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겨울수련회 제 7강
지난 시간에 난해한 것을 했는데, 다시 한 번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첫째는 ‘시간의 역전’이고, 둘째는 ‘출몰’이라는 개념, 셋째는 ‘잉태치 못한 여인’이 무슨 뜻인가 하는 것입니다.
‘시간의 역전’이라는 것은, 십자가 다음에 부활이 있습니다. 그러면 누가 봐도 이미 부활되었으면 십자가는 사라진 거예요. 어떤 사람이 22세가 되었으면 21세는 지나갔기에 22세가 된 거예요. 예수님 십자가 죽으시고 난 후에 부활하셨는데, 부활했다는 것은 십자가는 이미 지나간 과거가 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부활 믿으면 구원 받는다’고 말한 것이 아니고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이다’라고 했을 때, 십자가에서 부활로 가는 것이 정상적인 시간 흐름인데, 부활이 아닌 십자가라고 할 때 이것은 ‘시간의 역전’이 되는 겁니다.
제가 일부러 어렵게 해서 유식한 티를 내려고 ‘시간의 역전’을 거론한 것이 아니고 성경이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십자가로 구원 받고, 그 후에는 십자가는 잊고 부활을 믿으면 됩니다.” 또는 “재림이 남았으니까 재림을 믿으면 됩니다.”라고 하는데, 이것은 사도 바울의 주장과 다른 것입니다.
여기 메모지가 있는데 이것으로 이벤트를 해 보겠습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여러분들이 뭔가를 깨달을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유치한 것도 저는 할 마음이 있습니다. 메모지를 뿌려볼게요. 이렇게 메모지를 뿌리면, 십자가에서 뿌리면 앞으로 올 모든 시간에 십자가가 점박이로 박힌 채 흩어질 거란 말이죠. 그러면 흩어진 메모지가 흩어진 방향으로 다시 오게 되면 이것이 바로 ‘시간의 역전’으로 보이는 겁니다. 모든 것이 십자가로 쏠립니다.
이번 시간에 공부할 내용은, 노아 언약 이후 아브라함 언약, 이삭 언약, 야곱 언약인데, 골치 아프게 다 알 필요 없고 한 가지만 알면 돼요. 인간 구원이 아니고 여기 있는 법의 구원이에요. 법의 취지를 구원하는 겁니다. 이걸 분명히 알아야 해요. 인간 구원은 아닙니다. 아브라함 구원은 아니고, 이삭 구원이 아니고, 야곱 구원이 아니라 그 속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언약 취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노아 언약에서 무지개가 있지만 무지개라는 투영체를 따라가 보니 피가 있어요. 어린양이 흘린 피. 이 피를 살리기 위해서 노아 가정마저 사정없이 저주해 버립니다. 이런 인식이 없으니까 아브라함 언약, 이삭 언약, 야곱 언약을 배우면 “아브라함처럼 살아야지, 이삭처럼 살아야지, 야곱처럼 참아야지” 이렇게 나오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아브람을 아브라함 되게 하고, 이삭을 살리고, 야곱을 이스라엘로 만드는 원리가 있어요. 그 원리를 뽑아내고 살리기 위해서 언약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목사님, 어떻게 하면 구원 받습니까?”라고 물으니까 아무리 언약을 설명해도 어려운 거예요. ‘내가 어떻게 행동하면 사는 것인지 어느 대목에 나오나?’하면서 성경을 아무리 찾아도 나오지 않습니다.
이미 십자가가 뿌려져 점박이처럼 박혀 흩어졌습니다. 아까 설명할 때 모세와 엘리야가 연령차이가 나도 변화산에 주님과 같이 나타나서 “주님, 언제쯤 별세하십니까?”라고 물었어요. 변화산에서 다른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에요. “앞으로, 부동산 시세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런 것을 질문한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모르는 자는 어리석게 되어 있고, 십자가를 아는 사람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성령이 아니면 십자가를 알 수 없어요. 그리고 십자가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전달 될 때는 마치 시간이 역전되는 현상처럼 보입니다. 앞으로 진행되는 것 같다가 되돌아오는 거예요.
‘시간의 역전’ 현상을 더 쉽게 설명하면, 중국 음식점이 어려 곳 있습니다. A도 있고, B도 있고, C, D 도 있어요. 친구가 소개하기를 “A중국집에 가봐라. 진짜 중국 사람이 하는데 역사도 60년이 되었고 정말 맛있다.”고 말한 친구의 말을 믿는다면, 단번에 A중국집에 가면 될 텐데 “다른 집도 맛있을 수 있으니까 다른 집에도 한 번 가보자.” 이게 부활이고, 이게 재림이에요.
바로 A중국집에 가세요. 바로 십자가로 가야합니다. “A중국집(십자가)은 이미 알기에 다른 집도 맛을 봐야지?” 이럴 필요 없어요. 바로 십자가로 가라니까요. 다른 집에 갔다가 “역시 A중국집이 최고야.”하고 돌아올 때 다른 사람이 보기에 역전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우리는 나의 시간 인식으로 “이미 십자가는 알았으니까 이제 부활도 알고, 재림까지 완전히 알면 구원 받는데 지장이 없겠다.” 이렇게 나오는데 이러지 마세요. 이러면 내 수평적 시간 의식의 발전을 노리게 됩니다. 수직적으로 십자가가 오면 십자가로 굳어져 버렸기에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착해지지 않습니다.
나에게서 십자가 피만 뽑아내면 되지 나의 선함을 뽑아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엘리아야, 고생 많았지? 구원 받아라!” 이게 아닙니다. “주님, 언제 십자가 지십니까?” 십자가 피만이 우리의 모든 죄를 씻습니다. 이미 해답을 아는데 그곳을 지나쳐서 ‘다른 집에도 한 번 둘러보자.’ 이럴 필요 없어요.
십자가 지심으로 모든 것이 종결되었습니다. 십자가 안에서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마귀는 자꾸 유혹합니다. “네가 더 선할 수 있는데 왜 여기서 머무는가? 더 발전해야지. 새생명 운동도 하고.” 본인이 헌생명인데 새생명 운동한다고 새생명 됩니까? 자신이 헌생명인데 끝까지 안 죽고 버티겠다고 하기에 십자가에 다가가지 못하는 겁니다.
‘내 시간은 아직 남아있고, 남은 시간은 아직 발전할 여기지 있는데 왜 그것을 포기해?’ 이런 심보에요. ‘내가 지금보다 더 선할 수 있는데 왜 미래 포기해? 이건 말이 안 돼. 계속 선을 향해 노력하다가 미흡한 점이 있으면 그 부족한 부분을 십자가로 채우면 되지 지금부터 포기할 필요는 없어.’ 이것은 자기가 갖고 있는 시간 개념 때문에 이런 오류가 생기는 겁니다.
‘시간의 역전’이란, 십자가에서 수직적으로 뿌려오기 때문에 수평적 시간으로 보면 역전으로 보입니다. 야곱이 아무리 거짓말로 에서를 속이고, 에서가 무슨 일을 해도 십자가 앞에서는 아무 의미 없는 짓들입니다. 누구의 잘잘못을 따질 문제가 아니고 야곱은 이미 십자가의 점박이가 뿌려졌고, 하나님은 야곱에게 뿌려진 십자가의 원리를 뽑아내기 때문에 야곱은 덩달아 구원 받은 거예요. 우리 안에 있는 복음 때문에 껍데기인 우리도 같이 뽑혀 나온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내가 얼마나 착한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제 ‘출몰’이 무슨 뜻인지 생각해 봅시다. ‘출몰’은 바탕이 없어요. 왜 바탕이 없는가 하면, 예수님 자신이 이 땅에서 바탕이 없습니다. 히브리서 7장에 보면 예수님은 멜기세덱 계통입니다. 멜기세덱은 다섯 가지 없는 것이 있어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습니다. 뿌리가 완전히 절단된 것 같아요.
없는 족보가 예수님 족보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안에서 구원 받은 사람도 역시 엮이는 족보가 없어요. “안동 권씨입니까? 구원 받는데 유리하겠네요.” 이런 것이 없어요. “아버지가 목사님입니까? 그럼 예수 믿겠네요?”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환경 때문에 구원 받는다고 착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구원은 환경과 관계없습니다.
“아버지가 목사님인데 제가 아버지께 잘 양육 받아서 구원 받았습니다.” 이런 목사 자녀는 구원 받는 자가 아닙니다. “아버지가 목사가 아니라 깡패라도 구원 받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목사 자녀를 보고 싶어요. 언제쯤 그런 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 ---
‘출몰’이란, 바탕을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어요. 엘리야가 불 수레를 타고 하늘나라로 올라가기 위해서 사전에 수레 타는 연습을 하고, 또 불에 타지 않기 위해 소방관이 입는 복장을 갖추고 했습니까? 아니에요. 홀연히 그런 사태가 벌어진 거예요. 사전에 불 수레를 탈 것을 예상했다면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불의 온도가 얼마나 되며, 불에 내 몸이 타면 얼마나 뜨거울까?’ 이런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냥 불 수레에 실려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이처럼 구원이란 원인 없이 결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불신자: “당신은 어떻게 구원 받았습니까?”
성 도: “주님께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불신자: “당신이(주체가 되어) 무슨 일을 했기에 구원되었는지 제가 묻고 있습니다.”
성 도: “저의 어떤 행위도 구원에 보탬이 된 적이 없습니다.”
불신자: “나도 당신처럼 구원 받고 싶은데 당신을 본받으면 되겠습니까?
성 도: “저를 본받는다고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불신자: “당신은 구원 받았는데 나는 왜 구원 못 받습니까?”
성 도: “그것은 제가 대답할 문제가 아닙니다.”
구원은 돌발 사태로 출몰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이 출몰을 경험했어요. 전도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설득한 것이 아니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한다.” 이런 소리를 막 했어요. 이런 말을 듣고도 예수 믿는 사람이 출몰했어요. 출몰했다는 말은, 예수님과 똑같이 이 땅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그 사람의 육적인 어떤 것과 관계없이 성령으로 구원하십니다. 이런 이야기가 저는 굉장히 듣기 편한데 안 그런 사람이 많아요.
이제 ‘잉태치 못한 자’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이것은 차단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차단되었으면 이 역사 속에서 차단된 효과가 살아 있어야 돼요. 어떻게 오는가? ‘여자의 후손’으로 인하여 차단되는데, ‘여자의 후손’이란 말에서 ‘여자’의 특징은 남편 없는 여자이고, 잉태치 못하는 여자입니다.
[잉태치 못한 여자 + 후손] 이게 말이 됩니까? 잉태할 능력도 없는데 후손이 생기겠어요? 그러니까 후손이 새삼스럽게 여자를 규정하면 되는 거예요. 후손이 나타나서 “너는 그 여자의 후손인데, 그 여자였다.”고 차후로 소급해서 우리를 규정해 주면, 잉태치 못한 자의 자식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되는 겁니다.
‘여자의 후손’이라고 할 때, 이 ‘여자’는 남편이 없습니다. 홀로 있는 여자입니다. 그래서 잉태치 못한 거예요. 이 이야기가 이사야 54장에도 있지만 갈라디아서 4장에도 나와요. 갈라디아서에 보면 아브라함이 여자가 둘(하갈과 사라)입니다. 그런데 사라의 특징은 남편 없는 여자이고 잉태치 못하는 여자라는 거예요.
왜 사라가 남편이 없습니까? 아브라함이 사라의 남편이잖아요. 만약 아브라함이 사라를 통해서 자식을 낳게 되면 그 자식은 ‘여자의 후손’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육신의 후손’이 됩니다. 그러면 사라는 아기를 언제 낳아야 되는가 하면, 남편과의 관계에서 더 이상 아기를 낳을 수 없다는 것이 확정되고 난 이후에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아기를 낳게 될 때, 아브라함은 “절대로 이 자식은 내가 낳은 자식이 아닙니다.”라고 고백하게 되고, 이 상황에서 사라는 ‘남편 없는 여인’이고, ‘잉태치 못한 여인’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언약적 사건이 터진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출몰하는 언약적 사건들이 오늘날(신약시대) 우리의 입장이고 우리의 신세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해서 구원 받았습니까? 누구의 권유로 교회 와서 구원 받았습니까?” 교회 온 것은 누구의 권유로 왔지만, 교회 와서 구원 받는 것은 인간으로써는 어떤 방법도 제시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여자의 후손’은 차단성, 어떤 인간도 생명에 이를 수 없다는 차단을 깔아놓고, 생명은 중보자 이름의 일방적인 혜택에 의해서만 주어지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만 구원을 독점해야 되고, 아버지 뜻에 의해서 죽은 자가 살아남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모든 권한을 예수님 혼자 독점하게 되고, 그 독점하신 권리를 가지고 “너 구원 받아야 해!”라고 할당하게 되면 그 사람은 예수님 이름으로 구원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 받은 사람은 “내 행함이 아니고 주님 은혜로 구원 받았습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지요. 그러면 그 사람도 ‘여자의 후손’에서 여자에 해당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한 여자에 해당되는 겁니다. 사실은 잉태할 능력도 없고 남편도 없지만 후손이 어미를 규정해 버리니까 여자의 후손에 해당되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는 예수님이 이 땅에서 당했던 운명을 답습하게 되겠지요. 그게 차단성이에요. 인간의 힘으로 구원 받는 것을 확실하게 차단하기 위해서 주님은 여자의 후손으로 왔고, 여자는 자식을 낳을 능력도 없고 그런 입장에 있지도 않고 그런 것입니다.
천주교에서는 ‘여자의 후손’에서 ‘여자’를 마리아로 생각하고 마리아를 통해서 예수님께 압력을 가해서 기도 응답을 받으려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설마 자기 엄마의 말을 거절하겠어?’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마리아에게 부탁을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마리아의 말을 듣다니요. 예수님 홀로 모든 것을 완성하셨는데.
마리아가 친척 결혼식에 갔는데 포도주가 부족했어요. 그래서 마리아가 예수님께 부탁합니다. “예수야, 포도주가 떨어졌다.” 이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여자여,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라고 했어요. 그런데 마리아가 하인들에게 하는 말이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했고, 예수님은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명하셨고, 그 명령에 따라 순종했는데 그 항아리에서 퍼낸 포도주가 극상품 포도주가 되어 하객들이 기뻐했습니다.
예수님이 “내 때가 아직 되지 않았습니다(요2:4).”라는 말은, ‘지금 포도주가 떨어진 것은 (마리아)당신이 속한 때의 일로 나의 때와는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장차 올 나의 때(십자가로 모든 것을 변화시킬 때)를 미리 보여주기 위해 내가 물을 포도주로 바꾸겠습니다.’ 이런 의미로 기적을 행하신 거예요.
받은 저주를 확대하고, 그리고 저주에서 구원도 확대하고, 저주의 자리가 곧 구원의 자리가 되는 이런 예수님의 때. 처음부터 포도주를 주는 것이 아니고 물을 포도주로 바꾸심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어떤 효과를 주는가를 미리 보여주는데, 마리아 때를 이용해서 주님의 때를 설명한 것입니다.
그러면 마리아는 자기의 때에 머물러 포도주가 맛있다고 하지 말고, 자기 때에서 이동해서 예수님의 때로 가야겠지요. 그 가는 방법에 대해서 제가 이야기했지요. 심판을 통해서 가야 비로소 그 끝자리에 구원이 보입니다.
이제 노아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노아의 무지개 원천이 무엇입니까? 노아가 드린 피 제사였지요. 피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죽음이 어떻게 은혜가 되는가 하는 문제, 노아 당시에는 이것이 전혀 밝혀지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것이 하나의 법이 되었습니다. 노아 언약에서 이 법을 살리는 거예요.
‘피 흘린 자는 무조건 저주 받는다.’ 주님이 갑자기 생뚱맞게 피를 언급하십니다. 좋은 게 좋다고, 그냥 ‘잘 먹고 잘 살아라.’ 이렇게 나오시면 좋을 텐데, 갑자가 ‘피를 흘린 자나, 피를 먹는 자는 용서치 않겠다.’고 하심으로, 인간의 행복과 언약은 상관없음이 드러났습니다. 이제 피가 누구와 연결되는가를 보여줍니다. 인간의 시간을 따라서 밟아 나갑니다.
‘인간의 시간이 무엇인가’ 라고 물으면, 저는 ‘지연’이라고 답하겠어요. 계속 뒤로 미루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를 질질 끄는 이유는 죄를 생산하기 위함입니다. 죄를 생산해서 그 죄의 깊이가 점점 더 내려가서 하나님마저 죽이는 그 지점까지 이르도록 함으로써, 악마의 본심이 폭로되는 자리를 마련하고자 하신 겁니다.
이렇게 죄가 흐르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사용한 것이 이스라엘이었는데, 마태복음에서는 이스라엘을 포도원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역사를 포도원으로 설명하시는데, ‘포도원 주인이 먼 타국에 가면서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맡겼고, 열매를 거둘 때가 되어 자기 종을 보냈는데 농부들이 그 종을 때리고 죽였고, 그래서 이제는 아들을 보냈는데 농부들이 아들마저 죽였다.’라는 비유를 그 당시 바리새인을 향해 이야기하신 거예요.
바리새인들은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은 유일하게 메시아를 영접할 수 있는 권한이 있고, 메시아가 다윗 언약대로 오시면 그 때 이스라엘은 전 세계를 지배하게 되고 하나님 나라가 이뤄질 것이다.’ 이렇게 철석같이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한 그 시간을 예수님이 부정적으로 바꿔놓는 거예요.
그들의 존재 이유는 죄의 극단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함이며, 그들이 율법을 받은 것은 죄가 어디까지 미치고 있는가, 결국 죄가 하나님을 죽이는 것과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바리새인을 향해 “너희 아비는 마귀다.”라는 말씀이 의미 있는 거예요.
악마의 자손이라고 해서 머리에 뿔이 달렸고, 얼굴이 험상궂고 난폭하게 행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마의 종의 특징은 ‘역사를 믿습니다.’ 이거에요. 역사가 진행되면 될수록 보다 완벽한 이스라엘이 이뤄질 것이라고 믿는 것이 바로 마귀의 생각입니다. 이것이 개혁주의 신학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역사가 흘러오면서 조금씩 조금씩 더 완벽해지는 세월을 보냈다는 겁니다.
“처음에는 어설펐지만 뛰어난 신학자들로 말미암아 완벽에 가까운 진리를 갖췄습니다. 루터, 칼빈, 워필드 등등의 뛰어난 신학자들을 통해서 발전했기에 지금의 개혁주의 신학을 손댈 것도 없이 완벽한 신학이 되었기에 내가 지금 이 신학을 가르치는데, 이 나의 가르침을 받아드리는 사람은 구원을 받습니다.”라고 목사들이 주장하지요.
개혁주의 신학에서 구원의 능력이 나옵니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구원의 능력이 나와요? 예수님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공부했습니까? 십자가 위에서 구원 받은 강도가 오늘날 신학교 입학시험 문제를 풀면 몇 점 받을 것 같아요? 거지 나사로는 몇 점 받을까요? 강도, 거지, 창기, 세리가 구원 받은 것은 신학을 공부하고 알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시험을 치지도 않았고 시험지에 이름도 쓰지 않았지만 100점 받았습니다. 왜냐? 예수님이 문제를 풀었고, 그 점수를 이들이 공짜로 받은 거예요.
‘많이 용서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 내가 90점 받아 10점 모자랐는데 예수님이 10점 채워주셔서 만점을 받은 것이 아니고, 우리는 처음부터 0점인데, 나중에 발표하는데 보니까 100점이에요. 이것을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의’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해 율법을 지켰지만 이것이 오히려 그들을 멸망케 했지요.
구원은 우리의 의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로 됩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드러나면 우리는 0점입니다. 그래서 성경 해석의 정답은 ‘나는 0점입니다. 그런데 구원 받게 된 것은 주님이 100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입니다. 대신 죽으심의 효과지요. 이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보다 더 낫지 않습니까?
목사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가르친다고요? 우습지요? 왜 목사가 이런 것을 가르치는가 하면, 배운 것이 그런 것이기 때문에 그래요. 남들이 모르는 것을 가르쳐야 자신이 스승노릇을 하고, 그래야 돈을 받아도 권위가 살아요.
목사는 신앙생활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신앙이 없으니까 그것을 티내지 않기 위해서 개혁주의를 들고 나오는 겁니다. 신학교수가 되었다면, 교수 된 것이 나쁜 것이 아니고 “내 신학박사 학위가 죄입니다.” 이것을 고백하라고 신학박사가 된 것이고, 목사가 된 것은 “목사로 행세하며 사는 이 짓이 죄입니다.” 이런 고백을 하라고 목사가 된 거예요. 장로, 집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이 구원 받았을 때 여러분 생각에는 ‘기분 좋겠다’고 여기겠지만 칼로 자식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아비가 자식을 제물로 드립니까? 이건 미친 짓입니다. 예수님 없었으면 우리도 큰 일 날 뻔했습니다. 우리도 아들 잡아야 해요. 그런데 예수님 덕분에 안 잡아도 돼요.
이제 우리 죄를 씻을 제사는 더 이상 없습니다. 히브리서 10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우리 죄를 위해서 미사, 특별 예배, 송구영신 예배 다 필요 없어요. 집에서 졸다가도 구원 받아요. 주님이 우리를 건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 속에 자신이 남긴 법, 새언약을 살리기 위해서 건졌는데 우리가 함께 걸려든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언약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당부합니다. 언약은 인간 구원이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이 남기신 것을 회수하는 작업이에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가는 것. 주님께서 남기진 자기 것을 회수하는 과정에서 뭔가 줄줄이 같이 끌려온 거예요.
창세기 15장을 봅시다. 아브라함 언약에서 제일 난해한 부분입니다. 9절에 “나를 위하여 삼년 된 암소와 삼년 된 암염소와 삼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지니라.” 왜 제사를 이렇게 세분화 시키느냐는 것입니다. 그냥 농사 짓은 것을 바치라든지, 집에서 기르는 양을 바치라고 하면 되는데.
아브라함 자신을 위해 제사를 드리면 아브라함이 골라서 제물을 선택할 거예요. 그런데 이 제사는 아브라함을 위한 제사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위한 제사입니다. 다시 말해서 제사 드리는 인간을 위함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을 위한 약속이었습니다. ‘너는 나를 위한 제물이 되고 나는 너를 구원해 줄게.’ 이것이 주께서 주와 한 약속이기에 그것을 대표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매개자로 예수님이 등장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자기 아들 자랑뿐입니다. 아들이 주로 칭송받을 때 아버지가 영광을 받아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나를 끼워 넣지 마세요. ‘내가 착합니다.’ 이것으로 영광 돌리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면 하나님은 영광을 받아요. 하나님은 오직 자식 사랑밖에 없어요.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서 제물을 바칠 때 그 제물은 장차 오실 구원자, 하나님 아들의 모형을 앞당겨 제물화 시킨 것입니다.
지정한 제물을 보면 3년 된 암소가 나와요. 왜 수소가 아니고 암소며, 왜 2년이나 1년이 아닌 3년입니까? 여기에서 약간 엇길로 가면 알레고리에 빠집니다. 말장난이 되지요.
만약 말장난으로 빠지는 것이 두려워 여기서 해석을 중단하면 그 다음에 나타나는 세 천사와 관련시킬 수가 없어요. 세 천사와 관련이 있으면서 여자의 후손과도 관련이 있어야 돼요. 왜냐하면, 언약은 상자로 되어 있는데 이것을 열면 여기에는 여자의 후손도 들어있고, 뱀의 후손도 들어 있어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정체는 언약이 이어져서 점점 죄에 포위될 때, 마지막에는 악마가 하나님마저 죽이게 되고, 하나님은 악마가 죽인 예수를 살려내어 모든 권한을 아들에게 위임하고, 아들이 악마를 유황불에 집어넣을 때 이 모든 것은 마무리 되는 겁니다.
만화 같지요? 이게 만화가 아니라 실제 상황이란 것을 무엇으로 증명합니까? 이스라엘 역사가 증명합니다. 그래서 제가 신을 찾을 때 신을 찾지 말고 이스라엘 역사를 보라고 했지요. 이것을 그냥 이해하면 하나의 판타지 소설이 됩니다. 이것을 신학자들은 ‘묵시 문학’이라고 합니다. 문학이라는 말은 꾸민 이야기란 말이지요. 만화라는 말입니다. 그냥 흥밋거리라는 말이지요.
예수님이 십자가 죽으신 것이 흥밋거리입니까? 사도 바울이 만화책 읽고 순교했습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내가 원치 않는 길로 간다.”고 했는데, 그러면 만화 저자에게 홀린 것입니까? 베드로는 정말로 원치 않는 길로 끌려갔어요. 이게 소설입니까? 아니에요.
제가 강의 초반부터 말했지만, 지금 우리가 할 것은 ‘내가 어떻게 제사, 헌금, 봉사를 할까?’ 이런 것에 신경 쓰지 말고 ‘나를 이 지경으로 몰아세운 자가 누구십니까?’ 그 중보자를 찾고, 그 중보자를 증거하는 것인데, 이것은 인간으로써는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어딘가에서 출몰한 희귀한 현상에 우리가 지금 휩쓸린 거예요. 이런 자를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합니다.
이것은 내가 전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나의 변신입니다. ‘공부해서 배운 것으로 일해서 먹고 살자.’ 좋아요. 그런데 문제는 왜 죽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 죽는가는 몰라도 돼.’ 그래요. 몰라도 됩니다. 그런데 죄 값으로 죽는다는 로마서 6장 말씀이 믿어지는데 어떻게 합니까? ‘네가 죽는 것은 죄 값으로 죽는 것이고, 네가 사는 것은 누군가가 너의 죄 값을 대신 치렀기에 산다.’는 말이 안 믿고 싶은데 믿어지게 하시는데 어떻게 할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신앙생활 하면서 억지로라도 ‘안 믿는다’고 좀 하세요. “‘안 믿는다’고 다짐을 했는데도 왜 믿어지지? 이상하다.” 이렇게 되어야 진짜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잘 믿어야지. 믿으면 혹시 복이 올지도 몰라.” 이것은 우상숭배입니다. 이것은 자기를 위한 제물이에요.
성경에서의 제물은 하나님을 위한 제물입니다.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만드는 수술 의사가 3명 등장했어요. 사람을 죽입니다. 아브람을 변신시켜서 하나님의 의가 들어있는 아브라함으로 만들어 내는 작업은 아브람 본인이 못합니다.
아브람 인생에 하나님이 개입합니다. 처음 하나님이 ‘네 본토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할 때 다른 곳으로 이사 가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떠나고 나니 갈 바를 알지 못했어요. 갈 바를 모르기 때문에 본인이 사는 쪽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어요. 기근이 들어 애굽으로 내려갔고,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왕에게 아내를 뇌물로 바쳤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개입하심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십니다. 그래서 바로는 아브람을 불러 묻습니다.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나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이것은 아브람이 자기 삶을 꾸려나갈 능력이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브람은 걸려든 거예요. 멀쩡하게 잘 살 수 있는 사람을 주께서 불러 사람을 망쳐놓았습니다. 아브람은 끝났고 아브라함으로 바뀌어 집니다. 바뀌면서 생전 처음 경험하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임신하지 못한 아내가 임신을 하고, 그 임신한 여인을 통해 나오는 자식을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합니다.
그 전에 아브라함은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지만, 그 이후 이삭을 줌으로써 이삭과 이스마엘의 차이점을 아브라함에게 보게 하는 겁니다. 이삭은 바탕이 없어요. 멜기세덱같아요. 족보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그리스도가 아브라함 자손에게서 태어날 것을 미리 앞당겨서 아브라함 자손의 모형체로 이삭을 준 것입니다.
이삭을 보면서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지요. 그래서 이삭과 자신이 엮여지는 모든 관계는 장차 오실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겁니다. 이삭이 태어났지만 이것이 아브라함이 낳은 것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천사 셋을 보냈고, 천사 셋과 부합되고, 여자의 후손과 부합되기 위해서 이런 제물을 보여준 겁니다.
암소는 최상급 제물인데, 이것부터 시작합니다. 삼년 된 암소, 삼년 된 암염소, 삼년 된 수양. 전부 3일 넣어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3명의 천사와 이 제물이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구원자를 제물로 미리 보여주는 거예요. ‘네가 드린 제물이 장차 오실 메시야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제물을 어떻게 하는가? 제물을 쪼갭니다. 쪼갠다는 것은 제물의 본성을 이야기해 줍니다. 호빵을 쪼개면 단팥이 들어있지요. 이 제물을 쪼개니까 그 안에 하나님이 계신 거예요. 하나님이 죽어야 하나님이 주가 돼요. 하나님이 스스로 죽기 위해서는 필요한 모든 바탕이 어두운 이 세상입니다. 마귀가 그리스도를 죽여야 되는 겁니다.
따라서 이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자기 장난입니다. 주 예수님의 자기 전개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오셔서 악마를 쳐부숨으로 말미암아 모든 피조물로 하여금 주님을 찬양케 하고, 어린양의 보좌가 있는 그곳을 천국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죽기 전에는 천국이 없는 거예요.
천국에 어린양의 보좌가 있는 것이 아니고, 어린양의 보좌가 있는 곳이 천국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갈 수 있는 천국은 없어요. 예수님 가신 그곳만이 유일한 천국입니다. 살기 좋고 편한 곳이 천국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진 극락 개념이죠.
아브람이 제물을 쪼갰고, 솔개가 왔고, 아브람이 그것을 쫓았고,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나갔고, 18절에 드디어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라고 했어요. 여기서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겠습니다. ‘방주를 만들래요, 제물 쪼갤래요?’ 어느 편이 언약 세우기에 편리합니까? 방주 만드는 것은 힘들어요. 제물을 잡는 것은 짐승을 죽이면 되잖아요.
그런데 방주 자체는 죽음이 있습니까? 없지요. 방주에서 나온 후 제물을 바쳤지만 그전에는 죽음이 없지요. 그런데 아예 아브람은 하나님과의 언약 속에 이미 제물이 나오지요. 레위기에 가면 완전히 피 이야기로 도배를 합니다. 갈수록 점점 극단적인 죽음, 피와 관련되어 있고, 그 피를 유발시키는 사태가 병행하면서 하나님의 피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산 역사가 이스라엘을 통해서 전개되는 겁니다.
이 주장은 하나의 견해나 이론이나 소설이 아닙니다. 아브람의 언약을 이렇게 세웠습니다. 17장 7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그 중에서 피가 먼저 장식되었어요. 엔진부분은 피입니다. 그 피에서 뭐가 나오는가 하면, 하늘의 별, 바다의 모래같이 새로운 씨가 나와요.
피에서 씨가 나오려면 피 제사가 반복될 때 비로소 그 자손이 나오는 겁니다. 엔진이 가동되어야 자동차가 움직이듯이 피가 뿌려지는 제사가 반복되어야 자손이 생깁니다. 어떤 사람이 질문을 해요. “목사님, 율법은 언제 주어진 것입니까?” “모세 시대 때입니다.” “그러면 그 전에는 어떤 윤리가 있습니까?” 좋은 질문이지요?
도, 레, 미, 파, 솔 --- 올라갈 때, 만약 모세가 ‘미’부분이라면 그전에 ‘도, 레’가 있었던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피 없이는 사함이 없다.’ 그것이 여전히 유효하게 흘러 온 것입니다. 그것이 전승되었고, 그것이 기억으로 계속 자손들에게 흘러가는 거예요. 국가적으로 지키는 것은 모세 때였지만 그 전 족장시대 때도 이미 내부에서 윤리와 법도가 지키진 겁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당신의 법을 건집니다. 하나님이 법을 건지다보니 인간은 거기에 걸려 따라 나온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건지다보니 우리도 같이 걸려든 것처럼. 세리, 강도, 창기가 남들 보기에 반듯한 직업이 아니에요. 하지만 예수님이 “오늘밤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 한마디로 끝났습니다.
이것은 강도짓이 하늘나라에 쓸모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아무 쓸모없어요. 지상에서도 아무 쓸모없었고 하늘나라에서도 쓸모없고. 쓸모없기 때문에 주님만 쳐다보게 되고, 받은 면류관은 주님께 반납을 하지요. 그래서 진정한 교회는 모든 사람을 시체로 바보로 만들고, 오직 주님만 쳐다보고 사는 자로 만드는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죄로 돌리는 그런 말씀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목사님은 우리 사정을 어떻게 알고 죄인으로 몰아세웁니까?” 그건 간단해요. 누구의 행동을 알아서 죄인으로 모는 것이 아니고 목사 본인이 살아온 것을 말하면 다 해당이 됩니다. 목사나 교인이나 다 자본주의 사회에 적용을 받기 때문에 “제가 이렇게 살았는데 이것이 죄인의 모습입니다.”라고 하면 다 먹히게 돼 있어요.
같은 필드에서 영향을 받으면 같은 실체라는 이론이 있어요. 같은 자본주의 공간 하에 있으면 도시를 떠나 산속 깊숙이 들어가 약초를 깨도 그곳도 자본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다.”라는 말에 다 걸리게 되어 있어요.
15장 16절에 보면,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라고 했어요. 이 말은,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에게 주신 자기 법을 구원하기 위해서 출애굽 사건을 일으키는 겁니다. 어린양의 가치를 보이기 위해서 출애굽 시켰는데,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구원 받기 위해서 어린양이 필요했다고 오해한 거예요.
십자가를 섬기기 위해서 구원 받았는데,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가 필요했다고 오해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가 중요하지 우리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피의 제사를 먼저 드리고, 그 피의 제사가 엔진이 되어 돌아갈 때 거기에 그리스도를 향한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나는데, 그 움직임이 바로 언약으로 연결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