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겨울수련회 제 8강
아브라함 언약은 방주 만들기가 아닙니다. 그러면 제물 바치는 것이구나. 맞습니다. 제물 바치는 것입니다. 동물 제물 말이지요? 아닙니다. 사람을 바치는 것입니다. 양은 사람 죽음을 대신할 수 없고 사람이 사람 죽음을 대신하는 겁니다. 그러면 못난 인간 데려다가 죽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된 사람을 죽여야 됩니다. 그러면 약속된 사람은 어디에서 생깁니까? 약속을 준 하나님이 천사 3명을 보내서 약속된 사람을 보내는데 그분은 죽어야 될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이삭입니다.
아브라함 언약에서 제물을 바칠 때 하나님이 계속 원칙을 유지하는데 이삭을 통해서 유지가 됩니다. 그럼 이삭을 통해서 제물이 유지된다면 이삭이 죽은 후에는 누가 제물이 됩니까? 이삭이 제물이 되었다는데 이삭 이후에 에서나 야곱 중 누구 하나를 잡아야 하지 않습니까? 안 잡습니다. 왜 안 잡습니까? 잡는 것보다 더 힘든 고난을 줍니다.
인간이 왜 죽어야 하는가 하는 것을 일깨우기 위해서는 야곱을 통해서 인간의 죄가 죽어야 마땅한 것을 보여주는 새로운 영역의 지평을 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야곱부터는 이야기가 복잡하게 얽혀있습니다.
여기에서 일관성을 찾아야 하는데, 일관성이 뭐냐 하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을 한 상자에 넣을 때 이것이 언약이라고 했습니다. 노아는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홍수라는 거대한 심판을 예상하고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이게 바로 심판 사건입니다.
이 심판 사건에서 방주를 만들었으면 이야기가 이것으로 끝나야 돼요. “누구든지 방주에 들어오시면 구원 받습니다.” 하지만 방주는 심판과 더불어 날아가 버렸어요. 방주가 남긴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심판을 통과한 정결한 짐승의 피입니다. 누구든지 피를 흘린다든지 그 피를 먹으면 죽이겠다는 무서운 심판의 핵심이 하나 등장합니다.
이 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 뜻이라면 ‘여자의 후손’은 이 법을 따를 것이고 ‘뱀의 후손’은 이 법을 무시하는 쪽으로 등장하겠지요. 무시하는 쪽은 저주를 받습니다. 창세기 9장에 보면 노아 가정이 둘로 나눠집니다. 노아는 3명의 아들(셈, 함, 야벳)이 있었는데 그 뒤의 이야기를 우리가 모른다면 ‘노아가 구원 받았으니까 함께 방주에 들어간 세 아들도 아무 탈 없이 구원 받았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요.
아무 탈이 없으면 방주는 십자가와 연결되지 않아요. 십자가와 연결되려면 뭔가 탈이 나야 됩니다. 현재 있는 것은 노아 가족뿐이고, 노아 가족에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또는 십자가로 구원 받을 두 개의 노선이 갈라져야 해요.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사건을 유발시키는데,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장막에서 벌거벗었지요.
이 때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를 덮었으며”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아비의 하체를 보고 덮었다고 했어요. 처음 아담과 하와는 벗은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죄 짓고 난 후 첫 번째 현상이 벗은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이었어요. 벌써 이건 하나님의 형상이 된 인간이 아니지요. 달라졌어요. 하나님은 본래 그 인간이 아니면 안 받습니다.
‘부끄러워하니까 겸손하구나. 봐주자.’ 이런 것이 없어요. 본래 그 인간이어야 해요. 그것이 안 되면 그 인간을 죽이는 쪽으로 처리하고 그 죽은 인간 속에서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내는 방식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나중에 구원과 관련된 사람은 아비의 벌거벗음을 자기의 벌거벗음과 동일시합니다. ‘만약 내가 아버지처럼 벌거벗었다면 누가 덮어주는 것으로 은혜를 느끼겠다.’라는 마음이지요.
노아는 언약의 축복의 사람입니다. 축복의 사람에 셈과 야벳은 동참해서 같이 축복의 사람으로 있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서 독자적으로 나와서 아비의 벌거벗음을 비웃고 조롱한 자가 있었지요. 함입니다. 이 사람은 덮어줌의 은혜를 모르는 거예요. 누구나 죄를 짓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상품화 되어 있어요. 인간 자체가 노동시장의 상품으로 진열되어 있는데 누가 와서 채택해 가면 상품으로 뽑히고 아니면 뽑히기를 기다려야 해요. 시장입니다. 목사도 목사 시장에서 채용해 가면 목사 역할을 하고 아니면 채용되기를 기다리지요.
이런 상태에서 누가 독자적으로 나서면 죄를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아버지가 받은 것이 은혜입니다.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죄를 안 지었다는 말이 아니고 ‘죄는 지었는데 하나님이 그 죄를 언약의 담요로 덮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알면서도 ‘다시는 죄에 대해 묻지 않겠다.’는 것이 바로 노아가 받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사람을 용서하면 그냥 용서해주지 예수 안 믿는다고 지옥 보내는 것은 뭡니까? 예수 안 믿는 것도 용서해 줘야 진정한 용서잖아요. 그래야 대자대비한 것이지요. 불교가 자비 범위가 훨씬 넓은 것 아닌가요? 불교에서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고 할 만큼 아량이 넓어요.
그런데 기독교는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간다.’고 하니까 이게 무슨 사랑입니까? 안 믿을 수도 있지. 그러니까 구원 문제에 있어서 누가 더 아량이 있는가 하면 불교가 아량이 더 넓은 거예요. 그런데 아까 제가 말했지요. 복음은 인간구원이 아닙니다. 인간은 애초부터 저주 받는 것이 마땅한데 무슨 구원을 거론합니까?
연못 속에서 공룡이 떠오르면 물결이 출렁이는 것처럼 예수님 구원의 여파로 구원 받는 사람이 생깁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의 이름으로 구원 받는 겁니다. 내가 파도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로 구원 받았다는 말은, 반드시 죄가 나와야 되고, 그 죄가 덮여지는 방식의 반복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파도가 전달됩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누가 너희에게 돈을 꾸고자 하면 거저주어라. 맹세하지 말라.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이런 것을 구하지 말라.” 이 모든 말씀은 우리가 하나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아요. 말씀을 받으면 우리 속에 이미 다른 법이 있어서 말씀을 위반하는 메커니즘이 가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건 말릴 수가 없어요. 자연스럽게 그렇게 됩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으면 이미 간음한 것이다.” 물론 우리는 어지간한 여자를 보고는 음욕을 안 품어요. 왜? 인물이 안 되니까. 그런데 미모가 뛰어난 여자를 보면 음욕을 품어요. 이 정도로 우리의 본성은 처음부터 말씀을 어기게 되어 있어요. 이것을 알고 주님은 율법을 주시고 뒤따라 제사법이 주어지지요. 병 주고 약 주고. 이렇게 될 때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그 원리가 사는 거예요. 우리는 주님께 실컷 이용당하고 원리만 빼 가시고, 이용당한 우리도 덩달아 구원 받고.
은혜로 된 그 가치에 대해서, 아버지가 벌거벗어 부끄럽다고 느낄 때 자식들은 은혜 받을 기회가 온 거예요. ‘그래, 내가 아버지라면 나는 용서 받기를 원해. 아버지, 제가 덮어드리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아버지에게 일어나는 축복(덮어 줌)이 저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함과 그 아들 가나안은 노아의 벌거벗음을 조롱하고 비웃었어요. 이게 바로 뱀의 후손입니다. 우리는 여자의 후손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장차 여자로부터 후손이 나타나게 되면 그걸 소급해서 여자의 후손이 사태를 일으켜 온 겁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 복음에 대해서 반대하는 세력과 동반해서 같이 일어나게 됩니다.
장갑 살 때 한 손만 사는 법이 없고, 양말 살 때 한 짝만 사는 법은 없고 같이 사요. 이처럼 여자의 후손이 있는 곳에 반드시 뱀의 후손이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그래야 둘이 싸우니까. 그래서 노아 언약 안에서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다투게 되고 그 결과 한쪽은 축복, 다른 한쪽은 저주입니다.
축복과 저주의 갈림길에 누가 동원되었습니까? 노아의 벌거벗음. 벌거벗음의 원인은 포도주. 이것은 노아 언약 시대의 이야기고 지금은 새언약 시대이기에 다 같이 십자가에 죽읍시다. 십자가 안에 살게 되면 우리가 바로 노아가 되는 겁니다.
노아에게서 일어난 결과가 두 영역의 나눔, 함의 영역과 셈의 영역으로 나눠졌습니다. 함이 간 곳은 아프리카라고 하는데, 사실 아프리카만이 아니고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대부분 땅이 그들의 소유였고, 셈과 야벳의 땅은 얼마 되지 않아요. 인류의 역사를 공부해보면 BC 3,500년경에 그레타 문명으로부터 유럽 문명이 시작돼요. 셈의 문명은 이란을 거쳐 몽골로 해서 알레스카를 넘어 남미까지 퍼졌어요.
문명이 퍼지기 전의 상황이 11장에 나옵니다. 4절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이름을 높이는 탑을 쌓으려 할 때 하나님이 그 탑을 못 쌓게 했어요. 그런데 이것이 탑이 아니라 인간의 탑이에요. 인간의 탑은 결국 국가입니다. 국가가 있는 이유는 힘을 모아서 자기 이름을 하늘까지 닿게 하려는 시도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이런 시도를 용납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수직으로 세우려던 탑이 수평으로 퍼지게 됩니다. 그래서 온 천지에 인간의 이름을 높이는 탑이 생긴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이방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방 나라는 이스라엘이 등장할 때 생기는 개념이지만 사실은 모든 민족이 다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의 이름을 높이는 이방 나라입니다. 탑이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온 세상에 탑이 세워져 있습니다. ‘우리 이름을 내자.’고 하면서 세운 탑이지요. 아브라함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런데 사사기에 보면 못난 인간 하나 불러서 하나님의 일을 시키는 것처럼 아브람을 택하사 아브라함으로 바꾸고 이삭이 태어나게 하면서 뭔가 일을 벌이게 됩니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고 등등의 일을 시키는 이유가 뭔가? 새로운 민족을 만들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 민족은 출애굽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원리, 원칙은 이미 아브라함부터 시작이 되는 겁니다.
노아 언약의 특징이 뭔가? 땅 분배로 저주의 땅과 축복의 땅이 나눠지고 그 결과 제대로 된 민족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만약 예수님과 관련이 된다면, 하나님이 죽는데 그것도 민족의 이름, 국가의 이름, 짐승의 이름으로 죽이는 일은 보다 더 시간이 길어져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류의 역사가 발전하도록 시간을 허락한 겁니다. 짐승에 의해서 죽도록. 이 짐승이 악마인 것이 요한계시록에 나오지요.
창세기 15장 15절을 봅시다.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새로운 민족의 탄생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냥 그들을 구원하면 되지 새로운 민족이 나와야 될 이유가 뭡니까?’라고 물을 수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법을 건집니다. 이 법은 악마가 이 땅에 국가를 남겼기 때문입니다. 악마 개인이 예수님을 죽인 것이 아니고 국가의 이름으로 죽였는데, 왜 국가냐 하면 요한계시록에 보면 어떤 인간도 국가를 벗어나서 살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섬기고 싶어도 국가가 섬기지 못하게 하면 못 섬깁니다. 국가를 거역하면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하나님에 대해서 국가적으로 대적해서 뱀의 후손, 짐승의 정체를 폭로시키는데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17장 9-10절에 보면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노아 언약에서는 분명히 방주 만들기였고, 아브라함의 초창기 언약은 제물 드리기죠. 그런데 여기 또 하나가 추가됩니다. 모든 남자가 다 할례를 받는 것입니다. 그냥 예수 피 믿으면 구원 받는데 할례는 왜 필요합니까? 제가 하나님이라면 “아브라함아, 장차 예수라는 분이 온다. 그가 피를 흘릴 것인데 그 피를 믿으라.” 이렇게 하면 되잖아요.
구태여 할례가 왜 필요합니까? 저는 이 대목이 궁금한데 여러분은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 이유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제물 바치기 위해서 사람을 바치죠. 아브라함이 처음에 3년 된 암소를 바쳤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와서 아들을 준다고 했지요. 이 아들은 약속된 아들이기 때문에 지상의 육신과 관련이 없습니다.
아들을 주실 때 아들을 어떻게 바칩니까? 사람을 바치지요. 사람을 바쳐서 이미 죽었던 이분의 자손이 약속의 자손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약속의 자손이 되려면 육신의 몸에서 약속의 자손까지 이어지는 과정들이 필요해요. 이 과정에 아브라함의 아이디어는 안 되고, 하나님의 아이디어가 개입이 되어야 해요.
그러면 ‘육신을 안고, 육신이 변화되어서 천국 가면 되지 않습니까?’ 라고 하는데 그건 아닙니다. 우리의 육신은 죽으면 계약이 끝나고 새로운 육신을 배급받아 하늘나라에서 살아야 돼요. 하늘나라에 필요한 옷이 따로 있어요. 그러면 그 옷은 어디에서 제공하는가? 예수님께서 우리 육신을 경유해서 올라가면서 얻었던 그 하늘의 형상을 우리가 그대로 밟아서 그 하늘의 형상의 옷을 입어야 예수님과 합류해서 영원히 살 수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무슨 뜻입니까? 지금의 육신을 가지고는 못가요. 왜냐? 이 육신으로 가게 되면 사랑하는 부모는 예수 안 믿어서 지옥에 있을 때, 천국에 가도 마음이 안 편해요. 그렇지 않겠어요? 이게 천국입니까? 그래서 육신은 안 됩니다. 육신은 안 되는데 그 육신을 살리는 방법은 중간에 육신 교체작업, 육신 바꾸기 작업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헌 육신을 새 육신으로 바꾸려면 그 바꿈이 성사될 수 있는 권한자가 바꿔야 해요. 그분이 바로 중보자입니다. 중보자 본인이 헌 육신 속에 와야 해요. 그래서 육신의 죄를 입고 이 땅에 오셨지요. 로마서 8장 3절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죄 있는 육신의 운명대로 가게 하셨어요. 그 끝이 어디냐? 버림 받음입니다.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죽었습니다. 다 끝났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소문이 들립니다. 그리고 시체를 보기 위해 찾아갔던 마리아가 놀랍니다. 돌발사태, 출몰이 일어났어요. 아무 이유 없이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졌을 때, “누가 시체를 가져갔느냐?”고 따져 묻습니다. 예수님의 시체는 없어졌습니다. “부활했잖아요.”라고 하는데, 그 부활하신 몸은 예수님의 예전 몸이 아닙니다.
부활은 새로운 육신을 받은 거예요. 바꿔치기가 된 겁니다. 아버지에 의해서. 어떻게 바꿔치기가 되는가? 바꿔치기가 되기 위해서는 법적인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율법’이라고 합니다. 이미 구약 때 육체 바꿔치기가 가능하도록 ‘율법’에 장치가 되어 있었습니다. 새 두 마리를 취하여 한 마리의 새는 잡고, 그 새의 피를 다른 한 마리 새의 날개에 묻혀 날려 보내는 장차가 이미 레위기, 민수기에 나옵니다.
하나가 대신 죽으면 다른 하나를 살려주는 양해각서가 이미 율법에 다 있어요. 이 일에 종사했던 제사장은 지킬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 지심으로 다 이루었기에 예수님 안에서는 이 작업이 지금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들어오기만 해라. 새 몸으로 바꿔 줄게.’ 이렇게 되는 겁니다. 로마서 6장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산다.”
예수님이 문둥병 환자에게 안수하니까 깨끗한 몸이 되었지요. “야, 깨끗한 몸이 되었다.” “이 몸은 옛날 그 몸이 아니다.” 새롭게 된 몸은 율법의 완성인 십자가가 가미된 몸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일을 하신 것은 십자가의 온전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미리 보여주신 거예요. 장차 십자가로 나타날 효과가 어떤 것인지를 미리 보여주신 거란 말이지요.
소경을 보게 하시고, 절름발이를 걷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고 이게 뭐냐 하면, 십자가로 완성될 때만 이뤄질 효과인 거예요. 십자가 이후에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이 손수건을 흔들어 죽은 자를 살리고, 병든 자가 낫고, 귀신이 나가고 했어요. 그 모든 현장에 누가 있었습니까? 보이지 않는 분이 함께 계셨던 거예요. 그래서 사도들은 늘 하는 말이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셨다.”고 합니다.
김 권사가 전도해서 구원 받은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직접 믿음을 주셨기에 된 것이지 김 권사가 한 것이 아닙니다. ‘목사가 교육시키고 훈련을 받아서 구원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구원 받았습니다.’ 라는 고백을 해야 진짜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 아버지가 목사이기에 10년 동안 기도해서 구원 받은 것이 아닙니다. 목사의 10년 기도보다 예수님의 한 번 기도가 효과가 더 있어요.
그러한 준비 작업이 ‘할례’라는 겁니다. 할례는 육신을 끊는 거예요. 다리 공사를 할 때 강물이 흐리기 때문에 공사를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물줄기를 다른 곳으로 돌려놓고 물이 없는 땅에 다리를 세운 후에 다시 물이 원래대로 흐르도록 합니다. 이처럼 강이 잠시 다른 곳으로 흐르게 하는 댐을 만들어요. 이게 율법이고, 율법이 완성되면 원상태로 흐르게 되는 겁니다.
육신에 할례를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할례 행하면 구원 받습니까? 할례를 하든 안 하든 구원과는 상관이 없어요. 그러면 왜 할례가 있습니까? 그들은 그렇게 사용된 거예요. 준비단계로 보면 됩니다. 집에 잔치를 하는데 음식을 준비합니다. 음식을 준비하면서 맛이 있으니까 도우미 아줌마가 자꾸 먹어요. 주인이 “자꾸 먹지 마세요. 손님 대접하려고 준비하는데 왜 자꾸 먹습니까?” “맛보려고 하나 먹었습니다.” “맛보는 것을 그렇게 많이 먹습니까?” 이러면 안 되지요.
맛보기는 맛보는 것으로 끝나야지 식사용으로 하면 안 되지요. 준비단계에서 할례를 행하면서 ‘육신을 끊어야 할 정도로 나는 죄인이구나.’ 이렇게 믿어야지, ‘나 할례 행했다. 나 구원 받았다.’ 이러면 안 됩니다. 육신의 할례는 할례가 아닙니다.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할례라고 로마서 3장에서 말하고 있어요.
그러면 마음에 할례 받으면 구원 받습니까, 예수 믿으면 구원 받습니까? 예수 믿어서 구원을 받는다면 ‘여러분, 마음의 할례를 받아도 소용없습니다.’라는 말을 해야 하는데, 3장에서는 ‘마음에 할례를 받아야 참 이스라엘이다.’라고 해놓고, 10장에서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는데,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됩니까?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고 해놓고, 에베소서에는 ‘새 형상을 본받아라.’고 하는데, 새 형상을 본받아야 구원 받습니까, 예수 믿어야 구원 받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일단 예수 믿고 난 뒤에 추가적으로 새 형상을 본받으면 된다.’고 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면 예수 믿고 난 뒤에 추가로 새 형상을 본받지 않으면 구원 못 받습니까?’ 이렇게 물으면 ‘구원 받는다고 하지도 못하고, 구원 못 받는다고 하기도 좀 그렇고.
구원 못 받는다고 하면, 개혁주의는 행함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기에 교리에 어긋나고, 구원 받는다고 하려니까 사도 바울이 그런 말을 왜 했는지 납득이 안 되고. 그래서 나온 답이 ‘성숙된 신자는 믿고 행하시고, 초신자는 믿는 것만 하시면 됩니다.’ 뭐 이런 주장을 해요. 단계론이 등장하는 거지요.
육신의 할례가 소용없다는 자체가 마음의 할례입니다. 이게 정답이에요. 할례를 해놓고 ‘아이고, 아무짝에도 소용없다.’ 왜냐? 실체가 오게 되면 모형을 모형이라고 인정을 해야 됩니다. 내가 할례 받고 하는 이 모든 것이 실체 앞에서는 의미 없는 것이라고 여길 때 그 사람은 이미 마음의 할례를 받은 거예요.
진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이미 마음의 할례를 받았어요. ‘당신 속에 하나님의 법이 들어 있다.’ 즉 십자가 새언약이 들어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구약에서 할례를 행하라고 하신 것은 그것을 행해야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할례를 시켜서 하나님의 새언약과 연관시키도록 한 것입니다.
14절을 보겠습니다.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게 왜 문제가 되는가 하면, 이 말씀을 보는 순간 직감적으로 사람들은 어떤 것을 그리워합니까? 할례 받은 사람의 모임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언약의 백성이라는 생각을 갖겠지요. 이게 문제입니다. 할례를 받으라고 해서 받았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누가 뭐라고 해도 하나님의 백성이야.’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생각을 했고, 이런 생각 때문에 그들은 망했습니다.
이방인을 향해 ‘너희들은 할례 받지 않았지? 우린 할례 받은 민족이야. 그러기에 우리는 승리하게 되어 있어.’ 이것을 실습에 옮겨봅시다. 사울과 이스라엘은 전부 할례를 받았지요. 골리앗 부대는 할례가 없습니다. 그러면 전쟁에서 누가 이겨야 합니까? 당연히 할례 받은 이스라엘이 이겨야지요. 그런데 사울과 그 군대는 골리앗 군대 앞에 벌벌 떨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할례 받은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무 소용없어요.
이방나라와의 전쟁에서 언약궤만 있으면 승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언약궤 들고 전쟁에 나갔다가 언약궤 빼앗기고 제사장이었던 홉니와 비느하스는 전쟁에서 죽었습니다. 언약궤 소용없네요? 그러면 그들은 그동안 언약궤를 가지고 무엇을 기대했습니까? 언약궤가 있으면 구원 받는다는 생각은 완전한 착각이었지요.
이런 잘못된 생각에 빠지도록 누가 작용했습니까? 하나님이 하셨어요. 이 말이 무슨 뜻인가 하면, 지금 아브라함 자손은 전부 하나지요. 이 하나에서 둘을 끄집어내려고 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은 그 집단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것이 아니고 둘로 나누기 위해 말씀을 주신 거예요.
하나가 둘이 되면 반으로 나눠지는 것이 아니고 각자가 하나라고 주장하게 됩니다. 나눠진 것에서 또 둘로 갈라지고. 여기서 나오는 개념이 ‘남은 자’입니다. 쪼개진 것을 또 쪼개고, 또 쪼개고 결국 마지막으로 남은 자는 예수님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만 남은 것이 하나님 일의 실패입니까? 아닙니다. 여럿이 필요 없어요. 한 분만 있으면 하늘나라 이루는데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왜냐? 한 분이 자기 구원할 백성을 찾아오시면 되니까요.
성령을 통해서 ‘너, 걱정하지 마. 이미 너의 죄 값은 내가 다 치렀어.’ 이렇게 찾아오시면 되는 거예요. 이것이 사도 바울이 전했던 복음입니다. ‘다른 예수는 없다.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그분이 십자가 짐으로 죄인인 우리는 하나님의 의가 되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다수가 하나로 모이고, 그 하나에서 다수를 모으는 이 작업을 위해서 지금 역사는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 출발하는 다수의 특징이 뭔가 하면 모두가 예수님을 경유하게 되어 있어요.
그렇다면 여기 할례를 행했어요. 할례 이전에 아브라함은 제물을 드렸어요. 그러면 할례 받은 사람들이 ‘할례 받았다’고 하면 안 되고, 하나님의 제사를 경유해서 할례를 보아야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경유하는 노선이 자꾸 달라져요. 새삼 죄가 들어오게 되면 경유하는 노선도 그때그때 달라져요. 왜냐? 안 달라지면 형식적인 반복만 됩니다. “목사님 시킨 대로 했는데 안 되네.” 이렇게 나옵니다. 시킨 대로 한 것이 자기 의가 됩니다. 진짜 시킨 대로 하게 되면 ‘시킨 대로 한 것 때문에 내가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구원하셨다.’ 이렇게 나와야지요.
‘시킨 대로 했는데 왜 효과가 없습니까?’ 이렇게 나오면, 이것은 자기 행함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법을 줄 때 반드시 사람들은 그것을 모방하고 그 모방한 것을 자기 소유화함으로 똑같은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남 따라 신앙생활 하지 마세요. 자신의 개성대로 사세요. 무소의 뿔처럼 자기의 길을 가세요. 단 조건이 있습니다. 반드시 예수님을 경유해서 내가 죄인이란 사실을 늘 느끼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주차 문제로 다퉜습니까? 알고 보니 예수 믿는 사람이에요. 그러면 서로 죄인인 것을 시인하고 주차는 양보하지 마세요. 갑자기 양보하면 상대방은 죄인이 되고 나는 선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면 상대방에게 실례가 됩니다. 왜 양보를 못하는가? 양보할 권리가 우리에게 없기 때문이에요.
나에게 “저도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라고 하면서 은근히 양보해 주기를 기대했던 그 사람에게 실망을 줌으로 말미암아 그에게 다시 한 번 “야, 이웃도 믿을 만한 것이 못되네. 오직 예수님만 믿어야지.” 라고 더욱 믿음을 곤고히 하는 효과를 우리가 제공할 수 있어요. 사람을 믿다가 낙심하는 그런 기회를 줍시다.
우리는 이게 안 됩니다. ‘예수, 십자가’ 말하면서 그것이 모아져서 나로 하여금 점검에 들어갑니다. ‘질 좋은 나’를 은근히 기대한다는 자체가 겸손을 가장한 위선입니다. ‘혹시 양보하면 가정에 어려움이 해소될까? 남편 이번에 승진할 수 있을까?’ 이것을 안 노린다고 말 할 수가 없어요.
이 육신이 바뀌어져야 해요. 바꾸는 방법은 예수님 십자가를 경유해서 ‘나는 죽어야 마땅한 인간인데 주님 십자가 증거하라고 아직도 이 죄인이 살아있군요.’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옛날이나 지금이나 항상 제물을 경유해야 되는 거예요. 이 제물을 반복해서 고정화 시키는 장소를 ‘성전’이라고 하지요. 그 전에 있었던 것은 ‘성막’이고.
이 성막과 성전을 지탱하기 위해서 뽑혀 나온 사람들이 제사장이고, 이들의 생계를 위해 십일조를 내야했습니다.
21절에 보면 “내 언약은 내가 명년 이 기한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고 해서, 이렇게 새로운 제물로 죽을 인간이 하나님 약속에 의해서 제공됩니다. 바로 우리가 이삭을 함유한, 예수님을 함유한 그런 사람으로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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