뿔
2023년 8월 16일 본문 말씀: 스가랴 1:18-21
(1:18) 내가 눈을 들어 본즉 네 뿔이 보이기로
(1:19) 이에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묻되 이들이 무엇이니이까 내게 대답하되 이들은 유다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헤친 뿔이니라 hese are the horns which have scattered Judah, Israel, and Jerusalem. "
(1:20) 때에 여호와께서 공장 네 명을 내게 보이시기로 four craftsmen.
(1:21) 내가 가로되 그들이 무엇하러 왔나이까 하매 대답하여 가라사대 그 뿔들이 유다를 헤쳐서 사람으로 능히 머리를 들지 못하게 하매 이 공장들이 와서 그것들을 두렵게 하고 이전에 뿔들을 들어 유다 땅을 헤친 열국의 뿔을 떨어 치려 하느니라 하시더라
인간은 자신이 망하는 것이 마땅함을 모릅니다. 이점은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조상으로 인해 하나님께 버림받았습니다. 이 버림받음에는 그 어떤 변동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점을 대해서 인간들은 반발합니다. 왜냐하면 악마와 한 마음이 되어 자신이 ‘신처럼 행세’하게 됩니다.
즉 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자기가 해결하려고 합니다. 실패하지 않고 모든 모자람을 지식으로 채우려고 시도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버림받음이 취소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버림받은 자입니다. 따라서 자기가 가진 지식과 노력으로 인해 무너지고 있는 겁니다. 애를 쓰면 쓸수록 자신의 존재의 무게는 더 나가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① 지옥은 지옥다워야 한다. ② 사람은 사람다워야 한다. ③ 이 둘을 연결해야 합니다. ④ 인간들은 자기만을 상대로 이야기합니다. 즉 자기 마음에 맞는 사람은 자기뿐입니다. 그러니까 그 어떤 경우라도 조금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사람이 골프 친다고 해서 인간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사례는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유다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은 망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그런데 이 망한 것은 같은 인간들 나라에 의해서 망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뿔이 와서 이스라엘을 해쳤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뿔이 뭡니까? 이것은 인간들 만의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게 뿔입니다.
◎성경에서 뿔이라는 하는 것은. 돌출의 성격을 보여줍니다. 이는 초과적인 활동을 뜻합니다. 인간에 의해서 포착될 수 없는 활동입니다. 인간을 능가하는 활동입니다. 이 활동에는 무슨 의도를 갖고 있습니다. 이 뿔이라는 활동은 천사에 속한 활동이라는 사실은 장인(匠人)기능을 드러냅니다.
뭔가 만들어내는 활동입니다. 뭘 만들어낼까요? 그 만들어내는 것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꼼짝마라’는 처지를 놓이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3:22에는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죄 아래 가운데’ 놓이게 된 것을 기정사실화 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내린 조치는 천사를 통해서 율법을 주셨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갈 3:19) 즉 천사가 동원해서 율법이 일괄적으로 이스라엘에게 주어졌습니다. 이는 모든 인간은 율법의 저주 안에 갇혀 있는 상태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래나 저래나 인간의 신세는 마치 병 속에 갇힌 전갈과 같습니다. 이것을 모르고 인간들은 결사적으로 하나님의 법과 말씀을 지켜서 자신의 처지를 바꾸어보려고 시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는 인간이 그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위배된다는 점입니다. 더 나아가서, 왜 인간은 살려고 해도 죽음이 멈추지 않느냐 하는 겁니다.
천사의 활동은 인간의 요청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거대한 산불도 인간이 요청한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태어난 것도 나의 요청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되는 것은 새로운 뿔의 등장으로 성립되는 겁니다.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눅 1:69)
뿔이라는 것은 초과적인 천사의 활동과 관련이고 그 천사는 배후에 주님의 활동입니다. 즉 인간→천사→예수님→천사의 절차로 성도에게 작용합니다. 이 ‘구원의 뿔’은 하나님의 의에 위해 새롭게 등장하는 남은 자 위에 작용합니다. 즉 새로운 뿔의 장인, 곧 천사는 새 백성을 하나님의 의 안에 가두어둡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3-34) 성도의 초과분, 성도의 위에 돌출되어 있는 것은 ‘의의 뿔’입니다.
이 진행 내용이 미가 4:7-5:5까지 나옵니다. 이 중에서 미가 4:13에 보면, “딸 시온이여 일어나서 칠지어다 내가 네 뿔을 철 같게 하며 네 굽을 놋 같게 하리니 네가 여러 백성을 쳐서 깨뜨릴 것이라 내가 그들의 탈취물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며 그들의 재물을 온 땅의 대주재께 돌리리라”고 나옵니다.
이 뿔에 해당되는 분은 어떤 모습으로 오실까요?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미 5:2) 바로 낮은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어느 정도 낮게 오셨는가요? ‘아무 것도 없는 곳에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바로 성도의 원형이십니다. 성도는 자신이 하는 모든 시도가 다 실패일 뿐이라는 점을 너무 감사하고 도리어 즐기는 자들입니다. 갈라디아서 2:21에 보면, “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다’는 대목에 주목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사울일 경우에, 그는 예수님이 헛되어 죽었다고 여겼던 자입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은 자기 만이 분노할 자격이 있다고 여깁니다. 인간은 분노에서 시작해서 분노에서 말미암아 분노로 끝납니다. 그렇게 해서 생긴 사건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러나 이제 사도가 된 바울은 이 십자가를 가지고 반대로 제시합니다.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더는 신경쓰지 않게 된 이유가 자신이 마땅히 실패하고 마땅히 버림받아야 될 존재임을 이제사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은 복음을 가지고 더는 실패하지 않기 위해 복음을 알고자 합니다.
달리 말해서 복음없이 살려고 복음을 찾고, 자신이 믿을 만한 것을 구성하기 위해 복음을 동원합니다. 따라서 이런 것조차 마땅히 실패해야 됨을 이제는 기쁘고 즐겁게 받아들이게 된 겁니다. 십자가에 나오는 그 의로 인해 인간도 예수님처럼, ‘아무 없는 곳에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꿈틀거리는’ 존재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에 의해 요청된 자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죄 안에 갇힌 자들은 이제 주님의 남은 자는 의 안에 갇힌 존재로서 주님을 증거하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의 본 모습을 이제는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스가랴 1장 18절에서 21절까지입니다.
“내가 눈을 들어 본즉 네 뿔이 보이기로, 이에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묻되 이들이 무엇이니이까 내게 대답하되 이들은 유다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헤친 뿔이니라, 때에 여호와께서 공장 네 명을 내게 보이시기로, 내가 가로되 그들이 무엇하러 왔나이까 하매 대답하여 가라사대 그 뿔들이 유다를 헤쳐서 사람으로 능히 머리를 들지 못하게 하매 이 공장들이 와서 그것들을 두렵게 하고 이전에 뿔들을 들어 유다 땅을 헤친 열국의 뿔을 떨어치려 하느니라 하시더라”
오늘 말씀은 굉장히 함축된 내용들이 있습니다. 세상을 볼 때 어떤 관점에서 보는 것이 하나님의 관점인가, 그 하나님의 관점과 우리들의 관점의 격차, 차이는 얼마나 벌어져 있는가를 보게 합니다. 일단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유다는 망했습니다. 이렇게 인간들이 현실이라고 붙잡고 있는 그 나라는 망해버렸어요. 망했을 때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는 그쪽을 같은 인간들이라고 이렇게 오해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쳐서 망가뜨렸다, 멸망시켰다. 근데 오늘 본문은 그것이 잘못이라는 겁니다. 사람이 사람을 쳐서 멸망한 것이 아니고, 거기에 네 뿔이 이 세상을 장악하고 있는 네 뿔이 바로 이스라엘과 유다와 예루살렘을 망하게했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거에요.
근데 이 뿔이라는 것, horn(뿔)이죠 뿔. 뿔은 뭐냐하면 이게 돌출된 상황을 이야기합니다. 돌출되었다라고 하는 것은 여분의 것, 초과분이에요. 이 세상은 인간들의 세계고, 인간들에서 관리되고 운영되고 개발되는 것이 상식인데 그것 말고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것 말고 초과분 인간들의 눈에 보이진 않지만 도리어 인간보다 능가하는,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그 초과분이 이스라엘과 유다와 예루살렘을 멸망케 했다 이렇게 되는거에요. 그렇게 돼버리면 그럼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라는 결론에 도달돼요. 인간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인간이 살려고 그렇게 애를 쓰면 쓸수록 인간은 아무리 살려고 애를써도 인간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인간의 형편과 처지는 바뀌지 않습니다. 골프친다고 사람 바뀝니까? 아니지요. 취미생활한다고 인간 새 인간되는 것 아니거든요. 인간이 취미뿐만 아니고 노동을해도 그렇고 직장 생활해도 군에 가도 군에 제대를 해도 사람은 바뀌지 않습니다. 심지어 교회나와도 사람은 안바뀝니다. 교회 나와서 말씀을 듣는 이유는 내가 교회 나와서 하나님 믿어도 나는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하는겁니다. 그걸 알아채는겁니다. 이거는 구원은 인간의 손에서 인간의 수준에서 실시되는 일이 아니다는 거에요. 이것을 성경 전체에서 벌써 창세기부터 하나님께서 친절을 다하여 우리에게 알려줬습니다.
뭐냐하면 너는 버림받은 존재다라는 거에요. 버림받은 존재. 인간은 자꾸 자기에게 결점이있다는데 인간은 결점이 있는존재가 아니고 버림받은 존재에요. 결점을 메꾼다고해서 결점을 장점으로 바꾼다고해서 안버림 받는게 아닙니다. 아무리 결점을 메우고 없앤다고 할지라도 역시 여전히 남는 것은 버림받은거죠. 이번에 그 하와이에 산불났잖아요. 섬하나가 통째로 완전히 다 타버렸습니다. 그리고 산불을 하와이 주민가운데 누가 그걸 요청했습니까? 우리 이웃집 애먹이니깐 산불 나가지고 하나님이여 저 이웃집좀 불타게 해달라 그렇게 요청해서 산불 났습니까? 아무도 요청한적없어요. 이게 인간의 형편입니다. 인생이라는게 그거에요. 요청한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이세상에 산불도 우리가 요청해서 되지 않은 것 처럼 내가 이 땅에 태어난것도 내가 요청해서 태어난게 아니에요. 버림받기 위해서 태어난 겁니다 이 땅에서. 니 조상 아담이 하는 그 행세 때문에 그 결과로 태어난 거에요. 인간세계에서는 성공이라는게 애초부터 없어요. 인간은 성공이라는게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은 뭔가 자기가 결핍을 느끼고 가만히 있을수가 없지요. 계속 뭔가 시도를하고 노력을 하죠.
근데 인간이 버림받는다는 그러한 확정된 결과는 달라지지 않고, 인간은 노력하고 있고, 그 두 개를 합쳐봅시다. 합치면 뭐가 되느냐 하면, 인간은 자기가 아는것과 가진 것으로 망한다. 자기가 열심히하는 그것으로 인간은 점점 무게감이 더 늘어서 망하는거에요. 하나님의 뜻은 간단해요. 하나님뜻은 뭐냐하면 1번 2번 3번 이렇게 하겠습니다.
1번, 지옥은 지옥다워야 된다는게 하나님의 뜻이에요.
두 번째는 사람은 사람다워야 된다. 버림받는 존재는 버림받은 존재로 살아야만 한다.
세 번째가 이 둘을 연결해야 돼요. 벌써 다잊어버렸죠.
첫 번째, 지옥은 지옥다워야된다. 이 세상이 버림받은 지옥, 저주받은 땅은 저주받은 땅답게 해야돼요. 산불 났다고 해서 그렇게 그거에 대해서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면 안돼요. 지옥불은 지옥불 다워야돼요. 아, 지옥에는 불이 있구나. 그걸 알 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이 허락해준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찬미해야 돼요. 물론 찬미 할때는 이미 시체가 되어있겠지만. 두 번째가 버림받는 사람은 매사가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는 그걸로 인하여 자기가 망하고 있다는 점. 사람은 사람다워야돼요. 이 둘을 합쳐야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따로따로 되지 않고 같이 연결되는 거에요.
그러면 연결되면 연결된 것이 네 번째입니다. 연결된게 뭐냐. 사람에게 마음맞는 사람은 자기밖에 없어요. 그래서 인간은 자기하고 대화합니다. 자기 빼놓고 맞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그래서 마치 컴퓨터 게임을 할 때 인간은 자기하고 대화하잖아요. 막 총쏘고 하면서 죽어라 죽어라. 그 대화상대는 컴퓨터에 있는 케릭터에요. 그림에 나오는 만화주인공들이에요. 그러니까 내가 내하고 싸우는거에요. 내가 내하고. 내가 죽이고 싶은 사람하고 컴퓨터 끄집어내서 내가 싸우는 거에요. 혼자 노는게임, 그걸 이제 시체놀이라고 하죠. 죽은 시체하고 노는거에요.
자, 이러한 인간은 이게 이제 인간은 버림받은 그러한 실태인데요. 인간이 버림받았기 때문에 마음맞는 사람 자기밖에 없어서 평생을 살아도 자기하고 노는거에요. 누구하고 이야기해도 자기 이야기만 듣고 자기 이야기만 회수해버립니다. 상대방은 들어준다고 애를먹죠. 그래서 1번, 지옥은 지옥다워야 된다는 말이 무슨뜻이냐 하면, 천국을 인간이 안가는게 아니고 못가요. 인간은 천국을 못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결심은 굳어졌어요. 지옥은 지옥다워야돼요. 천국은 들어오지 말라고 만든게 천국입니다. 왜나하면 하나님의 뜻은 이땅은 지옥다워야 된다는 하나님의 일관성 때문에 그런거에요.
그래서 성경보고 교회오면서 무슨 착오를 일으키면 안돼요. 사태를 제대로 파악을해줘야돼요. 그리고 사람은 사람 스스로 초월할수 없고요, 자기를 초과할 수 없어요. 인간은 인간다워야 되니까. 열심히 노력하는데 뭐 초월을 이야기하는데 그걸 자기가 아는 것, 자기가 아는 성경지식 그게 자기를 더 무너지게 만들고 망하게 만드는거에요. 이게 뭐냐? 버림받은자의 재현. 표현하는거에요. 내가 버림받았다는 것을 몸부림치는 그 재현을 매일같이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 성공했다. 누가 출세했다. 그거 해봐야 그 사람 자기 무게가 더나갈 뿐이에요. 쇳덩어리가 더 많이 있어가지고 빨리 가라앉는 겁니다. 자, 그럼 이러한 성경 전체 내용이 이렇다면 그걸 오늘 본문은 어떻게 집약적으로 이렇게 이야기하느냐 하면 뿔이 나오거든요. 이 뿔이라는 것은 분명 사람은 아니에요. 사람은 아닌데 활동을 해요. 뭔가 움직임을 보여줍니다. 뭐야 너? 뿔 너가 거기서 왜 나와? 뿔이 왜나오냐 이말이죠. 우리 인간들만 있는게 인간세계라고 알고있는데 여기에 뿔이 갑자기 딱 등장해버려요. 뿔이 어떤활동을 하느냐? 유다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해치는 활동을 해버립니다.
자, 이 뿔이 어디서 나왔으며, 뿔의 기능이 무엇인가? 여기에 대해서 인간이니까 인간에 갇혀있으니까 난감하죠, 난감한데. 스가랴 계시를 통해서 뿔이 하는 기능을 21절에 보여줍니다. “때에 여호와께서 공장 네 명” 공장이라 하는 것은 장인이죠. 역시 천사입니다. 저 천사가 뭡니까? 솜씨 좋은 만드는 제조 기술이 있는 능숙능란하게 잘 만들어내는 장인. 재주꾼이죠. 그걸 공장이라 해요. 그러니까 뿔이라는 것은 그 뿔이 또 뭘하느냐, 또 그 공장이 뿔을 만들어요. “이 공장들이 와서 그것들을 두렵게 하고 이전에 뿔들을 들어 유다 땅을 헤친 열국의 뿔을 떨어치려 하느니라 하시더라” 뿔이 와서 뿔과 뿔이 만나서 해결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뿔이라는 것은 어떤 장인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만들어져 있는 그 무엇이 되는거에요. 역시 그 장인은 천삽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뭘 만드는가? 쉽게해서 이렇습니다. 병을 만든다고 보면돼요. 병 속에 전갈을 집어 넣는다 이렇게 하게되면, 그 병속에 있는 전갈은 전혀 위험하지 않죠. 왜? 가둬졌으니까. 예루살렘과 유다와 그리고 이스라엘, 이들을 망치는 것은 뭐 이렇게 이방민족 강력한 이방민족이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안돼요. 그거는 인간 세계 수준에서 이야기하는거니까요. 그러나 오늘 본문은 뿔의 수준에서 이야기합니다.
초과분. 인간들이 생각못하는 그 초과분, 초과분이면서 인간들이 실제로 활동하고 실제로 이 땅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삐져나오는 초과분, 여분의 것이에요. 이걸 쉽게하면 갈라디아서 3장 21절의 말씀이에요.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 말이에요.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다. 가두었다니깐 죄가 일종의 병이고 인간은 거기에 갇혔다 이렇게 보면 돼요. 유다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은 죄속에 가두어졌다 이래되는거에요. 죄속에. 그러면 죄는 어디있느냐, 죄는 인간과 더불어서 함께 초과분으로 나오는거죠. 이미 버림받았는데 인간쪽에서 어떤 대항력을 갖는거에요.
“아 우리는 뭔가 내 노력한 보람을 갖고싶지 내가 어떤 노력을해도 다 소용없다 그거는 내가 용납하기 싫다.”하고 버티는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뿔, 천사죠 천사. 이 뿔, 네 뿔을 통해서 그들을 망하게 하는 것은 그 유다 예루살렘 그 이스라엘로 하여금 아무것도 없는것에 아무것도 아닌게 꿈틀거리게 만드는 그러한 새로운 존재로 하나님께선 애초부터 이스라엘을 만든거에요. 아무것도 아니었을 때 아무것도 없을 때 비로소 아무것도 아닌 모습으로만 자태를 드러내는 희한한 민족. 그냥 세상적으로 있을때는 뭐 긴가 대단해보이지만 그래가지고는 유다 예루살렘 이스라엘의 실존, 본질이 드러나지 않아요. 망해버렸을 때, 그래서 아무것도 없을 때 아무것도없을 때 뭔가 대단한게 나오는게아니고 아무것도 없을 때 아무것도 아닌게 뭔가 꿈틀거리면서 나오게 하는 것. 그게바로 이스라엘의 정체가 되는거에요.
그동안 이스라엘이 쉽게 말해서 죄, 마귀지요. 마귀한테 망해버린 이유가, 자기가 뭐 약속의 땅도 있고 하나님도 자기편이 되었으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도와준다고 생각하는거에요. 그러니까 이미 플러스, 있음, 이미 있음을 주께선 지켜 주리라고 생각한거에요. 세상에도 그런사람 많습니다만, 세상에 있는걸 축약하는게 성경이니까 마태복음 19장에 부자청년, 부자청년이 예수님께왔을 때 아쉬워서 온게 아니에요. 뭔가 약간의 모자람을 마저 채우기위해서 온거에요. 그러니까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아니에요. 대단한 존재에요. 부자니까. 그 대단하다는 그걸 건드린겁니다 예수님께서. 지옥은 지옥다워야되고 사람은 사람다워야되고 버림받아야되고. 그 둘을 합치면 모든 인간은 악마로부터 선악과따먹어서 자기가 신인줄 알고 있어요. 자기가 자기하고만 이야기해요. 자기의 이익만 생각하고 다른 것은 일체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놓고 내가 뭐가 잘못되었느냐 하는거에요. 유다도 마찬가지고 예루살렘도 마찬가지고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에요. 같은 인간이니까 똑같이 그렇게 했던겁니다. 근데 하나님께서는 그 뿔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꼼짝마라, 완전 죄 안에 가두어 둔거에요. 죄 안에 가두어 두었을 때 이스라엘 유다 예루살렘 입장에서는 야 우리 참 손해봤다, 우리 큰 낭패다. 실패했다. 이래보잖아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행운인줄 알아요. 그게 복이에요. 내가 아무것도 아니다는 것을 내가 아무것도 아닌 이 상태에 놓여있을때에 근원 그 뿌리부터 다시생각하게 되는거에요. 하나님이 누구신가. 인간을 버렸죠. 그럼 나는 뭐냐? 버림받은 존재지요. 그럼 어떻게 나는 여기서 벗어날수있느냐, 못 벗어나죠. 바로 그 처지, 그 처지를 우리는 만끽해야돼요.
사람들은 내가 아무것도 아닌걸 가지고 뭐라하냐면 실패라고 하거든요. 그 실패를 즐길 수 있어야 그게 성도입니다. 이런 노래있지요. 실패의 끝을 잡고. 실패의 끝은 어디인가요. 어떻게 돌아왔는지 아무 생각이 나지않아요. 그런노래 알아요? 실패의 끝은 어디인가요. 양수경노래인데. 실패의 끝을 잡고. 김조한 잘 기억이 안나시는데 그러면 제목을 바꿀게요. 이 밤의 끝을 잡고. 이별의 끝은 어디인가요. 워낙 뭐 경건생활 했기 때문에 찬송가 외에는 다른노래를 모르기 때문에 이런노래 있었냐 하는데, 버림받은 입장에서 인간은 나머지는 누구몫인가, 천사의 몫이였죠. 자기 몫이 아니기 때문에 실패한 자체를 즐겨야되죠.
예감할 수 없었던 이별이였기에
무슨 말을 했는지 그저 눈물만 흐르네요
믿을 수가 없었던 이별이었기에
무슨 이유로 떠나야했나요
나보다 더 나를 사랑했던 그대가
왜나를 떠나야했는지
아직도 눈물이 남아있었나요
내모습이 정말 싫어요
또다른 사람을 찾아야 하나요
내 이별에 끝은 어디인가요
무슨 이유로 떠나야했나요
나보다 더 나를 사랑했던 그대가
왜나를 떠나야했는지
아직도 눈물이 남아있었나요
내모습이 정말 싫어요
또다른 사랑을 찾아야하나요
내 이별의 끝은 어디인가요
만약에 실패를 즐기지 못하는 사람은 뭐가나오냐하면 분노의 끝을 잡고, 이 분노의 끝은 어딘가요? 이래되는거에요. 분노 아니면 감사, 감사 아니면 분노. 이 둘 중에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럼 왜 분노하는가? 그거는 내 인생이 허비되기 때문에 그래요. 내 모든 수고와 노력이 허사고 허비되는 것. 이건 도저히 인간이 참을 수 없는 겁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수련회가 아직 안 끝난 모양이죠? 갈라디아서 3장 19절에 보면, 천사가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가,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서 병 속에 전갈을 담은 것 처럼 주님께서는 인간을 병 속에 집어넣어버린거에요.
그 병을 만드는게 장인이고 천사고, 유다 예루살렘 이스라엘 너희들은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도 버림받는다는 처지에는 변동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내 인생 내가 해결할 생각하지 말고 천사에 맡기시길 바랍니다. 드라마 대사보면 이런게 있어요. 서로 뭐 아주 사랑이 넘쳐가지고 대화가 아주 부드러워요. 남자가, “저 가방주세요” 하고 여자한테 친절을 베풀어요. “가방주시렵니까?” 여자가 빼는 듯 안빼는 듯 이야기합니다. “가방 무거워요.” 남자가, “무거우니까 내가 들려고 하죠,” 무거우니까. 여자가 줬겠어요 안줬겠어요? 대번에 줬죠. 왜? 무거우니까. 병 속에 갇히면 되는데 우리는 병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내 인생 끝까지 내가 해결할려고 하는거에요.
이미 버림받은거고 우리가 이게 멸절대상은 우리가 요청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청한거니까 이거는 달라지지 않아요. 기어이 사라지고 기어이 죽여버립니다.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교회와서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의 법을 지키고 말씀을 따르려고 애를 쓰는데 왜 우리의 죽음은 멈추지 않느냐.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는 것은 니가 어떤 것을 해도 이 말씀에 뜻과 위배된다는 것을 계속 알려주기 때문에 그런거에요.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해서 말씀을 지킨다고 해도 항상 위배가 되는거에요. 그러니까 인간으로서는 자존감이 확, 분노의 끝을 잡고 분노가 확 일어나죠. 분노에서 시작해서 분노로. 분노의 뫼비우스 띠. 분노와 분노의 만남. 주로부터와 주로 말미암아 주로 가는게 아니고 분노로부터 와서 분노로 말미암아 분노로 가는거에요. 그래서 인간이 분노하는 그 모습을 보면 이렇습니다.
복음을 찾는 이유가요, 복음없이 살려고 찾는거에요. 복음을 찾는 이유가 까지것 복음 챙기면 나머지는 내가 안 버림받겠지 다 노림수가 다 계산이 있어요. 그래서 복음을 왜 찾는가? 자기가 믿고싶은 것을 자기가 복음을 이용해서 자기가 만들려고 하는거에요. 왜냐하면 나는 나하고만 이야기하니까. 내가 믿을만한 그럴싸한 것을 복음을 재료를 넣어서 꾸며요. 꾸민다고요. 그래서 누가 뭐라하면 나는 복음 내 믿는데 복음한번 이야기해볼까 해가 복음이야기 한 두시간 이야기 쭉 하고요. 그것조차 주의 뜻과 위배되요. 그것조차. 그냥 실패를 즐기면 되는데, 죄속에 갇혀놓으니까 뿔이 와서 뿔의 장인이 병을 만들어 그안에 우리를 가둬놓았으니까 우리는 거기서 죄를 벗어나서 천국 못갑니다.
그럼 주의 뜻은 뭐냐. 주의 뜻은 간단해요. 니 인생 허비하라는게 주의 뜻이에요. 뭐 얼굴 보니 기쁜소식처럼 들리지않죠. 우리 인생을 허비하는거에요. 왜냐하면 우리가 하루하루 사는게 내 뜻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미래에 자꾸 쫓기는 경향이 있어요. 과거에 쫓기는게 아니고 미래에 쫓겨요. 앞으론 잘되겠지 앞으론 잘되겠지. 목적의 끝을 잡고. 오늘 끝 너무 많이 잡는다. 목적의 끝을잡고 자꾸 뭔가 내년되면 3년후에는 뭔가 있겠지. 2년뒤에면 집사서 나가겠지 이런 것. 미래에 쫓겨요 미래에. 근데 성공이란 것은 없습니다. 왜? 버림받도록 돼있기 때문에 그리고 이 세상은 지옥다워야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매일같이 죽도록 일하고 밤늦도록 일하는 그 결과가 결국은 허비되는거에요.
그러면 허비 안돼는 방법은 없는가? 없어요. 허비하라고 이 땅에 역사적 사명을 띄고 이땅에 태어난 거에요. 인생 허비하라고. 그 허비한 사람 중에서 우리나라에서 제일 유명한 사람이 있어요. 안중근 의사. 이봉창. 광복절을 맞이해서요. 그래서 그래도 예수 믿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예수 믿으면 내가 천국가지 않겠습니까? 그게 바로 내가 안 허비하고자 내가 손해 안보고자 내가 내인생 성공적인 인생으로 노선 바꿀려고 아주 몸부림 치는거에요. 죄의 병 안에 들어서. 하나의 전갈로서. 몸부림치는겁니다. 몸부림치면 지 몸만 아프죠.
그러면 오늘 본문 내용은 뭐냐? 다른 뿔들이 와요. 그 뿔말고 다른 뿔이. 다른 뿔을 만들어서 그 뿔의 병을 깨뜨려버립니다. 지금 유다와 예루살렘 이스라엘은 병속에 죄속에 갇혀있잖아요. 그 죄를 깨뜨리고 나면 그들은 죄에서 벗어나는게 아니고 그들을 새로운 뿔, 새로운 뿔에 가두게 만들어요. 그 뿔이 뭐냐. 하나님의 의에 예수 안이라는 뿔에 가두게 만드는 겁니다. 이러나 저러나 인간은 가두어지기는 마찬가지에요. 내인생 내가알아서 한다는 것은 자체는 이거는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용납할 수가 없어요. 죄의 종이 되든지, 아니면 의의 종이 되든지 그거는 내 손에 달린게 아니고 초과분이에요. 뿛이라 하는 것은 초과된거에요. 돌출부에요. 나인데 뭔가 내가 있는것에서 돌출된 것, 쳐다보니깐 내가 손대지 않고 만들지도 않았는데 뭔가 내위에 돌출되어있어요. 그게 죄냐 의냐 이 말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주님께서는 이 땅에서 어떻게 오셨는가. 천사를 역시 동원하지요. 갈라디아서 3장 19절,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이다”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이다. 중보자가 계신데 천사들을 동원해서 주신 것이 바로 율법을 주신거에요. 그런데 율법을 주신 이유가 뭐냐, 이게 우리에게서 계속 초과분이 나오는거에요. 무슨초과분? 죄라는 초과분. 그 죄의 초과분을 율법이 와서 달라붙어서 같이 율법과 함께 그 죄를 제거하기 위함이에요. 없애주기 위함이에요.
다리에 털나는 것 파스 붙여가지고 파스와 털을 같이 제거하는 거에요. 생각만 해도 시원하죠. 아프죠. 나의 성공을 나의 완전함을 완전히 털처럼 뽑아가지고 버리는거에요. 그러면 그 작업을, 이 작업을 어떻게 하느냐? 미가 4장 13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사실은 미가 4장 13절 말씀은 제가 읽어 드릴텐데요. 사실은 그것을 설명할려면 미가 4장 7절에서 미가 5장 5절까지 다읽으셔야돼요. 그런데 시간 관계상 다 읽지는 않고 미가 4장 13절 하고 앞에 것 설명하겠습니다. “딸 시온이여 일어나서 칠찌어다 내가 네 뿔을 철 같게 하며 네 굽을 놋 같게 하리니 네가 여러 백성을 쳐서 깨뜨릴 것이라 내가 그들의 탈취물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며 그들의 재물을 온 땅의 대주재께 돌리리라” 이래돼있어요.
여기에 유다, 시온에서 뿔이 나오는거에요. 시온 자체가 뿔이 되는거에요. 그럼 이 말은 뭐냐? 새로운 시온과 예루살렘은 어떤 기능을 하느냐 하면 천사의 기능을 하는거에요. 천사의 기능. 미가 4장 6절에서 보면 “그 날에는 내가 저는 자를 모으며 쫓겨난 자와 내가 환난 받게 한 자를 모아서” 그만큼 이스라엘이 망했다는 뜻이에요. 망했는데 내가 그 남은 자로 백성을 다시 시온산에 끌어모아서 거기서 해산한 여인처럼 내가 새로운 백성을 낳아서 그 백성을 가지고 주위에 있는 이방민족이 시온을 굉장히 욕을 하는거에요. 망해도 싸다고 하니까 13절에 시온아 일어나라, 내가 너희들 비난하는 자들을 칠 것이다.
그래놓고 미가 5장 1절에, “딸 군대여 너는 떼를 모을찌어다” 같은거에요, 계속 끌어 모으는거에요. 끌어모을 때 뭐냐하면 인간은 망하고, 그다음에 망하고 난뒤에 일은 누가하느냐, 망했으니까 못하죠. 죄악에 가두었으니까, 그러면 누가하느냐. 천사가 보내 천사가 일하고 그 천사가 일한 것을 핵심이 천사를 누가보냈느냐, 주인공. 천사를 보낸 당사자가 바로 미가 5장에 나옵니다. 2절에,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찌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메시아가 오는거에요, 메시아. 메시야를 비난하는 인간 망하고 일은 천사가 하고 천사 배후에 메시아 있고, 메시아가 새로운 예루살렘과 유다와 이스라엘을 천사의 역할, 천사의 기능을 하게 만든다 이 말입니다. 그렇게 하게 되면 새롭게 남은 자들, 새롭게 구원받은 백성들은 뭔가 초과분이 있어야 되잖아요. 그 초과분을 누가복음 1장에서는 그걸 뭐냐하면 1장 69절에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구원의 뿔이나와요. 구원의 뿔. 가만히 있어 전쟁 내가 할게, 이게 구원의 뿔이에요. 뿔은 초과분이에요, 돌출될 분이에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모아놓고 백성보고 일하는게 아니고 백성들에 집중했을 때 그 압축을 했을 때 튀어나오는 그 백성이라는 모든 의미가 꼭지점에 모였을 때 그게 뿔이 되는겁니다. 단단하죠. 내가 의롭다 한 일을 누가 죄라고 하리요. 로마서 8장에. 누가 정죄하리요.
성도라면 이런 뿔정도는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꼬깔콘만 먹지말고요. 그 우상 그 꼭지 밑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병안에 담겨있어야 돼요. 전갈 되면 안되죠, 천사가 돼야되니까. 2절 다시읽어보면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찌라도” 망한 유다에서 뿔로서 등장하는거에요. 쏙 튀어나오는 것. 꼬깔콘처럼 쏙 튀어나오는 그분이 바로 메시아가 되며, 메시아가 등장하면서 더 뒤에쪽에 뭐냐하면 하나님이 메시아에서 또는 천사의 부름을 받아서 모아놓은 집결된 하나님의 군대들이 뿔 뒤에 포진되어있는거에요. 그들은 한목소리로 냅니다. 하나님의 의가 이기는거라고.
그의 근본은 상고요 태초니라. 버림받았던 그분, 우리를 버렸던 분이 우리를 이제는 요청해주시는거에요. 천국백성으로 요청하는거에요.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는것이아니고 요청받아서 들어가고 허락받아서 들어가는 겁니다. 너너너너너, 들어와 하고 호출하는거에요. 호출. 흔한 말로 선택이죠. 택정함을 입었다고 하죠. 어떻게? 긍휼로서 불쌍히 여겨서 선택을 받은거에요. 선택받은 백성이 할 일은 간단해요. 실패의 끝은 어딘가요? 그걸 아주 실패를 즐기는거에요. 오늘치 실패로 끝났고 내일 눈뜨면 내일 실패는 또 어디인가요? 악마는 말합니다. “니 왜그래 개뿔도 없는게 왜그렇게 자신만만해.” 아무것도 없는데서 아무것도 아닌게 꿈틀거리고 나오는겁니다. 그게 뭐냐하면 마치 예수님같은 것. 천사는 원래 이세상에 없잖아요. 없는데 천사가 활동하잖아요.
성도도 마찬가지에요. 성도는 없는데 성도가 발생되는겁니다. 주님의 요청에 의해서. 그래서 구원받는 사람이 몇 명이냐가 아니라, 구원받는사람이 있다는 그 자체가 희한한 기적입니다. 뭐 예수님 부활 보고싶다고요? 성도 있으면 그 부활 못지않습니다. “니가 왜 성도야 니가” 내 끝을 잡고. 내 실패의 끝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자, 갈라디아서에서 방금이야기한 것, 이것을 갈라디아서 2장 21절은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2장 21절,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여기서 헛되이 죽으셨다는 말은 현재 우리가 헛되이 살고있다는 뜻이에요 이게.
우리가 헛되이 살고 있으면서 이게 이 자체도 헛되지 않을 거야 의미있을거야 라고 생각하니까 자꾸 내가 믿고싶은 복음을 내가 만들어내는거에요. 주님이 우리 눈에 헛되이 죽었잖아요, 주님이. 베드로가 고백하고있는 건데 우리가 현장에 가보세요 우리도 도망쳤어요. 주님의 끝은요. 진짜 실패의 끝을잡고 에요. 실컷 뭐 긴가싶어서 갔는데 3년동안 따라다녔는데, 역시 그냥 아무것도 아닌거에요. 아무것도 없어요. 죽음이에요. 끝났어요. 그래서 제자들도 “아, 아무것도 아니구나”하고 고기잡으러 갔잖아요.
그 타인의 마을 1강에 보면 나옵니다. 신간입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제가 여러번 이야기 했습니다만 교회 한 40년 다녔다. 거기서 다녀놓으니까 여기서 뭐 진급시켜가지고 장로까지되고 또 신학교가서 신학해서 목사됐다. 뭐? 성도가 찾는 것은 목사를 찾는게 아니에요. 신자를 찾는거에요. 신학교 나온 목사를 찾는게아니고 신자를 찾습니다. 신자의 특징은 뭐냐? 내가 아무것도 아니어야 된다는거, 억지로 되는게 아니고 원래 나는 그래야 되고, 또 원래 그렇고. 우리 인생은 이렇게 살아요. “나 전 인생 털어넣었다”하잖아요. 전인생 털어넣었다 투자했다 이렇게하는데, 그래살면 안되고 전 인생 털렸어요 벌써. 우리의 전인생 이미 털렸어요. 예수님이 헛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도 떠나고 다 떠난거에요. 그걸 강조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사도되기 전에 자기도 예수님의 죽음을 헛되이, 그때는 예수님이 아니고 예수죠. 예수의 죽음을 헛되이 봤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천국에 오라고 요청하고 천국 하나님의 의로서 내가 의의 뿔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택정함을 받으니까 분명히 헛되이 죽은 것이 그것이 헛된게 아니고 반대로 내가 구원받으려고 내가 살려고 한 이 짓이 헛되다는 그걸 알고 사도바울이 얼마나 감사하고 기뻐했겠습니까? 그렇게 몰랐던 눈이 감겨도 한참감겼던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열심히 노력하고 애쓰면 남들이 알아주겠지 이렇게 하거든요. 그러나 지 주제 파악을 해야죠. 이미 버림받은건데. 그동안 이 버림받은것도 모르고 마귀한테 속아가지고 열심히 노력하고 예수믿고 기도하고 성경공부하고 수련회 참석하면 뭐 된다, 되기는 뭐가되, 안돼요. 취미생활이에요. 화투친다고 인간되는 것 아니거든요.
그 인간 안됨을 인간이 안된다는 사실은 왜 이제 알려줬어 이제. 왜 이제 알려주십니까. “니가 이제라도 알았으니 얼마나 큰 다행이냐” 이말이죠. 이제라도 알았으니. 모든 일에 감사하고 모든 것에 기뻐할 수밖에 없는 것은 모든 일이 주의 뜻하고 안 맞기 때문에, 모든 일이 실패기 때문에 비로소 버림받아야 마땅하고 이 땅이 지옥이며 나는 내하고 대화하는게 나의 근성이고 이거는 못 고친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즐거움, 기쁨. 그래서 누가 이야기하길, 예수님은 왜 죽었지 헛되이죽었어. 아주 자신만만하게 헛되이 죽었어. 그리고 나도 같이 그 헛되이 죽음 앞에 그분의 헛되이 죽음이 바로 나의 죽음이었어. 내죽음이 얼마나 헛되다는 것을 알려주기위해서 주께서 헛되이 죽으셨거든요.
그 순간 우리는 율법으로 의롭다하다는 생각은 싹, 싹 없는거에요. 율법으로. 이제는 율법으로 의롭다하는 것이 없습니다. 뭐 뭔가 돼야 기대하지요. 주께서 헛되이 죽으셨지, 헛되이 죽었던 그것이 아무것도 없는데서 아무것도 아닌 꿈틀거리는 그것이 십자가고, 그 십자가는 날마다 우리의 참 철딱서니없음을, 내 주체를 모르고 있는 것을 날마다 주께서는 십자가로 쳐주죠. 끝으로 한 예를 들고 마치겠습니다. 독일의 유명한 그림 형제라는 동화작가의 제일 짧은 동화가 이거에요. 고집센 아이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애가 하도 엄마 말 안듣고 굉장히 고집이 세요. 걔가 결국은 죽었어요. 사고로 죽어가지고 흙을 이렇게 장래할 때 흙을 묻는데, 이게 얼마나 말을 안듣는지 흙을 다 묻었는데 흙 다 묻고 집에가자 하는데 팔을 딱 내밀고 있는거에요 흙속에서. 얼마나 말을 안들어요. 또 팔을 억지로 해가지고 흙 묻어도 애는 죽었으니까 또 이쪽 팔 하는거에요.
그래서 보다가 그 엄마가 죽은 아이의 엄마가 팔 이것 안내려? 때리니까 그제야 조용하게 흙에 조용하게 죽었답니다. 주님께서 이미 너는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너는 이미 의롭다는 그 회초리 가지고 매일같이 때리는거에요. 근데 니는 선악체계 가지고 나 어때 나 지금 괜찮지 내 지금 잘났지 그럴싸하지 남한테 밑지지 않지 나도 인간답게 살지. 이것. 이미 죽은 존재가 왜 팔을 자꾸 벌리냐 이말이죠. 그때마다 십자가 가지고 때려주는거에요. 너는 의라는 병안에 갇혀있는 천하의 전갈같은 죄인이다. 주께서는 의인을 부른게 아니고 죄인을 불러서 새 부대에 새술을 담듯이 예수님의 의의나라를 우리를 통해서 증거케 하는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께서 하신 모든일을 전체를 보지를 못했습니다. 일부만 보면서 마치 나를 가치있는 존재로 만들려 하는 이짓이 바로 죄의 짓인 것을 헛되고 헛된짓인 것을 이제는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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