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기대하는 바는, 이스라엘이 ‘자기를 위한 세계’가 하나님에게 일체 용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광야를 통해서 ‘사랑받는 자’가 아니라 ‘사랑 덩어리 자체’를 만들고, ‘미음받은 자’가 아니라 ‘저주 덩어리된 자’를 만드십니다. 이를 위하여 광야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나’ 곧 ‘자아’를 몽땅 다 뽑아내십니다
■인간의 모든 두려움은 자아 의식에서 비롯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광야를 통과시키면서 그들의 두려움과 그들의 죽음마저 그들과 상관없는 현상인 것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이스라엘 만큼은 ‘있음’으로 전쟁하는 것이 아니라 ‘없음’으로 전쟁해야 합니다. ‘물없음’, ‘양식없음’으로 말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항상 하나님께 노하는 본성을 지니고 이 땅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광야가 아니면 나타나지 않게 되어 있어요 네 길은 나를 화나게 하는 길이고 네가 염두에 두고 있는 네 길은 어떤 식으로든 천국으로 가는 게 아니라 지옥으로 가는 길인 것을 너와 동반되어 있는 율법이, 그걸 분명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광야 생활은 율법이 그냥 지켜야 될 것이 아니라 삶의 체험장이에요. 율법이 있음으로써 매사가 그들의 원대로 뜻대로 되지 않아요. 율법대로예요. 둘 중에 어느 것 하렵니까? 내 뜻대로 되렵니까, 율법대로 되렵니까? 인간은 쓰고 있는데, 하나님의 뜻과 내 뜻 사이에 인간은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거기 율법을 집어넣으니 사달이 나는 거예요. ‘아, 내 뜻이 나를 망치는 뜻이었구나.’
광야는 율법을 지킬 때 체험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 스스로 자기 환경을 만들어가면서 인간이 그 율법 안에서 율법은 율법대로 지키지 못하고 어떻게 망가지고 어떻게 죽어 가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죠.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니고, 지키고 안 지키고 와 상관없이 율법의 세계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어쩔 수 없이 하나님 앞에 처절하게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광야를 경유하지 않으면 약속의 땅도 없어요. 샘플이니까요, 샘플.
■이미 테스트가 끝났어요. 그 끝났다는 사건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 한 분이 우리의 샘플이 되어서 하나님 아버지께 버림받았잖아요. 그럼 끝났어요. 내가 누구냐는 문제에 대해서, 나는 어떤 존재냐는 문제에 대해서 십자가로 이미 확정이 났습니다. 괜히 “내가 누구입니까? 내가 어떤 존재입니까?” 물을 생각하지 마세요.
■광야라고 하는 건 인간을 살려주는 은혜가 아니에요. 그동안 살려준 은혜를 전부 회수하는 환경이 광야입니다. 은혜를 줘서 살려주는 것이 아니고 줬던 은혜를 다 빼앗아가 버려요. 회수함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살지 못하게 하는 것이 광야입니다. 벌써 옛날 구약 사람이나 오늘날 사람이나 똑같은 인간이에요. ‘하나님은 나를 살려주는 하나님’이라는 똑같은 관점을 가지고 있어요.
■이 광야라는 것은 은혜의 교체 공간입니다 내가 살아야 된다는 은혜를 다 뺏어감으로써 ‘네가 이 환경 속에서 필히 죽어야 된다’는 걸, 은혜를 교체해줘야 비로소 약속의 땅에 입성할 수가 있습니다. 그 교체를 했던 자가 딱 두 사람 있었어요. 갈렙과 여호수아. 갈렙과 여호수아는 약속의 땅도 광야라고 여겼던 사람입니다. 내가 떵떵거리며 사는 땅이 약속의 땅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되 말씀은 살리는 바로 그 상황의 완성이 약속의 땅이라는 사실을 갈렙과 여호수아는 알아챘어요. ‘아, 나를 살리는 게 아니구나.’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니고 나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살리는 그 장소가 약속의 땅이고 그걸 통과하는 튜브같은 공간이 바로 광야’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얼마나 수난받고 모욕받고 비난을 받는지, 고생고생하는 하나님 모습을 그 하나님과 동행하며 진실을 알아야 되는 거예요. 광야가 바로 그것이에요. 모든 인간 요소는 쭉쭉 다 빼버리고 오직 진리 덩어리만 달랑 남게 만드는 것, 진리만 남는 거예요. 율법만, 하나님의 정신만 덩어리로 남는 것, 그게 애굽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 데리고 약속의 땅까지 이사하는 방식이에요. 인간의 것은 일체 하나도 섞이지 않아야 해요. 다 뽑아야 돼요. 그럼 신약의 성도는 뭐가 되느냐? 내가 되는 게 아니에요. 나라는 건 다 뽑았으니까 내가 되는 건 없어요. 내가 어떻게 구원을 받고, 나 구원이 되었다든지 뭐 이런 게 없어요. 나라는 것은 구원이고 뭐고 다 빼버렸으니까. 남아있는 것은 진리의 덩어리, 그리고 그걸 감싸고 있는 진리의 보자기밖에 없어요. 보자기 밖에 안 되죠. 인간은 그런 사람 없어요. 그걸 가지고 성도라고 합니다. 성도는 사람이 아니고 진리 덩어리에요. 껍데기만 사람 모습이죠. 이게 로마서 9장 21절에 나옵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이스라엘이 광야를 통과했다, 또는 지나왔다, 이게 구약적 관점이라면 신약적 관점은 성도가 곧 광야다, 움직이는 광야다, 이렇게 보면 돼요. 왜냐하면 시간적 유예가 있는 게 구약의 광야라면 신약에서는 시간적 유예가 없어져요. 시간의 완료가 돼요. 광야 시절이 인간 속에 계시라는 이름으로 성도 안의 본질로서 차곡차곡 담기게 돼요. 진리 덩어리로서. 그래서 성도가 가는 쪽은 그 존재 자체가 불신자에게 부딪힘이 되고, 다툼이 되고, 그들에게 시험 거리가 되는 거예요.
■악마도 포착되고 하나님의 언약 사용도 같이 포착이 되면서 역사의 실제 사건으로 전환되는 겁니다. 우리가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니고 말씀 자체가 실제 사건들을 역사 속에 일으켰다, 이 말입니다.
■광야가 뭐냐? 말씀, 율법, 언약이 주인공이에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냥 시다바리라고요. 말씀이라는 건 뭐냐? 주의 이름이 말씀과 함께 등장하잖아요. 함께 동행하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아요. 그런데 광야는 보이지 않는 자가 주인이에요. 보는 것만 보는 인간들은 종이 돼요. 주인이 못 되고 종이 된다고요.
■광야를 통과하면서 아주 핵심적인 사건이 아말렉이 이스라엘에 달려드는, 전쟁하는 이 사건이에요. 왜냐하면 창세기 36장 12절에 보면,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의 아들이 아말렉입니다.
■구약은 하나의 시간이 유예된 기간이니까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상대해 주는데 신약이 되어버리면 이제 인간을 상대할 수 있는 그 기간이 끝나버려요. 이제는 인간 대신 누구를 상대하느냐? 하나님이 예수님과 상대합니다. 예수님의 속성이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저주를 저주되게 하는 능력을 갖고 있고, 또 하나는 사랑을 사랑되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요.
이게 하나님의 공의의 능력과 그리고 사랑의 능력, 자비의 능력과 공의의 능력 둘 다 예수님이 함유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예수님의 이야기에요. 예수님의 스토리에요. STORY OF JESUS, 예수님 이야기에요. 우리 이야기 아닙니다.
■출애굽기 17장 14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계시지요. 또 계시가 추가된 거예요. 사람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계시가 만들어내는 작업 됨, 생산된 계시가 이스라엘화 하면서 움직이는 겁니다.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도말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아말렉이 이스라엘을 공격할 때 이스라엘은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이긴다는 말입니까? 여기서 출애굽기 15장 12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주께서 오른손을 드신즉 땅이 그들을 삼켰나이다.”
■광야를 생각하면서 제가 처음 알았어요. 양털 뭉치 안에 인간의 죄가 모인다는 사실이에요. 죄란 인간이 스스로 선악과로 죄를 아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하나님 쪽에서 연락이 와야 비로소 내 안에 죄가 모이게 된다는 사실이에요. 하나님을 테스트하는 그것, 처음부터 나는 죄 덩어리라는 것을 내가 그동안 몰랐는데 내가 주님을 테스트하는 그것이 내가 죄인인 것을 테스트하는 하나님의 테스트였어요, 그게!
그리고 그 테스트하는 환경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이 세상, 광야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결코 모호하거나 관념이 아니에요. 우리는 한시도 한순간도 매일같이 하나님을 테스트 안 하고 지나간 적이 없습니다. 매일 테스트해요. ‘이렇게 해요? 저렇게 해요? 하나님, 어느 선택을 하면 내가 자식하고 밥 먹고 살겠습니까?’ 맨날 테스트해요, 이 땅에서. 맨날 테스트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세계에, 이 광야에 의도적으로 주의 이름으로, 하나님은 위에 계시고 주의 이름이 이 땅을 찾아와서 인간을 관통했다는 거예요. 인간세계를 관통한 거예요. 인간이 얼마나 못돼먹었는지. 거기서 맛사와 므리바가 나옵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의 특수성은 뭐냐? 없는 게 나와야 돼요. 물 없습니다. 양식 없습니다. 없는 게 하나의 샘이 되어서 나올 때 광야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신약의 성도가 대화할 때는 없는 게 나와야 돼요. 없는 것을 주고 받아야 돼요. 이걸 아말렉, 다시 말해 저주덩어리가 알고 공격합니다.
예수님 자체가 이 땅에 없던 분이고, 예수님이 주시는 것도 인간세계에 없는 것을 주십니다. 그게 선악 세계에는 없고 따로 감추어놓은 생명 나무에서만 나오는 것, 인간에는 없는데 하나님에게만 있는 생명을 줘서 우리는 영생을 얻게 됩니다. 아말렉이 이것을, 이스라엘을 공격하지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뭘 집어넣었다는 것을 알고 그런 이스라엘 존재가 아예 지구상에서 없어져야 된다는 거예요. 아말렉과 전쟁할 때 이스라엘은 무기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어요. 그때 없는 무기가 등장해요. 광야라는 곳이 하나님이 아말렉과 싸우는 그 공간도 광야지만 하나님이 이스라엘도 내치는 그곳이 광야입니다.
광야라는 것은 뭐냐? 없는 것이 우리를 살리는 거예요. 물이 없는데 물이 나오고요, 양식이 없는데 양식이 나오는 거예요. 내가 없는데, 내가 성도가 아닌데 성도 되게 하는 현상이 광야에서 일어나는 겁니다. 뭘 통해서? 가만있는데 저주받을 자들이 달려들어요. 우리가 이길 무기도, 재간도 없어요. 그냥 예수님만 품을 뿐이에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 모세의 지팡이를 통해서 아말렉이 패배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 지팡이, 지팡이가 겨냥하는 것이 바로 주의 이름입니다. 보이지 않는 주의 이름, 보이지 않는 이슬, 보이지 않는 이슬 쪽과 이슬 없는 바짝 마른 그쪽, 그쪽이 이슬 쪽, 죄로 축축한 쪽과 동반해서 일어난 전쟁이 기드온 전쟁이에요.
너 혼자 이 세상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네 생존, 생계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이 땅에서, 모든 인간이 죽는 이 땅에서 주님이 어떻게 죽었다가 영생을 얻고 부활을 얻는 그것을 보여주는 세상으로써 네가 여기 이 세상에 합류되어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끝으로 제가 말씀드릴 것은 이왕 죽으면서 뭐 할건데요? 이왕 죽는 거 뭐 할겁니까? 바로 우리의 남은 인생을 양털 솜이 축축하게 이슬로 젖는 것처럼, 무거워서 더는 얹을 수도 없을 정도로 솜 같은 우리 인생 나 위주의 죄로 꽉 채우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없는, 있는 내가 날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폼내는 있는 내가 나를 구원하는 게 아니라 없는 주님, 보이지 않는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가 모든 인간의 지혜와 모든 지식을 어리석게 만들고 어리석은 십자가의 피가 똑똑해서 살려는 우리를 구원해내는 놀라운 이 동행을 우리는 감사하고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남은 인생 전체가 주님의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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