 때, ‘솔’은 바느질하는 바늘이라고 했는데, ‘라’를 뭐라고 했는가 하면 ‘솔’다음의 건반이라고 했어요. ‘솔’이 있어야 ‘라’가 있어요. 베이스캠프가 없으면 정상 정복도 없어요. 포스코 선전에 보면, ‘우리는 베이스가 되겠습니다.’ 라고 해요.
우리의 본래 자리는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이 신앙생활 하는 우리들의 안정감입니다. 정죄함이 없는 자리가 우리 자리인데, 우리는 그 자리를 외면하고 ‘생활의 지혜’만 찾아다니고, ‘현미를 몇 % 섞으면 다이어트에 좋습니다.’ 왜 이런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는지 모르겠어요.
창세기의 흐름은 간단합니다. 이삭은 자신이 제물 된 것이고, 이삭 이후에 야곱과 요셉 이야기는 왜 나옵니까? 제물이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죽음의 시간을 연장해서 죽음을 쭉 펼쳐놓은 거예요. 죽음을 펼쳐보면 왜 죽어야 하는가가 나와요. 그것은 오직 나를 위해서만 살아가는 진면모가 보이기 때문에 죽어야 하는 거예요.
심지어 하나님도 내 것 건드리면 가만히 있지 않아요. 야곱은 자기의 아내와 종이 경쟁적으로 사랑해서 12아들을 낳았고, 그 자식이 있어야 축복이고, 그리고 야곱의 재산 형성과정에서도 부당하게 외삼촌의 것을 횡령했어요. 그 일에 누가 도와준 줄 아세요? 하나님이 도와 주셨어요. 하나님이 범죄의 동조자였어요. “네 본성은 속이는 거야. 마음껏 속여.” 하면서 도와주신 거예요. 그것도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태어난 야곱의 삶이 그랬어요.
계시에 의해 태어난 자는 고상하게 살아갈 것으로 생각하지요? 계시에 의해 태어났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죄에 근접해서 사는 모습을 보여줄 임무가 주어졌던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자식은 절대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잉태치 못하는 자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겁니다.
이제 우리가 끝으로 생각해야 될 것은 이것입니다. 가정 근원적인 문제로 돌아가서, ‘구원하지 않아도 되는데 하나님은 왜 우리를 구원하십니까?’ 라는 것에 대해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 마을]에서나 가능한 질문입니다. 다른 마을에서는 “목사님, 어떻게 하면 구원 받습니까?” 이런 질문이 나와요. 이런 질문은 성립이 안 됩니다.
“왜 주님이 우리를 꼭 구원하셔야만 했습니까? 안 해도 되는데 왜 하셨습니까? 나 같은 죄인은 버려도 괜찮은데 왜 기어이 건져내십니까?”라는 질문의 답을 우리가 창세기에서 찾아봐야 됩니다.
창세기 25장 23절을 보면,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먼저 있고 두 아이가 태어납니다.
그러면 태어난 아기가 “하나님이여, 왜 저를 태어나게 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말씀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너는 태어났고, 너를 건졌다.” 이렇게 대답해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이 창세기 25장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까지 있어요. 그래서 창세기를 보면 점점 더 의문점이 커지는데 그런 식으로 유도해서 마지막 십자가에서 ‘아, 그렇구나!’라고 깨닫는 지점까지 연결시켜 줍니다.
그럼 무엇을 깨달았기에 ‘아, 그렇구나!’라고 하는가 하면, 말씀이 육신이 되기 위한 보조 장치로써 우리 몸을 주님이 앞당겨서 깔아놓으신 거예요. 왕이 지나가는 길에 카펫을 깔듯이, 하나님은 우리를 밟고 지나가기 위해서 지금 이 말씀을 던지고 두 아들을 준 거예요.
그렇다면 말씀이 육신이 될 때 이 육신은 어떤 육신인가 하면, 뭔가 알 수 없는 것과 싸웁니다.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 태어나게 했습니다.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하리라.’고 난데없이 색시에게 이런 말을 할 때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을 동원해서 싸우게 하는 거예요.
이 말씀을 보고 사람들은 또 오해를 해요. “내가 전사가 되어 싸워야겠구나!”라고. 싸우지 마세요. 우리는 이기주의로 자신밖에 모르는 자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보수적인 교회에서 성장해서 50여년 넘게 기도와 절제로 순결하게 신앙생활한 분인데 그분이 세계적인 명품 ‘프라다’ 가방을 선물로 받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어요.
우리 몸이 명품을 기억해요. 백날 기도해도 우리 몸의 복음은 ‘프라다, 페라가모, 루이비통, 샤넬’ 이런 것입니다. 미처 몰랐지요. 명품이 내 눈앞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이런 것을 우리는 초월했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이런 몸으로 무슨 전쟁을 해요? 영적 전쟁을 한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영적 전쟁에서 마귀가 돈을 흔들면 우리 모두는 돈 따라 갈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해서 어떻게 전쟁이 되겠습니까? 우리가 전쟁에 투입되는 방식은 죄만 지으면 되는 거예요. 이 세상 살면서 원 없이 죄를 지으면 됩니다. 우리는 원 없이 죄 짓고, 그 죄가 어떻게 처리되는가를 바라보면서 “나 같은 망나니도 구원 받았단다.”하고 감사하고, 이런 우리를 주님이 끌고 다니면서 자랑하십니다. 원수의 성문에서 자랑하는 거예요.
애굽이 말과 병거와 칼을 자랑할 때, 하나님은 창기, 세리, 탕자를 내세우면서 ‘이런 자도 구원 받았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영적 전쟁입니다. 그동안 성경에서 무엇을 보았습니까? 교회 다니면서 무슨 짓 했습니까? “김 집사님은 올해 전도 15명해서 1등 했습니다. 상품은 삼성 냉장고입니다.”
시편 20편에 나오잖아요.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이런 말씀에 왜 눈에 안 띄었을까요? 카메라에 돼지 같은 내 얼굴을 갖다 대니까 내 얼굴 외에는 아무것도 안 보이는 거예요. 우리의 남은 인생이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이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죄를 지읍시다.
우리는 구태여 죄를 지으려 하지 않아도 늘 죄를 짓습니다. 스펙을 쌓는 죄를 짓습니다. 세상에서 자기가 실선이 되어 삽니다. 자기밖에 몰라요.
총 정리하는 입장에서 첫째 시간에 언급한 내용을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경책 속에 있는 우리가 바깥으로 나올 때는 존재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사건으로 나옵니다. 사건으로 연결되어 나 자신이 하나의 사건이 된다면 이 사람은 이미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강도가 밖에 나왔을 때는 주님의 사건이지 강도 개인이 만든 사건이 아닙니다.
강도는 강도가 되기 전부터 이미 주님의 사건을 위해 태어난 자입니다. 여자의 후손을 낳기 위한 주님의 시간에 따라 움직였는데 본인은 몰랐지요. 구원 받고 난 후에 보니까 이 모든 것이 나의 존재가 아니라 주님의 존재였고, 존재는 오직 주님밖에 없어요. 첫째시간부터 제가 ‘존재’라는 말을 해서 여러분들이 굉장히 낯설어 했겠지만, 이것을 쉽게 바꿉시다. ‘있음’으로.
책상 있음, 마이크 있음, 이게 ‘있음’이거든요. 그 모든 ‘있음’은 사라질 ‘있음’이에요. 지난 수련회에서 했잖아요.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 헛된 모든 것은 사라져 버려요. 사라질 것들에는 ‘존재’라는 말을 붙이면 안 돼요. 있다가도 없어지기 때문에 존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영원한 존재로부터 우리는 잠시 있는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에 ‘존재’는 영원히 계시는 예수님께만 붙여야 됩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거예요.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성경이 보이실 거예요. 그동안 카메라에 자기 얼굴을 대니까 완전히 가려졌는데 조금만 비켜서 자기를 사라질 존재로 보고 주님이 실선이 되어서 모든 시간이 주님의 시간이 되어 낚시 줄을 끌어당길 때 거기에 걸려든 고기가 바로 우리들입니다. 주님께 걸려든 사람들은 기쁘게 “걸려들었다. 너도 걸려들었구나. 나도 걸려들었어!”
아까 주차문제를 예로 들 때 그 말을 오해하신 분이 있는데, 이런 것입니다. 같이 예수 믿는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양보하지 맙시다. 왜냐? 양보를 안 해야 상대로 하여금 예수 믿게 하잖아요. “세상에 믿을 놈 없구나. 나는 예수만 믿어야지.” 이런 기회를 제공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그동안 누가 속박했는가? 내 잘남이 날 속박했고 배후에 악마가 있었어요. 악마는 이미 독립선언을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멸망한다는 사실도 알아요. 누구를 유혹해서 같이 멸망당할까 노리다가 아담에게 찾아온 겁니다. “너도 독립선언 해, 따먹으면 독립할 수 있어!” 이것 때문에 우리 몸이 독립을 기억해요.
우리는 사건이지만 돌아서면 존재가 됩니다. 마귀가 이렇게 만들어요. 그 때 다시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의에 대해서, 죄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책망합니다. 책망 받는 순간 우리는, 내가 존재가 아니라 존재는 따로 있고 그분에 의해서 살아간다는 사실이 느껴집니다. 물론 그 느낌이 잠시 뿐이지만.
용서가 되면 그 일만 감사가 되는 것이 아니고 소급해서 다 감사가 돼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했고, 그 남편 우리야를 죽였을 때 그 사건만 죄가 되는 것이 아니고 아예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었습니다.’ 라고 소급해서 알면서, 그 전체를 용서하기 위해서 주께서 일부러 그 여자와 남편을 개입시켰다는 사실에 대해서 감사하지요. 시편 51편 이야기입니다.
“성신이여 저를 떠나지 마옵소서.” 육체인줄 알고 오셨고, 하나님의 신은 육체와 함께 있지 아니하지만, 모세가 쓴 수건, 그리스도의 성령 안에서는 함께 있기가 성사됩니다. 왜냐? 예수님이 이미 죄인으로 사셨기 때문에, 죄인이 뭔가를 아시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를 용서할 수 있는 겁니다.
창세기를 통해서 성경 전체의 구원이야기를 했습니다. 주님의 구원은 내 구원이 목적이 아니고 주님의 구원 작업에 참여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인데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는, 그래서 구세주가 되는 이런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우리를 구원해야 되는 겁니다.
죄인의 입장에 설 때 우리는 의인이고, 만약 주님께 부름을 받지 않으면 우리는 선악적 관점에서 자기를 의인으로 보게 됩니다. 우리는 죄인이라는 것이 반복되는 반면에 저쪽에서는 ‘그래도 나는 잘났어.’라는 것이 반복 될 때 여기서 에서와 야곱이 갈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언제부터 갈라졌습니까? 우리의 시간이 아닌 주님의 시간을 따라 가보니까 이미 창세전에 갈라졌어요. 이미 된 것을 가지고 우리는 괜히 쫄았어요. 이미 합격했는데. 제가 대학시험을 친 후 합격자 발표하는 날까지 얼마나 초초했는지 모릅니다. 그 당시에는 시험 친 학교까지 가야 합격 여부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확인을 위해 학교로 가는 길에 온갖 상상을 다 했어요.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에도 합격자 명단에는 이미 제 이름이 붙어 있었어요. 이것을 모르니까, 인식의 한계 때문에 계속 염려하며 초조해 했어요.
그렇다면 나의 남은 인생은 뭔가? 구원 받았음을 확인해 주는 인생이 바로 우리 인생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로 구원 받았음이 확실한데, 때로는 초조하고, 때로는 이렇게 해서 될까 하는 근심도 생기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하는 것 같기도 하고, 지옥 갈 것 같은 생각도 듭니다.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성령이 찾아오셔서 십자가를 외치시고, 피 흘림을 알려주셔서 이미 해결되었다는 것을 알려주시니 감사합니다. 주 안에서 자유를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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