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 8장 10절,11절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아멘
율법이 장소화된다는 것은 몇 가지 조건이 있어요. 특히는 ㉮예수님이 계셔야 되고요, 그 다음에 ㉯그 율법을 해석하는 사람이 있어야 되고요, 세 번째는 ㉰율법이 있어야 돼요. 이 세 가지 조건만 있으면 뭐가 이루어지는가? 말씀이 실현되는 공간이 형성됩니다. 빠진 것처럼 보이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나’입니다. 내가 성경을 해석할 권한도 없고, 내가 성경을 나한테 적용시킬 그러한 대상자도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없다는 게 중요합니다. 내가 없으면 나의 구원도 없어요. 그리고 내가 지옥 가는 것도 없고, 말씀을 지키는 주체자인 나도 없어요.
말씀을 두고 예수님과 바리새인 간의 율법 해석에 대한 전쟁터라고 말씀 드렸는데 그 전쟁터가 왜 필요하냐 하면은, 그 전쟁터가 있어줘야 거기서 말씀의 세계가, 순간적으로 말씀의 세계가 나타나요.일방적인 하나님의 구원이 일어나는 현장입니다. 일방적인 구원이에요. 그냥 구원이 아니고요, 일방적으로 그냥 줘버리는 구원의 현장입니다. 말씀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대비하면서 말씀의 세계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은 죄인이 돼요.
인간이 죄인이 되는데, 인간은 본인이 이해하는 죄인이 되기 위해서 성경말씀을 봅니다.그것을 실천에 옮기면서 미흡한 거 있잖아요, 말씀대로 제대로 살지 못한 데서 오는 그 미흡함을 사람들은 죄라고 여깁니다. 죄는 내가 짓는 게 아니에요. 죄는 환경 자체가 죄입니다. 태어난 것 자체가 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내가 죄를 지을 수가 없어요. 죄 속에 있는 자는 죄를 짓는 게 아닙니다. 죄에 푹 잠겨 있는 거죠. 그래서 그 해석의 큰 잘못이 그거에요. 자꾸 죄 짓지 마라, 또는 죄 지은 것을 회개하라고 하니까, 마치 내가 죄 지을 수 있는 것처럼, 또는 죄 지은 것을 내가 회개하면 해소되는 것처럼,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내가 예수를 믿으면 죄 사함을 얻는 것처럼 그렇게 오해를 하고 있는 거예요.
구원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시는 건데, 주실 때는 조건이 뭐냐 하면, 환경이 조성돼야 돼요. 예수님, 그 다음에 율법, 그 다음에 마귀의 대변자, 바리새인, 이렇게 해서 구원이 주어지는 겁니다. 거기서 누굴 빼야 되겠어요? 나를 빼야 되죠. 내를 빼야 돼요. 천국 가겠다는 나를 빼줘야 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8장이 그만큼 중요한 겁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는 예수님께서 그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강제 소환시킵니다. 여기서 ‘강제 소환’이 제일 중요해요. 여인이 간음하는 게 취미가 아니에요. 여인은 간음을 해야 되고요, 간음을 하는 현장에서 발생된 일이기 때문에 반드시 여인은 간음을 해줘야 되는 거예요.
간음을 해줘야 누가 달려드는가? 말씀을 자기가 지켜서 구원 받겠다는 사람들이 그걸 눈여겨보면서 달려드는 겁니다. 하나님과 내가 내 행위로 연결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 바로 가인의 후손들이고, 가인의 사고방식이었습니다. 가인은 지옥 갔죠. 지옥이라는 것은 우리가 가는 게 아니고요, 이미 우리가 지옥이라는 환경 속에 놓여있다는 것을 가인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러면 지옥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아무도 없지요. 창세기 3장 24절에 생명나무가 없는 곳을 지옥이라고 해요. (요한계시록 22장에 보면 생명나무가 있는 곳을 천국이라고 합니다.)
왜 못 빠져 나오느냐? 하나님께서 그 생명나무 없는 세계에다가 집어넣었기 때문에 인간 자기 마음대로 빠져 나올 수 없습니다.
구원은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주는 것. 강제 소환됩니다. 강제 소환 되는 것을 사도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해요. 주의 이름 앞에서는 내가 없어요.내 이름이 없어지는 것을 ‘내가 없다’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마귀에 속한 인간들은요, 한시도 쉬지 않고 자기 공간을 만들어요. 거울의 방이에요. 거울의 방의 특징은 자기가 내뱉은 이미지가 반사되어서 내게로 다시 돌아오게 돼있어요. 자기가 만든 공간 안에서 자기가 탈출을 못합니다. 내 이름의 공간을 따로 챙기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입니다. 자기 폐쇄적 공간. 나르시시즘이라고 하는 거예요. 자기 착각에 빠진 거요. 빠져 나오지 못하죠.
예수님의 강제 소환인데, 이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예수님이 어떻게 하느냐 하면, 자기 공간에서 예수님이 만든 공간으로 강제 소환되면서 구원이 이루어지고, 죄 사함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여인이 간음했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분석해봅시다. 여인이 간음했다는 것은요 자기 공간 속에서 여인은 자기의 욕망의 결핍을 느끼고서 자기 참을 수 없는 감정을 실시한 거예요. 충동. 인간은 매일 매일이 살아온 모든 것이 모아져서 나를 죽게 만들어요. 그 세계가 뭐냐? 인간의 세계, 인간의 이름의 세계입니다.
강제 소환. 간음을 하게 만들고 만들어버려요. 들키게 만들 때, 그동안 인간을 인간 세계에 가두게 만든 악마의 앞잡이를 그 현장에 접촉하게 했습니다. 그게 누구냐? 바리새인들이에요. 그 간음한 여인이 홀로 예수님께 강제 소환되는 것이 아니고 그 고소했던 바리새인들이 함께 예수님 앞에 오게 만들어요. 고소하는 자 어디 있어? 그 때, 우리의 답변은 “없나이다.” 이거 눈물 나야 돼요. 여러분들이 이렇게 생각할 거예요. 누가 고소하긴 양심이 고소하지. 그 양심이 타인의 시선이라 하는 겁니다. 평소에 아버지 엄마부터 해서 남들이 지적한 것이 쌓인 것이 양심이에요. 양심 속에 타인의 고소가 들어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전체를 이렇게 간단하게 합시다. “말씀 앞에서는 내가 없다.” 그걸 더 구체적으로 하면, “주의 말씀 앞에서는 나의 이름이 없다.”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주의 말씀 세계 앞에서는 나의 공간, 나의 세계가 없나이다.” 없나이다.
왜냐하면, 나의 세계 안에서는 바리새인이 나를 고소하는 것도 나의 세계의 요소로서 거기에 들어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 다음에 중요한 게 11절에 나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게 있어요. 너가 누구냐 하면 주님이 만든 나예요. 지금의 나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너를 고소하지 않으니 다시는 가서 죄 짓지 마라.” 는 것이 나의 세계 속에 넘겨주는 게 아니고 그 자체도 예수님의 말씀의 세계 안에 포함된 내용이에요. 포함된 부분이 되는 겁니다. 이래가지고는 무슨 뜻인지 모르겠죠.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와가지고 이 여자를 고소할 때 이들이 짱돌 들고 왔잖아요, 이 여자 때려죽인다고.
왔을 때에 예수님께서 땅에다가 뭘 썼어요. 쓰니까 바리새인들이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해서 젊은 사람까지 다 달아났어요. 다 걸린 거예요. 다 도망친 겁니다. 도망친 그들이 어디로 갑니까? 각자의 자기만의 세계로 가는 거예요. 자기가 잘난 존재로 이만큼 살아온 그걸 못 놓는 거예요.
지금 이 여자는요 강제 소환 당했어요. 그 다음에 이 여자는 다시는 자기 세계로 돌아가면 안돼요. 다시는 죄 짓지 마라는 말씀을 누가 지키느냐 하면요, 주의 말씀 하나를 주의 세계는요 주님의 성령으로 지켜요. 주의 은혜로 지키지, 내가 지키는 게 아니라고요. 전에는 고소할 남이 있어서 무서웠는데 이제는 내가 나를 고소하기 때문에 자꾸 내가 나를 지적해요. 니 꼬라지봐라, 이게 뭐야? 이게 집사야? 본인이 정죄해요. 피 흘려주신 주께서 얼마나 화를 내겠습니까? 그걸 주님에 대한 핍박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강제 소환되면서 질문을 들어야 돼요. 주님께서 “이리와. 끝!” 이게 아니고, 그 동안 너는 네가 살아온 게 아니고 주위의 시선 때문에 살아왔다는 거예요. 남들이 망하는 그 세계 속에 같이 망하면서 남들이 어떻게 하는가 그걸 모방하면서 살아온 거예요. 그것을 주께서는 지적합니다.“너를 고소하는 자가 어디 있느냐?”
■그 때에 가만히 입 다물고 있으면 안 되고요, “없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없는 동시에 누가 없느냐 하면, 남한테 지적받은 나도 나의 공간도 없는 거예요. 거울을 깨는 거예요. 거울을 깨는 거예요. 그러면 말씀의 세계를 누가 이루느냐? 예수님이 이룹니다. 말씀의 세계 속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간음한 자를 용서하는 것도 말씀의 세계에 들어있으니까 간음한 자를 용서하는 말씀의 용서가 그리고 너를 고소하는 자가 없는 용서가 이제 그 통째로 우리 안에 들어와요. 그럼 우리 안은 무슨 세계가 되냐 하면, 나의 세계일까요? 아니면, 예수님의 세계일까요? 예수님의 세계가 들어오는데 그 예수님의 세계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우리는 때려 죽여도 죄 짓는 것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래야 말씀이 사니까,
내가 사는 게 아니고 말씀이 살아야 내가 사니까, 말씀의 세계가 들어오면서 나는 평생 마음속으로 간음한 여인에 해당됨이 우리에게 늘 범사에 감사하고 고마움이 평생 끝날 때까지 주님께서 나를 일방적으로 소환해서 구원하는구나 라는 것이 매일 반복해서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동안 우리가 어디에서 어떻게 배웠는지 모르겠지만 주님과의 일대일 대화가 혹시나 없었는지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님과의 대화 가운데 없나이다. 말을 기쁘게 하게 해주시고 다시는 죄 짓지 말라를 우리에게 책임감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책임져주겠다는 말씀으로 받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