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겨울수련회-창세기세척하기 제 5강
이번 시간이 제일 중요한 대목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이번 시간 지나서 주무시는 것을 저는 이해합니다. 교재 4페이지에 “화해란 행동한 것을 따지겠다는 것이 아니라 최종적 평가로써 모든 비판과 정죄를 종식시키겠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나오는 단어가 중요해요. “매개자의 자격으로 취하는 조치다.” 중보자가 할 수 있는 게 뭐냐 하면, 일체 묻지를 않겠다고 하는 거예요. 중보자가 “네가 어떤 행동을 했든지 간에 일체 죄를 묻지 않겠다.”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로마서 8장 1절, 매개자로서 일체의 비판과 정죄를 종식시키겠다는 그 조치는 인간이 선악과 따먹음으로서 비로소 개시가 돼요.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를 분명히 해주는 겁니다. 인간이 아무리 애를 써도 매개자에 관여할 수 없다. 매개자에 영향을 줄 수 없다. “주님, 이렇게 했으면 좋겠습니다.”하고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권한이 아예 박탈되어 있는 거예요. “이렇게 해서 저 사람을 구원해 주세요.”라고 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중보기도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어요. 중보기도는 중보자만 하는 것이지 인간은 할 수가 없어요.
중보기도가 유행한 것은 천주교에서 연옥 설로 패자부활전을 만들어놓으니까 그 대용품으로 기독교에서 만든 거예요. “혹시 여러분의 남편이 교회에 안 나오십니까? 그러면 여러분의 기도는 응답되니 믿음이 있다는 것을 실적으로 보이시오.”라고 해서 만든 거예요. 이것은 기본적으로 잘못된 거예요. 매개자라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사이만 관여하지 다른 사람은 관여를 하면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5페이지에 보면 “금지의 등장은 인간으로 하여금 욕망을 자극하는 계기가 된다. ‘건널 수 없다’는 말인지 아니면 ‘건널 수는 있어도 그곳에 들어갈 수는 없다.’는 것인지”가 모호하게 돼요.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것은 선악과 너머의 그 경계를 넘어오지 말라는 것이거든요. 선악과를 따먹을 수 없다는 말인지 따먹었다 할지라도 따먹어서 생기는 이 영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인지가 분명치가 않습니다. 그래서 일단 따먹었어요. 따먹으니까 도로 튕겨 나온 것이 아니고 어떤 현상이 벌어졌느냐 하면, 그동안 선악과, 생명나무, 뱀, 인간들, 각자 자기 자리에 위치해 있었는데 뭔가 뇌관을 건드려 버린 셈이 되었어요. 선악과를 따먹으니 새로운 요소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배치가 재구성이 되는 겁니다.
미국의 풋볼 게임에서 응원단이 있잖아요. 응원단이 신호 하나에 배치가 바뀌곤 하지요. 저도 가본일이 없는데 그 응원대형이 갑자기 바뀌는 것처럼 새로운 요소가 가미되면 모든 것이 재편성이 돼버려요. 선악과를 건드리면 하나님만이 독점하고 있는 영역에 참여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지만 이것을 건드리는 순간 그동안 배치되어 있던 것이 다시 재조립이 되면서 멀쩡하던 생명나무가 이제는 못 따먹는 나무로 전락하고 말았어요.
그것은 뭘 의미하느냐 하면, 생명나무와 선악과는 인간이 모르는 채로 어떤 연관이 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따먹어도 돼, 이것은 따먹지 마, 라는 것이 매개자 예수님을 중심으로 해서 연결되어 있었는데 그 매개자의 영역에 인간은 들어갈 수 없는 겁니다. 이번 교재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이 나와요. 4페이지 밑에서 두 번째 줄에 “선악과 따먹는 것을 금지하신다. 이로써 인간은…….” 제일 어려운 대목이니 천천히 읽어보겠습니다. “……이로써 인간은 주변에 보이는 현실이 자신을 위한 현실이 아니라 너무 일찍 오신 메시아나 너무 늦게 오신 메시아를 위한 장(場)임을 알리고자 하신다. 이게 제일 어려운 문장이에요.
너무 일찍 오신 메시아나 너무 늦게 오신 메시아가 뭔지 설명을 그 뒤에 해 놓았습니다. 설명해도 모르게 되어 있어요. 설명이 뭐냐, “심판의 하나님으로 이해되는 인간에게는 메시아께서 너무 일찍 일하시는 셈이 되고 구원을 고대하는 처지에서 볼 때에 메시아는 너무 늦게 일하시는 바가 되게 하신다.” 제가 첫째, 둘째, 셋째, 넷째 시간에 계속 한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는 인정하지 않고 원래 있다는 것은 예수님 만에 해당되고 모든 것은 예수님의 펼쳐짐, 예수님의 자기전개라는 말이지요. 인간은 자기존재가 어느 위치에 있는가, 선악과 따먹기 전에는 자기자리가 있었는데 선악과라는 뇌관을 건드림으로 말미암아 재배치된 상태에서 인간은 강제퇴거 당하게 되었어요.
“심판의 하나님으로 이해되는 인간에게는 메시아가 너무 일찍 일하시는 셈이 되고.” 이 말은 이미 심판이 시작되었다는 거예요. 이미 심판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심판하시는 사건으로서 심판 속에서 재조정된 구원 외에는 다른 구원은 없습니다. 심판이 전제로 되어 있는 구원이지 “너는 심판받을래, 구원받을래? 골라잡아라.” 이런 혜택은 이제는 없어요.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선악과 또 따먹을 거야, 안 따먹을 거야? 따먹으면 혼난다.” 이런 기회는 없어요. 우리 같으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어허, 주의하라고 했지? 앞으로는 조심해라. 사람은 한 번쯤 실수할 수도 있는 문제이니 다음번에는 건들지 말거라. 내가 철조망도 쳐놓으마.” 이렇게 되어야 하는데 그게 아니고 마치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해서 너무 탐스러우니 “따먹고 싶지? 따먹고 싶지?” 막 외치는 것 같아요.
그래서 건드렸더니 갑자기 자기 위치의 판이 막 바뀌면서 판이 이상하게 바뀌고 보니까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는 하나님처럼 되는 줄 알았더니 하나님처럼 되기는커녕 생명나무에서 완전히 퇴거조치 되고 말았어요. 두 번 다시 생명나무는 못 따먹는 나무로 굳혀져 있고 생명나무는 불 검 가지고 천사들이 지키는 상황으로 전환되고 말았어요. 자, 이럴 때 구원은 물 건너 갔고 우리에게 닥쳐오는 것은 심판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심판의 시작이 새로운 시간을 만들어냅니다. 심판에서 시작되는 시간이 이어져서 그것이 바로 구원에 도달되게 하시는데 그 구원은 인간구원이 아니고 선악과를 애초에 심었던 그 취지로 인하여 예수님이 주가 되시는 그 코스에 합당한 시간이 적용되는 겁니다.
인간 구원은 물 건너갔어요. 이것은 생각하지 마세요. 인간 구원은 어디로 갔는가? 선악과와 더불어서 새로운 시간이 주어지게 됩니다. 여기서 “지금 에덴동산이 어디 있느냐?” 하는 겁니다. 에덴동산 찾아서 우르지방을 뒤지는 고고학자들이 있어요. 메소포타미아나 티그리스강 유프라테스강 근처에 있을 것이라고 창세기 2장을 참고해서 찾는 거예요. 에덴동산이 어디 있느냐에 대한 답변은 그 다음에 계속되고 있는, 재배치된 에덴동산의 구조를 따라가 봐야 비로소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3장을 통해서 에덴동산이 어디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제가 물론 정답을 말씀 드립니다. 그런데 반드시 어떤 절차를 밟아야 되니까 기다려보세요. 그냥 해서는 이해될 수가 없습니다. 창세기 3장 20절에 보면,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하와’의 뜻이 뭐냐? 옛날 성경책에 보면 밑에 1)이라고 번호 매겨놓고 ‘생명’이라고 되어 있지요. 하와는 생명입니다. 그러면 생명이 몇 가지냐 하면, 생명나무도 생명이고 여기 또 생명이 있어요.
생명나무 가는 길을 절단시켜 놓고 왜 또 생명은 떴냐는 말이지요. 생명을 안줄 것 같이 하면서도 여자의 이름을 생명이라고 간주했을 때 생명이라는 것이 인간의 범죄 안에서 새롭게 만들어진다면 생명나무 가는 길을 차단한 취지는 여기서 사라지게 돼요. “생명나무 따먹지 마! 영생하지 마!”라고 만들어놓고 “그럴게요.” 하고 있는데 남자들은 이마에 땀 흘리다가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고 여자는 갑자기 이름을 생명이라고 지었다는 말이지요. 여기서 난데없이 왜 생명이 나오는가를 설명해 줘야 에덴동산이 어디 있는가가 풀리게 됩니다.
제가 지난시간에 남자와 여자의 차이성을 언급할 때 이런 단어를 언급했어요. 남자는 있는 것 가운데서 골라서 추려내지만 여자는 자기의 존재를 항상 ‘출몰’시키는데 원인 없이 결과만 생기는 이것이 출몰이지요.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인데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이미 남자와 여자가 서로 핑계대고 탓을 하고 한 몸이 될 수가 없습니다. 될 수 없다면 범죄하고 난 뒤의 남자와 여자의 공통점은 누가 마련해 주는가? 하나님이 마련해 줍니다. 어떻게 하는가? 팬티 색깔이 같아요. 가죽옷입니다. 단지 공통점이 그것밖에는 없습니다.
가죽옷을 입혔는데 공통점이 그것밖에는 없습니다. 그런 공통점 같으면 남자와 여자 자체적으로는 찾을 수가 없고요, 하나님께서 이미 에덴동산에서 생명나무가 없는 곳으로 추방시켜 놓고 여기에 무슨 작업을 하는 거예요. 그 작업을 하는데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모든 성경말씀은 인간을 위함이 아니고 매개자, 또는 중보자인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라고 했지요. 선악과와 생명나무가 연계되어 있을 때 그것은 매개자, 예수님이 누구신가와 관련되어서 그것이 재배치가 되고 재구성이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선악과가 사라지느냐 그 문제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선악과 따먹은 상태에 하나님께서 뭘 집어넣느냐 하면, 시간을 집어넣어 버려요. 교재 3페이지 제일 위에 “모든 사람은 이 잃어버린 빛과 생명을 시간을 통해서 되찾고자”한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당장 헉헉거리면서 죽어야 되는데 안 죽는 거예요. 하나님이 죽여줘야 죽는데 죽는다고 해 놓고 죽지는 않았다는 말이죠. 그러면 죽음의 실체는? 선악과 따먹으면 죽는다는 그 말씀은 취소될 수는 없고 그 말씀대로 확실하게 드러나게 되어 있는 것이라면 그 죽는다는 것의 실체는 시간 속으로 점점 지연되는 거예요.
선악과는 따먹은 상태에서 최종 죽음에 이르는 그 만큼의 시간은 유지되면서 흘러가고 있는 거예요. 이 시간은 선악과 따먹은 죄로 흘러가는 시간입니다. 이 시간에 선악과와 생명나무가 연계되어 있는 중보자가 이 속에 투입을 하는데 투입하는 그 방식이 여자의 후손이에요. 여자의 후손이라는 이 개념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성경 한 구절을 찾아야 합니다. “목사님, 여자는 마리아가 아닙니까?” 하는데 마리아는 아니거든요. 마리아가 아니라면 여자는 누구입니까, 할 때 그 점에 대해서 이사야 54장 1절에 보면,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할찌어다 구로치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찌어다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잉태치 못하고 생산치 못한 여자의 노래, “잉태치 못한 여자여, 너는 기뻐하라.” 그 말입니다. 왜?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이 이사야 54장이 시간의 확대, 시간이 흘러감,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했는데 그 죽음은 계속 유보돼요. 그 죽음이 목숨 끊어지는 것은 아니고 뭔가 아직도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보니 선악과를 따먹은 징벌이 시간 따라 계속 지연되고 있는 거예요. 최종판결은 아직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선악과 따먹으면 죽으리라고 하면서 심판할 때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보내신 중보자가 그 선악과 따먹은 것에 대해서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그 시간 속에 뛰어들거든요. 시간 속에 뛰어드는데 그 심판의 형식은 뭐냐 하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우는 것으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을 치는 것으로 선악과 따먹은 것에 대한 심판으로 마감하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여자의 후손은 누구십니까, 하는 것이 궁금하잖아요.
굉장히 궁금한데 여자라 하는 것은 창세기 말고 계속 시간이 흘러서 이사야시대에 와서 나타난 것은 ‘잉태치 못한 여인, 남편 없이 홀로 사는 여인’입니다. 남편 없는 여인이라면 거기에 대한 반대말이 등장함으로써 이 의미가 추가 됩니다. 반대말이 뭡니까? 남편 있는 여인이죠. 남편 있는 여인은 여인이 아닌 거죠. 남편 있는 여인은 여인이 아니에요. 그냥 남자 있는 여자지 성경에서 말하는 여인은 아니라는 말이지요. 잉태치 못하는데 무슨 자식이 나옵니까? 잉태치 못하는데 어떻게 자식이 많습니까?
여기서 시간의 역전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지금 시간은 현재에서 미래로 흘러가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선악과 따먹고는 그 때가 오리라, 하는 식입니다. 그런데 여자의 후손에 대한 개념추구에 있어서 여자의 후손의 정체에 대해서는 미래에서 미리 앞당겨서 암시를 주고 힌트를 주는 거예요. “남편 없어? 그러면 그 여인이야. 잉태하지 못해? 그러면 그 여인이야.” 그렇게 되는 거예요. 잉태치 못한, 자식이 없는 여자가 자식이 많다고 하니까 자식이 많다면 그 자식들은 다 어디서 나온 겁니까?
그것은 뭔가 일이 마무리 되었을 때 비로소 등장하는 그 자식들을 앞당겨서 입혀주면서 말하는 거예요. 현재는 자식이 없지만 나중에 언약이 마무리되면 너는 결국 많은 자식을 가진 여인이 될 것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여자의 후손이 누구냐 할 때는 우리는 생각하기를 여자가 있고 그 다음에 후손이 있는 것으로 알잖아요. 다시 말해서 잉태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후손 중에서 어떤 자식이 진짜 여자의 후손인가, 이렇게 하고 싶은데 하나님은 구원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잉태가 있는 거예요.
구원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잉태가 있게 하는 거예요. 상처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존재가 있는 것처럼 구원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그 구원을 보여주는 잉태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쪽의 자연적인 시간에서는 일체 잉태치 못하게 만드는 겁니다. 바람의 자식이 누구냐 하면, 성도를 말합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성령으로 나야 하늘나라 받잖아요. “그러면 그 성령은 무엇입니까?”라고 니고데모가 물었을 때 예수님 답변이 “너는 왜 그걸 모르는가?” 바람이 마음대로 불되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잖아요. 기존의 자식이 있다고 자부하는 여인에 대해서 진짜 구원받은 여인은 어떤 여인인가 하면, 분명히 우리는 자식이 있는데 자식이 없어요. 자식이 없는 그 여인에게 구원이 주어지는 겁니다.
이것은 기존에 과거 현재 미래로 흘러가는 시간대에 놓여있는 사람은 어떤 경우라도 메시아의 시간대에 관여하지 못하고 그 단절성은 유지된다는 겁니다. 생명나무 가는 길이 차단되었으면 그 차단성이 그대로 여자의 후손의 일함 속에서 당당하게 살아 있어요.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알지 못하”는 그 구원을 막는 차단성은 여전히 살아 있다니까요? 그래서 저는 그걸 출몰이라고 합니다. 그냥 등장하는 거예요. 원인은 없는데 그냥 등장해 버리는 거예요.
사도행전 8장에 보면 주의 천사가 빌립에게 갑자기 이런 지시를 내려요. “네가 예루살렘에게 가사지역으로 가라.” 가사지역은 지금의 팔레스타인들의 가자지구입니다. 그래서 갔어요. 거기 가서 누굴 만난다는 언질도 없었습니다. “그 다리는 5초 후에 폭파된다.” 해서 긴박한 음악이 흐르면서 갑자기 다리가 폭파되는 식의 미션 임파서블이죠. 그래서 갔는데 맞은편에서 이디오피아 내시가 오고 있었다는 말이지요. ‘전하’지요. 원 제국에 잡혀 있는 고려의 왕 전하가 왔어요. 이디오피아의 고관이죠. 빌립이 이 고관을 만나서 이사야 53장을 펴놓고 메시아중심으로 해석을 해 줬습니다.
그 뒤에 사도행전 8장 39절에 보면, 거기 물이 있어서 물세례를 주고 난 뒤에 그냥 있는데 갑자기 성령이 와서 사람을 공중 부양하듯이 데려가 버렸어요. 이것이 출몰이에요. 이게 사건입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베드로는 고넬료가 누군지도 몰라요. 잠을 자는데 꿈속에 펄럭거리는 보자기가 내려와서 “먹어라.” “더러운 것은 못 먹습니다.” “먹어라” “율법에 어긋나서 못 먹습니다.” 이런 식으로 세 번 왔다 갔다 하다가 사라지고 난 뒤에 딩동, 하고 고넬료가 보낸 사람을 만난 거예요. 이렇게 만났을 때 도대체 전도라는 것이 누가 하느냐는 말이지요.
베드로가 고넬료를 전도하게 해달라고 사전에 중보기도 한 적도 없는데 과연 이걸 누가 하느냐는 말이지요. 누가 할 거예요? 그 드라마 제가 할게요, 하고 나댈까요? 이 드라마를 누가 찍어요? 기존의 모든 잉태된 존재를 부정할 수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결론은 뭐냐 하면, ‘여자의 후손’에서 여자가 누구냐고 묻지 마세요. 후손이 여자를 규정하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이 있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자손인 예수님이 등장해서 아브라함과 연계시키면 아브라함 자손은 오직 예수님뿐이라는 것이 드러나는 겁니다.
여자의 후손에서 여자가 누구냐 하는 것은 그 후손이 와서 규정하는 거예요. “자꾸 뜸들이지 말고 여자가 누구란 말입니까? 지금 여자가 누구라고는 하지도 않고 약 올리는 겁니까? 그래서 여자가 누구란 말입니까?” 여자는 그리스도 몸이에요. 그리스도 신부. 남자도 있잖아요. 여기서 남자와 여자의 의미는 뭐냐, 이 세상에 남편이 없는, 다시 말해서 잉태치 못한 자의 총괄된 규정을 말합니다. 잉태치 못한 자, 붕 떠서 있는 자, 원인을 찾을 수 없는 자, 오늘날 교회에서 예수 믿게 한다고 사람들 모아서 양육하고 훈련시킨다고 하는데 그런 훈련 시켜도 구원 안돼요. 구원 안 생겨요.
그냥 출몰하는 거예요. 그럴 때 그 사람은 잉태치 못한 여자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여자를 구원하는 것은 그 여자의 후손이 구원하는 거예요. 어떻게? 바람같이 왔다가 바람같이 사라지는. “당신은 어떻게 구원되었습니까?” 하면 할 말이 없어요. 다른 분을 이야기하지요.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았습니다.” 그렇게 답변하지요. “그것은 아는데 예수님이 누굴 보냈습니까?” “몰라요, 보낸 자가 있어봤자 그 보낸 자도 구원과 관계없고 하여튼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았습니다.” “하여튼, 이라고만 하지 말고 상세하게,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원인이 없는데 어떻게 원인을 말합니까? 그 엮이게 된 원인은 선악과에 대한 심판에 관한 겁니다. 여자의 후손,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라고 할 때, 우리는 “여자가 누굽니까, 후손이 누굽니까, 뱀이 누굽니까, 누가 뱀의 후손입니까?” 이 네 가지 질문을 하고 싶은 거예요. 여기에 대한 답변이 뭐냐 하면, 예수님만 떠버리면 다 해석돼요. 이 여자가 잉태치 못하는 거지요? 그러면 이 뱀은 누구입니까? 모든 인간 중에 잉태치 못한 여자는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뱀이지요. “모든 인간은 좌우간 부모로부터 태어났습니다.” 이걸 주장하는 것이 뱀이라니까요.
“부모로부터 태어났기에 부모로부터 교육 잘 받으면 구원받습니다.”라고 주장하는 그 모든 자들이 다 뱀이고 뱀의 후손들이라니까요? 왜, 그 사람들은 뭘 인정하지 않기에? 잉태치 않는 자만이 구원받는다는 그 복음을 거역하고 싶은 역할을 하기 위해서 마귀는 임시적으로 시급 오 만원 받고 주님의 약속에 참여하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악마도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중이에요. 잉태 안 된 인간은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언약의역사라는 것은 출몰의 역사, 시간이 역전되는 것, 에덴동산은 어디 있는가, 시간이 역전되는 그 안에 에덴동산이 있어요.
이라크에 있는 것이 아니고. 왜냐, 그래야 절단이 되니까요. 지상에 어떤 방법으로도 구원될 수 없음을 이야기하는, 그 단절이 있는 그곳에 바로 에덴동산이 있는 거예요. 에덴동산은 지금도 안 죽었어요. 지금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시간, 과거에서 현재에서 미래로, 장차 어떻게 될 것이다, 라는 그 장차를 꺾어버리고 지금입니다, 지금, 지금 이미 구원되었음을 소개하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역할이고 할 일이에요. 언약을 이야기하는데 그 언약이라는 것은 시간의 역전이 된 사례들을 보여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이미 심판이 시작되었고 심판으로 이어진 시간 안에서만 구원이 나온다는 사실을 어떤 예를 들어서 보여준 그 사건이 언약사건입니다. 이미 구원이 시작되었고. 베드로전서에 보면 노아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전도했다는 내용이 있어요. 에녹도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예언했다는 내용이 유다서에 있습니다. 이미 그 시대에 벌써 심판이 시작된 거예요.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은 그 자체가 심판이에요. 심판은 일찍 오신 메시아라니까요? 이미 심판이 되었어요. 그리고 일찍 오신 메시아에 대해서 어떤 인간도 거기에 자력으로 참여 될 수가 없습니다.
왜, 그것은 중보자, 매개자만의 고유한 시간이기에. 그 시간 안에 에덴동산이 들어 있다는 말이지요. 그것을 폭탄투하 하듯이 순간순간 터뜨리면 사건이 되고 그 사건이 일어난 현장을 언약사건이라고 하는 겁니다. 언약 사건을 지금부터 공부하는 것이 창세기의 흐름인데요, 그 언약사건을 어떻게 잘 전할까 싶어서 제가 생각한 것이 뭐냐 하면, <사운드오브뮤직>에 나오는 도레미송이라는 것이 있어요. 그 도레미송에 보게 되면 마리아선생님이 커튼 찢어서 애들한테 옷 만들어 입히고 짤즈부르크 뒷동산에서 노래하는 장면이 나오거든요.
애들이 노래를 배운 적이 없어서 노래를 가르치는데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의 음표만 알아도 모든 노래를 만들 수 있다는 거예요. “When you know the notes to sing You can sing most anything.” 하나의 음표만 알아도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다. 그 노래를 부르면서 도는 암컷 사슴이 도, 레는 쏟아지는 햇빛을 레, 스스로 자기를 부를 때의 호칭이 미, 파, 끝까지 멀리 달려가는 것, 솔, 꿰매는 실을 가지고 솔, 라, 솔 다음의 음계를 라, 시(티), 시(티)라는 것은 빵을 먹을 때 같이 먹는 차, 다시 돌아오면서 도~!
이렇게 할 때 모세언약 다음이 아브라함 언약이 아니고 저변에 깔려요. 도~, 도는 계속 가는 거예요. 레~, 계속 또 가고, 애들이 일곱 명이나 되는데 그 애들 전체가 한 음계씩 맡아서 같이 층을 이루면서 죽 같이 가는 거예요. 같이 가면서 메시아만 알고 있는 심판 속에서의 구원의 사건이 미래에서 그 안에 사건으로 담기는 거예요. 인간으로서는 포착되지 않고 언약으로만 터져버린 사건이 죽 가는 거예요. 끝에 가서 마지막 십자가사건에 도~! 마리아가 마지막에 삼단 고음을 내면서 갈 때 백작부인이 나타나는 장면이 있어요.
언약에서 처음에 나오는 그 창세기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점으로 깔려버려요. 도~, 노아언약이라 하면 도~!, 은혜의 공간 확보, 레~!, 아브라함 혈통확인, 미~!, 모세의 은혜로 인한 민족혈통, 파~1, 다윗에 의한 은혜의 왕 확보, 솔~!, 새로운 성령의 연관성, 왕과 백성의 연관성에 관한 성령확보에 대한 예언, 다 생략하고 삼단 고음으로 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이게 새 언약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언약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언약을 알아도 다 응용이 돼요. 솔도라파미레도~! 솔도라시도레도~!
이래서 커튼 옷 입은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 겁니다. 하나의 언약만 알면 응용이 가능한 거예요. 그러니까 그 언약이 터지는 중심체가 뭐냐, 바로 우리의 육신입니다. 바로 우리의 육신을 통해서 이쪽에는 언약이 오고 저쪽에는 기존의 우리 육신이 기다리고 있는, 미래의 구원을 기다리는 우리의 흘러가는 일상적이고 상식적인 시간이 같이 만나는 겁니다. 그래서 그 만남의 자리가 우리 육신의 장소입니다. 나는 날마다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의 사건, 십자가사건이 되풀이해서 터져버릴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장소가 되는 겁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을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해서 에녹부터 시작해서 예수님까지 계속 이어져 갑니다. 도레미의 음계로서 죽 이어가면서 갈수록 상당히 상황이 난폭해져요. 왜냐하면 마귀의 자기정체가 들통 날 때가 되었기 때문에. 기어이 육신을 죽이려고 들지요. 사람은 있음 자체를 고수하려는, 있음에서 나오는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끝까지 고수하고 싶은 거예요. 아무것도 행하지도 않았는데 난데없이 구원받는 일은 없다는 겁니다.
난데없이 출몰하는 일은 없다는 거예요. 출몰하는 것은 물리학에서 힉스입자가 출몰하는 거예요. 그냥 난데없이 등장하는 거예요. 그걸 잉여, 여분이라고 하는데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것,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어떻게 구원받습니까?”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왜 제 죄를 다 가져갔습니까?”라는 고백을 하는 거예요. “나도 착할 수가 있는데, 나도 선을 쌓아서 악을 상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나도 도덕적으로 성숙이 가능한 존재인데 왜 그것을 뿌리치시고 그런 것을 일체 묻지 아니하시고 저로 하여금 언약이 터지는 언약의 사람으로 채택시켜주십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답변할 필요가 없지요. 이미 구원하셨기에 고맙다는 감탄조로 질문하는 거예요. 질문의 해답을 몰라서가 아니라. “해답을 모르나?” “아닙니다. 너무 고마워서 하는 이야기죠.” 그렇게 되잖아요. 너무 좋아서 하는 이야기, “왜 저를 구원하십니까? 아이고 좋아라!” 그런 뜻이라는 말이지요. 이것은 들을 귀 있는 자만 들을찌어다, 할 정도로. 그동안 그렇게 구원받고 난 뒤에 이 언약을 훼손하고 가로막고 뭉개려고 하는 모든 인간들의 집결이 그 다음부터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아, 나라도 그런 짓 하겠다. 구원이 안 되어서 안절부절하는 상태에서는 저런 식으로라도 몸부림칠 수 있겠다.’라는 것이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거예요.
구제하고, 이웃에게 봉사하고, 교회 섬기고, 그런 식으로 구원을 따내려는 그런 시도, 구원 안 받은 상태라면 나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들면서 우리에게 오는 것은, 그렇다면 언약사건이라는 것은 우리 안에 일어난 나의 사건이 아니고 심판 사건 속에서 일어난 주님의 중보자 됨을 드러내기 위한, 우리를 압수해서 일으킨 사건이 되는 겁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생명이라는 것이 생명나무에만 생명이 있는 줄로 아는데 왜 세상의 여자이름이 생명인가? 여자 이름을 생명이라고 해놓고 ‘모든 산자의 어미’라고 했다는 말이죠. 모든 산자의 어미라고 할 때에 그 산자의 어미라는 그 규정은 바로 예수님이 등장함으로써, 다시 말해서 잉태치 못한 자가 진짜 후손을 낳은 여자라고 할 때 주님께서는 그 여자의 후손으로 나오면서도 그 여자를 ‘나를 낳은 여자’라고 간주해 주시는 거예요. 후손이 주도권이 있지 여자에게 주도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리아가 그 여자의 후손이라면 마리아 때문에 여자가 태어난 것이 되어버려요. 예수님 때문에 마리아가 있는 것이 아니고 마리아가 먼저 있고 예수님이 있는 것이 돼요. 구원자가 먼저 있고 구원자를 맞추기 위해서 잉태할 자가 있는 거예요. 따라서 마리아는 예수님이 규정하는 그 여자에서 탈락이 되어야 됩니다. 마리아만 여자의 후손이 낳은 여자라면 마리아 옆집에 사는 여자, 그 잉태치 못하는 여자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표정들을 보니 그 점이 지금 이해가 안 되시는데 설명해 드릴게요.
창세기 25장 21절에 보면 이삭의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지요. 하나님께서 잉태치 못하게 하신 거지요. “이삭이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 아내 리브가가 잉태하였더니.”라고 되어 있어요. 창세기 24장 60절을 먼저 봅시다.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찌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찌어다.” 이렇게 되어 있지요. 결혼한 여자보고 원수의 성문 같은 전투적 용어를 붙일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이미 리브가가 언약 속에 포함이 되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운명 속에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사건화 되어서 지금 잠재되어 있는 겁니다. 이것이 나올 때는 잉태치 못한 자로 나온다는 말이지요. “천만인의 어미”가 된다고 하는데 천만인의 어미 같으면 숫자가 몇입니까? 천만 명, 천만 명이면 나라도 하나 만들겠습니다.
천만인의 어미라고 하니까 얼마나 자식을 많이 낳겠어요? 그런데 실제로는 뭡니까? 25장 21절에 자식을 낳습니까, 못 낳습니까? 자식을 못 낳는 거예요. 이 이야기는 바로 할례언약이라는 것, 창세기 17장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 할례언약입니다. 절단이죠. 생명이 나올 수 있는 모든 연결고리를 다 끊어버리는 겁니다. 끊어버릴 때 사라는 잉태치 못한 홀로 있는 자가 되어버려요. 그리고 남편이 없는 여인이 되는 거예요. 이 말은 남편으로부터 자식을 얻는 것이 아니고 남편외의 다른 이유로 자식이 나오는데 어차피 사라는 남편이 있든 없는 자식이 없는 거예요.
자식이 없는 것으로 계속 가야 돼요. 자식이 없는 자로 계속 가야만 자식이 있는 자가 받는 저주에서 벗어날 수가 있는 거예요. 사람들이 이점을 이해를 못하는 것이 뭐냐 하면, 지금 하나님이 모든 시간, 모든 개념의 존재가 예수님에게서 나오고 예수님은 이 지상에서 포착이 안 되는데 우리는 자꾸 질문하는 것이 내 존재가 여기 있다고 보고 주님의 존재와 자꾸 엮이려고 하니까 이게 설명이 힘든 거예요. 우리의 존재가 있으면 우리의 존재는 저주의 시간이 흘러요. ‘뭔가 구원이 있을 거야. 뭔가는 있을 거야.’ 라고 이렇게 자꾸 흐른다는 말이지요.
내 존재가 파악할 수 있고 내가 뭔가는 납득할 수 있는 무슨 구원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데 주님의 시간은 이런 시간과 역전해서 이미 일찍 오셨다니까요? 어떻게 오셨다? 구원자로? 아니에요. 일찍 심판주로 오는 거예요. 열차가 달리는데 그 열차에는 모든 범인들이 타고 있는 거예요. 그 열차위에 주인공이 올라타서 그 열차 안에 있는 테러범들을 다 죽이는 거예요. 지금 주님께서 올라탔어요. 거기 올라타서 이 시간상의 모든 존재를 다 심판해 버렸다니까요. 그래서 사람이 산다는 그 자체가 심판받기 위해서 사는 거예요.
그리고 심판 안 받고자 하는 그것이 마귀가 이 열차의 주인공이기에 마귀가 자꾸 “심판 안 받아. 걱정하지 마.”라고 거짓말 하면서 이 열차를 몰고 가고 있는 겁니다. 이미 우리는 주님의 심판에 참여함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이 땅의 잉태할 수 없는 자, 남편 없는 자가 되어버립니다. 그렇게 될 때 저쪽에서 우리의 구원을 이해를 못하지요. 제가 개혁주의신학회에서 70이레의 비역사적해석 논문을 발제를 하고 있었어요. 지금 발제자가 짧은 시간에 이야기를 다 하기 위해서 바쁘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숭실대학교 김 영한 교수가 방해를 놓는 거예요.
“계룡산에서 내려 왔구먼.” 그래, 계룡산에서 왔다! 이 지상의 역사를 주장하는 사람한테는 비역사라는 것이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사람은 자꾸 원인, 구원받는 원인을 찾으려고 드니까, 구원의 방법, 구원의 수단, “너는 어떻게 구원 받았는지?” “그러면 나를 따라서 그대로 해 볼래?” 자꾸 따라해 보라는 겁니다. 이걸 끊어줘야 돼요. 이 따라해 보겠다는 그 독약에서 쏟아지는 그것을 끊어주는 작업을 할례언약이라고 합니다. 할례언약은 그냥 끊어주는 거예요. 끊어줌으로써 육으로 난 인간은 절대로 천국에 못 간다, 그것을 쉽게 말해서 “인간은 천국 못 간다.” 다른 말로 하면 “아무도 못 간다. 왜, 이미 저주받을 존재기에 못 간다.” 그러면 구원은 새로운 피조물이지요. 새로운 피조물이라서 “이 언약에 의해서 주신 분이 너를 살릴 거야.”라고 하면서 그걸 보여주는 증거물이 뭐냐, 그 사건이 뭐냐 하면 바로 할례를 받는 사건이에요.
출애굽기 4장 24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하시는지라.”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려고 했어요. 죽이려고 한 이유가 뭐냐? 신학서적을 아무리 보고 주석이나 논문을 아무리 들춰봐도 신학자들이 이 이유에 대해서 써놓은 것을 보지를 못했어요. 하나님께서 자기편인 모세를 왜 죽이려 합니까? 자기 동업자를 왜 죽이려는 거예요? 사람을 왜 죽이려고 하지요? 자기 직원 죽이려고 했던 어떤 기업주도 아니고 말이죠. 죽이려면 처음부터 죽이지 애굽으로 가라고 해놓고 가는 도중에 죽인다?
이 본문은 잠시 빼놓고 가시게요, 이래가지고는 일이 안되거든요. 빼놓고 갈 것이 있지 이 중요한 부분을 왜 빼놓고 가요? “십보라가 차돌을 취하여 그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며.” 이게 또 무슨 미신적인 행위입니까? 갑자기 쓰러져서 죽어 가면 다리미 같은 심장 박동기로 가슴에 충격을 주든지 해야지 왜 엉뚱한 짓을 하는 겁니까? 제 삼자인 아들의 양피를 베어서 던지는 이유가 뭡니까? 또 효과를 보내요. 던지니까 하나님께서 모세를 놓았다는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면서 뭘 얻고자 하는 겁니다. 이미 너희들 모든 식구는 죽었다는 거예요. 이미 죽었다, 그러면 단절되어 있지요. 잉태치 못한 자, 남편이 없는 여인이 되어버렸어요. 전부 다 그 자체가 언약사건이 된 거예요. 그렇다면 모세와 애굽 바로왕의 대결은 모세와 바로왕의 대결이 아니고 언약사건, 곧 생명나무와 선악과 따먹은 죄지은 자의 심판행위로서 모세가 지금 가는 거예요. 왜, 메시아가 일찍 왔기 때문에. 어딜 통해서? 모세를 통해서 일찍 심판으로 메시아가 오신 거예요.
일찍 심판하러 왔기에 지금 모세는 모세의 자격으로 심판하는 것이 아니고 모세마저 죽이려는 그 여호와의 자격으로 애굽을 심판하려 하심입니다. 따라서 모세의 자기 뜻이 개입되어야 해요, 말아야 해요? 개입되지 말아야겠지요? 그런데 모세로서는 개입 안 될 수가 없지요. 그래서 모세를 애굽에 보낸 것이 아니고 피, 할례언약을 애굽에 보내는 겁니다. 그게 어디 나오는가? 마지막 유월절 때 그냥 떡이나 먹고 양고기나 먹고 피 바르면 안 되고 그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절차가 있습니다. 할례를 행해야 돼요.
이것은 할례 있는 자의 할례 없는 자에 대한 심판입니다. 그러면 이 땅에 할례 있는 자가 누구입니까? 이스라엘? 히브리인? 아니지요. 그것은 흔적만 있지요. 누가 할례 받은 자입니까? 골로새서 2장에 보니까 할례는 뭐다? 바로 십자가가 할례다. 예수님께서 미리 관여하신 거예요. “내가 분명히 했지? 선악과 따먹으면 어떻게 된다고? 정녕 죽으리라.” 이것은 네가 예상한 죽음이 아니고 하나님에 의해서 죽는다. 이것이 바로 매개자, 중보자가 갖고 있는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인 것입니다.
선악과와 생명나무가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선악과를 건드리는 것은 생명나무를 건드리는 거예요. 이것은 중보자를 건드린 것이고 중보자를 건드린 것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그 영역에 인간은 어떤 식으로도 선악과 따먹었더라도 개입될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아담은 속아 넘어갔어요. 네가 선악과 따먹으면 하나님의 영역에 합류할 것이라고 봤고 하나님은 그것을 허락지 않은 겁니다. 에베소서 1장 3절에서 4절에 보면 언약사건을 이렇게 표현했어요.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이 “창세전에” 우리가 개입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런데 악마는 아담보고 선악과 따먹으면 창세전에 개입할 수 있다고 본 거예요. 하나님끼리만 아는 그 정보를 너도 관여할 수 있고 참여할 수 있다고 본 겁니다. 주님께서는 그것을 허락지 않았어요. 왜냐, 창세전, 시간 전이기 때문에. 선악과 따먹고 심판받는 그 원칙은 시간 따라 흘러갑니다. 창세기 5장에 보면 아담이 셋을 낳고 오래 살았습니까? 결국 죽었더라, 또 죽었더라, 계속해서 죽었더라, 그렇지요. 그러나 그 죽음을 모아도 선악과 따먹고 죽으리라 한 그 죽음에는 합치되지 않아요.
어떤 죽음이 되어야 되느냐 하면, 우리는 어떻게 해도 하나님의 창세전의 계획에 관여할 수 없다, 그것을 깨닫는 그 죽음이 찾아와야 돼요. 우리는 피조물의 운명에 사전에 개입할 입장이 못 다는 것을 철저히 알아야 돼요.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서 착한일 했거나 악한 일을 한 것과 관계없이 에서는 미움 받기로 작정되어 있고 야곱은 이미 사랑받기로 작정되어 있어요. 여기에 대해서 야곱과 에서 본인이 개입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창세기 25장에서 그 둘의 어머니 리브가로 하여금 나중에 천만인의 어미가 되면서도 잉태치 못하게 만든 겁니다.
잉태치 못하는데 어쨌든 태어나기는 했잖아요. 태어난 그 인간들이 보여준 것은 “절대로 우리는 알지 못했다.” 그렇게 태어난 그 두 형제가 보여주는 것은 ‘인간이 왜 죽어야 마땅하고 죽어야 마땅한지’를 보여준 거예요. 그래서 둘 다 지옥가야 되고 둘 다 마땅히 저주받아야 됩니다. 그렇게 만들어놓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야곱은 사랑하사 천국에 보내고 에서는 지옥을 보내신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뭐냐, 야곱과 에서가 자기운명에 관여를 했다는 말입니까, 못했다는 말입니까? 관여를 애초부터 못해요.
왜, 선악과를 따먹었기에, 지금도 선악과는 반복되고 있는데 그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인간은 일체 내 구원에 대해서 구원해 달라고 요청할 수 있는 권리가 애초부터 없어요. 그 없음을 분명히 하는 겁니다. “너 잉태 되었잖아.” “잉태되었습니다.” 그러면 끝난 거지요. 잉태되었으면 여자의 후손에 관여할 수 없지요. “그러면 잉태 안 된 자는 구원 받습니까?” “잉태 안 된 자는 구원 받지.” “그러면 잉태된 내가 어떻게 잉태 안 된 자가 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안 되지요. 이미 잉태되어버렸는데, 이미 존재하는데 그걸 무효로 할 수 없지요.
이게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질문한 내용 아닙니까? 어떻게 사람이 다시 엄마 뱃속에서 태어납니까? 그 질문을 저에게도 많이 한다니까요? “목사님,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그 질문이 마찬가지 질문이에요. 되는 소리를 해야지. 그 질문 자체가 상당히 음흉하게 보이는 거예요. 뭘 잘했다고 구원을 받아요, 뭘 잘했다고. 그러면 제가 하는 말은 간단합니다.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그러면 또 질문하지요? “어떻게 다시 엄마 뱃속에 들어가서 태어납니까?” 그러면 제가 이야기하지요. “성령으로 태어납니다.” 성령이 어디 있는데요? “바람 쐐도 모르겠습니까?” 성령의 특징은 소유대상이 아니어서 손에 잡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대 이름은 바람, 바람, 바람, 바람 잡다가 다 놓쳐 버려요.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모든 구원시도가 다 마귀에서 나왔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서 구원은 우리가 구원의 열의가 있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중보자의 고유권한이라는 사실을 우리를 통해서 언약사건을 통해서 알려주는 겁니다. 마태복음 9장에서 중풍병자가 왔을 때 중풍병자는 중풍병자라는 사건에 말려든 거예요. 병이 걸린 것이 아니고 병 걸린 사건에 말려든 거예요. 오지랖 넓은 친구 넷이 지붕 뚫었지요.
제가 그 현장에 있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수리비는 줬을 거예요. 지붕을 뚫다니, 그것은 말도 안 되지요. 지붕 뚫고 수직강하 했습니다. 왜, 구원받으려고요? 왜? 잉태된 자들, 잉태 안 된 자들이 아니고 잉태된 자들이에요. 남편 있는 자들, 잉태된 자들이에요. 잉태 된 자들이 소원은 뭐냐 하면, 살아보겠다는 그것밖에 없어요. 잉태된 자가 왔을 때 주님께서 그들에게 병을 고쳐주는 것,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뭘 했습니까? 죄 용서를 해 버렸지요.
죄 용서를 해버리니 중풍병자도 놀랬고 친구들도 놀랬고 주변 사람들이 다 놀랬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요구한 것이 아닙니다. 주여, 우리가 요구한 것이 아닙니다.” 절대로 우리가 요구한 것을 주시는 것이 아니에요. 죄 용서를 우리고 요구했다면 절대로 우리는 용서받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만든 죄는 죄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죄 용서에서 죄가 뭐냐는 것은 용서받을 때 비로소 아는 것이 죄입니다. 좋은 소리 할 때 좀 적어 놓으세요. 죄라는 것은 일방적인 용서를 받는 그 시점에서 처음으로 경험하는 것이 죄에요.
아, 시계를 잘못 봐서 시간이 지금……,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죄인이었습니다. 마무리할게요. 죄용서는 십자가 앞에서 비로소 강도가 구원받은 것을 봄으로서 비로소 아는 겁니다. “아, 주여, 구원받는다면 제가 강도되어도 감사하겠습니다. 강도가 되더라도 구원주신다면 내 운명이 강도라도 저는 수용하겠습니다.” 그럴 때 강도되기 싫어한 모든 것, 창기 되기 싫어한 모든 것이 죄였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갖고 있는 육신의 끈질김입니다. 주님은 그보다 더 세셨습니다. “그래, 네 맘대로 해라. 용서는 내 맘대로 할 테니까.” 그것이 바로 주님의 의가 되는 겁니다. 십분 쉬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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