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4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4강-중보자의 자기전개에서 인간은 손을 떼라-내가 했어 와 주께서 하게 하셨어

아빠와 함께 2014. 1. 21. 19:39

2014겨울수련회-창세기세척하기 제 4강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로마서 10장 13절에 보면 나와 있거든요. 이렇게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이 된다고 하는 것이 신약인데 구약에서도 그렇게 주의 이름을 부르라고 하면 될 것을 구약에서는 왜 애굽에서 고난 받는 상황이 일어나야 하는 겁니까? 그들도 인간이고 신약시대의 우리도 인간인데. 또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어요. 왜 홍해바다가 갈라지는 그 멋진 일을 신약의 사람들에게는 허용하지 않는지, 우리도 바다가 갈라진 그 바다 속 길을 한 번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 온 몸으로 바닷길을 걷는 체험을 하게 되면 한 15년쯤은 믿음 없다는 소리를 안 하고 생생한 기억을 가지고 환희에 잠길 성 싶은데 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으면서 밋밋하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런 식으로 구원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여리고성 일곱 번 돌았더니 무너졌다. 실제로 신학교시절이나 목사의 경우에도 교회 지어 놓고 근처 아파트 일곱 번 도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아파트 주민들이 교회 나오면 좋은데 아파트가 무너져서 주민들이 다 죽어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제가 지금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뭐냐 하면, ‘나’라는 이 존재에서 나름대로의 구원스케줄이 나온다는 거예요. 뒤에 있는 악마의 조종에 의해서 그렇게 한다는 것을 미처 모르면서 내가 그 스케줄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 스케줄의 아이디어를 어디서 얻는가 하면 성경책에서 얻어요.

 

성경책에서 아이디어를 얻어서 ‘내가 착하게 되려면 뭘 하지? 이웃을 사랑하면 되겠구나.’ 해서 그 스케줄에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그것을 집어넣어서 나를 구원코자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이 공간, 이곳을 없애는 거예요. 이것을 없애지 않으면 점점 더 커져버려요. 주께서 이것을 없애는 방법은 주님께서 친히 이 속에 뛰어들어서 그들의 스케줄을 따라서 “이것은 구원받는 길이 아니고 지옥 가는 길이야.”하는 쪽으로 자기백성을 뽑아내 버려요. 그러면 이쪽의 구원스케줄은 뭐냐? 힘으로 구원받는 것인데 주님께서는 힘이 없는 쪽으로 자기백성을 빼내는 전략을 사용합니다.

 

이런 구원의 전략이 되려면 반드시 먼저 악마가 만들어놓은 이 터전이 필수적으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겁니다. 쉽게 말해서 마귀는 활동을 해줘야 돼요. 마귀는 활동을 해줘야 하고 우리는 그 마귀와 짝짜꿍이 돼 줘야 합니다. 두 번째 시간에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하나님이 사건을 이렇게 일으켰습니다.”라고 좋아하다가 이것이 몇 분 지나지 않아서 이것이 마귀가 역사해서 존재로 바뀝니다. “하나님이여, 이렇게 큰 은혜를 주시다니!” 할 때는 참 좋았지요. 몇 분만 지나면 “나는 은혜 받은 존재, (그냥 은혜도 아니고) 나는 큰 은혜 받은 사람이다. 고로 존재한다.” 존재가 뒤에 달라붙어요. 마귀가 그렇게 한다니까요?

 

“날 함부로 대하지 마라. 나는 적어도 은혜 받은 사람이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래 뵈도 내가 이대 나온 여자가 이래 뵈도 내가 미스코리아 출신이다.” 나는 이런 존재라는 겁니다. <왕가네 식구들>에서 그게 나와요. 그런데 그 존재로 인하여 다시 성령이 역사하게 되면 이것이 파괴가 되지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성경의 내용을 가지고 파괴합니다. 성전에서 세리는 기도하기를 “나는 죄인입니다. 감히 고개조차 들 수가 없습니다.” 하는 반면에 바리새인은 말하기를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를 했으니 나는 구원받지요?” 할 때 예수님이 가설 재판소를 열어버려요.

 

“너는 지옥, 너는 천국”이라고 아예 임시재판을 해 버렸습니다. 그것이 그대로 성령을 통해서 들어와 버리면 우리는 졸지에 뭐가 됩니까? ‘야, 내가 내 자랑 질을 하다가 지옥 갈 뻔 했구나.’라는 그것이 파악이 되지요. 그게 오후 2시 42분이었거든요. 오후 5시 45분에 “나는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또 나와요. 그래서 아까 이야기했지만 박스 안에 하나님의 약속이 담기게 되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공히 다 담깁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에서 나는 어느 편입니까?”라고 묻지 마세요.

 

인간은 그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아요. 인간은 빠져버려요. 류현진은 던지고 추신수가 쳐야 되지 거기에 동네야구팀이 끼면 안돼요. 고수들 노는데 아마추어는 끼지를 못합니다. 언약은 우리가 해내지 못한 것을 다른 전문가가 해내서 얻은 그 전리품을 우리에게 선물로 보내줌으로써 우리가 구원받는다고 에베소서 4장에 나와 있어요. 이미 다 이긴 자로서, “이미 영생을 확보한 자로서 우리에게 선물을 줬다.” 위로 올라가서 우리에게 선물을 주실 때 그 내용을 보니 이미 너 자신이 ‘내가 이겼다.’는 해답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엡 4:7-10)

 

그래서 신약에서는 주의 이름이고 구약은 사건이 벌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그 사건은 뭐냐 하면, 역사적사건입니다. 역사적 사건이 되게 되면 이것은 신이 아니에요. 어떤 역사를 보라고 하는 겁니다. 참된 신을 찾을 때 신을 찾지 말고 이스라엘 역사를 찾으면 참된 신이 그 안에만 들어 있고 다른 데는 들어있지 않아요. 그래서 신을 믿는다는 것이 가상이 아니고 실제로 일어난 실제 사건이고 현실이며 그렇게 하나님은 현실적이라는 사실을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너는 어느 신을 믿느냐?”라고 물을 것이 아니고 “너는 이스라엘 역사와 연결되어 있느냐?”고 물어야 돼요. 이스라엘 역사에서 실패한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사시켰다고 이렇게 연결되어 있느냐고 묻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의 실패를 남의 일로 보지 말고 그들이 왜 실패했는지를 봐야 돼요. ‘그들은 왜 실패했을까?’ 제 딸이 어제 밤 강의를 듣지 못했는데 아침에 첫째와 둘째 시간에 했던 것을 딸을 위해서 강의를 다시 해 줬어요. 아버지가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죠.

 

결혼식 입장할 때 아버지와 딸이 팔짱을 끼고 나란히 입장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저에게는 참 싫은 일이에요. 왜냐하면 제가 딸을 키운 적이 없고 엄마가 다 키웠거든요. 그런데 남들 보기에는 아버지가 기도를 해서 키운 듯이 가식적으로 보이니까 차라리 엄마가 옆에 데리고 입장했으면 좋겠어요. 나는 그냥 빠지고. 나는 엄마가 좀 잔소리를 할 때 애를 너무 기죽이지 말라고 초만 쳤지 아무것도 한 것이 없거든요.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다고 해서 가버리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항상 그때 그들이 역사적으로 실패했을 때 이스라엘 역사에 마귀가 있기 때문에 역사적 실패를 반드시 뭘 로 보충하려하느냐 하면 역사적 상황으로 보충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기적을 맛보려고 했던 겁니다. 그 오류를 우리가 그대로 시행하고 있어요.

 

예를 들면, 깜빡 잊고 헌금을 안 했더니 그 주간에 헌금한 액수의 네 배나 손해가 났을 때 이것은 하나님께서 “다시는 헌금을 잊지 말라.” 하는 자극으로 해석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실패한 이유가 그겁니다. 정답을 말씀드릴게요. 헌금을 못하게 되었을 때 ‘내가 헌금을 안했구나.’라고 했을 때 내가 헌금을 안했다고 생각한 이것이 이스라엘의 실패라면 ‘주께서 내가 헌금을 안 하게 하셨구나.’라고 하는 것이 신약적인 구원받은 사람들의 고백입니다. 자꾸 말이 어려워지는데 이것은 할 수 없어요.

 

‘헌금 하고 안하고는 내 결정에 달렸어.’라고 생각하는 자체가 마귀적인 생각이었다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구약에서 망했거든요. 그러면 신약에서는 뭐냐 하면, 못하게 하신 것도 주님이고 하게 하신 것도 주님이에요. 어차피 우리는 주님에 의해서 주님의 효과로 구원받는 입장이기에 따로 나를 주인공으로 만들 이유가 없는데 우리는 자꾸 주님으로 구원되었다고 말은 하면서도 따로 나를 주인공으로 만들기 위해서 나를 존재로 되돌아가게 하는 버릇을 자꾸 들이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수시로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사건화를 통해서 “그 사건에 대해서 네가 좀 손을 떼고 빠져라.”라는 말이지요.

 

“너의 굴욕적인 사건을 네가 나서서 고상한 착함으로 메우려 들지 말”고 항상 거기서 손을 떼버려야 돼요. 손을 떼버리면 남는 것이 뭐냐 하면 “나는 실패라는 이름의 존재자, 나라는 존재는 실패를 보여주기 위해서 살아왔다.”는 이것만 하나님께 고백하면 하나님께 합격입니다. “네가 바로 의인이다. 그 자리는 네가 만든 것이 아니고 내가 마귀를 통해서 일부러 실패할 뿐 아니고 그 실패를 성공으로 바꿀 생각조차 안 된다.”는 것을 알게 하신 겁니다. 구약에서의 모든 언약실패는 하나님의 일에 인간이 개입하려 들어서 벌어진 거예요.

 

인간의 모자라는 그것을 내 힘으로 보충하려 든 그 모든 것이 다 실패로 끝나버렸어요. 그래서 구약에서의 결론은 이겁니다. “하지 마.” 이것을 부정적으로 표현하면 “가만히 있어.” 출애굽기 14장 14절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성질상 가만있지를 못하고 뭔가 꿈적거리게 되는데 그 꿈적거릴 때 나오는 방향이 있는데 바로 마귀가 주의 이름을 훼손하기 위해서 뱀의 후손이 작용하는 모습으로 꿈적거리는 거예요. 우리는 어떤 실적을 점검하면서 보기를 원하거든요. 교재 4페이지 “투쟁적 화해”라는 부분을 봅시다.

 

지금 여러분은 구약 스토리가 궁금한데 그것은 6페이지에 나오니까 조금만 기다리세요. 조금만 기다리시고 존재부터 사건으로 완전히 희석시키는 작업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화해란 행동한 것을 따지겠다는 것이 아니라 최종적인 평가로서 모든 비판과 정죄를 종식시키겠다는 것이다.” 행동을 똑바로 해, 가 아니라 화해한 뒤에 “앞으로 잘해.”라는 뜻도 아니고 모든 것이 “네가 앞으로 어떤 짓을 해도 사태는 이미 종결되었다.” 하는 거예요. 이미 게임은 끝났어요. 삼성라이온스가 2013년도에 프로야구 우승했습니다. 지금 와서 무효라고 해도 소용없어요. 우승컵 들어 올렸고 이미 끝났어요. 이게 화해에요.

 

“하나님, 이런 죄를 지었으니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하고 울 때 주께서는 화해를 정답으로 제시합니다. “끝났어! 끝났다니까?” 새삼스럽게 “어떻게 일을 처리합니까?” “처리할 필요도 없어. 이미 끝난 문제이기 때문에.” 이게 화해에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하나님께서 무슨 제물을 주셨다고 했습니까? 그냥 제물이 아니고 앞에 뭐가 붙지요? 화목제물, 화해의 제물을 줬잖아요. 주신 분의 취지를 좀 살려줍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준 게 화해의 제물을 줬으면 우리는 어디서 만나야 돼요?

 

화해의 공원에서, 화해의 장소에서 만나야 돼요. 화해의 장소에서 만나면서 인상 팍 찌그려서 가면 안 되잖아요. “어디서 오셨습니까?” “화해를 맛보러 왔습니다.” “그런데 인상이 왜 그래요?” “화해 안 될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이렇게 되면 안 되잖아요. 화해의 장을 일부러 마련하신 분의 그 취지가 얼마나 모독 받습니까? 십자가는 다섯 가지 제사의 내용이 다 들어있어요. 번제, 소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이 다섯 가지가 다 들어있어요. 이것은 행사기간에만 주는 거예요. 5분 내에 다 소진되는 겁니다. 5종 세트 다 한꺼번에 주는 거예요. 월 2만 9천원에 모시는 거, 60개월, 마지막기회.

 

세례요한이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는 것은 이제 완판, 마지막기회라는 겁니다. “곧 하늘나라 왔습니다. 마지막 혜택입니다. 이 시기 놓치면 안 되십니다. 첨벙 물속에 들어가서 자기 이름을 지워버리세요. 이제 물에서 끌어낼 때 출애굽의 재현인데 당신의 이름은 사라지는 겁니다.” 하나의 잉크처럼 물속에서 풀어져서 나의 이름은 없는 거예요. 내 이름이 없을 경우에만 주의 이름에 합류가 됩니다. 내 이름을 걸고 주의 이름에 합류할 수가 없어요. 내 이름은 사라져야 되는 것, 그래서 물세례에요.

 

그 물세례라는 것이 그 당시 요단강에서 일어난 것이라면 이걸 보편화시켜서 물세례와 똑같은 취지의 것이 성령세례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늘나라는 볼 수가 없다, 너의 이름을 지워버리라는 말입니다. 존재를 지워버리면 없지 않는가? 아니죠. 존재를 지워버리면 뭐가 되느냐, 사건으로서만, 주님의 행하신 증거물로서만 이 땅에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해놓고 창세기 1장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겠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들었다.” 이 말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그 원리원칙을 적용하기 위해서 인간이 필요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에 합당한 인간이 등장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안식일을 정했거든요. 하나님의 형상이 없는 인간 같으면 하나님이 안식하지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에 부합되는 인간은 시간, 반복되는 안식일을 통해서 장차 올 거예요. 아까 강의한 것에 대해서 제 딸이 질문하기를 “죄짓고 난 뒤에는 아빠 말이 다 맞는데 인간이 죄가 없을 때가 있지 않느냐? 그 때도 이 해석이 과연 합당하냐?” 참 예리한 질문을 한 거예요. 참, 예리하다고 자기 아버지가 평가하고…….

 

중요한 질문이고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어요. 이 질문을 분석하겠습니다. ‘나’라는 존재에서 방금 뭐가 튀어나왔습니까? 시간이 나왔지요. ‘~전과 ~후’로 나눴지요. 그 말은 내가 내 나름대로의 뭘 끄집어 낼 수 있다? 시간을 끄집어 낼 수 있는 권한이 나한테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시간을 전과 후로 해놓고 나로 하여금 하나의 일기장을 펼치는 거지요. 내가 어디에서 어디로 옮겼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함으로써 내 존재는 구원받았다고 확신하고 싶어 하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답변하기를, “소급한다.”고 했어요.

 

소급한다는 것은 뭐냐 하면, 인간이 인간일 수밖에 없는 요소가 흙이라는 요소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의 요소가 있으면 인간의 모든 것은,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이 아니고 죄가 무엇인가 드러날 때 아담이 거기에 이용당한 거예요. 인간이 죄를 지은 것이 아니고 죄가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주님의 형상 때문에 인간은 활용당한 겁니다. 왜, 형상이 유지돼야 하나님이 만족하기 때문에 그래요. 내 구원을 만족하면 안돼요. 그러면 해석이 잘못된 겁니다. “내가 죄 있을 때와 없을 때가 어떻게 다릅니까?” 하는 자체가 “내가 어떻게 구원받은 자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까?”라는 것인데 그 질문자체가 주님의 이름에 의해서 소급적으로 적용되면 의미 없는 질문이 돼버려요.

 

질문자체에서 해답이 위쪽으로 가야 되는데 내 쪽에 머물고 있는 해답은 해답이 아닙니다. 그렇게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하지요. 뭔가 상처가 치유되는 것이 사랑이지요. 아프면 안돼요. 뭔가 아픔이라는 것은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기 위해서 아픈 것인데 그 아픔을 통해서 왜 아픈가, 아직도 자기는 미련이 있는 거예요. 그 부자청년이 왔을 때 근심하고 돌아가면서 마음이 아팠잖아요. 그러면 안 된다고요. 가룟유다가 자살할 때도 마음이 편했겠습니까? 아팠잖아요. 그것은 해답도 모르는 거예요.

 

이미 해답에 속했기 때문에 소급적용하게 되면 아담이 처음에는 절차상 아직 죄가 무엇인지 보여줄 절차가 아니었고 그 다음에 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기에 위해서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어야 되는 겁니다. 모든 배치가, 디즈니랜드 놀이동산이 관람객이 정한 것이 아니고 이미 회사 측에서 다 마련해 놓은 것을 관람객은 돈만내고 누비면서 타고 다니는 것뿐이에요. 바이킹이 공중으로 치솟으면 와, 하고 함성 지르고 기구가 물을 튀기면서 물속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이렇게 설치된 그 사이사이를 누비면서 다니는 것처럼 죄라는 것도 형상에 필요하고 의라는 것도 생명나무도 다 무엇과 연관되어 있는가, 하나님의 형상이 누구신가, 그 형상을 나중에 완성시키기 위한 겁니다. 그 전에 시간이라는 것이 필요하지만.

 

시간은 자꾸 우리를 치즈 속에 있는 쥐새끼가 치즈를 갉아먹듯이 우리를 갉아먹거든요. 이것은 구약이고 현재 우리가 있는 신약은 뭐냐, 이미 다 이루었던 것을 소급해서 우리에게 적용하는 겁니다. 우리는 이런 똑같은 인간이었는데, “우리는 할 수 없었는데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미 구원받은 자 되게 하시고 우리 자체를 하나님의 해답으로, 이미 확정된 해답으로, 화해된 사람으로 세웠습니다.”라는 것을 고백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구약을 보게 하는 겁니다. 따지고 보면 이미 구원받은 상태에서는 구약을 안 봐도 되잖아요. 구약뿐만 아니고 성경자체를 안 봐도 되잖아요.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이 호식이라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은 “아예 성경은 보지도 말자. 예수 처음 믿을 때만 믿고 그 다음에는 예수 믿지 말자. 왜, 우리가 예수니까. 우리가 말씀이니까.” ‘우리가 말씀’이라 하는 것은 지방교회출신의 목사인 이 현래라는 사람이 있어요. 엄청 추종세력이 많았습니다. 목사들 중에서 거기에 빠진 사람도 많아요. 존재에요, 존재, 이게 존재거든요. ‘내가 어떻게 하면 괜찮은 존재가 될까, 성경에서 어떤 아이디어를 얻을까?’ 다시 내 존재가 이익 되는 쪽으로 오는 거예요. 그게 구약으로 말하면 우상숭배입니다.

 

신천지도 맨 그거거든요. ‘성경말씀을 어떻게 해석하면 내가 구원될까?’ 목적이 내가 구원받는 그것이 목적이에요. 왜, 한국교회 전체가 그거니까. 한국교회전체가 “여러분, 이렇게 따라오시면, 세례 받고 성만찬하면 구원받습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것은 구원이지요?” “맞지요.” 인간은 이미 악마에 속했기 때문에 악마는 자기가 절대적인 존재만 되면 되는 거예요. 그게 죄기에 성경을 통해서 그렇게 나만을 위해서 살 때 어떤 사건들이 일어났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창세기 2장과 3장 사건을 주께서 준비해놓으신 거예요.

 

‘아하, 그랬구나.’ 선악과 따먹을 때 악마가 꾀인 것이 뭐냐? “그걸 따먹는 날에는 정녕” 어떻게 된다? “신처럼 된다.” 했지요. 우리는 거짓말이라도 좋아요. 거짓말이라도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해줬으면 좋겠어요. 일단 내가 기분 좋으면 거짓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내 기분에 따라서 내가 판단합니다. 신은 누가 고른다고요? 내가 골라요. 나한테 잘해주는 신은 좋은 신이고 나에게 나쁘게 하는 신은 나쁜 신이에요. 그러니까 인간의 존재성자체가 자기를 망치는 겁니다. 마귀라고 소개해도 마귀가 좋은걸 어떡해. 마귀가 좋으니까 받아주는 거예요. 사람들은 마귀 같은 메시아만 원하는 겁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의 새로운 당회장이 사도바울보고 이단이라고 한 거예요. “그는 맨날 십자가, 십자가 하지만 우리는 여러분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합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이야기하기를 “여러분의 당회장으로 있는 그 인간이 여러분이 그렇게 보고 싶었던 마귀입니다. 그 인간이 마귀의 제자이고 마귀의 하수인이고 마귀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원했던 겁니다. 내가 진짜 사도인데 나는 갈수록 더욱더 약해지고 건질 것이 없습니다. 내가 줄 것이 없어요. 이게 진짜 사도입니다.”라고 이야기해요.

 

그리고 고린도후서 13장에 보면 “주님께서 연약한 가운데 죽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강해지지 말고 약해집시다.” 이것은 이 세상에 있는 흐름과 정 반대지요. “여자야, 약해지면 안 돼.” 하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내가 약한데서 강함이라. 그게 나한테 주의 은혜라.” 그 폭만큼 은혜가 된다는 거예요. 내가 강하면 주님을 믿을 이유가 없지요. 내가 강한데요. 내가 약하기에 늘 주님의 은혜를 깊이 느끼면서 아는 거예요. 이 느낌 알지요?

 

방금 선악과와 생명나무를 제가 언급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박물관의 전시물인데 그것을 하나님의 형상이 형상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은 뭐냐, 할 때 하나님의 형상이 뭐냐고 묻는 것은 존재입장에서 묻는 질문이거든요. “나는 난데요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는 것이 당신은 뭐냐 하는 거예요. “뭐냐가 뭐냐고? 어쩔?” 하지요. 그걸 나에게 왜 묻느냐, 사도바울이 “주여, 누구십니까?”할 때 주께서 답변한 것은 내 신장이 얼마다, 이런 식으로 하지 않고 어떤 사건을 이야기해줍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하고 관련을 짓지요.

 

그것이 교재 5페이지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는 종식되고 하나님이 약속으로 제시한 ‘여자의 후손+생명의 후손’사이의 화해의 장이 악마와의 투쟁의 모습으로 지상에 깔린다. 여기서 인간은 홀로 존재하지 않고 ‘타인과 –쌍을-이룬-존재’로 살게 된다.” 항상 타인과 쌍을 이룬다는 겁니다. 가인이 제사를 드릴 때 그 제사의 의미는 가인도 몰랐습니다. 제가 첫 시간에도 이야기했습니다만 의자가 하나만 있을 때는 의자자체의 의미가 없어요. 의자 옆에 다른 의자가 왔을 때 ‘저 의자보다 나은가 못한가? 저 의자보다 앞에 있느냐, 뒤에 있느냐? 저 의자보다 쓸데가 있느냐 없느냐?’ 이렇게 표현되듯이 가인의 제사는 가인의 제사만으로는 의미가 등장하지 않고 여기에 새로운 제사를 갖다 붙이지요.

 

아벨의 제사를 갖다 붙입니다. 이게 쌍을 이루는 거예요. 언약이라는 박스를 깨보면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들어 있는데 이것은 시간 따라서 나중에 정체가 밝혀질 것이고요, 어쨌든 그 언약 속에 누가 담겨 있는가? 하나님이지요. 그래서 하나님 형상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정답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여기서 나오는 두 번째 흔히 많이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인터넷에 ‘흔히 많이 하는 질문’이 있잖아요. 그 흔히 많이 하는 질문 중에 “하나님과 하나님 형상이 어떻게 다릅니까?”하는 것이 있습니다.

 

“주의 이름과 주님이 어떻게 다르고 여호와와 하나님이 어떻게 다릅니까?” 요한복음에 보면 “나와 아버지는 하나”(요 10:30)라고 되어 있어요. 아버지와 내가 일치된다는 식의 같다는 뜻이라면 구태여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없지요. 분명히 다른 분이기 때문에 하나가 된다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는 어디에 관심을 둬야 돼요? 왜 다른 분인데 하나이어야 됩니까? 만화에 보면 독수리 5형제가 뭘 하지요? 합체하지요. 크로스! 지구는 누가 살립니까? 독수리 5형제가 살리잖아요.

 

“왜 이렇게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어야 됩니까?”라고 했을 때 그것이 하나님의 언약이고 약속이라는 겁니다. 시편 110편에서 “주께서 내 주에게”라는 말을 했을 때에 유대인들은 그 성경말씀에 대해서 영원한 비밀로 간직했을 거예요. 대체 이게 무슨 말인지. 왜 주가 갑자기 두 분인가? 여호와 증인들은 주의 등급을 나눴어요. 앞의 주는 성부고 뒤의 주는 성자로 해서 성자는 주이지만 하나님은 아니고 하나님보다 좀 못한 천사의 부류에 속한다고 본겁니다. 그런데 초기교회의 삼위일체의 형성과정에 있어서 사벨리우스같이 등급으로 나누는 경우들이 많이 나왔어요.

 

하나님만을 높이기 위해서 예수님을 하나님보다 못한 분으로 맞춘 거예요. 대표적인 사람이 아리우스라는 사람인데 그런 주장을 해서 이단으로 취급되었어요. 하지만 그런 주장을 이단으로 취급한 아타나시우스라는 그 사람도 이단이었어요. 이단이 남보고 이단이라고, 둘 다 문제 있으면서도 아리우스는 이단의 보스처럼 되어버렸는데 아타나시우스도 문제에요. 이런 인식이 다 무엇 때문에 나왔느냐 하면,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의 형상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을 감추기 위한 용도에요.

 

피조물은 하나님을 모릅니다. 그러면 형상은 뭐냐? 크게 쓸게요. ‘매개’입니다. 이게 네 번째 주제입니다. 교재에 나와 있는데 어려워서 잘 이해가 안 되실 거예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매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 이미 성립이 되어 있습니다. 그 매개가 되는, 중재가 되는 분을 이 지상에 보냄으로 말미암아 그 매개에 걸려든 사람만이 하나님의 창조의 본래완성에 합류한 인간으로서 피조물이다, 이렇게 하고 싶은 거예요. 아버지와 아들사이에서만 아는 이야기에. 아까 솔다씨도 질문했는데 하나님의 예정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예수님을 경유하게 되면 우리 인간들끼리 예정 받았다, 안 받았다, 이걸 가지고 투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정하심은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자체를 예정한 거예요.

 

우리 구원을 예정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 안을 예정한 거예요. 예수님 안이라는 새로운 공간의 창출을 예정한 거예요. 그 창출에 필요한 인간을 누가 뽑을 수 있는가? 예수님이 뽑을 수가 있어요. 요한복음 5장에서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라고 한 거예요.(요 5:20-21) 하나님의 관심사는 예수님이 주가 되는데 관심이 있기 때문에 주로서의 권한을 예수님께 허용하신 거예요.

 

이런 이야기에서 뭐가 빠집니까? “내가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이것은 빠지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자체가 뭐냐 하면, 하나님으로서 매개기 때문에 이 형상의 자기전개가 시작됩니다. 형상의 자기전개에 누가 말려드는가? 피조물인 인간이 말려들게 되어 있어요. 피조물에는 인간도 있지만 악마도 있어요. 악마와 인간과 천사도 있고 자연물, 새와 동물도 있어요. 노아방주에 동물들도 다 필요해서 태웠거든요. 제물이 될 새나 짐승도 있어야 되니까 필요해요. 이 모든 것을 하나의 재료로 사용해서 하나님의 중보자의 자기전개, 하나님의 자기 나타내심의 작업인데, 그것을 가지고 저는 ‘창조란 하나님의 자기표현작업’이라고 표현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기를 전개하면서 자기를 표현하시는 겁니다. 그 방법이 뭐냐 하면, 죄를 경유해서 표현하신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주’라는 것은 하나님이라고 주가 아니고 반드시 하나님의 원수를 처단하는 업적이 있어야 그때서 주가 되가 될 수 있어요. 따라서 인간에게는 반드시 죽음이 와야 되고 반드시 죄를 지어야 되고 반드시 심판이 있어야 되고 반드시 저주가 있어야 돼요. 하나님의 저주가 없는 주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저주받지 아니하면 예수님이 주가 될 수 없습니다. 아버지한테 버림받지 아니하면 예수님이 주가 될 수 없어요.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아버지께 저주받았다고 되어 있잖아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어떻게 구원받는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를 증거 하는 거예요. 그 십자가사건에 필요한 조치들이 여러 가지 있는데 그 안에 구원이 있는 거예요. 구원은 예수님의 자기숙제지 내가 풀어야 할 숙제는 아닌 겁니다. 주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거예요. 처음에 이스라엘백성에게 율법을 줬잖아요. 율법 주고 난 뒤에 율법 빼앗아 가버리고 그 다음에 예수님 주십니다.

 

태어난 지 돌도 안지난 애들에게 콜라를 먹이는 아버지가 있다는 거예요. 애기 때부터 콜라를 먹여놓고 일곱 살 되어서 빼앗아버리면 콜라 맛에 인 박혀서 애걸하면서 콜라를 달라고 조를 때 “안 돼. 콜라는 몸에 해로워.” 그러면 콜라는 처음부터 왜 주셨는데? 주의 영광을 위해서 주신 거예요. 주님이 주되기 위해서는 줬다 뺏는 것이 있어야 돼요. 우리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잖아요. 왜 태어나게 했습니까? 죽여 버리기 위해서 태어나게 했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롬 6:23)이라고.

 

죽이기 위해서 태어나게 하면서 거기에 주의 형상을 삽입시켜 놓았습니다. 죽는 것은 마귀 때문에 죽거든요. 제가 어느 날 이야기했지만 사람이 죽는 것이 무서운 것이 아니고 죽기 직전이 제일 무섭다고 했어요. 죽기 직전이 제일 무섭고 일단 죽고 나면 끝나버려요. 사람들이 이발소에 가기 싫어하는 이유가 뭡니까? 이발 끝나고 난 뒤는 괜찮은데 이발 할 때 그 거북스러움과 불편함. 그리고 목욕탕 가기 싫어하는 것은 그 때 미는 고된 아픔. 나올 때는 시원한 느낌으로 손가락 집어넣어서 머리카락 막 날리면서 나오잖아요.

 

이미 주를 아는 사람은 손가락 가지고 머리카락 날리세요.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그 대범함과 당당함이 바로 사도들이었습니다. 그걸 히브리서 11장에서는 “세상이 감당치 못한다.”(히 11:38) 교재에서는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시간을 두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높음이나 깊음이나” 천사들, 악마와 천사 다 이야기하는 겁니다,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에 대해서 “어떻게 하면 이걸 믿을 수 있습니까?” 라고 한다면 이건 이미 마귀에 속한 사람이에요.

 

이것은 ‘어떻게’가 성립이 안돼요. 이것은 통보를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너의 성적표가 이거야.”라고 통보해준 거예요. 현재 네 상황은 이런 상황이라고 통보해 준 겁니다. 여러분, 건강 검진 받잖아요. 받을 때 “간암 수치가 높습니다.” 그걸 듣고서 의사 멱살 쥐고 흔들면 안돼요. 그냥 검사하니 나왔다는 거예요.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습니다. 혈압이 높습니다.” 120-150이어야 하는데 어떤 분은 약 먹으면서도 180이 나오는 분도 있습니다만. 그걸 의사보고 “다른 병원 갈래요.” 해도 소용없어요.

 

“지금 혈압 높아도 괜찮아요. 혈압 높아도 지옥 안가요. 지옥 갈 일이 안 생겨요.” 도대체 어떤 일이 생겨도 지옥 갈 일이 안 생긴다니까요? 이런 통보가 왔다는 말이죠. 이게 믿어지고 안 믿어지고는 제 삼자가 확인할 것이 아니고 여러분과 짝을 이루는 분이 있어요. 누구냐? 예수님이 그걸 알려줄 때는 예수님 덕분에 알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가만있어라. 제발 부지런 떨면서 가만있어라.” 주께서 일하는 대로 열심히 일하면서. 여러분, 오리와 참새가 어떻게 합니까? 가만있습니까? 굶어죽으려고? 부지런히 날면서 먹을 것을 찾잖아요. 그게 가만히 있는 거예요.

 

가만있다는 말은 내 쪽에서 스케줄을 짜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내 쪽에서 짜더라도 그것은 항상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내 스케줄조차도 주님이 스케줄 속에 포함되어서 뭔가 제거되는 현상들이 반복적으로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 거예요. 시간 속에서 그것이 일어나거든요.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매개라는 그 말이지요. 이 매개가 이 땅에 오게 되면 고난 받습니다. 왜? 우리에게 또 다른 매개를 이미 악마가 장만해 줬기 때문에. 악마가 만들어낸 하나님의 형상이 있고 하나님의 구원이 있고 하나님의 율법이 있고 다 있어요. 악마는 예수도 만들고 다 만들어요. 악마는 프라다도 만들고 구찌도 만들고 다 만들어내요. 악마가 안 만들어내는 것이 없고 모든 것을 다 만들어내요.

 

자기존재에서 “네가 잘돼.”라고 하는 겁니다. 악마가 시험할 때 “너한테 유리해.” 자꾸 이런 식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있어요. 그래서 주님 쪽에서 만든 모든 요소가 말씀을 두고 충돌을 일으키면서 이쪽은 십자가 없음이 등장하고 이쪽은 원천이 십자가에서 나왔음이 드러나면서 그 반대쪽은 십자가가 아니라 인간의 행함에서 나온 거예요. “이렇게 행동하세요.”라고 하지요. 그래서 로마서에서는 행함이 아니고 무엇으로 구원받습니까?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아브라함이 나오지요.

 

아브라함이 아무것도 한 것이 없고 경건치 않은 자이지만 아브라함이 구원 받았잖아요. 이 아브라함 하나 데리고 계속해서 설명한 것은 ‘경건치 않은 자.’ 다윗도 사용해서 한 것은 ‘경건치 않은 자.’ 행한 것도 없는 자로서의 아브라함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보기에 아브라함은 자꾸 행했잖아요. 아들도 잡고 뭘 행했잖아요. 전에도 안양에서 그런 강의를 했지만 여러분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롯이 구원받은 이유가 뭡니까? 창세기 19장에서 소돔과 고모라에서 롯이 구원받은 이유, 객관식으로 합니다.

 

1)롯이 천사를 영접했다. 2) 롯이 천사의 말을 믿었다. 점점 더 정답에 가깝지요? 모창 할 때 1번인지 2번인지 누가 히든 싱어인지 찾아내기 곤란할 때가 많은데 3) 아브라함을 생각해서 구원받았다. 몇 번 입니까? 3번이 본 가수에요. 3번이 정답입니다. 창세기 19장 29절에 나오거든요.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 롯은 중보자, 매개를 눈치 챈 거예요. 분명히 자기가 영접한 것이 맞아요. 그리고 자기희생을 하면서 불량배를 쫒아내려고 애쓴 것도 맞아요.

 

다 맞는데 그것이 자기를 구원했다, 안했다? 절대로 구원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바친 것은 맞아요. 하지만 그것으로 자기가 구원받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 오기를 기다렸고 예수님 때문에 구원 받아요. 그렇다면 자기는 예수님오기 2천 년 전부터 이미 사건에 휘말린 거예요. 그래서 구약을 해석할 때는 뭐냐, 신약을 경유해서, 십자가를 경유해서 해석을 해줘야 마귀가 만든 해석이 어떤 해석인가를 눈앞에 확 드러나게 되면서 우리는 오직 예수님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마귀는 뭘 이야기합니까? “바쳐야 복을 받지. 목사한테 별미를 갖다 바쳐야 복을 받지. 야곱이 별미 바쳐서 복을 받았잖아.” 그런데 일반교인들은 그 소리가 얼마나 듣기 좋은지 몰라요. 왜, 몸이 애굽을 기억하니까, 행함을 기억하니까, 존재를 기억하니까. 우리 동네 갓 바위 올라간다고 차가 밀릴 정도에요. 왜, 내가 알고 있는 신앙생활을 그게 전부니까, 착하게 살면 복 받고 나쁘게 하면 벌 받는다는 그것이 전부에요. 중보자, 매개, 필요 없어요. 내가 잘해서 내가 구원받는 거예요.

 

이게 납득이 되고 이게 설득이 된다니까요? 박 영선 목사가 십자가 전했으면 교인수가 그렇게 안 많아요. “예수 믿었으면 값을 해야지.” 그렇게 나오는 거예요. “예수 믿었으면 값을 해야지. 옛날에는 헌금을 해도 그냥 했지만 예수 믿고 성령 받고 성령에 의해서 헌금을 해야지.” 성령에 의해서 헌금하는 것은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은 안 받아요. 하나님은 아무것도 안 받는다니까요? 하나님은 주시는 분이지 누구한테 받아 챙기는 분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헌금을 안 받는다니까요? 개나 줘 버려라.

 

친히 지금도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에요. 사도행전 17장에 나옵니다. 마지막에 피까지 줬다는 말이지요. 주의 피를 무슨 수로 보답해요. 향수 들고 와서? 내 피 뽑는다고 주의 피를 대신 할 수 있습니까? 견줄 것을 견줘야지요. 아예 견줄 수 없을 것 같거든 미리 죽으세요, 그냥. 그냥 판돈 털고 손들어버리세요. 이게 바로 성전에서 기도했던 세리가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하고 모든 것을 그냥 털어버린 거예요. 울면서 향수 뿌리면서 그냥 털어버린 거예요. “내 이름은 내가 감당 못할 이름이니 이 이름은 삭제해 버리시고 이제는 주의 이름으로 살게 하옵소서.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로마서 14장에 나오는 말씀 아닙니까?

 

이 사건은 모든 것이 중보자에 의해서 움직이는 사건, 주가 중보자 된 거예요. 이 중보자라는 것은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이어주는 분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모든 것의 의미는 의자 하나가 있으면 다른 의자가 있듯이 우리 곁에는 중보자가 있어서 비로소 우리는 의미가 생기는 겁니다. 나의 존재는 그 분의 사건으로 전환되고 그 분은 나를 통해서 하는 거예요. 이제 진짜 어려운 것을 하고 이번시간은 마치겠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을 때 나는 안 따먹었습니다, 하는 질문에 대해서 어떻게 답변하느냐는 겁니다. “선악과는 우리 조상이 따먹었지 내가 따먹지 않았습니다.” 이 율곡은 우리 경주이씨의 교시가 돼요. 이율곡이 어릴 때부터 야무졌다는 뜻으로 전해져 오는 감나무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감을 내가 따먹었습니까? 우리 선조가 따먹었지 내가 안 따먹었거든요. 여기에 뭐가 들어가느냐 하면, 소급이 들어갑니다. 아브라함에게 복이 온다고 할 때 아브라함이 좋았지요.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과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자식이 많을 것이라고 했는데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어요.

 

그러니까 이것은 장차 올 중보자에 소급해서 우리를 참여시키는 겁니다. 그분이 이미 이루신 것을 아브라함에게 미리 보여서 아브라함이 생각한 것과 따로 뭔가 덮쳐지는 요소가 있어야 돼요. 내가 생각한 스케줄 말고 다른 인생스케줄이 덮쳐질 때 우리는 그것이 처음에는 낯설게 느껴지지만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개입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나’라는 인생 자체가 없게 하는 거예요. 선악과는 누가 따먹었느냐 할 때, 그것을 사건화 시켜서 선악과를 반복하는 겁니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한 것을 자꾸 우리 눈에 띄게 해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을 자꾸 눈에 띄게 하는 겁니다. 띄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따먹은 티를 내게 하십니다. 그 따먹은 본성이 우리에게 흘러들어왔고 우리는 버티지만 어떤 상황이 닥치면 그것이 튀어나오게 되어 있어요. 아까 제가 남자, 여자, 하면서 여자는 사랑을 안다고 했지요. “날 그냥 두지 마.”라는 이것이 사랑지요. 그러면 남자는 사랑을 안다고 했습니까? 남자는 사랑을 몰라요. 모르는데 여자가 사랑이라고 외칠 때 비로소 발견하게 되지요.

 

남자에게 여자는 돌아가는 탄창이 있는 리볼버권총이에요. 여러 여자가 왔다 갔다 해요. 오늘은 이 여자, 내일은 저 여자, 탄창이 휙휙 돌아가는 권총처럼. 자기자리는 여자로 인해서 달라지지가 않아요. 그러나 여자는 남자에 따라서 이미 자기 자리가 확보되거든요. 따라서 선악과를 따먹었다고 할 때 이 선악과의 자리는 반복해서 등장하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안 따먹을 거야, 했는데 선악과를 따먹을 수밖에 없는 것이 새로운 상황 앞에서는 그렇게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하나님에게로 온 것이 아니고 어디서 왔습니까? 세상으로부터 온 거지요. 따라서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우리를 뒀다는 것은 우리가 아담과 조금도 변한 게 없어요. 따먹지 말라고 한 그 앞에 세워져 있다는 사실은 아담이나 우리나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 살면서 탐내지 말라고 하는 것, 세상과 벗된 여자들이 어떤 여자? 간음한 여자라 하잖아요. 이게 너무 오버하는 것이 아닙니까? 세상 것을 좋아하는 여자보고 간음한 여자라고 하니 세상 것을 안 좋아하는 여자가 어디 있습니까?

 

흰 저고리 입고 검정 치마 입고 성경책 끼고 돌아다닐까요? 언제까지? 시간이 쥐새끼처럼 갉아먹으면 그냥 늙어죽는 건데 이런 것은 아무소용도 없거든요. 어떤 인간도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그 본성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겁니다. 일부러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이라는 무대장치를 지금도 취소하지 않습니다. 에덴동산은 지금도 살아 있어요. 우리는 에덴동산에서 여전히 선악과 쪽에 손이 먼저가고 생명나무에는 손이 가지 않는 속성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남 탓하지 말고 남 이야기하지 말고 우리가 바로 선악과 따먹게 한 악마의 유혹을 받는 아담이고 우리는 심심하면 악마의 유혹을 요청하고 싶어요.

 

재미있는 일이 우리에게는 사는 행복입니다. 진리는 재미가 없어요. 뭔가 짜릿하고 신선하고 또 재미있는 것, 재미있는 것보다 더 재미있는 것, 찰나적으로 재미있는 것, 그런 것들만을 찾아서 오늘도 스마트폰 페이지 죽죽 넘기면서 보내고 하면서, 그저 재미있는 것, 누가 이혼 안했는지, 자살 안했는지, 그저 재미있는 것, 재미있게 살려는 그 본성이 우리의 본성이지 주님을 찾는 것은 절대로 우리 본성이 아닙니다. 감사합시다. 그런 인간임에도 우리는 이미 구원받았습니다.

 첨부파일 : 2014겨울수련회-창세기세척하기제 4강.hwp (40.5K), Down: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