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4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6강-인간의 시간과 예수님의 시간(예수 안.십자가 안)

아빠와 함께 2014. 1. 21. 19:42

2014겨울수련회-창세기세척하기 제 6강

 

요한복음 1장에서 세례요한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메시아를 표현할 때 시간을 동원하지요. 15절입니다.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우리 같으면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내 뒤에 오시는 분이다.” 이러든지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앞섰다.” 이렇게 할 텐데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나보다 앞선 이유는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앞선다는 것과 먼저 계신다는 것의 차이가 뭐냐는 겁니다. 차이가 없어 보이는 것을 왜 반복하는가?

 

이게 차이가 있어요. “여러분이 보기에 나보다 나이가 적고 나보다 늦게 태어나신(6개월쯤) 예수님이 나보다 어리다고 생각하는데 그분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앞섰다는 것은 순서를 이야기하고 먼저 계시다는 것은 “너희들끼리 통하는 시간 론으로는 안 맞도록 오신 분이다.” 그 말이지요. 그 말은 뭐냐, 세례요한이 외칠 때는 “너희들의 그 시간관으로는 안 맞는 내용이 함유되어 있는 복음을 전하겠다.”라고 한 겁니다. 나는 쇠해야 하고 그 분은 흥해야 하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기존의 시간 론을 갖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은 알아듣는다, 못 알아듣는다? 알아듣지를 못해요. 12제자를 뽑아 세운 것은 누구도 알아듣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고요, 심지어 수제자인 베드로는 뭐라고 했습니까? “난 당신을 저주합니다.” 세 번씩이나 했어요. “저주하면서 난 저 사람을 모른다.” 그렇게 했다는 말이지요. “목사님, 베드로가 그래놓고 울었잖아요.” 울어도 소용없어요. 울어서 될 것 같으면 나도 구원받겠다. 그러면 어떻게 구원받는가? 예수님이 다시 찾아왔지요.

 

그러면 이 소리 듣고 어떤 사람들은 “목사님, 만약에 안 찾아오면 어떻게 합니까?” 안 찾아오면 어떻게 하냐고 하는 것은 마치 찾아와야 될 권리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그 생각을 접으세요. “안 찾아오면 어떻게 합니까?”라는 것은 이미 찾아온 사람에게는 해당되는 질문이 아닙니다. 찾아와서 귀찮아 죽겠다, 그렇게 되어야지. “너무 찾아오시면 안 됩니다.” 이렇게 되어야지 “안 찾아오시면 어떻게 합니까?” 찾아왔다면 그냥 빈손으로 찾아오신 것이 아니고 선물 들고 오지요.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는 선물 보따리를 들고 찾아오시는 겁니다.

 

성경은 언약과 언약이 일으킨 사건 때문에 기존의 것으로 오해받고 무시당하고 모독 받는 현상이 계속 일어납니다. 창세기 4장에서 아벨이 제사를 드렸습니다. “아벨이 제사를 드릴 때 양을 잡고 기름을 구분해서 잡았습니다. 그게 아벨의 제사입니다.”라고 하거든요. 그것은 아벨의 제사가 아니고요, 아벨의 제사의 표징이고 아벨이 죽는 것까지 포함해야 그것이 아벨의 제사에요. 아벨의 제사는 뭘 로 상을 차렸는가, 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 상차림으로 인하여 그 제사와 연루된 사람을 불러 모아야 돼요.

 

마귀의 후손도 불러오고 여자의 후손도 불러와서 과연 약속대로 이것이 대립된다는 것을 보여줄 때 비로소 아벨의 제사가 그 효과를 다 하는 겁니다. 제사 잘 드리고 난 뒤에 무사히 지낸다, 그렇게 하지 마시고 제사를 잘 드렸기에 맞아 죽는 것, 따라서 맞아죽는 것 까지 해야 아벨의 제사는 마감이 되는 겁니다. 왜냐, 거기서 뭐가 나오기 때문입니까? 제물의 피로 멈추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피, “그의 핏 소리가 하늘에 상달”되어 줘야 아벨은 제대로 죽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은 죽으면 안 되고 살아 있어야 돼요. 이것은 사형이 아니고 무기징역입니다.

 

살아 있어서 그들은 새로운 국가……, 이 최초의 국가는 반드시 도시국가입니다. 잉여생산물을 도시의 엘리트집단이 장악할 때 도시가 발생되는 겁니다. 도시에서 가인이 엘리트 역할을 하면서 지배계층인 귀족이 되고 가인이 아벨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그것이 단순히 하나님께서 안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가인내부에 잠재되어 있고 그 열차에 가득실려서 후대로 운반해야 될 내가 뭐냐 하는 것을 가인의 나라는 오래오래 번성하면서 마음껏 죄를 퍼뜨려 줘야할 사명을 띠고 가인의 제국은 번창해야 되는 겁니다.

 

그 모든 것이 일찍 오신 심판행위에 그들이 말려들어가야 되는 거예요. 그렇게 해놓고 창세기 6장 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함께 있지 않겠다, 가 되어줘야 거기서 함께 있지 않은 상태에서 나오는 신이라면 그 신은 누가 만든 겁니까? 하나님이 함께 있지도 않았는데 거기서 신이 나왔다면 그 신은 누가 만든 거예요? 바로 인간이 육체가 된 상태에서 나오는 신이지요. 포이에르바하가 말한 신이라는 것은 인간의 투영 체라고 하지요. 자신을 꼭 닮은 신을 만들어낸다는 거예요.

 

고르기아스가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원숭이나라가 있다면 원숭이의 신은 원숭이를 닮았고 지렁이나라의 신이 있다면 지렁이를 닮았고 거북이나라의 신이 있다면 거북이를 똑 닮았다. 따라서 인간의 신이 있다면 인간을 닮는 것이 당연하다. 왜, 인간이 조작해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을 신앙인이라고 이야기한다면 ‘나는 신앙인’이라고 이야기하지 말고 ‘내가 신을 만든다면 이런 신을 만들겠습니다.’라고 미리 해놓고 그 신과 진짜 신을 대조하면서 ‘그래서 나는 이런 신을 믿습니다.’라고 해야 돼요. 문장이 좀 길지요.

 

“나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합니다.” 이렇게 하면 안 되고 “내가 만약 하나님을 만든다면 이런 신을 만들 겁니다.” 라고 신을 제시해 놓고 “저는 이것을 찢을 용의가 되어 있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이것은 자기를 경배하는 신전을 스스로 불 지르고 폭파할 수 있는 자만이 더 이상 자기를 위한 신은 우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지요. 내가 만들었기 때문에 이것은 무조건 참된 신이라고 우기신다면 이것은 우상숭배가 되는 겁니다. 구약성경을 보면서 사람들이 잘 이해를 해야 될 것은, 왜 하나님께서 우상숭배에 대해서 그렇게 민감하게 구시는지? ‘그것들은 그저 돌이나 나무나 청동에 불과한 것이다.’라고 했으면 우리도 그렇게 알면 되잖아요.

 

“하나님, 이거 의미 없습니다. 그냥 돌이고 나무고 그저 재미삼아 만들어봤습니다.” 라고 하면 되잖아요. “그걸 만들었다고 해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킨다는 것은 너무 오버하신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봐도 이게 내가 만든 거 뻔히 아는데 내가 만든 신을 섬기겠습니까? 주님이 우리 심정을 좀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하고 싶어서 미치겠지요. “나도 별 의미 안둡니다. 그러니 주께서 그런 것 좀 섬겼다고 해서 너무 신경 쓰지 마옵소서. 주께서 대자 대비한 마음을 가져야지 자꾸 인간이 하는 사소한 것들에 신경을 꼼꼼히 다 쓰십니까?”

 

“궁합을 다 봤다고?” “재미로 본 거예요. 한 번 잘 맞는가 싶어서.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궁합한번 봤다고 미신이라고 하시면 곤란합니다.” 이런 식으로. 옛날 다방 테이블에 보면 땅콩도 들어있고 돌리면 오늘의 운세가 나오잖아요. 주부생활이나 여성지 뒤에도 붙어 있잖아요. 이달의 운세나 별자리도 나오잖아요. 안 맞는지 알면서도 그냥 재미로 보는 거예요. “그럴 수도 있는 문제가지고 예민하게 하시면 우리가 숨 막혀서 살겠습니까?”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지요. 주님께서 언급하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을 우상이라고 한다면 네가 생각하는 참신도 우상”이라는 겁니다.

 

“그런 것을 네가 우상이라고 생각한다면 네가 믿는다는 십자가가 아니라 좋다는 것은 다 집어넣고 믹스를 해도 그것도 우상에 불과하다는 거예요.” 우리가 정신 차려서 미리 심판에서 면제되기 위해서 정신을 바짝 차려서 동네 주유소에 가서 기름준비하고 졸지 않게 눈꺼풀을 집게로 잡아당겨가면서 신랑이 언제 오시는지 기다린다든지 무슨 조치를 할 거예요. 그게 바로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을 채택했다는 그 자체가 우상이 되는 겁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기적은 인간이 예상할 수 있는 모든 기적을 다 피해가 버렸어요.

 

모든 기적을 다 피해갔습니다. 심지어 구원받은 당사자들도 몰랐어요. 세상에, 바다가 갈라진다는 것은 조미미도 몰랐어요. “바다가 육지라면” 이것은 당최 알 수가 없지요. 신 라면입니까, 삼양라면도 아니고 바다가 육지라면? 그게 어느 회사 라면입니까? 그런데 세상에 바다가 육지가 된다는 것을 상상도 못했어요. 그 다음부터 사람들은 또 바다가 육지가 되는 것을 기다렸어요. 이번에는 그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바다가 육지라면, 이 아니고 요단강 들어가서 육지라면, 이렇게 되지요.

 

베드로가 물 위를 한 번 걸었다고 해서 베드로가 물만 보면 환장해서 풍덩 풍덩 뛰어들지 않았습니다. 사건이라는 것은 내 손에 소유화되지 않아요. 사건이 날 소유했지, 주님이 날 소유했지 내가 주님을 가지고 다룰 수 있는 입장이 못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뤄버리면 주님을 내 뜻에 맞추는 우상숭배가 돼요. 우리가 우상숭배 안한다고 하지만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 뒤에 붙어 있는 기도의 내용들을 보게 되면 전부 다 우상숭배의 요소가 가득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하세요. “주여, 제가 이렇게 기도했는데 주께서 들어줄 리도 만무하고 저도 기대 안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그러면 주께서는 “그래, 네 뜻대로 절대로 안 들어주마.” 그러면 우리는 “제가 그렇게 기도했다고 그걸 그대로 하시면 섭섭하지요.” “네가 그렇게 함으로써 행여 또 될 줄로 알았지? 나는 그걸 비켜간다고 그걸 그대로 네 원대로 해 줬을 뿐이다.”

 

철저하게 우리 이름이 예상하는 것을 비켜가는 겁니다. 우리는 항상 시간상, 과거 - 현재 – 미래로 나아가기 때문에 이 미래는 그냥 공중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과거에서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미래는 먼저 과거를 참고로 해서 추가적으로 알파를 해서 만들어낸 것이 미래이기 때문에 이 미래를 뜯어보면 그 안에 우리가 알고 있는 과거가 들어 있어요. 그렇게 되면 시간 방향이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밀려갑니다. 그러면 제가 아까 이야기한, 메시아가 일찍 왔다는 것, 일찍 심판으로 왔을 때 이 자체를 심판하려면 주께서 이미 미래에 완성된 그것으로 과거 현재를 전부 다 폭파를 시켜 줘야 되지요.

 

폭파를 시켜 줄 때 우리는 거기서 내가 깰 수 없었던 시간을 깨게 해주셔서 범사에 모든 것에 감사할 뿐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할 때 그 ‘모든’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그 내용을 알았습니까, 몰랐습니까? 몰랐어요. 그 ‘모든’에 대해서 자기가 예상한 ‘모든’이 아니고 그냥 차후 적으로 소급해서 그냥 지금 일어난 모든 것에 감사하다고 할 뿐이라는 말이지요. 전부 다 뭉뚱그려서, 어떤 것은 감사하고 어떤 것은 감사 안하고가 아니라 한 소쿠리에 다 담아서 전부 다 감사라는 라벨을 ‘감사’ 해서 다 붙여버린 거예요.

 

그래서 언약사건 속에서는 모든 것을 소급해서 감사가 되는 겁니다. 이제부터 아까 이야기한 도레미송을 해 봅시다. 언약신학 들어갑니다. 도~! 깔고 레~! 깔고 언약이 같이 죽 나가는 거예요. 노아언약부터 해 봅시다. 창세기 6장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박스에 담으면 그것이 언약이 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택배박스를 열어 제치면 거기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나오게 되겠지요. 그런데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라는 것을 장식하기 위해서는 뱀의 후손 역할을 할 사람이 거기에 등장하게 됩니다.

 

그들은 심판을 받고 있지만 그 심판 자체를 부정하는 식으로 ‘나는 앞으로 잘할 거야. 내가 심판받는 것을 인정하지 못해.’라고 하면서 나오는 행위들이 있어요. 그 행위들이 바로 노아 당시에 뱀의 후손의 역할이 됩니다. 어떤 것이 있느냐?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그러다가 갑자기 뭐가 임했다? 홍수가 임했습니다. 이걸 요즘 버전으로 옮기면 이렇게 됩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사고팔고 갑자기 홍수가 일어나고.” 이렇게 되겠지요. 왜냐하면 한 번 홍수가 이미 일어났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대비하게 돼요.

 

그래서 사람들이 지금 홍수 대비한다고 홍수대비 프로젝트를 하는 사람들이 미국에 한 두 명이 아닙니다. 지하벙커에 홍수대비하고 원자폭탄 터질 것을 대비하시는데 예수나 믿으라 하세요. 생수 3년 치 쟁이고 라면 등 비상식량 비축하고 총기까지 준비해서 마지막 때 우리끼리 살아남아서 우리가 노아가 되어 후대에 씨를 뿌리세, 하는 거예요. 1월말이나 2월이 되면 그런 영화가 나옵니다. 노아라는 영화가 나와요. 아, 참! 이미 심판 받은 거예요. 태어난 그 자체로 이미 심판받기 위해서 태어났는데 뭘 새삼 구원을 언급합니까? 그냥 사는 대로 살지.

 

그런데 노아는 창세기 6장 9절에 하나님과 동행을 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했다. 이것이 말이 안 되지요. 내가 어떤 아저씨와 동행한다, 이것은 말이 돼요. 그런데 하나님과 동행할 때는 걸음을 어떻게 맞춰야 합니까? 하나 둘, 참새, 짹짹, 이런 식으로 할까요? “너는 삼보 뒤에서 따라와라.” 기황후처럼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이 동행입니까? 삼보 뒤에 떨어져서 가는 이것이 동행이 아니지요. 동행이란 기능의 동행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그 일은 내가 주관자가 아니고 동행하신 분이 기획해서 나에게 그 일을 시킬 때 그것을 동행이라고 합니다.

 

동행하는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하면, “주여, 오늘 뭘 할까요?” 이게 동행입니다. 그 동행의 대표적인 분이 누구냐 하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와 동행했습니까? 아버지 하나님과 동행했지요.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그것보다 더 확실한 동행이 어디 있어요? 그러면 제자들은 예수님과 동행 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동행 안했지요. 각자 다른 생각을 했다니까요? 가룟유다 뿐만 아니고 모든 제자들이 다 각자 다른 생각을 했어요. “야, 우리 중에 하늘나라 가면 누가 높겠는가?” 이런 되도 않는 소리를 했다 그 말이지요. 딴 생각을 했어요.

 

지시를 받아야 하는데 지시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그 제자들이 나중에 어떻게 되는가? 나중에 주님과 동행했는가? 그러면 주님과 동행이 안 되는 인간이 어떻게 동행이 가능했습니까? 맨 날 물고기 잡아 줬습니까? 그 때는 동행을 하는 그 연결고리가 있어요. 그게 보혜사입니다. 보혜사 많이 들었지요? 성령이 오십니다. 성령이 와서 어떻게 동행하는가 하면, 일을 지시하는 게 아니에요. 일을 지시한 것에 대해서 책망하십니다. 책망을 통해서 일을 되게 하셔요. “방금 네가 한 일이 있지?” “예” “그것은 네 자랑 질이 되고 네 의가 되었잖아.” “어떻게 알았습니까? 죄송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성령께서 동행하는 거예요.

 

“네가 방금 형제를 사랑했다고 네가 우쭐대나? 그것은 성령의 열매가 아니고 육신의 열매야. 육신의 열매는 미움과 다툼 같은 거야.” “알겠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잘못했다는 그것이 바로 양선과 화평과 성령의 열매에요. 성령이 동행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을 계속해서 회개하는 매카니즘에 집어넣어요. 쉴 새 없이 회개하게 만듭니다.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본적도 없고 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는 한석봉 일화를 들으면서 한석봉의 엄마가 머리가 참 좋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불을 끄고 “나는 떡을 썰고 너는 글씨를 써라.”라고 했습니다. 저는 대구 남문 시장에서 40년간 떡을 썰어온 분을 모셔보고 싶어요. 한석봉 엄마가 과연 제대로 떡을 썰었는지를 평가해 보고 싶어서입니다. 떡 썰 때 과연 공기만 칼질 반인지, “제 점수는 요?” 진짜 한석봉 엄마가 제대로 떡을 썰었는지 떡 썰기 달인을 모셔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한석봉이가 글씨를 제대로 썼는지의 평가는 엄마가 하면 안돼요. 엄마가 그 정도 되면 자기가 직접 가르치지 왜 떡을 썰고 있습니까? 그것은 대가를 불러와서 평가해줘야 되지 엄마가 불꺼놓고 글씨를 쓰게 해놓고는 “나는 떡을 바르게 썰었지만 네 글자는 삐뚤구나.” 했을 때 한 석봉이가 “어머님…….” 내가 보기에는 한석봉이가 효자에요.

 

어머니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이때는 무조건 어머니를 높이는 게 맞다 싶어서 “어머니는 위대하십니다.” “빨리 짐을 싸서 다시 떠나라.” “예, 알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처럼 억지를 부리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착한 일을 해도 “그게 맞나?” “아닙니다.” “그렇지. 정신 차려.” “알겠습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이제 실험을 해보겠습니다. “하나님, 제가 성경을 바르게 읽겠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맞지요?” “그게 글 읽는 거냐.” “죄송합니다. 제가 죄를 지었군요.” 그렇게 돼야 돼요. 미쳤어요. 다른 사람이 보면 완전히 이상해요. 돌아버린 사람이에요. 성경을 그대로 읽었는데 그게 성경해석이 틀린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성경해석입니까? “주여, 읽는 것도 죄입니다.” 시내 산에서 모세가 수건 덮고 온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십계명을 가지고 올 때에 십계명을 글로 썼다고 해서 읽을 수 있는 글이 아닙니다. 왜냐, 읽을 수 있는 자격이 못돼요.

 

그래서 읽을 수 있도록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기 위해서 자기 얼굴에 수건을 썼습니다. 그랬더니만 비로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혜택을 입을 수 있었거든요. 이 수건이 오늘날 접착제가 되어서 하나님과 연결시키는 무슨 영이라고 했습니까? 이게 바로 그리스도의 영, 그리스도의 영안에서는 뭐가 있다? 자유가 있다.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에요. ‘자유’라는 말은 행동을 바르게 한다는 말이 아니고 죄에서 벗어난 상황을 자유라고 합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너로 하여금 죄의 속박을 받지 않는 상태가 되게 하시는 거예요.

 

죄를 지으면서도 죄의 속박을 받지 않도록 하시는 그것이 바로 자유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러한 수건사건마저도 전부 다 출몰된 거예요. 우리가 예상한 것이 아니고 계속 출몰된 거예요. “목사님, 저도 그 출몰에 좀 해당되고 싶습니다.” 할 때 여러분들이 지금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출몰될 사건을 현재 일상적인 평범한 사건과 따로 구분하는데 사도베드로나 사도요한에게 있어서 모든 일상이 다 출몰된 일상이에요. 밥 먹는 것, 강도에 돈 빼앗기는 것, 도적의 위협과 테러를 받는 그것마저도 전부 다 출몰로서 하나님의 은혜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뭐 하나라도 뺄 것이 없어요. 전부 다 은혜에요. 라벨을 붙여서 한 바구니에 들어있는 전부가 다 은혜에요. “우리가 하나님의 기적을 보고 싶습니다. 갑자기 교실에 손가락이 하나 나타나서 십계명을 막 써 내려가면 우리는 깜짝 놀라면서 잘못을 회개하겠습니다.” 이렇게 하고 싶은데 우리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기르시는 기적의 손길인 것을 소급해서 파악하지요. 우리가 왜 그것을 모르는가? 우리가 너무 교만해서 그래요. 이것은 기본으로 주시는 것이고 그것 말고 획기적인 것을 주옵소서, 맨 날 이렇게 교만을 떠니까 그것은 주님께서 그 기본이라고 주신, 그 기본에 속한 은혜마저 우리가 짓밟고 있는 죄를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했습니다. 노아가 동행했다는 것은 동행하지 않은 쪽을 차별화시키는 거지요. 동행했으면 일거리를 주지요. 일거리를 주면 그 일거리가 무엇을 만드는 것이었습니까? 방주 만들기. 어렵겠습니까, 쉽겠습니까? 이것은 힘들기는 해도 그닥 어려운 일은 아니겠지요. 설계도대로 나무해서 하면 되니까. 영덕에 가면 금강송이 있어요. 그걸로 만들면 되는데 러시아산 쓰면 안 되고요. 노아가 견디기 어려웠던 것이 뭐냐 하면, 방주 만들기가 아니고 거기에 달랑 자기 식구만 들어간다는 이 사실, 방주의 의미를 모르는 자는 절대로 넣어주지 않는다는 이것이 어려운 거예요.

 

아는 사람들, 초등학교 동창생도 있고 계모임도 있는데 일체 넣어줄 수가 없어요. 왜, 친한 친구끼리 실컷 이야기 나누다가 “내가 요새 방주를 만드는데 방주 타 볼래?” “왜 타야 하는데?” “홍수가 난단다. 곧 일어난다.” “난 얘가 정상인 줄 알았는데 가끔씩 이상한 소리 한다. 와, 진짜 난 정상으로 봤거든? 네가 봐도 네가 이상하지?” “이상하지.” “왜 이상한 건데?” “동행하시거든.” “갈수록 증세가 더 심하네. 누가 동행하는데?” “하나님이.” “너한테 하나님이 동행하면 나한테도 하나님이 동행하겠다.”

 

욥이 힘들었던 것은 친구가 자기 심사를 오해하고 있다는 점이에요. “너는 분명히 죄를 지었어. 죄를 지었으니 회개해.” 이것이 더 답답한 거예요. 심지어 사랑하는 아내마저 차라리 저주하고 죽으라고 했어요. 그러니 흔히 요새 말로 소통이 안돼요. 말할 구석이 없어요. 그게 무슨 사건인가? 언약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거기에 십자가의 의미를 미리 앞서서 체험학습하게 하시거든요. 예수님이 하신 모든 것은 제자들도 못 알아 봤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그리스도의 영이 오게 되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 참, 남자에게 좋은 건데 말할 수도 없고…….’ “말을 해 봐!” “(산수유)이게 참 좋은 건데 말할 수가 없네.”

 

교외 안 다니는 사람 말고 교회 와서 그런 소리 해 보세요. “예수 믿는 것이 참 좋은데 뭐 알아듣는 사람도 없고.” 그러면 대번에 쫓겨납니다. “다 믿어, 다 믿는다고. 왜 그리 교만해. 너만 믿는 것이 아니고 다 믿어. 설명해 볼까?” “아니, 난 설명이 안 되는데 어떻게 당신이 설명을 해.” 설명이 안돼야 돼요. 갑자기 들이닥치기에, 기대하지 않은 것이기에 설명을 할 수가 없어요. 그냥 동행하는 모습으로 보는 겁니다. 자, 방주를 만들었는데 방주는 무슨 용도입니까? 방주를 만드는 것은 불을 대비하기 위함입니까, 아니면 물을 대비하기 위함입니까? 방주는 물을 대비하지요.

 

그러면 물이라는 심판이 우선입니까, 방주가 우선입니까? 물이 먼저고 그 물에 의해서 방주지요. 그러면 우리 인간들의 시간상 어느 것이 먼저입니까? 방주 만들기를 먼저 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홍수가 오지요. 그러니까 보세요. 하나님의 시간하고 우리 시간하고 다르잖아요.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나보다 앞선 거예요. 내가 와서 그분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먼저 나를 미리 보냈다는 겁니다. 따라서 나는 너희들의 시간에 맞추지 않고 나는 그분의 시간에 맞추겠다는 겁니다. 이게 세례요한에게 있어서 동행이에요. 오늘날 우리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제가 십자가를 이야기하니까 “당신은 왜 십자가만 이야기하고 재림은 이야기를 하지 않느냐?” 하는데 재림보다 십자가가 먼저라니까요? “그게 또 무슨 소리야!” 재림보다 십자가가 먼저라니까요? 사도바울이 십자가를 믿으라고 했습니까, 재림을 믿으라고 했습니까? 십자가를 믿으라고 했지요. 고린도전서 2장 2절에서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이렇게 되지요. 주님의 재림이 눈앞에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이것은 이 장림이가 한 이야기고요. 하얀 소복입고 오실 주님 기다린다고. 그것은 에덴동산 찾는 것 하고 똑같은 짓입니다.

 

시간 속에 있어요. 에덴동산은 시간 속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십자가라는 시간 속에 있습니다. 지금도 재림을 기다립니다. 누가? 엘리야와 모세,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전부 다 지금 주와 함께 있으면서 재림을 기다려요. 왜냐하면, 십자가의 부록이기 때문에. 자기를 죽였던 그 지역을 방문해서 심판으로 마감시키거든요. 심판과 구원이 마지막에 합치가 되면서 완성이 되는 겁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역사는 심판이 먼저 깔려 있잖아요. 깔려 있으면 여기에 하나님이 탑을 쌓아버려요. 탑은 수직적인데 수직적으로 구원이 와 버립니다.

 

구원이 와 버리면 심판과 구원이 만나면서 소급해서 구원받을 자는 다 끄집어내요. 소급합니다. 방주에 있던 여덟 사람도 구원하고 구약에서도 신약에서도 다 끄집어내요. 하루가 천년같이 천년이 하루같이 어떻게 해도 다 끄집어내요. 왜냐하면 이 안에는 이 모든 시간보다 우선된 시간이 있기 때문에. 천년이 하루같이, 천년이 길다고요? 이 안에서는 길지도 않아요. 이 시간이 우선된 시간이고 이 시간을 말하기 위해서 이 현재의 시간이 깔려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여기 있다가 사라져도 괜찮아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시간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나이차이가 약 600년 나지요. 차이가 나는데 변화 산에서 막 먹었잖아요. 모세와 엘리야하고 같은 탁자에서 예수님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어요. “이게 쫄따구가!” “선배님!” 이런 것은 없어요. 그것은 새로운 시간이에요. 이런 이야기를 논문에 담으니까 그 사람들이 이해를 못하는 거지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방주라 하는 것은 물이 먼저 있고 방주가 있지요. 그러면 노아가 방주를 만들면서 방주와 연계되어 있는 것을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그것은 뭐냐, 불이 오는 것이 아니고 물이 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제 응용문제 나갑니다. 무지개가 있다는 것은 무엇과 연관시키면 되겠습니까? 초등학교 줄긋기 문제입니다. 무지개와 연관되어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봐주고 계시다.’라는 거지요. 하나님께서 봐주고 있는 거예요.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다 같이 햇빛과 공기를 주시는 겁니다. 지금 북한에 있는 김정은 에게도 따뜻한 햇빛과 공기를 주셔요. 아침에 눈을 뜨면 평양시내에 따뜻한 햇빛이 막 비추거든요. 그 나쁜 사람에게 왜 주는 겁니까? 이게 뭣 때문에 주는 겁니까? 선인과 악인에게 햇빛과 공기를 주시고 우상숭배자들에게도 햇빛과 공기를 주시는데 이것이 바로 무지개언약입니다.

 

무지개라는 것은 뭘 차단했다? 다시는 물로서는 심판하지 않겠다고 물을 차단시키는 기능이 무지개언약입니다. 물이 쏟아지지 말라고 받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물을 받치고 있는 무지개를 무지개로 보면 안 되고 무지개의 원형을 찾아가야 돼요. 원형을 찾아가게 되면 여기에 뭐가 있느냐 하면, 여기에 인물이 등장합니다. 노아가 뭘 드렸습니까? 정결한 짐승이죠. 그 정결한 짐승은 뭘 통과했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을 통과했기 때문에 용서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했고 우리가 지옥에서 건짐 받을 수 있는 것은 이미 예수님께서 먼저 지옥과 죄를, 버림받음을 이미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이루었던 그 능력을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게 되면 죽을 우리 몸도 살리신다, 로마서 8장 11절의 말씀. 우리 속에 그의 영이 오게 되면 죽을 우리 몸도 살리신다. 왜냐, 그 영은 죽은 예수를 살린 그 영이기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저주를 받으시고 십자가를 받으심으로써 예수 안의 혜택을 받는 사람은 더 이상 저주나 죽음이나 심판, 이런 것은 더 이상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미 방주를 거쳐 왔던 그 정결한 짐승의 운명 안에 어떤 정보가 있느냐 하면 “이미 심판을 이기고 견뎠습니다. 심판은 더 이상 없습니다.”를 정보로 해서, 어떤 심판, 물 심판, 더 이상 물 심판이 없습니다, 라는 것을 환등기 필름으로 찍어 넣으면 그 투사체가 비취면 그게 무지개가 된 거예요.

 

환등기에 집어넣고 스크린에 이걸 비추는 거예요. 그러면 이런 혜택을 받은 사람은 어디를 찾아가야 합니까? 도대체 이 아름다운 무지개가 어떤 일의 근거에 의해서 이렇게 아름답게 물심 판이 없다는 혜택을 받는가를 찾아가 봐야 될 것이 아닙니까? 찾아갈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성령께서는 한꺼번에 소급해서 구약을 보게 함으로 말미암아 ‘아, 그 피가 그 시대를 살렸다면 오늘날 예수님이 피는 우리를 살’리는 거예요. 왜, 예수님의 피에 노아언약이 포함되어 있어요. 왜, 도~! 레~! 미~! 도레미송에 의하면 도는 저음으로 깔리고 그 다음에 레가 깔리고 그 다음에 미가 깔리고, 모든 언약은 그리스도 십자가 안에 다 깔려서 같이 움직이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해야 돼요. 아침 식사를 할 때 “이 주스도 예수님의 십자가 피의 희생으로 이 주스를 먹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고백해야 돼요. 농부의 희생, 이런 것 말고. 이 주스를 팔았던 편의점, 그 편의점 주인이 통일교 다니는 사람, 통일교 다니는 사람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이 주스를……, 그러지 말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써 오늘날 우리 머리카락도 자라고 때로는 빠지기도 하고 오늘날 우리 발걸음도 세시고, 모든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혜택이 되는 거예요. 그 원천을 우리가 찾아가도록 성령이 이끄십니다.

 

그래서 성령이 하는 일은 십자가가 보이는 쪽으로 우리를 데려가는 일이 성령이 하시는 거예요. 요나의 기적으로, 그것이 전부라는 겁니다. 그래서 첫 번째 언약에 보니 무지개가 있고 그 정결한 짐승의 피를 받아서 하나님께서 “다시는 너희들을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는 겁니다. 왜, 처음부터 악하기에. 창세기 8장 20절에 보면 노아가 정결한 짐승을 잡아서 번제를 드립니다. 우리 같으면 정결한 짐승 안 잡습니다. 더러운 짐승을 잡아서 빨리 더러움의 숫자를 줄이려고 할 것인데 더러운 짐승 잡아서 필름에 넣어봐야 무지개가 뜨지를 않습니다.

 

정결한 짐승을 잡아야 은혜의 무지개가 뜨거든요. 그것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 죄 없는 분이 죽어야 우리에게 은혜가 주어지기 때문에 그것을 앞당겨서 노아언약이라는 필름에 그 정보를 집어넣었어요. 필름을 조사해 보니 그 안에 예수님이 다 들어 있어요. 그래서 노아가 정결한 제물을 번제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하시는 말씀이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여기서 이 “어려서부터”는 몇 살부터를 이야기하는 거지요?

 

그때그때 달라요. 이것은 몇 살 때부터가 악하다는 것이 아니고 악함이 나올 때부터 이미 애추부터 악하다고 보면 돼요. 일곱 살 때 악한 것이 나오잖아요. 그러면 그 ‘어려서부터’는 일곱 살보다 적은 것이 분명하고 네 살 때 못돼먹은 것이 나오면 그 악함은 네 살보다 적은 세 살 때도 악한 것이 분명하고 세 살 때 악한 것이 나오면 두 살 때부터 악한 것이 분명하고 6개월부터 악하면 이것은 3개월 때부터 악한 것이 분명하고, ‘어려서부터’는 항상 남아 있어요. 그러면 태어나자마자 악한 것은 뱃속에 있을 때부터 악하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다윗 같으면 “아예 모친이 태중에서부터 악하게 나왔습니다.”하고 먼저 자진납세를 했지요. “처음부터 다 악합니다.” 해버린 거예요. 그러면 문제 간단한 것을 가지고, 백점입니다. “주여, 제가 이 나쁜 짓을 했습니다.” 그런 소리 하지 말고 아예 처음부터 “저는 나쁜 짓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나오면 이것은 포괄적으로 다 합격인데 그걸 가지고 이것은 악한 것, 이것은 복 받는 것, 이것을 콩 가르듯이 왜 구분합니까? 스트레스 받게. ‘오늘도 착한 일을 했으니까 복 받을 거야. 나쁜 짓을 했으니까 저주 받을 거야.’ 바로 이것이 잉태한 인간들에 대한 악마의 시험이 계속 주어지는 겁니다. 언약을 외면했기 때문에 그런 시험이 계속 주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하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과학자는 말하기를 “낮과 밤이 쉬지 않는 것은 지구가 자전하고 공전하고 지구의 기울기가 23점 5도로 기울어졌기 때문에 밤과 낮이 명확하게 구분된다.”고 하는 겁니다. 이게 맞습니까? 과학자들은 예수의 피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과학적인 논리에 의지해서 설명하는 거예요. 그 과학자가 지구가 23.5도 기울어졌기 때문에 밤과 낮이 된다고 우기는 그 시간은 자기 입이 살아 있을 때, 자기 수명이 허락될 때까지만 허용되고 죽고 난 뒤에는 예수님 만나서 “예수님이 다 하셨습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미리 온 심판을 몰랐기 때문에 그래요. 미리 앞당겨서 심판을 시작한다는 것을 모르고 그저 죽을 때 구원받게 교회 나가자, 이렇게 하기에 문제에요. 이미 앞서서 심판이 이루어져야 됩니다. 많이 피곤하신데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9장 보겠습니다. 9장에 어려운 것이 나옵니다. 9장 5절, 6절을 설명해야겠습니다. 이게 왜 어려운가 하면, 하나님께서 노아 때 무지개를 통해서 은혜를 주잖아요. 은혜를 주게 되면 그냥 은혜를 주면 되지 법이 필요합니까, 필요 없습니까? 법은 필요가 없잖아요. 법은 있으나 마나 우리가 악한 것을 아시고 무지개는 떴고, 그러면 우리는 죄를 지어도 햇빛과 공기는 받고,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의 혜택을 받는데, 이 스케줄에 따라서 농사를 지으면 옥토가 곡식을 내면 밥 먹고 살면 되거든요.

 

그런데 왜 갑자기 법이 등장합니까?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 채 먹지 말것이니라.” 또 “사람의 피를 흘리”지 말라는 새로운 조항이 첨가됩니다. 그것은 뭐냐, 도~! 레~! 해서 전환되는 시점에 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언약이 나오면 그 언약은 드디어 새로운 언약이 나올 기초가 되어버려요. 레위기는 초반부터 온천지가 피범벅이에요. 레위기를 보는 사람은 이런 소리 합니다. “하나님은 왜 이랬다 저랬다 하는지?” 왜, “노아 때는 그냥 하나님께서 은혜를 준다며? 어차피 인간은 악하고 그 악한 것을 알고 은혜를 주겠다고 했다면서? 그런데 여기서 왜 제사니 피니 하는 이야기를 왜 하는가?”

 

거기에 대한 답변은 뭐냐 하면, 언약의 도, 레, 미, 파, 가면 갈수록 하나님이 죽었다는 것, 하나님의 피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쪽으로 점차 접근이 시도가 되는 겁니다. 대구에서 서울까지 승용차로 달리게 되면 청주까지 잘 달립니다. 청주 지나서 계속 달려가면서 ‘야, 차도 별로 없는데 뭐한다고 이렇게 넓게 도로를 뚫었나?’ 하고 달리다가 갑자기 어디서 딱 막히는가 하면, 수원, 용인, 여기부터 가지를 않네요. 서울에서 결혼식이 있는데 5시까지면 충분하겠지, 하고 거리계산 다 해서 가는데 수원에서 막혀버려요.

 

수원에서 서울까지만 두 시간이 걸려버려요. 특히 주말의 경우에. 뭔가 낌새가 이상해요. 피 이야기가 나왔다는 말은 “아이고, 무지개 고맙습니다.” 한 그것은 무지개 뜨기 전까지가 하나님의 은혜라면 이제 예수님이 오실 때는 더욱 더 깊이 있는 은혜가 요구되는 거예요. 왜? 은혜 받고 저주 짓을 하는 인간들이 새롭게 죄로 발생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언약 안에서 내부적으로 문제가 생기지요. 언약으로 구원받는다고 했는데 언약자체 내에서 언약에 대한 반동되는 세력들이 잉태하기 시작하거든요.

 

그걸 생각해서 “사람의 생명을 죽이지 말라. 왜, 내가 은혜로 준 생명을 네가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말 듣고 사람을 죽이면 안 되겠네요? 안된다고 한다면 정답은 땡, 틀렸습니다. 레위기 모세언약에 보면 죽일 인간은 죽이라는 겁니다. 안식일에 일하는 사람 죽이고, 점치는 사람 죽이고, 부모 저주하는 사람 죽이고, 무당 죽이라는 겁니다. 안식일 날 나무했다고 죽여 버리지요. 죽이는 그것이 하나님의 법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죽는 사람을 죽일 때 몰래 죽입니까? 아니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자진해서 돌 들고 죽입니까? 성경에서는 자진해서 돌 들고 그 사람을 때려죽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죽은 자는 죽은 자로 그만이지만 그 죽인 자를 죽이고 난 뒤에 살아남은 자가 자기도 안식일을 어기면 어떤 취급을 받겠다? 나도 똑같이 나에게 돌을 던지라고 할 마음을 가지고 돌을 던져야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죽은 자의 죽음 자체가 어디에 귀속되는가 하면, 새로운 법의 해석으로 포함이 되어버려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헌금을 잘못해서 죽었잖아요. ‘헌금을 잘못해서 죽는구나.’라는 그것에 의해서 후에 교회에서 뭘 해야 합니까? 헌금을 똑바로 하라는 뜻입니까?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죽는 것을 보고 어떤 마음이 들어야 합니까? “하나님, 앞으로 헌금 제대로 하겠습니다. 속이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나올 거냐는 말이지요. 그래서 안 속이는 사람이 있을까요? 마찬가지에요. 다 또 속이게 돼요. 그게 그 시대에서 죽일 수도 있는 무서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느껴야 돼요. 성만찬을 하는데 죄를 생각 안하고 떡을 먹었더니 죽은 사람도 있고 병든 자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성만찬을 어떻게 할까요? 1) 부들부들 떨면서 한다. 2) 목사님께서 성만찬하기 일주일 전부터 TV도 안보고 찬양만 하면서 기다렸다 한다. 3) 그래도 혹시 모르기에 증인 하나 불러서 동행하면서 혹시 죄를 짓거든 죄 지었다고 이야기 해달라고 한다. 죄 지으면 성만찬 하지 못하기에 죄를 지었거든 알려달라고 다짐에 다짐을 한다.

 

몇 번입니까? 그냥 먹으세요. 이게 뭐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보다 뭘 더 중요하게 여긴 것인가 하면, ‘어쨌든 안 죽어야 한다.’ 는 자기 존재, 자기생각이 먼저 생기는 거예요. 이 시간까지 존재는 계속 흘러옵니다. 계속 결국 존재에요. 지금 내 존재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지적 질을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는 이게 중요한 거예요. 지금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살아 있군요, 그것이 감격스러워야지 그저 매 안 맞는 쪽으로 자꾸 생각하면 바리새인 됩니다. 이미 물론 되었지만.

 

하나님의 법이라 하는 것은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고 법을 제시한 분이 너와 함께 있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한 겁니다. 그래서 한 가지 법을 어겨도 모든 율법을 다 어긴 거예요. 한 가지 법을 어겼다는 말은 나머지 법은 자기가 법 지켰다는 그것을 자랑 질 하고 싶어 지킨거예요. 진짜 모든 법을 지킨 사람이라면 오히려 모든 법이 있다는 것을, 그런 법을 주신 분을 바라보게 되고 그러면  다 되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그걸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은 모든 법의 완성(롬 13:10)이라는 말이지요.

 

법이 앞으로 나올 거예요. 미리 이야기합니다만 법이 나올 때 겁내지 마시고 또 ‘함이 저주받았다.’ 할 때 그것을 겁내지 마세요. ‘아, 이미 구원하신 주님께서 어느 시대에도 그 때 그때마다 살아 계시구나. 그럼 이 시대에도 살아 있구나. 나는 주님이 살아 있으면 좋아.’ 이렇게. 나를 죽이든 살리든 나는 주님의 것이다, 라는 마음을 가지라는 겁니다. 식사합시다.

 첨부파일 : 2014겨울수련회-창세기세척하기 제 6강.hwp (39.0K), Down: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