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은 내가 거짓인 것을 모르고 살아가는 게 거짓입니다. 그래서 윤리 도덕적인 것이 다 거짓이에요. 바르게 사는 게 거짓입니다.
시편 51:16에서 다윗은 비로소 자신의 본질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상한 심령’ 곧 ‘썩은 심령’이었습니다. 그것은 고치지 말고 그대로 제단 앞으로 들고 나와야 합니다. 거기에 주께서 꺾으신 뼈와의 만남이 유지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시 51:8) 즉 최초의 하나님은 형상이 다윗 내부에 꺾으신 뼈라는 형상으로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8. Make me to hear joy and gladness, Let the bones which Thou hast broken rejoice.
보이지 않는 분이 보이는 형식으로 왔다는 것은, 지팡이로 왔다는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기만케 하는 거에요. 인간을 기만케 하는 겁니다. 보이는 것들은 때려죽여도 날 못 믿게 만들어 버려요
성경은 오직 주님에게만 사실이에요. 그 이유가 배후에 악마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가면만 있어요, 가면. 안에 실체도 없고 그냥 가면이에요. 오늘의 가면, 그게 오늘의 나예요.
그 가면 이마에다 하나님께서 도장을 찍어버립니다. 그 도장을 찍는다는 말은, 시편 51편에 나오는 바로 다윗에게 알려준 성령하고 똑같은 거예요. “너 때문에 꺾여진 뼈가 있다. 망가진 형상이 있다. 너는 잘난 형상을 고집하는데 너 때문에, 그 잘난 너 때문에 망가져 버린 형상, 진짜 하나님의 형상이 네 안에서 지금의 너의 얼굴에 어떤 흔적 표시가 되기를 바란다.”
그게 인입니다. 얼굴에 이마에다 도장을 찍어버려요. 에스겔에 나오지요. 천사가 와서 먹물로 도장을 찍지요. 그게 뭔 뜻이냐 하면, 천국이라는 것은 일체 내 사정이 제거된 세계입니다. 나의 입장, 나의 처지, 형편을 완전히 제거시켜 버렸어요. 그러면 우리는 뭐냐? 예수님의 형상을 담는 그릇이 되게 하는 겁니다. 그 말은, 우리 자체로서는 아무 쓸모 없다는 거예요. 쓸모없는 정도가 아니고 아예 상한 심령이지요. 다윗의 고백처럼 아예 상한 심령, 17. The sacrifices of God are a broken spirit; A broken and a contrite heart, O God, Thou wilt not despise. 아무 쓸모짝이 없어요. 쓸모짝 없다는 것은 더 이상 나라는 나의 보이는 형상에 대해서 내가 나를 부정해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6장 24절에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나는 쓸모짝 없어 폐기처분해야 마땅함을, 그게 나인 것을 인정하면서 나를 따라오너라.” 그 말입니다. 주님 따라오라 그 말입니다.
그게 바로 주께서 구원하는 방식입니다.
부침(浮沈)이에요. 인생이라는 게 고요함이 아니고 망가지지요. 이것을 우리가 겪게 만들어요. 겪게 만들어서 오늘 본문의 말씀이 오늘 듣고 다 알았다, 가 아니라 이 말씀이 내일 또 써먹고, 한 달 뒤에 또 적용되고, 몇 년 뒤에 또 적용되어서 내가 죄인 중에 괴수이지만 내가 홀로가 아니라 주님의 영광, 내 안에 있는 십자가만 영광 받으실, 면류관 내가 건방지게 쓰고 있을 잽이 안된다는 것을 날마다 부침(浮沈)을 통해서 구원이라는 것이 족히 비교가 안 되는 놀라운, 내 사정을 일체 고려하지 않는 천국의 상태를 그대로 보여주는, 그 세계에 이미 우리가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사도바울처럼 기쁘게 기쁨으로 흔쾌히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임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