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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줄 존재가 없을 때=본질

아빠와 함께 2024. 6. 13. 18:54

2강-말라기 1장 6-8절(본질의 노출) 240612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말라기 1장 6절에서 8절까지입니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찐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찐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아멘.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유다 민족을 책망을 한다는 것, 이게 아주 신기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찾아오실 때 이처럼 책망을 통해서 찾아오시는 이유는 인간은 책망을 듣지 아니하면 항상 자기 정당화 자기 합리화로 중무장해서 살아가고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유다 백성에게 선지자를 통해서 꾸지람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구조가 있는데 그 구조하고 너희 유다 민족의 구조가 그게 합치되지 않고 있다는겁니다. 인간들이 그 합치되지 않는 이유는 인간은 자기나름대로의 이땅에서 살아가면서 자기중심으로 구조를 만들어요. 이 구조라는 것은 구조를 두 개의 구조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인간중심의 구조가 있고 하나님의 말씀중심의 구조가 있는데 인간중심의 구조를 가지고 뭐라고하느냐 하면 ‘존재한다. 내가여기 있다.’라고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동안 이 말라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제사장들과 유대 민족이 자기가 열심히 나름대로의 제사를 열심히 드렸는데 그 하나님의 종 말라기 선지자의 입장에서 보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의 구조와, 동그라미가 있다면 그 동그라미에 완전히 일치되는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상태에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선지자가 그렇게 이야기 할 때에 거기에 대해서 “아, 잘못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어야 될텐데 오늘 본문 6절 끝에 7절에 보면,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그렇게 되어있어요.

또 7절에 보면,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까 하는도다” 이렇게 반발하고있습니다. “선지자를 통한 그 지적에 대해서 우리가 전혀 동의하지 못하겠습니다.” 라고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본문을 보면서 저도 보고 여러분도 같이 볼 때에 여기 8절에 보면,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래 되어있는데 그렇다면 눈먼 희생물 말고 눈이 아주 가버린, 병든 희생물 말고 그리고 저는 희생물 말고 그냥 누가봐도 허술한 제물 드리지 않고 진짜 싱싱한 누가봐도 이거는 제 1등급 최고급 희생을 드리면 하나님께서 이 제사를 받겠느냐 하는겁니다.

하나님이 지적하고 하나님이 책망한 그 책망 조항에 대해서 수정을 가해서 바르게 드리면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래, 바른 제물 드렸구나. 니가 그런식으로 줄곧 나와함께 제사 받아줄게.”이렇게 하실꺼냐 하는겁니다. 그게 안돼요. 인간쪽에서 약간 수정을 하고 시정조치 한다고해서 하나님께서 그걸 온전하게 받지를 않습니다. 그 이유가 여기 6절에 나옵니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이래되어있어요. 이렇게해서 하나님께서는 그 제물을 받지않겠다고 했는데 이 제물 받지 않는 경우가 어떤 경우냐에 대해서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어요. 그게 이사야 1장에 11절에서 17절 나오는데, 그게 약간 좀 길어요. 긴데 압축을 해서 말씀드리면, “너 소돔과 고모라 이 백성들아. 너희들의 수많은 번제와 살찐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어린양의 피에 기뻐하지않는다. 너희가 기름도 얻고 제물 바치고 피줬는데 나 그거 안받는다.” 안받는다는거에요.

그 이유가 뭐냐?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이 이사야 1장 3절의 말씀이나 오늘 말라기 1장 6절의 말씀이나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찐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이렇게 되어 있는거에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꾸지람을 하시는데 그 꾸지람이 인간들은 뭐 어떻게 대처하느냐 하면 “내가 성의것 모든 것을 시키는대로 정성스럽게 다 하면 하나님 받으시겠죠.” 하게 되면 주님께서는 어떤 구조를 가지고 있어요. 어떤 틀을 가지고 있다고요. 틀에 부합되지 않고있다는겁니다. 그 틀이.

그 틀은 뭐냐? 아버지에게 아들다운 아들로서 니가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겁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생각하는데 그 아들다운 면면을 안보이고 있다는거에요. 그러면 이 이사야에 1장에서 좀더 많이 생각을 더해볼필요가 있어요. 그게뭐냐하면 “니가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아니하고”이렇게 되어있다 이말이죠. 그럼 그 뒤에 도대체 선지자를 통해서 왜그렇게 책망을 하는지 어디가 안맞는지 어디가 틀어졌는지 무엇이 문제가 되는지를 인간의 입장에서는 알 수가 없지요. 책망은 하지만.

여기에 이사야 1장 17절에, “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다시말해서 그들이 뭔가 정기적으로 제사를 드리고 예배를 드리고 절기를 지켰는데 하나님께선 그걸 아들다움으로 보지 않고 아버지를 제대로 아버지라고 이해하는 모습이라고 보지 않고 “학대 받는자를 도와주고 공의를 구하고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이것이 너희들이 제대로 안되고있다는거에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러면 고아를 돌보고 과부를 돌보고 학대받는 사람을 도와주면 그럼 우리 제사도 받고 우리를 아들로 인정해주시겠습니까?” 이렇게 나올꺼다 이말이죠. 그게 또 안돼요. 그렇게 나와도 안돼요. 그러니까 이게 주님께서 괜히 지금 시비걸고 있는 억지로 흠집을 찾아내서 시비걸고 있다는 그런 뉘앙스가 굉장히 여기서 강합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주시면서.

하나의 예를 들면 돈없고 몸아파서 가누지도 못하는사람. 그런사람을 만약 어떤사람이 함부로 대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사야 1장에 의하면 이 세상에서 제일 겁나고 무서운 사람은 약한자 병든자 가난한자가 제일 무섭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과 주님이 밀착되어있기 때문에 그렇다는겁니다. 밀착되어있기 때문에. 이 점을 이렇게 이야기해도 무슨말인지 몰라요. 돈없고 어렵고 병든사람 그럼 위해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들로 인정해주는가? 그래도 아들로 인정 안해줘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는 것은 뭔가 주님의 꽉잡힌 틀이 있어요. 구조가 있어요. 그 구조를 들이밀면서 “니가 이렇게해도 그 틀에 안맞고 저렇게 해도 틀이 안맞다”는 것을 계속 확인시켜나가는 겁니다. 그게 바로 제사에요. 제사라는 것은 없는데서 나왔거든요. 이 제사법이란 것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제사는 없음의 세계와 맞닿아있어요. 없음의 세계를 직면하고 있습니다. 없음의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게 제사에요. 근데 인간들은 인간들의 살아가는 행동은 어디서나오느냐 하면 있는데서, 내가 먼저 있고요. 있는것에서 있는 것을 어떻게 보존하느냐와 관련되어있습니다. 없음에서 나온게 제사다 이말이죠.

율법은 이세상에 없어요. 땅의 세계 없는 세계. 없는 세계를 구조의 세계라고 이렇게 제가 말을 드리겠습니다. 좀더 알기쉽게 말해서 어떤 사람이 건축가보고 “우리 집좀 지어주세요.”하니깐 건축가가 “예 알겠습니다.”하고 건축자재를 그땅에다가 쭉 부어놓고 “자, 여기서 사세요.”하고 집에 가버렸어요. 건축 자재들이 있는데 그것이 살집은 아니죠. 자재하고 재료가 있고 그것을 구조를 만들어야 돼요. 이제 구조라는게 무슨뜻인지 알겠습니까? 재료가 있는데 재료가지고 안되고 이게 틀, 구조를 잡아야 살 집이 되는거에요.

근데 인간이라는 것은 뭐냐하면 인간은 존재거든요. 인간의 존재가 자신은 하나님이 만든 존재, 하나님이 만들어서 있다고 하나님의 구조라고 이렇게 우깁니다. 인간들은. 그 ‘일각수’란 단어가 나오니까 학생이 선생님한테 묻습니다. “선생님 일각수가 뭡니까?” “일각수라 하는 것은 뿔이하나 나와있고 그리고 말처럼 생긴 것이 바로 일각수야.” 이렇게 선생님이 친절하게 설명해주니까, “그 일각수 어디에있습니까?” “없어, 그런 존재는 없어.” 그런존재는 없어요.

없는 존재인데 본질은 있어요. 이게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이 없는데서 만들어 낸게 하나님의 아들이에요. 그 없는데서 나타난게 그게 언약이고 율법이고 말씀이고 뭐 같은 말, 약속, 다 같은 말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고 그 언약이 구체화 된 것이 바로 그 본질과 합치된 존재가 하나님의 이스라엘로 그렇게 하나님께서 설정을 한겁니다. 본질과 존재안의 본질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 되기 위해서 하나님이 언약을 주신거에요.

그 언약을, 그 이스라엘을 출애굽기 4장에서는 뭐라고하냐하면, “내 아들, 내 장자”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자, 여기서부터 이제부터 어려워요. “이스라엘은 내 장자라.” 출애굽기 4장 24절의 말씀인데 여러분 이것을 이스라엘로 이름을 바꿔보세요. 야곱으로 보세요. 야곱.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내아들 만들었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러면 그 야곱이란 아들은 말라기 1장에 나오지만 어디서 나오는가? 원래 쌍둥이로 나왔어요. 쌍둥이로 나왔는데 똑같은 하나님의 예언에 의해서 태어난 두 남자가 있는데 한쪽은 아들이 아니에요.

한쪽은 장자가 아니고 아들이 아니고, 한쪽은 하나님이 인정한 내 장자, 내 아들로서 야곱을 따로 빼돌린겁니다. 따로 구분시킨거에요. 그러면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아들이라는 그게 나왔지만 그 본질을 어떻게 주입시키느냐. 에서는 제끼고 야곱한테는 하나님을 직접 만나게 해요. 직접 만나서 여기서 야곱이 무엇이 누락되고 제거되느냐하면 자신의 환도뼈가, 자기 존재를 지탱할 수 있는 힘이되는 힘의 원천인 환도뼈가 날라가버립니다.

그때까지는 자기가 야곱이라고 생각했지 이스라엘 이름 따로있다는 생각은 상상도 못했어요. “처음도 야곱이고 지금도 야곱이다.” 야곱으로서 하나님과 싸웠던 거에요. 그러나 야곱이 하나님과 싸우고 난 뒤에 하나님의 복을 받아서 아들이 되었을때의 이름은 야곱이 아니고 뭐로 바뀌느냐? 이스라엘로 바뀌어요. 그것은 환도뼈가 날라가버린 야곱이라는 껍질, 껍질이 날라가버릴 때 본질이 나오는겁니다.

그렇다면 돈없고 몸아프고 가누지도 못하고 그런 자들은 여기서는 아까 이사야에서는, 고아와 과부, 그런 자들은 뭐냐하면, 내세울만한 껍질, 존재가 없어요. 그럼 뭐냐? 본질만 노출된채 살아가는겁니다. 그 본질을. 아들로서의 본질, 그런데 이사야 1장에서 “너희들은 고아와 과부” 이 불쌍한 사람들은 없음을 본질로 가지고 있어요. 왜냐? 내가 살아도 산게 아니에요. 뭐 내세울 만한게 있어야 되는데, 심지어 변변한 자기의 본질을 덮을 걸칠만한 존재의 껍질 조차도 이게 다 낡아 떨어졌어요. 없어요.

없는겁니다. 그냥 날것으로 살아가는거에요. 살아도 산게 아니고 죽은거에요. 내세울게 없으니까. 방실이라는 사람. 그사람이 부른 노래에 서울 탱고에 보면 이런 가사가 나와요. 내고향도 묻지마시고 내 나이도 묻지마세요. 그냥 쉬었다가세요. 술한잔하면서. 이 말을 압축을 하게 되면 “나에 대해서 더 이상 알 생각 하지 마세요. 나는 그냥 있어도 없는겁니다.” 이런 뜻이거든요. “난 있어도 없는거니까 고향이 어디십니까? 나이가 어떻게 됩니까? 애는 몇 명되는지.. 묻지마세요. 나는 날것 그대로에요.”

걸칠 존재가 없어요. 약하고 병들고 가난하고. 왜 주님께서는 그들 이스라엘 그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지칭되는 나라에 그런사람을 왜 발생했을까요? 장차 유일한 아들이 바로 그런모습으로 오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누가 건드려도, 누가 때려도 그냥 뺨을 얻어맞는 그런 모습. 그런 모습은 때리는 자가 누구냐? 존재가 확고한 자들이 때리죠. 존재가. 자기가 자기 존재를 지키고자 모든 신경을 곤두서서 내존재 내존재를 강화시키기 위해서 애썼던 자들이 예수님을 모독하고 때립니다. 그 대목을 제가한번 읽어드리겠어요. 얼마나 모욕했는지.

마태복음 27장 37절에서 42절까지요.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니는 죄인이야 하고 패를 붙인거에요. “이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흔든다는 말은, 안돼. 처지가 안되었다는거에요. “아이고. 내가 그런 처지라면 나는 진짜 말을, 죽겠다”할 정도로 안됐다는 거에요.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그러니까 머리를 흔드는 것 보다도 요즘 식으로하면 제일 더 실감나는 거는 손가락을 흔드는거에요. “음. 아니야. 그건 아니야.” 이런거요.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러니까 당신은 딴 소리 할 것도 없이 당신은 본인부터가 자기 구원을 실험적으로 못보였다는겁니다. 자기구원. “니나 잘하세요.”하고 똑같은 말이에요. 자기 자신도 구원 못하면서 어떻게 남을 구원하느냐? 정말 이거는 근거있는 모욕이죠. 이 말은 뭐냐? 그 당시 예수님은 구원이 아니라 정반대,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있는 과정을 가고있습니다. 버림받는거에요. 버려지는거에요.

그리고 주변에 아무도 예수님을 건져 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안건져줍니다. 인간으로서는 제일 싫어하는 상황이에요. 사태에요. 인간이 제일 거부하는 사태를 지금 예수님은 그걸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걸 실천하고있어요. 그러니까 이말은 뭐냐하면, 조금 어렵게 이야기해서 제사 제도가 뭐냐? 슬로프에요. 제사제도가 슬로프인데, 위에서부터 없는데서 주어진 그 제사제도가 마지막에 어디까지 미끌어지고 쫄딱 미끌어져서 쳐박히느냐 하면, 제물의 죽음까지 쳐박혀요. 그게 하나의 슬로프라는거에요. 스키타는 내려오는 것.

하늘에서 시작된 것이 땅에 쳐박히는거에요. 인간들이 제일 싫어하는 상황까지 거기에 완전히 박혀버리는겁니다. 그 다음에,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찌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이렇게 되어있어요.

이런 모욕을 당해야 아들이라는거에요. 이 말라기의 오늘 주제가. 이런 모욕을 당해야 아들이라는거에요. 그러니까 그 당시 제사장들이 어떤 입장에 있느냐 하면, 일단 왕이 없습니다. 그리고 제사 제도는 있는데 성전이 없어요. 성전도 초라하기 짝이 없고, 제대로된 성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제단은 있지만 제대로된 성전은 갖추지 않았어요. 그게 이제 뭐냐하면, 왕이 없어요. 그러면 이거는 뭐냐? 파장입니다. 이 파장을 맞이하면서 그런 그들은 이제 버티기에 들어가는거에요. 그래도 우리라도 제사를 드려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뭐 장차 희망을 주신다는거에요.

그러나 똑같은 제사제도인데 진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그 제사제도에 미끌어져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했어요. 그것을 그당시 제사장들은 알 리가 없습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최선을 다한다고 지금 버티기에 들어가는거죠. 열심히. 그래서 하는말이 “우리가 나름대로 열심히 했는데 도대체 우리의 제사의 제물에 뭐가 문제가 있는지 우리는 문제가 없습니다.” 이러고있는 거에요.

여기서 두 구조를 이야기했는데 무엇을 알아야 하냐면 없음에서 나오는 구조와 인간이 있음에서 그 있음을 중심으로 해서 나오는 두 개의 구조 자체가 말라기를 통해서 도저히 건너갈 수 없는, 부합 될 수 없는 대립관계에 있다는 것을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합니다. 그러면 제사 제도에 원천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데 이 제사제도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도달했을 때 그때 누가 함께 도달했는지가 출애굽기 20장 24절에 나옵니다.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 신상이나 금으로 신상을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고,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 되어있어요.

여기 내 이름을 기념하는 곳에서 내가 복을 준다고 했어요. 말라기 1장에서 6절 오늘 본문에서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주인을 공경하나 내가 아비일찐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이렇게 나와있어요. 여기서 그당시 제사장도 마찬가지고 오늘날 우리 인간들이 당황스러운 것은 아들이 거기에 상주하는 제단이나 제사를 어떻게해야 그게 가능하느냐 하는거에요. 상당히 어렵죠. 내가 예배를 어떻게 드리면 주님이 자동적으로 쪼르르 오셔가지고 합세할 수 있는 예배가 어떤 형식을 갖추어야 어떤 마음자세가 돼야 그게 가능하냐 하는거에요.

왜냐하면 그것가지고 지금 말라기가 시비를 거니까 하는거에요. 분명히 제사 제도는 주님의 이름이 거기에 강림해야 돼요. 그런데 너희들은 너희들이 하는 제사가 강림은커녕 내 이름을 모독하는식으로 제사해왔다는겁니다. 그 소리를 듣고 그러면 우리는 “고칠게요. 반성합니다. 잘못되었으면 고쳐야죠. 그럼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라는 질문이 필히 나오죠.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방법은 간단해요. 없음을 거기다 두라는거에요. 여러분, 인간은 땅의 세계입니다. 땅의세계 거든요. 있음의 세계에요. 그리고 그 땅은 인간이 생존을 우선시합니다. 왜? 내가 있어야 되니까. 이땅에서 있는거니까. 모든 것이 있음이에요. 그래서 책망받는 제사장들 특징이 뭐냐하면 제사를 드리면서 자기자신을 제거하기 위한 용도로 제사를 드리질 않았던 겁니다. 자기자신을 있음을 없음으로 바꾸는 제사. 나의 존재를 벗기고 본질을 드러내는 제사를 말라기시대에 이 제사장들은 할 수 있는 재주가 없었습니다.

도저히 할 수가 없는거에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말라기를 통해서 그 선지자를 건드리는겁니다. 할 수 없는데 할 수 없는 것을 책망하시는 그 이유가 뭐냐? 그 이유를 오늘 설교의 핵심으로서 제시해 드리겠습니다.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어떤 사람이 가로등 밑에서 열쇠를 잃어버렸어요. 그러면 집에 오니까 차 열쇠가 없는거에요. 그래가지고 후딱 잃어버린 장소에 가서 찾는데 그 가로등이 어떤 가로등은 밤에 전력이 약해가지고 나라에서, 이미 꺼졌어요. 어떤 가로등은 한 반쯤은 켜져있습니다. 근데 열쇠 잃어버린 사람이 자기가 잃어버린 장소에서 그 열쇠를 찾아야 되는데 밝은 가로등 밑에서 열쇠를 찾는거에요.

이 머리 나쁜 사람은 무슨은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왜냐? 내가 찾으려면 밝아야 되니까요.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존재를 밝다고 생각하는거에요. 내 존재에서 성의와 열심을 다하고 주께서 책망하시면 그걸 교정하고 개선해가지고 이러면 다시 잃어버린 하나님의 이름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겁니다. 지금 성전 깨졌죠. 솔로몬 성전 깨졌습니다. 나라, 왕 없어요. 나라 없습니다. 전부다 없는거에요. 없지만 그당시 제사장들은 뭐냐? 제사제도는 있으니까 이것 붙들고 열심히 하면 하나님께서 다시 나라 회복하고 다시 본토로 돌아가고 이미 옛날 솔로몬처럼 다윗처럼 나라가 되고 왕도 있고 성전도 생기고 하나님 메시아가 오실것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제사 제도를 하고 있던거에요.

그런데 말라기 선지자를 보내서 하는 말이, “야, 너 어디서 찾아? 어디서 지금 제사하고 있냐?” 이렇게 묻는거에요. 그러면 우리보고 어떡하라고요? ‘내가 모든 너가 있어서 제사드린다’ 이것을 없애줄게 하는거에요. 제사장을 없애줄게. 이 제사장 없애는 방법이 그렇게 간단치가 않습니다. 오늘 계속 어려운 이야기만 하는데 이게 뭐냐하면 처음에 모세가 율법이 없는데서 모세가 불속에서 율법을 받았어요. 그래서 생긴게 율법이고, 제사법이고 레위언약이고 제사장들이에요.

그런데 그 제사장들이 지나가다가 약속의 땅에 가서는 그다음부터는 뭐냐? 그 제사장들이 히마리가 없어요. 백성들한테 제사장들이 레위지파가 천대받습니다. 오죽했으면 사사기에 레위지파가 먹을게 없어서 돌아다니겠습니까? 그러면 그들이 왜 했는가? 이제는 그 약속의 땅에서 그들은 왕을 달라고 했습니다. “제사장들이 제사지내는 것 여기에 대해서 사람들이 믿음이 안가고 우리도 옆에있는 잘사는 나라처럼 왕을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게 여호수아 이후에 그다음에 사사기 이후에 사무엘 상 계속 할 때 왕을 달라고 했거든요. 사무엘 상 8장에. 왕을 달라고 하는 그 순간부터 그들은 이 제사라는 것이 어둠과 직접 대면하고 있다는 이 사실을 놓쳐버리고 있는 땅에서 우리가 생존하면 우리로서는 오케이라 이렇게 본거에요. 오늘 이게 우리 이야기에요. 사람들은 하나님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잘 살아가요. 오늘날 모든게. 교회 나와도. 왜? 땅이 있고 집이 있고 내가 있으니까요.

이 있음가지고 어떻게 하나님께 잘 보이면 이 있음을 구원하겠다 하잖아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미끌어진다는 말이 그 제사제도의 제물이 미끌어져서 제단에서 죽음까지 내려간다는 말은 주님께서 모든 있음을 없애버리는거에요. 존재라는 껍질을 없애야 본질이 나오니까요. 소위 자신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우기는 이스라엘을 멸망시켜야 이스라엘이 나오고 거기서 예수님이 나와요. 진짜 제사장이 나오고 진짜 어린양이 나오고 진짜 구원이 나오는 겁니다.

그 마지막 절차가 말라기에요. 이제 마지막 절차가. 그 예를 들라면 바로 룻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제사장한테 십일조 안하죠. 중요한 것은 땅이 중요하니까 땅에서 농사잘짓는 것이 중요하지 제사에 대해선 하든 말든 난 모르겠다는 거에요. 근데 하나님께서 그 땅에다가 가뭄을 일으키니까 나오미 가정이 모압으로 피신했습니다. 있음을 살려야 되니까 내가 여기 있잖아요. 있음을 살려야 된다 이말이죠. 살리는데 그 모압에서 만난 모압 며느리하고 같이 합세하면서 나오미도 그렇고 그 며느리라는 룻도 그렇고 둘다 돈없고 땅없고 남자없고 누가 건드려도 함부로 건드릴 수 있는, 기득권이 전혀 없어요. 그야 말로 헐벗은 것이고 자기를 지켜줄 외투같은 존재성이 있는사람이 없어요. 나중에는 만나죠. 보아스.

보아스를 기적적으로 만나요. 기적적으로 만나는데 하필 있는 것이 보아스 땅이었으니까요. 그러니까 그 오기전에는 룻이나 나오미는 살 수가 없습니다. 살 재간도 없고 기껏 하는 것이 남아있는 것 주워먹는거에요. 이삭. 그걸 물리학으로 잉여에너지. 남아도는 에너지라고 하는데, 이세상에 태양빛으로 준 그 에너지가 남아돌아요. 남아돌아서 기후 재앙을 일으키는겁니다. 에너지학적으로 보면 그런거에요. 아무 쓸데없이 회오리 바람이 왜 붑니까? 태풍이 왜 불어요 아무 쓸데없는데.

남아도는 에너지. 그처럼 이삭하나.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서 나온 이삭을 주워야 겨우 먹고사는 그 룻. 그 룻에서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다윗 왕이 등장합니다. 그렇게 되면 뭐냐하면 룻이 움직이는 제사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라기에서 원하는 것은 제사장이 와서 제사 드리는게 아니고 마지막에는 예수그리스도 중심으로, 그 제사장 중심으로 온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제사장이 되는 그날까지 중간 완충지대를 지나고있는거에요 지금. 왜냐하면 제단이 제대로 제사를 드려야 거기에 하나님의 이름이 거기에 임하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들이 드리는 제거되지않는, 자기가 짤리지 않는 상태에서 드리는 어떤 제사도 안받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왕도 싫고 나라도 싫고 오직 하나님께서 끝까지 버티는 것은 제사제도에요. 제사법입니다. 그 제사법에 의하면 인간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제거대상이에요. 하나님은 예수님만 건지지 사람 건지지 않습니다. 인간구원 없습니다. 이게 제사법의 내용입니다. 그 제사법의 그당시 건방진 제사장이 “우리가 제사법을 지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봐주겠지.” 아닙니다. 반드시 흠집 트집 다잡아서 그들로 하여금 기어이 유대민족 마지막까지 다 없애버려요.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얻고자하는게 뭐냐? 그게 바로 말라기 1장 2절입니다.

“에서는 야곱의 형이아니냐. 그러나 나는 야곱을 사랑했다.” 야곱을 사랑했다는거에요. 사랑은, 사랑이라는 것은 어디서 나오냐하면은 유에서 나온게 아니고 무에서 나온다는거에요. 그리고 무가 유가 되는 거기에 어떤 슬로프같은게, 미끄럼틀같은게 걸쳐있어야 되는데 그 걸치는 것이 레위언약이고 그게 제사법이라는거에요. 주님께서 이땅에 오신 것은 바로 그 제사법에 슬로프를 타고 내려오신거에요. 마지막에 십자가에 쳐박혀 버렸어요. 모독받으면서.

예수님 십자가 죽을 때 그 당시에 주변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측은하게 여기고 아니라고 머리를 흔들고 손가락을 흔드는 이유가 “도대체 이것봐. 너를 지켜줄 자가 아무도 없잖아. 너를 지켜주는 존재가 없잖아. 존재가.” 근데 지켜줄 존재가 없을 때 그게 바로 하나님이 원했던 본질이에요. 그게 하나님의 구조를 이루는 건축자재가 되는겁니다. 예수님이 첫 번째 모퉁이 돌이 되는겁니다.

오늘 본문 말라기 1장 6절에서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라고 되어있어요. 이제 마지막 남은 어려운게 하나 있는데, 그게 뭐냐하면 왜 “우리가 어려운 사람 도와주고 어디 가난한 사람도와줄 테니까 그러면 그렇게 해놓고 제사 제대로 드릴 때 그때는 하나님께서 우리제사 받아 줄거죠?” 라고 나올 수가 있어요. 말라기가 하는 이야기 톤을 보게 되면, “너가 하나님의 제사를 통해서 주의 이름을 멸시했다. 그러니까 너희가 이런 떡을 가지고 어떻게 이걸 들고오느냐? 이런 제물을 가지고 어떻게 내한테 바칠생각을 다 하느냐”라고 했다면, 그들은 그걸 듣는 사람이 주의 이름을 멸시하지 않기 위해서 성의것 다 할거다 이말이죠. 더러우면 물로 씻어내고, 뭐 오래된 제물 같으면 이제 시장에서 새로 사와가지고 깨끗한 것 드리고 그러면 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것도 안받습니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너희가 주의 이름을 어떻게 해서 “주의 이름을 멸시 하였나이까?” 하는 것 조차 너희들은 주님이 어떤 분인가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 있는거에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디까지 밀어붙이느냐 하면 여기까지 밀어붙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죽더라도 자기 죽음을 설명 못해요. 죽을때도 자기 죽음을 설명 못하는데 살아있으면서 “내가 어떻게 고치면 됩니까? 내가 왜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힘들게 합니까?”를 설명을 하지를 못합니다. 인간은. 그래서 아까 제가, 돈 없고 몸아파 가누지도 못하고 이렇게 가난하고 약한자는 주님과 함께 있고, 밀착되어있다 하는데 문제는 그런 사람이 이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병들고 가누지 못하는 사람은 없어요. 이것은 인간이 자기를 설명하지 못합니다. 살아있을때도 자기 설명이 안되고요.

심지어 죽을때도 자기 설명이 안됩니다. 끝까지 우리는 주의 이름을 멸시할려고 하는게 아니고 그냥 사는데 그것이 주님의 이름을 모르는채 계속 살고있는거에요. 말라기에서 이렇게 해서 말라기가 마감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 해답을 우리가 알고 말씀을 마쳐야 되겠죠. 해답은 요한복음 5장 28절 29절에 나옵니다. 잘아시는 말씀인데 한번 들어보세요.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벌써 기이히 여깁니다.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여러분 여기서 멘붕오지 않습니까? 인간은 자기가 자기를 설명못해요. 자기도 설명못하면서 주님을 설명하고 하나님 설명 못합니다. 근데 언제 설명하느냐? 내가 무덤에 있다가 기어나올 때 다시 살아 나올 때 비로소 나는 나를 설명하고 주님을 설명하고 하나님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 말라기 선지자가 말씀하는 것을 우리가 들어서 깨달아서 실천에 옮길 생각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나에 대해서 모르고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고 아는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말씀이 말씀대로 시행해서 나중에 여러분들이 성령받아서 내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알거든 바로 그게 야곱의 사랑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야곱은 야곱의 사랑을 몰라요 그러나 사랑이 오니까 야곱이 죽었을 때 비로소 내가 이스라엘 될 때에 나를 잘라내는 것이 주님의 계획이었다는 것, 나를 죽이는 것이 계획이고, 왜냐? 죽여야 주님을 아니까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죽는날 오는 것을 손꼽아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주님을 설명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알기 위해서 세상을,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우리에게 죽는 날을 주신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 죽는 날을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앞당겨서 매일같이 우리의 존재를, 껍질을 벗겨내는 작업을 성령께서 하십니다. “니는 말라기 선지자 말 들어야 돼. 니는 개뿔도 아무것도 몰라. 니가 주의 이름을 알았어? 니 남 멸시 안했어? 다 했어.” 그걸 다 벗겨 내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돈없고, 몸아프고 가누지도 못하는존재가 돼요.

다시말해서 집에 15억 있고 몸은 체중은 정상체중이고 병원 가본적 없는데 우리는 가난한자가돼요. 과부요 고아입니다. 성령안에서. 이제는 주님이 지켜주지 아니하면, 주님이 함께하지 아니하면 우리가 아는것도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나 십자가를 알았기 때문에 비로소 우리는 내 죽음을 설명할 수 있어요. 십자가는 내가 죄인되고 그 죄인을 씻어주기 위해서 주께서 흘린 십자가를 무덤에 가야 알 수 있는 것을 주와 함께 무덤으로서 살아가면서 시신으로 살아가면서 그걸 깨닫는거에요. 그럴 때 이 말라기는 우리안에서 본질로서 완성이 되는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가 하신 일인 것을 새삼스럽게 우리가 느끼게 해서 감사합니다. 지식으로 말로는 모든게 주가 했다 했는데 전혀 우리의 실생활 속에서는 내가 한게 주의 행하심을 가리고 방해하고 왔었습니다. 다시 말씀을 통해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가 헐벗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 것을 깨닫는 가운데 다이루신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만을 증거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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